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고의 해상활동Ⅰ. 서론흥덕왕(興德王)대를 전후한 시기에 활약하였던 신라의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 장보고(張保皐)는 사실상 최초로 동양세계의 해상권을 지배한 막강한 해군력을 과시하였고, 최근 세계적으로 눈부시게 뻗어나는 우리나라의 해운산업과 국제무역을 맨 처음 개척한 것이다. 장보고 대사의 행적은 곧 우리나라의 해양경영사의 시작이다. 따라서 장보고 연구는 우리 뿌리에 관한 연구이며 우리나라 대외경제 전략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연구인 것이다. 이 시점에서 장보고의 해상활동에 대해 알아보려고 한다.Ⅱ. 본론1. 장보고 해상활동의 배경장보고가 동아시아 해상무역활동을 전개하고 그것이 활발한 데 있어서 그 당시 당나라에 거주하면서 해상무역활동을 하던 신라인들(백제, 고구려, 신라의 유민들), 8~9세기 동아시아 세계의 시대상황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여기서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기로 한다.1)재당 신라인(在唐 新羅人)들의 분포와 위상고구려, 백제, 신라의 끊임없는 영토분쟁은 668년 신라에 의해서 끝을 맺고 통일신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통일은 당나라와 연합하여 이루어졌기 때문에 백제와 고구려에 진격한 당나라는 상당수의 사람을 압송해갔다. 또한, 고구려 멸망 후 660년 평양에 설치했던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가 고구려인들의 저항으로 철수할 때 당이 압송해간 고구려인 수가 20여만 명이라는 기록이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에 나타난다. 당으로 건너간 유민은 멸망한 백제?고구려의 유민뿐만이 아니라 신라에서 건너간 유민도 상당하였다. 신라 유민이 발생한 이유로는 골품제도(骨品制度)하에서 나은 생활을 기대하기가 불가능했던 육두품 이하의 신라인들이 새로운 세상을 찾아 당으로 이주하거나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당나라로 건너갔기 때문이다. 당나라에 건너가 살게 된 백제?고구려?신라의 유민들을 통틀어서 재당 신라인이라 부르는데, 이들의 활동은 장보고의 도움으로 당나라를 여행한 일본 승려 엔닌(円仁)의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를 포함하여 연구 자발하였다. 이 난의 결과 당에서는 율령에 의한 기존의 통치체제가 무너지고 사회는 각 지방의 절도사세력에 의해 주도되는 이른바 번진체제(藩鎭體制))가 성립되었다. 이들 번진 세력들은 8~9세기 당의 정국을 주도하였고, 급기야는 중앙정부에 반항하여 당 왕조와 대립하는 양상을 나타내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농민들에게는 당 왕조와 번진 세력에게 이중으로 수탈당하는 생활고를 가져왔고, 결국 9세기 말에 이르면 황소(黃巢)의 난)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동아시아세계를 주도해나가던 당은 결국 907년에 멸망하게 되었다.②신라의 시대상황한반도의 삼국 중에서 가장 늦게 중앙집권적 고대국가의 기틀을 마련하였던 신라는, 7세기 중엽 삼국을 통일하고 당의 율령제를 수용하여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이룩하였다. 이후 신라는 사회 각 분야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고 적극적인 대외활동을 통하여 발달한 제도와 문물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8세기 말에 이르러 왕권은 진골 귀족들의 도전을 받아 약화하고 진골 귀족들이 연합하여 정국을 주도해갔으며 이들 간에 왕위쟁탈전이 일어나 중앙정부는 혼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중앙에서 이러한 혼란이 가중되고 있는 사이에, 지방에서는 각지의 호족들이 그들의 세력을 키워나갔다. 9세기에 이르러 신라에서도 지방분권적 양상이 뚜렷이 나타났다. 결국 889년(진성여왕 3년) 전국에서 농민반란을 일으켰고, 지방호족들의 반란으로 이어졌다.③일본의 시대상황동아시아세계에서 가장 늦게 고대국가로서의 기틀을 마련한 일본은 7세기 후반에 등장한 야마토 정권(大和政權)을 중심으로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로 발전해 갔다. 이 과정에서 당의 율령제와 신라의 문물까지도 받아들여 고대국가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일본에서도 8세기 이후 율령제는 모순을 드러내게 되었고, 9세기에 와서는 정치권의 붕괴양상까지 뚜렷해졌다. 국가권력의 상징인 천황의 권위는 추락하였으며 이를 대신하여 귀족세력인 후지하라(藤原氏)에 의해 ‘섭정 정치(攝政政治)’가 이루어졌다. 이렇게 중앙에서는 귀족들이 지방에서는 토착세력들역 제패, 김헌창 계열의 반항세력 견제 등이 주장되고 있으나 역사적 기록이나 장보고의 해상무역 추진내용에 비추어 볼 때 해적소탕과 동아시아 해상무역 추진이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견해이다. 삼국사기 등 여러 기록에 의하면 청해진의 설치 목적이 분명하게 직시 되어 있는바, 해적소탕에 의한 노비매매 근절이라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설치 목적이다. 이것은 장보고와 신라조정의 이해가 일치되는 공통의 목적이며 청해진이 군진의 성격을 갖게 하는 기본적인 목적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대부분 연구문헌에서는 동아시아 해상무역 장악을 청해진 설치의 중요한 목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동아시아 해상무역의 추진’은 신라조정으로부터 인정받지 않는 것으로서 이것은 장보고 사적인 목적으로 규정되어야 할 것이다.2)나?당?일 3국 항로의 요충지 청해진의 지역적 특성장보고는 일찍이 당나라의 서주(徐州)에 건너가 무녕군소장(武寧軍小將)이 되었으나, 강제로 잡혀와 노비가 된 신라인들의 모습을 보고 분개하여 벼슬을 버리고 귀국하여 해적들의 인신매매를 근절하기 위해 청해(淸海) 완도(莞島)에 군영(軍營)을 설치할 것을 왕에게 요청하였다. 이에 왕은 승낙하고 장보고를 청해진 대사(大使)에 임명하였다(828). 장보고는 군사 1만 명을 이끌고 중국과 일본 해로의 요충지인 청해에 진(鎭)을 설치하고 가리포(加里浦, 완도의 옛 이름)에 성(城)을 쌓아 항만을 보수, 전략적 거점을 마련하였다. 청해진을 중심으로 한 서남 해안의 해상권을 장악한 그는 중국의 해적을 소탕하는 한편, 동방무역의 패권을 잡게 되었다.) 서해의 조류와 풍향 등 자연의 이점을 최대한 이용할 수 있는 천연적 해운 요충지인 완도는 장보고의 청해진 설진으로 동북아의 군사 및 무역 전진기지로서 부상하게 되었다. 고대 사회에서 한반도와 중국을 연결하는 항로는 크게 북중국항로와 남중국항로로 구분한다.) 북중국항로는 발해 해안선~산둥반도 북부를 잇는 노철산 항로와 한반도~산둥반도의 최단코스인 황해횡단 황로이다. 그러나 장보고 시대에 이르러 양쯔었다. 이 때문에 청해진은 나?당?일 3국 항로의 요충지였던 것이다.3)장보고 청해진체제의 의의와 성과청해진의 설치 목적을 규명할 때 이미 밝힌 대로 청해진의 설치는 ‘해적소탕에 의한 노비매매 금지 및 해상치안 유지’라는 신라조정의 목적과 ‘해적소탕에 의한 해상항해질서 유지 및 해상무역 추진’이라는 장보고 개인의 목적이 조화를 이루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따라서 장보고의 청해진체제는 군사조직과 함께 무역조직이라는 이원적 조직체계를 갖추게 된 것이다. 이 때문에 장보고는 해상무역을 안전하게 추진하여 부를 축적하게 되었으며, 국제적 인물로 성장하면서 청해진을 ‘동아시아 무역체제’의 근간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또 신라조정으로서는 해적이 소탕됨으로써 노비매매 근절이라는 목적이 달성되었고, 청해진을 서남해안의 해상질서유지에 계속 활용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대당 조공무역항로의 유지비용을 절감하게 되었다. 결국, 청해진체제의 가장 중요한 점은 신라조정과 장보고의 ‘전략적 제휴체제’라는 점이며, 이러한 제휴로 신라는 해안국경의 안정을 얻었고 장보고는 동아시아무역을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3. 장보고의 동아시아 해상무역활동1)대당(對唐) 해상무역 활동)장보고는 재당 신라인들을 자신의 지휘체제하에 두고 신라왕에 의해 청해진에 대한 지배권을 특허받고 있었으므로 이들 재당 신라인 사회를 하나의 체계 속에 조직화하였다. 당시 장보고의 중국 내 교역활동의 거점은 산둥반도의 위치한 등주 적산포였다. 이곳은 당시 한반도 서남해안의 다도해를 따라 북상하고서 서해를 횡단하는 항로의 중국 측 최초의 기항지이기도 하였다. 장보고는 이곳을 기점으로 하여 초주(楚州)?연수(蓮水)?양주(揚州) 등지에 분산되어 있던 신라인의 무역상들을 하나의 교역 망 속에 편제시키고 그들을 실질적으로 통솔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창건 시기는 분명하지 않으나 장보고가 이곳에 설립한 법화원은 청해진의 신라인 압위(押衛), 장영(張詠)이 지휘하는 활동거점이었으며, 고국에서 온 여행자라든지 무역 관계 종사자들을 위한 은 장보고의 시대로까지 소급해 보는 견해가 나오는 것이다.2)대일 해상무역 활동)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그 초기에는 나?일 양국관계가 원만하지 못하여 성덕왕 말년 경 갑자기 국교가 파열된 이후 약 70년간은 국교가 사실상 중단되고 말았다. 이로써 공무역의 길이 막히게 되자 양국 간에는 신라 상인들에 의한 사무역이 증대했다. 9세기에 이르러 해상 무역이 번창하였으며 신라 본국인 뿐만 아니라 재당 신라인도 합세, 특히 청해진 설치 후 장보고의 대일 교역 활동은 본격화되었다. 장보고는 일본에 회역사(廻易使))라는 무역사절단을 보내고, 하카다(博多 : 현재 후쿠오카)에 무역 거점을 설치하고 대재부(大宰府))와 일본정부의 묵인하에 교역 활동을 하였다. 일본은 장보고의 사절이 갖고 온 무역품에 대해서 자유로운 교역을 허용하였고 청해진에서 파견된 신라상인은 지금의 쓰시마섬(對馬島)·이키섬(壹岐島)·규슈(九州) 북쪽의 히라도(平戶)·하카다·혼슈(本州), 남단의 나가토(長門) 등지의 교관지)에서 교역하였다. 이처럼 장보고가 자유로이 견당매물사나 대일 회역사와 같은 무역사절을 파견할 수 있었던 것은 장보고의 해상 무역단이 국가와 국가 간의 공적인 성격에 가까울 만큼 대규모적이었고 독자적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보고는 이와 함께 국제적인 해상무역을 전개하여 거대한 상업 자본을 형성하였고, 또한 상업제국을 구축할 수 있었을 것이다.3)이슬람지역에 대한 해상무역 활동)한국이나 중국 측 문헌에서는 신라와 이슬람 여러 나라가 직접 무역을 했다는 기사는 찾아볼 수 없지만, 이슬람 쪽의 문헌인 슈라이만(Sulaiman)의 「중국과 인도소식」(851), 알?마소디(Al-Masoudi, ?~965)의 「황금초원과 보석광」(10세기 중엽) 등에는 아랍상인들의 신라 내왕이나 신라 견문에 관한 기록과 함께 신라로부터 수입한 상품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다. 아랍의 지리학자 이븐 쿠르다지바(Ibn Khurdhibah, 820~912)는 그의 저서 「제도로 및 제왕국지」에서 신라의 위치와 황금의 산출,
목차1. 들어가면서2. 본론① 선사 시대, 가장 원초적인 질문② 잘못된 민족주의 ‘환단고기’3. 결론4. 참고문헌‘문답을 통해 얻은 민족주의사관에 대한 의문들’ - 한국고대사 산책을 바탕으로1. 들어가면서나는 사실 고대사에 대해서 별로 아는 바가 없다. 이 강의를 듣기 이전에는 몇 년 천을 차지하는 고대사를 그저 책 반 권 가량의 교과서로 배우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서 실은 고대사에 대해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가장 기본적인 궁금증도 많았었다. 그러던 찰나에 과제를 통해 이 책을 만나게 되었다. 이 책은 선사 시대부터 남북조 시대라 일컬어지는 통일신라와 발해까지의 고대사 부분을 총 8개의 단락으로 나누어 다루고 있다. 각각의 단락에서는 학계에서 논란이 되거나 잘못 이해하기 쉬운 이슈들을 문답형식으로 엮어 정리해 주었다. 그래서 사실 단순한 과제물에 불과하였던 책읽기를 통해 새로운 앎에 대한 재미와 올바른 역사의식에 대한 성찰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다 잡을 수 있었다. 선사 부분에서는 한반도에 거주한 우리 조상의 기원에서부터 사회구조, 생활양식 및 장례 풍습, 고조선 부분에서는 ‘환단고기’의 문제점, 단군신화에 대한 해석, 기자 조선의 사실성 등과 같이 각 영역에서 논쟁거리가 되고 잘못 이해되고 있는 흥미로운 소재에 대한 질문을 통해 이제껏 막연하게 이해되었던 역사 해석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단정이 아닌 사실에 근거하여 역사에 대한 해석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이처럼 책 전편에 걸쳐 있는 접근 방식은 단순한 민족주의 사관에 빠져 내가 막연하게 단순히 믿고자 하였던 역사에 대해 반성적이고 분석적인 접근을 통한 바른 역사 이해의 틀을 제시해 주고 있다. 또한, 일방적인 주장을 진술하기보다는 질문에 대한 해답으로 가능성 있는 다양한 주장들을 열거하고 그 각각에 대한 논리적 타당성 여부를 평가하여 이해의 폭을 넓혀 주고 있다. 나는 특히 이 책을 읽기 전에 가졌던 ‘환단고기’나 ‘단군신화’에 대한 여러 의문을 중심으로 우리가 무의식중에 가진 민족주의 의식을 통한 역사관이 얼마나 편협한지 알 수 있었다.2. 본론① 선사 시대, 가장 원초적인 질문선사시대 장은 궁금해하지만 선뜻 물어보기 어려운, 또 사실 명쾌한 해답을 주기도 어려운 내용의 질문들에 대한 해답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중 ‘우리 조상은 언제부터 한반도에 살기 시작했을까?, 또 우리의 직접 조상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은 명쾌한 해법을 제시해놓기보다는 지금 당장 궁금증은 어느 정도 풀고 넘어가는 정도로 쓰고 있다. 사실 이 문제는 과학적인 측면에서도 정확히 증명할 수 없어서 이 문제를 살펴보고자 먼 구석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보기도 했으며 또한, 일본인들의 얄팍한 주장을 무너뜨리는 증거로 1960년대에 들어와 북한의 웅기 굴포리, 남한의 공주 석장리와 각지에서 많은 수의 구석기 유적과 유물이 발견되었다고 제시하기도 한다. 또한, 인류의 진화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잘 풀어놓았다고 보았다. 지금으로부터 약 250만 년 전에 나타난 ‘오스트랄로피테쿠스’를 최초의 인류로 간주하고 이후로 ‘호모 하빌리스’와 ‘호모 에렉투스’, 그리고 이들의 형질적 특성을 유전시켜 출현하게 된 ‘호모 사피엔스’, 마지막으로 유명한 ‘크로마뇽인’이 속한 ‘호모 사피엔스사피엔스’까지 일목요연하게 눈에 들어 왔다. 이렇게 전체적인 부분에서 한반도의 구석기로 세부적으로 넘어가면서 한국인이 한반도에 언제 등장하였는지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설득력은 없지만, 한국인이 한반도에 자생적으로 등장하였다는 ‘본토 기원설’로 시작하여 한반도에서도 호모 에렉투스의 인골이 발견될 가능성을 점치기까지 한다. 난 이 부분을 읽으면서 사실 ‘부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 구체적이거나 확실한 주장을 펴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저자의 주장은 없고 사실 여러 설에 대한 저자의 해명과 반론만 있기 때문에 저자가 주장하는 견해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고 단지 저자가 열어놓은 가능성에 대해서만 생각할 수 있었다.하지만, 결론은 ‘언제’가 아니라 ‘어떻게’로 맺으면서 흥미를 더욱 유발하고 있다. 또한, 한국인의 기초가 형성된 과정을 긍정할 수 있도록 잘 정리해 놓았다. 청동기시대 이래로 고조선, 삼국 등의 고대국가를 건설한 집단은 예?맥?한족이다. 이후에도 삼국시대 초기까지는 북방으로부터 유이민 집단이 이주해왔지만, 기존의 주민을 완전히 대체하거나 종족적인 특징을 변경시킬 정도는 아니었다고 보고 있다. 예?맥?한족은 제각기 국가를 세우고 분열과 통합을 거듭하면서 불완전하나마 결국 통일신라로 수렴되어 갔고, 이때부터 한국인의 기초가 형성되었다고 보고 있다. 선뜻 ‘언제부터’라는 식으로 접근하면 금방 미궁에 빠지거나, ‘유구한 기간에 순수성을 지켜온 단일민족’이라는 개념을 선사시대까지 소급하여 오늘의 우리를 초역사적인 존재로 간주하는 오류를 범하기 쉽다는 마지막 주장은 정말이지 흥미로우면서도 긍정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사실 우리는 군사 독재 시절 잘못된 민족주의로 인해 한민족이라는 역사관을 세뇌당하면서 자라왔다. 현재도 대다수의 사람이 그릇된 생각들을 버리지 못한 채 ‘환단고기’나 ‘단군신화’의 절대적 신봉을 주장하기도 한다.② 잘못된 민족주의 ‘환단고기(桓檀古記)’고조선 부분은 기존에 우리의 민족적 근원이라고 본 고조선에 대한 질문들로 이루어져있다. 그중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환단고기’와 ‘단군신화’에 대한 의문이었다. 과연 ‘환단고기’는 과연 후세의 위작(僞作)인가? ‘환단고기’에 따르면 우리 민족은 단군 이후 화려한 문화와 광대한 영토를 지녔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역사학계에서는 이 책들을 ‘위서(僞書)’라고 보기 때문에 믿지 않고 있다. 현재 한국 고대사 연구에서 기본적인 사료로 이용되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는 조선시대의 목판본이다). 그러나 ‘규원사화’나 ‘환단고기’는 모두 20세기 들어서 이루어진 필사본 밖에 전하지 않는다. 또한, 인용된 사례를 찾아볼 수가 없다. 따라서 이들 책이 만들어졌다는 연도에 대해 의심을 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게다가 이들 책에서는 시간착오와 사용되는 용어와 지명에서도 여러 가지 모순이 발견된다. 그러나 후세의 용어들이 사용되었다는 이유만으로 ‘환단고기’의 내용 전부를 후세의 위작(僞作)으로 단정할 수는 없다. 이런 용어들이 사용되었다는 것은 후세에 가필(加筆)되었다는 ‘한정적’ 증거는 될지언정 이 책의 모든 내용이 후세에 창작되었다는 보편적 증거는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환단고기’의 본격적인 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찰나에 저자는 내용면에서의 진위여부도 확실히 말해주고 있다. 이렇듯 앞에서 들었던 여러 가지 객관적인 증거에 의해, 학계에서는 이 두 책을 위서로 간주하여 신빙성을 두지 않는다. 그리고 대략 1920년대 이후 단군신앙이나 관념적인 민족감정을 바탕으로 하여 쓰인 책들일 것이라고 추정한다. 또한, 당시의 현실 속에서 민족감정을 고무시키고자 한 노력의 일환이었다는 점에서 제한적이나마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이 장의 결론에서 저자는 ‘환상적이고 영광스런’ 고대사를 아무리 소리 높여 외친다고 해서 눈앞에 벌어지는 현실을 외면할 권리가 주어지지는 않는다고 했다. 냉철하면서 옳은 말이다. 이런 맹목적 애국주의가 바뀌지 않으면 우리의 상고사는 우리에게 영영 자리 잡지 못하고 말 것이다. 현재도 ‘환단고기’를 맹목적으로 믿는 이른바 민족주의자들은 ‘환단고기’를 부정하는 현대 학계를 일본의 식민주의에 사로잡힌 일제 앞잡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하지만 학계도 일제의 주장에 맞서왔고 진실을 알려고 노력했다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우리는 ‘단일민족으로서 단군의 자손’이라는 생각에 젖어 있다. 또 ‘단군신화’는 우리 역사상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의 건국신화가 아닌가. 과연 단군은 실재했고, 단군조선은 우리 민족사의 출발점인가. 그에 대한 대답은 대단히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단군에 관한 이야기가 신비적 사고에 바탕을 둔 신화의 형태로 전해지고 있기에, 그 내용을 그대로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신화는 계급사회의 시작과 함께 형성된 관념형태이다. 물론 그 속에는 원시공동체 사회의 여러 경험이 어떤 형태로든지 간에 남아있기 마련이지만, 그것도 계급사회의 발전과정에서 국가의식이나 계급의식 아래 여러모로 윤색되고 합리화되는 것이다. ‘단군신화’도 예외는 아니다. 여기서는 여러 각도로 ‘단군신화’를 재조명하고 있다. ‘단군신화’는 오랜 세월 전승되어오는 과정에서 고대사회 초기의 관념에다 도교나 불교 또는 유교적 사고방식에 맞게 재해석되거나 윤색되어왔던 것이다. 그러나 ‘단군신화’에는 우리 역사상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이 성립되는 과정에서 일어났던 중요한 사건들이 상징적으로 함축되어 있다. ‘단군신화’는 문헌상에 나타나는 가장 오래된 건국신화로서 그 의미가 크고, 그 속에 반영된 고조선 성립기의 사회상을 다소나마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귀중한 것이다.) ‘단군신화’를 맹신하는 편협하고 배타적인 민족주의는 물론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그렇다고 신화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 배타적 민족주의가 마치 단군신화에 의해서 발생하기라도 하는 양 싸잡아서 ‘단군신화는 더는 유효하지 않다.’라거나 ‘이제 단군신화는 폐기돼야 한다.’라는 식의 주장은 언어도단이라고 생각한다.
외국의 도심 속 자전거 거치대를통해 본 공공디자인1. 동기학교를 전철로 등?하교하는 나는 전철 역 앞에 배치된 자전거 거치대를 자주 보곤 한다. 사실 그 동안은 비를 피해 잠시 머물러 있는 자리로만, 그렇기 때문에 그저 그런 흔한 자전거 거치대라고 생각하고 눈여겨보지 않았다. 이것은 나뿐만 아니라 자전거를 이용하는 사람이든지 아니든지 간에 ‘거치대’라는 자전거의 부산물은 우리들의 이목을 끌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공공디자인이라는 소재를 갖고 어떤 주제를 선택할 것인지 곰곰이 생각하던 찰나에 이런 흔한 거치대가 내 눈에 들어왔다. 우리 집 가까운 역 앞에 공영 자전거 무료 대여소가 세워졌는데 둥그런 곡선들과 직선이 만나 물결 치는듯해 보이는 건물의 외관은 너무나도 세련되고 디자인적인 요소가 많아 보였다. 그런데 그 건물 주변의 자전거 거치대를 보니 건물과는 달리 정말 평범한, 흔히 거치대라고 생각하는 고정관념 속의 그 반듯한 거치대였다. 디자인적인 새 건물을 보며 흥미를 느꼈던 나는 거치대를 보며 아쉬움을 금할 수 없었다.그래서 생각한 것이 바로 디자인적 요소를 살린 공공 자전거 거치대인 것이다. 도심 속에 우리에겐 너무 익숙해져 큰 신경을 쓰지 못한 자전거 거치대가 디자인과 만난다면 재미와 편리함은 물론 더 나아가 경제적 홍보 효과도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쉽게 찾아 볼 수 있지만 눈에 띄지 않는 이 자전거 거치대라는 주제를 외국의 사례에서는 어떤 방법으로 디자인화 했는지, 또 그 사례들을 통해 우리나라가 배울 점은 무엇인지에 대해 알아보고 싶었다.2. 서론멀게는 영국, 프랑스, 독일 가깝게는 일본, 중국 등 세계 각국에서 자동차 대신 자전거를 강조하고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하에서 공영 자전거를 무료로 대여하는 프로그램이 많이 생겨났다. 자전거 공급이 많아진다면 자연히 자전거 거치대의 수요도 많아질진대 너무 흔하고 고루한 디자인보다는 시선을 한눈에 사로잡을 수 있는 이색적인 자전거 거치대를 만든다면 사람들의 자전거 사용량이 증가할 것은 자명한 일이다. 이처럼 외국에서는 공영 자전거 무료 대여 프로그램이 많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자전거 거치대가 주목받게 되고 이는 사람들의 미적 욕구를 충족할 수 있는 공공디자인의 모습을 한 자전거 거치대의 증가를 불러 일으켰다고 볼 수 있다.나는 여러 가지 외국의 자전거 거치대 사례에서 볼 수 있는 Fun적인 요소들에 대한 나의 생각과 함께 이런 사례들이 단지 재미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기능적인 면모까지 뛰어남을 분석할 예정이다. 제품의 기능면을 중시하는 것은 물론이고 디자인 요소까지 빼지 않고 꼼꼼히 따져 보는 것이 현대인들이다. 디자인 요소가 없으면 아무리 기능적인 면이 뛰어나더라도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금방 잊혀지고 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까다로운 현대인들의 입맛을 외국의 디자이너들은 어떻게 맞췄는지에 대해 사진들을 통해 상세히 알아 볼 예정이다. 또한, 이런 미적 요소만을 갖춰서는 진정한 공공디자인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Fun적인 요소뿐만 아니라 자전거 거치대라는 특수한 목적을 갖고 있는 제품의 기능면을 어떠한 방식으로 현대의 시각에 맞게 살렸는지에 대해서도 알아 볼 것이다.3. 본론① 미적인 요소들을 부각시킨 자전거 거치대그림 데이비드 번의 독특한 자전거 거치대가 이목을 끈다.그림 1은 뉴욕에 설치된 예술가 데이비드 번David Byrne의 자전거 거치대들이다. 심플한 실루엣이 인상적인 데이비드 번의 자전거 거치대들은 도시 환경 속의 활력소로 자리 잡을 듯하다. 그의 디자인은 특히 거치대가 설치될 주변 환경과의 교류가 돋보인다고 할 수 있다. 가령 뉴욕현대미술관인 MOMA 앞에 있는 거치대(왼쪽에서 위에서 두 번째 사진)는 어딘가 현대 예술 작품 같은 느낌이 든다. 사실 이 거치대는 처음에 봤을 때 여자인 나로서는 너무도 당연하게 하이힐의 형상인 줄 알았지만 미술관 앞에 있다고 하니 왠지 모르게 기하하적인 문양으로 다시금 보이며 특이하게도 빨강색을 사용하여 시각적으로 더욱 강렬함을 보이고 있다. 또한, 왼쪽에서 위에서 첫 번째 사진의 거치대는 링컨 터널 앞에 배치되어 있다. 터널이라는 지역적 환경과 어울리게 자전거 거치대 역시 귀여운 자동차 모양을 하고 있어 외관상 위화감 없이 아우르고 있는 듯하다. 이런 케이스를 보면 어디서나 똑같은 천편일률적인 자전거 거치대가 아닌 지형적 환경과 특성에 따라 디자인 하는 것도 공공디자인의 측면에서 볼 때 미적인 요소뿐만 아니라 그 지역에 미치는 경제적 홍보 효과도 상당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이 거치대 작품들을 통해 어느덧 도심 속의 예술이라는 말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상이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 피부로 와 닿았다. 사실 이 작품들은 자전거를 많이 거치할 수 있는 능률적인 면은 부족한 듯 보이지만, 아무런 위화감 없이 주변 환경과 어울린다는 특색을 통해 공공디자인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그림 뭉크의 와 자전거 거치대의 만남다음으로 알아볼 것은 파디PADI 유학 미술 건축 교육원 학생인 JOOs님의 프랑스 자전거 거치대이다. 이 거치대를 보자마자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너무나도 놀랐다. 이 거치대는 귀여운 것을 좋아하는 아동들이나 여성들은 물론 시각적으로 쉽게 눈에 띌 수 있어서 관광객들에게도 인기가 좋을 것 같다. 한눈에 봐도 뭉크의 작품인 절규를 앙증맞게 형상화시킨 이 거치대는 앞서 보았던 데이비드 번의 작품에서 떨어지는 능률적인 면에서도 많이 향상된 것을 볼 수 있다. 일단 색상 면에서도 검정과 노랑의 대비로 자전거 거치대의 위치를 쉽게 파악할 수 있고, 기능적 디자인 면에서도 사람 형상을 본 따 만들어 구부러진 허리 쪽의 빈 공간을 통해 자전거를 비스듬히 세우고 안전장치를 건 후 주차하는데 용이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시각적인 면에서 굉장한 센세이션을 일으키는데 우리에게 너무도 익히 알려진 이 고명한 미술 작품이 길거리에 배치된 자전거 거치대로 둔갑한다고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② 공공디자인의 요소인 기능성을 부각시킨 자전거 거치대그림 심플한 미와 기능을 갖춘 거치대다음은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에 위치한 자전거 거치대이다. 모양 자체가 둥그런 우체통을 연상시키며 흡사 책이 펼쳐져 있는 것처럼 되어 있어 일단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러나 이런 미적인 요소는 단지 독특한 외관상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보조적인 기능 역할을 할 수 있게 한다. 종종 거치대 위에 지붕이 없어서 비나 눈이 오면 가죽으로 된 안장이 다 젖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이 거치대는 펼쳐 있는 책장 모양 비 가리개가 있어서 비가 올 시에는 안장을 보호할 수 있게 설계해놓았다.그림 버스 정류장과 비슷한 자전거 거치대. 우리의 눈에 익숙하다.뉴욕시의 가로변에 버스 정류장과 신문 가판대를 만드는 Cemusa란 회사가 37개 중 첫 차양이 있는 거치대를 만들었다. 외관상 전체적으로 우리나라의 버스정류장과 닮아 있다. 아마도 제작 회사가 버스 정류장을 만드는 회사이기 때문일 것이다. 외관상으로는 폭우가 내릴 경우 자전거를 보호하기는 어려울 것 같으나 이 주차시설은 짧은 기간만 거치할 수 있는 단기 주차 시설이기 때문에 상관은 없을 듯하다.
‘바스 부인’을 통해 본중세의 여성 평등론적 개념과 한계제프리 초서의 서평1. 서론문학이 시대를 반영한다는 말은 아주 기본적인 전제이며 명제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문학 작품을 접했을 때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많은 여성이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한 채 무시당하고, 핍박받으며 침묵하는 것을 흔히 발견할 수 있다. 여성은 종교, 가정, 정치, 경제 등 모든 문화적인 면에서 남성에 종속되고, 남성에 의해서 결정되는 몰가치적이고, 무개성적인 일종의 기계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가장 종교적이고, 가장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색채가 현저한 중세 시대에 인간으로서의 가치와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남성 중심의 사회에 정면 대응한 어찌 보면 파격적이고 특이한 여성이 자세하게 나와 있는 책이 있다. 바로 제프리 초서(Geoffrey Chaucer, 1340-1400)의 『캔터베리 이야기』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동시에 떠올랐던 책이 바로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이다. 자기만의 방에서는 문학 속에서 현격하게 나타나는 성 차별의 문제점과 함께 여성이 문학에서 불필요한 존재로 전락해버린 중세 시대를 볼 수 있다. 이렇듯 중세라는 특수한 시대적 배경하에 귀족 등 위층 계급도 아닌 여성이 작품에 주요 역할로 등장해 남녀평등을 부르짖으며, 성의 혁명, 여권의 신장 등을 위해 성경의 내용을 인용해가며 자신의 논리에 맞게 재해석하고, 또한 그녀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등의 과감한 태도는 상당히 놀라움과 더불어 가히 당대 사회에 충격을 부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2. 본론①여성평등론적 측면에서 본 바스 부인바스 부인에 대한 외관적 묘사는 기존의 여성성이 여전히 남아 있는 시대상과 달리 자칫하면 음란하고 정숙하지 못한 여성으로 오인하기 쉬울 수도 있으나 다시 생각해보면 이것은 저자가 그리하도록 계획한 것이 아닌가 싶다. 십 파운드나 되는 훌륭한 천으로 머리를 덮고, 다리에는 현란한 진홍색 각반을 매고, 홍조를 띤 윤곽이 뚜렷한 얼굴, 육감적인 외모 등 바스 부인을 설명하고, 또한 많은 남성과 연애를 했고, 정식 결혼만 다섯 번을 했다는 등의 파란만장한 그녀의 삶을 처음부터 언급하고 있다. 이는 중세의 기독교적 윤리관에 어긋나는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중세 기독교는 종교적 권위로 가부장적 결혼 관행을 정당화하며 남성중심의 담론에서 여성을 배제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처럼 중세에서는 꿈도 꾸지 못할 여러 번의 재혼을 한 바스 부인의 행위(시대적인 잣대에 의해 규정된 여성의 전통적인 절제나 금욕 등을 타파하고 여성도 남성과 같은 하나의 완벽한 독립적인 주체가 되어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려 하며, 더 이상 남성에 의한 종속적이고 열등한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남성을 조종하고, 경제적 주도권을 지배하려 하는)는 여성평등론과 직결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바스 부인은 열두 살 때 이래로 다섯 번의 정식 결혼을 했다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전통적인 여성성을 고려해 본다면 분명히 성이 문란한 여인이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여러 번의 결혼을 강력하게 변호하며, 그 방법으로 성경의 권위 있는 말씀들을 인용한다. 바스 부인은 남성들처럼 여성이라는 타이틀을 벗어 던지고, 남성과 똑같은 인격체로서 결혼을 영위할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그녀는 결혼, 동정, 생식 기관에 관한 그녀만의 정의를 통해서 기존의 여성성을 타파하고, 남성을 성으로 지배하고, 그것이 전혀 문제 되지 않은 것임을 성경 내용으로 입증하고 있다.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성경은 오래간 남성 중심 사회에서 남성에 의해서 재해석, 재정비되었다는 전제를 둔다면, 바스 부인 그녀 스스로 성경에 기재된 논리적 해석이 비단 우스꽝스럽거나 억지 어조에 가깝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바스 부인이 성이라는 측면에서 여성이 남성에 종속되기보다 오히려 남성을 지배해야 한다는 주장을 토대로 그녀는 단지 성생활에서 그녀의 주장을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열등한 위치에서 하나의 인격적 정당성을 갖은 소유자로의 탈피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여권론자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이행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그녀는 다섯 명의 남편들에 대해서 언급하기에 앞서 세 명은 좋은 사람들이고, 두 명은 못된 사람이라고 말한다. 먼저, 바스 부인은 그녀가 한창 젊고 아름다운 용모를 가지고 있던 시기에 결혼한 나이 많은 부유한 남자들을 남편으로 맞아 다스리는 일화 등을 소개한다. 그녀는 거짓말과 거친 욕설, 남편에 대한 성(性)적 행사 등을 통해서 가정의 경제적인 물권을 취득하게 된다. 그녀는 더 이상 재산에 대한 권한은 남성에 의해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똑같이 아내에게도 할당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더 이상 바스 부인에게 여성은 남성의 열등 존재가 아니며, 대등한 관계로 그에 따른 응당한 물질적 가치도 공유해야 하는 독립적 주체이다. 그러면서 여성이 남성으로부터 독립된 자아로 인정받으려면 경제적 뒷받침이 필요하다는 것을 간과하지 않고 있다. 바스 부인은 전 남편들로부터 물려받은 상당한 재력을 소유한 40대가량의 나이의 미망인이고, 다섯 번째 남편은 비록 가난하지만, 한때 옥스퍼드 대학생이었던 지식인이며, 20대의 젊은 청년이었다. 바스 부인은 그런 그를 돈이 아닌 사랑으로 결혼했다고 말하며 모든 재산과 땅을 그에게 양도한다.하지만, 남편은 바스 부인의 그런 마음도 모른 채 폭력을 휘둘러 그녀의 귀를 먹게 한다. 다섯 번째 남편은 남성 중심적인 세계관이 뚜렷한 가부장제 사회의 전형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그가 바스 부인에게 여성은 남성에 종속되어야 하는 열등한 존재이며, 사악한 악녀로 취급하는 역사와 성서 이야기를 설교하며 기존의 여성성을 강조하는 인물로 묘사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기존의 여성성을 강조하는 다섯 번째 남자에게 바스 부인은 남편이 가장 좋아하는 책으로 여성 비하에 대한 모든 내용이 집약된 책을 훼손시킨다. 결국, 남편은 바스 부인에게 용서를 구하고, 재산을 아내에게 양도함으로써 다시는 싸우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이렇게 바스 부인과 그녀의 남편들과의 관계에 얽힌 일화들을 소개함으로써 경제적인 주도권 소유 문제가 서로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하는데 얼마나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하는지 유추해 볼 수 있다. 이러한 경제적인 부는 자아를 찾게 하고, 바스 부인은 남성으로부터 여성이 독립적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그녀의 논지를 피력하는데 강한 원동력으로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②한계점앞서 말했듯이 바스 부인은 남성 중심적 가치관에 의한 여성이 열등하다는 편견을 단절하고, 올바른 가치관을 확립할 수 있는 독립적인 주체로 여성에 대한 인식을 다시 재정립하고 있다. 그렇지만, 한계점은 있다. 남성 중심이라는 시대적 이데올로기의 한계를 완전히 탈피하지는 못한 것이다. 그녀는 여성은 신이 주신 능력 이외에 어떤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해 기존의 여성성을 다시 부각시키는 오류를 범하고 시대의 한계성을 완벽하게 넘지 못하고 있다. 더불어 남편 없이 자신은 혼자 살 수 없으며, 부유한 늙은 남자들과 결혼해 재산을 물려받는 등 그녀의 삶은 남성에게 귀의하는 삶이 여성이 살아가는 안락한 길임을 슬며시 비추어 주고 있다. 또한, 다섯 번째 남자를 그녀의 남편으로 맞이하고자 스스로 인연을 조장하는 것은 자신의 어머니로부터 배운 방법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즉, 여성이 남성을 군림하는 방법은 오직 거짓과 위선, 속임수로 가능한 것이고 당시 시대의 이분법적인 여성(기독교적 관점에서 성모 마리아와 이브)상을 고려한다면 바스 부인의 어머니로부터 바스 부인에 이르기까지 여성의 계속되는 역사는 사악한 이브의 상을 수반한다는 것이다.남성 지배 이데올로기 하에 있으면서도 바스 부인은 다섯 남편을 주무르고 지배권을 장악하여 승리자 혹은 자유인으로서의 면모를 보인다. 그러나 그녀의 활동 범위는 단지 가정의 테두리에 국한된다. 그녀는 정치적, 사회적으로는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 교회의 예배에 참여하여 헌금도 하고 순례 여행도 다니며 가부장제의 토대가 되는 기독교에 대해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 그녀를 보면, 여성의 근본적인 권익 신장에 소극적인 그녀를 발견할 수 있다. 또한, 바스 부인이 다섯 번째 남편과의 싸움에서 여성으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굳히려고 투쟁한 것으로 보일지 모르나 결국은 아내인 바스 부인에게 재산권을 위임하고서 화해를 통해 더 이상 싸움은 없었다고 한다. 이것은 바로 뒤이어 나오는 바스 부인이 덴마크에서 인도에 이르기까지 그에게 부인으로서 역할을 최대한 잘 이행했다는 사실과 모순적인 성향을 보인다. 즉, 결과적으로 여성이 남성에게 순종적 태도를 보일 때 그 둘은 타협할 수 있고 서로 상호 보완할 수 있는 관계가 성립된다는 말하고 있다. 이것은 바스 부인이 얘기해주는 기사 이야기에서의 결말에서도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성이 원하는 것이 남성 위에 군림하는 것이고, 젊은 기사 역시 늙은 노파에게 모든 것을 위임하지만 결국 노파도 젊은 기사에게 만족과 기쁨을 줄 수 있도록 모든 일에서 복종을 했다고 나온다. 결과적으로 남녀평등 및 여성의 주도권 확립 등을 이룩하기 위해서 여성이 임으로 남성 중심적 사회를 완전히 탈피할 수 없다는 것을 바스 부인 스스로에게서도 드러나고 있다는 것을 작품 속에서 고찰해 보았다.
사후세계에 대한 중세 시대의 해답‘연옥’Ⅰ. 서론Ⅱ. 본론1. 연옥의 기원2. 연옥 탄생의 시대적 상황 - 유럽 중세 전성기의 태동과 발전과정3. 연옥의 정립 - 아우구스티누스의 종교관을 바탕으로4. 연옥의 시기적 발전5. 연옥이 미친 영향Ⅲ. 결론Ⅳ. 참고문헌Ⅰ. 서론인간은 사후세계가 있음을 믿고 고대부터 사후세계에 대해 끊임없이 상상하고 있다. 그 때문에 인간의 종교관에서 ‘죽음’이라는 것은 새로운 시작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종교는 사후세계의 이미지를 형상화해 인간의 사후세계에 대한 불안감을 해결하려 했다. 이러한 불안감은 신앙과 결부하여 중세에 연옥이라는 개념을 탄생시켰다. 11세기에서 14세기 유럽은 종교, 문화, 문학적으로 큰 발전을 하였다. 그리하여 중세의 전성기인 12세기 말에 기독교는 저승의 제3의 처소, 이른바 연옥이라는 개념을 교리체계에 흡수하게 된다. 연옥의 개념적 토대는 고대에서부터 내려오는 개념이 신학자에게 영향을 끼쳤다고 보는 견해와 성서에 근거하여 기독교의 아우구스티누스가 쌓았다는 견해가 있다. 나는 연옥의 기원을 두 방면에서 찾아보고 기독교 측 아우구스티누스의 종교관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 또한, 연옥이 기독교에 흡수될 수 있었던 당시 유럽 사회의 변동 상황을 기독교적 차원에서 알아보았다. 그리하여 연옥이 시기적으로 어떤 방면으로 발전하여 중세 사람들에게 연옥이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참고 문헌을 토대로 알아보았다.Ⅱ. 본론1. 연옥의 기원연옥이란 일반적으로 세상에서 죄를 풀지 못하고 죽은 사람이 천국으로 들어가기 전에, 불에 의해서 죄를 정화(淨化)한다고 하는, 천국과 지옥(地獄, infernum)과의 사이에 있는 상태 또는 장소를 또는 상태)를 말한다. 예전에는 연옥이 지어낸 장소이며, 성서에는 나오지 않는 개념이라고 보았다. 연옥의 개념은 기독교의 탄생 이전시기부터 이어진 인간의 사후세계에 대한 관심과 불안감이 만들어 낸 고대의 상상 세계에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고대의 상상 세계가 어느 정도 신학자들에게 영 것이다. 자크 르 고프의 『연옥의 탄생』에서도 연옥의 개념은 이집트에서의 지옥에 관한 상상 세계나 그리스?로마 신화들, 그리고 그리스의 철학자들 저승에 대한 상상이나 논의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후 연옥에 대한 논리는 기독교의 교리체계 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요소가 되었으며, 개념과 체계 또한 논리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기독교 측에서는 연옥의 기원을 성서에 근거하고 있다.“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을 순수하게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결국 없어지고 말 황금도 불로 단련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황금보다 훨씬 더 귀한 여러분의 믿음은 많은 단련을 받아 순수한 것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는 날에 칭찬과 영광과 영예를 받을 것입니다.”(1베드 1.7)“만일 그 집이 불에 타버리면 그는 낭패를 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신은 불속에서 살아나오는 사람같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1고린 3.15)연옥에 대한 믿음은 이처럼 교회사의 초기부터 성서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나타나고 있다. 오늘날의 역사학자들은 연옥에 대한 교리가 3세기부터 13세기에 이르는 오랜 기간을 거쳐 확정된 것으로 설명한다. 특히 연옥 교리는 1170년경부터 1220년경 사이에 뚜렷이 등장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또한, 연옥 교리가 확정된 배경으로 그리스도교적 봉건 사회의 변동 현상을 여러 방면에서 걸쳐 지적하기도 한다. 이후 중세 기독교의 지배적 철학이었던 교부철학의 아버지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가 연옥이라는 개념의 토대를 만든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어떠한 종교관을 바탕으로 연옥을 생각하였는지는 3장에서 다루기로 한다.2. 연옥 탄생의 시대적 상황 - 유럽 중세 전성기의 태동과 발전과정연옥이라는 개념이 실질적으로 정립되는 12세기 전에는 연옥의 형성에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4세기 이후 계속된 교리 논쟁으로 말미암은 로마 황제와 교황 간의 대립은 교회 내부의 권력 투쟁으로까지 심화하였다. 476년, 서로마에서 황제제도가 사라짐으로써 서로마 제국은 멸망하고, 서로마는 정치적 무 새로운 왕국을 새운 게르만들에 대한 포교활동에 더욱더 중점을 두었다. 그래서 기독교는 성상 숭배와 수도원 중심의 포교활동을 펼쳤다. 8~9세기에는 이교도인 이슬람세력과 바이킹족 등의 침입으로 다시 혼란한 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혼란의 시대상황 속에서 로마 교황을 필두로 하는 교회세력은 ‘정화하는 불’이나 저승, 연옥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두지 못했다. 그저 교세 확장이 주 관심사였던 것이다. 그렇기에 저승에 대한 이전 시대의 논의는 수도원을 중심으로 하여 그 학문적 연구를 통해 그 명맥만 유지하였을 뿐이다.9~10세기에는 봉건제도의 확립이 이루어지는데, 이러한 봉건제도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지방분권화의 형태를 띠게 되며 카롤링 제국의 몰락과 더불어 더욱 심화한다. 종교에서도 지방 분권화 현상이 나타났고, 부패가 만연하게 된다. 이 때문에 수도원 개혁운동과 교회 내부의 자체 개혁이 진행되었고, ‘카노사의 굴욕’ 이후 교황권이 황제권보다 우위를 차지하면서 기독교 사회가 교황 중심의 중앙집권화를 이루게 된다. 또한, 11세기에는 더는 외적의 침입 위협을 걱정하지 않게 되면서 경제생활의 발전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서유럽의 농업혁명을 가져왔다. 농업의 생산성이 향상된 결과 식량이 풍부해지면서 경제를 비롯하여 여러 분야의 발전을 위한 토대가 마련되었다. 또한, 12세기 이후 지대의 금납화가 진행되어 화폐경제가 발달하였으며, 동시에 도시에서는 상업이 발달하기 시작한다. 또한, 십자군 원정 덕분에 상업의 발달이 더욱 가속화되며, 중세 인들은 그동안 접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을 접하고 새로운 문물을 접하게 된다. 이렇게 유입된 동방의 이교문화와 사상이 연옥이 만들어질 때 어느 정도 영향을 준 것이다.3. 연옥의 정립 - 아우구스티누스의 종교관을 바탕으로아우구스티누스는 죄인들과 죄들의 일정한 범주를 규정하였는데 이것은 지옥을 정립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정화의 시간을 최후 심판으로부터 죽음과 부활 사이의 중간으로 옮겨 놓을 뿐 아니라 이승에서 정화전적으로 선한 자’(천국행), ‘전적으로 악한 자’(지옥행), ‘그렇게 선하지는 않은 자’와 ‘그렇게 악하지는 않은 자’ 등 네 범주로 분류했다. 전적으로 선하다면 죽은 후 천국으로 갈 것이고 전적으로 악하다면 지옥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문제는 그 중간에 끼어 있는 부류의 사람들이다. 나머지 부류들에 대한 사고는 연옥이 나타날 중요한 측면이 된다. ‘그렇게 악하지는 않은 자’는 지옥으로 가나 아직 희망을 품을 수도 있고, 대도를 통해서 좀 더 견딜만한(원래 지옥보다 강도가 약한) 지옥으로 옮겨갈 수도 있다. 또한, ‘그렇게 선하지는 않은 자’는 구원을 얻을 수는 있으나 그것은 불을 통한 정죄의 과정을 거친 다음에야 가능하다. ‘그렇게 선하지는 않은 자’와 ‘그렇게 악하지는 않은 자’라는 두 개의 범주는 하나의 중간 범주로 합쳐질 것이다.이 당시 연옥은 장소의 개념을 갖지 못하고 단지 정화의 불로서의 이미지로 인식되었다. 생전에 지은 대수롭지 않은 죄들을 다름 아닌 불로 태우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정화적 공간의 성격은 모호했다. 이후 중세 초 대 그레고리우스 교황Gregorius I은 그러한 공간이 지상에 있다고 상상했고, 흔하게는 아무도 벗어날 수 없는 본래 의미의 지옥과 다소 장기간 고통과 정화를 받고 천국으로 올라가는 상위의 지옥만을 구별했다. 이후 아우구스티누스의 정화의 불은 연옥이라는 이름을 갖추고 시공간적 위치가 명백히 정의되었는데 그 시기가 12세기였다.4. 연옥의 시기적 발전12세기 말에 대 그레고리우스에 의해 천국과 지옥의 양극적 공간이었던 저승의 개념에 ‘제3의 저승’으로서 연옥이 부가되었다. 즉, 전적으로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자들을 위한 독자적 ‘공간’으로서의 연옥이 탄생한 것이다. 이 공간은 최후의 심판 이후 모든 주민이 천국으로 떠나면 소멸한다. 또한, 연옥에 머물게 되는 시간에 대한 개념이 정립되었는데, 연옥의 체류 기간을 결정하는 요소는 세 가지이다. 첫째, 망자의 임종 시의 죄의 양(속죄 가능한 ‘정죄’)에 따라, 둘째, 이승에혼의 정화 기간을 단축하기 위해 지급하는 대도(기도?보시?미사)에 따라, 셋째, 교회의 개입 여부에 따라서이다. 또한, 연옥에서 정화의 과정이 주는 고통을 피하려는 방법으로 현세에서의 참회와 고해가 등장하였다. 이 시기까지의 연옥은 천국과 지옥의 두 가지 가능성 사이의 심판적 공간이었으며, 망자의 영혼을 놓고 벌이는 선한 천사들과 악한 천사들, 고유한 의미에서의 천사들과 마귀들 간의 싸움이라는 이미지로 나타난다.하지만, 13세기 이후 연옥의 이러한 어두운 이미지는 희망의 의미로 변화한다. 13세기 들어 도시를 중심으로 한 상업의 발달이 만연되자 교회도 이러한 시대의 변화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 이전까지 교회는 상업을 죄악으로 보았으며, 특히 고리대금업을 경멸하였다. 그렇기에 고리대금업자들은 연옥에도 들어오지 못하고 지옥으로 떨어진다고 보았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래서 기독교와 고리대금업자 사이에 타협이 이루어지게 되는데 바로 그들에게도 연옥의 구석자리가 하나 주어진 것이다. 즉, 본질적으로 지옥이냐 천국이냐의 선택은 마지막 순간, 최후의 기회였지만 천국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연옥은 누구에게나 열린 것이었기 때문이다. 단지 문제는 연옥에서 정화의 시간을 얼마나 단축하는가에 있었다. 이렇게 연옥의 교리가 확립되자 교황은 하느님과 만민 사이의 중재자로서 저승의 영혼에 대해서까지 좌지우지하게 되었다. 교회는 연옥에 체류하는 시간을 완전히 또는 부분적으로 단축하는 것을 망자들에게 보장해주는 수단으로서 13세기 이후 ‘면죄부’를 판매했다. 연옥 덕택에 지옥을 면하게 되리라는 희망은 고리대금업자들로 하여금 13세기 경제와 사회가 자본주의를 향해서 전진할 수 있도록 했다. 이것은 개인의 대도도 필요하지만. 교황의 사면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것을 상징하면서 교황의 권위를 극대화 시켰다. 이후의 연옥은 흑사병의 창궐과 초기 자본주의 국가의 등장 덕분에 그 공간적 영역이 확대되었지만, 연옥을 이용하여 부의 축적을 이루려던 교회는 종교개혁의 한 원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