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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항해시대』요약
    『대항해시대』- ‘유럽중심주의’ : 근대에 들어와서 가장 활발하게 해상 팽창을 한 주체는 유럽이며, 따라서 유럽이 근대 이후 세계사의 발전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나머지 지역들은 수동적인 자세로 있다가 결국 유럽의 식민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런 인식을 잘 나타내는 지난날의 용어가 ‘지리상의 대발견’일 것이다. 이 용어의 이면에는 서구가 나무지 세계를 발견하고 영향을 미치고 종국에는 지배한다는 관점이 깔려 있다. 이렇게 되면 서구 이외의 다른 지역들은 온전한 역사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다만 서구 중심의 역사 서술의 대상이 될 뿐이다. 15-18세기만 해도 유럽은 아직 절대적 지배권을 행사하지는 못했다. 지구적인 네트워크는 전 세계의 문명권이 참여하여 만든 것이지 유럽의 힘만으로 된 것은 아니다.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곧 근대사에서 유럽 세력이 행한 역할을 모두 부정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실제로 15-18세기 동안 유럽 각국이 시간이 갈수록 강력한 활동을 펼쳤고, 종래 19-20세기에 제국주의적인 지배자가 된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유럽중심주의란 단순히 유럽이 역사적으로 늘 우월한 지위를 차지했다는 주장이 아니라 유럽이 절대적 보편성을 가진 ‘기준’이 되어 나머지 모든 지역의 역사를 그 기준에 맞춰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제1장 세계의 팽창, 세계의 불균형- 15세기까지 아시아 해상 교역은 동서 간으로 대단히 긴 해상 루트를 형성하면서 발전했다. 서쪽의 홍해로부터 동쪽의 일본에까지 긴 활 모양의 아시아 교역망이 엄청난 길이로 이어져 있어서, 여기에 많은 아시아 상인들이 참여하였다. 페르시아 상인들, 아랍 상인들, 중국 상인들이 큰 비중을 차지했지만, 그 외에도 아시아의 각지에서 다양한 상업 세력들이 성장했다.아시아 해상교역의 특징은 정치?군사 세력이 분산되어 있고 문화적으로 극히 다양했다는 점이다. 이 말은 곧 아시아 각지의 상인들이 비교적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다는 의미.- 유럽은 힘이 넘쳐서라기보다는 자신들에게 부족했던 것을 찾아서 해외로 나아간 것리적으로 다른 제도였으며, 따라서 아시아의 상업 세계에 미치는 영향력은 훨씬 컸다.제2장 세계와 유럽의 조우 : 유럽의 해상 팽창- 포르투갈의 지정학적 위치 : 상이한 두 세계 사이의 ‘경계’에 있다는 점① 기독교권과 이슬람권의 경계에 위치해 있었다. 이 나라는 이슬람권 지배를 종식시키고 기독교권의 영토 회복을 완수한다는 종교적?군사적 이데올로기가 강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슬람권의 발달된 문화를 흡수했고, 아프리카의 중요 산물들을 교역하면서 부를 쌓았다.② 대서양 세계와 지중해 세계의 경계에 위치해 있었으며, 지중해권의 지원을 받아 대서양으로 발전해 나갔다고 할 수 있다.- 포르투갈 국내의 정치적?사회적 변화와 해외 팽창의 관계 : 아비스 왕조 성립 이후 부르주아 계급이 성장하고 귀족이 몰락하였다. 이 몰락한 귀족들이 국내에서 상실한 지위를 획득하는 방편 중의 하나가 해외 모험에 참여하는 것이었다.아프리카에서 포르투갈의 사업은 크게 두 갈래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상업 이윤을 찾아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남하나는 것으로서 주로 부르주아층이 지지했다. 다른 하나는 모로코의 군사 정복을 추진하는 것으로서, 주로 왕실과 귀족들의 지지를 받았다.이처럼 포르투갈의 초기 탐사는 이슬람권과의 투쟁과 교역-금, 노예, 말라게타, 상아 등-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지향하였다. 그러나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접촉은 해안 지역에만 국한되었을 뿐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가지는 못했다. 대개 질병, 아프리카의 군사적 저항, 혹은 직접적인 이윤 동기의 부족 등이 그 이유로 제시된다.- 알메이다와 알부케르크 : 기본적으로 무력을 사용하여 현지의 주요 상품 거래를 빼앗고 그럼으로써 오토만 제국이나 이집트 같은 적의 힘을 약화시킨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포르투갈의 무역 방식은 ‘군주 자본주의’의 성격을 띠었다. 특히 주목할 점이 소위 ‘카레이라(국왕선박항로)’체제)와 카르타스 제도)이다.- 16세기 중엽부터 포르투갈 체제에는 위기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 가장 중요한 교역 상품인 후추와 향신료 수 소수 지배자와 다수의 노동자 집단이 상품 작물을 경작하는 플랜테이션 사회가 여러 곳에 형성되었다.- 포르투갈이 상대적으로 더 ‘상업’지향적이었던 반면 에스파냐는 처음부터 ‘정복’에 더 큰 무게가 실렸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에스파냐의 사업은 초기부터 상업, 탐험, 정복의 욕구가 혼재된 양상을 보였다.이런 과정을 통해 아메리카 대륙 내에 유럽인이 지배하는 제국이 형성되었다.- 에스파냐 인들은 정복 지역에 요새화된 읍을 건설하고 정복자들에게 주변의 땅을 분할해 주었다. 인디언 노동력을 할당하는 레파르티미엔토 체제가 만들어졌고 이 강제 노역 체제가 원주민 사회의 붕괴를 가져왔다.서인도 제도에서 약탈을 통해 얻은 부는 다음 탐험의 비용으로 충당되었다. 에스파냐 탐험가들은 곧 대륙 본토로 공격해 들어갔다. 1519년 코르테스가 쿠바에서 출발하여 본토에 상륙한 다음 해안 지역에 베라크루스라는 도시를 직접 건설하고 총사령관이 된 후 더 내륙으로 들어가서 1521년 아스텍 제국을 멸망시켰다. 1531년에는 피사로가 겨우 180명의 군인과 27마리의 말을 가지고 수만 명의 군인들이 지키고 있는 잉카 제국을 멸망시켰다. 에스파냐는 이 지역들에 엔코미엔다라는 가혹한 조세?조공 체제를 만들어냈다. 현지 지배자들이 자의적으로 인력과 물자를 수탈하는 것이었다. 그 명분은 에스파냐의 국왕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직접 통치를 하지 못하므로 현지 지배자에게 원주민들을 ‘보호’하고 기독교로 인도하는 임무를 맡기는 대신 그에 상응하는 조세를 받게 하자는 것이었다.곧 지배자(엔코멘데로)의 지독한 수탈에 대한 거센 비판이 제기되었다. 특히 ‘인디오의 옹호자’로 알려진 라스카사스가 격렬한 반대 논의를 펼쳤고, 에스파냐 궁정에서는 이에 대한 신학적?법학적?정치적 논쟁이 벌어졌다.라스카사스세풀베다?인디언 옹호?인디언 지배 합리화?‘인디언들이 자발적으로 국왕의 신하가 되려고 하고 그것을 영예로 생각하도록 해야 한다’?인디언을 보호하기 위해서 흑인 노예를 도입해야 한다?‘인디오들은 인간 같지 않은 존재유럽이 아시아의 문호를 여는 수단이 되었다.- 16세기에 급격히 증가하던 아메리카와 유럽 사이의 교역은 17세기에 들어서 뚜렷하게 감소했다. 그 원인으로는,첫째, 유럽의 은수요가 감소했고 그래서 가격이 떨어진 결과 식민지의 은 생산도 채산성이 나빠졌다.둘째, 인구가 감소하고 경제가 불황에 빠졌다. 17세기에 유럽 경제는 소위 ‘철의 시대’를 맞이한 것이다. 그 결과 귀금속에 대한 수요가 적어졌다.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변화는 사탕수수를 재배하는 플랜테이션이 크게 늘고 이를 위해 아프리카의 흑인 노예가 본격적으로 도입되었다는 점이다.-토르데시야스 조약 :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고 돌아오자 교황은 이곳을 에스파냐에게 주고 싶었다. 그래서 아조레스제도와 카보 베르데 해역에서 서쪽으로 100리그 떨어진 지점에 북극에서 남극으로 곧게 그은 구획선을 설정하고, 이 선의 서쪽에서 발견된 모든 육지는 에스파냐에 속한다는 교서를 발표했다. 이 100리그라는 것은 터무니없는 가까과학이 그 배경이 되었다. 이 선을 넘으면 기후가 갑자기 변하여 기온이 올라가고 여름과 겨울의 구분이 없으며 바다는 해초로 가득해진다고 믿었다. 에스파냐의 경쟁국인 포르투갈 국왕으로서는 이 선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에스파냐와 협상을 통해 구분선을 더 서쪽으로 옮겼다. 이제 구분선은 카보 베르데 서쪽 370리그를 지나게 되었는데, 사실 그 당시 기술로는 그 지점을 정확히 측정하는 것이 힘들었다. 그래도 양국은 이 합의를 아주 성실하게 지켰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선의 동쪽에 위치해 있는 브라질이 포르투갈령이 된 것이다. 이 구분선을 지구 반대편으로 확장하여 지구 전체를 완전히 양분한 것은 1529년에 체결된 사라고사 조약이다. 물론 지구 전체를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식민 지배한다는 것은 그들의 희망사항일 뿐이었고 다른 국가들이 이런 조약들의 내용을 존중하지는 않았다.- 브라질은 처음에는 아시아로 가는 항로의 중간 기착지 역할에 치중했으며, 염료 원료로 쓰이는 부라질 나무 외에 별다른 매력적인 상품이었으므로 손을 놓았고 따라서 개인 업자들이 사업을 주도하게 된 것이다. 특히 대구 어업과 모피 교역이 주요 사업 분야였다.북아메리카 지역은 처음부터 거주민 사회의 건설을 주요 목표 중 하나로 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중남미와 달랐다. 영국은 이미 인구 과잉 상태여서 적절히 인력을 해외로 유출시킬 필요가 있었다. 북아메리카에서는 유럽의 모국에서보다 인구 증가율이 훨씬 높았다. 이에 비해 열대 지역에는 남성들만 이주해 갔기 때문에 자연 증가가 불가능했고, 따라서 메스티소 현상이 시작되어 인구가 안정화 단계에 들어가기 전에는 계속 인력을 공급해야 했다.백인 인구의 급격한 증가와 인디언 인구의 몰락은 동시에 일어났다. 인디언들이 너무 소수사 되어서 피지배 노동층으로 삼기에도 부족한 지경에 이르자 필요한 노동력은 유럽계 계약제 노예로 충당했으며, 곧이어 흑인 노예 노동력이 대규모로 유입되었다.- 전체적으로 프랑스 식민지는 정체해 있었다. 여기에 더해서 영국 식민지와 갈등을 겪어서 1629년에는 일시적으로 퀘벡을 상실했다가 1632년 다시 회복하기도 했다.프랑스계 캐나다 인들의 경우에서 한 가지 놀라운 것은 다른 식민지의 경우와 달리 모국으로부터 이주민 보충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다만 인구의 자연 증가만으로 버텨냈다는 점이다.제5장 화폐와 귀금속의 세계적 유통- 근대 세계의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는 귀금속이 사상 유례 없이 대규모로 산출되어 전 세계적으로 유통되었고 또 이것이 각 지역의 화폐 체제에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근대 화폐사의 고전적인 연구자들인 해밀턴, 쇼뉘, 빌라르, 브로델 등이 제시한 정설적인 주장의 큰 틀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콜럼버스 이후 아메리카 대륙에서 막대한 양의 금과 은이 산출되어 유럽으로 흘러들어왔다. 이 가운데 많은 양은 유럽 내에 잔존했으며 이것이 이 지역의 인플레이션을 유발했다. 귀금속 유입으로 화폐량이 증가하여 이것이 곧 물가 상승을 초래한 것이다. 이는 특히 상공업자들의 이윤을 높여서 유럽 경제의 발전을 자극했다. 한편다.
    인문/어학| 2012.04.27| 4페이지| 2,500원| 조회(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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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항로 개척, 대항해시대
    대항해시대서양근대사 역사교육전공 이지혜.hwp15세기까지 아시아 해상 교역은 동서 간으로 대단히 긴 해상 루트를 형성하면서 발전했다. 서쪽의 홍해로부터 동쪽의 일본에까지 긴 활 모양의 아시아 교역망이 엄청난 길이로 이어져 있어서, 여기에 많은 아시아 상인들이 참여하였다. 페르시아 상인들, 아랍 상인들, 중국 상인들이 큰 비중을 차지했지만, 그 외에도 아시아의 각지에서 다양한 상업 세력들이 성장했다. 아시아 해상교역의 특징은 정치?군사 세력이 분산되어 있고 문화적으로 극히 다양했다는 점이다. 이 말은 곧 아시아 각지의 상인들이 비교적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다는 의미이다. 유럽은 힘이 넘쳐서라기보다는 자신들에게 부족했던 것을 찾아서 해외로 나아간 것이다. 아시아에 들어온 유럽인들은 단지 수많은 이방인 상인들 중의 하나에 불과했다.동기?배경- 일반적 견해 : 오스만 투르크족이 레반트 방면으로 진출하고, 특히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함으로써(1453) 동방무역로가 폐쇄되고, 동방의 산물에 대하여 중세가 부과되었기 때문- 부정적 견해 : 콘스탄티노플은 동방무역에 있어 그렇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 않았으며, 동방 무역로의 종점인 시리아나 알렉산드리아는 16세기에 들어서서야 투르크족에게 점령. 게다가 15세기를 통하여 동방의 산물은 계속 유럽에 수입되고 있었고, 향신료가격의 급등현상도 없었기 때문.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기 훨씬 전부터 포르투갈인들은 동방으로 가는 새로운 항로를 탐험하고 있었다는 것- 종교적 측면 : 이베리아반도에서의 두 왕국의 성립은 끊임없는 이슬람과의 투쟁. 그러므로 그들은 이슬람에 대한 적개심과 이슬람을 타도하고 그리스도교를 전파하고자 함. 따라서 프레스터 존(Prester John)이 다스리는 망각된 강력한 그리스도교 국가가 동부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어느 곳엔가 존재한다는 전설은 그들에게 있어 큰 관심의 대상이 됨- 경제적 측면 : 향료는 지중해를 통한 동방무역의 주종상품이었고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가져오는 것.- 문제에의 적용② 조선과 항해기술의 발달③ 화기 특히 해전에서의 이의 이용의 발달- 집권적인 통일국가 형성 : 새로운 항로의 탐색과 발견에 필요한 막대한 비용과 그것이 실패하였을 경우의 희생을 감수할 능력은 통일국가를 이룩한 왕권에 구할 수밖에 없었음.인도항로의 발견- 포르투갈의 지정학적 위치 : 상이한 두 세계 사이의 ‘경계’에 있다는 점① 기독교권과 이슬람권의 경계에 위치. 이 나라는 이슬람권 지배를 종식시키고 기독교권의 영토 회복을 완수한다는 종교적?군사적 이데올로기가 강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슬람권의 발달된 문화를 흡수했고, 아프리카의 중요 산물들을 교역하면서 부를 쌓음.② 대서양 세계와 지중해 세계의 경계에 위치해 있었으며, 지중해권의 지원을 받아 대서양으로 발전해 나감.- 포르투갈 국내의 정치적?사회적 변화와 해외 팽창의 관계 : 아비스 왕조 성립 이후 부르주아 계급이 성장하고 귀족이 몰락. 이 몰락한 귀족들이 국내에서 상실한 지위를 획득하는 방편 중의 하나가 해외 모험에 참여하는 것.- 포르투갈의 항해왕자 엔리케(Henrique)) : 국왕으로부터 기니 연안에 대한 탐방과 교역에 관한 전권을 획득. 동시에 2대에 걸친 교황들로부터 아프리카 탐험에 참가한 모든 사람들의 완전 면죄부를 획득. 또한 아프리카 흑인들을 기독교도로 개종하는 것에 대한 독점권도 교황으로부터 받아냄. 그리고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독점권을 관대하게 적용하여 포르투갈 상인들과 탐험가들 뿐 만 아니라 외국인들도 재정적으로 후원.? 1441년 탐험대 파견. 보자도르 곶 남쪽해안에서 탐험대는 약간의 사금과 흑인 포로를 데리고 왔으며, 그 후 6년 간에 포르투갈 탐험대는 1,000명에 가까운 노예를 본국으로 운반.- 1480년대 주앙 2세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탐험 재개.? 바르톨로뮤 디아스(Bartholomeu Dias) : 1487년 아프리카 대륙의 남단에 도달하는 데 성공.?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 : 1498년 인도의 캘리컷에 도달. 신항로개척의 목표였던 후추와크(Affonso d'Albuquerque) : 호르무즈를 먼저 점령, 동방경략의 근거지로 고아를 택하여 이를 점령(1510). 이렇게 해서 동방 무역로의 서쪽을 장악한 알부케르케는 다시 동쪽으로 진출하여 말라야의 요소인 말라카를 점령(1511). 1513년에는 최초의 포르투갈 선박이 광동에 도달, 그 후 포르투갈은 마카오에 무역거점을 설치하여 중국과 말라카 사이의 무역에 직접 참여. 거의 같은 시기에 향료제도로 알려진 몰루카제도에 이르러 그 곳 태수와 협약 체결.- 포르투갈의 무역 방식은 ‘군주 자본주의’의 성격을 띰. 특히 주목할 점이 소위 ‘카레이라(국왕선박항로)’체제)와 카르타스 제도)아메리카 대륙의 발견-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에스파냐의 이사벨라 여왕의 후원 : 1492년 8월 2일 3척의 배를 갖고 팔로스항을 떠남. 한 달 가까이 걸려 카나리아제도에 도착, 거기를 출발한 지 41일 만에 지금의 바하마 제도 중의 어느 섬에 도착하여 이를 산살바도르라고 이름 지음.? 그 후 3회에 걸쳐(1493 : 1496 : 1502) 항해를 하고, 향료와 황금을 찾았으나 허사. 그는 죽을 때까지 인도 근처에 도착한 것으로 믿음⇒ 콜럼버스의 항해는 인도로 가는 서방 항로의 탐험을 크게 자극- 토르데시야스(Tordesillas) 조약) 체결- 피렌체 출신의 아메리고 베스푸치(Amerigo Vespucci) : 여러 번 신대륙으로 건너가 중남미 쪽을 탐험한 끝에, 이곳이 ‘신세계’일 것이라는 의견을 발표. 이 신대륙은 최초의 발견자인 베스푸치의 이름을 따서 ‘아메리카’라고 불림.- 포르투갈 출신 마젤란(Ferdinand Magellan) : 최초의 세계 일주 항해 성공. 지구가 둥글다는 것 확인⇒ 마젤란의 세계주항은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사이에 몰루카제도를 둘러싼 분쟁을 야기 시켰으나, 1529년 사라고사(Saragossa)조약)으로 해결에스파냐의 신대륙경영- 코르테스(Hernando Cortes) : 1519년 멕시코 정복. 1521년까지 아친 광대한 지역에 에스파냐의 식민지가 건설- 엔코미엔다 : 가혹한 조세?조공 체제. 현지 지배자들이 자의적으로 인력과 물자를 수탈하는 것. 그 명분은 에스파냐의 국왕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직접 통치를 하지 못하므로 현지 지배자에게 원주민들을 ‘보호’하고 기독교로 인도하는 임무를 맡기는 대신 그에 상응하는 조세를 받게 하자는 것.라스카사스세풀베다? 인디언 옹호? 인디언 지배 합리화? ‘인디언들이 자발적으로 국왕의 신하가 되려고 하고 그것을 영예로 생각하도록 해야 한다’?인디언을 보호하기 위해서 흑인 노예를 도입해야 한다? ‘인디오들은 인간 같지 않은 존재이므로 에스파냐가 지배하는 것이 정당하다’- 곧 지배자(엔코멘데로)의 지독한 수탈에 대한 거센 비판이 제기.- 1542년에 인디오의 노예화와 가혹한 착취를 규제하는 신법이 반포되어 이존의 부르고스 법을 대체. 이에 따라 아메리카에 2개의 부왕령을 설치하고 중앙집중화를 강화해서 식민 정책을 통제하고자 함. 많은 문제를 노출한 엔코미엔다 체제는 서서히 해체를 유도→ 식민지 경제가 크게 동요. 에스파냐 궁정 측은 중요한 개선 조치들을 곧 철회, 인디오들에 대한 착취 체제는 약간 변형된 방식으로 온존. 이제 통치자가 인디오 공동체에 부역 노동력을 징집?차출하여 운영하던 방식 대신 아예 주민들을 직접 고용해서 농장 노동자(페온)로 정착시키는 대농장 제도(아시엔다)로 점차 바뀜⇒ 원주민 공동체의 해체를 더욱 가속화.- 에스파냐 정복자들은 목축업 경영. 에스파냐로부터 말?소?양 등을 들여와 기후가 온화한 지역에서 대규모의 목장 경영.- 목축에 부적당한 열대 해안지대, 특히 카리브해와 멕시코만 일대에서는 사탕과 담배를 재배하는 대농장이 발달, 노동력으로서는 아프리카의 흑인노예가 많이 이용- 초기 정복자들은 아스테크나 잉카제국이 보유한 금?은을 마구잡이로 탈취하여 사복도 채우고 본국에도 보냄. 그러나 점차로 금광과 은광을 답사하여 이를 채굴하게 되고, 16세기 중엽에는 멕시코의 포토시(Potosi)와 같은 풍부한 광맥들이 으로 인정받는 칙서를 받음- 유럽의 해외 팽창이 국가가 주도하는 사업이었고, 또 기독교가 국가 이데올로기로서 작동- 당시 교황청은 종교 개혁 시기인 이 당시 개신교의 성장에 대응해야 하는 초미의 문제, 그리고 터키에 대항하는 문제 등에 주력하느라고 해외 선교 사업은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에 거의 위임한 상태.- 포르투갈 : 세속적 정복과 종교적 전도가 결합된 전형적인 사례. 자신들의 해외 사업이 이방인들을 올바른 신앙의 품으로 인도하리라는 의식이 강함.→ 곧 각국 간의 치열한 선교 경쟁이 전개. 해외 선교의 최전선에 포르투갈이 나가 있고, 이에 대해 에스파냐, 프랑스 등이 도전하는 양태가 벌어진 것.유럽으로의 은 유입과 인플레이션- 콜럼버스 이후 아메리카 대륙에서 막대한 양의 금?은 산출→ 유럽으로 유입→ 인플레이션 유발→ 상공업자들의 이윤을 높여서 유럽 경제의 발전을 자극.? 유럽으로 들어온 은→ 아시아 : 아시아로 귀금속이 유입된 이유는 아시아 산물에 대한 유럽의 수요는 크지만 반대로 유럽 상품에 대한 아시아의 수요가 그리 크지 않아서 유럽이 아시아에 대해 무역수지 적자를 보였으므로 그 차액만큼 귀금속으로 결제를 해야 했기 때문.- ‘아메리카의 귀금속 생산-유럽으로의 유입-아시아로의 유출’ 형태 : 유럽의 적극성 내지 우월성을 나타냄. 유럽은 현지에서는 수요가 아주 약한 먼 이국에서 광산 개발을 주도하여 나머지 지역으로 송출했으며, 무엇보다도 아시아 시장을 개방하는 데에 이 자원을 사용했고, 또 이 과정을 주도하는 가운데 세계 경제에 대한 지배력을 키워 갔다는 것.- 유럽에 들어온 금과 은은 그 다음 어떻게 되었으며, 또 어떤 역할을 하였는가?? 교과서적인 설명① 에스파냐에 들어온 귀금속은 곧 유럽의 다른 나라들로 유출. 16세기 에스파냐는 군사적?정치적 측면에서는 강국이었지만 사회적?경제적으로는 후진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에스파냐 자체적으로 필요한 물품이나 신대륙에 수송해야 할 물품들을 외국에서 구입해야 했으며, 그에 따른 대금결제 때문에 귀금속이 촉진
    인문/어학| 2012.04.27| 5페이지| 2,500원| 조회(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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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사소통장애와 통합교육
    의사소통장애아와 특수교육Ⅰ. 서론내 초등학교 시절에 같은 반에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친구가 있었다. 학습능력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발표 같은 것은 잘 하지 못했다. 선생님 또한 단순히 그 친구가 수줍어서, 또는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해 말을 잘 못해봐서 그런 것이라 생각하시고 발표시간이 되면 그 친구에게 항상 발표를 시켰다. 그러면 그 친구는 여자아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낮은 음성으로 말을 더듬으며 우물쭈물하곤 했다. 어린 마음에 또래 친구들은 대놓고 그 친구를 멀리했고, 우리와 조금 다르다는 이유로 항상 놀림감이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굉장히 부끄러운 일이지만 아마 지금도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리라 생각된다.다른 장애에 비해 의사소통장애는 교사나 부모들이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부모들의 경우에는 아이가 말을 할 때 문제가 있거나 의사소통이 잘 안 된다 하더라도 “아직 어려서 그렇겠지.”라고 생각할 것이고, 교사들의 경우에는 학생이 그러한 모습을 보이면 의사소통장애를 떠올리기 보다는 다른 장애(예를 들어 지체장애 같은)를 의심할 것이다. 그만큼 의사소통장애는 생소하고 의사소통장애아를 선별하는 기준도 모호하다. 현재, 우리나라의 경우 법적으로 장애 위험 유아나 특수교육대상자를 진단?평가하는 체제는 갖추어져 있으나, 의사소통장애는 선정과 관련된 선정 기준별 조작적 정의나, 진단 지침 등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지 않아서 전문가들이 특수교육대상자를 선정하고 배치하는데 어려움이 많다. 또한 장애의 유형과 연령 단계를 고려한 표준화된 진단?평가도구도 미흡한 실정이어서 특수교사들의 의사소통장애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갖기에는 어려움이 있을 수 밖에 없다. )의사소통장애는 말 그대로 의사소통이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는 것으로, 말을 잘 하지 못하거나 소리가 이상하거나 하는 등의 행동만 보일 뿐 지능이 떨어지거나 하지는 않는다. 일반학급에서 충분히 함께 학습할 수 있다.이 글에서는 의사소통장애에 대해 교사들은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의사소통장애학생을 효율적으로 가르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한다.Ⅱ. 본론ⅰ. 의사소통장애의 정의미국 말?언어?청각협회는 의사소통장애를 "개념 또는 구어, 비구어 및 그래픽 상징체계를 수용하고 전달하고 처리하는 능력의 결함"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한편 우리나라 장애인 등에 대한 특수교육법(2008. 5. 26)에서는 의사소통장애를 첫째, 언어의 수용 및 표현 능력이 인지 능력에 비하여 현저하게 부족한 사람, 둘째, 조음 능력이 현저히 부족하여 의사소통이 어려운 사람, 셋째, 말 유창성이 현저히 부족하여 의사소통이 어려운 사람, 넷째, 기능적 음성장애가 있어 의사소통이 어려운 사람 중에서 어느 하나에 해당하여 특별한 교육적 조치가 필요한 사람이라고 규정하고 있다.교사들이 학급에서 만나게 되는 아동들은 말과 언어의 능력 면에서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앞으로의 교육적, 사회적, 직업적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적절한 말과 언어를 지닌 아동, 둘째, 잘못된 말이나 언어 기술을 보이지만 성장함에 따라 점차 교정되는 아동, 셋째, 언어적 자극이 필요한 아동, 넷째, 언어병리학적인 치료를 필요로 하는 좀 더 심각한 결함을 지닌 아동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 중 세 번째와 네 번째 아동들은 효율적인 교육적 접근이 필요한 아동으로 볼 수 있다.)ⅱ. 의사소통장애에 대한 교사의 인식「의사소통장애의 진단과 중재에 대한 특수교사의 인식」이라는 논문은 의사소통장애아에 대한 특수교사의 인식에 대해 면담을 통해 질적 연구를 한 것이다. 이 논문에서 면담 대상자는 서울시에 소재한 특수학교와 특수학급에서 근무하고 있으며,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갖는 장애아동을 담당하고 있는 9명의 특수교사였다.면담에 참여한 교사들이 대부분 언어장애에 대해 설명을 하였지만 막상 현장에서 언어장애로 진단받거나 언어문제만 있는 학생은 본 적이 없다고 하였다. 즉, 의사소통 장애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도 각 장애 유형별로 장애 아동에게서 관찰했던 언어문제를 진술하였다. "대부분의 자폐나 정신지체 아동들이 언어장애를 겸하고 있다"라며 특수교사들에게 있어서 '의사소통장애'는 특수교육대상 학생들의 '장애'가 초래하는 결과적 현상으로 인식되고 있음을 나타냈다.또한 면담에 참여한 대다수의 특수교사는 특수교사가 의사소통 문제에 대해 전문성을 갖고 언어치료적 접근을 하기는 어렵다고 답하였다. 그러나 특수교사가 전문적인 언어치료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수업내용 속에서 언어와 관련된 내용을 많이 다룰 수 밖에 없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학생들이 보이는 언어상의 문제가 곧 이들이 겪고 있는 학습에서의 어려움과 직결되기 때문이며, 이러한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언어교육이 특수교육에서의 언어치료인 것 같다고 설명하였다.또한 면담에 참여한 특수교사들은 현재 의사소통장애 진단에 있어서 주된 문제점은 도구와 절차상의 문제라고 하였다. 현재 교육 현장에서 주로 사용하고 있는 진단도구로 기초학습 기능검사, 그림 어휘검사, 시지각 검사도구, K-WISC 등이 있지만 자신들이 사용할 수 있는 언어관련 진단 도구는 매우 부족한 실정이라고 지적하였다. 이들은 현재의 의사소통장애 진단 도구는 각 장애별 특성이 고려되어 있지 않아 의사소통장애를 동반하고 있는 장애학생들에게 적용하기에 부적절하며, 이로 인해 해당 장애학생의 언어능력을 파악하는데 어려움이 있다고 하였다. 특히 각 장애의 특성을 고려할 수 없는 상태에서 진단을 실시할 경우, 진단받는 학생들의 실제 언어능력이 제대로 측정되지 않거나, 측정불가의 결과가 나올 수 있는 것에 대해 우려를 표현하였다. 또한 대부분의 진단 도구가 실제 생활에서 필요한 의사소통 능력을 측정하지 못하고 있다고 인식하고 있었으며, 특히 중등시기의 장애학생들이 일반학생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기 위해 필요한 '화용'중심의 의사소통 능력을 진단하고 중재의 기초를 제공할 수 있는 진단 도구가 매우 부족하다고 지적하였다.면담에 참여한 특수교사들은 현재 학교에서 실행되고 있는 순회치료교육대상 선정의 문제, 진단과 치료의 비연계성, 순회치료교사의 배정 등과 관련된 다양한 문제점들에 대해 지적하였다. 특히 중등 특수학급을 담당하고 있는 특수교사들은 새롭게 시작된 순회치료교사제도가 현재 초등학교에서만 실시되고 있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입장이었다. 장차 중등교육 이후 사회로 진출하게 될 중등기의 학생들이야말로 실생활과 관련된 화용론적인 접근에서의 언어치료가 더욱 절실한데도 오히려 순회언어치료제도에서 소외되고 있다고 인식하였다.또한 순회치료교사의 전문성과 관련하여 경험이 많고 전문적인 능력을 갖춘 순회치료교사가 지원되었으면 좋겠다고 하였으며 순회언어치료교육내용 또한 해당 학생들의 생활연령에 맞는 내용으로 제공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표현하였다.)ⅲ. 의사소통장애아를 위한 교육의사소통장애아들을 보면 대게 말을 하는데 문제가 있거나, 목소리가 이상하다거나, 말을 더듬는다거나 하는 등의 모습을 보인다. 지능이 떨어지지는 않으나 일반적인 방식으로 학습하기에는 문제가 있다.그래서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나온 것이 바로 보완대체 의사소통(Augmentative and alternative communication; AAC)이다. 이것은 다양한 선천적 또는 후천적 이유로 인해 의사소통능력의 결함을 가진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기존의 구어를 통한 의사소통방식을 보완하거나 대신할 수 있는 여러 가지 형태의 비구어적 의사소통방식을 말한다. 상징, 보조도구, 전략, 테크닉의 네 요소로 구성되는 AAC 사용의 궁극적 목표는 대화에 사용할 수 있는 메시지를 표현하고, 가정, 학교, 직장 및 여가생활에의 참여를 도와주고, 모국어 학습, 사회적 역할의 유지?수행을 도움으로써 그들의 개인적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사용자 개개인에게 기회와 능력을 제공해주는데 있다. 또한 보완대체의사소통의 적절한 활용은 의사소통 장애를 가진 대상자뿐만 아니라 그 가족의 삶의 질까지도 높여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국내 현장에서의 AAC활용에 대한 인식과 요구는 점차 커져가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현장에서 바로 사용될 수 있는 의사소통 보조도구와 진단도구의 보급은 매우 초기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는 실정이다. 현재 AAC도구는 주로 학교, 언어치료실 등의 맥락에서 교사가 직접 제작한 비전자식 도구(의사소통판이나 의사소통책) 또는 음성녹음이 되는 간단한 수업도구에 의존하고 있다. 또한 AAC 적용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첫 단계는 대상자에 대한 체계적 진단인데, 아직까지 현장에서 특수교사나 언어치료사들이 믿고 사용할 수 있도록 체계적인 평가도구는 없는 실정이다. 따라서 AAC 중재나 도구결정시, 담당교사나 치료사의 개인적 소견에 주로 의존하고 있으며, 이로 인한 부담 때문에 AAC 중재에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의사소통장애아들은 대게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못하기 때문에 의기소침해 있고, 피해의식이 생길 수 있으며 학습에 참여하길 꺼려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의사소통장애아를 교육하는 방법론적 측면 뿐 아니라 일반학생들과의 통합교육 측면에서 보았을 때 어떻게 하면 그들과 융화되면서 잘 적응할 수 있으며, 학습에 높은 참여도를 보일까에 대한 고찰도 필요하다.위의 표는 「일반교사와 특수교사의 협력을 통한 사회과 통합교육 프로그램 적용이 장애학생의 학습참여도 및 일반학생의 통합교육 인식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논문에서 발췌한 것으로, 중학교 특수학급에 배치된 장애학생 2명과 이들이 소속된 2개 통합학급 일반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질적 연구이다. 사회과 담당 일반교사와 특수학급담당 특수교사가 긴밀히 협력하여 장애학생 통합교육 인식개선의 일환으로 부모상담, 교사연수, 및 통합학급학생을 대상 '장애인 이해교육' 및 'Good Friends(장애학생 친구도우미)'제를 사전교육으로 실시하였고, 아울러 장애학생의 적극적인 학습참여도 증진을 위해 학교교육과정 편제의 사회과에 배정된 사회교과와, 독서교육, 그리고 CCAP(외국인과 함께하는 문화 교실) 수업 세 영역과 'Good Friends'제를 각각 독립된 협력적 통합교육활동 프로그램으로 구안하여 4월부터 10월말까지 21회기에 걸쳐 적용하였다.
    교육학| 2011.12.28| 5페이지| 1,500원| 조회(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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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급경영계획서(역사)
    교직실무 기말과제.hwp학급경영계획서Ⅰ. 들어가며학급경영계획서를 작성해 보라는 교수님의 말씀을 듣고 교생실습 나갔을 때 담당 선생님의 모습이 떠올랐다. 처음 교생실습을 나갔던 날, 그 선생님은 출근하자마자 굉장히 분주해 보였다. 그 이유는 담임학급의 두 학생이 고등학생 형들에게 돈을 뺏기고 맞고 왔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선생님은 경찰서에 다녀오랴, 나머지 다른 학생들 챙기랴, 교과 지도 준비하랴 굉장히 분주했었다. 뿐만 아니라 다양한 잡무 때문에 정말 쉴 틈이 없었다. 그 모습을 보고 한 학급의 담임을 한다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시간이 꽤 흐른 후 담당 선생님께 고충이 심하지 않은지 여쭈어 보았다. 그런데 그 선생님께서는 힘들긴 하지만 담임을 하기 때문에 학생들과 끈끈한 친밀감을 형성할 수 있었다고, 그래서 보람을 느낄 수 있다고 대답하셨던 것이 기억이 난다. 실제로 그 선생님은 짬짬이 시간을 내어 학생들과 주기적으로 상담을 하셨고, 고민이 있으면 진심으로 걱정해주면서 해결책을 모색하려고 하였으며, 주말이나 개교기념일 등 쉬는 날에는 가끔씩 모여 단합대회를 하는 등 학생들을 정말 잘 챙겨주었다. 그래서인지 유난히 학생들이 선생님을 잘 따랐고 체육대회나 반의 단합이 요구될 때에는 다른 학급보다 끈끈한 협동심을 보여주었다. 그런 모습을 본 후, 나도 나중에 교사가 되어 학급을 담당하게 되면 성적을 올리는 것에만 신경 쓰는 교사가 아니라 학생들과 진심으로 교감할 수 있는 그런 교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앞으로 언급할 내용에는 구체적으로 학급을 어떻게 경영할 것인지에 대해서 기술하기로 하겠다.Ⅱ. 역사교사로서 학급경영 어떻게 할 것인가단순히 학급을 어떻게 경영하겠다는 것은 후에 설명하기로 하고, 일단 역사교사로서 학급을 어떻게 경영할 것인지에 대해 먼저 생각해보기로 했다.최근 들어 역사교육이 점점 약화되고 있는 추세이다. 오죽하면 6?25전쟁이 언제 일어났는지도 모르는 학생들이 있을까.. 안타깝기만 하다. 그러나 이것을 교육과정의 문제로만 볼 수는 없다. 현재 역사교육의 현장을 보면 교과서를 중심으로 단순히 연도와 사건을 암기하는 데만 치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아이들이 역사를 기피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그래서 내가 나중에 학급을 담당하게 된다면 그 학급만큼은 역사가 재미있는 과목이라는 것을 주지시켜 주고 나아가 역사적 사고력을 기르고,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키워주고자 한다. 하지만 말이 쉽지, 행동으로 옮기기에는 어려움이 따를 것이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 지 생각해 보았다.일단 역사와 친해지기 위해서는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역사와 관련된 책을 한 달에 한 권씩 읽게 하고 독서록을 쓰게 할 것이다. 이때 강압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쿠폰북 같은 것을 만들고 한 달에 한 번씩 독서록을 검사하여 10달을 채우면 상품을 주는 식으로 진행 할 것이다. 역사와 관련된 책에는 예를 들어 삼국유사 같은 쉽고 재미있는 내용을 선정하여 학생들의 흥미를 유발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그리고 방학 때는 한 번씩 체험학습을 나갈 것이다. 먼 곳으로 나가기에는 아이들을 통솔하기에도 무리가 있으니 가까운 서울에 있는 유적지나, 궁궐 투어를 통해 역사를 몸소 체험할 수 있도록 하는 자리를 마련할 것이다.내 개인 교과목 시간에는 시험을 위한 가르치기 보다는 역사에 대한 아이들의 눈을 넓혀 줄 수 있는 그런 수업을 하고자 한다. 역사라는 것이 결코 암기만 하는 따분한 과목이 아님을, 그리고 나와 연관 고리가 없는 무의미한 과목이 아니라 ‘내가’ 역사를 이끌어 가는 주체임을 인식시켜주고자 한다. 예를 들자면 교과서 중심의 수업방법에서 탈피하여 다양한 컨텐츠를 사용한다던지(다큐멘터리를 시청한다거나 등등) 역사신문을 만든다던지 하는 등의 학생들 스스로 참여할 수 있는 활동을 많이 하고자 한다.1. 경영 목표Ⅲ. 학급경영목표 세분화? 왕따 없는 교실 만들기? 바람직한 인성교육 함양? 역사적 사고력 함양과 민주시민의 육성? 다양한 체험 활동2. 경영 활동계획◈ 타인을 배려할 줄 아는 인격과 도덕성을 배양한다.◈ 폭력과 따돌림 없는 학급 분위기를 조성한다.◈ 독서와 글쓰기를 통해 창의적?비판적 사고를 할 수 있도록 한다.◈ 학급회의를 통해 토론문화를 양산하여 민주시민으로서의 태도를 육성한다.◈ 다양한 체험학습을 활성화 한다.학급 경영 계획? 급 훈盡 人 事 待 天 命(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사람이 되자)? 학급경영관◈ 학급 교육 목표지나친 몰입식 교육은 지양하고 학생들이 흥미를 느낄 수 있도록 유도하는 교육을 지향.◈ 학급경영방침1. 마니또 제도를 통해 서로서로 도울 수 있는 협동심을 함양하도록 한다.2. 학생들의 바람직한 인성을 위해 잘못을 했을 경우에는 체벌을 대신할 수 있는 벌점 제도를 실시하여 잘못된 행동은 하지 않도록 한다.3. 항상 따뜻한 마음으로 어느 누구도 편애하지 않고 평등하게 대우한다.4. 독서를 통해 생각의 깊이를 넓히도록 한다.◈ 담임의 교육 신조누구든지 사랑으로 평등하게 대우하고, 학생들을 내 아이들처럼 생각하고 진심으로 다가간다. 누구든지 진심으로 대하면 마음을 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교육학| 2011.12.28| 5페이지| 1,000원| 조회(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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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차세계대전 원인 관련 논쟁
    역사교과 논리 및 논술※제시된 자료를 보고, 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게 된 원인에 대해 논의해보자.(가) "독일과 그 동맹국들의 침략에 의해 강요된 전쟁의 결과로 연합국 정부와 국민들이 입게 된 모든 손해와 손실에 대한 책임이 독일과 그 동맹국들에 있음을 확인하고 독일은 이를 수락한다."-베르사이유 조약 231조)(나) 피셔논쟁논쟁의 발단은 1959년에 발표한 F.피셔의 ‘독일의 전쟁목적’이라는 논문으로, 1961년 그가 《세계에의 도전》을 출판하여 독일의 정통사학(正統史學)에 전면적 비판을 가하면서 논쟁은 본격적으로 표면화되었다. 반론(反論)의 대표는 당시 서독 사학계의 장로인 리터로, 그는 독일의 전쟁목적을 조국방어라는 점에서 찾고, 전쟁의 책임을 군부와 전(全)독일파(병합론자)라고 주장하였다. 피셔는 방대한 사료(史料)를 구사하여, 전쟁목적을 제2제정(帝政) 독일의 ‘세계정책’을 배경으로 삼아, 재상 베트만홀베크가 1914년에 발표한 ‘9월 프로그램’ 속에서 제국주의적 ·침략주의적 측면을 그것은 독일의 일관된 전쟁목적 정책의 기초가 되었다고 지적하였다.[출처] 피셔논쟁 [─論爭 ] | 네이버 백과사전제시된 자료 (가)는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체결된 베르사이유 231조의 내용이고 (나)는 피셔논쟁에 관한 내용이다.흔히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원인에 대해서 물으면 많은 사람들이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페르디난트 대공이 세르비아의 한 청년에게 암살당한 사건을 이야기할 것이다. 이 사건이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던 것은 맞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전쟁이 일어나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당시 유럽사회가 어떠한 위기상황에 봉착해 있었는지에 대해서 알 필요가 있다.19세기 중엽까지만 하더라도 영국은 세계의 중심이었다. 1차 산업혁명의 근원지였기 때문에 다른 나라들보다 산업이 발달했고, 가장 많은 식민지를 보유하고 있었다. 당시 영국에게 위협이 될 만한 나라는 없었기 때문에 유럽 열강들 사이에서 동맹을 맺지 않고 ‘명예로운 고립’을 택하여 중립을 지키고 있었다.그러나 19세기 말이 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2차 산업혁명이 전개되면서 이른바 후발 자본주의국가라 불리던 미국, 독일 등이 급부상 하였으며, 이들은 새로운 연료를 찾기 위해, 또는 해외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식민지 건설에 열을 올리면서 많은 식민지를 보유하고 있던 영국에게 위협이 되었다. 그리고 동아시아로 눈을 돌렸던 영국에게 러시아의 남하정책은 걸림돌이 되었고, 비스마르크 사퇴 이후 독일은 함대법을 제정하고 거대함선을 제조하는 등 해군력을 증강하는데 주력을 가하였고, 활발히 식민지를 개척하려는 세계정책을 추진하면서 영국에게 위기감을 심어주었다. 또한 보어전쟁 이후 다른 나라와의 동맹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면서 ‘명예로운 고립’에서 벗어나 동맹노선을 구축하게 된 것이다.비스마르크 시대에도 동맹체제가 있었다. 1870년 보불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비스마르크는 독일 주도의 러시아·오스트리아·이탈리아와 동맹 체제를 구축하여 프랑스를 고립시켰다. 그러나 비스마르크 사퇴 이후 동맹체제에 변화가 일어났다. 빌헬름 2세는 러시아와의 재보장 조약을 갱신하지 않아 파기되었고, 위에 언급하였듯이 해군력을 증강함으로써 영국의 경계대상이 되었다. 이때 러시아는 프랑스와의 연계를 모색하여 러·프 동맹을 구축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가장 귀추가 주목된 것은 영국의 행보였다. 보어 전쟁 이후 동맹체제의 필요성을 절감한 영국은 제일 먼저 일본과 영·일 동맹을 맺었으며, 이후 러시아·프랑스와 삼국협상을 체결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삼국동맹과 삼국협상이 서로 대립하는 형세가 되었다.또한 이 시기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민족주의이다. 다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던 오스트리아에게 가장 큰 위협이 되는 것은 러시아가 발칸반도로 남하하여 세르비아를 통합하고 거대한 범 슬라브 국가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오스트리아의 여러 민족을 통제할 수 없을 것이고 큰 위협에 처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스트리아는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독일과 손을 잡았던 것이다.이러한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오스트리아의 황태자가 암살당하자 오스트리아는 독일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이때 독일은 오스트리아를 지원해주겠다는 백지수표를 주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게 최후통첩을 가하였으며 여기에 러시아가 총동원령을 내리면서 전쟁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결국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고 이 전의 전쟁과는 다른 양상을 띠게 되었다. 탱크?독가스 등 신무기가 개발되었고 공중전?참호전이 등장했으며 최초로 총력전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전쟁의 고착화로 인해 장기화 되자 결국 독일의 항복을 끝으로 전쟁은 종결되었다.이후 연합국 측은 미국의 윌슨, 프랑스의 클레망스, 영국의 로이드 조지를 중심으로 베르사유 체제를 구축하였으며 독일에 대해 베르사이유 조약을 체결할 것을 강요하였다. 당연히 조약의 내용은 독일에 불리한 내용들이었다. 특히 (가)자료에 나와 있듯이 전쟁의 모든 책임을 독일에게로 전가시켰다. 아마 이때부터 전쟁의 책임에 관한 논의가 이루어졌던 듯 하다.전쟁 발발의 직접적인 책임에 대한 논쟁은 신랄하게 계속되어 왔다. 최후의 승전국들, 즉 영국·프랑스·미국과 그의 동맹국들은 종전 무렵에 독일이 전쟁 책임을 져야 하고, 전후의 협정문에 독일의 전쟁 “범죄”를 명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와는 반대로 1920년대 및 1930년대의 역사가들은 유럽의 모든 주요 국가들과 그들이 건설한 동맹 체제는 1914년 여름의 운명적 날로 세계를 몰아갔다고 주장하면서 앞서의 일방적인 평가에 대해 반박했다. 반면 1960년대 독일의 역사가 프리츠 피셔는 독일제국은 1914년 7월 위기를 의도적으로 확대시켜서 발칸반도에 한정된 위기 상황을 유럽 위기로 확대시켰다고 주장했다. 독일은 오스트리아의 황태자가 세르비아 청년에게 암살 당한 후인 7월 5일과 6일에 동맹국인 오스트리아 측에 무조건적인 지원을 약속하는 백지수표를 발행하였고, 이는 오스트리아로 하여금 세르비아에 대한 강경책을 취하게 하였고, 이에 따라 세르비아의 보호자격인 러시아를 전쟁으로 이끌었으며 러시아의 동맹국인 프랑스의 참전을 야기시켰다는 것이다. 당시 대다수의 독일 정책결정자들은 전쟁에 찬성하는 입장이었고, 이는 상당한 부분이 내정적인 측면에서 유래하였다는 것이다. 특히 피셔는 1차 세계대전의 중요한 책임은 정치지도자인 베트만 홀벡 수상에게 있다고 하였다. 그는 1914년 7월 위기를 1912~13년의 발칸위기와 비교하면서 왜 베트만 홀벡이 1912~·13과 마찬가지로 1914년 7월에 오스트리아의 강경한 발칸 정책에 제동을 걸지 않았나는 것이다. 피셔는 베트만 홀벡이 1913년과는 달리 1914년에는 전쟁을 원했다고 주장했다.
    인문/어학| 2011.12.28| 3페이지| 1,500원| 조회(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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