학 사 학 위 청 구 논 문「금오신화」의 사상 연구대진대학교 국어국문학과김 도 균2008년 월 일이병찬 교수지도학사학위청구논문「금오신화」의 사상 연구이 논문을 문학사 학위논문으로 제출함.2008년 월 일대진대학교 국어국문학과김 도 균김 도 균의 문학사 학위논문심사를 완료함.2008년 월 일위원장 인위 원 인위 원 인- 목 차 -Ⅰ. 서론Ⅱ. 작가 생애 및 시대적 배경1. 작가 생애2. 시대적 배경Ⅲ. 김시습의 사상적 경향1. 유교사상2. 불교사상3. 도교사상Ⅳ. 작품 분석1. 만복사저포기2. 이생규장전3. 취유부벽정기4. 남염부주지5. 용궁부연록Ⅴ. 결론※ 참고문헌Ⅰ. 서론동양사상이라 하면 여러 가지 사상을 들 수 있으나 이 중에도 유교, 불교, 도교 이 세 가지 교에서 우러나온 사상은 가장 주체가 되는 것으로 동양의 3대 사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유교와 도교는 중국에서 일어난 중국 고유의 사상이고, 불교는 인도에서 일어나 중국에 들어왔지만 불교 역시 중국의 고유한 사상의 영향을 받고 중국 불교로서의 독특한 사상적 경향을 지니게 되었다.이러한 중국의 유교, 불교, 도교의 사상은 지리적으로 가장 접근하여 있고 역사적으로 가장 관련성이 깊은 우리 한민족에게까지 미치어 삼국시대를 전후하여 유입되니 자연히 우리 한민족의 정치, 사회, 풍속, 문화 등에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지난 날 우리 국문학에도 이 사상은 스며들어, 특히 고전작품에는 이 3대사상이 작품내용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매월당 김시습의「금오신화」도 예외는 될 수 없었다.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은 선초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작가로, 또한 사상가로 널리 알려진 인물로 계유정란의 정치적 혼란기에 살았던 인물이다.) 사상 면에서는 고려 말의 쇠퇴한 불교로부터 벗어나 주자학을 중심으로 한 유학을 국가 이념으로 삼았으나, 유교적인 것을 요구하면서도 조정의 정치인과 민중들에게는 모든 분야에서 불교가 아직 지배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또한 유학자들이 겉으로는 척불을 주장하면서도 오랜김시습이 37세 되던 해 봄, 정든 금오산실을 하직하고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그러나 눈앞의 현실은 그의 기대와 희망과는 다른 차원이었다. 현실과의 괴리로 그는 성종 3년 서울에 가까운 성동에 폭천정사를 짓고 다시 은거하였다. 이때에 그는 출사의 꿈을 버리고 현실을 체념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서울 근교에서의 생활이 이때로부터 약 10여년에 걸쳐 펼쳐진다. 이십여년의 생활을 통해 그의 수많은 기행이 전해져 있으며, 이러한 기행은 그를 용납해주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매도와 울분의 발산으로 볼 수도 있다.현전하는 문헌에 의하면 대체로 서울 근교에 우거하면서 특히 수락산에 가장 오래 머물러 있었던 것 같다. 그가 47세 되던 해에 생활에 하나의 변혁이 왔다. 그것은 그가 환속을 하였고, 그리고 안씨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새로운 인생도 오래가지 못하고 이듬해 처자를 잃는 비극을 맞이하였다.4) 노년기 (49세~59세)이러한 비극으로 인해 성종 14년 그의 나이 49세 때 다시 방랑의 길에 나선다. 그리하여 그의 발길은 관동지방을 주로 하여 광범위하게 미쳤으며, 특히 그는 육경자사를 가지고 다니며 지방 청년들을 훈도하기도 하며 정처 없이 떠다니다가 성종24년 그의 나이 59세 때 부여 흥산의 무량사에서 한 많은 일생을 마쳤다.2. 시대적 배경조선 초기는 고려의 무질서를 지키려는 보수세력과 이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조선의 신질서를 구축하려는 개화세력이 양립해 있던 일종의 과도기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신왕조 창업을 정당화시키기 위하여 숭유배불책이 요구되었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태어난 김시습은 정치가로서의 대용을 꿈꾸며 성장하게 된다.김시습이 처했던 시기는 크게 두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전기를 세종대왕의 집현전 설치와 훈민정음 창제로 인해 유학자 등용이 활발했던 국가 발전의 시기로 본다면, 후기는 세조의 왕위 찬탈로 인한 불의배의 득세와 정의인의 침체 시기로 볼 수 있다. 전기에는 자주적인 정치가 확립되어 중앙집권제의 확립, 국가재정의 충실, 영도 불교의 신앙적 측면이 계승되던 과도기였다. 국초 유신들로부터 배불론이 주장되면서도 불교신앙이 전승되는 시대에 그는 특히 세종 만년의 호불에 영향을 받아 출가하고 그 이후 세조의 호불책, 성종의 배불책을 겪으면서 이십대 이후 거의 만년에 이르기 까지 승려 신분을 유지한 점 등으로 보아 그의 불교적 사상의 심도를 미루어 알 수 있다. 이우성의『매월당집』서문에 보면아, 예전에 명승으로 이르는 자는 혹은 좋은 결과를 말하거나 혹은 글귀에 뜻을 두기도 하여 모두 당세에 이름이 드러나고 간책에 빛을 내었거늘 하물며 우리 청한자는 유가의 행위로서 불가의 길을 걸어 이치에 밝으면서 불교에도 해박하였고, 또 그 평생이 쓸쓸하고 고단하여 거친 시골에서 외롭게 지낸 것은 진실로 덮어 둘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라 하여 유학의 뜻을 품고도 불가의 길을 걷게 된 근거를 설명하고자 하였고, 또불경에 있어서도 또한 밝아서 막히는 것이 없이 세밀함을 보였으니……)라 하였다. 흔히 당시 인들은 그를 심유적불이라 하여 사상의 기저를 유교에만 맞추고자 하였으나 그는 여러모로 불교의 참된 종교성을 인정하고 이에 귀의한 독신자였던 것이다. 즉 그는 유교적 정치사상과 불교의 교리를 혼융하여 유교, 불교 일치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러한 그의 노력이 권 2에 나오는 ‘법신장’ 중「인주」,「양무」장에 나오며, 또 그의 파격적인 승려로서의 생활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김시습은 외롭고 허무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하여 불교로 굴절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는 승려의 복색을 하고 한평생을 살았으니 그에게 불교적인 사상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으며, 그를 학승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한편「금오신화」에 나오는 주인공들이 유생이기는 하되 와의 주인공이 밝히는 ‘삼세의 인연’이라든가 또 에서 염라왕과의 토론을 거쳐 인정하는 부처의 세계는 결과적으로 그가 몸담은 바 있는 불교의 세계도 또한 인정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따라서 김시습의 사상성에는 유교적 가치관이 기본이되 거기현실적 고통을 불교를 통해 벗어나게 된다. 이러한 불교 사상의 양상을 살펴보자. 현실적 고통을 불교로 통해 벗어나게 된 양생은 부처와 저포놀이를 하여 이기게 되고, 이긴 대가로 아름다운 한 여인을 배필로 맞게 되는 것이다. 이는 곧 발원에 의한 영험사상이다. 또한 작품 말미에 이르러 양생이 여귀를 위하여 일심으로 재를 드려서 여귀가 타국의 남자로 태어남도 모두 불교의 발원사상이라 할 수 있다.양생과 여인의 만남에는 불교의 인연사상이 나타나 있다. 여귀는 인연이 있어 배필을 만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아울러 불전에 올린 소원이 업보에 의한 불가피한 인과응보라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이는 여귀가 왜구의 침입으로 인하여 부부의 인연을 맺어보지 못하여 부부의 인연을 맺게 해주시라는 소원을 부처께 아뢰는 대목에서사람의 한평생은 태어나기 전부터 마련되어 있으며 선악의 응보를 피할 수 없으므로, 타고난 생명에 인연이 있을 것이오나 일찍이 배필을 정해 주시어 즐거움을 얻게 해주심 간절히 빌어 마지않습니다.)라고 한 것을 보면 인연사상이 잘 드러나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여인은 그들의 만남이 단순한 우연에 의한 것이 아니라, 불교에서 말하는 인연이 만남 이전부터 있었음을 믿고 있다.이와 같은 불교의 인연사상은 죽어서 저승에 가더라도 이 인연은 끊을 수 없으며 이어져서 끝내 이루어지는 것임을 믿는 것이다. 이는 현실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김시습은 양생과 여귀를 통해 초현실적 상황에서 인연에 의해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소망을 이루고 있다. 이처럼 는 불교사상을 바탕으로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한을 풀어가고 있다.는 양생의 여귀를 만나 현실계의 소원을 성취하고 나아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며, 또한 여귀는 원한으로 떠돌다가 양생으로 인하여 자신의 한을 해소하고 바라던 저승에 남자 몸으로 태어나 자신의 소원을 이루는, 한의 해소구조로 볼 수 있다.) 여기서 현실의 고통을 넘어서 소원을 성취하는 데 불교사상과 도교사상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니다.” 하고는 마침내 목메어 울었다. 이생은 깜짝 놀라면서 물었다. “무슨 까닭으로 그런 말씀을 하시오?” 여인은 대답했다. “저승길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저와 낭군의 연분이 끊어지지 않았고 또 전생에 아무런 죄악도 없었으므로 이 몸을 환신 시켜 잠시 낭군을 뵈어 시름을 풀게 했던 것입니다. 오랫동안 인간 세상에 머물러 있으면서 산 사람을 유혹할 수는 없습니다.”)결국 김시습은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한을 풀기 위해 귀신사상을 통해 여인들을 환신으로 나타나게 한다. 그리고 끝내 이생이 최랑의 뒤를 따라 죽는 것은 불교적 인연, 환생 사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김시습은 에서 세조의 왕위찬탈에 반대하여 끝까지 절개를 지킨 자신의 의지를 최낭자를 통해 드러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소망을 귀신사상을 통해 이루려다 실패하고, 결국 불교적 인연, 환생 사상을 통해 초월적 사랑을 이루고 있다.) 이와 같이에서는 김시습의 사상인 유교사상과 불교사상이 잘 나타나 있지만, 도교 사상은 잘 나타나 있지 않았다.3. 취유부벽정기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조선 세조 초기에 송도의 부호인 홍생이 물건을 팔러 평양에 갔다가 달 밝은 밤 대동강가 아름다운 경치에 취해 홀러 부벽정까지 다다른다. 그는 밝은 달빛에 빛나는 옛 나라의 고도를 바라보자 문득 감회에 젖어 한탄의 시구가 절로 읊조려졌다. 이때 선계의 한 선녀가 내려와 자신은 기자의 후손으로 신선계로 갔다가 지금은 옥경에 사는 선녀인 바 고국이 그리워 잠시 내려 왔노라고 말을 한다. 그녀는 또 자신의 선고준왕이 필부의 손에 죽고 위만이 자리를 차지함에 죽음으로써 그 절개를 지키려 하는 중에 국조의 도움을 받아 선계에 거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에 홍생이 황감하여마지않았으나. 기씨녀는 ‘강정추야완월’ 40운을 들려주고는 옥계로 돌아가 버렸다. 이에 홍생은 집에 돌아와 그 아름다운 기씨녀를 흠모한 나머지 병을 얻어 자리에 눕게 되었는데, 어느 날 꿈에 한 미인이 와서 하는 말이 기씨녀가까?)
춘향전 감상문학 과: 국어국문학과학 번: 20052136성 명: 김 도 균한국 고대소설의 대표작으로 판소리 12마당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작품으로 추측되나 작자나 연대는 미상이다. 춘향전은 판소리로 처음 생성되고 그 후에 소설로 만들어졌다.춘향은 성울 양반 성참판을 아버지로 하고, 퇴기 월매를 어머니로 하여 태어났다. 양반의 핏줄을 타고 출생하였으나 어머니가 퇴기라는 데서 신분적 한계가 나타난다. 그러나 춘향은 비록 어머니는 기생이지만 춘향이는 도도하여 기생구실 마다하고 백화초엽에 글자도 생각하고 여공재질이며 문장을 겸전하여 여염처자와 다름이 없이 처신하였다.이몽룡의 구혼에 대해 춘향은 자기 처지와 사회에 대한 옳은 이해와 총명하고 사리에 밝은 성격적 특성이 잘 반영되어 있다. 그리고 수청을 들라는 변학도의 엄명을 거역하는 춘향의 형상에서 불합리한 신분제도에 대한 항거의 정신의 자기의 정당성을 끝까지 관철하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이몽룡은 남원부사 이한림의 아들로, 양반출신이면서도 게급을 초월한 사랑을 실천하는 근대적 인물이다. 이도령은 경판본에서는 그저 방탕한 양반자제로 등장하지만, 완판본에서는 이러한 모습이 다소 완화되어, 정의를 지키는 의리와 책임감 강한 인물로 형상화된다. 이는 이몽룡의 인물 특성이 처음에는 바람기 많은 양반 자제로 설정되었으나, 춘향을 만나 사랑을 진행시키며, 그 사랑을 완성시키려는 이야기 구조상에서 불가피하게 서민들의 이샹향을 접목시켜 선하고 정의로운 인물로 만든 측면이 있다. 이는 바람둥이로 등장한 이몽룡이 신분해방과, 부정관료의 척결까지 이루어내는 인물로 변화하기까지의 근거가 결여되어 있는 것으로써 알 수 있다. 변학도는 당대의 탐관오리를 대표하는 인물로 악인군의 전형적인 인물이다. 반상의 제도를 철저히 지키면서 그것을 악용하여 개인적 이득을 추구하고 상민의 신분상승 의지를 꺾는 관리의 전형이다. 월매는 퇴기로 성참판과 동거하면서 춘향을 낳고 신분상승을 추구하는 이기적이고 기회주의적인 인물이다. 월매의 성격은 경판, 완판본에서 공통적으로 묘사되어 있으나, 경판에서는 역할이 극히 적고, 처음 이도령을 만났을 대에는 춘향에게 이도령을 받아들이라 종용했으며, 암행어사인 이도령을 만났을 때에는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이를 치켜 올리는, 중년 퇴기의 인간상을 잘 보여준다. 방자는 상전의 위세를 믿고 양반 행세를 하기도 하고,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양반에게도 능청스럽게 구는 희극적인 인물이다. 완판본은 이런 흥미 있고, 재치 있는 방자를 등장시켜 작품적 효과를 많이 드러냈다.
유충렬전 감상문학 과: 국어국문학과학 번: 20052136성 명: 김 도 균고전문학강독이란 수업을 통해 유충렬전이라는 국문소설에 대해 알게 되었다. 솔직히 말해서, 유충렬전과 같은 군담소설은 홍길동전만 읽어보았지 다른 작품들은 읽어보지 못했었다. 국어국문학과를 전공으로 하고 있는 나에게 영웅소설의 대표작 중 하나인 유충렬전을 강제로나마 읽을 수 있던 이번 기회는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되었다.유충렬전은 조선 후기에 쓰여진 국문소설이며, 군담, 영웅소설이다. 그리고, 전지적 작가 시점에 의해 쓰여졌다. 유충렬전의 대강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중국 명나라 때 유심이 부인 장씨와의 사이에 늦도록 자식이 없다가 남악형산에 치성을 드리고 신이한 태몽을 꾼 뒤 아들을 낳아 충렬이라 이름을 지었다. 유심이 간신의 모함으로 귀양을 가게 되고 장씨는 충렬과 도망치다 도적을 만나게 된다. 강물에 던져진 충렬은 물에서 구출된 후 부친의 친구인 강 승상의 사위가 되는데 역심을 알게 된 강 승상이 상소를 올렸다가 오히려 귀양을 가게 되고 그 가족 역시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충렬은 백룡사 노승 밑에서 무예를 배우며 때를 기다린다. 드디어 남만과 북적이 명나라를 치려 하자 정한담은 남만에게 항복하고 오히려 명나라를 공격한다. 정한담 일파에게 천자가 막 항복하려 할 때 충렬이 단신으로 적을 무찌르고 천자를 구해 낸다. 황실을 구한 충렬은 돌아오는 길에 부모와 장인, 아내를 찾는다. 황성으로 돌아온 충렬은 공훈으로 높은 벼슬을 받아 부귀 영화를 누리게 된다.이상이 유충렬전의 대강 줄거리이며, 동명왕 신화에서 이미 그 구조가 확립된 귀족적 영웅의 일생을 바탕으로 한 전형적 영웅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이 글의 앞부분을 조금 읽고나서 나는 ‘아, 유충렬전 역시 홍길동전의 외전이라 불릴 정도로 내용이 비슷하다.’ 생각했었다. 하지만 글을 다 읽고 나서 내 생각은 많이 틀렸음을 알 수 있었다. 홍길동전의 갈등은 사회의 신분제도에 대한 강한 불만과 탐관오리 즉 정권에 관한 불만이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홍길동은 자신을 위한 투쟁을 전개해 나가고, 주체적으로 영광을 차지하려하며, 나중에 율도국이라는 이상적인 나라를 건설하게된다. 하지만, 유충렬전 이 작품에서는 유충렬은 자신을 위한 투쟁보다는 천자를 위한 투쟁에 비중을 더 두고 있는 종속적 영웅의 성격을 띈다. 그래서 투쟁의 결과로 얻는 영광도 천자에게 부여받는 벼슬이다. 나는 이 부분에서 왜 유충렬이 주인공의 이름인지를 짐작할 수 있었으며, 영웅이라 할지라도 새로운 왕족을 세우기 보다는 현재의 왕족을 보좌하며 충렬을 다해야 한다는 작자의 의도를 파악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대개의 영웅 소설들이 그렇듯이 이 작품도 천상계와 지상계라는 이원적 공간을 설정하고 주인공이 어떤 잘못으로 지상계에 추방된다는 적강 화소를 지닌다.적강 화소란 말도 솔직히 몰랐지만, 독후감을 쓰기 위해 대강의 작품특징을 알아보면서 알게 되었다. 아무튼, 이러한 성격의 소설을 적강소설이라 칭하기도 한다는데, 유충렬전 역시 이런 유형에 속하며, 작품에서 적강 화소는 작품 전체에서 복선의 구실을 한다. 유충렬은 천상에서 익성과의 반목 때문에 적강한 존재이기 때문에 지상에서 악성의 화신인 그 누군가와 대립할 것임을 추측할 수 있었는데, 역시나 정한담이라는 인물과 대립구조를 가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유충렬전의 배경은 중국 명나라이지만, 조선시대의 정황과 상당히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과 토번과 가달의 정벌을 툴러싸고, 유심과 정한담이 벌이는 대결은 주전과 주화의 대립인데, 이것은 조선시대 병자호란 때의 척화파와 주화파의 대립을 연상케 하였다. 또 호국에 황후, 황태자가 포로로 잡혀간 것은 대군과 비빈이 청나라의 포로가 된 역사적 사실의 반영이라 생각되었고, 천자가 금산성으로 피난한 것 역시 인조가 남한산성에 피난한 사실과 너무나도 대응되었다. 그러므로 충렬이 호국을 정벌하고 인질을 구함으로써 통쾌하게 설욕하는 것도 민족의 역사의식을 작가가 반영한 것이라 생각되어진다. 그런데 여기서 나는 이런 생각을 문득 하게 되었다. ‘그냥 배경을 중국으로 하지 말고, 조선시대로 대놓고 서술하면 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말이다. 하지만, 이 점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본 결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바로 아래에서 이야기 하겠지만 작품에선 왕권과 정권을 무능하고, 비굴한 성격으로 그리고 있다. 물론 지금시대에서는 당당하게 앞에서 정권의 시시잘못을 주장할 수 있겠지만, 작품이 쓰여진 시기는 조선시대이며 왕권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보이는 것은 역적으로 몰릴 수도 있는 중대한 사유가 되지 않았을까?라고 말이다. 결국 작가는 배경을 다른 나라로 할 수 밖에 없는 환경에 있었던 것이다. 자세히 말해보면 유충렬전에서 작가는 역경에 처한 왕권이 얼마나 무능하고 비굴한가를 보여주면서, 유충렬이 몰락한 가문을 일으키는 과정을 서술하고, 정적인 정한담을 대역 죄인으로 형상화하여 잔인한 보복을 가하는 작품 전개를 해나가는데, 여기에 작가의식이 암시되어 있는 것 같다. 즉, 몰락한 계층의 권력만회 의식이 구현된 보복 문학적인 성격을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구운몽 감상문학 과: 국어국문학과학 번: 20052136성 명: 김 도 균서포 김만중의 구운몽 아마도 고등학생 정도 되면 안 읽어본 사람이 없을 정도로 우리나라의 유명한 고전 소설이다. 비록 본인이 읽기 싫다하더라도 고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되어 있어 성적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읽을 수밖에 없었던 구운몽을 대학생이 되어 다시 읽게 되었다. 사실 입시와 성적이라는 중압감 속에서 학창시절에 읽었던 책들은 무엇이 시험에 나올 것인지에만 초점을 맞추어 책을 읽다보니 지금은 책 제목만 보더라도 입시생활의 고단함이 묻어나와 애써 그 당시 책들을 외면하게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대학생이 되어 전공과목의 과제를 위해 구운몽이라는 책을 그저 입시와 성적을 위한 책읽기가 아닌 하나의 진정한 책으로서 다시 읽게 되었는데 내가 나이를 먹어서인지 아니면 책을 대한 나의 시각이 바뀌어서인지 고등학교 당시와는 책에 대한 느낌이 많이 다르게 다가왔다.그런데다 양소유의 인간 세상 이야기가 꽤 재미있어 흥미 있게 읽어보았다. 이런 소설을 몇 백 년 전에 썼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고 사람의 기본적인 생각은 비록 시대가 다르다 해도 비슷하게 마련인가보다. 왜 고등학교 당시에는 이런 생각이 들지 않았는지 아마도 입시라는 것 때문에 마음의 여유가 많이 없었던 것 같다. 사실 그 시절에는 그저 성진의 꿈 속 얘기인 양소유의 삶이 재미있었을 뿐이었고, 양소유가 아름다운 여자를 만나고 싸움마다 이기니 그게 좋았을 뿐이었는데, 차츰 크면서 양소유의 삶이 주는 의미와, 성진의 마음을 헤아리게 되었다. 역시 자라면서 머리도 크나 보다. 그저 이기고 잘 되는 것이 좋아서 어렸을 적엔 양소유의 삶을 동경하기도 했다. 심요연이 여자 자객으로 양소유에게 다가오는 것도 내게는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어린 나에게는 성진의 이야기가 별 흥미를 끌지 못했기 때문에, 성진이 꿈을 깰 즈음 되면 알아서 책을 덮어 버리기도 하고 말이다. 나도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하는 게 내 생각이었다. 지금, 대학생이 되어 구운몽을 읽어 보자 이번엔 제일 중요하게 다가오는 것이 바로 ‘인생무상'이었다. 나는 성진만큼 뼈저리게 삶이 덧없음을 느껴본 적은 비록 없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해도 충분히 가능한 생각이다. 내가 바로 내일 죽는다면 하는 가정을 해 본 적도 여러 번인데, 정말 내가 사는 이유를 찾을 수가 없어서 혼자 잠 못 이룬 채 고민한 적도 있었다. 내가 아직 나이가 어려서 인생을 다 산 후의 허무함을 아직 느끼지 못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27여년만 돌아봐도 지금의 나로선 충분히 허망하다. 하루하루 바쁘게 지나가고, 일주일 후 남은 시험은 너무나 무섭게 느껴지는데, 한참이 지난 후에 보면 바빴던 하루는 어느새 기억 속의 한 장면이 되어 버리고, 무서웠던 시험도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만 느낄 수 있을 정도로 퇴색되어 기억나지 않는 것이다. 아무리 힘든 날이 있었다 해도 나중엔 그걸 추억하며 웃을 수 있는 것이고 모든 기억은 내가 사라짐과 함께 사라지는 것이고 내가 이 세상에 사는 의미는 찾을 수가 없다. 모든 걸 끝내고 늙음의 나이를 느낀 성진은 아마도 왜 자기가 이런 삶을 살았던 가 왜 그런 싸움들에 이기고 사랑스러운 여인을 만나 살았는데도 만족스럽지 못하고 뭔가 허전한 가 그런 것들을 생각했을 것 같다. 나도, 현실의 삶에서 나이를 먹어 뒤늦게 후회하기 전에, 꿈으로 한 번 삶을 경험해서 현명하게 살고 싶다. 지금은 머리속에서 상상하며 이렇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그게 진짜로 뼈저리게 다가오지 않기 때문에 나태해지고 대충이기 일쑤다. 뒤늦게 후회하지만 이미 늦은 자신을 느끼면 정말 다시 되돌아올 수 없는 시간들을 원망하지 않을까 싶다. 시간이 다 지난 뒤, 죽기 직전에 후회하거나, 후회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은 채 죽는 일이 제발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성진에게 내려진 축복이 내게도 내려졌으면 좋겠는데 어리고 생각도 깊지 못해서 하루하루의 일에 희비를 느끼고, 이것저것 삶의 자질구레한 일에 신경을 쓰는 나지만, 언젠가 나도 모든 것을 깨달아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게 되었으면 한다.
일상으로 본 조선시대 이야기학 과 : 국어국문학과학 번 : 20052136이 름 : 김 도 균과거 조선 시대의 모습을 보여주고, 설명해주는 방법은 대부분 커다란 사건이나 중요한 인물을 주로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조선 시대 일생 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삶은 어떤 삶이었을까? 삶을 부유하게 살아가고 있었던 양반들과 양반들로부터 지배 계급에 있었던 서민들이 바로 조선 시대를 더욱 잘 표현하는 그것이다. 양반들은 가진 사치와 향락을 즐겼고, 노동으로부터 해방된 그들은 자신들만의 특권으로 문화를 즐길 수 있었다. 반면 서민들은 이와는 반대로 끝이 없는 노동에 시달리면서 힘든 삶을 살아야 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서민층의 생활을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었다. 특히 기생의 이야기와 담배 이야기를 읽게 되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특히 관기로 있으면서 사랑하는 이와 헤어져야 할 때가 되면 얼마나 가슴 아파 했을지 느끼게 되었다. 져버리는 장미와 같이 그들이 나이가 들면 그들은 더욱더 서글픈 삶을 살아야 했으리라. 소수의 기생들은 양반의 후첩으로 들어가 잘 사는 경우도 있었겠지만 대부분의 기생들은 그러하지 못했다. 그들은 자신도 평민들처럼 소박한 가족을 이루고 살아가기를 얼마나 염원했을까? 평범하게 살아간다는 것도 어쩌면 힘이 드는 일인지도 모를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담배 이야기가 나왔을 때는 이 책이 사실인지 아닌지 놀라며 입을 벌리고 책을 읽었다. 그 당시에도 많은 사람들이 담배를 피웠다는 사실에 말이다. 3살짜리 아이가 담배를 필 정도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담배 이야기가 나왔으니 한마디 좀 하고 싶다. 담배를 피는 것이야 개인의 자유이지만 그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 다는 사실을 흡연자들이 모르는 것 같다. 나는 주말마다 이마트에서 주차관리를 하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데 아침에 출근해서 1시간 동안 주차장 내에 버려져 있는 쓰레기를 줍는 일을 한다. 그 1시간에서 50분 동안은 버려진 담배꽁초를 줍느라 시간을 보낸다. 어떤 때는 같은 자리에 똑같은 담배가 7개피나 버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럴 때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문화 수준을 심각히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쓰레기통이 바로 옆에 있는데도 왜 땅에다가 담배를 버리는 건지. 이것이 조선시대부터 이어져온 잘못된 습관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되었다.요즈음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가 많이 나오고 있다. 그런 이유인지 흥선대원군에 대한 관심이 이 글로 눈길이 가게 만들었다.“흥선은 고즈넉이 눈을 감았다. ‘상갓집 개라.’ 이 상갓집 개는 내일도 또한 병기의 집을 찾아보자. 수모를 하면 수모를 하느니만큼 더욱 자주 찾아보자. 샅 틈으로 기어 나간 한신이 있지 않느냐…그들이 자기를 바보로 여기고 속없는 놈으로 여기면 자기는 더욱 그들에게 그런 눈치를 보여서 당분간 안전을 도모하여야겠다.”김동인이 지은 『운현궁의 봄』에 나오는 흥선군이 대원군으로 봉작되기 전의 모습을 나타낸 . 그러던 흥선군이 어느 날 갑자기 대원군이 되어 조선 팔도를 쩌렁쩌렁 울리는 인물로 변해버렸다. 문학적 상상에서나 가능할 듯 한 인생역전이 역사적으로 실재했다는 것은 대단히 흥미로운 일이다. 그것도 아주 먼 옛날도 아니었으니 더욱 그렇다. 과연 흥선군이 그러한 인물이었는가?흥선대원군 이하응은 1820년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남연군 이구는 인조의 동생인 인평대군의 6대손이었는데, 정소의 이복동생인 은신군의 후사로 입정된 사람이었다. 이하응은 24살인 1843년 흥선군에 봉작되었다. 대원군이 되기 이전 흥선군의 활동을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다. 다만 1847년 종친부의 실무를 맡은 유사당상에 임명된 것이 확인된다. 당시 종친부는 군에 봉작된 사람들 4~5명 정도의 모임으로서 정치적으로 거의 의미가 없는 관서였다. 그러나 흥선군이 유사당상을 맡은 뒤 이러한 종친부의 권한을 확대시키려 하였음이 주목된다.흥선 대원군에 대한 의문은 그가 대원군이 되기 전에는 어떻게 살았을까? 라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영의정과 같은 정부 고위 관직에 임명된 적도 없고 그렇다고 국왕도 아니면서 그가 어떻게 막강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는지가 더 큰 의문이다. 국왕의 생부로서 국왕이 아니었던 사람을 대원군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의 대원군은 선조의 아버지인 덕흥대원군,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대원군, 철종의 아버지인 전계대원군 그리고 조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 이렇게 4명이 있었다. 이 가운데 정원대원군만은 1632년 정식 국왕으로 추존되어 원종으로 부르게 되었다.그러나 그 동안 생존하였을 당시 대원군이 된 사람은 없었다. 종래에는 모두 사망 후 대원군이 된 까닭에 예우 문제로 고민할 필요 없이 제사 절차만 규정하면 되었다. 생존하여 활동했던 국왕의 생부는 흥선대원군이 처음이었다. 따라서 대원군에 대한 예우도 새로 마련되어야 했다. 일단 그에 대한 예우는 대군에 준하도록 하고, 다만 국왕에게 올리는 글에 신(臣)이라는 표현은 쓰지 않도록 하는 정도로 결정되었다.그렇다고 대원군이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직책도 아니었다. 즉 하부 조직을 거느리고 일정한 직책을 수행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흔히 흥선대원군이 ‘섭정’이 되었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섭정이란 국왕을 대신해서 정사를 보는 사람 혹은 그러한 행위를 가리키는 말이다. 하지만 섭정은 일본역사에서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조선시대는 그러한 용어조차도 자구 사용하지 않았다. 굳이 섭정이라는 개념으로 조선시대 역사를 살펴본다면 어린 국왕이 즉위하였을 때 대왕대비가 수렴청정하는 것을 거기에 해당시킬 수 있을 것이다. 수렴청정하는 동안 대왕대비가 내린 결정은 국왕의 결정과 같은 법적 효력을 갖고 있었다. 즉 ‘왕처럼 행세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1984년 일본의 영향력 아래 진행되었던 갑오개혁 시기를 제외하고는 흥선대원군을 섭정이라고 부른 적은 없었다.다음은 조선시대의 종교적인 측면이다. 지금과는 달리 조선시대의 이념이 유교이다 보니 불교는 당연히 천대를 받을 수밖에 없었으리라. 이 책에서 조선시대 중들이 겪어야 했던 일들이 서술되어 있는데 조선시대에 중들이 이런 고통을 받았다니 하는 생각을 하니 중들도 불쌍하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참선을 통해 반야의 세계로 해탈하고 싶어했던 중들에게 참선을 할 시간이 없을 정도로 많은 일들을 짊어져야 했다는 사실에 더욱 놀랐다. 조선시대 중들이 이런 일을 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기 때문이다. 중들이 종이를 만드는 일 짚신을 만드는 일 등 갖가지 일들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얼마나 일이 많았으면 중들이 절을 도망쳐서 절이 망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나는 조선시대에도 중들이 참선을 닦기 위해 고행을 하고 불경을 외는 줄로만 알았었는데 이 책을 읽는 순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