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 차 ◎1. 서론2. 향리집단 성립의 배경3. 향리제도의 성립4. 결론1. 서론후삼국시대의 정치 주도세력인 호족은 신라라는 낡은 기존체제를 타도하고 고려왕조를 창건하는 데까지는 그 소임을 다했지만 新王朝(신왕조)의 기반을 구축하고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는 데는 그들이 그대로 적격자가 될 수 없었다. 따라서 신흥 고려왕조의 가장 큰 관심은 각 지방에 散居(산거)해 있는 호족세력을 어떻게 흡수, 동화 시키느냐 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고려 초기의 지방세력은 아직도 강력한 호족적 성격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王建(왕건)의 등장과 후삼국쟁패기에 있어서의 호족의 동향을 살피는 것은 왕건이 고려왕조를 창업하는 과정에서 호족을 어떠한 시각에서 파악하였고 또 어떻게 새 왕조에 편입시켰느냐 하는 문제해결의 열쇠가 될 것이다. 또한 이런 호족들이 통일 후 어떠한 모습으로 편제되었는가 하는 것은 高麗社會(고려사회)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본 레포트에서는 문제의 성격상 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에 걸쳐 광범하게 대두된 호족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호족은 지방 유력자로서 성종2년 지방제도의 개편과 아울러 향리라는 이름으로 명명된, 바꾸어 말하면 향리의 前身(전신)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레포트는 향리집단 성립의 배경으로서 호족을 살피고 이어서 향리제도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알아보도록 하겠다.2. 향리집단 성립의 배경고려초기 향리제도의 성립과정을 살펴보기에 앞서 우선 호족에 대해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고려초기의 향리는 신라말 고려초기에 걸쳐 광범하게 대두한 호족집단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통일신라의 통치력이 약화되고 후삼국이 출현할 무렵 각 지방에 실질적인 세력가로 등장한 것이 바로 호족이었다. 이들 호족에 대하여 『三國史記』나 『高麗史』에서는 그 명칭을 장군, 성주, 성수, 적수) 등 각양각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들은 각기 독자적인 무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고려사』의 기록에 보이는각 지방에 할거하여 지방분권적 세력을 지니고 있었음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따라서 후삼국시대에 있어서 정권의 향방을 좌우하는 데 이들 호족집단의 동향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왕건의 세력이 점차 우세해짐에 따라 각지의 호족들은 태조에게 항복, 복속해 오는 경우가 속출하였다. 따라서 이들 전공자들에 대하여 대광, 대상) 등의 높은 관계를 준 것은 그들이 그 지방에 있어서 가장 유력한 세력자 였다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게 하는 것이다. 이 밖에도 고려가 재통일하는 시기에 왕건에게 내부, 복속해 오는 호족들이 많았다. 이들 호족이 태조에게 내부 , 복속해 오늘 과정에서 통합된 지역은 경상도지방 전역과 황해, 충청, 강원의 일부 지역으로, 이는 구신라지역 대부분에 걸쳐 분포되어 있다. 이것은 당시 신라의 지배하에 있던 유능한 호족들이 점차 왕건세력하로 흡수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태조가 고려왕조의 기반을 굳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할 만큼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태조는 내부한 호족들에게 관직등을 주어 포섭하는 한편, 전택 및 녹읍을 사여하였다. 이것은 태조가 종래 그들의 세력기반이 되어 오던 토지를 전적으로 말살하지 않고 국가에서 제도적으로 인정해 줌으로써 그들의 반발을 막고 회유, 포섭하려는 정책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물론 중앙집권화되지 못한 상태에서 나타나는 것이었다. 따라서 전택 및 녹읍의 賜給(사급)은 來降者(내항자)에게 새로운 혜택이 주어졌다기보다는 종래 그들이 보유했던 세력기반을 고려라는 신왕조가 정식으로 시인해 준 것에 불과하다고 보아 좋을 것이다. 한편 이들 호족들의 내투나 통합이 모두 순조롭게 진행된 것만은 아니었다. 고려조가 대혼란기를 극복하고 통일을 이룩한 뒤에도 고려에 불복하는 자가 많았다고 하는 사실은 이에 대한 명백한 증거가 될 것이다. 이러한 사항은 고려사에 웅주(공주), 운주(홍성)등 충청도의 10여 주현이 배반하여 후백제 확립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쳤던가를 짐작할 수 있겠다.이와 같이 고려의 지배체제를 형성시키는 과정에서 호족 집단은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그 후 고려왕조의 지배권이 확립됨에 따라 이들 호족집단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는 필연적으로 불가피하게 되었다. 중앙정부의 이러한 통제의 방편으로 案出(안출), 制度化(제도화)된 것이 바로 외관파견에 따른 성종2년(983) 지방제도의 개편과 아울러 실시된 향리제도이다. 바꾸어 말하면 향리제도를 실시한 것은 고려왕조의 중앙집권체제가 확립된 결과에 의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3. 향리제도의 성립고려왕조의 중앙집권적인 통치체제가 갖추어지면서 호족세력은 향리의 신분으로 변화되어 갔다. 즉, 태조왕건 당시의 투항자에 대한 구체적인 포섭조치가 왕조의 확립과 더불어 제도화된 것이다. 고려왕조 성립시부터 중앙집권체제의 정비과정에서 이루어진 일련의 개혁 가운데 성종2년(983)의 지방관제 실시와 鄕職(향직)의 개혁은 향리문제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개혁은 지금까지 인정되어 오던 지방세력의 독립성을 말살하고 이를 중앙집권적 체제 속에 포함시켜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격하시키는 직접적인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고려국가는 이러한 지방세력을 향리로 편성시켜 지방에 대한 행정에 참여 하도록 하였다. 향리와 더불어 밀접한 관계를 갖는 지방제도의 실시에 대하여는 성종 원년(982) 최승로의 상서문에 고려왕조는 신왕조 草創(초창)으로 말미암아 외관을 설치하지 못하고 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초창의 事煩未遑(사번미황)이 원인이라기보다는 그 당시 중앙정부로서는 지방에까지 힘을 뻗칠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고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할 것이다. 그러므로 중앙정부에서는 독립적 자치의 성격이 강한 지방세력을 통제하기 위하여 임시로 使者(사자)를 파견하는 것으로 그치고 있다. 금유, 조장 이라고 불린 이 사자는 지방상주관이라기보다는 재지세력자라고 봄이 타당하다. 이들의 주된 임무는 조부의 지방관의 설치와 더불어 혁파되고 있다. 그러므로 적어도 성종2년 이전까지의 지방통치는 지방세력자에 의해서 행해졌음이 틀림없다고 하겠다. 최승로의 상서문에는 당시 향호가 공무라는 이름을 빌어 백성들을 침해, 폭압 한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것으로 당시 향호의 세력 정도를 짐작할 수 있겠다. 다시 말하면 고려초기에 있어서 그들의 지위는 정치적으로는 지방행정의 실권을 장악하고 사회적으로는 지방문벌로서 세력을 확장하였으며 경제적으로는 신라말의 동란으로부터 광대한 토지를 점유한 토호적인 존재로서 군림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강대한 세력을 보유한 그들일지라도 일단 고려왕조에 편입된 이상 어떤 방법으로든지 중앙정부의 통제를 받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성종2년에 실시된 주, 부, 군, 현의 吏職(이직)의 개혁과 지방관제의 실시는 이러한 지방세력에 대한 통제를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비로소 고려시대 향리의 등장이 이루어진다고 하겠다.그런데 이같이 강대한 세력의 보유자였던 호족이 어떠한 경로를 밟아 향리화해 갔을까? 이것이 우리가 해명해야 할 문제인 것이다. 호족이 향리의 전신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하는 논거로서 다음 사료를 들 수 있다. 즉 『?曹龜鑑』)(연조귀감)에° 신라말 의관의 후예들은 競用豪武(경용호무)하고覇於州縣(패어주현))하여 고려조통합후에 처음에는 복종하지 않은 사람이 있어 이를 진압하여 환란을 없어고자 하였다. 힘써 소재지의 호장이 되었다(『?曹龜鑑』권1 吏職名目解(이직명목해) 興陽李氏譜(흥양이씨보)라는 것이 있고 또신라말 諸邑(제읍)의 土人(토인)이 능히 그 읍을 다스리고 호령하는 자가 있었는데 고려조 통합 이후에 직호를 내리고 그들로 하여금 그 지방의 일과 백성들을 다스렸으니 이를 일러 호장이라 하였다(『동상』,安東金氏譜(안동김씨보))이라는 것이 있다. 여기의 호장은 곧 향리의 수장인 것인바 이것은 신라말 고려초기의 호족에게 호장이라는 직호를 주어 그 지방의 통치, 운영에 힘썼던 사실을 전하여 준다. 또한아래와 같은 기록은 호족이 향리의 전태조가 그들을 다스리기 어려울까 근심하였다. 그래서 大官識事者(대관식사자)들을 호장으로 삼아 위무하였다. 마침내 세상에 나아가 벼슬을 하여 오늘날에 이르러 천여년이 지났는데 이들이 곧 안동의 권씨, 김시 양성으로 두드러진 자이다.43라는 것이 그것이다. 위와 같은 기록에 의해서 우리는 호족이 향리화해 갔다는 사실을 조금 더 명확히 알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여기보이는 안동의 권씨와 김씨 양성은 특히 이 시기에 있어서 가장 두드러진 세력가였음은 이미 밝혀진 바와 같다.다음으로 향리제의 始原(시원)이 언제인가를 알아보고자 한다. 그것은 곧 호족세력이 향리로 전화되는 시기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에 주목하고자 한다.A) 신라말 諸邑 土人으로 능히 호령하고 읍을 다스리던 자를 고려 통합후에는 직호를 내려 일과 백성을 다스리는 사람을 호장이라 하였다. B) 그 자제들을 서울에 인질로 두었다. C) 왕이 지방관을 파견하여 이를 감독케 하였는데 成宗(성종)때 지금의 지방관이 읍을 다스리던 자를 호장이라 하니 마침내 강등되어 향리가 되었다(『연조귀감』권2, 『안동김씨보』).A)의 내용은 고려초기의 호족에게 호장이라는 직호를 주어 지방민을 다스리게 하였다는 것이고 B)의 내용은 이른바 其人(기인)에 관한 설명이다. C)의 내용을 좇으면 이것은 바로 성종2년의 지방관 파견의 사실과 호족의 지위가 떨어져 향리로 전화된 사실을 역사적으로 확인시켜 주는 것이라 생각된다. A)와 C)의 내용을 결부시켜 봄으로서 우리는 맨 처음 지방관이 파견되는 시기와 향리에의 성립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다시 말하면, 향리제가 성립되는 시기는 고려가 지방세력의 독립성을 말살하고 이를 중앙집권적인 체계 속에 포함시키려는 강한 움직임을 보였던 성종2년이었다. 때문에 호장이라는 직호는 각주에 따라 그 사용시기가 다르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제도적으로 인정되는 것은 지방세력에 대한 중앙정부의 새로운 통제가 시작되는 성종2년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호 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