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무용1910년 8월29일 일제의 강압으로 한일합방이 공포되고 일제의 최고 통치기관인 조선총독부가 설치되자 일제는 헌병경찰제도를 실시하여 억압.공포정치를 감행하는 한편, 국가의 모든 제도를 무단통치하기 위한 수단으로 개편 또는 폐쇄시켰다. 이에따라 악원제도와 여악제도가 폐지되고 왕실에 예속되었던 여령과 무동들도 해산시키기에 이르렀다.이렇게 해산된 악인과 여령, 그리고 무동들은 전전하다가 직업을 옮기기도 했으며 일부 사람들은 민간조직단체에 흡수되어 후진양성에 헌신하기도 하고 직접 무대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이들에 의해 왕실에서만 볼수 있던 궁중무용과 민간무용이 일반관중들과 만나게 됨에 따라 민간무용이 점차 모습이 바뀌게 되었으며 한편으론 일본 서구 러시아 발래와 민속무용이 들어왔는데 이서구무용을 신무용이라고 하였다. 이렇듯 식민지 치하에서 들어온 이들 외국무용은 광복이후 현대무용과 외국무용 부분에서 모체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여령정재여령정재는 한일합방전까지는 궁중내에서 연희되어 왔다. 당시도 이들은 궁궐내에 행사를 마친 뒤에는 외부와의 가무활동도 허용되어 자유로이 생활할 수 있었다.그러나 이들의 활동영역은 일부 특수 계층을 위해서 춤추었을 뿐이다.1902년 고종등극 40주년 기념 경축식을 거행하기 위하여 희대라는 극장이 건립되었고 궁내부에서 관할하는 협률사라는 기관에서 기생, 재인, 창우, 무동 등으로 구성시켰다.희대 개관공연 프로에는 관기들의 궁중무용도 들어 있었고 민속무용과 탈춤도 들어 있었다.당시 여기들의 의해 연희된 종류는 아박무, 가인전목단, 항장무, 무산향, 춘앵전, 포구락, 대고무 등이었다. 1902년부터 여령들의 활동이 외부로 알려직 1910년 지방공연까지 하였지만, 1914년 해산되었다.1912년 박승필이 광무대를 건축하여 유일한 구극의 극장을 세웠는데, 주로 고전음악과 광대 줄타기, 기생의 가무, 재담, 검무 등과 춘향전, 심청전, 흥부가, 백상화가 등 구극이 상연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광무대는 구극공연을 위주로 하는 극장이었으나, 공연 종목 중에는 기생의 가무와 검무가 들어있긴 해도 춤의 종류는 분명하지 않앗다. 1930년 화재로 소진될때까지 구극을 계속공연하였다. 이 광무대의 소실을 계기로 궁중정재는 민간으로 파급되었다고 볼수있다. 1910년 이후 관기제도가 폐지되자 사단법인 한국정악원이 창설되었다. 이 단체는 1910년에 발족한 정악연구단체인 조양구락부가 1912년에 조선정악전습소로 개칭되었고, 그 분원으로 여기에게 가무를 교습시키는 여악분원을 두었는데, 이분원이 1914년 새로 발족한 조선기생조합의 모체가 되었으며 정악전습소장 하규일이다. 여기서 전수되고 연희되어진 춤으로는 춘앵전, 무산향, 무고, 검무, 항장무, 포구락, 가인전목단, 남무 헌천화, 사자무, 선유락, 고구려무, 연화대무, 봉래의, 수연장, 오양선 등이었다.1920년대에는 기생조합의 이름이 일본식으로 고쳐져 다동조합이 조선권번으로, 광고조합이 한성권번으로 불려지게 되었으며, 이때 기생들의 예능활동도 점점 위축되어 요릿집의 작은 무대에서 공연되었고, 연기 종목도 승무, 검무, 춘앵전, 사고무, 장생보연지무, 무고 등에 불과했으며, 시간의 제한을 받아 원형 그대로 공연되지 못하고 대부분 감축되고 변질되기에 이르렀다. 한편, 단성사, 조선극장, 우미관 등이 건립됨에 따라 기생들은 온습회란 명목으로 이곳에서 발표회를 열어 일반에게 공개하는 정도였다.11937년 중일전쟁뒤 민족말살정책에 의해 요릿집 등이 폐쇄되고 권번이 해산됨에 따라 무용활동도 막을 내렸다.무동정재무동정재는 1900년 초까지는 궁중에서 여령정재와 함께 연희를 계속하였으나 한일합방을 계기로 궁내에서 활동이 중단되었다가 1923년 순종황제 50주년 탄신일을 맞아 무동정재의 재현을 보게 되었다. 즉, 이왕직아악대에서 축하연주를 준비하기 위해 무동을 선발하였는데, 제1기 아악생 중에서 2인,2기에 9인 아악수에서 2인 등 모두 13인이 선발되었는데 아악수 2명을 제외하고는 연령이14세~17세의 어린 학생들로 용모나 체격이 단정한 자들이 선발되었다. 이때 무용을 지도하 악사로는 김영재, 함화진, 이수경 등이었다. 당시에 전수시킨 정재로는 처용무, 춘앵전, 봉래의, 보상무, 포구락, 향령무, 수연장, 만수무, 무고, 장생보연지무, 연백복지무, 가인전목단 등이었다. 그뒤 1926년 순종황제의 승하와 일본 천황의 서거로 정재학습이 중단되었다가 이듬해에 다시 시작되었으며, 1936년경에는 정재무용이 많이 위축되어 처용무, 향령무, 장생보연지무만이 전수됐다.민속무용민속무용은 1902년에 협률사가 원각사 무대 공연이 효시로 볼 수있다.승무, 농악, 살풀이 등 가면무극이 상연되었는데 공연보다도 명창대회격인 판소리 ,연주회에 곁들여진 것이었다. 그뒤에도 광무대, 단성사와 1922년에 개관된 조선극장 등에서 경기도 명창들의 의해 가야금 병창, 재담, 병신타령, 줄타기 등이 공연되었으며, 무용으로는 승무, 검무, 한량무 등이 공연되었다.당시 주역으로 활약했던 이는 한성준이었다. 1930년에 조선음악무용연구회를 조직하고 춤을 지도하게 됨에 따라 본격적인 무용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듬해 부민관에서 한성준 무용발표회를 가지기도 하였다. 이때 작품으로 승무, 신선무, 검무, 한량무, 살풀이춤 농악무 등이었으며 새로 등장된 바라무, 사공무, 학무 등이 었다. 당시 한성준 밑에서 배출된 무용가로는 이강선, 장홍심, 한영숙, 강선영 등 이들은 1940년경 동경 등 일본의 주요도시에서 순회공연을 하여 한국무용을 소개하기도 하였다.신무용신무용이란 신문물과 함께 외국에서 유입된 서구무용 등을 가리키는 말이나 그 뒤 국내에서 창작된 것까지 포함하여 신무용이라 하였다. 신무용이 우리나라에 처음 선을 보인 것은 1920년 노령 블라디보스톡에 있던 유학생들이 고국을 방문하여 음악과 러시아의 민속무용을 추어 관심을 끌었는데, 이것이 외국의 민속무용이 소개된 최초이다. 이때부터 러시아의 민속무용인 코팍댄스가 유행되어 각종음악무도회에 등장하였으며, 이와 같이 체육댄스와 사교춤 등이 전파되어 유행되기 시작하였다. 그뒤 코팍댄스와 사교춤은 화류계에 침투되어 기생들에게 교습되기 시작했으며, 또 무대에서 출 수 있는 무용으로 레부식의 춤을 작품화해서 교습시키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고급요정, 박람회, 연예무대, 또는 온습회 등에서도 추게 되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1939년대에 가극단 악극단이 생기게 한 근원이 되었다.
러시아발레 볼쇼이발레단(1) 러시아 발레의 역사적 배경러시아는 거의 2세기 반에 걸쳐 몽고 타타르족의 압제와 이웃 나라들과의 대대적인 전투로 인하여 발전이 저해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17세기 중엽 러시아는 경제적?군사적으로 낙후되어 있었기 때문에 급속한 경제적인 발전과 국가 통치 조직의 개선, 그리고 국방력의 강화 등이 요구되는 시대였다. 그러나 17세기 말엽 뾰뜨르 대제가 즉위하면서 러시아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수없이 발달하기 시작하였고 신도시인 뽀뜨로그라드가 건설되었으며 최초의 제조 공장들이 세워졌다. 이리하여 각 지역들 사이에는 경제적인 관계가 맺어져 전 러시아적 시장이 형성되었고, 외국과의 무역도 증대되었다. 이제 러시아는 뾰뜨르 대제 1세에 의하여 전제 군주제가 확립되었던 것으로서 이러한 대개혁은 과감하게 진행되어 갔다. 뾰뜨르 대제는 교회나 궁정의식 같은 형식을 싫어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개혁을 추진하는 데 있어서는 적극적이고 개방적이었다. 그런고로 러시아의 발전을 위해서는 서구화가 긴요하다고 판단하였다. 뾰뜨르 대제는 우선 생활과 풍습을 서구 지향적으로 바꾸어 나갔는데 특히 프랑스 풍의 모방이 강하였다. 사교적인 생활의 변화로 긴 수염과 묵직한 의복에서 해방된 남성들은 댄스 상대자로서 여성을 리드하게 되었는데 바로 이와 같은 사교적인 생활 속에서 러시아 발레가 발생하게 되었다. 따라서 러시아 발레가 무용사에서 거론되는 것은 1717년 바로 표트르 대제 1세 때이며 발레는 서구화 정책의 한 방편으로서 도입하였던 것이다. 러시아에서도 춤은 고대로부터 존속되어 왔지만 과거의 오락 위주의 춤이었던 것이 이제는 중요한 정치 이념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2) 러시아 발레의 발전 과정러시아 발레는 서구화 정책의 하나로서 뾰뜨르 대제 1세에 의하여 도입되었지만 급속한 발전을 보인 것은 안나 이바노브나 로마노프(Anna, Ivanovna Romanov 1693-1740)여황제 이후부터였다. 안나 여황제가 제위에 오르자 1736년 처음으로 위하여 향연을 베풀었다. 그 당시 유럽에서는 프랑스 혁명을 기점으로 낭만주의가 성행하고 있었기 1811년 샤를르 루이 디들로( Charles Luis Didelot1767-1837)의 초빙은 러시아에 가 상륙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여러 사람들에 의해 계속 발전해 가던 발레는 차이콥스키(Peter Ilych Tchalkovsky 1840-1893)와 글라주노프(Alexander Glrazunov 1865-1936)와 같은 위대한 러시아의 작곡가와 제휴함으로써 획기적인 성과를 이룩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때에 비로소 발레공연의 무대 형태가 확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의 러시아에서는 우수한 무용가를 배출시킬 정도는 못되었으므로 막대한 비용을 들여 무용 교사는 프랑스에서, 무용수는 이탈리아에서 대량으로 초빙하였다. 러시아 발레 애호가들은 발레광이란 말이 생길 정도로 발레에 열광하였지만 궁정과 게급층 사람들의 한정된 관객들은 점차 러시아 발레를 폐쇄적으로 만들어 갔다. 이때에 서구 유럽에서는 현대 무용의 기운이 싹트고 있었는데 비해 러시아 발레는 1880-1890년에 걸쳐 유럽의 30여년전의 형식을 그대로 답습하는 구태의연한 것으로 창의성이 결여되었음을 보여 왔다.2. 볼쇼이발레단재정 시대의 발레라면 뾰뜨로그라드의 마린스끼 극장과 모스크바의 볼쇼이 극장을 들 수 있는데 러시아 발레는 이들 극장 속에서 발전한 것으로 오늘날 소비에트 발레의 원줄기로 생각할 수 있다. 마린스끼 극장은 1924년 지도자인 레닌이 암살되면서 키로프(Kirov)로 개명하였다. 그리고 이 발레단은 엄격하고 계획된 지극히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으며 소련 정부의 풍부한 지원과 감독 하에 운영되어 졌다. 1930년대 중반 스탈린 치하에서 소련 예술계가 더욱 강경한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단계로 들어서자 정부는 사회주의적 내용과 민족적 형식을 더울 강조하게 되었다. 볼쇼이 발레는 창립후 오랫동안 마린스키 다음가는 무용단으로 인정되었고 오늘날까지도 볼쇼이와 키로브는 서로 강력한 경쟁 의식을 갖고 장은 1930년에 레닌그라드에서 제 1인자로 손꼽히는 세묘노바와 에르몰라에프를 불러들여 발레진을 강화하는 한편 세묘노프, 체쿠르긴, 모나호프 등 레닌그라드의 교수진을 불러 그 교육 시스템을 도입했다. 그 최초의 성과가 1933년 졸업생인 레페신스카야 였다. 이런 것과 때를 맞춰 소련에서는 작곡자와 안무가 사이에 새로운 발레 창작 기운이 일어났다. 이것은 혁명의 이념과 현실을 그대로 발레화 하려 했던 성급한 시도가 실패한 후였으므로 음악? 미술? 춤의 결합인 발레 예술의 발전과 진화가 쉽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식한 후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련은 다시 뒤돌아서 고전 발레 형식과 역사. 전설. 민화에서 소재를 찾기 시작했다. 과거 여러해 동안에 볼쇼이 발레단의 공연을 관람했던 사람들은 그 안무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이다. 왜냐하면 세계 각국들 사이에서도 1917년 국가적 혁명을 당한 러시아는 예술에 대한 착수에 있어서는 가장 단호하게 보수적인 입장을 지켜 왔기 때문이다. 볼쇼이의 수석 안무자인 유리 그리고로비치의 근래의 한 논편을 보면 “나는 주제 없는 무용 양식이 존재할 수 있고 또 존재해야 한다는 생각은 갖고 있으나 나 자신으로서는 종합적인 연극과, 다시 말해서 춤뿐만 아니라 문학적인 요소가 담긴 발레 극에 흥미가 있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 논편에서 문제점을 발견할 수가 있는데 이 속에서 말한 문학적인 요소란 항상 소련 정책을 옹호하기 위해 사용되어져 왔다는 점이다. 볼쇼이 발레단의 특성을 종합해 보면 첫째, 볼쇼이는 탄탄한 지원과 훈련하에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무용수들이 존재하며 테크닉 면에서 뛰어나다는 점이며, 둘째, 레퍼토리 작성에 있어서 주의 시대에 지나치게 비중을 두었다는 점이다. 셋째로는 최근 안무가 소련 정치관에 도움이 될 수재에만 집중한다는 점이다.3. 볼쇼이발레단의 특성(1) 예술성제 1차. 제 2차 세계대전 기간에 서방세계로부터 발레의 지식을 갖고 소위 [철의 장막]이라고 불리는 곳을 뚫고 진출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물론 포킨이 소련을 짧은 보아도 세계 어느 나라도 따를 수 없는 발레의 강대국임을 알 수가 있다. 소련에서의 젊은 안무가들은 6년동안의 안무 학교를 다녀야 하며 엄한 감독과 관료적인 통제를 극복하여야 한다. 그리고 또한 소련은 현대 무용의 무대와 공산주의가 아닌 나라에서 오는 안무가들을 허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소련이 서구 나라들이 제공하는 예술적인 기회가 미치는 범위를 그들에게 준다면 서구로 무용수를 잃게 되는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소련의 이러한 격리와 통제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보물인 수많은 예술가들이 망명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사실 소련은 그들의 최고의 무용수들을 서방세계에 빼앗기고 있으며 남아 있는 무용수들마저도 위험한 상태라고 볼 수 있다. 러시아 발레가 너무 19세기의 고전주의 발레의 계속적인 재현과 자유로운 주제와 표현이 아닌 정치 선전적인 경향을 볼 수가 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한가지는 소련 무용수들은 아직도 그들의 확고한 교육 시스템과 함께 놀라운 무용수들을 배출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러시아 발레는 무용수들의 기량은 매우 뛰어나지만 안무가나 제작자들은 시대에 뒤떨어져 있음을 볼 수 있다.(2) 이데올로기예술은 크든 적든 간에 공개적인 프로파갠더의 형태로 어느 특정한 파벌이나 폐쇄적인 집단, 정치적인 무리, 사회계층의 이익에 이용되고 있으며, 예술의 프로파갠더의 가치에 대한 발견은 일찍이 인류역사가 시작하면서부터 이루어졌고 그 점이 철저히 이용되었다. 러시아 혁명 이후 레닌이즘이 소비에트의 지배 이데올로기이자 정책으로 간주되기 시작하면서 소련의 정치는 부정적인 요소로 만연하였고 모든 예술까지도 정치적인 규제를 가하였다. 따라서 예술가들은 이데올로기적 변화에 공헌할 것을 요구 받게 되자 발레의 레퍼토리에도 점점 이데올로기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졌고, 발레 무용수들도 훌륭한 기교로써 더욱 더 완전한 숙달을 요구받아 점차 예술의 본질적인 성격은 변모되어 갔다. 이제 당국은 모든 예술 분야뿐만 아니라 발레에 적극적인 간섭을 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공산주의 예술의 이상은 다양하고도 구체적이며 특정한 수많은 인간들의 안목에서 실현된다. 그럼이러한 요구 사항에서 발레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표현되어 지는가? 소비에트 발레는 먼저 아름다움에서 무엇을 만들어 낸다는 단순한 것에 겨냥한다기 보다는 관중으로 하여금 뚜렷한 의미를 확신시킬 수 있도록 감정 묘사를 한다. 그리고 소비에트의 안무가들은 판토마임이라는 형태로부터 빌어 온 레시터티브 -즉, 신체의 유연한 움직임을 통해 노래 부르듯이 춤을 훈련하는 방법- 방식을 자주 사용하고 하는 데 그것은 소비에트 안무가들의 최고의 창조물은 무용과 마임의 화합을 기초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빠드되역시 현저하게 부드럽고 기교적이므로 추상적인 것이 되지 않고 장면이 항상 실제적으로꾸며져 있기 때문에 소비에트 발레는 체육 적이라는 평을 듣기도 한다. 예를 들면 작품은 러시아에서는 논리적으로나 예술적으로 완벽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지만, 서방에서는 전체적인 줄거리에서 심리적인 미묘함이 전혀 고려되어 있지 않은 너무도 단순한 수법으로 전개되어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소련에서의 발레는 어느 정도 그들의 이른바 ,에 대한 태도를 기초로 하여 적합한가 부적합한가를 판정받고 있기도 하다. 당국이 가능한 한 직접적이고 목적이 뚜렷한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보다 더욱 억압적이었던 시기에 당국은 발레의 수용성에 대한 여부를 표시하는 를 가지고 모든 발레를 분류한 적도 있었다. 그 결과 어떤 작품들은 무대에 올리기에 부적합하다는 판정이 내려지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소비에트 발레가 순수하게 예술적인 관점에서만 창조되기가 어렵다는 점을 감안할 때 모든 레퍼토리에는 소련 당국의 정치적인 여과기를 거쳐 나온 것으로 보아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본다면 소비에트 발레는 단순한 선전수단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왜냐하면 사회주의 리얼리스트들은 모든 사람의 생활 속에 적극적으로 들어가 선과 악에 대한 관념 체계를 형성하게끔 하기 때문이다. 발레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 작품에았다.
삼국시대고구려, 백제, 신라가 주변의 크고 작은 부족들을 정복하고 통합하여 전제왕권을 가진 고대국가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한 것이 고구려는 태종왕(53~146) 백제는 고우왕(234~286) 신라는 내물왕(356~402)때 부터였다.삼국시대에는 안으로는 왕권과 귀족세력이 확고하게 자리잡기 시작하고 밖으로는 삼국이 팽팽이 맞서서 전쟁이 끝이 날이 없었고 중국과의 왕래가 잦아 문화가 급속히 발전하던 시기이다. 또 불교가 도입되었고, 고대 귀족문화가 꽃핀 시기이기도 하다. 민중들에 의해 주술적인 의미로 춤추어지던 무용이 삼국시대에는 관람하는 무용으로 발전하였고, 춤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 발생하여 격식을 갖추고 발전한 시기라고 할 수 있겠다.1, 고구려고구려는 육로로 중국과 교역이 이루어졌으므로 삼국 가운데 가장 일찍 문명이 발달하였다. 고구려의 무용에 대해 삼국사기에 기록된 내용을 옮겨보면“고구련의 음악은 통전에 말하기를 악공인은 자주빛 비단모자를 쓰고 새 깃으로 장식하고 노랑빛 큰 소매에 자주빛 비단 띠에 가랑이 넒은 바지를 입고 붉은 가죽신에 오색 끈을 매었다. 춤추는 사람 넷은 뒤에 상투를 틀고 이마에는 빨간 칠을 하고 금귀거리를 장식하였는데 두 사람은 노란 치마저고리에 적황색 바지를 입고 두사람은 적황색 치마저고리와 속바지를 입었는데 긴 소매에 오피화를 신고 짝을 지어 나란히 서서춤춘다. 라고 했다. 그런데 통구의 무용총 벽화나 그 외의 고구려 벽화에서 발견된 무용수의 옷은 모두 입고 손이 보이지 않도록 하고 춤추고 있으며, 남녀가 함께 옆으로 늘어서서 열을 지어 추는 혼성 무용이다.고구려의 무용은 아마도 420년 이후에 크게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고구려의 무용의 종류는 고구려의 멸망과 비슷한 연대인 측천무후 때에는 중국에서도 25곡이나 사용되고 있었던점으로 보아 많은 종류의 무용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현재까지 무용의 명칭을 알수있는 것으로 당나라에서 고구려무로 기록된 호선무와 이백의 시에 기록된 광수무, 수서에 기록된 지서무 등이 있을 뿐이다.2,. 백제백제는 북쪽에는 고구려가 자리잡고 있었으므로 바다를 건너서 주로 남중국의 여러국가과 교류했다. 백제의 무용에 관해서는 유물과 유적은 물론 기록으로도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 드물다. 다행이 백제는 일본에 문화를 전파하였기 때문에 일본에서 백제 무용의 면모를 단편적이나마 찾아 볼 수 있다.일본서기에 백제사람인 미마지가 일본에 귀하하여 중국의 오나라에서 배운 기악무를 영정촌에 기거하며 소년들에게 가르쳤다.1 기악은 부처를 공양하는 불교무악으로 나라시대에 대유행을 하다가 카마쿠라시대에 이르러 쇠퇴한 가면무도회로서 우리나라의 산대도감놀이 및 봉산탈춤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아 백제에서는 중국에서 전래된 가연무인 기악이 널리 춤추어지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백제의 무용은 기악 외에도 왕이나 귀족들을 위해 전문적인 직업 무용수가 있어 연무되고 있었던 것 같다.3. 신라신라는 삼국가운데 가장 후진국으로서 북에는 고구려, 서로는 백제에 막혀있어서 중국이나 기타 대륙의 영향을 가장 늦게 받았다. 신라는 문무왕8년(688)에 고구려를 멸망시켜 삼국을 통일(677)하고 정치적,문화적으로 통일된 단일 국가를 건설하게 되었다. 527년에는 불교가 전래되어 공인되므로서 불교가 신라인들의 지배적인 종교로 대두 되었다.신라의 무용은 부족국가 시대부터 삼국통일까지의 무용과 고구려 백제의 무용을 수용하게 되는 통일 이후의 무용으로 나눌 수 있다.1) 통일신라 이전의 무용신라는 주변의 부족국가들을 병합하여 발달하였으므로 삼한의 고풍을 그대로 이어받았을 것으로 생각되며, 따라서 무용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신라의 무용은 일찍부터 상당히 발달한 것으로 보이며 특히 가야국의 병합 이후 가야의 무용이 신라에 널리 보급되고 흡수된 것 같다. 그증거로 진흥황의 명에 의해 가야사람 우륵은 신라에 귀화하여 계고에게는 가야금을, 법지에게는 노래를, 만덕에게는 춤을 가르쳤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알 수 있겠다. 우륵은 금의 명수일 뿐만아니라 노래와 춤에도 뛰어난 인물이었음을 틀림없다. 또 신라통일을 전후하여 당과 문물교류가 빈번해 짐에 따라 당의 무악의 도입 및 영향도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이 시대에 무용에 대해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① 회악 : 유리왕 9년에 왕이 6부를 정하고 왕녀 두사람으로 하여금 각각부내 여자들을 거느리게하여 붕당을 만들고 7월16일부터 날마다 6부의 뜰에 모여 길쌈을 했는데 음력 8월15일에 이르러 그 공의 다소를 살펴서 진편에서는 음식을 마련하여 이긴편에 사례하고 모두 춤과 온갖 놀이를 하는데 이를 가희라 하며, 이때 진편에서 한 여자가 일어나 춤을 추며 탄식하기를 “희소.희소”하였는데 희소곡이라 한다.② 도솔가무 : 유리왕때 문든 무용이다.③ 가무 : 제17대 내물이사금이 만든 것으로 가척2인과 무척1인이 추는 춤이다.④ 우식악 : 제19대 눌지마립간이 만든 것으로 눌지왕이 외질로 잡혀갔던 눌지왕의 동생이 박제상의 구함을 받고 돌아오자 주연을 베풀고 형제의 정을 나누고 왕이스스로 노래를 지어 부르고 춤을 추어 그 뜻을 널리 선양했는데 이를 우식곡이라 했다고 한다.22) 통일신라 시대의 무용통일 신라시대에는 고구려 백제의 유풍을 이어박고 당의 춤과 노래의 여양을 받아 악이 제도적으로 정착되고 발단한 시기일 것으로 생각된다. 뿐만아니라 무악을 맡아 관장하는 관청이 설치 되었는데 진덕왕5년에는 예부에 음성서를 설치하였고, 경덕왕은 음성서를 대악감으로 고치고, 혜공왕은 다시 음성서로 명칭을 바꾸었다.이시대에는 무악이 상당히 중요시 되고 종류도 풍부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삼국사기에 보면 31대 정명왕 9년 당시의 춤과 종류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었다.
선사시대 무용무용은 인간이 이세상에 존재함과 동시에 생활 자체에 다른 예술과 같이 그 시대의 사상이나 감정의 미를 탐구하려는 인간의 본능에 의하여 지속되고 변천하여 온것이다. 또한 무용은 다른 예술과는 달라서 그 표현운동을 그대로 오랜 시일을 보존하고 전할 수 없는 결함이 있다. 하나의 운동은 춤추는 사람의 체감에 또는 관중들의 연상이나 기억속에 잔상으로 남는 이외에 별다른 도리가 없을 것이다.회화나 조각 등은 그 작품이 후세에 까지 남아있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줄 수 있고, 음악은 악보나 리코드등에 의하여 널리 전달 교류될 수 있다. 물론 무용도 근일에 와서는 영화화할 수 있으므로 앞으로의 운명에는 많은 발전이 기약될 수도 있으나, 지금까지의 발달과정의 연구에는 오로지 현존된 미개인의 사회에서 보는 풍속 습관을 통하여 추축하는 도리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는 이러한 미개인의 풍습습관이나 고대의 유적 유물을 찾아서 무용의 발달과정을 알아 보자.1) 종교적 무용원시인의 풍속 습관을 알기 위하여서는 종교를 무시할 수 없다. 종교는 원시인의 생활 기초였고 그 중심이었던 까닭이다. 그러므로 원시인의 생활을 구명하려면 종교 및 종교와 관계가 깊은 무용을 알아야 되는 것이다.종교와 무용의 관계는 여러 가지로 설명되어 왔다. 즉 원시인들의 무용은 신을 인간의 세계에 임하도록 하기 위하여 또는 현대인과는 달라서 인간의 주위에서 어떠한 현상이 일어났을 때 인간의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어떠한 위대한 힘이 그것을 일으키게 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환경속에 존재하는 구체적인 것을 들어서 그 위대한 힘의 상징으로 삼았다.어떠한 힘과 공포를 느낄 수 있는 자연물이나 동물을 숭배함으로써 서로 융합하고 단체적인 생존력이 존재하였었다. 구체적인 상징 즉 토템을 중심으로 공통된 투쟁과 환희속에서 집단생활을 하였던 것이다.이러한 생활양식속에서 본능적인 욕구로서 잠재적 충동적인 신체운동은 그 표현형식의 중요한 수단이 되었던 것이다. 즉 종족을 수호하기 위하여 외적을 막고 자체의 파괴를 방지하기 위하여 춤이 활용되었기 때문에 무용은 원시사회조직의 기본이 되어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원시무용은 후에 종교무용, 수렵무용, 전쟁무용, 농경무용등 여러 가지 명칭으로 설명되고 있다.2) 미개인의 무용현재의 원시적인 민족들의 춤을 보면 대개 질서 없는 자연 그대로의 자태나 운동으로 되어 있다. 주로 발의 운동이며 순박하고 단순한 순서로서 대부분 원형으로 춤추고 있다.1(1) 수렵무용미개인들의 수렵무용에는 대개 세 측면이 있음을 엿볼 수 있다.첫째 측면은 수렵을 하러 가기 전에 부락의 신에게 풍요로운 수렵을 소원하는 춤이며, 둘째 측면은 수렵장소에 가서 신에게 다시한번 소원하는 춤. 셋째 측면은 수렵을 마치고 부락으로 돌아와서 신에게 보고하며 감사드리는 춤과 가족들에게 그 상황을 알리는 춤 등이다.이러한 무용에는 또한 세가지 형식이 있다. 첫째 형식은 수렵인이 추는 춤, 둘째형식은 동물을 가장하여 추는 춤, 셋째형식은 수렵인과 동물의 가장인이 같이 춤추는 형식이다.동물의 춤에는 동물이 산야를 뛰어 다니는 모방과 동물에 가까이 접근하려는 춤으로 동물을 끌어당기기 위하여 추는 춤이있다.이 수렵무용을 출 때에 전기구석기 시대에는 창을 무기로 사용했고, 후기 신석기 시대 이후에는 활을 무기로 사용하였음을 유적으로 알 수 있다.(2) 전쟁무용원시 사회에서 외적에 대항에 대한 방위를 위하여 또는 신의 가호로써 승리를 얻고자 열렬한 기원을 하였던 것이 습관이 되어 승리의 기원행사로서 형성되었다. 이제의에서 추는 춤이 전쟁무용이 되었다.
◎ 과 목 : 전통문화 현장실습◎ 교수님 : 장 순 향 교수님◎ 일 시 : 2010년 10월 18일◎ 학 번 : 2010802003◎ 이 름 : 박 미 경2010세계대백제전은 지난 55년간 백제문화제를 개최해 온 백제의 왕도 부여군과 공주시가 백제교류국등 20여개의 세계역사도시와 국내외 260만 관람객이 함께하는 거대한 축제로 개최 되었다.1400년전 대백제의 부활은 오랜 세월 잠들어 있던 대백제가 그 후손들의 터전인 대한민국 충청남도에서 백제문화단지 준공 과 함께 새롭게 펼쳐진다.2010년 9월18일 ~ 10월17일(30일)간 펼쳐지는 축제는 여러 가지 다체로운 행사들을 볼 수 있다.공주에서는 “웅진성의 하루”를 놓칠 수가 없는 체험행사다.백제식 산성인 공주 공산성에서 매일 진행되며 웅진시대의 생활상을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다. 무령왕릉에서도 체험 행사가 기다린다.무령왕릉의 전시 공간을 활용해 무령왕의 일생을 그려낸 연극 공연과 백제왕관 만들기 백제 복식 체험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고마나루 예술마당에서는 백제왕과 왕비, 공주, 장군, 병사, 선녀복 등을 입고 퍼포먼스에 참여할 수 있다.부여에선 “사비궁의 하루”를 놓칠 수 없다. 백제 문화 단지 사비궁에서 진행되는 이 프로그램은 성왕 사비천도 선포식과 인형극, 창작극, 서동과 선화공주 혼례식, 사비천도 행렬, 혼례 체험, 어린이 수문병 교대식 등 퍼포먼스와 공연, 체험이 함께 어우러진다.백마강 구드래 둔치에선 백제 와당과 복식, 옥사, 주막체험, 가마게임, 천연 염색, 엿치기, 두부 만들기, 활쏘기 등 총 34종의 체험을 만끽할 수 있는 체험장이 운영된다. 또 백마강 신리 둔치에 설치된 무예 체험장에선 지상 및 마상 무예와 옥사 및 망루 체험에 참여할 수 있고 백제 호신술도 배울수 있다.백마강에도 부교가 설치돼 있다. 부여 구드래 선착장부터 왕흥사지까지 250m의 백마강을 건너는 체험이다. 야간에는 사비궁의 천정전을 모델로 한 1900개의 전등이 점등돼 화려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10월3일 구드래 둔치 행사장에선 당일 관광객 2000명이 참여하는 기지시줄다리기 행사도 열린다.2010세계대백제전은 종전에는 사상 최대, 최고의 신기원을 선보이는 역사문화 축제다. 백제전의 백미는 수상공연이다. 공주에서 펼쳐지는 “사마이야기”와 부여에서 선보이는 “사비미르”는 국내 최초의 수상공연으로서 사상 가장 웅장한 규모로 최장 기간 공연된다.논산 둔치에서 100분간 스펙터글한 전투 씬이 펼쳐지는 “황산벌 전투 재현”은 국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전투 재현이며 백제 기마군단 행렬은 2008년에 국내 축제 사상 처음 선보인 이후, 이번 대백제전에는 말 123필이 동원돼 최대 규모의 기마군단 행렬을 선사하게 된다.또 공주시 일원에서 총 3회에 걸쳐 전개되는 “웅진성 퍼레이드”도 1회당 총 2000명이 참여하는 최대규모다. 체험 프로그램으로는 공주의 “웅진성의 하루”와 부여의 “사비궁의 하루”에 참여함으로써 역사문화 체험의 진수를 만끽할 수 있다.백제 금동대향로의 오악사 연주와 최초의 한류스타인 “미마지” 의 삶과 예술을 마당극 형식으로 극화한 창작극“미마지”는 백제의 혼을 이어가는 새로운 역사 재현극이다.대표적인 수상 공연중 첫번째 “사마이야기”는 사마(무령왕)가 백제를 중흥시키고 해상강국과 영토확장을 이룩한 이야기를 아름다운 금강을 배경으로 과거와 미래의 시공간을 7겹의 무대공간으로 연출, 대형 군무와 액션, 특수효과를 결합한 화려하면서 민족 화합정신, 헌신과 희생을 통한 사랑, 공동체 정신을 표현한 공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