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장 선생 글쓰기1단계 : 영화의 내용 600자로 요약하기(600자)간장 선생은 세계 제 2차 대전으로 인해 피폐해져가는 일본의 작은 마을에서 개업의로 일하는 아카기 선생을 칭하는 말이다. 그는 모든 환자들의 병을 간염이라고 진료하는 바람에 간장 선생으로 불리며 마을 사람들의 조롱을 받는다. 그러나 이 영화 속에는 아카기 선생뿐만 아니라 전쟁으로 인해 타락한 모습을 보여주는 주변 인물들이 있다. 알코올에 중독되어 항상 여자의 몸을 탐닉하는 우메모토 스님과 모르핀에 중독된 외과의사 토리우미가 그들이다. 이들은 전쟁으로 인해 몸도 마음도 병들어 버린 모습을 보여준다. 또, 아카기의 곁에 중요한 인물이 있는데, 이 영화 속에서 창녀로 등장하는 소노코이다. 그녀는 아카기의 간호사로 취직해 후에 그를 사랑하게 되어 헌식적인 태도를 보이는 여자로 등장한다. 아들의 죽음으로 인해 간염 연구에 몰두하는 아카기와 그를 돕는 주변 사람들의 모습은 전쟁 속에서 한 줄기 빛이 되지만 군에 의해 그마저 좌절되고, 아카기는 자신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마을 사람들을 진료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사람들을 진료하기 위해 다시 달린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원자폭탄의 구름을 보며 ‘비대해진 간’이라고 칭하는 아카기의 모습으로 영화는 끝을 맺는다.2단계 : 영화의 주제와 관련하여 ‘간염’이 뜻하는 바를 400자로 서술하기영화 속에서 ‘간염’은 중요한 키워드이다. 영화 속에서 아카기 선생이 진료하는 모든 환자에게 간염이라고 진단을 내이기 때문이다. 전시 상황 속에서 전 국민을 동원해야 하는 상황 때문에 군의관들이 간염과 황달에 시달리는 국민들에게 장티푸스라고 진단한다. 위태로운 국가의 운명을 위해 싸워야 할 사람들이 병 때문에 누워서 쉬고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이런 고위층들의 왜곡된 모습은 정신이 간염에 걸린 모습으로 몸에 간염이 걸린 국민들보다 그 상태가 더 심각해 보인다. 즉, 영화 ‘간장선생’ 속의 간염은 군국주의로 찌든 일본 내에서 전쟁을 주도한 지도층과 그로 인해 아무것도 모른 채 피해를 입어야 하는 국민들의 일그러진 일상을 나타내주는 질병인 것이다.3단계 : ‘고래’의 상징에 대한 나의 견해(600자)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섬에 다녀오는 아카기와 소노코의 눈앞에 고래가 나타난다. 기겁하는 아카기 선생과는 달리 소노코는 고래를 잡겠다고 나선다. 그녀의 이런 모습은 영화의 중반부에 아카기 선생에게 고백하며 고래를 잡아주겠다고 할 때부터 예상했던 반응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왜 하필 고래를 잡아주겠다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도 영화 속에 나타나 있다. 소노코의 엄마는 어린 소노코를 안고 소노코의 아버지가 잡아다 준 고래 고기에 대해 이야기하며 황홀한 표정을 짓는다. 소노코는 이 모습을 보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래 고기를 줌으로써 누구보다도 행복한 표정을 짓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었을 것이다. 또한, 영화의 장면 중에서 그 어느 배경보다도 맑고 깨끗한 바다 속에서 헤엄치는 고래의 모습은 전쟁으로 인해 피폐해진 일본 본토의 모습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이며, 순수하고 정화된 세상을 표상한다. 간염에 걸린 사람들 천지인 본토와는 반대로 깨끗한 물속에서 헤엄치는 건강한 고래의 모습은 군국주의에 찌든 인간들의 정화의 필요성과 그것이 가능하리라는 희망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고래를 쫓아 바닷물 속에서 반라의 모습을 보이는 소노코가 그 어느 때보다도 순수해 보이는 것 아닐까?prewriting 과정학교에서 영화를 보지 못한 관계로 집에서 영화를 보면서 인상 깊은 구절이나 장면을 메모하면서 영화를 보았습니다. 또, 영화 속에서 중요 키워드가 되는 간염이 정확히 어떤 병인지 알기 위해서 인터넷에서 조사를 해보았고, 전체적인 영화비평문을 쓸 때에는 이전에 썼던 영화의 줄거리와 간염의 의미, 고래의 의미가 잘 드러나는 방향으로 초점을 맞추어 글을 진행해 나가기로 하였습니다. 또, 시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어 감독이 표현하고자 한 점이 무엇인지에 주목하며 글을 쓰려고 하였습니다.4단계 : 완성된 글군국주의가 양성해 낸 간염, 그 치료의 선구자‘간장 선생’을 보고나서…….경쾌한 음악을 바탕으로 양복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한 노신사가 “타다다닥”소리를 내며 어딘가를 향해 바삐 달려간다. 그 주인공은 마을 사람들의 건강을 책임지는 개업의 ‘아카기 선생’이다. 군의관들의 진단은 항상 오진이라고 주장하면서, “간염이야! 간이 이렇게 부었잖아!”라고 말하는 그에게 마을 사람들은 ‘간장선생’이라며 조롱하지만, ‘개업의는 발이 생명이다. 한 다리가 부러지면 다른 다리로 달리고, 두 다리가 부러지면 손으로 달리고, 죽기 살기로 달리고 또 달리고, 죽을 때까지 달려야 한다.’라는 말을 신념으로 삼고 항상 환자를 향해 달려가는 그의 모습에서 의사로서의 책임감이 느껴진다.그런데 영화 속 질병이 왜 하필 ‘간염’인 것일까? 이는 영화 속의 배경인 전쟁 상황을 통해 해석될 수 있다. 전염된 물이나 환자와의 접촉을 통해 발생하는 전염병인 간염을 치료하는 방법은 아카기 선생이 항상 말하듯이 ‘잘 먹고 푹 쉬는 것’이다. 그러나 전 일본 국민을 동원해야 하는 전시 상황 속에서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은 일본의 병력이고, 어마어마한 수에 해당하는 병력이 간염으로 누워있는 꼴을 국가는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영화를 통해 드러난 고위층의 이러한 생각은 그들이 비록 신체적으로 간염이 걸리지는 않았지만 정신 깊숙이 간염의 싹이 자라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해주었다. 즉, 영화 ‘간장선생’속의 간염은 군국주의로 찌든 일본 내에서 전쟁을 주도한 지도층과 그로 인해 아무것도 모른 채 피해를 입어야 하는 국민들의 일그러진 일상을 나타내주는 질병인 것이다.
창출된 고대사에 대한 담론『만들어진 고대』 - 근대 국민 국가의 동아시아 이야기< 제1부 >고대사에 나타난 국민 국가 이야기 - 일본과 아시아를 가로막는 것사실문제로서 사람은 항상 현대를 통해서만 고대를 이해해 왔던 것이다.…(중략)…사람은 자기 체험으로 고대를 설명하고, 그리고 이렇게 해서 얻어진 고대에 의해 자기 체험을 평가하고 짐작해 왔다. )이 말은 니체가 『우리 문헌학자들 』에서 말한 문헌학의 이율배반에 대한 이야기이다. 니체의 이 말 속에는 우리가 역사를 해석하는 방법이 나타나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고대를 해석함에 있어서, 현재 우리의 시각에서 역사를 이해하고 해석하고자 한다.니체의 이야기는 단군묘 조영을 두고 일본이 곤혹해 하는 모습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먼 과거의 일이며 현재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하기 쉬운 고대에 우리가 실은 깊이 얽매여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고 이때 새삼 뼈저리게 느꼈다.’ )라는 지은이의 이야기는 우리가 광개토대왕 비문이나 발해를 둘러싸고 벌이는 논쟁을 볼 때마다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방금 이야기한 발해를 둘러싼 네 국가(남한, 북한, 일본, 중국) 간의 논쟁에서도 우리는 모든 국가들이 서로 자기 국가에 유리한 방식으로 고대를 해석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1990년 전후의 동아시아의 정세가 이러한 국가들이 고대를 해석하는 방법에 모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동아시아 나라들 사이에는 아직까지도 현재를 과거에 투영하여 과거를 배타적으로 점유하려고 하는 표상을 둘러싼 투쟁이 전개되고 있으며, 자국의 유리성을 독점하기 위해 서로의 주장을 끊임없이 강화해나가고 있는 것이다.그렇다면, 이런 담론이 초래한 부작용은 무엇일까?각각의 국가에서 산출한 이야기는 국민의식의 형성에 커다란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현재 우리의 의식까지도 강하게 구속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대다수의 국가들이 역사를 국가의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 책의 1부에서 논의되는 문제에 해당되는 남한, 북한된 역사를 이용해 국민의 의식을 형성하고, 민족 상호간의 편견을 조장하였다.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는 자해적인 해석이 다른 나라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어버린 것이다. 결국, 현재의 기득권 싸움이 과거 역사를 통해서도 끊임없이 진행되며, 이로 인해 국가 간의 역사 주장에 있어서 상호 배타성은 점점 더 강화되어 가는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것이다.표상으로서의 광개토대왕비문동아시아 네 나라(남한, 북한, 일본, 중국)에서 공통적으로 논의되는 광개토대왕비는 국가들이 자기 국가, 민족의 컨텍스트 속에서 역사를 해석함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예이다. ‘근대 텍스트로서의 광개토왕비문’은 네 나라 모두 자기 국가의 관점에서 역사를 자의적으로 해석해, 이것이 과거 속에서 자국의 이익을 점하기 위한 노력이고 동아시아에서 국민 의식 형성을 위한 담론임을 드러낸다. 그렇기에, 각 국가의 역사가들이 주장하는 해석은 나라마다 너무나도 다르고, 이런 점에서 근대 텍스트로서의 광개토왕비문은 새로운 시각에서 해석되어야 함이 너무나도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다.그렇다면, 각국의 이익에 맞추어 해석된 비문의 내용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기 위해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이 질문에 대한 답은 ‘비문 텍스트의 내부를 들여다본다.’이다. 즉, 근대와 현대의 입장에서 텍스트를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고구려 그 당시 고대의 시각에서 텍스트를 바라보는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광개토왕비문을 해석하면 그 내용은 ‘비문의 독자인 지배 공동체(5부)내부의 상극(相克)과 긴장의 산물’) 이라는 지금까지 네 나라가 주장한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당시 고구려의 현실을 반영한 텍스트라는 것이 드러난다.발해사 연구에서의 국가와 민족 - ‘남북국 시대’론의 검토를 중심으로발해사 연구에 있어서도 위에서 말한 근대적인 역사 해석 방법이 드러난다. 발해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는 국가는 남한, 북한, 일본, 중국의 네 나라에 소련이 포함된 다섯 국가이다. 우선, 일본의 경우 만주 침략 정당화를 뒷받침하기 위해 발해사를 이용하는 로, 중국의 경우에는 발해를 단지 ‘소수 민족이 건립한 하나의 지방 정권’)으로 바라보며, 발해사를 중국사의 일부로 보려는 시각을 드러낸다. 세 번째로, 구소련의 경우에는 중국의 입장과는 반대되게 발해는 그저 단일 민족이 세운 최초의 국가일 뿐이라는 입장을 드러낸다. 발해사 연구에 있어서 이들 세 국가와는 상대적으로 다른 입장을 내보이는 한국사의 경우 ‘남북국 시대’론을 펼치며 발해사를 한국사 속에 편입하려 하고 있다.이런 한국 역사의 흐름에 지은이는 ‘남북국 시대’론에 대해 6가지 이유(첫 째, 건국자의 출자만으로 국가 ?민족의 성격을 논할 수 없음. 둘 째, 피지배자였던 말갈족에게서 주체적 활동이 간파됨. 셋 째, 하나의 글귀에서 고구려와의 연관성을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함. 넷 째, 남북국이라는 것은 단순한 상대적 위치 관계를 나타내는 것임. 다섯 째, 고려가 발해를 동족으로 여긴 징후는 발견되지 않음. 여섯 째, 고구려 문화의 영역을 분석한 부분에서 객관성이 떨어짐.)를 대며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다.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봐야할 점은 “왜 한국이 ‘남북국 시대’론을 주장하느냐.”이다. 그것은 역사 연구가 민족 문제와 연결되는 것과 결부시킬 수 있는데, 한국은 한민족이 단일 민족으로 형성되었다는 절대적 믿음- 시대와 사회의 사상이나 통념이 투영된 믿음- 을 이어나가고자 발해사를 한국사의 일부로 보고자 한 것이다. 결국, 여기에서도 한국의 논리는 현시대의 입장이 반영된 논리인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논리뿐 아니라 발해사를 바라보는 모든 국가가 각 국가의 입장을 반영하여 해석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깨달을 수 있다.발해사를 둘러싼 민족과 국가 - 국민 국가의 경계를 넘어서현재 각국에서 주목하고 있는 발해사 연구는 각국에 속한 연구자의 국가별 문제 의식이 투영되며 저마다 고유의 논점이 제시되고 있다. 발해사에 있어서 현재 국제적인 중심 논점은 발해사를 구성했던 ‘민족의 족속 문제’에 있다. 족속 문제의 시각에서 각 국의 설을 보면 발해사에 대한 견해는 상당한 차이를에 분명한 공통점을 엿볼 수 있는데 그것은 ‘오늘날 각국에서의 민족과 국가에 대한 통념을 암묵리에 분석틀로 삼고 있으며, 나아가 각국이 내포하고 있는 현실적 정치 과제에 맞추어 발해사를 부각 시키려고 한다는 점이다.’) 즉, 중국은 중국 내의 다양한 민족의 통합을 위해, 남북한은 분단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구소련은 다양한 민족 간의 경계의 해소 추진을 위해 ‘발해’라는 고대의 역사를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그렇다면 중심 논점이 되는 ‘민족의 족속 문제’는 어떻게 해석 되고 있을까?이 문제를 해석함에 있어서 지은이는 발해의 민족이 어느 민족으로 이어졌는가 보다도 그저 발해를 구성했던 여러 말갈족을 각각의 ‘민족 집단(ethnic group)')으로 보고 고찰함으로써 그 본질을 알고자 한다. 수령제와 대외 통교를 통해 밝혀낸 발해의 족속 문제는 지배층 내부의 복합성과 피지배층의 민족적인 다원성 )이라는 문제가 있었다는 것인데, 이로 인해 지배층은 피지배층인 말갈족을 포섭해 그들의 이익을 보증하는 방법으로 지배를 유지해 왔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또, 상대적으로 교섭이 없었던 신라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민족 집단 이 큰 영향을 미쳤는데, 신라와의 긴장 관계로 국가 내에서 여러 말갈족을 지배했던 지배층이 당의 붕괴로 상호 긴장성을 잃자 붕괴해버린 것이 민족 집단의 존재를 방증해주는 것이다.동아시아 문화권의 형성일국을 초월한 역사의 관점으로서 ‘동아시아 문화권’의 형성을 주장하는 것은 지금까지 생각해 온 일국사의 틀을 상대화하고 그러한 역사의 관점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동아시아 세계’는 중국사의 전개에 따라 형성되고 변화한다. 그 기점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한 대에 이르러 정비된 정치사상(화이사상과 왕화 사상)과, 군국제라는 통치 형태 출현이 큰 계기가 되었다.) 문화권과 정치권이 일체가 된 완결적 세계를 가리키는 동아시아 세계의 형성은 조금 갑작스럽게 진행되었다는 분위기가 감돈다. 과연 이 속에는 어떤 비밀이 있는 것일까?‘과거에 대한 탐구는 그 과거서야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이 말은 앞에서 말한 이야기와 같은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데, 이 말을 동아시아 문화권의 형성에 비추어 생각해보면 ‘동아시아 세계론’의 유래는 1950년 당시 일본이 직면하고 있던 위기를 직시하려한 데에서 나타난 것, 즉, 그 이론을 만들 당시의 현실에서의 필요성-고립적인 황국 사관을 극복하고 일본사를 세계사에 자리매김하기 위함-때문에 생성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입장에서 ‘니시지마 사다오’가 주장한 동아시아 세계론을 살펴보면 근거에 있어서의 허구성을 발견할 수 있다. 결국, 일국사의 틀을 넘기 위한 방안으로 주장되었던 동아시아 세계론 또한 일본의 현실적인 과제가 투영되었다는 점에서 그저 안일한 태도로 받아들일 수는 없는 이론이 되어버린 것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한 국가의 역사를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특정 지역을 엮어 만든 역사도 한 나라에서 자국의 이익을 위해 임의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이다.근대 국가의 형성과 ‘일본사’에 대한 고찰일본 역사의 형성에 있어서의 특징은 편찬 계기가 일본 내부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서양의 시선에 의해 발생했다는 점이다. 홉스봄(Eric Hobsbawm)이 말했듯이 ‘전혀 새로운 목적을 위하여 낡은 재료를 가지고 참신한 형식의 전통 을 창출하는 것이 지향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좀 더 자세히 들어가 보면 일본사를 정비하는데 있어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외국과의 교섭에 있어서 외관을 정비하는 문제였던 것이다. ‘견구미사절단’의 이와쿠라 도모미가 견당사를 부각시켜 그 당시 불평등 조약을 개정하고자하는 사명감을 투영한 것이나, 프랑스의 오페라에 영향을 받아 ‘노’를 부활시킨 것 모두 서양에 비견할만한 일본 황실의 권위 신장에 관심을 가졌던 일본 내부에서의 욕망의 반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역사 부활의 문제점은 서양의 시선 속에서 생성된 역사이기에 새로이 ‘독자성’을 띄는 것은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일본사는 자기 반복만 이루어지는 근대의 산물인 것이다. 고유의 회화라고
-을 읽고-50가지 예수 모습이라는 책의 제목을 봤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기독교와 현대 사회 시간에 배웠던 예수님의 모습들이었다. 그 당시 교수님께서 수업하신 내용에는 다양한 예수님의 모습이 제시되어 있었는데, 가장 나의 눈길을 끈 것은 바로 과학자들이 다시 복원해낸 예수님의 모습이었다. 그 모습은 항상 성당이나 교회에서, 또는 사진으로만 보던 파란 눈에 금발 머리의 예수님이 아니라 투박하게 생긴 마치 목수와 같은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야 그 동안 봐 온 서양인의 모습을 한 예수님은 서양 사람들이 자신들의 관점에서 만들어 낸 한 형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진짜 예수님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우리가 알 수는 없는 것일까?” 이런 고민을 하던 찰나에 교수님께서는 마지막 과제로 이 책을 읽으라고 하셨다. 한 학기동안 수업을 들으면서 예수님의 모습을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예수님의 모습이 딱히 이런 것이라고 구체적으로 제시할 수는 없었기에, 마침 마지막 과제로 나온 이라는 책은 나에게 예수님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알려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게 하였다.책을 읽으면서, 나는 다양한 모습의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다. 내가 생각하던 예수님의 모습도 있었고, 내가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예수님의 모습도 담겨 있었다. 그러나 이런 구분도 나의 편견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하니, 이 책의 저자가 마지막에 강조했듯이 더 많은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이 책의 저자인 안셀름 그륀이 제시한 50가지의 예수님은 그 모습이 모두 제각각이다. “한 인간이 한평생동안 살면서 과연 이런 다양한 모습을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 모습은 다양한데, 우리에게 친숙한 어진 목자, 부활, 다정다감, 메시아, 예언자, 수난자, 십자가 죄인, 부활자, 구세주 예수의 모습도 있고, 우리에게 친숙하지 않은 일탈자, 분열 조장자, 먹보?술꾼, 야성의 사나이, 광대 예수의 모습도 있다. 내가 읽으면서 가장 공감하고 동의했던 예수님의 모습이 몇 가지 정도 있었는데, 여성의 벗 예수, 가정 문제 상담원 예수, 야성의 사나이 예수, 고독자 예수, 구세주 예수, “나는 나”예수이다.여성의 벗 예수 부분을 읽으면서 크게 공감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 내가 여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놀랐던 부분은 여자가 무시당하던 그 옛날, 예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를 동등하게 생각하고 가르쳤다는 부분이다. 이런 부분은 교회를 다니거나, 수업을 들으면서도 잘 느끼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생각해보면, 성당에서나 교회에서 여자들도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믿고 있다. 그러나 여자들의 이런 모습은 흔히 무시되고 남자들의 역할만 부각되기 마련인데, 오히려 예수님은 그 옛날부터 여자의 지위를 인정했다는데서 오늘날에도 이를 적용시켜 남녀평등을 주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예수님께서 마리아와 우정을 나누셨다는 부분에서도 공감했는데, 남녀가 친구 사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나에게는 이런 면도 이해가 되는 부분이었다. 여성의 벗 예수 부분을 읽으면서 흔히 남성의 역할이 부각되는 교회에서도 이제는 여성의 역할도 그들과 동등한 수준으로 인정 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가정 문제 상담원 예수는 그 제목만큼이나 나에게 새롭게 다가온 예수님의 모습이다. 흔히 예수님을 그저 믿음의 대상, 고마움을 느껴야 할 대상, 우리를 구원해주신 분이라고 생각한 나로서는 이런 모습이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신기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가족과 화목하게 지내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앞부분과 중복해서 나오고 있는데, 교회를 다니지 않는 나로서는 이러한 사실도 처음 접한 것이라 예수님이 좀 더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과 같은 모습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계기가 된 것 같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신기하기도 했지만 많이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있어서 내 머릿속에 남는 것 같다.‘야성의 사나이 예수’는 내가 그동안 생각해왔던 예수님의 이미지와 너무 다른 모습이라 기억에 남는다. 그러나 이 부분을 읽고 나서 여기서 말하는 야성이 동물들에게 적용되는 의미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는 말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예수님의 모습 속에 야성적인 모습이 있었다는 것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상대가 잘못하고 있을 때, 올바른 뜻을 관철시킬 수 있는 모습 또한 우리에겐 필요한 모습이므로, 예수님께서 몸소 실천하셨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살면서 동료가 올바르지 않은 선택을 하거나, 객관적으로 생각했을 때 올바르지 않은 말을 하더라도 상대와의 관계를 고려해 무심코 지나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멀리 내다봤을 때, 이런 태도는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듣기 좋은 말만 하는 사람과는 오랜 친구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진리를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고 싶으셨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야성적인 모습도 드러내셨을 것이고, 이것 또한 예수님 모습의 일부가 되었을 것이다.‘고독자 예수’의 모습은 요즘 내가 많이 생각하는 고독이나 소외와 관련되었기 때문에 나의 시선을 끌었던 것 같다. 예수께서 올리브 산에서 기도를 할 때나 군인들에게 잡혀 가실 때나 그가 항상 혼자였다는 것을 언급하면서, 예수는 외로웠지만 항상 그와 함께하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덕분에 고독을 견뎌낼 수 있었다고 요한 복음사가는 말했다고 한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문득 ‘우리 인간은 모두 고독한 존재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우리 주변에 가족과 친구들이 항상 우리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있지만, 살다보면 문득문득 우리가 너무나도 외로운 존재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럴 때는 그 누구의 손길을 통해서도 내면의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데, 예수님도 내가 느끼는 이런 고독과 외로움을 느끼셨다고 하니 멀게만 느껴졌던 예수님이 나와 같은 고민을 겪는 친구로 느껴지게 되는 순간이었다. 예수님은 인간의 근원적 고독을 항상 내 주변에 계신 하느님의 존재를 깨닫는 것으로 극복하라고 하셨다. 혼자가 아니라는 믿음만으로도 정말 내 상황이 외롭더라도 견뎌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믿음이 있다면 고독이 오히려 하느님과 하나 되는 일체감으로 변모할 수 있다는 글을 보면서 평소에 진지하게 고민해왔던 외로움과 고독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을 찾은 것 같았다.내가 평소 상상해 온 예수님의 모습과 가장 부합하는 모습은 ‘구세주 예수’의 모습이다.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당하셨어도, 자신을 죽게 만든 사람들을 원망하기 보다는 자비와 사랑을 베푸셨던 그런 모습, 우리의 죄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용서하시는 모습이 내가, 그리고 보통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예수님의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가장 감명 깊게 읽고 예수님을 직접 만났다고 생각할 정도로 공감했던 부분은 바로 “나는 나”예수라는 부분이다. 여기서 나타나는 예수님의 모습은 내가 추구하는 모습과도 너무나도 닮았기 때문이다. “나입니다”, “나는 나다”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는 것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자신의 존재를 의식하고, 자신이 스스로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고 사신 분이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시하는 부분이 바로 이런 부분이다. 나의 참된 모습을 찾는 것, 나 자신부터 진정한 나의 모습을 찾는 것, 다른 사람의 잣대로 판단되는 나의 모습에 휘둘리지 않는 것을 중요시하는 나로서는 예수님께서 이런 면모를 가지고 계셨다는 데 대해서 놀라면서도 반가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예수님께서 ‘나의 모습’을 강조하신 것은 책에도 나와 있듯이 하느님께서 개인 한 명, 한 명을 창조하신 의도가 개개인의 내면에 숨겨져 있으므로 ‘나’에 대해 깨달아 하느님이 의도한 고유의 모습대로 살라는 뜻이다. 요즘 들어 부쩍 느끼는 사실이지만, 우리는 내가 생각하는 기준보다는 남들의 시선, 말에 더 영향을 받는 것 같다. 또, 사람들은 점점 더 사람의 내면보다는 겉모습만으로 한 사람을 평가하는 경향이 심해지는 것 같다. 이럴 때, 나부터 나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깨닫고,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존재인 ‘나’의 소중함을 인식한다면 하느님의 의도를 깨닫고, 예수님과 같이 하느님의 영광을 느끼며 살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현대 사회에서 원하는 자신감 있는 모습을 지니는 것도 가능하리라고 본다.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 비추어진 나의 모습에 연연하지 말고 스스로 나 자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다보면 장점도 단점도 모두 보일 것이다. 장점은 더 부각시키고, 단점은 고쳐나가면서 자신의 가치를 재창조한다면 예수님께서 “나는 나”를 강조하신 의도에도 맞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캉디드, 또는 낙관주의’와 ‘허생전’의 풍자를 통한 비교-볼테르의 는 순진한 낙천주의를 풍자한 철학적 콩트이다. 작가는 ‘캉디드’가 성에서 쫓겨난 후 세상을 방랑하며 겪는 난파, 지진, 질병, 약탈, 전쟁, 고문, 폭행, 광신과 종교재판 등 온갖 재해와 불행을 보여주면서 라이프니츠가 주장하는 낙천적 세계관에 대해 조소를 퍼붓는다. 소설에 대해 개괄적으로 설명하자면 이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낙관주의자인 ‘팡글로스’로부터 교육받던 캉디드가 성에서 쫓겨나 세상의 온갖 풍파를 경험하면서 세상이 그다지 낙관적이지만은 않다고 결론을 내리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작가는 낙관주의를 풍자하는 것이다.소설을 읽으면서 소설 곳곳에 낙관주의에 대한 풍자가 다양하게 드러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첫 번째로 제 4장에서 팡글로스가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에 의해 성병이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콜럼버스의 미 대륙 발견에 대해 예찬하는 부분이 있었고, 두 번째로 제 29장에서 캉디드가 사랑하는 퀴네콩드의 몸값을 치르고 그녀를 만나게 되는 부분을 통해 이전의 소설에서 나타난 전통적인 연인의 재회 모습에 대한 비틀기를 하는 장면이 있었다. 세 번째로 제 30장에서 캉디드가 퀴네콩드와 결혼할 마음이 없으면서도 그녀와 결혼하는 모습을 통해 전통적인 소설에서의 감상적 장치에 대한 풍자가 드러난다.외국 소설, 특히 불문학에는 문외한인지라 불문학 소설에도 풍자가 있다는 사실이 새롭게 느껴졌음과 동시에 우리 나라의 많은 풍자 소설과 비교해보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조선시대 우리나라 풍자소설의 대표 작가인 박지원의 소설과 볼테르의 를 비교해보기로 하였다.우선, ‘풍자’란 사전적 의미로 ‘정치적 현실과 세상 풍조, 기타 일반적으로 인간생활의 결함 ·악폐(惡弊) ·불합리 ·우열(愚劣) ·허위 등에 가해지는 기지 넘치는 비판적 또는 조소적(嘲笑的)인 발언.’이라는 의미이다. 쉽게 말하면, 무엇에 빗대어서 재치 있게, 웃음을 통해 한 대상을 비판하는 것이다.그렇다면, 볼테르의 를 우리나라 풍자 소설의 대표격인 박지원의 소설 과 비교해 보겠다. 와 마찬가지로 에서 연암은 허생을 통해 당시의 시대 상황을 풍자하고 있다. 허생전에서 박지원은 대표적으로 두 가지를 비판하고 있는 데 그 첫 번째가 ‘선비의 위상에 대한 풍자’이고, 두 번째가 ‘집권층에 대한 풍자’이다.선비의 위상에 대해 풍자하는 부분은 앞부분에서 허생의 부인이‘밤낮으로 책만 읽으면서 오직 배운 것이라곤 “어떻게 하오”,할뿐이란 말이오. 공장이 노릇도 못하고 장사치 노릇도 못한다면 어찌 도적질도 못한단 말이오.’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다. 이 대목을 통해서 박지원은 선비들이 진정한 학문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입신, 출세와 허식, 그리고 체통을 지키기 위한 학문을 하는 비현실성을 통렬히 풍자하고 있다. 허생이 행한 상행위에서도 이러한 풍자가 여실히 나타나는데, 허생이 매점매석의 방법으로 돈을 불리기 위해 선택한 상품은 과실류와 말총이었다. 이러한 물건은 서민 생활에 필요한 물품이 아니고, 양반들의 일상 생활에서 쓰이는 것으로, 매점매석의 상행위를 통해 풍자하려고 했던 것은 양반사회의 모순점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이러한 풍자를 통해 위선적이며 가식적인 양반의 실상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두 번째로, 집권층에 대한 풍자는 마지막 부분에서 허생이 이완장군에게 호통 치는 장면을 통해 나타난다. 이완장군이 ‘요즘 사대부들은 모두들 삼가 예법을 지키는 판이어서 누가 과감하게 머리를 깎고 되놈의 옷을 입히겠습니까.’라고 하자, 허생은 ‘이놈 소위 사대부라고 뽐내니 어찌 앙큼하지 않느냐 바지저고리는 온통 희게만 하니 이는 실로 상제의 의복이 아닌가. 머리털을 송곳으로 피어 매는 것은 남방 오랑캐의 하는 것과 무엇으로 예법의 차이를 두려 하는가. 이놈 베어 버려야 하겠군.’이라고 말한다. 이는 이완 장군을 통해 아직 현실에 대해 깨닫지 못하고 있는 집권층의 우매와 불합리한 현실을 풍자하는 대목이다. 또, 변 씨에게 빌린 만 냥으로 매점매석해서 십만 냥을 만들고 난 후, ‘만 냥으로 나라를 기울일 수 있으니 이 나라의 얕음을 알만하다.’라고 말하며, 위정자들의 무책임한 정치를 풍자하고 있다.와 , 이 두 작품의 공통점이라면 두 작품 모두 풍자로 인한 비난을 피하기 위해, 볼테르는 랄프 박사의 글을 번역한 것이라고 표기한 것과 박지원은 허생이라는 허구적 인물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또한, 주인공들이 직접 몸으로 체험하면서 풍자하는 것도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다. 캉디드가 성에서 쫓겨나지 않고 팡글로스로부터 낙천주의에 대한 가르침만 받았더라면 낙천주의에 대해 풍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캉디드가 직접 세상에서 몸소 체험한 것을 통해서 낙천주의를 비판하게 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허생도 방에서 공부만 하고 있었다면 세상의 부조리함을 몰랐을 것이나, 직접적인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 양반의 위선과 세상에 대한 풍자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볼테르의 와 박지원의 에는 공통적으로 풍자가 나타나지만, 그 배경과 풍자의 대상이 달라서인지 읽으면서도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볼테르는 낭만주의라는 사상에 대한 풍자이기 때문에 좀 더 근원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그 풍자 방법 역시 직접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은근하게 풍기면서 독자가 찾아내길 바라는 듯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박지원의 허생전에서는 박지원이 살았던 당대에 대한 풍자이기 때문에 허생이라는 인물의 입과 행동을 통해서 직접적으로 신랄하게 풍자한다. 또, 풍자를 하고 난 후의 태도도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낙천주의라는 사상을 비판한 볼테르는 부정적 입장을 취하며 무위(無爲)의 태도로 상황을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을 이겨내려는 개선의 의지를 보이며 실천적 지성인의 면모를 드러낸다. 실제로 그는 왕성한 문예 활동을 통해서 이러한 면모를 드러내며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그러나, 박지원은 그 당시 사회적 상황 때문인지, 자신도 양반층이었기 때문인지 허생전의 마지막 부분을 모호하게 끝맺는다. 허생이 전통적 선비의 모습으로 돌아가며 실학자 선비의 모습을 부정한 채 이완(집권층)과의 대립을 매듭짓지 못한 채 자신의 행위를 스스로 무력화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다가 결국 사라지는 것으로 결말을 내린 것이다. 즉, 은 정치적 체제와 구조에 대한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대안 제시를 하지 못하며 발전적이지 못한 한계점을 드러낸 것이다.
프란츠 카프카의 을 읽고( )계열학번이름평소 독일 문학에 관심이 없던 나는 문학입문 수업을 계기로 카프카의 ‘변신’에 대해 읽게 되었다. 막연히 어려운 내용의 소설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읽기 시작했는데 주인공이 벌레로 변신하는 설정이 그러한 나의 편견을 깨버렸다. 더군다나 현대 사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인간소외’ 라는 문제를 20세기 초의 작가가 주제로 다뤘다는 것도 나를 놀라게 했다.이 소설의 주인공인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갑자기 흉측한 벌레로 변신하게 된다. 집에서 실질적인 가장의 역할을 하던 그가 벌레로 변해버리자 가족들은 그를 멀리하고, 그레고르는 벌레로서의 삶을 영위해 나간다. 집안에서 유일하게 돈을 벌어오던 그레고르는 벌레가 되고 나서야 그 동안의 자신의 희생이 쓸모없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그레고르에게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아버지는 은행 수위로, 어머니는 삯바느질로, 여동생은 판매원으로 일을 해나가며 집안 살림을 꾸려 나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그레고르는 벌레로라도 삶을 지속해 나가고자 노력해보지만 가족들의 냉대와 무시는 날이 갈수록 심해져가고, 집안에 하숙인을 들이면서 그 냉대는 극에 달한다. 하숙인에게 그레고르의 존재를 숨기고자 한 가족들이 그를 방에 감금하자, 고독과 소외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그레고르는 죽게 된다.짧지만 강한 인상을 남기는 이 소설을 읽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만약 내가 지금 상황에서 벌레가 된다면 어떨까?’ 였다. 집안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던 그가 가족들과 의사소통이 단절되는 벌레가 되어버리자 집안에서 아무 의미 없는 존재가 되어버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무관심의 대상이 되어 결국은 죽게 되는 것을 보면서, 인간이 고립되고 소외되는 것은 한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벌레가 된다면 나도 똑같이 친구들에게, 가족들에게 이렇게 소외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상상만 해도 그 모든 일이 두려워졌다. 그러면서, 이 소설 속 주인공의 일이 단지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고민해야 할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신문이나 뉴스를 보면, 소외로 인하여 자살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해서 죽음을 택하는 학생들, 가족들에게 버려져 혼자 살아가다가 죽은 노인들, 회사에서 해고당해서 자살하는 가장들의 이야기는 이제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반적인 일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이렇게 생각해보니 우리 개개인이 모두 벌레가 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벌써 카프카가 생각하는 벌레의 모습을 하고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인간 그 자체로 대우받고 주체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 우리의 능력과 겉모습으로 평가 받고, 도구로 취급받는 일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우리 개개인은 이런 타인의 평가에 너무나도 민감하다는 사실이다.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개개인이 타인에게 노출되는 범위는 늘어나고, 익명성이라는 도구 아래에서 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자유자재로 평가하고 있다. 이 평가는 한 개인의 내면까지 들여다보고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겉모습만 놓고 평가한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한 예로, 몇 년 전에 아름다운 여자 강도의 사진이 인터넷에서 유행을 하면서, 단지 외모만으로 그 여자 강도의 죄를 용서해주어야 한다는 의견이 인터넷에서 문제가 된 적이 있다. 단지 아름답다는 이유만으로 그녀의 죄를 용서해준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에 사람들이 동요한 것을 보면 우리 사회에서 겉모습이 사람을 판단하는데 있어 얼마나 중요한 요인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의 내면을 가꾸기보다는 그저 얼마나 예뻐 보이고, 멋있어 보일까하는 문제로 고민하면서 성형수술을 쉽게 하고, 자신의 학벌이나 나이를 속이기도 하면서 겉으로 보이는 가치를 높이고 있는 것이다.마지막 장면에서 가족들이 마치 그레고르의 죽음을 기다렸다는 듯이 여행을 떠나는 모습에서는 타인뿐만 아니라 한 개인의 든든한 버팀목인 가족마저도 개인을 소외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런 모습은 마치 1998년 우리나라에 불어 닥쳤던 IMF를 떠오르게 한다. 그 당시에 우리나라의 많은 가장들은 평생 몸 바쳐 일했던 직장에서 해고당하고, 무능력한 가장으로서 집안에서도 냉대 받는다. 더 이상 돈을 벌어다 주지 못하는 아버지와 남편이라는 이유로 가족들의 냉대를 받으며 소외감 속에서 자살을 선택했던 많은 가장들의 모습과 그레고르가 마지막에 고독 속에서 몸부림치다 죽음을 선택한 모습이 겹쳐지면서, 현대 사회에서 고독과 소외의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것이지를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