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Bronze개인
팔로워0 팔로우
소개
등록된 소개글이 없습니다.
전문분야 등록된 전문분야가 없습니다.
판매자 정보
학교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직장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자격증
  •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판매지수
전체자료 7
검색어 입력폼
  • 박목월의 생애와 시기별 작품 조사
    따뜻한 사색의 시인목월(木月) 박영종(朴泳鍾)Ⅰ. 그는 누구인가?경북 고성에서 1916년에 태어난 그는 경북 경주 월성군 서면 건천리의 모량이란 마을에서 부친 박준필씨의 4남매 중 맏이로 자라났다. 본명은 영종, 소국이라는 아호로 불리기도 했다. 부친은 경주 수리조합 이사로 근무하고 있었고, 모친은 열렬한 기독교 신앙에 입각하여 자녀들을 보살폈다.목월의 시에 지속적으로 작용했던 자연에 대한 탐구는 집근처의 신라의 고도 경주에서 자라면서 받은 영향으로 생각된다. 목월은 1933년 미션스쿨인 대구 계성중 재학당시 17세의 나이로 동시 「통딱딱? 통딱딱」을 《어린이》잡지에, 「제비맞이」를 《신가정》지에 본명으로 발표함으로써 동요작가로 데뷔했다.1935년 계성중학교를 졸업하고 경주금융조합에 취직해 있다가 1938년 공주 출신의 유익순과 범상치 않은 인연으로 결혼했다. 금융조합에 재직중인 1939년 《문장》지 9월호에 「길처럼」,「그것은 年輪이다」가 , 12월호에 「산그늘」이 정지용의 추천을 받아 문단에 등장했다. 그 후 1940년에 이르러 《문장》지 9월호에 「가을어스름」과 「연륜」이 3회 추천 완료됨으로써 문단에 정식 데뷔했다. 경주 시절 동무였던 김동리의 존재는 그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며, 동리와 목월의 작품에는 유년시절을 보낸 경주의 향기가 배어있다.해방이 되면서 목월의 시작활동은 본격화되어 1946년에 조지훈, 박두진과 함께 「청록집」을 간행했다. 이 무렵 동시의 창작에도 힘을 기울였다 한다. 1951년 대구에서 창설된 종군작가단의 일원이 되어 이한직, 조지훈, 오영진 등과 함께 중부전선을 종군하며 서울탈환과 평양입성 등을 함께 하며 전쟁의 참상을 직접 목도하였다. 6?25전쟁 후인 1955년 12월에는 첫 개인시집 『산도화』를 간행했고 이후 수상집『구름의 抒情』, 『토요일의 밤하늘』, 그리고 자작시 해설집인 『보랏빛 소묘』등을 펴내기도 했다. 1956년 동생 영호의 죽음을 겪은 후 그의 시세계에는 변모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1959년 『난?기타』를 펴냈으며 수상집 『여인의 書』를 냈다. 널리 알려진 시 ‘하관’은 『난?기타』에 있는 것으로, 동생이 죽은지 1년쯤 뒤에 썼다.1962년부터 세상을 떠나기까지 한양대 국문과교수와 동대학 학장을 역임하면서 1968년에 시집 『경상도 가랑잎』을, 연작시집 『어머니』를 간행하였으며 수필집 『밤에 쓴 人生論』,『구름에 달 가듯이』를 펴냈고, 이 무렵 다시 3인 공동시집『청록집 以後』『청록집 기타』를 펴내기도 하였다.특히 목월은 1960년부터 《현대문학》지 시 추천 위원으로 또한 《심상》시 추천위원으로 각종 신춘문예 심사위원으로 수많은 후배와 시인들을 배출했다.) 문단활동으로는 1946년 서정주, 김동리 등과 함께
    인문/어학| 2012.01.01| 8페이지| 1,000원| 조회(565)
    미리보기
  • 만주 지역 독립 운동 평가A+최고예요
    Ⅰ. 만주독립운동기지 건설의 움직임만주는 일제침략에 의한 민족수난기에 한민족이 독립운동을 펼쳤던 주요무대일 뿐만 아니라, 고대로부터 관심의 대상이 되는 땅이었다. 하지만 명에 이은 청조가 만주를 그들 왕조의 발상지라 하여 이민족의 주거를 금하는 봉금령(1628)을 반포하자 한인은 물론, 중국인의 이주 또한 불허했다. 후에 청의 입장에서는 만주를 계속 봉급지역으로 해 두기보다는 많은 인구를 유입시켜 연해주를 발판으로 남하정책을 시도하려는 러시아 세력을 방어해야 할 입장이 되어 1875년 봉천성에 대한 봉금령을 해제한 것을 시작으로 중국인들의 이주를 허락하였다. 봉금령이 해제되자 만주지역에는 중국인 뿐 아니라, 한인의 이주까지 증가하게 되었다.1910년 경술국치를 전후한 시기 독립전쟁론에 근거하여 해외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해 졌다 이를 주도한 인물들은 계몽운동과 의병항전의 이념과 논리를 합일 발전시킨 독립 전쟁론자들이었다.) 그 첫 단계 사업은 민족정신이 투철한 지사들을 집단적으로 해외이주 시키자는 것 이었다.이 계획은 신민회에 의하여 구체화되었는데 1910년을 전후하여 만주지역에 한인들을 집단적으로 이주시키고자 하였다.)만주지역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고자 하는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될 수 없었다. 사전에 계획을 탐지한 일제가 1910년 12월 말부터 1911년1월 초에 걸쳐 6백여 명의 민족독립운동자들을 안명근사건, 양기탁 사건 등으로 체포 및 투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기 위한 계획은 계속 추진되었고, 아울러 군자금도 꾸준히 모집되어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투입되었다. 서간도에 세워진 독립운동기지가 바로 그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1909년 신민회(新民會)는 만주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기로 하고 이동녕(李東寧)·이회영(李會榮)·장유순(張裕淳) 등을 기지답사를 위하여 만주에 파견하였다. 이들은 남만주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三源堡鄒家街)에 우선 정착하였다. 이때가 1910년 7월이었다. 그 뒤 토민의 배척이 심있었다. 제 1사단은 무송현에 본부를 두고 모두 4개 중대로 구성되었다.그러나 대한독립단은 1919년 말 이념과 노선의 차이로 내부적 분화를 맞이하게 된다.Ⅱ. 만주지역 독립기지건설과 독립전쟁의 전개임시정부 수립 이후 성립된 재만독립군단들은 군사훈련과 무기구입 등을 통해 일제를 구축하기 위한 국내진입전을 전개하였다. 한 자료에 의하면 1920년 독립군들이 국경 3도(함남, 함북, 평북)에서 전개한 국내진입전의 수는 총 1,700여 건에 이른다. 그리고 1921년에는 602건, 1922년에는 397건, 1923년에는 454건 등이었다.이러한 재만독립군의 국내진공 유격전으로 큰 피해를 입게 된 일제는 국경 수비의 강화 및 독립군 탄압을 위하여 국경 3도에 군사 및 경찰 경비력을 대폭 증강하였다. 1910년과 이듬해 두해동안 국내로 진입하여 왜적 구축작전을 전개했던 독립군의 활동 상황을 살펴보면 우선 대한독립군은 일본군의 삼엄한 국경수비에도 불구하고 혜산진을 점령하고 갑산으로 진격하였으며 이어 강계와 만포진을 점령하였다. 또 국민회군과 북로군정서군 등도 회령을 점령하는 등 큰 성과를 올렸다.이와 같은 독립군의 무장투쟁에 대해 일본군은 이들 독립군 세력을 조기에 제거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절감하고 마침내 1920년 10월 간도출병을 단행했다. 이는 간도지역 독립군을 토벌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혼춘 ? 왕청 ? 화룡 ? 연길현 일원에서는 일본군과 독립군의 전쟁이 벌어졌으며 그 대표적 승리의 예가 바로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였다.1. 봉오동 전투 (1920.06)와 홍범도일제의 국경경비 강화에도 불구하고 독립군들은 국내진입을 계속 결행하였다. 그 전투력은 횟수가 거듭될수록 효과적이었다. 독립군에 의해 연달아 참패를 당한 일제는 이번에는 약 250명의 병력으로 ‘월강추격대’를 편성하여 1920년 6월 7일 봉오동으로 진군해 왔다. 이곳에는 이미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과 최진동의 군무도독부 및 안무가 이끄는 국민회군이 통합하여 조직한 대한북로독군부군과 이홍수밖에 기습 공격을 받은 일본군은 필사적으로 돌격해 왔다.하지만 유리한 지형을 미리 차지한 독립군의 맹렬한 집중 사격과 수류탄 투척으로 일본군 추격대는 사상자만 속출할 뿐이었다. 그들은 독립군 포위망 속에서 3시간 이상 끈질기게 버텼으나 이미 작전상 허를 찔려 시간이 흐를수록 사상자만 늘어날 뿐이었다.그들은 더 이상 전투는 무모했음을 알아차리고는 후퇴했다. 통쾌한 승전이었다. 봉오동전투에 대한 전상자 피해는 독립군 일본군 양측의 주장이 엇갈린다. 비교적 객관적 자료인 당시 중국〈상해시보〉에 따르면 독립군이 일본군 월강 추격대를 150여 명이나 사살하여 크게 이겼다고 보도했다.(2) 홍범도홍범도는 1868년 8월 27일(음력), 평양 서문 안 문렬사 부근에서 가난한 농사꾼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홍범도 아버지 홍윤식은 남의 집 머슴살이를 했다. 홍범도 어머니는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외가에서 자랐다. 그녀는 인물이 남달리 뛰어나 관기(官妓)로 뽑혀갈 처지에 이르자, 외가어른들이 서둘러 홍윤식과 혼인시켰다. 이들 가난한 부부는 생계에 어려움이 많았지만, 결혼 이태 후에는 아들을 얻는 기쁨을 누렸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뿐, 산모가 해산한 뒤 하혈이 심하여 이레 만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홍윤식은 동네 아낙네들에게 동냥젖을 얻어 먹이며 어린 아들을 길렀다. 그러나 그도 아들이 아홉 살 되던 해 열병으로 세상을 떴다. 일찍 부모를 여읜 홍범도는 머슴살이, 막일꾼 등 닥치는 대로했다. 그는 공장에서 막일꾼 생활 중에 공장주가 품삯을 일곱 달이나 주지 않고, 도리어 먹고 입고 잠잔 값을 받아야겠다는 데 너무나 어이가 없어서 공장주를 둘러치고는 그 길로 금강산으로 들어갔다.그는 외금강 신계사 주지 스님 앞에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그때 홍범도는 수도 생활 중에 여승 옥녀와 정이 들어 뱃속에 아이까지 가지게 되었다. 그들은 옥녀의 고향인 북천으로 가고자 금강산을 떠났다. 하지만, 원산 교외에서 불한당으로부터 변을 당한 홍범도는 옥녀와 생이별을 하고 방랑객이 되었다. 그는 로군정서군은 일본군을 유인하기 위해 주변 마을의 노인들에게 "독립군은 무기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사기가 떨어져 허둥지둥 도망갔다"는 등의 허위정보를 퍼뜨리게 한 후, 주위의 천연적 엄폐물을 이용해 철저히 위장했다.< 전투의 전개과정 >1920년 10월 21일 오전 8시 일본군 선발 보병 1개 중대는 매복사실을 모른 채 하루 전에 독립군이 행군한 길을 따라 백운평에 진입했다. 일본군 전위부대의 전병력이 공지 안에 들어서고 선두가 북로군정서군 제2제대의 매복지점으로부터 10여 보(步) 앞에 도달했을 때인 오전 9시에 독립군의 기습공격이 시작되었다. 독립군이 은폐하고 있는 정확한 위치도 파악하지 못한 채 응사하던 일본군 전위부대 200명은 교전한 지 20여 분 만에 전멸했다. 뒤이어 도착한 야마다[山田] 토벌연대 본대는 전위부대의 전멸에 당황하여 산포와 기관총으로 결사적으로 응전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희생자는 늘어났다. 이에 일본군은 보병 2개 중대와 기병 1개 중대로 1부대를 편성해서 매복하고 있던 독립군의 측면을 우회공격하려 했으나 절벽 위에서 조준 사격하는 독립군에 의해 막대한 희생을 치른 뒤 패주했다. 일본군은 다시 전열을 정비해 매복한 북로군정서군 제2제대의 정면과 측면을 산포와 기관총으로 공격했지만 완전히 엄폐되어 있는 독립군의 반격에 사상자만 늘어날 뿐이었다. 일본군 토벌연대 본대는 자기편의 시체를 쌓아 은폐물을 만든 뒤 필사적으로 반격했으나 1,200~1,300명의 전사자만 더 내고 숙영지로 패주했다. 북로군정서군은 전투에서 크게 승리한 후 퇴로가 차단될 것을 우려해서 22일 새벽 2시 30분에 이도구(二道溝) 갑산촌(甲山村)으로 철수했다. 청산리전투의 승리는 독립군 병사들의 영웅적 분전, 지형을 적절히 이용한 지휘관들의 우수한 유격작전, 간도지역 조선인들의 헌신적인 지지와 성원이 함께 어우러져 이룩된 것이었다.(2)김좌진안동 김 씨로서 부유한 명문 출신이었으나 15세 때 대대로 내려오던 집안의 노비를 해방하고 토지를 소작인에게 분배했다.1905년공동전선을 형성하자는 제의를 받고 독립군들이 이만을 떠나게 됨으로써 해체되고 말았으며 북로군정서 계열)은 이만에서 다시 밀산으로 되돌아갔다.이만에서 러시아의 정세를 관망한 독립군은 두 가지의 서로 다른 판단을 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하나는 러시아가 아직 그들 자체도 정비하지 못한 상태이므로 한국독립군의 원조가 힘들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독립군의 현재 처지에서 후원을 요청할 곳은 볼셰비키밖에 없다는 판단이었다. 상반된 판단에 따라 독립군이 각기 개별적으로 행동하게 된 것이 해체의 원인이었다.)당시 러시아는 볼셰비키 혁명이후 피압박 약소민족의 해방을 후원 하겠다고 크게 선전하던 때였다. 그곳에 도착한 독립군은 새로운 전술전략을 습득하였으며 당시 러시아 한인군 지휘관의 한 사람인 오하묵의 주선으로 그곳 치타정부와 군사협정을 체결하여 러시아측의 독립군에 대한 원조는 순조로운 듯하였다. 따라서 한국독립은 일제의 지원을 받는 러시아 백군과의 계속되는 전투에서 많은 전공을 세우게 되었다.그러나 이 무렵 북경에서 일본 주중공사 방택과 러시아 정부 대표 카라한 사이에 캄차카 반도 어업권에 대한 교섭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방택은 "러시아 영토안에서 일본에 방해되는 한국인 무장단체를 육성하는 것은 양국우호관계에 큰 지장이 된다"고 항의하면서 그 해산을 요구하자 러시아에서는 국내외적으로 정치적 기반이 취약한 시기에 일본과 불화를 가져오는 것이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독립군과의 약속을 저버리고 일제측의 요구를 받아들이게 되었다.더군다나 1921년 6월 오하묵의 자유대대와 박일리아의 사할린 의용대간의 이념과 이해의 갈등이 발생하자 러시아 적군은 흑하변 스랍스크촌에 주둔하고 있는 사할린 의용대에 대하여 무장해제를 요구하고 장갑차까지 동원하여 총격을 감행하여 왔다. 러시아 적군의 전면적인 공격 앞에서 수많은 한인 무장대원들은 무참히 희생 당하고 말았다.(자유시 참변))러시아의 적군과 백군의 내전에 휘말려 수많은 독립군이 무참히 희생된 이 사건을 계기로 재만 독립군의 주력부대가 속해 있던 있다.
    인문/어학| 2008.02.19| 11페이지| 1,000원| 조회(973)
    미리보기
  • [조선] 삼정의 문란 평가A좋아요
    조선후기 삼정의 문란- 폐단의 수법을 중심으로 -Ⅰ. 들어가면서- 민란의 정의Ⅱ. 본론1.삼정의 문란1)전정2)군정3)환곡4)각 제도의 수탈방법Ⅲ. 나가면서Ⅰ. 들어가면서[민란의 정의]19세기는 "민란의 시대"라고 불릴만큼, 수많은 민란이 일어났다. 흔히 19세기 조선사를 크게 두가지로 구분하는데, 그 첫번째가 안동김씨 세도정치이고, 두번째가 민란이다.민란은 말그대로 백성의 반란이다. 여태까지 정치적인 반란이나 반역 사건의 대부분은 왕실 혹은 지배층의 떨거지인 양반 계층이 중심이 되어 반란을 일으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1812년 홍경래 난 이후 50년이 지난 임술민란부터는 소농, 빈농을 중심으로 반란을 도모한 것이었다. 따지고보면 임술민란이라고 규정한 이 난리는 반란이 아닌 민중 항거인 것이다. 그들이 정권 탈취나 지배층 교체를 목표로 한 것이 아닌 단지 자기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다. 하지만 대부분 거사 도중 실패하는 경우가 많았고, 설령 군사작전까지 들어가도 정규군에 의해 진압되는 것이 태반이었다.그러함에도 백성들이 민란을 일으킨 원인은 무엇일까? 일단 그 첫번째는 기형적인 독재인 안동 김씨 세도 정치에 있었다. 인조반정 이후 무려 300년동안 서인, 특히 노론이 장기간 독재를 해왔다. 그 노론에서도 안동 김씨를 중심으로 일족이 모두다 중요한 관직에 임명되어 자기 비판을 가로막고, 견제세력을 없애게 만들었다.순조는 이런 폐단을 알았기에 효명세자의 처가인 풍양 조씨 세력을 등용해 그들로 하여금 견제를 하게 하려고 했으나 오히려 풍양 조씨는 자기네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정권투쟁에만 몰두하였다. 이러다보니 조정은 물론이고, 지방 하위관직마저 기강이 흐려지게 되고, 탐관오리가 들끊게되어 백성들은 살길이 없었다.Ⅱ. 본론1. 삼정의 문란두번째로는 전국적인 규모로 일어난 임술민란의 결정적인 원인이 되는 삼정에 있었다. 삼정은 당시 조선의 수취제도였다. 삼정은 토지세를 의미하는 전정, 국방비를 의미하는 군정, 춘궁기에 쌀을 빌린 후, 이자를 붙여 갚는 환곡이 있었 이 규정은 거의 무시되었다. 그런 탓으로 피해를 입은 농민들은 아예 신고조차 하지 않아 홍수로 논밭이 싹 쓸려가도 면세의 혜택을 한 푼도 받지 못하였다. 더러 빈 쭉정이만 거두었다고 신고하면 짚은 소의 먹이나 지붕을 이는 데 쓸 수 있다고 하면서 거들떠보지도 않았다.그런데 다fms 한쪽에는 면세전이 늘어갔다. 곧 궁방전이 늘어나게 된 것이다. 궁방전은 임금의 아들딸이 국가 조세를 대신 받는 수조권을 확보하여 먹고사는 땅이다. 수조권이 다른 곳에 속하게 되면 국가 재정이 그만큼 줄어드는 것이다. 정조는 궁방전이 확대되자 이 특혜를 철폐하고 왕자와 공주, 옹주들에게 돈을 지급하여 생계를 꾸리게 하였다. 하지만 정조가 죽은 뒤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궁방전을 하나씩 회복시켜 주었다. 왕족, 척족의 불만을 해소하고 ㄹ정치적 입지를 넓히려는 생각에서였다. 이것이 국가정책으로 굳어져 문벌정치 아래에서 계속 진행되었다.19세기 첫무렵 기록에 나타나는 궁방전만도 4만여 결이 넘었는데, 해가 지날수록 점차 넓어졌다. 에 따르면 1860년에는 18,789결로 나타난다. 50여 년 만에 다섯 배 가까이 늘어난 것이다. 궁방전에서는 국가에서 정한 조세 규정을 어기고 불법으로 도조를 거둬들였다. 농민들은 처라리 국가에 전세를 내는 쪽을 원하는 지경이었다. 각 아문전의 면세 토지도 늘어났다. 양향청이나 역에 둔전을 두어 자체 경비로 쓰도록 수조권을 인정하였는데 19세기에는 그 면적이 엄청나게 불어났다.면세 토지의 확대는 결국 농민 부담으로 고스란히 옯겨갔다. 농민들은 전세에 시달릴 뿐만 아니라 수조권에 따른 조세에 더욱 시달렸다. 거기다가 대토지를 소유한 세도가와 지지들은 자기네가 내게 되어 있는 조세를 소작인들에게 떠넘기기 일쑤여서 소농민은 이중의 수탈에 시달렸다. 기근에 시달린 농민들은 굶어죽는 것을 면해 보려고 한 마지기의 논밭을 쌀 닷 되나 서 되와 맞바꾸었다. 그래서 논밭은 '닷되배니','서되배미'라 부르는 유행어가 생겨났다.사료에 나타난 44가지의 부가세에는 별의별 전세의 경우, 세종조의 풍흉을 구분해 세금을 매기는 연등구분제나 밭의 품질을 기준하는 전품육등분를 실시하여, 공정한 부과의 징수를 위해 20년마다 토지조사, 즉 양전을 하도록 법으로 정해져 있었으나, 조선후기에는 그것이 오랫동안 행해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토지의 소유관계나 생산성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세금은 공평하게 매겨지지 않았다. 이를테면 생산이 많은 땅에 적은 조세가 생산성이 적은 땅에 많은 과세가 부과되고, 토호나 아전들의 부정과 농간으로 조세를 포탈하는 경작지(은결)도 광범하게 있었다.이밖에도 조세를 거둘 수 없는 땅에 부과하거나 여러 가지 명목으로 법정 세액보다 많은 조세를 거두었다. 토지에 부과할 수 없는 세목의 조세까지 토지에 부과되어 징수되었다. 이렇게 각종 명목의 조세와 잡부금을 전세에 얹어 징수하던 관행을 도결이라고 했다. 문제는 세목이나 세율의 증가가 아니라, 사실상 납세가의 빈부권력, 신분과 영향력의 차이에 따라 부정과 불공평이 자행되고 있었다. 양반과 부유한 지주층들은 아전을 위협하거나 매수하여 그들이 내어야 할 세금이 농민들에게 전가되었다.2) 군정군정은 군사 경비로 쓸 무병을 내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군사 경비를 군액, 군액으로 내는 무병을 군포라 한다. 이 의무는 16 ~ 60세 미만의 장정이 지게 되어 있다. 17 ~ 18세기에는 군액을 축소했으나 19세기에 들어서는 오히려 확대하였다.1750년 균역법이 실시된 뒤 장정 개인에 대한 부담이 두 필에서 한 필로 줄었으나 19세기에 들어 총량이 배로 늘어났다. 거둬들인 군포를 돈으로 환산하면 한 필 당 22냥으로 잡아 400만 냥이나 되었다. 군사 수나 군사 경비를 늘려서 액수가 증가한 것이 아니라 중간에서 부정 착복이 만연하였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늘 논란이 되어 왔던 죽은 사람에게서 군포를 거두는 백골징포, 도망민의 몫을 이웃에게서 거두는 인징, 도망민의 몫을 친척에게서 거두는 족징은 이제 고전적인 수법에 지나지 않았다.)에서 암시한 대로 사내아이인지 계집아에서 횡령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군역의 부과는 군포의 징수를 둘러싸고 지방관과 아전의 농간과 횡령이 자행되었다. 아전의 횡령으로 군포에 결손이 될 경우에는 그것을 토지에 부가하여 징수하였는데, 이를 결렴이라고 하였다.3) 환곡고려시대에 백성을 위한 복지정책의 하나로 처음 실시되어 제도로 굳어졌다. 곧 흉년이 든 해나 춘궁기에 곡식을 빌려 주고 풍년이 든 해나 가을에 일정한 이자를 붙여 거두어들이는 제도이다. 이를 환정, 환상, 환자라고도 한다.조선시대에 들어와 환곡 창고를 마을에 두어 사창이라 하였다. 사창을 통해 빌려 주는 곡식의 이자는 시대에 따라 달랐는데 1할에서 5할까지 들쭉날쭉하였다. 이자는 대개 관청의 경비로 사용하였다. 환곡으로 이식을 불리는 대표적인 기구는 중앙의 비변사와 훈련도감 등을 비롯하여 팔도의 감영과 네 유수부와 각지의 병영, 수영 등 31개소이며, 그 외 작은 관아는 통계를 내지 못할 정도로 많았다. 그런데 국가 수입에서 환곡의 이자곡식이 전정의 세미보다 훨씬 많은 기묘한 운영 양상을 보였다. 1807년의 경우를 보면, 전정의 총액이 24만 섬으로 추정되는 데 비해 환자의 총액은 99만 5천여 섬을 헤아렸다.규정에는 창고에 보관된 곡식의 절반만을 풀어 대여하도록 되어 있다. 이를 반류반분이라 한다. 그러나 관리들은 억지로라도 환곡을 몽땅 빌려 주고 장부에는 규정대로 반만 낸 것처럼 허위로 작성한 뒤 이자만큼은 다 받아 냈다. 물론 여기서 나오는 이자는 고스란히 수령이나 구실아치들이 착복하였다. 환곡을 받는 대상은 힘없고 가난한 농민이나 종, 백정 등 천민들이었다. 양반과 요호부민과 향교와 서원에서 놀이로 지새우는 선비들은 거의 제외되었다. 게다가 관권과 끈끈한 줄을 대고 있는 아전과 관가나 벼슬아치나 양반의 묘지기와 궁방전의 도장이나 지주의 마름도 빠졌으며 대가에 딸린 노비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한 고을에서 40퍼센트 정도의 백성들이 환곡을 강요에 의해 받아 쓰고 환자빚을 물어 주는 지경에 이르렀다.환곡을 이용해 백성의 고혈을 짜는 방무와 작전이었다.이무는 원래 지방에 따라 차이가 많은 환곡의 물량을 고르게 하기 위해 액수가 많은 고을에서 돈으로 바꾸어 액수가 적은 고을에 넘겨주는 제도로서 지역간의 공평하지 않은 폐단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시기에 본래의 목적은 퇴색되고, 오로지 돈으로 바꾸어 이자만을 챙기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다.환곡으로 인한 농민의 부담을 가중시켰던 것은 각 고을의 아전이었다. 이들은 환곡을 분배하고 거둬들이는 실무를 맡아보면서 갖은 방법으로 횡령을 자행하였다. 횡령의 규모는 날로 커져서 19세기에는 수천 석에서 많게는 수만 석에 이르기도 하였다. 원래 환곡은 만약을 대비하여 일정 수량을 창고에 보존해야 하고, 전액을 대출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방관과 결탁한 아전들은 전액을 대출하여 이자를 받고 환곡을 이용하여 상업자금으로 활용되었다. 그 과정에서 결손이 나기도 하고, 흉년이 연속되어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렇게 결손된 환곡을 포흠이라고 했다. 부패한 관리는 이 결손된 환곡을 부정하고 가혹한 방법으로 농민에게 물리고, 곡식에 들이나 짚 등 불순물을 넣어 수량을 늘이기도 했다. 그리고 제때 거두어들이지 못한 환곡은 장부에만 상환과 대출을 반복하여 결국 곡식은 없고 빈 장부만 남아 있는 일도 허다했다.19세기 이후 환곡은 지방 재정의 커다란 부분을 차지했기에 백성들에게 환곡을 지급하지 않아도 이자는 반드시 받아들여만 했다. 이것이 백징의 폐단이었다. 그러나 나누어주지 않는 환곡에 이자를 거두는 백징이 결코 용이하지 않았기에 이것을 전세에 얹어서 징수하는 일이 보편화되었기에 이것을 도결 혹은 가결이라고 불렸다.4) 각 제도의 수탈방법 정리- 진결(陳結): 경작하지 않은 땅이나 황폐한 땅에서 징수하는 수법- 은결(隱結): 토지대장에 기록되지 않은 땅, 신개간지 등에서 징수하는 수법- 백지(白地): 공지에서 징수하는 수법- 도결(都結): 정액 이상의 세를 덧붙여 징수하는 수법- 족징(族徵) : 도망자, 사망자의 체납분을 친족으로부터 징수하는 수법다.
    인문/어학| 2008.02.19| 9페이지| 1,000원| 조회(1,112)
    미리보기
  • 어린왕자 독후감 [독서감상문]
    결코 어리지 않았던 나의 왕자님『어린왕자』를 읽고어릴 적 순수하고 톡톡 튀는 생각들이 사라지고, 현대문명이 선사하는 끊임없는 최신정보와 틀에 얽매이며 살아가는 어른들은 보아뱀이 코끼리를 삼킨 끔찍하고도 무서운 그림을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코끼리를 알아보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어릴 적 어린왕자를 만났을 때의 기억일 뿐이었으므로 안심할 수는 없다.‘나도 비행사인 그처럼 나이를 심각하게 먹을 수 밖에 없겠지…….’ 라는 유치한 섭섭함이 일시에 몰아닥쳤다. 그 섭섭함이 주는 집중력 때문일까? 국어 시험의 지문을 읽는 것처럼 몰입하여 나는 어느새 사하라 사막의 한복판이었다. 혼자라는 절박한 심정에 당면한 그가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비행사인 나의 앞에 나타난 어린왕자는 양을 그려달라고 했다. 거듭된 불만족의 실패작들이 나오고 난 후에 그려준 ‘상자 속의 양’에게 크게 만족하는 어린왕자. 보이는 것이 아닌 상상의 공간 속에서 자신만의 영롱한 양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 어른들과는 그 양을 같이 볼 수 없었다. 그래서 나도 잘 볼 수 없었다. 벌써부터 이러니까 난 정말 내가 걱정 된다.왕자가 사는 곳, 작은 소행성 B 612는 어린왕자의 손이 많이 타는 별이다. 화산을 정기적으로 청소해 주어야만 했고, 바오밥 나무가 생기면 손수 제거해 주어 별의 안위를 책임져야만 했다. 그렇다. 그곳은 바보밥 나무를 틀림없이 조심해야 했다. 나무가 자라면 앙증맞은 소행성은 부수어질지도 모른단다. 마치 나쁜 습관 하나가 사람하나를 망쳐놓는 무서운 진리가 이 나무를 조심스럽게 살피고 제거해야 할 이유가 되었다. 왕자의 별에는 늘 소박한 꽃들이 피고 지고를 반복하였다. 그 소박함에 익숙했던 왕자에게 날아온 장미 씨앗 하나는 그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 아름다움을 갖고 있었으나, 거만했다. 그렇지만 무엇이든 표면적인 것에 대한 매력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하는 것일게다. 장미는 마치 요즈음 드라마에서 완벽한 메이크업을 하고서 침대에서 눈 부비며 일어나는 연기자 같았다. 나중에는 와자가 장미를 의심한 행동을 후회하게 되지만, 어쨌든 장미가 어린왕자의 여행에 결정적 이유였다.나는 어린왕자와의 여행을 떠났다. 그가 여행한 첫 번째 별에는 한 왕이 살고 있었다. 그는 우주의 모든 것을 자기 신하로 보았는데, 방문한 어린왕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불복종을 싫어한다고, 그것만은 용서할 수 없다고 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자기 명령에 따르지 않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별을 떠나는 어린왕자에게 다급하게 “대사로 임명하노라!!” 라고 외치는 우스꽝스런 장면을 보자면, 명령에 대해 통제할만한 위인도 안되었던 모양이다. 우습다가도 측은하다.두 번째 별의 허영심 많은 사람도 측은하긴 마찬가지. 자기 혼자 있는 작은별 안에서도 그 자신만의 좁은 이기주의 안에서 만족하는 못난 사람이었다. 셋째별에는 시무룩한 술꾼이 있었는데 그는 부끄러움을 잊으려고 술을 마신다고 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부끄러움은 술을 마시는 데서 기인된다고 했다. 결국 자신의 모든 것을 부정하면서 부끄러워 하는 것인데 현실도피적인 낭만적 퇴폐적 시인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었던 인물형이었다. 나도 이해 안 되는 어린왕자라고 이 사람이 이해가 되었겠는가? 네 번째 별의 사업가는 별의 개수를 세는데 여념이 없는 진보적인(?) 사업가였다. 그는 별을 묘사할 때 ‘게으름뱅이에게 허황된 꿈을 꾸게 하는 금빛 물체’라고 했으나, 정작 허황된 것은 그 많은 별을 세는 것과 또 그것들을 소유하려고 하는 실업가가 아닐는지. 이분도 어린왕자와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것에 성공하고야 만다.다섯 번째 별은 가장 작은 별이었다. 가로등을 켜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린왕자는 맡은일에 충실한 그가 꽤나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그에겐 어린왕자와 친구가 될 여유도, 그 별에는 둘이 있을 만한 공간도 없는 것이 어린왕자를 아쉽게 했다. 사실 진짜 이유는 마음의 공간이 부족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여섯 번째 비교적 큰 별에는 지리학자 노신사 한분이 살고 있었다. 우스꽝스럽게도 자기 별조차 조사해 본적이 없는 공허한 정보 수집형 지리학자 였다. 이것저것 얘기하다가 둘은 덧없는 존재에 대해 얘기하는데 어린왕자는 떠나온 꽃도 덧 없는 존재란 것을 깨닫고 처음으로 떠나온 것을 후회하게 된다. 여기서 어린왕자가 훗날 선생님이 되고 싶은 나였다면, 그래서 장미를 버려두고 오는 교육자라면 선생님이 될 자질이 없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학생은 연약한 존재로서 장미처럼 허술한 네 개 정도의 가시를 가지고 세상에 반항심으로 부딪히다가 결국 상처 입게 될 것이다. 겸손하고 솔직한 장미는 어린왕자의 사랑이 지속되었다면 볼 수 있었을 캐릭터였다.
    독후감/창작| 2007.12.18| 2페이지| 1,000원| 조회(461)
    미리보기
  • [교육]교육기자재 사용의 유의점
    Ⅰ.서론우리의 교육현장에서 사용되는 대부분의 매체는 비투사매체와 교과서이다. 교실현장의 첨단화로 멀티미디어 체제가 현실화되어가지만 실제로는 아직까지 교실현장에서 많은 시간이 비투사매체와 자료로 이루어지고 있다. 여기서 비투사 매체 및 자료는 빛을 투시하지 않고 사용되는 매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교과서, 참고서 등의 인쇄자료와 칠판, 괘도, 실물, 현장견학 등을 포함한다. 이러한 자료들은 손쉽게 사용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매체와 자료임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매체의 발명과 그 매체의 신기효과에 가리워져 등한시 되어왔다. 그러나 학습에서의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측면을 볼 때 비투사매체는 첨단매체만큼 중요한 매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되기에 그 특징과 사용시 유의점에 대해 한번 되짚어보는 기회를 마련해 보았다. 하지만 비투사매체의 중요성을 인식하자는 것이지 첨단매체의 효과를 불신하자는 것은 아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기자재와 매체는 다양해지고 있고, 학습효과의 극대화를 낼 수 있는 다양한 매체를 활용하여 좀 더 효과적인 교육을 연구하는 것이 이시대 선생님들의 의무일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적인 첨단매체들의 특징도 숙지 하고 그 유의점에 대해서 살펴보는 것 역시 필요하다. 본 보고서에서는 비투사매체와 첨단매체의 특징과 사용의 유의점에 대해 살펴보고 덧붙여 영상매체의 올바른 활용방안을 바탕으로 올바른 소설교육에 대하여 미약하게나마 진지한 고찰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1)칠판① 칠판의 교육적 특성 : 사용을 위한 별도의 기술이 필요 없고, 교사와 학생 누구든지 부담 없이 활용이 가능하다. 색 분필의 병행사용으로 강조나 주의집중의 효과가 있다. 하지만 많은 양의 자료를 취급하지 못하며, 세부적이고 복잡한 그림을 그리는 데는 다소의 훈련과 기술이 필요하다. 그리고 필기나 그림을 그릴 때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단점이 있다.② 사용 시 유의점 : 글자와 그림은 충분히 커야하며, 색상조절의 효과를 높이도록 적절한 색분필의 사용이 요구된다. 판서내용이 너무 많은 경우 아닌 학생들을 주시하며 해 주어야 한다. 또한 학생들의 시야를 가리지 않도록 주의해야하며, 소용되는 필기 시간을 고려해 미리 필기를 해두거나 그림을 그려두는 등의 배려가 학생들의 수업에 대한 집중력 향상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또한 자료를 배열하기 위한 칠판이라는 공간자체에 한계가 있으므로, 자료를 효과적으로 배열하기 위하여 미리 계획을 세운다. 이렇게 하면 필요 없는 설명이나 연속성 없는 자료의 배열을 피할 수 있다.□ 칠판의 특수한 활용법에는 본뜨기법(pattern method, dusting method), 형판법(template method), 정관법(grid method), 투사법(projection method), 칠판 가리우기법(hidden drawing method), 약화법(comic drawing mothod)등이 있는데, 이 가운데 투사법은 실물환등기, 투시물환등기, 혹은 슬라이드 환등기를 사용하여 필요한 도형이나 그림을 칠판 위에 투사한 뒤 분필로 따라 그리는 방법이다. 칠판과 투사기와의 거리를 변화시키면 손쉽게 상을 크게 또는 작게 조절할 수 있어 편리하며 가장 정확하게 원하는 그림을 칠판 위에 재생시킬 수 있는 방법으로 비투사매체와 첨단매체의 병행사용을 보여주는 예라고 생각된다.(2) 괘도① 괘도의 교육적 특성 : 특별한 기재 없이 어디서든지 사용할 tnh 있으며 내용이 복잡하거나 너무 작아서 잘 볼 수 없는 것, 또는 구조의 이해가 곤란한 것 들을 간단하게 그림이나 글로 요약, 확대하여 제시함으로써 학생들의 이해를 도울 수 있다. 하지만 정밀하고 복잡한 그림을 그리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제작에도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또한 장의 넘김 등을 고려하자면 크기가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대항 학생수가 많을 때는 사용할 수 없고, 정적인 시각자료에 그쳐서 장시간 사용하게 되면 학생들이 지루함을 느낄 가능성이 많다.② 사용시 유의점: 사용할 괘도는 미리 펼쳐두지 말고, 수업시간 중간에 설명이 필요한 부분에서 펼쳐서 사용하는 것이 주의 집중에 효과가여유를 주어야 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또한 설명이 끝난 자료를 계속 보여주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며, 주어진 시간에 제시하는 자료의 수는 제한하는 것이 학생들의 흥미상실을 예방할 수 있다. 너무 많은 양의 자료를 보여주면 학생들은 흥미를 잃게 된다. 또 비교하는 경우가 아닐 때에는 한 번에 하나의 자료만 보여주는 것이 효과적이다. 또, 내용의 변경, 정보의 수정이 요구되는 자료는 즉시 수정 보완하여 항상 정확하고, 최신의 정보를 제시해야 한다. 만약 괘도의 내용을 보충해 주기 위한 다른 교수매체가 필요할 때에는 수업 전에 미리 준비해 두어 필요시에 즉각 사용할 수 있도록 한다. 또 괘도를 제시할 때 반드시 동반되어야 할 구두 설명은 앞장의 뒤에 메모해 두면 편리하다. 교사는 자료가 포함하고 있는 중요한 정보를 암시하는 큐를 제공하고 내용과 관계가 있는 질문을 함으로써 학생들에게 그림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능력을 길러 주어야 한다.(3) OHP (Over Head Projector) : 교육자가 자신의 머리 너머 뒷면에 있는 스크린에 교재를 제시할 수 있다는 데에서 ‘Over Head’라는 명칭이 유래했다.① OHP의 교육적 특성 : 교사가 학생과 대면하면서 그들의 반응을 관찰하며 지도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필요에 따라서 제시중인 교재에 기입을 하는 것과 의도적으로 교재를 겹치는 작업이 가능하다.② 사용시 유의점: 많은 양의 자료를 기계적으로 제시하지 말고, 한 시간 수업에는 6~7매 정도의 투시물 자료가 적당하다 하겠다. 키스톤(keystoning)) 현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고, 학생들이 충분히 읽고 필기할 수 있는 시간을 주어야 한다. 또한 자료 제시대위의 먼지 등이 화면에 나타날 수 있으므로 청결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 슬라이드 프로젝터와 빔프로젝터는 매체의 특성상 유의점이 OHP와 유사한 점이 많이 있기에, 간단히 기술 하겠다.▷ 슬라이드 프로젝터는 상을 투사하기 위해 광원, 반사경, 렌즈, 투사될 물건을 받쳐 줄 장치, 투사할 표면 등모 집단의 수업 등에서, 500~1000W이상 정도의 세기는 일본 교실이나 강당에서 적합하다.빔 프로젝터는 컴퓨터 화면을 확대하는 것으로 화질이 떨어지므로 한 화면에 2개의 글씨체만을 사용하는 것이 좋고, 명암도 서로 상이한 색깔을 이용하며, 주요 구성요소가 수평과 수직으로 정확하게 맞도록 배열하면서 사용하여야 한다.(4)웹기반 수업(Web-Based Instruction)① 특징 : 컴퓨터와 학생이 직접 상호작용을 하여, 학습자 개개인의 특성을 고려한 개별적 교육을 시사 하는 데 목적이 있다. 학생 반응에 따라 다양한 안내를 받을 수 있고, 피드백 원리에 의한 학습시간 단축과 교수효과의 극대화에 공원한다.또한, 학습속도가 늦은 학생을 구제할 수 있으며, 복잡한 그래프나 그림을 포함한 정보 재생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수업원리를 활용하는 언어가 개발되어 그 융통성이 매우 높아진다. 학업성취도의 즉각적 평가가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수업 양식으로는 개인교수식, 문제해결식, 탐구식 또는 질문양식, 반복연습식, 시뮬레이션식, 게임식 등이 있다.② 교육시 유의점 : 웹 기반학습은 조화를 이루면서 단순해야 한다. 페이지 접근 시간을 고려해야하며, 융통성 있고 조직적인 화면배치가 요구된다.화면 스크롤은 집중도를 떨어뜨릴 수 있으므로, 최소화시켜야한다. 그리고 풍부한 상호작용의 서예가 이루어져야 하며, 연결되지 않은 문서는 지양한다. 덧붙여, 하이퍼텍스트나 하이퍼미디어의 구성은 학습내용및 기반학습 목적에 부합되어야 하겠다.(5)넓게 본 교육기자재-(“대중매체도 하나의 교육제재로 이해해야…….”)- 문학 교육에서 대중매체의 활용대중매체의 발달에 따른 문학의 변용양상이 다양화 되고 있다. 그렇다면 문학교육의 활성화를 위해 대중매체의 문학 변용을 문학교육의 장에서 어떻게 활용될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검토해 보아야 할 것이다.① 교육제재의 다면화 : 일반적으로 문학교육의 제재로서 고전을 중시한다. 흔히 인류의 민족의 문화유산으로서의 위대한 문학을 중시하는 반면, 우리의 삶을 형상화을 느낀다.)가. 신문이나 잡지에서의 사진과 그림 : 우리 주위에는 신문이나 잡지가 산재해 있고 여기에는 각종 사진과 그림이 게재된다. 이들 사진자료는 문학교육에서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이것은 시 장르의 교육에서 효과가 탁월하나, 사실은 소설교육에서의 배경에 대한 교육에서도 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 하나의 작품을 읽고 난 후 학생들이 체험의 부족으로 머릿속에 하나의 상을 그리지 못할 경우 위의 사진자료를 학생 개개인이 모아 보게 하거나, 교사가 적절한 자료를 모아 제시하는 것은 효과적이다. 이들 사진자료가 작품의 분위기와 호응이 되는지, 어느 것이 작품과 가장 일치하는지를 집단 탐구하게 하거나, 그 결과 골라진 사진을 작품의 전개에 따라 배열하고 그 근거를 말하게 하는 것은 특히 저학년 과정에서 상호작용모델로 활용될 수 있다.나. 프로젝션tv를 이용한 텔레비전의 드라마 : 텔레비전의 드라마는 시각화된 변용물도 동일한 활용이 가능하다. 소설이나 수필, 또는 극 형식의 글의 경우 수업시간의 제재가 이미 드라마로 제작되어 있을 때, 교사는 내면화 단계에서 방송국에서 비디오테이프를 구해 학생들에게 시청하게 하여 소설의 장르적 특성인 서사성을 드라마의 극적 특성과 비교함으로써 직접 체현하도록 해 줄 수 있다. 또 학생 스스로 한 작품이 드라마화할 때 거기에 관계하는 많은 사람들의 원전 이해가 자신이 감상한 작품의 세계와 얼마나 다른 작품을 만들게 되었는가를 알게 하는 것도 문학의 이해를 넓히기 위한 좋은 방식이다. 이 때 한 작품이 서로 다른 연출가에 의해 제작되었거나 한 연출가가 다른 배우들과 드라마를 만든 작품이 있다면 훨씬 효과적이다. 이 두 드라마와 원작을 학생들이 모두 감상하면 원작을 이해한 연출가와 배우의 시각이 전혀 다른 작품을 낳을 수 있음을 알게 된다.특히 작품에 대한 분석적 접근을 위해서도 영상매체는 적극적으로 화용되어야 한다. 소설의 플롯을 이해시키기 위해 동일한 짧은 이야기를 각기 다른 방식으로 영상화한다거나, 소설의 시점을 이해시키기 위해있다.
    교육학| 2006.06.17| 4페이지| 1,000원| 조회(344)
    미리보기
전체보기
받은후기 4
4개 리뷰 평점
  • A+최고예요
    2
  • A좋아요
    0
  • B괜찮아요
    2
  • C아쉬워요
    0
  • D별로예요
    0
전체보기
해캠 AI 챗봇과 대화하기
챗봇으로 간편하게 상담해보세요.
2026년 06월 04일 목요일
AI 챗봇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 AI 챗봇입니다. 무엇이 궁금하신가요?
2:30 오전
문서 초안을 생성해주는 EasyAI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의 20년의 운영 노하우를 이용하여 당신만의 초안을 만들어주는 EasyAI 입니다.
저는 아래와 같이 작업을 도와드립니다.
- 주제만 입력하면 AI가 방대한 정보를 재가공하여, 최적의 목차와 내용을 자동으로 만들어 드립니다.
- 장문의 콘텐츠를 쉽고 빠르게 작성해 드립니다.
- 스토어에서 무료 이용권를 계정별로 1회 발급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바로 체험해 보세요!
이런 주제들을 입력해 보세요.
- 유아에게 적합한 문학작품의 기준과 특성
- 한국인의 가치관 중에서 정신적 가치관을 이루는 것들을 문화적 문법으로 정리하고, 현대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를 비교하여 자신의 의견으로 기술하세요
- 작별인사 독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