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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랑세기의 진실
    ◈ 화랑세기(花郞世紀) 필사본(筆寫本)의 진실(眞實)Ⅰ. 화랑세기 필사본의 발견1989년 2월16일 부산에서 ‘화랑세기’ 필사본(축소본)이 공개되었다. 32쪽짜리 이 필사본이 만약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언급된 김대문의 ‘화랑세기’가 맞다면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사서인 ‘삼국사기’보다 무려 460여년이나 이른 기록이다. 더욱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三國遺事)’가 고려인이 쓴 삼국시대 이야기라면 ‘화랑세기’는 신라인이 쓴 신라 이야기였으니 한국 고대사학계가 흥분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 이후 1995년에 원소장자의 장서 속에서 또 하나의 필사본 가 존재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이 두 종류의 필사본을 대조해 본 결과,1995년에 확인, 공개된 는 이른바 모본(母本)이고 1989년의 그것은 이를 요약한 발췌본(拔萃本)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필사본은 남당 박창화(1889~1962)가 1933년 일본 궁내성 도서료 촉탁직으로 일할 때 필사(筆寫)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사료는 비록 필사본이지만 내용 면에서 ‘국보급’이라는 평가를 받았다.Ⅱ. 논쟁의 시작과 전개과정박창화는(1889~1962) 일본 궁내성 도서료(현 서릉부)에서 한국 관련문헌자료 담당 촉탁사서로 있을 당시 필사했다는 「화랑세기」는 김대문이 지은 「화랑세기」 원본을 베낀 것일까, 아니면 박창화가 다른 책들을 참고로 해 창작한 것일까? 89년 본지에 의해 처음 세상에 나온 발췌본(拔萃本) 「화랑세기」는 한국 고대사학계에 이 책의 사료 적 가치를 둘러싼 논쟁을 불러왔고 95년 필사본 「화랑세기」가 다시 알려짐으로써 한국고대사학계는 본격적인 논쟁에 돌입했다. 지금은 국문학계까지 가세해 논란이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89년 이후 지금까지 「화랑세기」관련 논문은 모두 50여 편이나 된다. 어떤 학자는 이런 현상을 두고 『「화랑세기」가 마치 한국고대사 연구의 백가쟁명(百家爭鳴)을 불러일으킨 느낌을 받았을 정도라고 밝히고 있다.「화랑세기」가 위작(僞作)이라고 주장하는 대표 학자는 노태돈 교수(서울대 국사학과)는, 진본(眞本)의 필사본이 맞다고 주장하는 선두주자는 이종욱 교수(서강대 사학과). 그 전까지는 조심스럽게 논쟁이 진행됐으나 두 사람이 본격적으로 논쟁의 시작은 1995년 역사학회세미나에서였다. 이종욱 교수가 이 해 4월 제325회 세미나에서 발췌본 「화랑세기」의 가치를 공식적으로 처음 인정하는 발표를 하자 노태돈교수가 두 달 후 열린 한국고대사연구회 월례발표회에서 이교수의 주장을 반박하며 발췌본과 필사본「화랑세기」는 1930년대 이후 1945년 이전에 박창화에 의해 만들어진 위서로 단정지었던 것. 여기에 여러 학자들이 가세해 진위논쟁을 더욱 열띠게 만들었다.우선 위서를 주장하는 학자들의 견해에서 노태돈교수는 97년 「한국사연구」에 발표한 또 다른 글에서 박창화가 지은「도홍기(桃紅記)」 「홍수동기(紅樹洞記)」 「어을우동기(於乙于同記)」등 한문소설의 주요 모티브가 남녀간의 애정과 성관계이며 박씨의 「화랑세기」도 그런 창작의 하나라고 주장했다. 노태돈은 『박창화의 「화랑세기」가 진본을 필사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박씨가 쓴 다른 책들을 검토하지도 않는 등 학자로서 기본적으로 갖추어야할 자료파악과 실증 문제에 소홀했다』며 『지금의 진위논란이 학문연구에서의 상식과 규칙이 지닌 의미를 한번쯤 되씹어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권덕영교수님은(부산외국어대 사학과) 처음엔 유보적인 입장을 보였으나 최근 나온 최근엔 위서로 보는 견해에 동조(同調)하고 있다. 권덕영 교수님은 박창화가 필사본을 만드는 과정에서 적어도 두 차례 이상 수정(修正)과 가필(加筆), 그리고 삭제(削除)를 가한 흔적이 있으며 이러한 글자가 무려 332자나 된다고 밝혔다. 이기동 교수(동국대 사학과)도 박창화의 「화랑세기」에는 여러 화랑집단의 인적구성의 차이라든가 혹은 기질상의 차이가 상세히 기술된 점에 대해 이처럼 화랑단체를 사회학적 관점에서 기술한다는 사고양식 자체가 이미 근대인의 것이므로 틀림없는 위작이라고 주장했다. 위서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박창화가 필사본 「화랑세기」를 좀 더 신빙성(信憑性) 있게 보이기 위해 불필요한 부분을 빼거나 필요에 따라 글자를 새로 더하거나 고치고 문장의 순서를 바꾸어 발췌본「화랑세기」를 만들었다고 말한다.진본의 필사본임을 주장하는 학자들의 반론은 다음과 같다. 이종욱교수는 위서를 주장하는 쪽은 박창화가 필사본을 만든 후 그것을 기초로 발췌본을 다듬어 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사실은 발췌본이 필사본에 비해 오히려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필사본에는 사다함이 「귀당비장(貴幢裨將)」이 된 것으로 나오고 있으나 발췌본에는 「귀당(貴幢)」이 된 것으로 나오는 등 발췌본의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것이다. 또 위서를 주장하는 학자들이 박창화의 창작품으로 보고 있는 필사본의 향가 「풍랑가」와 「청조가」에 대해서도 이종욱는 박창화가 필사했던 1930~40년대엔 향가연구가 태동단계였으므로 박씨가 현실적으로 창작할 능력이 없었을 것이라는 반론을 폈다. 이종욱 교수는 신라의 사회체제를 현장 중계하듯이 쓴 「화랑세기」를 현재의 관점으로 보아서는 안되며 신라인의 시각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재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객원교수도 이미 89년에 「화랑세기의 사료적 가치-최근 발견된 필사본에 대한 검토」주제의 논문에서 김대문이 아니고는 화랑의 세보(細報)를 이렇게 소상히 기술할 수 없으며 신라사회의 다른 문제도 연구할 수 있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며 발췌본 「화랑세기」의 가치를 주장했다.Ⅲ. 논의(論議)의 쟁점(爭點)1) 전승과정의 불분명화랑세기는 왜 고려시대 삼국사기와 해동고승전 이후 자취를 감췄었나? 어떻게 화랑세기는 수백년 정확히 1145년 김부식의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인용한 후 844년 동안 공백기간 있는 동안 시대상으로는 고려시대에서 조선시대가 지나가는 동안 단 한명도 화랑세기라는 책을 인용했거나 거론하지 않았다가 일제시대에 이르러 박창화란 인물이 등장하고, 또한 궁내청도서관이 등장하면서 갑자기 화랑세기가 등장하게 된 연유는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이 생기게 된다.2) 내용의 문제화랑세기에 등장하는 검도(劍道)라는 용어는 어떻게 해석해야 검도는 한서에 처음 나오긴 하지만 이후 쓰인 적인 없다. 게다가 이 검도라는 용어를 쓰는 나라는 일본에 의해서였다. 그럼 이 검도라는 말이 화랑세기에만 나오는 특출난 이유에 대해 의구심이 든다. 이 밖에도 부계, 궁주, 풍월주란 용어가 나오는데 이런 용어들은 고려시대 이후의 용어이다.또한 화랑세기는 부(部)가 나오지 않는다. 울진봉평비, 영월냉수리비, 남산비.등등 많은 신라 금석문에서 보이는 부가 왜 단 한건도 보이지 않는 걸까? 신라인의 인명에 붙어나오는 부가 화랑세기에 안나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화랑세기를 보면 치밀하게 계산된 계보(系譜)에 놀라움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이 치밀성에 의해서 연대와 계보가 조작되었을 것으로 본다. 삼국사기, 삼국유사에서 보이는 계보를 이용해서 난해한 부분은 조작해서 넣었을 확률이 너무나 크다.Ⅳ. 논쟁(論爭)에의 참여(參與)1) 용어와 인물필사본 「화랑세기」에서 모계(母系), 부계(父系), 궁주(宮主), 풍월주(風月主) 등 과 같은 용어들은 8세기 이전의 용어가 아니었음을 금석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으며, 또한 화랑세기에 등장하는 인물로서 1차적 사료인 금석문과 대조해보면 서로 어긋나는 부분이 많이 보인다.2 )제도와 사회첫째, 필사본 「화랑세기」에서는 유독 신라시대 왕들을 중국 정통 왕실의 임금을 지칭하는 용어로서, 신라 임금에 대해서 사용했는지에 대한 의문을 가진다. 신라 금석문(金石文)에 의하면 중고기 신라 역시 어느 왕에 대해서도 제(帝)또는 대제(大帝)라 칭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확실한 근거를 제공한다. 중국의 황제 칭호인 제(帝)를 사용했다는 것은 필사본을 쓴 박창화 자신의 중국에 대한 자주적인 역사관의 표출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인문/어학| 2009.02.11| 4페이지| 1,000원| 조회(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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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근현대사
    ♠신해혁명에서 5.4운동까지중국은 1840년부터 몇 차례에 걸친 대외전쟁을 겪었으나 한 번도 상대방을 제압해보지 못하였다. 또한 두 차례의 걸친 혁신운동도 소기의 성과를 달성하지 못한채 실패하게 된다. 이에 따라 민중들은 망국의 위기에 대한 각성을 하기 시작하였으며, 자연히 민족주의도 발흥하게 되었다. 이들은 개혁적이고, 강력한 중앙정부의 출현과 제국주의 축출 그리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반에 걸친 변혁을 기대하였다. 민중이 바라는 변혁은 20세기 맞은 중국대륙의 크고 작은 혼란과 혁명을 가져온다.쇠락해진 청조는 마지막 몸부림으로 기존의 중체서용의 방식에서 전반서화의 발전된 형식의 개혁정책을 추진한다. 기존의 보수적인 배외운동으로는 제국주의 열강을 몰아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중국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선 교육부문에선 과거제를 폐지, 신식학교 설립과 유학생 파견을 통해 인재를 배양하고자 했다. 사회와 경제부문에서는 상공부의 신설, 상회나 회사의 설립을 장려하였으며, 만한가의 통혼을 허가하여 민족이 융합을 꾀하였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일본의 군사체계를 모방하는 군사개혁을 원세개를 중심으로 추진하였다.그러나 정치적인 면에서는 앞의 개혁조치와 상당히 거리가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이 시기에는 청조타도를 주장하는 혁명파 단체들이 속속 출현하였고, 부르주아를 중심으로 하는 입헌파가 등장하게 된다. 입헌파는 정치개혁의 일환으로 대략 1904년부터 1910년까지 대중들은 입헌국회의 개최를 수차에 걸쳐 촉구하였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비록 1911년 4월에 청정부가 새로운 내각제 실시를 발표하였으나, 실제로 만주족이 중심이 되는 황족내각의 전제왕조 형태에 불과했던 것이다.청조의 입헌개혁이 점차 허구성을 드러내자 중국민족의 만청정부에 대한 불만은 높아갔고, 1905년 일본의 동경에서 중국동맹회(국민당의 전신)를 결성하고 청조타도를 외치면 혁명운동을 전개하였다. 혁명의 이념은 민족, 민권, 민생의 삼민주의였다. 이와 함올라갈 수 있다. 1913년 2차 혁명이 진압된 후 서남지방을 제외하고는 남방지역까지 대체로 원세개의 북양계 지배하에 있었다. 북양군벌을 제외한 비북양계군벌은 신해혁명 이후 점차 군벌로 선회한 형태로써 반북양군벌의 기치하에 자기영역이 확대와 유지를 꾀하였고, 손문의 광동정부와 모종의 협력관계를 유지하였다.1916년 북양군벌의 최고지휘권을 가진 원세개의 죽음은 바로 절대권력의 공동화(空洞化)를 초래했고, 군벌의 지방이 분권적 성향은 더욱 커졌으며, 군벌할거체제와 같은 극단적인 형태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각 지역에 웅거한 군벌이 존재하는 가운데 북양군벌은 원세개 사후 미국과 영국을 등에 업은 단기서의 안휘파(환계세력), 일본의 지지를 받은 화중의 풍국자의 직예파(직계세력)와 봉계세력으로 나뉘어져 각각 차례로 북경중앙정부를 차지하였다. 당시 북경정부를 장악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정통성있는 중앙정부로 인정받는 정치적 이점과 열강으로부터 차관 등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북경정부 장악을 둘러싼 군벌간의 투쟁은 안직전쟁, 제1, 2차 직봉전쟁 등 크고 작은 전쟁에서 볼 수 있듯이 매우 치열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로 인해 사회는 극도의 혼란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1928년 장개석의 북벌의 성공으로 북양군벌의 분할 통치는 종식되었으나 서북과 서남지역에서는 웅거형태로 잔여군벌들이 존속하고 있었다.북벌이 완성되기까지 군벌정치는 중국의 정치체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각성의 독립된 재정은 중아재정에 더 이상 기여하지 않았으며, 농업에 대한 경시와 권력분산에 따른 국가영도력 결핍이라는 부정적 영향이 심각하였다. 더욱이 군벌은 제국주의 세력과의 야합을 통해 정치적 후원과 재정적 지원을 받았으며, 민중에 대한 수탈은 중국의 발전을 저해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학술사상? 정치에 대한 비평풍조? 국민들의 정치적 관심도 제고 등은 현대 중국의 새로운 정신 창출에 도움이 되었다.신해혁명으로 공화정이 수립되었으나 원세개의 제제운동이 일어나는 등 공화문화 운동이 지식인 중심의 정신혁명, 윤리혁명, 문화혁명을 통해 신중국을 건설하려고 하였으나, 5.4운동은 학생, 지식인, 노동자 등이 모두 참여한 대중운동의 성격의 의미를 지닌 자주운동이었으며 민주적 정치실현을 목표로 하는 중국 최초의 근대적 의미를 지닌 반제국주의? 반봉건주의(반군벌)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민중을 억압하는 세력이 군벌과 제국주의라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하게 했고, 민중적인 국민혁명의 단행만이 중국을 구할 수 있다는 사상을 갖게 한 사건일 것이다.**5.4운동 이후..중국5.4 운동을 거치면서 중국의 위기를 타파하려는 혁신세력의 공통된 과제는 사회개조로서 처음에는 각양각색의 사회주의를 막연한 이상으로 내걸었다. 차츰 3대논쟁을 거치면서 명확한 의식을 가진 공산주의자 그룹이 나타났으며 이대교를 중심으로 조직한 마르크스주의 연구회는 1917년 러시아 볼세비키 혁명의 성공과 제정러시아가 중국에 대해 보유하던 일체의 권익과 불평등 조약을 포기한다는 1920년 카라한 선언으로 크게 고무되어 있었다. 마르크스주의가 서구문명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제3의 문명으로 인식하였으며, 급격한 변혁을 가질 수 있다는 믿음은 중국공산당 결성의 원동력으로 작용하였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이라는 결과를 얻기까지 공산당은 수많은 시련과 복잡한 상황을 극복해 나갔으며, 그 힘든 과정을 종합적으로 살펴보자.중국공산당은 1920, 21년 국제공산주의 운동을 지도하는 위치에 있던 코민테른은 적극적으로 중국공산당 결성을 종용하였다. 결국 1921년 상해에서 진독수가 총서기로 선출되었고, 노동자의 조직화를 제일의 임무로 하는 당 강령과 결의가 채택되었다. 이로써 지식인 최초의 정당의 성격을 가진 중국공산당이 정식으로 출범하였다.당시 청조를 타도하고 중화민국을 수립하여 제한적이나마 중국을 이끌고 있던 손문은 러시아 혁명이 성공에 감명을 받았고, 5.4 운동의 과정에서 민중이 지닌 거대한 힘을 인식하고 있던 중이다. 그는 1919년 중화혁명당을 중화국민당으로 개원은 대중의 지지기반을 높이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노동운동의 고양은 국민당 내 공산당의 역량과 입지를 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국민당 지도층 내부에 공산당 세력에 대한 심각한 우려를 갖게 하였다.드디어 국민당은 국민당 좌파, 우파로 대립? 충돌하여 국민당 좌파가 공산당과 연합하여 일부 우파를 제거하고 당권을 장악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황포군과학교의 교장인 장개석(쟝제스)는 국민혁명군 총독에 임명되었으며, 1926년 3월 중산함사건을 계기로 군대 내의 공산당 세력을 일소하여 국민당의 실권자로 부상한다. 그는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으로 1926년 7월에 전국에 동원령을 선포하고 북벌전쟁을 개시하였다. 북벌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자 국민당 좌파와 공산당은 1927년 2월 무한으로 정부를 이전하였다. 이는 장개석은 무한정부가 민중운동을 급진적이고 과격하게 추진하자 반공노선으로 선회하는 계기를 주었다. 장개석은 이듬해인1927년 3월에 상해에 입성하여 반공테러를 감행하고 1927년 4월 소위 4.12 쿠테타를 일으켜 상해 노동자에 대해 대학살하였으며, 남경에 국민당정부를 수립하였다. 국민당이 용공정책의 파기를 선언하고 공산당이 무장폭동을 준비하자 국민당좌파는 장개석의 남경국민정부에 합류하게 되었다. 이로써 3년 7개월에 걸친 제1차 국공합작은 결렬되었다.이로써 국민혁명은 좌절되었고, 노농운동은 제자리로 돌아왔으며, 9월에 무한과 남경 두 국민정부는 장개석의 남경국민정부로 통합되어 제국주의와 타협해가며 전국통일을 지향하게 되었다. 패배한 공산당은 중국사회의 최저변인 농촌으로부터 혁명의 기운을 다시 찾게 된다. 여기까지는 공산당 국민당 을 함께 묶어서 서술하였다.(*공산당 부분)제1차 국공합작이 결려되자 공산당 조직은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되었으며 공산당원의 수도 감소하였다. 공산당은 타협적인 노선을 견지했던 진독수를 비판, 구추백을 총서기에 임명하여 노동자? 농민의 무장화와 무장봉기를 추구하는 새로운 당노선이 제시되었고, 남창봉기를 비롯한 무장봉기가 모두 실패로 돌사건을 계기로 중일간에는 약 8년에 걸친 전면전(중일전쟁)이 시작되는 가운데, 1937년 제2차 국공합작이 성립되었으며, 중국의 전 민중이 하나가 되어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게 되었다. 일본군의 전투는 1938년말에 거의 끝나고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며, 이후 윤함구(일본의 점령지구), 해방구(공산당이 지배하는 변두리 지구), 대후방(국민당 지배지구)의 세 가지의 이질적인 지역이 공존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공산당 세력은 게릴라전을 전개하면서 농촌해방구를 건설하였으며, 민중운동을 적극적으로 유도하여 공산당이 국민당의 대안적 정치세력이라는 이미지를 부각시려 하였다. 이러한 공산당의 태도는 국민당 내 불안을 초래하였기 때문에 결국 1941년 1월 환남사변을 계기로 완전히 결별하여 제2차 국공합작도 사실상 붕괴되었다.국공붕괴 이후 공산당은 지배지역인 해방구는 백단대전에서 타격을 받은 일본군의 대대적인 공격으로 위기에 빠지게 되다. 이 위기를 극복한 것이 바로 자력갱생의 생산과 사상을 개조하려는 정풍이 연안공산주의 운동이다. 연안공산주의 운동을 계기로 모택동 사상은 중국공산당의 중심으로 자리잡아, 소련과 코민테른으로부터 독자성을 찾아가는 과정이 되었다. 1945년 드디어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었고, 이와 더불어 중국도 항일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전쟁을 겪으면서 공산당의 세력은 국민당과 정면으로 대적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하게 되었다.세계 대전 이후 공산당과 국민당은 내전을 피하고 평화와 통일을 지향하려 했으나 국민당의 장개석은 공산당에 대한 전면전을 시작하였다. 초반에는 국민당의 우세 속에 진행되었으나, 인민의 지지를 등에 업고 지구전을 펼친 공산당이 결국 국민당군을 궤멸시켰다. 1949년 국민당은 대만으로 철수하였으며, 중국공산당에 의한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사회주의적 개조의 제창 및 후르시초프의 개량주의적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발생한 반우파투쟁 그리고 서구세력을 앞지르기 위해 무리한 생산목표를 지향한 대약진 운동과 다.
    인문/어학| 2009.01.11| 9페이지| 1,500원| 조회(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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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의 생활과 풍습
    1.중국인의 관습과 예절일반적으로 중국인들은 한번 좋은 관계를 갖으면 끝까지 믿고 도와주지만, 반대로 한번 원한을 사게 되면 좀처럼 잊지 않는다고 한다. 중국인들은 한국인과 마찬가지로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에게는 상당히 무뚝뚝하다. 그러나 친구라든가 사업상 알게 된 사람, 다시 말해 계속 만나게 될 사람에 대해서는 매우 예의 바르고 친절하다. 특히 아는 사람을 통해 소개를 받았을 경우에는 무척 호의적이며 상당히 적극적으로 도와주기도 한다. 중국인들도 한국인과 마찬가지로 손님을 환대하는 관습이 있다. 때로는 그것이 지나쳐서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빚을 지기도 한다. 초대를 받아 방문할 때는 혼자 가는 것이 좋다. 사전 양해 없이 상대방이 잘 모르는 사람을 데리고 가면 실례가 될 뿐 아니라 터놓고 이야기하려 들지 않을지도 모른다. 중국인들은 일반적으로 아주 친해지기 전까지는 상대방에게 마음속 깊은 이야기나 개인적인 문제를 털어놓지 않는다. 상대방이 대답하기 부담스러운 질문은 삼가는 것이 좋다.1) 식사예절중국의 음식은 단순한 생명유지를 위한 방편 만이라면, 이를 문화체계의 편입, '음식문화'로 지칭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중국의 요리가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는 것도 단순히 중국요리 자체 때문만은 아니고 음식이 삶의 기초인 만큼 중국요리는 요리 안에 많은 문화전통과 어우러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국에서는 식사하는데 많은 예절들이 있다. 초대받을 경우에는 선물은 짝수로 준비하며, 가급적 벽시계나 탁상시계는 삼가는 것이 좋다. 시계를 뜻하는 종(鍾)의 발음이 끝을 나타내는 종(終)의 발음과 같기 때문이다. 이는 중국에서는 탁상용 시계나 괘종시계가 죽음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선물은 되도록 가벼운 것으로 오래 기억될 수 있는 실용적인 것을 주는 것이 좋으며, 외국화폐나 기념주화도 선물해서는 안된다.중국인들은 손님을 초대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며 초대를 받은 경우는 고급 과일이나 쵸코렛 또는 쿠키 등을 부인에게 선물하면 된다. 음식은 통상 12가지 이상 나오므로 되도록 자신 건배를 외치며 술을 권해 올 때는 다 들이키는 건배의 의미로 중간에 내려놓으면 실례가 되며 술이 약한 사람의 경우 음주 전 양해를 구해놓는 것이 좋다. 중국인 집을 방문했을 때 일반적으로 차를 대접하나 만약 술을 대접하면 주객의 사이가 보통이 아님을 의미한다.4) 차 예절 및 차의 선택과 마시는 법중국은 차 역사는 4천년 이상을 가지며, 어느 공공장소를 가더라도 차잎만 있으면 언제든지 차를 마실 수 있도록 끊는 물이 준비되어 있다. 차의 종류에는 녹차, 홍차, 오룡차, 백차, 화차, 긴압차 등이 있으며 각 지방마다 고유한 차가 있어 지방 특산물로서 즐길 수 있다. 중국의 차문화는 식사시, 회의시를 막론하고 생활 깊숙이 파고 들어 한국인들의 물 마시는 것과 비슷하다. 택시기사들도 보온통 혹은 유리병에 차를 타서 마셔가며 운전할 정도로 차는 중국인에게 하루도 없이는 안돼는 중요한 것이 되고 있다. 특별히 예의를 요하지 않지만 상대방의 잔에 물이 빌 경우 계속 따라주는 것이 예의이다.Ⅰ. 중국 차중국 차의 음용은 신농씨 때부터 시작되어 5000년의 역사를 갖고 있으며 차란 말의 기원은 중국의 복건성 (福建省)발음 Tay 가 말레시아, 이탈리아, 대만 등지의(TE) 독일(THEE), 프랑스(THE), 영국(TEA), 한국(TA)에 영향을 줌. 중국 광동성(廣東省)의 DHAR 월남의(TEA) 이란,일본의 (CHA) 한국의 (차)에 영향을 주었다. 복건성(福建省)과 광동성(廣東省)의 항구를 통하여 세계에 전파되었으며 우리가 차라고 부르는 것은 "Camelia Sinensis"차나무의 어린 잎 제조한 것을 말하며, 칡차, 율무차, 생강차, 인삼차등은 엄밀히 말해서 차라고 할 수 없다. 차의 효능으로는 차는 한잔의 차라고 하지 않으며 차 생활이라 한다. 즉 하루 종일 있을 때마다 마시는 것이다. 차는 다섯 가지 맛이 있으며 쓴맛으로 시작해서 단맛으로 끝난다. 주성분은 비타민 C,B,E,K 등 아미노산 25종 함유 카페인, 프림, 탄닌, 단백질, 탄수화물, 엽록소, 무기질 된다. 음식을 깨끗이 먹어 치우는 것은 "거지와 같다"고해서 좋지 않게 여긴다. 이렇듯 음식을 남기는 습관에도 모두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언제부터인지 우리 한국 음식점에서는 음식을 먹다 남기면 벌금을 부과한다고 엄포를 놓는 모양이다. 그래서 손님을 접대할 때에는 깔끔히 먹는 것이 도리처럼 되었다. 그리고 중국인의 초대를 받았을 때에도 깨끗하게 먹지 못해서 도리어 미안감을 느껴 남은 음식을 싸 가지고 오기도 했었다. 중국인들은 우리의 이런 모습을 어떻게 보았을까? 재가 중국인을 "거지처럼 밥그릇을 들고 먹는다."고 생각한 것처럼 이들로 한국인은 "체면도 모르고 거지처럼 깡그리 먹는다."고 비웃지는 않았을까? 우리가 실용성을 중시하고 중국이 체면을 중시하는 것은 각자 다른 배경에서 형성된 문화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내 문화는 고상하고 네 문화는 저속하다."는 것도 아니다. 내 눈에 들지 않는 것이 중국인에게는 고귀한 그들의 삶의 철학일 수도 있고 그들의 눈에 좋지 않게 보이는 내 문화도 내게는 귀중한 삶의 습관이기 때문이다.☞2.식사와 관련된 풍속☜우리 나라에서의 반찬을 제외한 국과 밥은 개인별로 나누어 상을 차리는 것과는 달리 중국은 일반적으로 회전이 가능한 원탁에 한가지 요리를 한 접시에 모두 담아 판을 돌려 가며 나누어 먹는 것이 외관상 눈에 띄는 습관의 차이 중의 하나다.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할 경우 대개 채소 (쑤차이 : 소채(素菜)와 육고기, 해산물 요리를 조합을 하고 냉채 (량차이 : 凉菜)와 더운음식을 적절히 조정하고 간단히 밥이나 면을 곁들여 주문하면 무난한 편이다. 대개의 경우 기호에 따라 백주나 황주 혹은 콜라 등을 시켜 음료에 대신하거나 그냥 차를 요구할 수도 있다. 중국인들이 식당에서 식사를 할 때는 술을 주문하여 마시는 (혹 여자의 경우는 야자액이나 기타 음료를 마신다) 모습을 흔히 보게 되는데 일반 가정에서 자기들끼리 식사할 때는 술을 거의 마시지 않는다. 단지 외부에서 손님 접대시는 체면(面子)을 위해 술을 마시는 경우가 부분이다. 그러므로 결혼의 초점도 가족 구성원보다는 당사자들에게 집중되어 있다. 혼식 후에 떠나는 신혼여행은 보통 3일 정도로 되어 있다.★전통적 결혼풍속한국 전통적 혼인습관과 같은 것으로 남자 집에서 중매인을 여자집에 보내어 혼담을 꺼낸다. 여자 집에서 마음에 들면 사주팔자를 적어주고 중매인이 남자 집으로 가지고 돌아가서 맞추어 본다. 남녀의 사주팔자, 궁합을 본 뒤 상극되는 점이 없으면 남자 집에서 중매인을 여자 집에 보내어 약혼조건을 상의한다. 중매인을 통해서 약혼 예물을 교환하며 신랑집에서 길일을 택하여 신부집에 알린 후 신랑이 악대, 의장대, 가마를 가지고 가서 신부를 맞아온다. 이같은 전통적 결혼 풍속은 농촌지역에 남아 있을 뿐이다.★현대적 결혼풍습1980년대 들어서 개혁, 개방 이후 부모가 정하는 결혼은 애정 위주의 혼인관으로 발전했다. 연애가 자유로운 도시에서는 직장에서 혼례식을 치러주며, 간략한 주례의식을 거친 다음 신랑 신부 맞절, 양가부모, 손님들에게 인사, 그리고 모두 술만을 들고 축배를 올리는 경주가 있은 다음, 신랑신부가 각 식탁마다 다니면서 경주로 인사한다. 신랑은 양복을 입으며, 신부는 치파오(旗袍) 혹은 서양식 웨딩드레스를 입는다. 신랑측에서 대부분의 살림살이를 장만하고 신부측에서 약간의 살림자금을 보태주어 한국과는 반대이다. 결혼 후 거의 신혼여행 없이 며칠 휴가 동안 신방을 꾸미며 결혼휴가 후 직장으로 돌아올 때 사탕을 직장동료들에게 돌린다.★결혼비용최근 중국에서 급증하는 결혼비용이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결혼비용의 대부분은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가전제품 등 혼수비, 실내장식비와 연회비용이 차지한다. 10만원(한화 1천만원)의 결혼비용을 쓴 신혼부부의 경우 가전제품구입에 3만 1천 5백원, 실내장식에 2만원, 가구구입에 8천원, 연회비 3만원 정도인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상해에서 발행되는 해방일보의 조사자료에 따르면 중국이 개혁, 개방의 길을 걷기 시작한 이래 소비의 관념, 형태, 습관에 큰 변화가 일어났지만 그 중 대표적인제 1 조에는 혼인에 대한 정부의 입장이 명확하게 표현되어 있다. "독단적이고 강제적이며 男尊女卑하고 자녀의 이익을 경시하는 봉건주의 혼인제도를 폐기한다. 남녀 혼인자유, 이룹일처(一夫一妻), 남녀 권리평등의 부녀와 자녀의 합법적인 이익을 보호하는 신민주주의 혼인제도를 실행한다." 이 혼인법을 기초로 1980년 9월 다시 새로운 혼인법을 공포하여 원래의 규정을 강화하고 수정?보완하였으며 결혼 연령은 남자 20세, 여자 18세에서 남자 22세, 여자 20세로 개정하였다. 당대 중국의 청춘 남녀들이 결혼 상대를 선택하는 표준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감정상의 수요를 제외하고 주로 외모?직업?학력?성격?수입?가정을 고려한다. 남자 쪽의 요구는 여자의 외모가 예쁘고 단정한가, 성격이 부드러운가, 사람들을 친근하게 대하는가 등을 중점적으로 보고, 키는 자신보다 작고 나이가 자기보다 적기를 원한다. 여자 쪽의 요구는 남자의 직업이 좋은가, 키가 비교적 큰가, 비교적 높거나 일정한 학력이 있는가, 경제적인 수입이 비교적 많은가, 올바른 사상을 가지고 있는가, 신체가 건강한가, 사업에 대한 성취동기가 강한가 등을 본다. 결혼 형식은 법률혼이며 전통 사회의 의례혼(儀禮婚)과는 달리 법률 수속을 이행하면 된다. 즉 결혼할 남녀 쌍방이 반드시 같이 가서 해당 지역의 담당 부서에서 결혼 등기를 하고 결혼 증서를 받으면 곧 합법적인 부부가 된다. 결혼 증서를 받은 이후에 결혼 의식을 거행하는 데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형식이 있다. 결혼 잔치를 베푼다. 식당이나 집에서 약간의 술자리를 마련하고 친척과 친구 등을 청해서 음식을 먹고 축하 술을 마신다. 연회에서 간단한 결혼 의식이 진행되며 신랑과 신부는 축하 술을 따르고 축하 담배에 불을 붙이며 하객들은 모두 신랑 신부에게 술을 권한다 다과회를 거행한다. 결혼 후에 잔치를 베풀지 않고 단지 친구와 동료들이 한데 모이고 사탕?과일?담배 등을 준비하고 간단한 혼례 의식을 거행한다. 이 형식은 비교적 간단하고 편리하며 절약을 할 수 있어서 일반다.
    인문/어학| 2009.01.11| 14페이지| 2,000원| 조회(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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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적제도
    ■ 호적제도(戶籍制度)Ⅰ. 서론인간의 역사는 곧 어떠한 통제에서 벗어나 더 나은 자유를 갈망하는 곳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에게 주어지는 자유는 무한정하지 못하며, 언제나 통제와 감시의 대상이 되어왔다. 신분에 따라 적용되는 규범이 엄격이 구분되는 조선시대 즉 중세봉건사회에서는 신분에 따른 사회통제 방식의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일반 민중생활을 통제하는 가장 필수적인 법적 장치가 바로 호적제도였다. 생활전반에 걸쳐 없어서는 안 될 규제 장치였다. 이렇듯 인민을 보호하고, 통제하는 구실로 쓰인 호적제의 역사와, 규제방식, 그리고 변천사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Ⅱ. 본론1. 호적의 역사국가에서 인민을 파악하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진 호적은 우리나라에서도 일찍부터 도입되어 작성되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호구 파악 문서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신라촌락문서’이다. 이 문서를 이용하여 신라시기의 사회구조나 경제관계를 밝히는 중요한 자료로 쓰이고 있다. 이 문서는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호구(戶口)와 노비(奴婢), 그리고 우마(牛馬), 상목(桑)木)까지 파악하여 기록한 중국 위나라의 계장(計帳)문서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원래 중국의 호적제의 목적은 토지의 균등한 조절에 의한 균전제의 시행이며, 고려시대에서도 호적 비슷한 문서들 역시 호구와 토지를 동시에 파악한 자료가 있었으나, 실물자료가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구체적인 운영방식은 알 수 없다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에 이르며 국가제도의 정비에 따라 호적제도도 더욱 엄격하게 정비되었다. 고려시기와 조선시기의 호적기재 방식에는 큰 차이가 나타나지 않았으나, 호처(戶妻), 병산(幷産), 모(母), 외조(外祖), 본관(本貫), 등의 기재 방식의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이는 부계와 모계의 양측적 친속관계가 조선시기에 들어와서 부계친을 중심으로 한 친족관계로 호적기재의 형식에서도 바뀌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호구 파악 수준은 조선후기에 이르면 실제 인구의 40% 정도로 매우 불완전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2. 호적제도의 운용호적대장은 국가에서 종합적으로 호구의 현황을 파악한 장부였다. 조선시대 호적대장은 대게 크기가 매우 커서, 규장각에 소장된 현존 최고의 호적대장인 선조대의 산음호적은 가로, 세로의 크기가 무려 91x37㎝ 였으며, 후기로 갈수록 크기의 축소와 함께 제본도 가볍고 편하게 되었다.보통 조선시대 호적대장은 식년마다 작성하고 있으며, 이는 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리라고 생각한다. 즉 신라정적에 3년간 변동한 내용을 추기한 사실에서 우리는 일찍부터 호구의 변화를 3년마다 작성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식년마다 작성된 호적대장은 먼저 읍에 보관되고, 그 외에 2부가 더 등사되어 소관의 감영과 서울의 호조(혹은 한성부)에 보내어졌다. 즉 각 호적대장의 표지에 ‘읍상?영상?경상?이라 쓴 것은 호적대장의 소장처를 말해준다.3. 조선시대 호적 작성 절차우린 과거의 전통 양반가문이나 박물관, 도서관 등에 현재도 많이 남아 있는 호구단자, 준호구, 호패 등은 어떠한 절차를 걸쳐 작성했는가에 대한 생각을 할 수 있다. 조선초기의 호적대장이나 준호구에 대한 자료가 현재 남아있지 않고 있기 때문에 대게 호적자료는 조선후기의 것이다. 이와 같이 고려시대나 조선초기의 준호구가 남아 있지 않은 것은 시기가 오래된 것도 있지만, 준호구를 성큼 해주는 관행이 아직 확립되지 않은 데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호적 발급 절차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백성이 호구단자를 작성하여 자신의 호구를 신고하다. 그러면 각읍에서는 제출된 호구단자가 사실에 맞는가를 확인하여 호구를 호적대장에 등재한 후, 호구수를 확인하고 제출한 호주에게 돌려준다. 그 후 각 읍에서는 호적대장을 3부로 작성하여 호조(또는 한성부), 본도에 올려보내고 한 부는 읍에 남겨 군역차출, 신분확인, 노비추심 밎 소송자료로 이용하였다. 또한 백성이 역시 위와 같은 목적에서 문서르 발급받아 증명할 필요가 있을 때는 호적대장에 근거하여 수령의 관아에서 준호구를 발급해 준다.이와 같은 호적제도는 위에서 말한바와 같이 17세기 이후의 즉 조선후기 이루부터라고 해야 할 것이다.4. 호구 파악의 보조수단조선후기의 호적제가 제대로 정비되는 것은 호적제의 보조적 역할을 한 호패제도와 오가작통제의 정비와 실시에 의하여 가능한 것이었다. 조선전기의 호적제를 뒷받침해주는 보조적 제도로서 국가에서는 인보정장법과 호패법을 들 수 있다. 인보정장법은 두에 오가작통법으로 발전하여 《경국대전》에도 수록되어 있지만, 실제로 조선전기에 오가통제가 실시되지 않았다. 임지왜란을 비롯한 국가적인 사건이나 일이 많았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오가작통제가 시행된 것은 숙종대 이후였다.호패법은 조선전기에 실시된 적은 있으나, 이 제도의 가혹한 인신구속적 성격으로 오래 지속될 수 없었으나, 임란 후 흐트러진 국가기강을 바로 잡고 호구수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하여 광해군대에 호패청을 설치하고 호패제를 실시하려 하였으나, 이 역시 제대로 실시되지 못했다. 호패법이 제대로 시행된 것은 인조대였다. 17세기에 작성된 호적대장의 직역 기재의 정밀성함은 호패법과 오가작통법의 시행으로 가능했다.호패제, 오가작통제 이외에도 국가에서 인민을 파악하고 통제하는 장치로서 실시된 제도로 면리제, 향약 등을 들 수 있다.
    인문/어학| 2007.12.17| 3페이지| 1,000원| 조회(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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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의 식민지정책
    ■ 일제의 식민지 지배정책Ⅰ. 서론*식민지화를 위한 일본의 기초작업Ⅱ. 본론1. 일제의 무단통치와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1) 식민지 무단통치의 강화2) 경제기반의 수탈2. 민족분할 통치와 수탈체제의 강화1) 문화정치의 실상과 민족분열 통치2) 산미증산 계획과 경제수탈의 강화3. 세계공항의 여파에 따른 조선의 병참기지화 정책1) 파쇼적 지배정책으로의 전환2) 수탈방식의 전환4.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1) 총동원 체제와 인적 물적 자원의 수탈강화2) 민족말살정책Ⅲ. 결론*일제의 식민지 정책의 결과와 우리의 자세Ⅰ. 서론동학농민 운동과 갑오개혁이 실패로 끝난 후, 민족운동은 실력양성과 국권회복을 목표로 내걸고 재기했다. 개화파의 흐름을 잇는 사람들은 1896년에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민주주의 이념을 수용한 대중운동. 민중계몽운동에 몰입했다. 한편, 위정척사파 유생들은 을미사변을 계기로 의병투쟁을 일으켜 항일운동을 벌였다. 이런 국내정세와 더불어 국외의 사정은 일본의 노골적인 침략주의적 노선이 더욱 뚜렷해지고 있었다. 삼국간섭을 통해 힘의 열세를 절감한 일본은 제국주의 국가들과 외교적 교섭을 강화해 나갔으며, 의화단 사건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제국주의 국가로부터 ?아시아의 헌병?이라는 칭호를 얻게 된다. 또한 러시아의 적극적인 남하정책을 견제하기 위하여 일본은 1902년 영국과 동맹조약을 맺어 청에서의 영국의 이권을 인정해 주는 대신 한국에서의 일본의 이권을 승인받기에 이르렀다.하지만 일본과 러시아의 의견충돌은 결국 그들 각자의 목적을 관철시키기 위해 전쟁을 일으킨다.(1904년 2월 러일전쟁) 두 나라 사이 전운이 감돌자 대한제국 정부는 국외중립을 선언하지만, 일본은 강제로 한국을 군사적으로 강점한 상태에서 ?한일의정서?을 강압적으로 체결하게 되며, 러일전쟁에서 우세를 점한 일본은 한국에 대한 내정간섭을 구체화하기 위하여 ?제1차 한일협약?(1904년 8월)을 강제적으로 맺는다. 러일전쟁에서 승리로 한국에서의 독점적 위치를 확고히 한 일본은 이토을 한국에 파견하여 본격 배치된 3개 사단의 육군과 영흥만·진해만에 배치된 해군의 통솔권을 장악했다. 또한 조선총독부의 출범 당시 한국에는 일본의 2개 보병사단과 약 4만의 헌병 및 경찰, 2만여의 헌병보조원이 전국 요소에 배치되어 있어 육군대장으로 초대 조선총독이 된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는 이를 발판으로 한국인의 항거를 억누르면서 효과적인 헌병경찰정치를 펴나갔다.이 시기에는 종교를 제외한 한민족의 모든 자주 단체와 언론기관을 폐지하고 헌병과 경찰이 하나가 되어 치안뿐만 아니라 행정까지도 엄격하게 통제했다. 또한 근대 문물제도를 수립한다는 명분과는 달리 실제로는 보안법? 신문지법? 출판법 등을 강화 반포하여, 언론? 출판? 집회? 결사 등 근대적 기본권을 철저히 부정하였다. 1911년에는 조선교육령과 사립학교규칙을 반포하여 민족교육을 약화시키고 식민지 통치의 정당화를 위한 이데올로기 이식과 식민지 통치에 소용되는 도구적 인간의 양성을 꾀하였다. 나아가서 1918년 서당규칙을 제정? 반포하여 서당의 개설은 도지사의 인가를 받도록 하고, 사용 교과서조차 총독부에서 편찬한 것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한말 애국계몽기에 융성했던 사립학교 교육과 전통적인 민족 교육기관인 서당교육은 급격히 쇠퇴하게 되었다. 그 결과 1908년 2천여개의 사립학교가 1919년에는 740개로 급격히 줄게 된다. 여기에 일제는 민족문화와 독립운동에 대하여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였다. 민족문화유산의 파괴는 고분의 발굴과 파괴, 고도서의 분서(焚書) 등으로 까지 나타났다. 그리고 독립운동의 탄압은 의병의 철저한 소탕과 애국계몽운동가의 대량검거 등으로 나타났는데, 그 대표적인 사건이 105인 사건이다.이처럼 식민지 통치가 원활히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일제가 1910년에 제정한 조선귀족령이 큰 역할을 하였다. 일제는 왕족과 이완용을 비롯한 친일귀족과 관료들에게 작위와 은사금을 주어 식민지 통치에 이용했으며, 친일 조선인 관리를 일부 등용하여 식민지 지배의 앞잡이 노릇을 하도록 하였다.2) 경제기반의 수탈19과 견사(絹紗)의 원료인 면화와 누에고치의 생산을 늘리도록 강요하였다. 헌병경찰·면사무소 직원·금융조합 직원 등을 동원하여 이미 심어놓은 작물을 뽑아버리거나 저항하는 농민을 체포·구금하기도 하였다.토지조사다음으로 1910년 식민지화 직후 공포된 회사령은 조선의 상공업을 철저하게 억압하였다. 이 법령에 따라 조선에서 회사를 설립하기 위해서는 총독의 승인을 받아야 했으며, 총독의 명령에 의해 회사를 해산하거나 폐쇄할 수도 있었다. 이것은 일본의 자본 진출이 용이하도록 하기 위한 일제의 의도가 반영되어 있는 것이었다고 하겠다.조선총독부의 이러한 정책으로 영세상공업자와 농민들은 몰락해갔다. 그리하여 한국인들의 반일 독립의식은 더욱 강화되었다. 국내에서는 의병과 애국계몽운동의 세력을 잇는 비밀결사가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꾸준히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한민족이 많이 이주한 만주와 연해주 같은 국외에서는 의병과 애국계몽운동 세력이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여 일본에 대한 장기 항전 태세를 갖추어 나갔다. 이들은 국내 조직과도 연결을 가지면서 국권 회복을 위해 칼날을 갈았다.이러한 1910년대 조선총독부의 무단통치는 3·1운동을 계기로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3·1운동은 무단통치의 한계를 노골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일제로서도 이미 한국의 사회·경제 구조의 식민지적 재편 작업이 완료되었다는 판단이었으므로 더 이상 지속할 필요를 가지지 않았다. 일제는 1919년 8월 사이토[齋藤實] 총독의 부임과 함께 기만적인 문화통치를 표방하기 시작하였으며,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날 때까지 일본의 조선에 대한 식민지정책의 기조가 되었다.2. 민족분할 통치와 수탈체제의 강화1) 문화정치의 실상과 민족분열 통치거족적인 독립의지를 보인 3?1운동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 방식의 전환을 가져오도록 하였으며, 또한 일제는 무단통치를 통하여 조선의 사회? 경제구조를 식민지적으로 재편하는 작업을 일단락 지었기 때문에 더 이상 무단통치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였다. 일본은 거족적인 3.1운동을 군대와 경찰을 쌀을 일본으로 최대한 반출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일본은 제 1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경제성장을 급속하게 이룩하여 자본이 남아도는 반면 심각한 식량부족에 부딪혔다. 식량부족 현상은 일본 전역을 폭동에 휘말리게 하여 주요한 정치? 사회문제를 유발하였다. 그리하여 산미증식계획을 실시하여 증산된 양보다 훨씬 많은 쌀을 일본으로 가져왔으며, 조선총독부는 회사령을 철폐하여 일본 기업이 한국에 쉽게 진출하도록 유인했다. 그 결과 우리 농촌에서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화되어, 대지주는 점점 더 많은 토지를 소유하게 된 반면에 영세농은 손 바닥만한 땅조차도 잃어버리고 살길을 찾아 만주나 일본으로 떠나야 했다.문화통치기의 농업정책에 있어서, 일본 내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중 급속한 자본 축적으로 대량 이농과 도시노동자의 급증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일본은 식량수급 구조에 왜곡현상을 나타나게 되었고 1918년에는 일본 각지에서 쌀의 공급확대를 요구하는 폭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일본 내에서의 쌀 부족현상이 심각해지자 총독부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산미증식계획(産米增殖計劃)을 입안하였다. 자국 내의 식량위기를 한국의 농업 통해 해결하는 한편, 급격히 팽창한 자국의 자본을 한국의 토지·농업부문에 투자함으로써 초과 이윤을 극대화하고자 하였다. 실제로 일본 국내의 쌀값은 1917년 1월에 1석(石)당 17원대였던 것이 1920년 3월에는 동경에서 54원 63전까지 치솟았는데, 제1차 세계대전이 종식되면서 그 해말 26전 31전으로 인하되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높은 가격을 형성하고 있었다.산미증식계획 토지개량과 농사개량에 의해 생산량을 대폭 늘림으로써 일본에 더 많은 쌀을공급하며한국농민의생활도안정시킨다는미명하에추진되었다.그러나제1차(1920-1925)와 제2차(1926-1934)에 걸친 산미증산계획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일제가 본래 의도했던 쌀의 반출은 예정대로 이루어졌다. 이로 인하여 한국인의 식량사정은 악화되었고, 부족한 식량을 만주에서 들여오는 잡곡으로 충당해야 하는 한일 합작자본으로 주로 상업·공업·운수업에 투자가 집중되었다. 이 시기에 공장 노동자들도 이전에 비해 늘어나기는 했으나, 이들은 일제와 자본의 식민지적 초과 이윤 획득을 위해 기아적인 저임금과 장시간의 노동을 강요당하는 처지에 있었다.이러한 경제 사회의 변화는 민족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다. 국내에서는 노동쟁의와 소작쟁의가 자주 일어났고, 이들을 응원하는 사회주의운동도 급속히 퍼져갔다. 민족주의 색채가 강한 전국 각지의 지도급 인사들은 교육 보급을 통한 실력양성운동과 국산품 애용을 표방하는 물산장려운동을 광범위하게 전개했다.3. 세계공항의 여파에 따른 조선의 병참기지화 정책1) 파쇼적 지배정책의 전환1930년대 일제의 식민정책은 1929년에 시작된 세계공황으로 인하여 다시금 변화하게 되었다. 공황으로 농산물가격이 하락하여 미곡증산중심의 식민지 지배정책은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되었으며, 1931년 오타와회담의 결과 세계경제의 블럭화는 일선만(日鮮滿) 경제블럭의 위상을 재조정해야만 하게 되었다. 일본제국주의가 경제공항에 따른 정치? 경제적 위기를 타개화기 위하여 군비증강에 의한 대륙침략을 감행하였으며, 이와 동시에 조선에서의 식민지 지배를 더욱 강화하였다. 그 결과 1931년의 만주사변과 1937년의 중일전쟁을 도발하여 준전시체제에 돌입하였으며, 조선은 정치·경제적으로 일제의 대륙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로 그 위상이 설정되었다.이제 조선은 대일본제국 내에서 단순 농업국으로부터 대륙침략의 병참기지로서의 공업국으로 그 위치가 변화되고 있었으며, 조선의 위상 변화로 인하여 1930년대 들어 한국의 공업화가 급속히 진전되었다. 이와 더불어 한국인들을 용이하게 전쟁에 동원하기 위한 황국신민화정책이 실시되었고 1945년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조선총독부에서는 전시체제 하에서 한국인에 대한 감시와 통제를 강화하는 한편, 정신적으로 한국인을 일본인으로 동화시키려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추진함으로써 침략전쟁의 수행에 대비하고 있었다. 이것은 일제가 기만적인 문화정치를 포되었다.
    인문/어학| 2007.12.17| 11페이지| 1,500원| 조회(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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