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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럽의 마녀사냥
    * 마녀사냥이란?15세기부터 18세기 초까지 서양에서 일어난 마녀재판에서 유래한 말. 십자군 전쟁 실패 후 사회불안과 종교적 위기가 계속되자 권력층과 교회는 주민들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해 멀쩡한 사람을 마녀 또는 악마의 사도로 몰아 대대적인 재판을 벌였다. 1950년대 미국에서 조지프 매카시 상원의원 주도로 벌어진 '빨갱이 사냥'이 마녀사냥의 전형으로 꼽힌다. 이 사건 이후 마녀사냥이란 용어는 '권력자들이 도덕적 공황상태를 이용, 특정 개인이나 집단에 죄를 뒤집어씌우는 행위'를 의미하게 됐다.마녀탄압의 가장 오래된 예는 기원 년전 1200년의 이집트에서 있었고, 그리스에서는 데모스테네스의 시대(BC 4세기)에 한 사람의 마녀가 처형되었고, 로마에서는 네로와 카라카라 황제에게 심하게 박해 받았고, 그리스도교에 개종한 직후의 콘스탄티누스 황제 ( AC 4세기)와 프랑크 왕국의 샤를르대제(AC 9세기)도 주술을 금지한 엄격한 법령을 선포하는 등, 마녀와 그 주술에 대해 탄압과 박해를 가한 예는 드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탄압과 박해는 마녀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행하는 반사회적인 범죄에 대한 것이었다. 마녀 선풍기 이전에는 마녀에 대해 매우 관용적이고 탄압도 극히 미온적이었을 뿐 아니라 마녀에 대해 온정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1400년을 경계로 하여 사태는 일변한다. 마녀에 대한 교회의 태도가 돌연 강경해진 것이다. 1400년경부터 시작되어 1600년을 중심으로 하는 일세기 동안은 바로'마녀선풍'의 기간이었다.이 기간을 절정으로 하는 마녀 선풍은 13세기 무렵에 프랑스에서 불기 시작하여 결국 모든 그리스도교 국가, 즉 서유럽 전역을 황폐화시키고 17세기 말에 그 여 파가 신대륙 아메리카에 퍼진 후 급속하게 진정되었다. 수만, 수십만의 마녀가 교살당하고, 혹은 교살당한 후에 불태워지고, 또는 살아있는 채로 불태워져 죽었다. 1590년에 독일을 여행했던 여행자는 적고 있다. 제네바에서는 3개월 동안 5백 명(1513년),트레이브즈(독일)에서는12세기 발발했던 대규모 과격 이단운동이 교회 당국에 던진 심각 한 충격과 위기감 때문이었다.교황권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1198∼1216)의 시대에 남프랑스의 이단운동이 격화되고 로마교회가 공황 속에 내던져진 것이다. 원인은 교황권력의 강대함과, 성직자의 독선적인 우월감 때문이었다. 이 무렵 성직자들은 부패와 타락에 빠져 있었다. 면죄부의 판매는 상식이 되고 영혼의 구제는 금전적 거래에 의해 행해지고 성찬례, 죽은 사람을 위한 기도, 임종의 희사, 그 외에 모든 의식은 그 본질을 잃고 형식만 남았다. 성직매매는 보통이고 성직자는 정부를 두었으며 참회실은 여자를 감쪽같이 유혹하는 밀실이 되고 수녀원은 적선구역이 되었다. 여기에 반항해 일어난 것이 이단운동 이였다.12세기 남프랑스는 유럽에서 가장 문화적인 지역이었고, 많은 종파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자유로운 지역이었다. 이 같은 자유스러운 공기는 로마 교회의 부패를 공격하고 그 개혁을 주장하는 목소리를 높이는데 극히 합당했다. 혁신 가들은 12세기 초부터 알비와 툴루즈의 마을을 돌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들은 뼈대만 남은 로마교회의 모든 의식을 부정했다. 그리스도의 인성, 화체설(化體說), 유아세례 등의 교리를 부정했다. 또한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학살 도구이므로 불태워야 하며, 성직자 외경을 중지하 고 교회유지비 내기를 거부했다. 이들이 알비파들이다.또 한 무리는 리용의 거상 피에르 발도(1140년∼1197년)가 성서의 복음을 전한고 다닌 '리용의 빈자'라 불리는 일단의 개혁적 설교운동이 급속히 확대되어 간일이다. 그리스도가 명한 것을 이살생활의 지도원리로 엄격하게 지키자는 발도파의 복음주의, 성서주의등은 교황과 성직에게 복종하는 것을 거부했고, 죽은 자에 대한 미사 , 기도, 포교 등의 일정한 의식은 무의미한 것이며 연옥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침상에서의 기도도 마굿간 안에서의 기도도, 교회당에서 행한 것과 유효하고, 참회는 평신도도 청문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비판적 개혁적 한 이단자운동에 11, 12세기 무렵부터는 이단자를 재판하는 교회 법정에 '마녀'의 모습이 어른거리기 시작한다. 재판받는 이단자의 죄상 중에 마녀적 인 행위가 드러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1239년 5월 29일에 샹파뉴에서 이단자 약 1백 80명이 불태워졌는데 그 죄상에는 " 악마의 도움을 요청했다"라는 마녀 행위가 첨가되어 있었고, 1275년에는 툴루즈에서 60세의 노파가 화형을 선고받았는데, 마녀가 악령과 성관계를 맺어 귀신 아들을 낳아 가까운 묘지에서 파낸 젖먹이의 살로 그 아들을 키웠다는 하는 행위, 1303년에 루브르의 입버회의는 프랑스왕 필립과 다투던 교황 보니파티우스 8세를 이단자로 고발했는데, 교황이 '심부름하는 악마'를 이용 해 여러 가지 정보를 수집하거나 점장이나 예언가 등과 관계를 가진 마녀라는 것이었다.이단퇴치의 열의에 불타고 있던 이단심 문관들은 그 활동범위를 마녀에게까지 확대시켜나갔다. 교황 요하네스 22세의 교서(1318년 2월 27일자)"언제, 어디에서라도 마녀재판을 개시하고 계속하고 판결하는 충분하고 완전한 권능을 당신들 각자에게 부여하는 것이다"는 마녀사냥 강화령을 발표함으로써 본격적인 출발을 하였다. 요하네스 시대는 '교황의바빌론 죄수'시대(1309∼77)로 교황의 권력은 국왕의 권력에 눌려 교황청은 로마에서 아비뇽(남프랑스)로 옮겨져 프랑스왕의 지배하에 있고, 로마교황을 주권자로 하는 카톨릭적 '세계정부' 가 붕괴될 위기상황의 시대였다. 또한 중세의 세계관이 붕괴되고 새로운 사상이 꿈틀거렸으며, 흑사병에 의해 인구가 급격히 감 소한 이후에 사회의 재편성이 이루어지던 시기였다.또한 봉건체제가 붕괴되면서 지방분권이 중앙 집권 체제로 옮겨가던 시기였다. 여기에종교개혁운동과 연결되어 '종교전쟁'이 서유럽 전체를 황폐화 시킨 사회적인 움직임이 일어나게 되니 마녀사냥은 이 러한 정치적 문제와 시기를 같이한다. 마녀가 정치적 도구를 사용된 것은 템틀기사단(1119년 설립된 수도회, 성지순례의 보호와 성묘방위를 목적, 13세기 말 막대한 신하처럼 따르고, 그 보상으로 악마의 마력이 주어져 초자연 적인 요술을 행할 수 있다." 이러한 마녀에는 고상한 사상가에서 아래로는 독초를 따는 노파에 이르기까지 빈부귀천, 나이의 많고 적음, 남녀 성별을 불문하였다. 마녀 사냥의 희생자 중에 약 80%는 여자였고 그 중 대부분은 45세 이상의 이었다. 여성 이 많은 이유는 당시 마을 공동체에서 다른 사람들의 불행을 도와주며 긍적적인 역할을 하였던, 전염병이나 기근같은 일이 발생 하거나 불구가 되어 자식을 낳지 못하거나 가축이 새기를 낳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일이 없어지면 사람들은 이들에게 도움을 청 했다. 이들은 그들의 불행을 마법을 통해서 사라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주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들은 마을 공동체의 생활이 유지도리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는데 이러한 능력을 지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대체로 생활의 안정이나 마을 내에서의 영향력 을 가장 필요로 하던 사람들이었다. 대체로 늙고 가난하거나, 독신, 그 중에서도 과부인 경우가 많았다. 여성들은 경제적 곤궁이 더 심했기 때문에 더 많은 숫자의 여성들이 초자연적인 능력을 지녔다고 주장함으로써 사회 속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하였 을 것이고 이러한 이유로 많은 숫자의 여성들이 희생을 당했다.더군다나 이러한 여성들은 산파의 역할을 담당한 경우가 많았는데 , 위생조건이 열악했던 당시 사랑하는 부인이나 신생아가 출산 도중 사망할 경우 이들은 쉽게 분노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마녀를 공격한다는 것은 기성의 기독교 사회가 새로운 지역에 그 세력과 영향력을 확장시킨다는 것을 뜻하는데, 마녀를 처벌하는 과정에서 마을에서 도덕적, 정치적 권위를 선언하게 되며,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던 인물들을 제거함으로써 마을 공동체 에서 기독교의 교두보를 확보하는 의미였다.* 마녀재판은 어떤 식으로 이루어졌을까?1)체포와 수사마녀는 먼저 풍문에 의해 적발되었다. 누구누구가 마녀라고 하는 소문이 나고 이들을 체포하고 이웃의 부합하는 진술에 기초하여 고문에 의해 마녀로 둔갑하게 송절차의 당연한 결과였다. 15-6세기 로마법이 유럽 전역에 전 파 되기 전까지는 이른바 게르만법계에 속하는 이른바 형식적 증거법주의가 증거법상의 원칙이 되어 있었다. 이에 따르면 요증(要證)사실의 진실 여부는 이론상 또는 경험상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 주장방법 자체에 의해 결정되었다. 진실은 주장자 자신의 선서, 또는 이웃의 선서, 때로는 결투에 의해 제기되고 인정되었다. 피고인 자신도 마녀가 아니하는 선서, 이웃의 선서에 의해 형벌을 면할 수가 있었지만, 마녀인지 여부는 수족을 묶고 수중에 던져 보아 가라앉으면 결백한 것이 입증되곤 하였다. 그러나 그 결백이 입증되었을 때에는 이미 산 사람이 아니었다. 15-16세기경 로마법이 전래되면서 이른바 논리증거주의가 채용되었다. 요증 사실의 진실을 증명하기 위 해 서는 경험상 논리상 진실인 것을 확신시키기에 충분한 증거자료의 존재를 필요로 하였다. 1532년 제정되어 18세기말까지 독일 보통법이었던 카톨리나 형법의 증거원칙에 의하면 유죄의 증거로서 피고인의 자백 외에 2인의 증인의 증언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이에 위하더라도 법률에 정하는 정도의 정황증거가 있는 경우에는 고문에 의한 자백이 허용되어 이것이 마녀의 양산에 별다른 통제가 될 수 없었다.3) 고문위와 같이 고문은 거의 모든 마녀재판의 필수적인 한 요소로 등장한다. 마녀는 결국 고문의 소산이었다. 물론 희귀한 사례가 없지는 않았다. 어떤 소녀는 자신이 마녀임을 아버지에게 자백하고 아버지가 딸을 신고하여 마녀재판에 등장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건에서 마녀들은 자신이 마녀라는 사실을 부인하였다. 그럴 경우 위에서 본 마녀의 징표들을 들이밀며 마녀라는 사실을 시인할 것을 강요한다. 그 강요의 수단이 바로 고문이었던 것이다. 이 당시 행해진 고문은 그야말로 "인간의 지혜를 모두 동원하여 만든 것으로써 필설로 설명하기 어려운 정도"였다. 건강한 남자조차 견디기 어려운 정도의 고문이 연약한 여성에게 가해질 때 심문관이 요구하는 내용의 진술을 자인하지 않을 도 된다.
    사회과학| 2008.12.14| 5페이지| 1,000원| 조회(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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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맹자와 고자의 인성론
    맹자와 고자의 인성론맹자 때, 성품에 대한 견해가 세 가지 있었다. 첫째, 성품에는 선도 없고 불선도 없다는 학설(性無善無善說), 둘째, 성품은 선하게 될 수도 있고, 불선하게도 될 수 있다는 학설(性可以爲善, 可以爲不善說), 셋째, 성품은 선한 사람도 있고 불선한 사람도 있다는 학설(有性善, 有性不善說)이다.고자는 사람의 성품이란 원래 선한 것도 아니고 불선한 것도 아니라는 학설을 주장했다. 고자는 인성(人性)은 단지 후천적인 도덕행위가 형성되는 소재를 제공하는 역할을 할 뿐이라고 주장하였다.고자에 의하면 아직 드러나지 않은 성(性)은 선한 것도 아니고 선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버들가지가 곧바로 술잔이 될 수 없어 그 사이에 가공과정이 필요하듯이, 사람의 본성으로부터 직접 선한 행위가 도출되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 성(性)을 선한 행위와 매개할 수 있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고자가 버드나무가 그릇이 되고, 또 갇혀 있는 물이 물꼬를 트는 방향으로 흐르는 것으로 성을 비유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치를 설명하려는 것이다.그러나 맹자는 모든 도덕의 근원을 성(性)이라고 생각하고, 인간의 본성은 타고날 때부터 착한 것이라고 하였다. 맹자는 고자의 설을 반박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사람의 성이 선한 것은 마치 물이 아래로 내려가는 것과 같다. 사람 가운데 선하지 않은 사람이 없고, 물 또한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 물은 없다.’물을 튀어 오르게 하거나 역류하게는 할 수 있지만, 그것은 물의 본성이 아니다.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물의 참다운 본성처럼 선한 것이 바로 사람의 참다운 본성이라는 것이다.또한 맹자는 성선설의 근거로 어린아이가 물에 빠지는 것을 보았을 경우 이에 대처하는 사람의 행위를 예를 들어 설명한다. 아이를 구하는 것은 다른 목적이 있어서 라기 보다는 사람이 그 아이를 불쌍히 여겨 구한다는 것이다. 이점이 곧 인간에게는 본래 도덕적인 선함이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준다는 것이다. 맹자에 의하면 사람의 선한 본성은 네 가지의 실마리를 통해 밖으로 나오는데, 그것들을 곧 측은지심(딱하게 여겨 안타까워하는 마음), 수오지심(자신의 선하지 않음을 부끄러워하고 남의 선한지 않음을 미워하는 마음), 사양지심(사양하고 남을 공경하는 마음), 사비지심(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이다.
    사회과학| 2008.12.14| 1페이지| 1,000원| 조회(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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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논어의 체계와 내용
    논어(論語)논어의 체계와 내용《논어(論語)》는 유가(儒家)의 성전(聖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사서(四書)의 하나로서, 중국 최초의 어록(語錄)이기도 하며, 고대 중국의 사상가 공자(孔子)의 가르침을 전하는 가장 확실한 옛 문헌 이기도하다. 《논어(論語)》는 공자의 혼잣말을 기록해 놓은 것과 제자의 물음에 공자가 대답한 것, 제자들끼리 나눈 이야기, 당대의 정치가들이나 평범한 마을사람들과 나눈 이야기 등 다양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으며, 인생의 교훈이 되는 말들 또한 간결하고도 함축성 있게 기재되어있다.《논어(論語)》라는 서명(書名)은 공자의 말을 모아 간추려서 일정한 순서로 편집한 것이라는 뜻인데, 누가 지은 이름인지는 분명치 않다. 저자에 관해서 숭작참(崇爵讖)의 자하(子夏) 등 64제자설(六四弟子說), 정현(鄭玄)의 중궁(仲弓) ·자유(子游) ·자하(子夏)설, 정자(程子)의 증자(曾子) ·유자(有子)의 제자설, 그 밖에 많은 설들이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단지 공자의 제자들과 그 문인들이 공동 편찬한 것으로 추정되며, 한 사람의 저자가 일관적인 구성을 바탕으로 서술한 것이 아니라, 공자의 생애 전체에 걸친 언행을 모아 놓은 것이기 때문에 여타의 경전들과는 달리 아포리즘적) 성향을 띄고 있다.현재 현존하고 있는《논어(論語)》는 에서 에 이르는 20편으로 이루어져있으며, 서술방식과 호칭의 차이 등을 기준으로 앞의 열편을 상론(上論), 뒤의 열편을 하론(下論)으로 구분하며 앞의 열편이 더 이전 시대에 서술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편명(篇名)은 각 편 내용의 첫 두 글자를 따서 그 편명(篇名)을 붙였다.각 편마다 내용과 주제를 살펴보면,제 1편 는 논어의 서편(緖編)으로 학문의 중요성과 공자의 사상이 깃들어 있다.제 2편 은 정치에 대한 내용을 수록하였다.제 3편 은 무악(舞樂)의 이름인 팔일을 편명으로 삼아 예악에 대한 이야기를 수록하였다.제 4편 는 인덕(仁德)에 대한 말들을 수록하였다.제 5편 은 제자들과 고금의 인물을 평한 것으로 주로 자공의 언행이 기술 되어 있다.제 6편 의 앞쪽은 인물평에 대해, 뒤쪽은 인(仁)과 지(知)에 대한 이론을 수록하였다.제 7편 는 공자 자신의 일과 공자의 용모, 태도, 행동에 대한 것들이 기록되어 논어 전 편중 가장 뛰어난 구절들이 많이 있다.제 8편 은 고대의 성왕들과 현인들의 이야기를 주로 다루었다.제 9편 는 공자의 언행에 대한 기록과 공자의 출처진퇴(出處進退))에 대해 기록하였다.제 10편 은 공자의 일상생활과 생활태도를 기록하였다.제 11편 은 문인들과 그 외의 인물들에 대한 평하고, 논어 전권을 선진을 기준으로 상, 하로 나누는 경계로 삼았다.제 12편 은 공자와 제자, 제후들과의 대화를 기록한 것으로 주로 정치 쪽으로 많이 기록 되었으며 바름(正)과 솔선을 이상형으로 삼았다.제 13편 의 앞쪽은 정치에 대해, 뒤쪽은 성인군자에 대한 문답을 수록하였다.제 14편 은 여러 나라의 사대부의 말을 기록하였으며, 원헌(原憲)이 직접 기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제 15편 은 문구가 짧은 것이 특색이며, 수신과 처세에 관한 구절을 수록하였다.제 16편 는 말한 사람의 이름이 없으며 특히 자왈을 공자왈로 기록해 놓았다.제 17편 는 세상의 어지러움과 위정자와 제자들에게 경고를 수록하였다.제 18편 는 고대 은, 주나라의 현인(미자, 기자, 비간, 백이숙제 등)들에 대한 공자의 생각과 사상을 당시의 사회상에 중점을 두어 기술하였다.제 19편 은 공자의 제자들인 자하, 자공, 증자 등의 말을 기록해 놓았다.제 20편 은 3절로 구성 되었으며, 논어 20편중에서 체제가 가장 다르게 꾸며졌다.요, 순, 우, 무왕 등의 정치적 성격과 일반 위정자를 위한 훈계를 수록하였다.이처럼 각 편마다 주제가 있기는 하나, 용어가 통일되지 않았고, 같은 문장의 중복도 있다. 그래서 글의 내용이 산만하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중국철학사적 의미교수님께서 첫 시간에 이야기 해주셨듯이, 그리스의 해양문화는 서양철학의 첫걸음을 공간(空間)과 존재(Being)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내딛게 했다. 그리스는 올리브와 포도 등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자급자족이 불가능했다. 자급자족이 불가능했던 그들에게는 바다 건너에 무엇이 있는가? 하는 공간적 지리 지식이 중요했다. 인식은 관심에서 비롯한다. 그리스인들은 밖으로, 또 밖으로 내달려 밖으로 대상을 잘 알아서 어떻게 하면 지배하고 점유할 수 있을까? 하는 인식의 문제에 관심을 두었다. 서양문화가 시간보다는 공간을 중시하고, 시간에 오는 변화보다는 공간에 자리하는 불변의 존재(Being)에 관심을 더 둔 것도 이 때문이다.반면에 중국의 농경문화는 중국철학의 첫걸음을 시간(時間)과 도(道)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내딛게 했다. 중국은 자급자족이 가능했기 때문에 한 곳에 정착하여 때에 맞추어 농사일을 했다. 따라서 집단적인 대가족제도가 발달했을 뿐만 아니라 혈연을 중심으로 하는 부족끼리의 연맹으로 부족이 형성되고 부족끼리의 연맹으로 나라가 형성되었다. 이들에게는 언제 어떤 농사일을 하여야 하는가 하는 시간적 변화 지식이 중요했다. 중국인들은 안으로, 또 안으로 들어가 나 스스로가 어떻게 하면 자연과 사회와 더불어 살 수 있을까? 하는 실천의 문제에 관심을 두었다. 중국문화가 공간보다는 시간을 중시하고, 공간에 자리하는 불변의 존재 보다는 자연의 시간 변화에 발맞추는 도(道)에 관심을 더 둔 것도 이 때문이다.공자가 있던 시대는 질서를 유지시켜주는 기존의 예악(禮樂)이 무너져가는 시대였다. 그러므로 어떻게 하면 무너져가는 예악을 다시 세울 수 있을까, 하는 문제가 공자의 가장 큰 철학적 과제였다. 이에 공자는 예악의 기본으로 어질 인(仁)을 주장 했다.
    사회과학| 2008.12.14| 3페이지| 1,000원| 조회(6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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