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나무의 파수꾼]을 읽고작가 : 히가시노 게이고출판사 : 소미미디어양윤옥 번역히가시노 게이고는 한국의 독자들이 언뜻 생각하는 것보다 많은 작품을 출간하는 것 같다. 간단히 검색엔진에서 ‘히가시노 게이고’만 입력해보아도 도대체 몇 권의 작품이 주르륵 나오는지. 그 중 나는 두 권을 읽어보았다. 영화로도 감상할 수 있었던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그리고 이번에 읽은 [녹나무의 파수꾼]. 고작 두 작품을 읽었으니 히가시노 게이고의 팬이라고는 절대 말할 수 없겠고 기회가 되면 읽는, 그러니까 우연히 누군가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을 읽고 있다면, “아..새로운 책이네? 히가시노 게이고의..”.. 하고서 읽어보는 작가와 독자의 관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녹나무의 파수꾼]. 한국어로 번역된 제목이라서 그런지 제목을 보고는 아하하...했다. 그러면서도 부제는 ‘어떤 소원이라도 들어주는 나무’이다. 사실 부제가 상당히 흥미롭다. 정말로 어떤 소원이라도 들어주는 나무인지. 그저 공상과학 소설이라면 너무 유치한데.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려고 하기에 이런 거창한 제목을 붙여놓았는가. 대략 이와 같은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책을 들여다보았다. 아마도 수많은 독자들이 나와 같은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해 열심히 책장을 넘길 것이다.속 시원하게 말하면, 몇 천 년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온 거대한 녹나무가 모든 소원을 들어주는 것은 아니지만 ‘이 정도면 설득력은 있네..’. 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는 있다. 과학적으로 묘하게 설득력이 있어서 작품을 다 읽은 후에는 사기 당했다는 느낌보다 ‘오..이런 생각을 해내다니 머리가 참 좋네.‘ 하고 생각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작중 인물 레이토와 유미에게는 정말 짜증난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레이토는 도무지 자신의 임무에 대한 자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분명히 강력한 주의를 들었음에도 막무가내인 유미의 부탁을 들어준다. 그리고 유미라는 여자는 또 왜 그렇게 막무가내인지. 남의 직업에 대한 사명감이건 뭐건 관심 없다. 자신의 사정이 먼저니까 그저 도와달라고 한다. 이들의 이런 성격으로 인해 작품이 전개되고 좋은 결말이 나왔으니 다행이지만 개인적으로 이런 성격. 정말 정말 싫다. 주먹을 쾅 내려치게 하는 캐릭터를 일부러 찾아 만들어 낸 것이라면 할 말 없지만.작품 중에서 어머니 다카코와 아들 기쿠오의 이야기는 마음을 울리게 한다. 짧게 이야기를 해 보자면 기쿠오는 어릴 적 음악에 커다란 재능을 보였다. 어머니 다카코는 이런 아들이 음악적으로 성공하기를 바랐고 기쿠오를 물심양면으로 돕는다. 어머니라는 존재의 아들이라는 존재에 대한 욕심도 작용했다. 그 욕심이 기쿠오를 숨 막히게 했던 것 같다. 그저 취미로 생각했어도 괜찮았을 것을. 어머니의 기대가 기쿠오를 병들게 한 커다란 이유 중 하나였다. 서서히 심리적으로 짓눌려가던 기쿠오는 결국 음악에의 길을 포기한다. 여기까지는 별다를 바 없다. 그저 평범한 세상에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일 뿐. 놀라웠던 것은 어머니의 마음인데. 어머니의 기대에 짓눌려 폐인이 된 기쿠오는 마치 어머니 보라는 듯 항의하는 듯 거리 퍼포먼스를 하기 시작한다. 이를테면 거리에서 분장을 하고 미동도 없이 가만히 서 있다가 사진을 찍을 때 갑자기 움직여 사람을 놀래키는 거리의 퍼포먼스. 어머니는 아들의 공연을 지켜보았나보다. 멀리서가 아니라 가까이서, 바로 앞에서. 그리고서는 아들의 손에 말없이, 조용히 돈을 쥐어주고는 돌아간다. 다음번에도 또 그 다음번에도 그렇게 아들의 얼굴을 보러 온다. 자신의 기대가 아들을 짓눌렀다는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를 바라보며 말없이 공연을 하고 그리고서는 어머니가 내어주는 돈을 꼬옥 쥐는 아들의 심정을 우리는 어떻게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 둘의 나누지 못한 마음은 너무나 아쉽다. 이 아쉬운 마음을 그대로 끝낼 수는 없는 건데..우리들의 마음을 달래주는 것이 바로 거대한 녹나무. 시들어가는 자신의 정신과 육체를 바라보면서 어머니에게 하고 싶었던 말들을, 어머니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자신의 손으로 만든 음악을, 어머니가 이해해주었으면 하고 바랐던 감정을, 기쿠오는 녹나무에게 전해주고 온다. 아들의 모든 감정과 생각을 어머니에게 생생하게 전달해 줄 수 있는 녹나무였었기에, 독자들은 아쉬움을 달랠 수 있다.어머니라는 존재가 그런 거겠지..하고 생각한다. 커다란 기대가 무너져도, 자신의 마음을 아프게 해도 조용하게 자식이 걸어가는 길을 응원하게 되는 필연적인 어머니라는 존재의 마음. 히가시노 게이고가 이 포인트를 참 잘 살린 것 같다. 이 포인트만으로 읽어볼 충분한 가치가 있다.작품에서 또 한 가지 참신한 설정을 찾을 수 있다. 거대한 녹나무가 정말로 생각과 감정을 전해주는 존재이기 때문에 파생되는 문제인데, 타인에게 전달하고 싶지 않은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까지도 고스란히 타인에게 전달되어 버린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동생을 시기했던 기쿠오의 질투심이라든지, 살아오면서 떳떳하다고만은 할 수 없는 누군가의 뒷이야기라든지 말이다. 작품 속에서는 등장인물들이 나름대로의 결심으로 자신의 마음을 전달할 것인지 아닌지 결정하지만 나라면 어떨까? 나라면 나의 생각과 감정을 고스란히 남에게 전해주려고 할까? 지금 대답을 말하라면 ‘아니오.’ 이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조차 자신의 감정을 고스란히 전해준다는 것. 할 수 있는 길이 있다고 해도 하지 않을 것 같다. 적당히 감춰주고 적당히 표현하고. 그것이 인간끼리의 묘미이고 타인에 대한 배려 아닐까?
[동물 농장]을 읽고지은이 : 조지 오웰책을 읽으면서 이렇게 분노했던 적은 일찍이 없었던 것 같다. 무자비한 폭력으로 민중을 억누르는 권력자에 대한 불타는 분노, 우매한 짐승들을 교묘히, 교묘히 속여 갉아먹는 권력자의 옆에 붙은 아첨꾼에 대한 증오에 가까운 분노, 삶도 자유도 빼앗기면서 그저 우직하게 일하면서도 우매하기에 이용만 당하고 버림받는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책망어린 분노. 조지 오웰의 [동물 농장]은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전체주의의 시작을 그리고 있는 소설이다. 인간 사회를 그대로 짐승에 비하였으며, 짐승 사회를 인간 사회와 아주 똑같이 그려놓음으로 그 시대, 헛 희망에 부풀어 있던, 결국 한치 앞도 내다 볼 줄 모르는, 결국 실패와 더불어 수많은 희생을 낳은 인간의 이상을 제대로 비꼬아 놓았다.어렸을 적, TV에서 동물농장을 본 기억이 있다. 돼지들이 인간의 집에서 중절모를 쓰고 담배를 피우며 위스키를 마시던 장면이었다. 담배연기가 자욱하게 흐르는 거만한 모습의 돼지들이었다. 거만한 거구의 살덩이들이 인간과 한 식탁에 앉아있는 모습이었는데, 소설 [동물 농장]의 마지막 장면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그칠 줄 모르는 탐욕을 부리던 돼지들이 결국에는 인간을 흉내낸다.(돼지들은 두발로 걷고, 중절모를 쓰고, 담배를 피우고, 자신들의 절대 증오의 대상이라던 인간을 결국에는 흉내내게 된다. 탐욕의 끝은 인간이니까.) 누가 인간이고 누가 돼지인지 도저히 분간할 수 없는 마지막 장면은 [동물 농장]의 하이라이트라 할 만 하다.속임수. 우매한 민중들을 속이고서는 자신들을 행동을 뻔뻔스럽게 정당화 시키는 저 극도의 사악한 마음,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어떻게 표현해야 또다시 떠오르는 분노를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전달할 수 있을까? 전달된다면, 또다시 인류에게는 분노라는 광풍이 불지 않을까? 음..공감하기 쉽도록 한국 전국민의 분노를 샀던 최순실 이야기를 해볼까? 국민을 속이기 쉬운 바보로 취급한 그 국정 농단에 우리들은 얼마나 분노했던가? 최순실과 박근혜 전 대통령의 결말은 우리를 어느 정도 속시원하게라도 했지..만약 죄가 온 천하에 발거벗겨진 지금도 그들이 권력의 최상위를 차지하고서 날이 갈수록 국민을 우롱하며 탐욕을 부리는 것도 모자라, 매번 국민을 우롱할 때마다 ‘오늘 우리의 승리를 축하하고 싶습니다. 우리 나라는 날마다 진보하고 있습니다’ 라며 감언이설로 매번 우리를 속이려 한다면? 아마 몇 십년전만 하더라도 권력층의 억압에 시달리고 정보에 어두웠던 우리들이었다면 매번 거짓말을 들으면서도 매번 속았을 것이다. [동물 농장]의 가엾은 희생동물들처럼. 농단을 당하면서도 속기만 했을 우리들을 생각해보라. 분노가 타오르지 않는가? 그 분노가 100만 촛불을 뜨겁게 피우지 않았겠는가?[동물 농장]의 배경이 되는 러시아 혁명은, 전체주의로 대변되어지는 그 혁명은 처음은 좋았다. 부를 노동 계급에게 분배하자. 인간에게서 나온 생각이 완벽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지만, 어쨌든 그 의도는 좋았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했던가. 발걸음을 인도하는 것은 사람에게 있지 않다고. 사람의 마음을 자신이 제어하게 내버려두면 욕심과 탐욕과 차별로 물들어 갈 뿐인가보다. 그 좋았던 취지도 마음도, 결국에는 실패로 돌아가버린 것을 이제는 누구나가 알고 있지 않은가..실패해버린 그 허울 좋은 이념 뒤에 새빨갛게 흘린 저들의 피와 소리 없이 하늘에 닿은 그들의 원망은 누가 보아준단 말인가. 전체주의로 아우러지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그 이념을 나는 소설 [동물농잘]을 도구로 삼아 이 독서감상문에서 비판하고자 한다.[인간을 좀 먹는 인간의 욕심. 창조 이후 달라진 것이 없다.]전체주의는 부를 분배하지만, 그 분배를 강력하게 통제한다. 통제당하는 자는 또다시 통제하는 자를 위하여 일하게 된다. 통제하는 자는 부를 일구어 내기 위해서 노동력을 제공하지는 않고 점점 차오르는 권력을 탐식한다. 이른바 [동물 농장]의 최고 통치자 나폴레옹과 같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 편하게 무위도식하면서 타인 위에 군림하게 되면, 그 달콤한 유혹을 뿌리칠 수 있는 인간이 되어간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명예가 되었든, 권력이 되었든, 돈이 되었든, 끝을 모르고 얻으려 한다. 이용할 수 있는 자는 휴지조각처럼 쓰고 버리고, 경쟁자는 눈 앞에 왱왱거리는 파리처럼 불굴의 집념으로 제거한다. 인간의 선한 본성은 뒤로 한 채, 탐욕을 제어하지 못해 점점 자신마저 싫어했던 악한 군상이 되어간다. 세상만사의 이치가 이러하듯, 인간의 끝없는 욕심이 인간을 갉아먹는 행위는 인간이 창조된 이래, 되풀이 되는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탐욕의 제어. 너무도 어려운 일이다.전체주의가 실패했던 원인 중 하나가 이것인데, 인간의 탐욕을 물로 봤기 때문이다. 부가 제대로 분배될 수 있을 것이라 자만했던 그들의 실패이다. 부가 분배되는 과정에서 권력이 편향(누군가는 그 과정을 통제해야 하기에)되었고, 권력이 편향되자, 이제는 거꾸로 부가 편향되었다. 권력을 가졌던 이들은 그들이 누렸던 모든 것을 포기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피지배자들을 억눌렀으며, 그 편차가 커져갈수록, 억누르기 위한 힘은 커져갔다. 급기야는 민중들의 눈과 귀를 무자비한 폭력으로 가렸으며, 이제 피지배자들은 더 이상 ‘부의 분배’라는 허울을 믿지 않는다. 믿음에 균열이 생기는 순간, 노동력은 사그라들며, 경제의 파탄을 이끌고, 부의 양극화는 극심해 파국을 맞게 된다.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리기 위한 폭력에 희생당한 억울한 이들은 역사에 이름도 남기지 못했으며, 정치가 생겨난 이래 가장 억압받고, 숨막히고, 극악한 장면은 이렇게 생겨나게 된다. 이 모든 것의 원인, 인간을 좀 먹는 인간의 욕심.[자유를 억압한다. 인간을 지운다.]믿음에 균열이 생기면, 인간들은 지배자에게 순종하지 못한다. 더 나은 것을 필사적으로 추구하게 된다. 다른 곳으로 달아나고 싶어한다. 깨어나라고 소리치기 때문이다. 자신의 내면에 움크리고 있는 존엄성이란 금덩이가. 지배자들은 이 존엄성을 없애고 싶어한다. 자신들은 국민들의 노동력 위에 군림하는 것이니까. 자신들 아래에 아무도 없다면 자신 역시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는 것이니까. 존엄성을 없애기 위해서 모든 방법을 다 쓰겠지. 폭력이든, 회유든, 뇌물이든.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했던가. 일제 시대를 떠올려 볼 수 있다. 처음에, 일본은 잔인했다. 폭력을 난자했다. 한민족은 굴복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대항했다. 일본은 다음으로 한민족의 정신을 말살하려 했다.[동물 농장]에서 숨 쉬기 조차 힘든 살덩어리 돼지 나폴레옹은 교묘하게 동물들의 정신을 흐트려 놓는다. 동물 농장의 칠 계명이 그것이다. 혁명을 일으킬 때, 자신들의 혁명이 정당했던 이유를 적은 계명이다. 나폴레옹은 동물들이 글에 약하다는 것을 악용한다. 나폴레옹은 자신들을 정당하게 유지시켜 준 칠 계명을 결국에는 다 깨버리고 만다. 하나씩 하나씩 깨뜨리는 과정을 소설에서는 묘사하는데, 그 묘사가 진국인 것이다. 하나씩 깨어져갈 때마다, 탐욕의 돼지들은 한 발짝 더 인간의 탐욕을 닮아가며, 급기야는 네 발 돼지가 두 발로 걸어다닐 때, 그들은 이제 인간이다. ‘탐욕을 채우기 위해선 인간이 되어라.‘ 작가 조지 오웰의 날카로운 비판 정신이 진수를 발휘하는 장면이다.자유를 말살하기 위해 권력자에 대한 존중심을 심어주기도 한다. 인간이 가진 신앙심, 호기심, 자유로움을 획일화한다. 그 모든 것을 권력자에게 돌리기 위해 어릴 적부터 교육에 힘쓴다. 나폴레옹의 심복인 사나운 개들이 그 적당한 본보기가 아닐까 한다. 아주 어렸을 적부터 나폴레옹에게 세뇌되어, 아무것도 비판하지 못한채, 비판없이 악인의 수족처럼 폭력의 앞잪이가 된 개들. 그들에게 자유란 존재할까? 아무것도 이성적으로 판단하지 못하는 데 말이다. 자아의 무. 조지 오웰이 [동물 농장]에서 비판하고 있는 또 하나의 전체주의의 폐혜이다.
[걸리버 여행기]를 읽고지은이 : 조너선 스위프트사실, 나도 [걸리버 여행기] 완역본을 읽기 전에는 거인국과, 소인국 두 나랑 여행기가 소설의 전부인 줄 알고 있었다. 몇 십년 전 우리나라에는 걸리버 여행기의 절반 부분만 유통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늘을 나는 섬 라퓨타 여행기와 말의 나라 여행기는 쏙 빼놓은 채 말이다. 소설에서 제일 비중을 두고 있는 여행기가 말의 나라 여행기 같은데, 이 부분을 빼놓고서 걸리버 여행기라니 조금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개인적으로는, 책을 읽으면서 깜짝 놀랐던 부분이 하늘 섬 라퓨타 이다. 일본 애니매이션 ‘천공의 성 라퓨타’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작품으로 일본 특유의 정서를 담은 애니매이션인데, 지금 보아도 손색없을 정도로 대작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라퓨타의 모티브가 걸리버 여행기였다니, 새삼 나의 짧은 지식에 혀를 내두르게 되었다. 꼼짝 없이 굉장한 아이디어를 낸 애니매이션인줄 알았는데, 그런 창작 모티브가 있었다니..조너선 스위프트는 소설을 통해 인간 사회를 통렬히 비판한다. 인간에 대해서 너무 심하게 냉소하지 않느냐..하고 말한 당대의 비평가들의 말에 동의하는 바이다. 서평으로 글을 쓰고 싶지는 않아서, 소설속에 담긴 인간에 대한 냉소적 시선이나, 통렬한 비판을 다루기보다는 느낀 점을 중심으로 서술하고자 한다.[소인국 릴리푸트에서..식량조달이 가장 궁금한 한가지]걸리버가 처음 표류한 릴리푸트 역시 각종 음모가 난무하는 나라이다. 세속 인간역사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정치적인 목적으로 사람의 목숨을 다룬다. 뿐만 아니라 터무니없이 비이성적인 왕궁의 놀이..무슨 이럴 수가 있어..라고 생각하게 된다. 자연히. 누구나. 하지만 걸리버 여행기를 계속 읽다보면 너무나 허황된 이야기가 많아서.. 허풍선이 남작처럼.. 아..이 책은 원래 그렇지..하고 체념하게 된다. 이러한 허황된 이야기 중에서 가장 관심을 끌었던 것은 걸리버의 식사이다. 소인국 사람들의 키는 손가락만 하다. 그럼 그들이 먹는 음식의 크기는 손톱 끝 부분 크기만 할 것이다. 마치 좁쌀 크기와도 같다고 상상해 볼 수 있겠는데, 이 정도의 음식을 아무리 먹는다고 한들 배가 부를까? 좁쌀 10만개를 먹는다 해도 배가 부를까? 아니, 맛은 느껴질까? 그리고 한두끼가 아닌 매번 먹어야 하는 식사인데..또한 그 배설물 처리는 어떻게 하고? 걸리버가 소인국에 몇 달만 더 머물러 있었다면 소인국의 재정은 그야말로 파탄에 이르렀을 것이다. 소인국 이야기는 정말 별 것 없다. 상식적으로 통하지 않는 허황된 이야기들과, 음식 이야기 뿐이다. 인간 사회를 빗대어 나타냈지만, 깊게 생각해 보아야 할 진지함과 진실함은 부족하다. 소인국을 넘어 거인국까지의 이야기는 여행기의 처음이라 그런지 그저 남들이 생각지 않은 허황된 이야기를 그려 넣었을 뿐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본격적인, 조너선 스위프트가 무언가 인간의 고뇌와 세상사의 부조리함, 개선점을 진지하게 그려 넣은 부분은 ‘하늘 섬 라퓨타’와, ‘말의 나라’여행기이다. 이 이야기는 조금 후에 다루겠다. 작가 조너선 스위프트가 아주 작심하고 결심한 듯이, 온갖 상상력을 동원해서 인간세상을 꼬집었다. 그럼 다음 나라, 거인국 이야기로 넘어가보자.[거인국 브로브딩낭..무엇을 하든 장난감처럼]소인국에서 나와 잠시 집에 돌아왔던 걸리버가 천성적인 방랑벽 때문에 다시 바다에 나온다. 또다시 표류하게 되는데 이번에는 거인국이다. 이쯤 되면 작가가 얼마나 작심하고 허황된 소설을 지어내려 했는지 이해하게 될 것이다. 아주 어릴 적 영화 ‘아이가 줄었어요’를 기억하시는지.. 너무 작은 몸집탓에 개미와 같은 작은 곤충에게도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잔디밭에 뿌리는 스프링클러의 물이 벼락같은 홍수로 닥친다. 자신의 크기가 보통 성인의 손가락 크기만해졌다고 생각해보라. 생각할 수 있는 어려움들을 작가가 최대한 생각했다.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벌들, 쥐, 징그럽게도 꿈틀꿈틀하는 자기만한 구더기, 아무리 보아도 혐오감을 주는 우둘투둘한 피부(너무 큰 인간이기에 그들에게는 매끄러운 피부도 걸리버에게는 우둘투둘하게 보인다.) 무슨 행동을 하든 그저 어린 장난감이 보여주는 쇼로 보인다. 소인국에 이어 조금 발전된 것이 있다면 당시 작가가 살았던 영국의 제도나 사회면을 꽤나 사실적으로 묘사했다는 것이다. 덕분에 소설이 쓰여진지 몇 백년이 지난 후에도 우리는 그때의 영국의 인간사회가 지금과 별로 차이나지 않음을 알게 된다.[천공의 성 라퓨타.터무니 없는 학문의 나라]서두에서도 언급했지만 천공의 성 라퓨타라니, 사실 깜짝 놀랐다. 심금을 울렸던 일본 애니매이션의 모티브(섬 이름마저 똑같다)가 걸리버 여행기였다니. 꼼짝없이 걸리버 여행기는 거인국과 소인국이 전부인 줄 알고 있었는데, 사실 거인국과 소인국 이야기는 맛보기 정도였던 것이다. 라퓨타가 하늘에 떠 있을 수 있는 이유가 뭘까? 그냥 막 떠 있는 것은 아니고, 작가는 꽤 그럴듯한 과학적 설명을 곁들여 놓았다. 자기장의 법칙을 이용하는데, 자기장을 이용해 붕 떠서 진동 없이 이동하는 현대의 과학기술을 생각해 보면 웬지 모르게 이유에 수긍하게 된다. 하지만. 무언가 빈틈 있는 과학이라는 것을 알아두어야 한다. 섬이 하늘에 뜰 수 있는 이유부터 시작해서 라퓨타의 이야기는 학문 이야기이다. 허황된 학문을 소개하기에 바쁘다. 대리석을 부드럽게 만들어서 베개나 핀꽂이로 만드는 연구를 한다든지, 말의 말굽을 돌같이 단단하게 만든다든지, 고무와 광물과 채소의 혼합물을 새끼양에게 발라 털이 없는 양을 만든다든지. 허황된 학문을 많이 소개해 놓았다. 평소 작가의 생각과 허황된 아이디어가 많이 반영된 듯 하다. 인간 삶을 진보시킬 만한 새로운 아이디어를 연구하는 나라인데, 그것을 이렇게 풍자적으로 표현해놓은 것을 보면 저자는 아마도 학문의 진보를 달갑게 여기지 않은 듯 하다. 자주 쓰게 되는 표현이지만, 터무니 없는 학문의 소개에 슬슬 고개를 가로져을 때마저 있었다. 무엇을 위해서 이런 허풍선이 같은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인가 하고 말이다. 아니면, 내가 아직 전혀 이해를 못하고 있는 것인가?다음 이야기 말의 나라 이야기에서 스위프트는 너무나 강렬하게 인간 사회를 비판하고 있다, 인간 본연의 순수함 위에 더해지는 학문과 과학과 지식의 발달에 심한 거부감을 갖고 있지 않나 싶을 정도이다. 말의 나라 이야기를 살펴보도록 하자.[말의 나라 이야기. 독자에게 던지는 질문 한 가지. 책이라는 것은?]말의 나라 이야기가 가장 할 말이 많은데, 말이 두 궁둥이로 앉아 소 젖을 짜고, 식탁에 둘러앉아 음식을 먹고, 의사소통을 하고, 인간을 지배하는 허황된 이야기임에는 변함 없지만, 그 이야기 속에 인간사회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 뚜렷이 반영되기 때문이다. 참, 한 가지 말해두고 싶은 것은, 주인공 걸리버는 언어에 천재적인 재능을 넘어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어서 동물의 언어까지도 금새 익혀 굉장히 고난이도의 언어를 구사한다. 걸리버는 말의 나라에서 자신의 주인인 말과 오랫동안 대화를 나눈다. 당연히 대화 속에 현실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 녹아나기 마련이다. 나의 생각의 늘어놓기 전에, 몇 마디 저자의 말을 소개한다. 그리고 나서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한번 쯤 생각해 보기 바란다.‘의사들은 병을 고칠 때, 한 가지 유리한 점이 있는데, 그것은 병을 예단하는 것입니다. 그런 예단은 빗나가는 경우가 드뭅니다. 왜냐하면 의사들이 고치기 힘든 병에는 “이 야후(인간)는 사망할 것이오“ 라는 예단을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일으키는 방법을 의사들은 압니다. 그래서 죽을 거라고 선고한 야후가 병이 호전되는 상황이 발생하면 의사 야후들은 자기들이 진단을 잘못 내렸다고 비난을 받기보다는 적절한 방법을 써서 사망에 이르게 합니다.’(본문 331p)
[죄의 목소리]를 읽고지은이 : 시오타 타케시출판사 : 비앤엘 (임희선 옮김)범죄와 과학, 그리고 인간. [죄의 목소리]를 읽고 독서감상문을 써내려가고 싶은 방향이다. 아마도 국민들을 공포에 몰아넣었던 범죄, 그리고 범죄라는 게 없는 세상을 생각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잡혀진 방향같다. 한창 일본소설 [나이먀 잡화점의 기적]이 인기를 끌고 있기 때문일까? 일본 소설이 종종 베스트셀러로 독자들의 이목을 끄는 것 같다. 시오타 타케시의 [죄의 목소리]도 최근 베스트셀러로 인기를 끈 범죄 소설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평범한 소설이라고 평해야 할 것 같다. 깊은 고찰이나, 작품 의도가 있는 게 아니라 한 순간 재미를 위한 소설이다. 2시간 흥미 있는 블록버스터처럼 책을 읽는 동안 흥미를 가지고 보게 된다. 그 다음에는 ‘재미있었다’가 끝인 소설이라고 느껴진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읽은 후 나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떤 대답을 해주었을까? 하고 깊게 생각해 본 것과는 대조적이다. 하지만 아마도 시오타 타케시가 가볍게 쓴 소설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훨씬 인간 내면의 무엇인가를 담은 걸작을 남길 수도 있는 작가인데 말이다. 단순한 범죄소설로 베스트셀러를 차지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사실, 500을 넘기는 책 곁표지를 본 순간, 매우 심오한 소설인줄 알았다. 해골과 그 해골을 바라보는 매우 신비한 눈을 가진 신비한 아이를 그린 삽화부터 말이다. 그래서 크게 생각할 것도 없이 책을 집어들었던 것 같다. 이 정도 두꺼운 책을 읽으려면 일반적으로 4일 정도는 걸린다. 낮에는 일을 하느라 책을 잡고 있을 수가 없으니 말이다. [죄의 목소리]는 딱 1루 걸렸다. 이유를 말하자면, 첫째, 깊은 생각을 필요로 하지 않고 훌훌 책장을 넘길 수 있으며, 둘째, 다분히 재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깜짝 놀랄 정도로 빨리 500페이지를 읽어넘겼던 것 같다.굉장히 횡설수설한 서론이었지만, 맨 처음 언급했던 것 처럼 딱 한 가지 책을 읽으면서 잠시 등골이 오싹했던 것은 ‘대국민적 범죄’라는 점이다. 한국에서도 국민들을 호기심과 충격에 빠뜨렸던 굵직굵직했던 사건들을 떠올리게 한다. 본인은 아직까지도 영구미제로 남아있는 ‘개구리 소년 사건’을 떠올리면서 읽었다. 큰 공통분모는 없지만, 어린아이들이 희생되었다는 점, ([죄의 목소리]에서도 범행도구로 쓰인 테이프에 담긴 목소리가 어린이들이었으며, 실제로 그 중 한명은 살해되었다. 또한 어린이들이 주소비원인 과자에 청산가리를 넣어 범행하였다.) 영구미제로 남은 만큼 사건의 본질이 미스터리로 남아있다는 점, 대대적인 국민의 관심을 모았다는 점 등이 은연중에 작용했었던 것 같다.대국민적 범죄가 일어나면 어른아이들부터 어린아이에 이르기까지 두려움에 휩싸이게 된다. 과자에 독이 들어있다면 한동안 과자는 입에 대지도 않을 것이며, 아이가 계속해서 실종된다면 밖에서 나돌아다니는 아이들의 모습을 더는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혹은 보디가드처럼 아이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고 돌보는 어른들의 모습이 진풍경이 될 수도 있다. 꼭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지 않더라도,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저지르는 범죄가 연일 일어난다면, 하루하루를 두려움에 휩싸여 노심초사하게 될지도 모른다. 언제 어디서 불똥이 튈지 모르는 저 멀리 중동을 보라. 하루가 멀다하고 일어나는 테러 때문에 끊임없이 죽어나가는 사람들이 있다. 도대체가 왜 아직도 저곳에서 살고 있는지, 왜 끔찍한 그 도시에서 빨리 탈출하지 않아서 매번 범죄의 희생양이 되고야 마는지, 의아할 정도로 매일같이 폭력은 끊이지 않고, 사상자도 끊이질 않는다. 머리에는 온갖 뿌연 먼지를 뒤짚어쓴채 피를 흘리며 고통을 당하는 영문도 모른채 카메라만 응시하고 있는 어린아이의 모습에 전세계가 분노하던 일도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니다. 부당한 폭력을 피해 저 넓은 바다를 건너다 목숨을 잃은 4살 남짓한 아이의 모습에 전세계가 눈물을 흘리던 일도 엊그제이다. 사실, 이런 사진을 볼 때마다, 뉴스를 접할 때마다, 마음속으로 되새기는 말이 있다. 아니, 되새긴다기보다, 자연스럽게, 체념 비슷하게 마음속에 새겨지는 것 같다. ‘이제, 그만 좀 하지..’폭력이 난무해도 너무 난무하는 시대다. 이래서는 안 될 것 같은데, 사람들의 마음은 더 삭막해져 가고, 인정이 메말라가고 있으며,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는 시대가 왔다.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는 그 병이, 소설 [죄의 목소리] 모든 범죄의 시초가 되지 않았던가..물론 소설이지만 말이다. 멈추지 않고, 미친 듯이 앞으로 황폐해져가고 있는 세계, 그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혹자들은 말한다. 과학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거라고. [마이너리티 리포트], 혹은 [이퀄리브리엄]이라는 영화가 생각이 난다. 과학이 모든 불안정을 제어하는 것 같아 보인다, 심지어 불안정한 인간의 마음과 감정조차도. 하지만 또다시 불거지는 문제는 무엇일까? 자유의 제약이다. 인류에게 폭력 없는 세상을 제공해 주기 위해서는 획일화된 정서가 필요하고, 이것은 인간의 의지와, 감성, 자유를 빼앗는 기초가 된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미래에서, 과학은 인류의 불안정을, 폭력 가득한 시대를 바꾸어 줄 대안이 되지 못한다. 영화가 아닌, 현실에서 과학은 우리에게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시대를 열어 줄 수 있을까? 과학의 힘으로 양식에 세계 어디서나 풍족해지고, 먹을 걱정, 입을 걱정, 살아갈 걱정이 사라지고 모든 인류가 자신의 꿈을 꿀 수 있는 세계가 올 수 있을까? 그런 시대가 오면, 범죄는 사라지게 될까?논리적으로 추리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과거, 현재, 미래는 같은 선상의 역사라는 것이다. 과거를 보면 미래를 예측할 수도 있지 않을까? 과거와 현재를 생각해보자, 비약적으로 과학은 발달했다. 그리고 폭력도 늘었다. 과학이 발전함과 동시에 폭력이 비약적으로 늘어난 것이다. 더 효율적인 건설을 위해 개발되었던 다이너마이트는 획기적인 살인도구가 되었고, 극대의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원자력은 한 도시를 한 순간에 잿더미로 만드는 최고의 살상무기이다. 과학은 전쟁을 거치면서 발전한다. 더 강력한 무기를 만들기 위해, 더 많은 사람을 효율적으로 희생시키기 위해 수많은 천재 과학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한다.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닌, 죽이기 위해, 그 천재적인 머리를 사용한다. 그러면서 과학이 발전한다. 전쟁이 끝나고서야 개발되었던 기술이 편의를 위해 사용되어진다. 그렇다면 과학이 더 발전하는 미래에는 더 많은 폭력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상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타당하지 않을까? 상상할 수 없는 편리한 기술이 개발될수록 그 뒤편에는 순식간에 생명을 집어삼킬 수 있는 어마어마한 무기가 숨어있기 마련이다. 풍요롭고 깨끗하고 안전한, 미래의 과학도시는 꿈같은 소리, 그야말로 뜬구름 잡는, 초등학교 아이들의 글짓기 대회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라는 말이다. 오히려 미국드라마 [스타게이트]에서처럼 과학이 사라져 버린 시대가 인류에게는 폭력을 줄여줄 수 있는 시대가 될 거라는 이야기가 더 현실적으로 들린다.
[극지 과학자가 들려주는 남극의 사계]를 읽고지은이 : 안인영가장 사랑스럽고 정이 가는 남극생물. 남극에서 1년을 보낸 글쓴이, 책[극지과학자가 들려주는 남극의 사계. 봄, 여름, 가을, 겨울. 이하 남극의 사계]의 저자는 남극의 순수 토착 포유류 웨델해표를 이렇듯 사랑스럽게 표현하고 있다.(본문 p 175). 웨델해표 세종이가 세상에 나와 어미로부터 독립하기까지 약 한달 가까이 해표모녀를 관찰하면서 단단히 정이 든 모양이다. 사실, 지금 독서감상문을 쓰고 있는 본인조차도 세종이의 매력에 푹 빠졌나 보다. 어찌나 천진난만하고 사랑스러운지, 그 똘망똘망하고 뚜웅한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세상에 찌들어 발에 채인 깡통처럼 쭈그러진 마음이 남극의 새하얀 눈밭처럼 환히 밝아지는 느낌이다.책[남극의 사계]는 자연과학적 사실을 주로 기록해 놓았다. 제목에서처럼 남극에도 사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내가 알게 해준 책이다. 글쓴이가 1년 동안 사계절을 겪으면서 지켜보았던 장엄하고 다채로운 자연의 변화, 정감 가고 사랑스러운 남극동물, 해양 생물을 소개하면서, 글쓴이 특유의 글재주인지는 모르지만 감각적인 문장들로 읽는이의 마음을 남극으로 끌어당긴다. 본인은 여행을 좋아하는 편이다. 유럽, 동남아시아, 북아메리카, 아시아. 꽤 여러 나라를 여행했다고 자부한다. 여행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지면, 악착같이 돈을 벌어 여행에 쓰곤 했다. 마지막 가장 길었던 여행이 덴마크였던가. 1년을 조금 넘는 여행 끝에 이제는 해외 여행에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않게 되었는데..세계 어디든 다녀보고 싶다는 그 불같은 마음도 이제는 사그러져 버렸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이게 웬걸. 골라야 할 여행지로는 너무 벅찬, 실현 불가능에 가까운 상대라고 실감하고 있음에도 남극. 반드시 가보고야 말겠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설렘 반, 기대 반. 마음을 들뜨게 한 글쓴이의 정감어린 경험들을 소개하며 독서감상문을 쓰고 싶다.겨우내 꽁꽁 얼었던 빙하가 녹고, 바닷길이 열리며, 듬성듬성 갈라진 해빙사이로 우리네 해표랑, 물개들이랑, 갈매기들이랑, 고래등이랑 그 모습을 드러내면 남극에도 봄이 시작되었다고 말하나 보다. 남극의 봄 어느 날. 웨델 해표 세종이가 세상에 나왔다. 2일째, 3일째, 생존을 위해 필사적인 세종이, 그리고 그런 세종이를 헌신적으로 돌보는 어미의 감동적인 드라마를 나는 사진으로 밖에 볼 수 없지만, 사진 속 동그랗고 초롱초롱한 눈과, 필시 웃는 것임에 틀림없을 해벌쭉한 눈꼬리를 보면 그야말로 심쿵하다. 몸집이 불어 제법 통통해진 세종이는 햇빛에 비쳐 미끈한 몸매를 자랑하며 씨익 미소짓기까지 한다. 아직 철이 없고 순수해서, 더 사랑스럽다. 해표 모녀가 10월 어느 날, 자취를 감췄을 때, 가슴 한구석이 텅 빈 것 같았다는 글쓴이의 그 표현이, 왜 이리 내 마음을 아련하게 하는지.세종이가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을 남극의 봄 어느 날, 조금 떨어진 펭귄마을에서도 반가운 얼굴들이 하나둘씩 모여든다. 긴 겨울을 어디에선가 무사히 보낸 수백 수천마리의 펭귄들이 제 집을 찾아 돌아오는 것이다. 빨간 부리를 꼬옥 다물고서 삼삼오오 대열을 지어 걷는다. 내 앞까지 아장아장 걸어온다면 내 무릎까지 머리가 닿기는 하는걸까. 두리번 두리번, 뒤뚱뒤뚱, 그 천진난만하고 순수함 가득한 어리숙한 모습을..이제 여름이 되면 번식과 생존을 위한 치열한 사투를 벌일 그들이지만, 내년에도, 또 그 이듬해에도 잃지 않고 소중히 간직해주기를 바란다.남극의 사계 중 겨울이 가장 내 마을을 당긴다. 역동적인 여름의 모습보다도, 겨울을 준비하는 분주한 가을의 모습보다도, 새하얗게 눈 덮인 겨울을 더 좋아하기 때문이다. 왜일까? 왜 난 어둠이 길고 정적인 겨울을 좋아하는 것일까? 남극의 순백의 천사 스노우페트럴의 우아한 비행을 볼 수 있기 때문인 것도 아니고, 세종기지 근처 어딘가에서 남극대구를 잡아먹으며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을 웨델해표 세종이를 볼 기대 탓인 것만도 아닌데..사실 남극 겨울에 대한 나의 이미지를, 오래 전부터 스스로 마음 속에 만들어 놓은 남극의 색깔을 엿볼 수 있는 문장이 책에 실려 있다. 겨울하늘을 촘촘히 수놓은 푸르게 반짝이는 별들과, 감히 인간이 형언해 낼 수 없는, 신이 빚어낸 광대한 밤하늘.(본문 p 157). 역동적인 삶과는 거리가 먼, 조용하고 정적인 세계. 미치도록 무섭고 적막한 그 어두운 세계를 화려하게 수놓은 밤하늘의 별과, 그리고 보는 이의 숨을 멎게 만드는 오로라. 몽환적인 기운을 내뿜는 마음 속 환상 같은 남극의 그곳이 나에게는 겨울이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을 정복했다는 성취감이 아니라, 아무도 하지 못한 일을 해냈다는 뿌듯함이 아니라, 거대하고 고요한 적막속에 홀로 서 있다는, 절대로 쉽게 느껴보지 못할 고립감을 간직한 남극의 겨울이 그렇게 끌렸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