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일지를 읽으면서백범 일지를 처음으로 읽은 것은 중학교 때였다. 하지만 그 후로도 비록 타의였지만 두 차례 더 읽은 까닭으로 내용을 잘 알고 있어 이전의 내용의 이해와 줄거리 파악형의 독서를 벗어나 생각하는 독서를 하였다. 따라서 이번 독후감은 백범의 인간성과 사상을 탐구하고 백범이 활동하던 시기의 시대적 배경을 생각하면서 백범이라는 인물에 나 자신을 대입하여책을 읽었고 독후감 또한 같은 맥락에서 기술하고 작성 하였다.한반도의 역사가 늘 수난의 역사 였듯이 백범이 살았던 19세기의 구한말부터 해방 직후까지의 민족사는 일제 수난의 역사였고 미국과 소련을 중심축으로한 극단적 대립의 이데올로기 시대였다 . 백범은 이러한 격변기인 구한말에 태어나서 일제식민지 지배를 겪었으며, 해방 후에는 좌우익의 대립으로 인한 외세와 분단의 아픔을 극복하지 못하고 수난을 당한 인물이다. 백범이 살아온 생애는 우리 민족사의 격동과 수난의 기록이며, 그의 통일된 민족국가건설의 정신은 근현대의 한국 정치를 이해할 수 있는 기초가 된다. 개인주의와 다문화주의가 팽배해지면서 민족의식이 갈수록 희박해져가는 이 때 백범 김구의 생애와 사상을 살펴봄으로서 우리가 국민으로서 살아가야 할 방향을 설정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김구가 백범일지를 저술하게 된 동기는 두 아들에게 자신의 경력을 전해 주기 위하여 저술하였다. 따라서 백범일지는 김구 자신의 행적을 진솔하게 기록한 책이다. 상권에는 어린시절부터 1927년 임시정부의 국무령이 될 때까지의 행적이 기술되어 있다. 동학, 의병,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하여 활동한 행적과 세 차례에 걸친 투옥 및 탈옥, 그리고 상해의 임시정부에 참여하는 과정과 활동 내용 등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하권은 상해를 떠나 중경에 정착하기까지 임시정부의 이동 및 활동과정을 서술한 것이다. 특히 이봉창, 윤봉길 의거의 전말과 중국 국민당 정부와의 관계, 김원봉과의 좌우합작 추진과정, 그리고 임시정부의 중경정착 및 광복군 창설에 관한 내용 등이 서술되어 있다.백범일지에 나타난 백범 인물탐구1).백범은 강한 추진력과 리더싶의 소유자다.그의 추진력은 어릴 때부터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이 [백범일지]의 소년기 회상록 속에 보인다. 백범은 나라를 위하는 일이고 정의로운 일이라면 남들이 엄두도 내지 못하는 일들을 대담하고 용감히 실행해 사람들로 하여금 놀라게 하였다. 백범이 19세의 어린 나이로 동학의 팔봉 접주가 되고 선봉장이 된 일, 김이언 의병 부대에의 투신한일, 일본군 특무장교 쓰치다를 처단한일, 한인애국단 조직과 이봉창 의사, 윤봉길 의사의 의거, 어려운 조건에서의 광복군 창군 등은 그의 이러한 추진력과 강한 리더십과 관련된 사례라고 할 수 있다.2).백범은 공리공론을 배척하고 실리를 추구했다.백범 일지를 읽다보면 백범이 실질적 논의와 실천을 중시하는 인물임을 알 수 있다. 백범이 동학, 유교, 불교, 기독교의 여러 가지 종교를 모두 섭렵한 이유도, 사람을 도덕적으로 교화시켜주고 독립을 지원해주기 위함 이였다. 백범은 종교의 이론에도 집착한 일도 없었고종교적 배타성 같은 것은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3) 백범의 사상은 자유 민주사상이다.백범은 다음과 같이 썼다. “나의 정치 이념은 한마디로 표시하면 자유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는 자유의 나라여야 한다. 나는 어떠한 의미든지 독재정치를 배격한다. 나는 우리 동포를 향해서 부르짖는다. 결코 독재정치가 아니 되도록 조심하라고, 우리 동포 각 개인이 십 분의 언론자유를 누려서 국민전체의 의견대로 되는 정치를 하는 나라를 건설하자고, 일부 당파나 어떤 한 계급의 철학으로 다른 다수를 강제함이 없고, 또 현재의 우리들의 이론으로 우리 자손의 사상과 신앙의 자유를 속박함이 없는 나라와, 그러면서도 사랑의 덕과 법의 질서가 우주자연의 법칙과 같이 준수되는 나라가 되도록 우리나라를 건설 하자고 했다.4). 김구선생이 항일운동한 목적은 오직 조국의 독립이었다.이 책을 읽은 분이라면 누구라도 인상 깊었을 부문은 나의소원 중에서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우리나라의 독립이 소원이라고 말씀하셨던 부문일 것이다. 이 부문에 백범의 생애와 진정성 그리고 나라사랑하는 마음이 함축되어 있다.5). 백범은 수준 높은 문화국가 건설을 원했다.백범일지에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이 마음만 발달이 되면 현재의 물질력으로 20억이 다 편안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이다"라고 말하고 있다.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이 부문을 보면 일부 친일정치인이 주장하고 있는 백범의 테러주의(윤봉길, 이봉창의거. 일본군장교 처단, 동학운동 참여 등) 인상과 상반된 인상을 받는다. 일제가 비정상적으로 국권을 찬탈 하였기에 이러한 테러는 일본법에는 위법이 되지만 조선법에는 충신의 행위였다. 결국 백범의 폭력성은 가해자에 대한 정당한 응징이며 약소민족이 택 할 수 있는 자주적이고 수준 높은 문화국가 건설을 위한 수단 이었다.6).백범은 서민 의식이 강했다백범 김구 선생의 가문은 '김자점의 난'으로 멸문지화를 당하게 되자 양반의 신분을 감춘 채 11대에 걸쳐 해주에서 정착하게 되었다. 과거에 급제하여 전사가 되는 길 만이 양반들로부터 모욕과 천대, 멸시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 김구 선생은 공부를 시작하였고 17세가 되던 해에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당시 매관매직으로 타락한 과거에 실망을 느꼈다. 당시 조선조 왕조는 부패와 무능으로 이미 국가통치의 능력을 상실한 상태였고 양반과 상놈의 신분차별은 극대화되어 되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시대적 상황과 생활이 동학에 참여한 배경이 되었을 것이고 그가 서민의식을 갖고 살게 하였을 것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