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차원의 인생을 지배하는 4차원의 영성을 읽고우리의 인생은 시공간의 제약아래 사는 3차원의 인생이나 4차원의 영적인 세계가 또 존재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영혼을 가진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3차원의 세계에 있으면서 영적인 세계인 4차원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4차원의 영성으로 모든 환경을 새롭게 변화시켜 3차원의 인생을 지배해야 합니다. 즉 4차원의 세계를 움직이는 네 가지 요소는 생각, 믿음, 꿈, 말인데 이것을 개인의 삶에 적용하여 4차원의 영성을 개발하여 자신의 3차원의 인생을 성공적으로 변화시켜야 하겠습니다.첫째 요소인 생각을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 말씀 묵상을 통해서 하나님과 대화하고 내 생각을 점검 또 성찰, 회개하고서 하나님의 생각을 닮으면 어떤 문제에 직면하든지 부정적으로 드는 생각을 긍정적인 생각으로, 절망을 승리로 바꿀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복 받은 사람이라는 생각의 부요의식을 가지고 부정적 체질을 파악하고 지배해야 합니다.두 번째 요소인 믿음은 4차원의 세계를 통해 3차원을 바꾸는 강력한 힘이다. 성경에도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믿음으로 살아야 하며 믿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목표를 바라보되 있는 것처럼 실체를 바라보고 마음속에 소원을 품은 후 이미 이루어진 현실로 믿고 기도하고 기도의 내용을 발전시켜야 합니다. 우리의 부정적 생각과 두려움의 짐을 하나님께 맡기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아야 하며 일상생활 속에서 성령님을 만나고 말씀을 묵상하는 등 하나님과 동행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세 번째 요소인 꿈이 4차원으로 계획되어 있지 않으면 3차원은 희망이 없다. 하나님께서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성령님을 통해 내 마음을 거룩한 꿈으로 계획하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베풀어 주신 크고 비밀한 일을 소망하며 꿈을 꾸어야 한다. 그리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확신이 올 때까지 열심히 기도하고 말씀을 통해서 점검 하여야 한다. 꿈의 성취를 위하여 꿈이 실제가 되어 나타난 것처럼 행동하고 사전 준비를 철저히 하여야 한다. 항상 희망의 꿈을 유지시켜야 한다.네 번째 요소인 말을 통해 4차원의 특성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 어떤 말을 해야 하는 가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내 입의 말로 네가 사로잡혔다, 죽고 사는 권세가 혀에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성경말씀을 통해 변화 될 수 있도록 해 주셨다. 항상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생각을 말로 풀어 놓고 희망이 말씀을 입술 밖으로 선포해야 한다. 입술로 믿음을 고백하여야 하며 믿음으로 명령해야 한다. 창조적이고 성공적인 말을 해야 한다. 즉 상대방에게 감동과 기쁨 그리고 성공을 불러오는 창조적인 말을 하도록 힘써야 한다. 사랑과 축복이 담긴 말은 사람을 변화시키고 환경을 복되게 한다. 천국 언어인 축복과 사랑의 말을 하면 성령이 그 혀를 통해 기적을 베풀어 주신다.
1.공동체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오늘날 후기 근대 산업화의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공동체’에 대한 관심이나 그러한 요소들이 언급되고 강조되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오늘날의 삶의 정황은 사람들로 하여금 급변하는 사회문화적 환경과 현실이 주지 못하는 진정한 만남과 돌봄, 배려 등에 대한 열망을 갖게 한다. 현대인들은 개인주의적인 삶의 형태에서 야기되는 각종 공허함과 단절감, 소외감, 무기력감을 느끼면서 점점 더 공동체성에 대한 관심과 필요성을 호소하고 있다. 이러한 오늘의 현실은 교회로서는 하나의 위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러한 사람들을 향한 사역에 대한 새로운 도전이면서 기회이기도 하다.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공동체’는 어느 특정한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모임, 또는 공통의 관심사와 특성들, 그리고 사회문화적 요소들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집단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경우에 따라서 공동체는 같은 아파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고, 여러 집들로 구성된 생활 거주 지역을 공동체라 부르기도 한다. 공동체에 대한 심리학적 정의는 위의 지역적, 조직적 모임의 측면 외에 사람들 사이의 상호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심리학자 레이몬드 코르시니의 정의에 의하면, 공동체는 지역적으로 조직된 거주 형태인데, 여기에서 사람들은 서로 대화하며 공통적인 관심사를 나누고 서로의 자원들과 상징을 공유하고 함께 살아가는 관계를 발전시킨다고 한다. 서로 비슷한 관심이나 경험들을 나누고, 서로를 지원하는 친밀한 관계가 있는 사람들의 모임이 공동체인 것이다. 이러한 정의에 속하는 공동체의 한 예가 바로 오늘날 점점 늘어나고 있는 ‘지원 그룹’이다.그런데 현대인들의 미충족된 욕구와 갈망은 이러한 지원그룹만으로는 충족되지 않는다. 삶의 공허와 불안정성, 무의미감은 여전히 그대로 존재하고 있고, 어떤 면에서는 더욱 커지고 있다.
찬송생활의 권능책을 읽으면서 언제나 동일하신 하나님을 느끼게 됩니다. 그때에 은혜와 은총이 지금의 운혜와 은총에 빛깔과 양과 질 모든 것에 있어서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말입니다. 영원전부터 영원까지 계시는 하나님의 변함없으심이 시시때때로 변덕스러운 나에게 안식과 평안이 됩니다.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주 듣는 교훈 중에 하나가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입니다. 감사는 창조주 하나님과 구세주이신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마땅한 태도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하고, 기도할 때마다 감사의 조건을 찾아서 감사하곤 합니다. 하지만 이책을 읽으면서 감사의 전혀 다른 본질을 접하게 됩니다. 그것은 감사할 만한 일이 아니라 도저히 감사할 수 없는 일로 인해 도리어 감사하라는 메시지입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얼토당토한 상황가운데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아래 있음을 믿으며 오히려 감사하는 삶이 얼마나 우리에게 합당한 것인가를 이 책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당장이라도 원망과 불평이 터져 나올 만한 상황에서 어떻게 감사할 수 있으며 그렇게 드리는 감사가 위선이 아니라 어떻게 진실한 신앙의 고백이 될 수 있을까요? 지금 내 눈에는 암담한 현실일지라도 이 상황을 주관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고 이 일도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을 이루어나가는 과정임을 믿을 때 우리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감사하는 것이야말로 믿음의 본질이라고 합니다. 또한 그런 일들을 만난 것을 기회로 삼아 감사하기로 그 의지를 결단하여 실행했을 때 내적인 놀라운 기쁨을 맛본 이들을 책 속에서 만날 수 있었습니다.이 책 안에는 도저히 감사할 수 없는 조건에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안에서 믿음으로 감사할 때 일어난 수많은 기적 같은 이야기들이 들어 있습니다. 그 놀라운 이야기 속에 빠져들면 지금의 나는 나의 신학을 정립하기 위한 학업과정과 인간관계 속에서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마침내 감사치 못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확신하며 지금 당장이라도 하나님께 감사하고 싶은 충동이 불길처럼 일어납니다. 그런 주인공은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나의 삶 속에서도 그런 감사와 기쁨과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고 맛볼 수 있음을 나는 믿습니다.감사에 메마르신 분들이 계신가요? 감사하기에는 너무 가혹한 현실에 망연자실한 분이 계신가요? 감사의 기적을 믿으십시오. 하나님께 감사로 찬송을 올려드리십시오.‘우리의 모든 악조건들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며 이러한 환경을 전적으로 주님께 맡길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 우리 환경을 지배하던 악마의 권세를 깨어 버리시고 하나님 본래의 계획하심에 따라 환경을 변화시키실 것입니다. (출처 : 찬송생활의 권능 p.114)’
그리스도인의 정신건강 계획구축그리스도인의 정신건강 계획 구축에 관해 읽고서 나의 정신건강을 생각해보았다.그리고 나의 정신건강은 어느정도인지 곰곰이 따져보았다. 그중 첫 번째에 나온 정신건강 상태들의 대해 살펴보았다. 낮은 자존감, 우울증, 역기능적인 가정, 자신감의 부족, 내 상황에 대한 부적응의 문제, 중요한 일이나 학업과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정서적으로 힘들게 하는 요소들, 자신의 행동에 장애를 느끼거나 불만을 느끼게 하는 것, 자신을 힘들게 하는 생각들, 그리고 영적인 어려움을 주는 어떤 것들이 무엇인지 나와있었다. 그 중에 낮은 자존감에 대해서 보았다. 나는 나에게 자존감이 낮다고 생각 되지 않는다. 그래도 내게 열정이 부족하긴 하다. 자신의 자존감을 낮게 평가하는 것은 하나님께 잘못하고 있는 것같다.왜냐하면 나는 내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다. 그리고 내 안에 무한한 가능성과 잠재력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내가 이 침례신학대학교에서 상담공부를 하게 하시도록 인도하신 하나님을 느껴보면은 하나님은 나를 쓰시기 위해 이 학교로 보내주신 것이다.그리고 아직 젊은 나이에는 자신이 행하여 나갈 꿈들이 있다. 이런 미래를 생각한다면, 자신의 자존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자존감도 지켜줘야 한다.그 다음 우울증에 대해 보았다. 나는 우울증에대해 들어보았지만 직접 우울증환자를 본적이 없다. 책에서 읽어보니 우울증은 누구에게나 찾아올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우울증은 자살을 만들 수도 있다고도 한다. 나는 내가 우울증이 있었나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역시 나는 우울증이 찾아온적이 한 번도 없다. 다만 우울해진적인 있지만 잠깐이었지 그리 오랜시간동안 우울한 적이없다. 그리고 우리가정은 역기능적이지 않았다. 항상 화목한 가정이었다. 특히, 나랑 내동생은 싸운적도 별로 없다. 그리고 텔레비전에서 보던 조용한 가족들처럼 말이없던 가족이 아니라 항상 대화를 나누는 가정이다. 우리 아버지랑 어머니는 부부싸움도 거의 안하셨다. 나는 이런 가정에서 자라게 된 것이 정말 하나님의 큰 축복같다. 그리고 부모님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된것에 참 기쁨을 느낀다.그리고 자신감의 부족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나는 자신감이 부족했던 적이 많은 거 같다.항상 잘 나서는 동생과 달리 나는 잘 나서지 못했고, 처음해보는 일에 자신감을 갖지 못한 적이 많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일과 잘 할수 있는 일들은 자신감을 가져보았다. 그리고 잘 하지 못해도 할 수있다고 생각하고 도전해 보았다. 내가 자신감이 낮기는 하지만 자신감을 갖기로 노력해보니 점차 자신감이 붙는 것같다. 그래도 아직 잘 망설이거나 잘 나서지 못하는 나의 모습을 버리지 못할 때가 참 많다.내 상황에 대한 부적응을 볼 때 나는 내 상황을 잘 받아들이는 것같다. 그리고 적응을 잘 하는 것같다. 그다음 중요한 일이나 학업,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봤다. 나는 중요한 일은 잘 기억해두거나 적어두어서 해결하였고, 학업은 시험기간 전에 공부하여서 학업을 해결하였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과는 관계를 잘 맺는 편이다. 주변사람들과 깊은 관계는 아니어도 친밀하게 지내는 편이다. 주변사람들에게 만나면은 먼저 인사를 하거나 가벼운 안부를 묻기도 한다. 정서적으로 힘들게 하는 요소는 주변사람들에게서 상처받을 때이다. 특히 어려운 대화를 할 때 조금 힘들다. 그러면 나는 나 혼자만의 취미생활로 금방 정서적으로 회복을 하게 한다. 그 다음으로 자신의 행동에 장애를 느끼거나 불만을 느끼게 하는 것은 나의 느린성격과 우유부단해질 때 그렇게 느낀다. 하지만 별로 힘들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자신을 힘들게 하는 어떤 생각들은 차라리 생각 하지않으면 힘들지 않다. 그리고 힘들게 하는 생각들이 없다. 내게 영적인 어려움을 주는 어떤 것들은 내가 세상것에 빠질 때와 게을러질 때 느낀다. 나는 텔레비전을 보는 걸 좋아하는데 성경보기보다 텔레비전 보기에 더욱 빠져있는 나를 볼때 영적인 어려움이 느껴진다.
속사도 교부니케아공의회에서는 아리우스에 반대하여 하나님의 삼위일체 교리를 선언하였다. 그러나 아리우스의 주장은 유일하신 아버지 하나님만이 완전하시고, 태어나지 않으시고, 영원한 통일체(Monad)이시기 때문에, "독생하신 아들"은 어떤 의미에서든지 그 통일체에서 나온 종속적이고 열등한 존재라는 것이다. 아들, 혹은 로고스의 이 열등함과 종속성은 "아들이 존재하지 않은 때가 있었다"는 아리안주의의 공식으로 잘 표현될 수 있다. 아리우스는 아들을 다른 피조물과 같은 무상한 한 피조물로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아들이 본질적으로 신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없었다. 결과적으로, 로고스는 완전히 하나님도 아니고 완전히 피조물도 아닌 일종의 중간적 존재로 간주되었다. 반아리안주의자는 이 이론은 구원을 반신, 반피조물에게로 돌린다고 믿었다.니케아공의회 신조는, 하나님의 아들은 "아버지와 동일한 본질, 혹은 존재를 가지신(HOMOOUSION)" 분이시며, "참된 하나님으로부터 나신 참된 하나님"이시라고 언명하였다.엄격한 아리우스주의자들은 아들이 아버지와 동일한 본질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에 '동일본질(HOMOOUSION)'이라는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니케아신조에는 "아들이 없었던 때가 있었다"고 말하거나 "영원하신 아들은 피조물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한 저주(anathema)가 붙어 있었다. 아리우스와 두 동료는 니케아 신조에 서명하기를 거부하므로 출교되었고, 황제에 의하여 추방당하였다. 몇 년 후,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들 때문에 아리안주의의 분위기가 되살아났다. 336년에 이르러는 아리우스는 교회와 교회의 정통적인 지도자들과의 친교를 회복하였으며, 아타나시우스(Athanasius)는 추방당하였다. 그러나 아타나시우스는 다시 복권되고 니케아공의회의 삼위일체 교리를 지키기 위해 아리우스를 계속 비판했고, 결국 총 5번의 추방을 당했으나 마침내, 니케아신조를 지켜냈다. 그는 오늘날 니케아공의회의 챔피언으로 불려진다.니케아 공의회에서는 하나님의 존재의 위격적인 구별을 주장하였고, 성부와 성자(그리고 성령->후에 니케아-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가 모두 하나님이라고 고백하였다. 그 이후로 삼위의 구별을 믿는 이가 하나님의 통일성(단일성)에 관한 진리를 무효화하지 않도록 주의하여야만 하였다. 이 회의의 격렬한 논쟁의 논점은 그리스도가 동일 본질(homoousios)인가 아니면 유사본질(homoiousios)인가에 하는 문제에 귀착되었다.그러면 아타나시우스는 성삼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하는가? “성자는 성부 안에 계신다. 성자의 모든 것이 성부의 것인데, 어떻게 이것을 알 수 있는가? 빛의 광채와 샘의 물줄기처럼 성자를 보는 것이 바로 성부를 보는 것이며, 성자의 것이 곧 성부의 것임을 알 수 있다. 성자는 늘 성부 안에 계시고, 성부도 성자 안에 계신다. 광채 속의 태양과, 말씀 안의 성령, 물줄기 안의 샘처럼 사실 성부의 것은 모두 성자의 것이다”(아리우스이단을 반박하는 변론 3,3). 아리우스는 성부께서 세상을 창조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 로고스(성자)를 창조하였다고 하는데, 아타나시우스는 이러한 논리가 하느님께 대한 불경(不敬)이라고 비난한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머리카락, 참새들과 들풀등 작은 것까지 염려하시는 분이신데, 세상창조라는 막중한 일을 직접하시지 않으시고 먼저 창조한 성자를 시켜 창조하게 한다는 것은 그분의 자비와 섭리에 모순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타나시우스는, 성자께서 성부와 “동일한 본성”(homousios) 즉 같은 천주성을 지니신 분이라는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을 강변한다. 또 성자께서 성부와 같은 본성은 아니지만 “비슷한”(homoios) 본성을 지니셨다고 하는 후기 半 아리우스이단의 주장도 배격한다.아타나시우스는 추상적인 사변을 사용하지 않고 기독교 구원의 교리를 근본으로 하여 그의 주장을 펼쳤다. 그의 요지는 하나님과 인간을 결합시킬 수 있으려면 그 중재자는 피조물로는 안되며 반드시 하나님이라야 된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의 교부들은 아들인 하나님의 신성을 천지 창조에 관여하는 측면에서만 설명했는데 아타나시우스는 이것을 인간의 구원과 관련하여 설명하였던 것이다. 그의 합리적인 발언은 회의의 대세를 결정했다. 처음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으나 결국 정통파 쪽으로 기울어지게 되었고 마침내 논쟁은 정통파의 승리로 끝났다.여기서 아리우스와 아타나시우스의 사상을 다시 정리하여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아리우스/ 아타나시우스‘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는 아리우스는 ?유사함?, 아타나시우스는 ?동질임?을 그리고‘아들의 신성’은 아리우스는 ?반신성(半神性)?, 아타나시우스는 ?완전한 하나님?이심을‘아들의 인성’은 아리우스는 ?특별히 주장?, 아타나시우스는 ?완전한 사람?으로 고백했고,‘아들의 창조’에 관하여는 아리우스는 ?무로부터 창조?를 아타나시우스는 ?영원히 낳으심? 을 주장하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