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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리학]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보고...
    ‘물을 아낍시다!’ 우리 집 세면대에 작년부터 붙여져 있던 물 절약 캠페인 문구이다. 물론 이러한 캠페인 문구는 각 가정에서 뿐만 아니라 어느 곳을 가든지 쉽게 찾아 볼 수가 있다.그 종류도 다양해서 ‘자연이 보호하자!’, ‘내가 오염시킨 물 내 아이들이 마신다!’ 등 이루 헤아리기가 힘들다.이러한 문구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자연환경은 이미 우리의 원하는 데로 가져다 쓸 수 있는 한계를 넘어 섰으며, 더 이상 자연에 대한 일방적인 착취는 우리의 미래를 내다보기 어렵게 한다. 이제는 그동안 자연으로부터 받기만 했던 우리들이 나서서 자연을 보호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실정에 놓이게 된 것이다.상황이 이렇게까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아직까지 이러한 자연위기를 절실히 느끼지 못하고 있는 듯 하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이렇듯 무감각한 사람들에게 확실한 경고를 주는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더 이상 이렇게 살다가는 독가스로 폐가 썩어죽을 것이다’라고 말이다. 사실 우리들이 보고 듣는, 자연 보호 캠페인 문구에도 중요한 부분이 빠졌을 뿐 영화의 경고와 다름이 없다. 문구가 우리에게 일깨우려거 하는 것은 ‘자연을 보호하지 않으면 죽는다!’ 일 테니 말이다.영화 속에서는 인간들의 전쟁으로 인해 미래의 지구 환경이 황폐해 졌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천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후 지구는 ‘부해’라는 숲을 이룬 곰팡이와 세균들이 확장하게 됨에 따라 인간의 삶이 위협을 받게 된다. 여기서 특이한 점은 ‘부해’에서 발생하는 유독가스는 오직 인간들에게만 치명적일뿐, 거기서 살아가는 곤충들에게는 아무런 위협이 되진 않는 다는 것이다. 1년 전 개봉한 스티븐 스필버그의 SF영화 ‘우주전쟁’을 보면 비슷한 점을 엿볼 수 있다. 최첨단의 기술을 가진 외계인들에게 인간의 기술과 무기로는 더 이상의 저항이 무의미하게 되어 버렸고, 이제는 조용히 전 인류의 죽음을 지켜 볼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황당하게도 외계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하나둘씩 쓰러지는데, 원인은 원시적인 미생물 때문이었다, 즉 미생물에 대한 면역이 없는 외계인들은 지구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모두 죽음을 맞이하고 만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자연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구를 침략하여 필요한 자원을 모두 고갈 시키려 하는 외계인들에 대한 자연의 응징인 셈이다.‘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서도 인간에 의해 황폐해져버린 자연은 인간을 곧 자연을 파괴하는 존재로 판단하고, 오직 인간에게만 치명적인 독가스를 자연 스스로 발생시킨다. 즉, 오랜 세월을 자연과 함께 공존하는 존재로서, 자연으로부터 선택 받아 삶을 영위해 왔었지만, 자연을 파괴하는 순간 인간은 ‘자연의 선택’으로부터 제외 되고 만 것이다.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인간에게 생명에 치명적으로 작용하는 그 독은, 사실은 인간이 오염시킨 땅속과 물속에서 나온 것이었다. ‘부해’의 식물들은 인간에 의해 중독된 자연을 스스로의 자정 과정을 통해 정화 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독은 그러한 자정 과정에서 발생하는 필수불가결한 것인데, 이렇듯 인간은 스스로 발생시킨 독을 자연으로부터 고스란히 되돌려 받고 있는 셈이다.하지만 인간들은 ‘부해’에서 나오는 독이 자신들의 잘못이 원인임을 깨닫지 못하고, 그러한 독의 발생은 자연이 다시금 깨끗해 지기위한 과정임을 알지 못한다. 그저 ‘부해’를 불태우고 독으로부터 안전해지길 바랄 뿐이다. 그러기 위해 천년 전 지구를 불로 뒤덮여 황폐화 시킨 ‘거신병’이라는 괴물을 차지하기 위해 다시금 전쟁을 일으키고 만다.
    인문/어학| 2006.07.06| 2페이지| 1,000원| 조회(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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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리학]델마와 루이스를 보고...
    ①‘델마와 루이스’ 이 두인물의 성격은?-델마와 루이스는 서로 조금은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다. 델마는 영화의 시작부에서 알 수 있듯이 자신을 함부로 대하는 권위주의적 남편 때문에 감정을 억 누른 채 살아가는 전 형적인 전업주부이다. 남편에게 그렇게 길들여 져버린 델마는 어떤 결정을 하는 데에 도 남편의 허락이 없이는 할 수 없다. 성폭행을 하려던 남자를 죽이고 난 뒤에도 남 편에게 전화를 걸어 의사를 물어 보려고 하는 지극히 의존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어리숙한 행동과 푼수 같은 모습에서 순수함을 느낄 수 있었지만, 영화 후반부로 갈수 록 억눌린 감정을 분출 시키고 어느 남자 못지않은 여자 갱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델 마가 루이스와의 여정을 통해서 주체적인 성격을 지닌 여자로 바뀌게 되는 것을 말해준 다.이와는 달리 루이스는 주관이 뚜렷하고 매사에 당당하며, 독신으로 살아가면서 남자들을 항상 경계하는 페미니즘적 사고를 지닌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루이스의 남성에 대한 비 판적인 시각은 델마를 성폭행 하려던 남자를 총으로 죽이는 장면에서 이미 예상을 했었지 만, 후반부에 그들의 대화를 통해 그 이유를 짐작할 수가 있었다. 루이스는 과거에 어떤 남자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던 경험이 있었고, 그로인해 남자들에게 불만을 품은 채 살아가 게 된 것이다. 영화 속에서 실제로 그를 사랑하는 사람이 등장하는데, 루이스 역시 그 남 자를 사랑하지만 굳이 살인은 저지른 채 도주해야 만 하는 그녀의 상황 때문만이 아니라 그러한 루이스의 성격 때문에 그 남자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영화 초반에 상반된 성격으로 묘사되던 델마와 루이스는 영화 후반으로 갈수록 서로 성 격이 역전 되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살인을 한 사실 때문에 괴로워하던 델마를 다독거 리고 도주계획을 세워 강한 여자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던 루이스는 돈을 잃게 되고 경찰들 의 수사망이 점점 좁혀 지게 되자 불안해하고 속으로 자수를 생각하기도 하는 등, 전형적 인 연약한 여성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델마는 처음의 모습과는 달리 돈을 구하기 위 해 강도짓을 하기도 하고, 경찰을 총으로 위협하는 등 강한 여성으로서 변화하게 됨을 알 수 있다. 그것이 혹, 그들의 내면에 감춰져 있는 진정한 그들의 모습이 극한의 상황에 치 닫게 됨으로 인해서 표출된 것은 아닐까? 진정한 델마는 가부장적인 남편 때문에 숨어 있 었던 것이고, 루이스는 연약한 자신을 감추기 위해 그렇게 강해져야만 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② 그들은 왜 마지막에 자살을 선택 하였을까?-살인과 강도라는 중대한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그들의 삶을 예전으로 돌릴 수 없는 것을 알기에 자살이라는 마지막 방법을 선택한 것 일수도 있지만, 일탈을 꿈꾸며 출발한 여행의 과정에서 남자들로 인해 겪게 되는 어려움을 통해 그들은 많은 것을 깨달았고, 다 시 남자들과 함께 어울려 살수 없는 자신들의 모습을 찾았기 때문이 아닐까?그들의 자살은 현실을 도피를 위한 것이라고 비판 할 수도 있으나 그들은 완전한 일탈을 이루기 위해 스스로 자신을 해방시킨 것이라고 생각한다.③ ‘델마와 루이스’를 보고 난후 나의 생각- 남성으로부터 받은 치욕들로 살인까지 저지르게 된 그녀들은 도망치듯 떠나지만 그녀들 의 앞에 다가오는 것은 또 다른 남성들로부터의 피해들이다.이런 것들에서 살펴 본 것들처럼 남성들은 여성보다 상등한 위치에 있고 여성들의 많은 노력들을 받는다. 그러나 그녀들을 가엾게 여긴다거나 아니면 노력을 대가로 무엇인가 를 해주려고 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그러한 생각을 갖고 있지 않음에 대하여 그다지 이상스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그들은 그녀들의 삶의 많은 부분들을 차단하고 빼앗으려 한다. 이 점이 이 영화를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가진 자의 특권이라고 할까. 남성들은 가진 자의 특권을 맘껏 누리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속에 너무 몰입되어 있어서 그것이 방종으로 치닫는다는 것조차 느끼지 못한다는 것 이다. 한 쪽의 방종으로 다른 한 쪽이 막다른 골목으로 몰리고 결국에는 그 곳에서 모 든 걸 포기하게 된다. 그래서 영화 속 그녀들이 택하는 마지막 수단이 바로 죽음이 되 는 것이다.난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한 것과는 일맥을 같이 하면서도 또 다른 면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이 영화를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보지 않을 경우를 생각해 보았다. 그렇다면 이 영 화는 여성이라는 객체가 아닌 인간이라는 보편성에게 주어진 많은 환경들에 대한 것들을 말할 수 있다. 난 구체적으로 그것을 ‘자아 찾기’라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여성들이 살 아 온 길을 벗어나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것이 자아를 찾는 일을 말하기에는 가장 쉬울 거 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전제를 둔다면 영화에서 말하는 많은 것들이 시대 속에 묻혀서 잊혀지고 있는 많은 여성들의 삶을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이 삶을 살아가 면서 겪는 많은 것들이 된다. 한 인간이 자신의 삶 속에서 ‘그리는 이상’과 ‘겪는 현실’ 사 이에서의 괴리감을 이기지 못하여 혹은 이기기 위하여 택한 방법을 난 죽음이라고 보았다. 그랬기에 한 쪽 면에서의 죽음은 사회라는 현실 속에서 사라져 가는 여성들에 대한 안타까 움을 표하지만 다른 한 쪽에서는 한 인간의 또 다른 삶을 살아가는 방법이고 그럴 때의 그 것은 또 하나의 용기가 된다. 그러나 이 역시 앞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그 표현 수단이 여자라는 데서 문제를 찾을 수 있다.
    독후감/창작| 2006.07.06| 2페이지| 1,000원| 조회(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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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문학]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를 보고... 평가A+최고예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제목에서 풍기는 뉘앙스만으로 짐작해 보았을 때 어느 이름 없는 댄서의 슬픔을 그린 영화가 아닐까하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는 그런 나의 짐작이 전혀 들어맞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탱고는 영화가 끝날 무렵 겨우 한번 볼 수밖에는 없었으니 말이다. 제목에 대한 의문을 제쳐두고라도 영화가 표현하려고 하는 것을 해석하는 데에도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명화는 두 번째 보았을 때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있는 것 일까? 영화를 제차 보고나서야 조금씩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다.영화에 등장하는 주인공 폴은 미국인이지만 아프리카, 일본, 남아메리카 등 세계 여러 나라를 떠돌며 다양한 직업을 가졌던 자유분방한 사람이었다. 한 장소에서 한 가지 직업만을 가지고 평생을 살아가는 일반적인 사람과는 다른 방랑객과 같은 사람이다. 그런 그가 파리에서 부인을 만나 결혼까지 하고 정착하게 된 데에는 어떤 이유에서일까? 그것은 부인을 만나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는 부인을 너무나 사랑했다. 그동안 그가 추구해오던 삶의 스타일을 모조리 바꾸고서라도 파리에 정착해서 살아가는 걸 택할 충분한 이유이다.영화에서 보여주는 주인공 폴의 눈물과 분노는 그토록 사랑한 부인이 다른 남자와 정을 통하고, 자살까지 하게 된 것에 대한 반응이다. 폴이 여주인공 잔느 에게 행하는 변태적 성행위와 폭력적인 면 역시 자신을 버리고 자살을 택한 부인에 대한 분노이며 그리움의 표출이다.그러한 폴의 성향은 비단 부인의 죽음 때문에만 기인 한 것은 아니라고 보여 진다. 영화 중반부에서 폴이 말해주었듯이 그는 억압적이고 어머니에게 폭력을 일삼는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그런 가정환경 탓에 집을 떠나 떠도는 생활을 좋아하게 됐을 런지도 모르는 거지만, 그 역시 아버지의 폭력적인 면을 많이 닮아버렸기 때문에 그러한 성향을 지니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사랑했던 부인의 죽음 뒤에 우연히 만나게 된 젊은 여주인공 잔느. 폴은 자신의 잠재된 성적욕망과 분노를 잔느에게 그대로 쏟아낸다. 그녀의 이름과 과거 따위는 알 필요가 없다. 그는 오로지 끊임없이 탐닉하고 가슴깊이 쌓여있던 분노를 내지를 상대가 필요하기 때문에.서로의 이름과 과거, 생각을 공유하는 순간 둘은 서로에게 의미를 부여하고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폴은 또다시 배신당하고 상처받게 될 여지를 남기지 않기 위해 그녀를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폴에게 있어 잔느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그렇다면 잔느는 처음만나 이름도 모르는 사람에게 끌리게 되고, 자신을 몸까지 허락하게 된 데에는 어떠한 이유가 있을까? 그것은 어린시절 그녀의 영웅이자 우상인 아버지의 모습이 폴에게서 비춰졌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20살이 꽃다운 나이에 자신을 사랑해주는 약혼자까지 있는 그녀지만, 마음속에는 어리시절 여읜 아버지를 항상 동경하고 그리워하고 있다. 그런 그녀 앞에 나타난 폴에게서 아버지에 대한 향수, 아버지의 푸근한 모습을 기대했던 것이다. 하지만 폴은 그녀가 원하는 것을 주지 못한다. 자신의 목적만 이루려고 할뿐. 그것을 느끼면서도 잔느는 계속해서 폴에게 집착하고, 억지스럽게 사랑을 하려고 한다.영화가 종반에 다다를 때, 폴은 점차 잔느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자신의 얘기를 꺼내다. 그에 반해 잔느는 그에 파행적인 태도와 폭력적인 성향에 지쳐서 더 이상 그를 만나는 것을 원치 않게 된다. 서로의 그러한 대립된 감정에 의해 결국 폴은 잔느가 쏜 총탄에 죽음을 맞게 된 것이다.‘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는 처음만나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서로를 알기위한 뻔한 대화 같은 건 등장 하지 않는다. 영화는 욕망을 드러내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이성의 상자 안에 가두어두는 것을 영화는 용납하지 않는다. 폴과 잔느의 파격적이고 격정적인 정사에서 이성에 짓눌려 있던 감정을 충실히 보여주고 있다. 처음만난 남녀의 섹스... 변태적인 성행위... 형식과 틀에 사로잡혀있던 구조주의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의 강력한 도전인 것이다.
    독후감/창작| 2006.07.06| 2페이지| 1,000원| 조회(3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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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리학]`에린 브로코비치`를 보고...
    영화 ‘에린 브로코비치’는 굉장히 재밌고 감동적인 영화중 하나로, 이미 여러 차례 봤던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TV에서 재방송이라도 하면 다시 눈이 가게끔 만드는 영화이다. 꼬일대로 꼬인 인생의 밑바닥까지 경험한 여자주인공 에린이, 대기업과의 소송을 극적으로 승리 함으로써 인생역적은 이룬다는 어쩌면 뻔해 보이는 영화 스토리지만, 정말 가슴 벅찬 마음으로 눈물이 나오게 만드는 몇 안 되는 작품이라는 생각한다.그러나 이런 단순한 스토리를 가지고도 수많은 영화 중에서 손꼽히는 감동적인 영화로 기억 될 수 있었던 이유를 이번 과제를 통해서야 겨우 조금 알 수 있게 되었다.먼저 이번 레포트의 키워드인 ‘정의윤리 vs 배려윤리’를 알아보면서, 이는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남성 주의적 도덕관과 여성 주의적 도덕관으로 대변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정의나 합리성, 공정성 등과 같은 개념들이 남성위주의 가치체제로, 이와는 달리 배려와 책임을 토대로 한 가치체제가 여성위주의 것으로 속하게 된 이유는 사회?문화적 특성에 의한 것으로 특히 가부장적인 제도의 영향이 가장 크다고 하겠다.이러한 전통적 성가치관은 현재의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특별히 어느 교과목의 구분할 것 없이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전통적 성역할의 차이에 의한 묘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교과서에 등장하는 위인이나 역사적 인물의 대부분이 남자일 뿐만 아니라 등장인물도 남자가 압도적으로 많고 그 역할도 다양하다. 반면에 여자의 경우에는 그 수가 적게 표현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대표적으로 묘사된 성격도 전통적 성격으로 정형화되어 나타나고 있다. 여성의 성격은 독립적이기보다는 의존적이고, 지적이고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정적이고 사랑이 많으며, 공격적이고 능동적이기보다는 순종적이고 수동적이다.어머니는 주부로서 가정을 지키고, 아버지는 가장으로서 사회인이고 직업인이다. 남자는 주도적, 적극적이고 여자는 소극적, 감상적으로 묘사된다. 성역할 의식이 자리 잡아 가는 시기인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주어지는 교과서에 여자인 어머니는 주부이고 가정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시사하고 맞벌이 가정에서도 가사노동을 전적으로 어머니에게만 전담시킨다.영화에서도 에린이 비록 개인주의적 특성이 강한 미국의 여성이기는 하나, 2번의 이혼을 겪었음에도 세명의 아이들을 혼자서 어렵게 키울 수밖에 없는 것은, 여성으로서 강요되는 어머니로서의 역할이 우리나라의 그것과 비슷하기 때문이다.배려윤리는 가정에서 여성의 역할, 모성적 배려에 둠으로써 배려 윤리를 여성적 특성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렇듯 교육에 의해서, 그리고 그뿐만 아니라 가정?사회에서 규정짓는 남녀의 성역할의 의식 때문에 여성들이 그런 특성을 갖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이러한 이유로 많은 윤리학자들은 기존의 학교교육은 배려윤리와 정의윤리 골고루 발달시킬 수 있는 기회를 거의 제공해주지 못했다고 비판하였다. 따라서 남녀 모두에게 정의와 배려의 도덕성이 함께 요청되기 때문에 학교교육을 통해서 정의와 배려의 도덕성을 함께 균형적으로 발달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배려윤리와 정의윤리는 상호 배타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상호 의존적이고 보완적인 것으로 상대편 윤리를 통해서만 이론적 한계를 보완할 수 있다고 한다.에린은 2번의 이혼 뒤에 남편들에게 물려받은 거라고는 엄청난 액수의 빛이었으며, 또한 자신이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재판이라는 정의의 심판 앞에 좌절할 수밖에 없는 상황, 그에게는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치러야할 세금과도 같은 고난을 전통적 여성의 절대 계율과도 같은 배려윤리에 충실하면서도 남자의 성역인 정의윤리에 뛰어들어 헤쳐 나가려 한다.
    인문/어학| 2006.07.03| 2페이지| 1,000원| 조회(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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