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미있는 통계이야기 >우리는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통계를 접하게 된다. 언제 어디서 자료를 접했는지 판단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통계를 접하면서 살아간다. 이러한 통계가 엉뚱한 속임수나 사기로 되어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평균이라든가, 상관관계라든가, 경향이라든가, 그래프 등등은 표시되어 있는 그대로의 뜻을 갖는 것은 아닌 것이다. 눈으로 보는 것 이상의 뜻이 포함되어 있을지도 모르고 또 겉보기보다는 훨씬 더 내용이 부실할지도 모른다.통계학이라는 단어는 물적 증거가 제일인 세상에서는 사람들에게 호소하는 힘이 매우 큰 까닭에 사물을 크게 소문나게 하거나, 과장하거나, 혼란시키거나 또는 극도로 단순화시키는데 자주 이용된다. 사실 통계적 방법이라든가 통계적 용어는 사회나 경제의 동향, 기업의 경영상태, 여론조사, 국세조사 등 방대한 데이터를 기록하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될 용어들이다. 그러나 그 용어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정직하게 사용하는 발표자와, 사용된 용어의 뜻을 올바르게 알아차리는 대중들이 짝을 이루지 않는 한 그 결과는 의미 없는 용어의 장난에 불과하다.우리는 조사를 뒷받침하여 자료를 분석한다. 한때, “모 대학 졸업생의 연간 평균소득이 25111달러이다” 라는 기사가 주간지에 실리는 일이 있었다. 이 또한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통계였다. 소득이 얼마냐고 물을 때 어떤 사람은 허영심 또는 낙천주의 때문에 소득을 실제보다 높게 적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낮게 적는 사람도 있다. 이것은 표본추출의 문제로서 모든 종류의 통계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의 하나이다. 여기에서 추출한 표본의 수가 충분히 크고 끄집어내는 방법이 적절하기만 하다면 이러한 통계는 전체의 수를 썩 잘 대표할 것이며 또 대부분의 목적에 대해서는 그것으로 충분할 것이다.여론조사에서는 왜곡이 따르기 마련이라고 한다. 왜 왜곡된 결과가 일어나는가. 많은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사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대답을 기피할 수도 있고, 거짓말을 할 수도 있으며, 질문하는 사람에 따라서 대답을 다르게 할 수도 있는 법이다. 또한, 조사자는 여러 사람 중에서 느낌이 좋은 쪽으로 접근하여 조사할 것이다. 따라서 여론조사는 고의적으로 결과를 왜곡시키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어느 특정한 방향으로 기울어져 왜곡되려고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왜곡되어 버리는 것뿐이다.우리는 평균치로도 많은 속임을 당한다. 이 때, 평균이란 말의 의미가 매우 모호한 것을 이용하여 그때그때마다 종류가 다른 평균치를 쓴 것이다. 이 방법은 자주 이용된다. 쓰는 사람 자신도 모르게 사용되는 수도 있기는 하지만 대중의 의견을 좌우하고 광고면을 팔고 싶어할 때 의도적으로 저지르기도 한다. 어떤 수치가 평균치라 하더라도 그것이 어떤 종류의 평균치인지 즉 산술평균치, 중앙치, 최빈치 중의 어느 것이냐 하는 것을 알기 전에는 별 의미가 없게 된다. 국세조사에는 확률과 오차한계까지 함께 명시되기에 비로소 우리는 상당히 정확한 추정치를 얻을 수 있다.적은 인원수를 표본으로 쓰는 속임수도 적지 않게 볼 수 있다. 일정한 크기의 표본에 대하여, 신뢰구간이 좁으면 좁을수록 그것에 대한 신뢰도는 높아진다. 물론 표본의 크기를 증가시키면 신뢰구간도 좁힐 수 있고 표본이 모집단의 백분율을 대표한다는 신뢰도도 높일 수 있다. 그러나 표본크기를 증가시키는 만큼 비용이 더 들게 된다. 많은 사람들은 어떤 결과를 도출해내기 위한 대상의 수가 매우 적었음을 알고 상당히 놀란다. 실제로 여론조사자들은 임의추출에 관련된 문제를 보정하기 위해 이론적으로 필요한 인원보다 더 많은 사람을 조사한다.아무런 의미도 없는 어떤 결과를 완전히 우연에 의해서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은 비용을 별로 들이지 않고도 쉽게 독자 스스로도 실증해 보일수가 있다. 한 예로 동전을 던졌을 때 앞면이 나오는 확률은 누구나 알다시피 2분의 1이다. 허나, 이는 시행횟수가 아주 적을 때의 이야기이다. 실제로 동전을 던져보면 반반이 될지도 모르지만 아마도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50대 50의 결과와는 동떨어진 엉뚱한 결과가 나올 것이다. 그러나 꾹 참고 몇 천번쯤 던져보면 거의 반반씩 나올 것이다. 즉 이렇게 시행 횟수가 커야만 올바른 확률이 나타나는 것이다. 시행 횟수가 충분히 클 때에 한해서 평균의 법칙은 여러 사물의 설명이나 예측에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다. 또한, 표본조사에는 오차가 따르게 마련이다. 이것은 여론조사 결과를 읽는 사람은 누구라도 알아두지 않으면 안 되는 중요한 점이다. 어떠한 조사결과에도 어느 정도 오차는 있다.
「창가의 토토」를 읽으면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 ‘이런 학교가 정말 존재할까? 작가가 바라는 상상 속의 학교는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이런 의문은 2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읽으면서도 문득문득 떠올랐다. 마지막 작가후기를 읽은 후에야 ‘정말이구나.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있었던 일들이구나..’ 라고 믿었으니 말이다. 도모에 학원의 고바야시 교장선생님의 교육방침은 그 어느 누가 보더라도 놀라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이 책은 태어나자마자 알파벳을 먼저 배우고, 학원과 과외에 시달리고 있는 이 시대의 교육이 옳은 것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끔 만든다.어렸을 때부터 교사가 꿈이었지만 교직관에 대해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는 것 같다. ‘늦었구나..’ 라는 후회도 있지만 정말 다행스럽게도 이 책을 접하게 됨으로서 앞으로의 교육자라는 꿈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나 또한 여느 교사들처럼 ‘안정적이니깐.. 좋아보이니깐..’ 이라는 생각으로 여기까지 온 것은 아닌지 되돌아본다.수업 중에 창가에서 친동야를 불러 모두에게 피해를 주고 퇴학을 당한 토토가 도모에 학원으로 가면서 많은 변화가 올 수 있었던 것은 이 책의 주인공이기도 한 고바야시 선생님의 교육효과라 할 수 있다. 또한, 토토의 순수한 마음을 지켜주었던 토토엄마의 남다른 교육이 아니었다면 토토의 변화는 볼 수 없었을 것이다.살아가면서 학창시절 기억에 남는 선생님을 묻는다면 우리는 선뜻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그저 똑같은 책상과 의자에 앉아서 어두운 칠판만 바라보며 학창시절을 보냈기 때문이다. 교사 혼자서 책 내용을 중심으로 가르치는 일방적인 수업이 대부분인 우리 현실은 고바야시 선생님의 교직관이 꼭 필요한 때이다.고바야시 선생님은 자연주의 즉, 실존주의 철학으로서 아이 중심의 교육을 하였다. 이것은 아이들의 개성을 존중하면서 조금의 강제성도 허락하지 않으며 아이 자신의 행복추구에 목적을 두었다. 하지만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아이들의 생각을 배려하는 고바야시 선생님은 존경받아야 마땅하나, 이 교육방침의 모든 부분을 본받기에는 무리인 것 같다. 그 이유는 너무나도 이상적인 실존주의 철학은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기초적인 지식습득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짜여진 시간표도 없이 아이들이 원하는 것만 하게끔 한다면 살아가면서 꼭 필요한 것들을 모두 습득하지는 못할 것이다.이에 비해 항존주의는 내용의 원리를 알려주고 아이들 스스로 이해하고 깨닫기를 바란다. 내용중심의 무조건식 암기인 주입식 교육을 반대하며, 그렇다고 해서 조금의 강제도 허락지 않고 아이들에게만 모든 것을 맡겨버리는 자유로운 교육을 찬성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항존주의는 변하지 않는 진리는 존재한다는 의식아래, 내용의 원리를 잘 알려줄 교사중심, 이해중심의 수업이 된다. 반드시 배워야 할 지식을 습득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야 말로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 생각한다.교육의 보편적인 의미는 인간행동의 계획적인 변화라 하였다. 여기에서 인간행동은 지적, 정의적, 신체운동적인 모든 부분을 가리킨다. 이처럼 다방면에서의 인간행동이 골고루 조화롭게 발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바로 전인교육이다. 어느 학교든 대부분의 교사들이 전인교육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진심으로 실천하고자 노력하는 교사들이 몇이나 될까. 다들 직업으로서의 교사라는 명찰을 달고 있다. 또한, 학교를 단순한 직장생활이라 여긴다.앞으로의 미래를 책임질 아이들의 생활터전인 학교.. 교사들은 훈련의 의미가 아닌 교육으로서 아이들을 대해야 한다. 교사는 아이들을 도와줄 뿐 변화시키는 것은 학생 자기 자신으로 그 어느 누구도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