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퍼로드 감상문1. 위대한 유산, 종이의 탄생기원전 2세기 중국과 서역을 연결해주는 실크로드를 통해 종이가 전파되었다. 세계 전역에 종이를 통해 인류 지식이 전파되었으며, 이를 문명의 길, 페이퍼 로드라고 한다. 중국에서 처음 출발하여, 지구 한 바퀴를 돌아 기계화된 제지술은 다시 중국으로 돌아왔다. 이것은 또한 인간 정신과 문화의 전파이기도 하며, 또한 인간 문명의 발달 여정이다. 종이를 통해 인류는 기록을 남길 수 있었고, 그로써 인류 자신을 바꿀 수 있었다.기원전 213년 진시황은 분서갱유를 일으켰고 기록이 말살되었다. 그러나 지식이 집적되고, 문명발달로 기록은 더욱 더 필요해 졌고 그로부터 300년 후 종이가 탄생하였다.종이 사용 전에는 나무나 죽간으로 목간과 책이 만들어 졌고, 이를 합쳐서 간독이라고 하며 그 위에 칼로 글을 새기기도 하였다. 춘추 전국 시대에 제자백가가 등장하여 사상과 학문 흥성하였고, 이것은 간독에 기록 기록되었다. 그러나 간독은 부피가 크고 무거워 운송에 불편하였고, 이는 동방삭의 일화가 잘 보여준다. 간독 외에 비단에도 글을 썼으나 값이 너무 비싸서 보급하기 힘들었다. 이에 따라 종이 수요가 사회 경제 발전에 따라 제기되고, 절박한 일이었다. 효율적 행정처리, 학문 흥성을 위해 편리한 기록매체는 절실한 것이었다.산서성 양현은 채륜이 종이를 만든 후 봉지로 받은 곳이다. 이후 종이 제작의 중심지가 되었다. 꾸지나무라는 널리 있는 나무로 종이를 만들었고, 이로써 대량 생산이 가능해졌다. 현재도 많은 부분에서 채륜의 종이 제작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다. 채륜 이전에도 종이가 있었다는 학설이 제기되기도 하나 의견이 분분하며, 종이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낙양은 고대 중국의 중심지이며, 채륜이 종이를 최초로 보급한 곳이기도 하다. 3세기 후반 낙양은 종이 문화 중심지이다. 좌사의 ‘삼도부’는 처음에 비하당하나 나중에 인기가 높아져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이 일로 낙양의 종이값이 오르게 되었는데 여기서 洛陽之貴라는 고사가 나오게 된다. 이 돈황 석굴은 1000여년에 걸쳐 조성되었으며, 석굴 안에는 벽화가 있다. 석굴의 일부가 무너지면서 5만여점의 문서와 서적이 쏟아져 나왔는데, 온갖 종류의 서적이 있었다. 그 중 천문학 책이자 군사 전술 교본이기도 한 ‘점운기서’도 나왔다. 또, 행정체계도 나왔으며, 4~10세기 당나라 시기 금강경을 대표로 하는 불교서적이 제일 많이 나왔다.하남성 낙양의 백마사는 중국 최초 사찰이다. 불교의 전파는 인도와 중국 문화 융합된 것이다. 불경의 인도어를 한역화 작업이 매우 중요하였다. 산서성 서안 초당사에서 ‘구마라집’이 불경번역 작업을 하였는데, 이는 중국 불교 역사상 매우 중요한 일이다.한자 문화권에서 불교가 흥성하였으며 경전 전파가 곧 불교의 전파이자 발전이라 봐도 된다. 종이는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현장’은 중국 불교가 발전하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그는 인도에서 가져온 불경을 번역하였으며, 그가 번역한 한역 경전을 통해 중국 불교는 인도 불교와 차별화되었다. 또 이를 통해 다양한 종파 형성되었고, 교리가 체계화되어 신도의 수가 대폭 증가하였다. 불교와 한자의 전파로 한자 문화권 생성되었으며, 주변국가에 전파되었다.법현의 ‘불국기’ 현장의 ‘대당서역기’는 서역 인문지리를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불교는 서역, 인도, 중국 문화교류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현장이 서역으로 가는 도중 투르판 거치게 되었는데, 당시 이곳에 고창국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4세기 후반 이 지역에 제지술이 전파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독자적 불교문화가 융성하였다. 타클라마칸 사막을 지나 ‘호탄’이라는 불교왕국도 번영하였다. 이곳은 중국에 10세기 이전까지 불교를 전파하였다. 3세기에 이곳에 제지술이 전파되었으며, 뽕나무로 종이 만들었다.7세기 후반 서안은 세계 종이 문화 중심지였다. 종이의 보급이 증가하자 일상생활에 활용되었는데, 전지 공예 등장하고, 원나라 시대 보초라는 화폐가 등장하였으며, 청나라 시대에 이르면, 종이 신발 깔창, 종이 투구, 종이 옷, 화장지 등등 각종국지’는 5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베스트셀러로 군림하였다. 역사서인 ‘삼국지’ 바탕으로 씌여졌다. 16세기 초반 ‘삼국지연의’라는 소설로 출판되었다. 그 시기에는 소설들이 크게 유행하였으며, 이는 책이 서민에게까지 유행되었음을 나타낸다.송나라 시대에는 서적이 중시되었는데, 송나라 시대 기점으로 서적 출판 문화가 비약적 발전하였으며, 민간 출판업도 성황을 이루게 된다. 송대 베스트셀러인 ‘四書’로써, 이 시대에 유학이 모든 것의 중심이 된다.공자의 사상인 유학은 한무제 때 동중서의 주도아래 국가통치 이념으로 자리잡게 된다. 중국에서 유학은 과거제도로 인해 획기적인 전환점을 맞게되는데, 유학 지식과 유학자로서의 소양 여부가 관리 선발의 기준이 된 것이다. 송대에 이르면 과거 제도는 정착되게 되며, 유학 계층 확대되고, 유학 서적이 널리 보급되고 읽혀지게 된다.북경의 ‘국자감’은 국가가 인재 양성까지 맡게 된 것을 의미한다. ‘문치주의’가 강화되었으며, 송 이후 국가주도로 대규모 유교경전이 편찬되게 된다.활자본 등장하자, 서적출판 문화 발전 앞당겨졌으며, 송대 인쇄술 발달로 책이 보급화되었다. 이로써 서민도 유학 교육을 받게 되었고, 유학사상이 사회 모든 분야의 근간이 되었다. 유학은 주변 국가로도 전파되었으며, 유교 중국문명은 황금기를 맞이하게 된다.3. 서역으로 가는 길2세기에 중국에서 종이가 만들어졌다. 종이는 값이 싸고, 글쓰기에 좋았으며 휴대와 보관이 용이했다. 이동하고 기록문명의 황금시대를 열었던 종이는 그 후, 수 세기 동안 문명의 전파로를 따라 필연적인 여정을 시작한다. 지난 2500년 동안 동서 문명의 가교 역할을 했던 실크로드를 통해 종이도 서역으로 이동했을 것이다.서역으로 가는 관문도시 사마르칸드는 소그드인들이 세웠으며 위대한 왕 티무르가 제국을 일으켰고 대상들이 번성시켰던 도시이다. 좋은 종이는 사마르칸드에서 만들어진다. 종이를 만드는 곳이 모두 코니길에 위치해 있는데 그곳에 잊혀진 사마르칸드지 복원에 40년 가까운 인생을 바쳤다는 자리프 무은 해 사마르칸드에 종이공장이 들어서고 이어서 바그다드와 다마스쿠스, 그리고 900년경에는 카이로까지 제지술이 전파된다.압바스 왕조의 칼리프였던 알 마문이 830년에 세운 지혜의 집은 문화의 용광로였다. 로마시대를 거치며 유럽에서 잊혀졌던 소크라테스, 플라톤, 유클리드,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그리스 학자들이 이곳에서 아랍 번역가에 의해 되살아나 이슬람 학자들과 지적논쟁을 벌인다. 고대 이집트, 인도, 중국 등 세상의 모든 지식들이 이곳에 들어왔고 논쟁됐으며, 번역된 다음 축적됐다.바이툴 히끄마에서 200년 동안에 200만권의 서적을 번역하는 귀중한 학문적 업적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중국 종이의 발명과 보편화 때문이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구전 전승되어서 단 1퍼센트에 불과한 특정계층에 지식이 독점되던 시대여서 아주 값싸고 보존과 필기가 용이한 중국 종이가 8세기 이후 도입됨으로써 학문의 민주화와 대중화가 이뤄지고 또 그리스 로마가 가지고 있던 모든 학문적 업적이 경제적 부담 없이 번역될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이 마련됐던 것이다.종이 이전에는 가죽을 썼다. 그러나 가죽은 질겼으나 쓰기에 불편했고 책의 크기에 따라 많게는 수십 마리의 가축을 필요로 했다. 난제에 고민하고 있을 때, 그 경쟁자가 나타났다. 그것은 종이였다. 종이는 몇 배 싼 가격에 공급되었다. 10세기부터 종이는 전세계로 퍼지게 된다.쓰기에 좋고 값이 싼 종이가 등장하자 무엇보다 필경사들이 바빠졌다. 중국의 붓과 달리 대나무를 납작하게 깎아 만든 필기도구가 등장하였다. 필경사들은 어떤 부담도 없이 질 좋은 종이 위에 코란은 물론 수학, 물리학, 천문학, 역사 등의 각종 지식을 써내려갔다. 필경된 책들은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제본됐다. 그리고 중앙아시아 곳곳에 퍼져나갔음은 물론이다.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지 값싸게 책을 구할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다. 책을 통해 세상의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다. 그것이 지금으로부터 천 년 전, 중앙아시아였고 아라비아 반도였다.이 시대 이곳에는 예물로 바친다. 1500년전 일본에 제지술 전파되었다. 쓰루가만 해안의 ‘시라기 마을’은 신라인들 교류 거점이었다. 이들은 뱃길을 이용하여 일본열도 곳곳 진출하였는데, 신라에서 건너온 여인이 종이의 신이 되었다. 백제의 왕인 박사는 한자와 유교지식을 담은 천자문, 논어 등의 서적을 전파하였다. 일본은 문자와 동시에 종이가 들어왔으며, 문자시대로 진입하였다.옛 수도인 후지와라쿄에서 목간 유물 발굴되었는데, 당시 종이는 귀한 물품이었으며, 목간에 종이가 사용되었음이 기록되어 있다. 한중일 한자 문화권이 탄생한 것이다.고구려는 세계에서 최초로 종이가 전파되었다. 고분 벽화에 종이가 등장하는데, 장천 1호분에는 신선이 종이 위에 글을 쓰는 장면이 있으며, 안학 3호분 종이가 정착되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4세기 중반 전후에 삼국사기에 따르면 삼국은 이미 문헌 생산국이었다. 4세기의 종이 보급으로 인해 삼국은 유교사회로 재편되었다. 당시 목간에 논어 필사하며 공부한 흔적이 있다. 아마 종이 경전을 보고 목간으로 공부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원은 조선시대까지 제지술 중심이었으며, 종이를 생산하여 국가에 바쳤다.317년 전진의 스님이 고구려에 불경을 전파하였는데, 이때 종이도 전파되었다. 유교와 불교 수용은 지식 전파와 재생산 큰 기폭제가 되었으며, 종이는 이에 크게 기여하게 된다. 백제, 신라도 불교 전파와 함께 종이가 전파되었다. 신라 7세기에서 8세기 무렵 닥나무로 고유의 종이 만들어 중국과 차별되었다. 이 종이는 당나라에 수출되기도 하였다. 중국 명나라 시대에 이르면 고려지가 선호되었다.불국사 석가탑의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세계 最古의 인쇄본이다.고구려 담징이 일본에 제지술 전파하였으며, 가야는 제철기술과 종이 전파해주었다. 일본의 수도 교토는 신라의 문화로 기반 마련하였다.일본 고유의 문화가 발전하였고, ‘만엽집’이 등장하였다. 만엽가나 등장은 책의 대중화 문화발전의 기폭제가 되었다. 일본은 보관과 관리가 잘되었으며, 이에따라 고대 서적이 많아 동북아 서적의 저장고 였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문헌정보학과 4학년1. 도서관의 설립고유한 시민적 정치적 제도 및 백성들의 믿음과 종교를 존중했던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문화 발전에 적합한 관용과 보호의 풍토를 이집트에 조성했다. 그로 말미암아 프톨레마이오스 1세와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그리스 학자를 비롯한 당대의 훌륭한 학자들을 초청하였으며 알렉산드리아는 마침내 헬레니즘 학문의 중심지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풍토와 사상으로 인해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그의 재위기간 중에 오늘날 잘 알려진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설립하였던 것이다.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창립 연대에 대해서는 불확실한 점이 많다. 그것은 창립이라는 말의 의미에도 근거하지만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창립 연대는 몇 가지 萌芽로부터 즉, 건물, 장서 등의 물질적인 기초 확립까지를 포함한 넓은 의미에서 해석하지 않을 수 없다. 기존 연구자들은 대개 창립 연도에 대해서 명확한 기술은 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광의의 의미에서 본다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창립연대는 대략 BC.290년경부터 BC.240년경까지의 근 50년간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대략적인 범위를 나타낸 것이고, 엄밀히 말하자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데메트리우스가 도서관에 관계한 BC.290년경에 설립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처음부터 도서관이라는 명확한 형태로서 독립적으로 건설된 것이 아니다. 즉 복합적 문화기간으로 설립된 것이다.아리스토텔레스 학파의 한 사람인 데메트리우스는 아테네 출신의 학자로서 알렉산드리아가 세계 학예의 중심지가 되기를 꿈꾸고, 많은 서적을 갖춘 학예 센터의 창립을 프톨레마이오스 1세에게 진언하였다. 프톨레마이오스는 그 의견을 수용하여 장엄한 건물의 'Museion'을 설립하였던 것이다. 'Museion'은 'Muse'를 위한 곳으로 'Mouseia'라 불리는 특별한 축제에서 문학적 열정을 해소하고, 호머 시대의 서사시를 찬양했다. 이것은 새로운 'Museion'설립을 위한 명칭을 설명하는 것뿐만 아니라 알렉산 'Museion'은 연구와 교수를 겸하도록 Lyceum을 본 따 건축되었으나 규모는 훨씬 장대했다. 'Museion'에는 약 50만 권의 장서가 있는 도서관과 100명의 교수가 배치되어 국가의 봉급을 받았다. 이 'Museion'은 600년가량 지속되었지만, 과학의 측면에서 볼 때 처음 200년 동안이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따라서 'Museion'은 학문 연구기관의 성격이 강한 시설로서 건립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Museion'은 성역과 같은 의미로서 그리스어 'Mousa'의 영어형 'Muse'이며 “Muse신들의 館인 것이다. 여기서 'Muse'는 인간의 모든 지적활동인 학술과 예술을 담당하는 그리스 여신의 총칭이다. 이것이 오늘날 Museum의 어원이 되었다. 현대의 Museum은 박물관, 미술관을 의미하지만 앞서 언급한대로 학문 연구소라는 의미가 포함된 것이다. 이러한 근거로 근대까지만 해도 도서관 명칭에 박물관이라는 명칭이 함께 사용되어 왔다. 예컨대, 대영 박물도서관이나 Smithsonian 박물관도서관 등이 그 좋은 예들이다. 그러므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처음부터 독립적인 기관으로 설립된 것이 아닌 박물관 즉, Museion의 부설기관 성격을 띠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최초는 'Museion'의 자료실과 같은 형태로 시작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렇게 자료실의 형태에서 시작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궁전, Museion과 廟 등을 총합하여 왕궁을 의미하는 Brucheium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이것은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도서관에 대한 많은 기대와 노력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왕가의 도서관에 대한 애착이 나중에 또 하나의 도서관 Serapeum을 설립하게 된다. 따라서 알렉산드리아 대 도서관은 사실상 Brucheium과 Serapeum의 총칭인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분관시스템'의 효시라는 아이디어를 제공받게 된다.이러한 시설에 대하여 알렉산드리아 사람들은 인간의 지적 활동센터로서의 상념을이 신분 높은 경력을 영위하는 안식처가 되었다.프톨레마이오스의 통치기간 동안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대해서 언급할 때, 도서관이 정확히 책을 축적하는 곳이라고 지칭되었지만, 도서관을 서지 및 문헌 활동들을 뒷받침했던 박물관과 다른 시설들로부터 분리시켜 생각하면 안 된다. 우리는 또 하나의 중요한 도서관에 대해서 기억해야 한다. 그 도서관은 Serapis 사원에 부속되어 있었던 것으로, 처음에는 대 도서관에 전적으로 의존했었다. 대 도서관의 역사에 대해 언급할 때, 우리는 먼저 Aristeas의 서한과 Tzetzes의 'Prolegomena'에서 자료를 얻을 수밖에 없는 한계성에 부딪친다.2. 도서관의 구조와 기능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보다 큰 복합단지, 곧 예술과 과학방면에 문호를 개방한 일종의 연구소로서 천문 관측소, 동물원, 식물원 그리고 회의실, 식당을 갖추고 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도서관 조직을 구성하는 멤버는 학자, 문학자, 과학자, 지리학자, 의사, 역사가, 시인, 편집가 등 다양한 주제 전문가 및 학자를 포함하였으며 이 중 한사람이 관장이 되어 경영을 맡은 것으로 보인다. 도서관은 각각의 부서장 책임 하에 여러 부서로 나누어졌다. 또한 10개의 대규모 연구실이 있었으며, 이 연구실은 식물원, 동물원, 해부실, 천문대 등 여러 주제 연구소로 나누어졌다. 이러한 면에서 오늘날의 도서관을 센터로 한 종합대학교나 또는 거대한 종합연구소를 연상케 한다.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수행하는 주요 기능을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그리스 문학의 전반적인 서지류의 편찬으로서 국가 서지의 편찬은 Callimachus에게 맡겨졌다. 둘째, 당시의 정리되지 않은 문헌들을 넓은 장소에 저장하고, 참고하기 쉽도록 두루마리를 적당한 표준적인 형태로 편집하는 업무이다. 이러한 편집업무는 다양한 주제 전문가들에게 맡겨졌다. 그것은 문헌의 개정이 아니라 두루마리의 표준 형태를 저장에 편리하도록 적당한 길이의 도서를 배열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Zenodotus는 Homer의 과학이외에도 도서관이 수행했던 업무는 도서수집, 분류, 목록작성 외에 원전교정, 주해작성, 사본복제, 출판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였다. 또한 대규모적인 번역사업도 주요한 도서관 사업이기도 하였다. 이를테면 72명의 유대인 학자들에게 구약성서를 그리스어로 옮기는 업무가 주어지기도 했고, 바빌로니아 필사본과 불교경전의 번역 사업이 위촉되기도 했다. 즉 도서관은 필사실, 번역센터, 출판국의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면서 도서관의 기본적 기능인 소장기능과 학문연구의 기능까지 수행하였다.고대사회 도서관들은 도서관의 성격상 이용자가 지배계층, 지식인 등 극히 일부 특권자에 한정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본다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문화사적 의의로서 특징적인 것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단순히 자료를 수집하고 이용에 공헌한 것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도서관 자체가 새로운 학문의 성과를 산출한 장소로서 즉, 지적 생산의 장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내용은 다양한 문헌을 통해 나타난다.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단순한 연구활동의 장소가 아닌 새로운 학문활동 그 자체였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오늘날 도서관의 기능과 다름없는 역할을 수행 하였다. 이러한 체계적인 도서관 조직이 알렉산드리아의 문화발전에 필수적인 존재로서 기여했음은 당연한 일이다. 또한 도서관 기능뿐만이 아닌 종합적인 연구소로서, 대학 기관으로서의 성격을 볼 수 있다.3. 장서구축의 과정 및 정책장서수집은 도서관 설립과 더불어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예술 및 과학을 총망라한 수집을 목적으로 장서구축에 노력하였지만, 자금 문제나 지리적인 문제보다는 그리스시대의 원고를 수집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리스에서 기원전 5세기 이전에는 그 어떤 규모의 독서 대중도 존재하지는 않았지만, 세계 최초의 주요 도서관들은 최초의 주요 필사본 저작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인들의 천재성의 산물이었다. 그 시기 이전과 수년 이후에도 대다수 백성들은 그 지적인 유산을 유랑 부족이나 이야기꾼들의 입을 통해 전달받았 그러나 그리스가 비록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구전의 시대에서 독서의 시대로 이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원전 5세기 즈음의 그리스에는 책이 넘쳐났다.기원전 5세기인 '페리클레스의 황금기' 동안에는 다수의 개인 장서가 존재했으며, 그 중 일부가 당시의 학자들에게 개방되었다. 아테네의 최초의 공공도서관은 기원전 330년에 아테네의 시민들이 위대한 그리스 극자가 Aeschylus, Sophocles와 Euripides의 진본을 읽을 수 있는 장소를 갖게 하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왜냐하면, 그 극작가들의 비극은 매우 인기가 있었으나, 대중들은 매우 부실한 사본들만 이용이 가능하였기 때문이었다. 역사가인 폴리비우스에 따르면, 기원전 3세기까지는 아테네에 매우 많은 공공 및 사립 도서관이 존재했는데, 시칠리아섬 출신의 역사가 Timaeus는 그 도서관에서 50년간이나 연구에 몰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알렉산드리아 대 도서관이 그 위대성을 성취한 시기는 Ptolemy Philadelphus 시대에 이르러서이다. 책을 수집하려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열정은 엄청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상선이 항구에 정박하면 화물 중에 필사본이 있는지 검색하고 선적되어 있으면 원본은 도서관에 소장시키고 정서된 복사본은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을 관행으로 삼을 정도로 책수집에 열광적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아테네로부터 그리스 극작가의 희곡들의 공식 극사본들을 빌리면서 그 회수를 보증하는 보증금까지도 지불하였다. 그러나 그 보증금을 단념하고 원본은 알렉산드리아에 소장하고 복사본을 돌려주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소장품은 그리스의 필사본뿐만 아니라 에티오피아, 페르시아, 히브리, 북부 인도의 원본들에게까지 이르렀다. 왕실의 연금 지원을 받은 학자들은 필사 작업, 필사의 정확도 확인 및 도서관을 '고대 세계의 영광'으로 만드는데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소장품이 넘쳐나게 되어 아주 중요한 제1도서관 이외에 제2의 도서관이 Jupiter Serapis 사원에 확장 건립되었다. 불행하게도 제1도서
‘위대한’ 기계, 인간(이기적 유전자를 읽고)저자 리처드 도킨스는 이 책에서 주장한다. 유전자는 영원히 존속하고자 하는 본능이 있다. 유전자 존속은 복제 혹은 분열을 통해서 이어지며, 이는 종 전체의 존속으로 귀결된다. 즉 미시적 차원의 유전자라는 존재는 종(種)이라는 거시적 차원의 존재와 ‘존속’이라는 대전제 아래에서 의의를 합치시킨다.깔끔한 도킨스의 논리는, 오금을 저릿하게 만드는 무엇인가가 있다. 게다가 게임이론으로도 설명이 가능하니 이 얼마나 논리정연하고 수학적인가? 논리적인 것을 좋아하는 필자로서는 그의 이론에 흠뻑 빠질 수밖에 없다.하지만 그의 이론 속에는 인간의 숭고함을 오로지 DNA를 전달하는 매개체로 전환하면서 짐승의 차원으로 끌어내리는, 섬뜩함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이 글도, 논리도, 이성과의 사랑도 모두, ‘유전자 존속’에 불과하단 말인가? 이는 경제학의 기본 테제가 ‘인간은 이기적 동물이다.’라는 것과 동급의, 아니 그 이상의 충격이다. 여러모로 ‘이기적(Selfish)’이라는 단어를 활용함으로써 인간의 숭고함을 끌어내린 경제학의 대부 아담 스미스가 생각나게 한다.여하튼 스미스가 인간이 이기적 동기만으로 시장을 형성했더라도, 그 이상의 ‘공감’을 통해 복지가 단계적으로 개선되길 바랐던 것처럼, 도킨스도 인간이 유전자만으로 형성되었을지라도, 그 이상의 ‘무언가’를 통해 더 나은 무엇을 만든다고 여겼다.유전자의 총합인 인간은, 유전자 그 이상의 존재가 되기 위해, 밈이란 요소를 통해 자기 복제를 특별하게 만든다. 밈은 무엇일까? 그것은 고결함이란 말로 포장된, 유전자 이상의 무엇 - 이를테면, 시, 미술, 공감력, 사랑 등의 문화적 총체로, 우리 삶을 가득 채우는 것들을 일컫는다. 인간은 밈을 통해 유전자의 전달에 스토리를 더했고, 그 스토리의 총체를 통하여 유전자 전달체 이상의 존재로 우뚝 섰다. 이렇게, 우리는 단순한 짐승을 벗어나 숭고함을 지닌 존재로 자리 잡을 수 있다. 우리는 성교를 하지만, 이것을 자신의 ‘자유의지’로 거부할 수도 있고 애정이란 요소를 넣음으로써 다양한 감성을 통해 삶을 풍부하게 만들었다.여기서 카를 융의 ‘리비도’라는 개념을 문뜩 떠오르게 만든다. 그것은 밈이 도킨스의 독창적인 요소만은 아니었다는 소리가 된다. 즉, 인간은 성교를 자유 의지로 거부하고, 연마시킴으로써 문화를 낳는다. 리비도를 통하여 인간의 문화는 이다지도 찬란하게 발달해왔다. 이성을 통한 성욕의 억제와 그를 통한 새로운 창의성의 폭발. 융의 ‘리비도’와 도킨스의 ‘밈’은 그렇게 상통한다.예술은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만든다. 필자 역시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이 테제를 당연하게 생각해왔다. 하지만 조금 더 깊게 따져보자. 예술가들은 과연 예술을 리비도를 통하여 시행하였나?물론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유전자 복제를 위한 하나의 전술이라는 차원에서도 해석될 수 있다. 많은 예술가들이 자신의 유전자를 존속시키기 위해 예술을 했고, 돈을 벌었고, 더 많은 상대와 만나지 않았는가. 성공한 예술가들의 작품이 후세에 전해지고, 예술가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후원받아야 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은 이를 반증한다. 피카소와 다빈치가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이쯤에서 문뜩 질문이 떠오른다. 예술적 감성 혹은 리비도는 인간이 유전자 존속을 좀 더 현실적인 시장에서 교류하기 위한 ‘도구’가 아닌가? 리비도는 유전자 존속을 돕는 것으로, 그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는 보조적 혹은 지원적 도구가 아닌가?이러한 질문은 간단하게 반박된다.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는 격언은 괜히 있는게 아니다. 백이와 숙제가 산속에 틀어박혀 은거하며 유전자를 남기지 않은 것처럼, 칸트가 한 여인과의 사랑을 아련하게 가슴에 품고 평생 논리를 사랑하면 살았던 것처럼, 비트겐슈타인이 완전한 논리를 생각하며 수음(愁吟)하였던 것처럼, 그리고 고흐가 예술로 배부른 삶을 향유할 수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인간은 융의 리비도로 성욕을 강조한 프로이트의 리비도를 무시하며, 그 이상의 존재임을 드러냈다.이러한 반박은 우리로 하여금 다시 ‘밈’을 요청할 수 있게 만든다. 인간의 가능성이 무엇이었는지 다시 말할 수 있게 만든다. 그렇기에, 우리의 삶은, 유전자 존속 이상의 총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술을, 문화를 통해서 삶은 풍요로워질 수 있다. 예술과 문화는, 우리가 유전자 전달 그 이상이라는 답변으로 이러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우리는 우리 존재를 증명한다. 즉 이유를 찾는 존재다.이유를 찾는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의 삶은 풍부할 수 있다. 따라서 필자는 도킨스가 문화적 전달요소라 칭하는 밈의 정체를 ‘철학’이라는 단어로 좀 더 구체화 시키고 싶다.우리는 무엇인가. 어디에서 왔는가. 어떻게 살 것인가. 이러한 물음은 모든 학문의 원류이며 동시에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이다. 이 물음은 수학, 신학, 과학으로 발전해 나가며, 크게는 경제학, 경영학을 태동시킨 끝에 현대 문화를 이룩해냈다. 우리의 삶은 유전자로 전달될 수 없는 효용을 내포한다.그 효용은 간단하게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강아지와 내가 느끼는 고통은 비슷할 수 있겠으나, 우리는 이를 화려하게 포장시키고, 마침내 치료시키는 법을 연구해왔다. 이것은 유전자 존속을 좀 더 효과적으로 이끌어냈을 뿐만 아니라, 유전자 존속을 통한 ‘효용’적 측면 혹은 질적 측면을 도야(陶冶)시켰다. 바로 이 점을 빌어서, 필자는 도킨스의 이론에서 철학을 보았고, 밈 속에 녹아들어간 철학이 어떻게 인간을 위대하게 만들었는지 역설해 보았다.도킨스의 이론은 확실히 현실을 깔끔하게 설명한다. 그 이론의 원류, 즉 ‘다윈의 진화론’을 빌어서 이 글을 마무리하고 싶다. 다음은 그 진화 과정을 철학적 사유와 함께 스토리텔링한 것이다.
논어 발제문1. 논어 개관논어란 어떤 책인가? 사실 이 책은 모두 익히 들어본 우리에게 대단히 익숙한 책이다. 그러나 정작 읽어본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은 책이기도 하다. 어찌보면 (현대식, 혹은 서양식으로 말하자면) 논리가 떨어지고 편집도 허술하기 짝이 없는 책이나 오히려 그런 부분이 우리로 하여금 더 생각을 하게 해주는 책이다.논어는 이후 이천년 남짓 동양의 정치, 사회, 문화, 사상 등 사회 전반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게 된 공자와 그의 제자들의 어록을 공자 사후 제자들이 편집한 것이다. 춘추 말기, 최소한의 도덕마저도 무너져가는, 속되게 말해서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는 시대’, 약육강식과 실용주의가 판을 치던 시대, 역설적으로 중국 역사상 가장 사상, 기술이 발달하고, 진보했던 시대에, 그 혼란기 속에서 살아왔던 공자와 그 제자들의 대화를 통해 우리는 그 시대와 그들이 바람직하게 여기던 이상향과 이상적 인간상을 엿볼 수 있다.사실 우리 사회에서는 성리학 이후의 영향인지 ‘유교’라는 이미지는 상당히 부정적인 측면이 강하며, 고리타분한 것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나는 적어도 논어에서만큼은 공구라는 그저 배우기를 한없이 좋아하고, 아들이나 손자뻘의 어린 제자들과도 토론을 주거니 받거니 한 ‘인간’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배우기를 한없이 좋아하는 사람이 고리타분할 것이라고는 생각 할 수도 없었다. (기본적으로 고리타분이라는 것은 기존의 것을 고수하고, 새로운 것을 배척한다는 뉘앙스가 강하기 때문이다.)논어에서는 모든 주제가 결국 인간과 인간의 삶과 연관되어 있다. 어떤 인간이 되어야 하는가?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그 외 인물의 평이나, 정치 행보에 대한 평가가 쓰여 있지만, 논어에서 정치라는 것은 자신이 어떠한 인간상이 되어서 백성들에게 어떻게 인간다운 삶을 제공할 것인가이다.여기서는 논어의 수 많은 소주제들 중 하나인 배움(혹은 학문, 공부? 다 좋다)에 초점을 맞춰보기로 한다. 배움이란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자체로 삶의 즐거움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발제를 함에 있어서 원문을 보되, 나의 한문 실력이 심히 미천한 관계로 해석이 애매한 부분은 백화문을 참조하였다. 원래 고대한어는 그 특성상 최대한 말을 간단하게 쓰는 것이 관형화 되어있는데, 논어의 경우는 다른 일반적 한문 문장에 비해서도 그 정도가 심해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해석이 불분명하거나 의견이 분분한 부분이 꽤 된다. 따라서 애매한 경우는 아래의 백화문 해석을 따랐다.http://www.wisefy.com/forumdisplay.php?fid=20&page=32. 인상깊은 구절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 不亦君子乎?논어 맨 첫 구절로 논어를 읽지 않는 사람도 누구나 들어봤음직한 명구이다. 가장 공자의 인간됨을 엿볼수 있는 논어스러운(?) 구절이 아닌가 싶다.子曰:“學而不思則罔,思而不學則殆."배운다는 것은 타인으로부터 무언가를 전수 받는 것이고, 생각한다는 것은 스스로 하는 주체적인 활동이다. 따라서 배우기만 하고 생각을 안하는 것은 쉽게 말해서 주입식 교육이나 다름없고(스스로 얻는게 없고, 수동적인 인간이 되기 쉬우며), 생각만하고 배우지 않는 것은 남의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고, 독단에 빠지기 쉬운 것이니 위태로운 것이 아닐까?子曰:“由,誨女,知之乎?知之?知之,不知?不知,是知也.”역시 너무나도 유명한 구절이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른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아는 것이다. 자신이 무엇을 알고 모르는 지를 정확히 아는 것이 아는 것의 첫걸음이라는 뜻일까?子曰:“溫故而知新, 可以?師矣.”온고지신이라는 말은 귀에 딱지가 생기도록 들어본 말일 것이다.(특히 나이 지긋하신 분들께서 자주 하신다) 근데, 개인적으로 뒷부분까지 다 읽어야 이 문구의 참 뜻이 전해지지 않나 싶다. 옛것을 익히고, 새로운 것을 알아야 ‘스승이 될 만하다’라는 것이다. 남의 스승이 된다는 것,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것인지 생각해보게 한다.子曰:“知之者不如好之者,好之者不如樂之者.”이 말의 이치는 누구나 살면서 몸으로써 체득하게 될 것이다. 혹자는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는 말을 하고는 하지만, 나는 ‘즐길 수 없으면 피하라!’라고 해주고 싶다.葉公 問孔子於子路, 子路不對. 子曰: “女奚不曰, 其爲人也, 發憤忘食, 樂以忘憂, 不知老之將至云爾.”늙는 것조차 모를 지경이라니!! 공자가 얼마나 배움을 사랑하는지를 가장 절실하게 보여주는 문구가 아닌가 한다.子曰:“默而識之,學而不厭,誨人不倦,何有於我哉?”논어 전체를 보면 공자는 상당히 겸손하게 말하는데, 이 부분에 있어서 만큼은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이다. ‘나보다 배우기 좋아하고, 꾸준히 가르칠 수 있는 사람 있어?’子曰:“我非生而知之者,好古,敏以求之者也.”나라고 처음부터 알았겠니? 그저 열심히 배운 것이지.子曰: “學如不及, 猶恐失之.”배울 때는 못 미칠까, 잊어버릴까 두려워하듯이 해야한다. 특히 각종 시험공부를 해본 사람은 뼈저리게 공감하는 말 일 것이다. 시험의 당락은 외우는 속도와 까먹는 속도의 싸움(?!)司馬牛憂曰:“人皆有兄弟,吾獨亡.”子夏曰:“商聞之矣,死生有命,富貴在天. 君子敬而無失,與人恭而有禮,四海之內,皆兄弟也. 君子何患乎無兄弟也.”비록 공자의 말은 아니지만, 속된 말로 쿨해서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구절이다. ‘남들은 다 형제가 있는데, 나만 혼자네’라는 사마우우의 푸념에, 자하가 ‘군자는 사해가 전부다 형제인데, 무슨 형제 없는 걸 걱정하니?’子曰:“古之學者?己,今之學者?人.”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과거에는 이러이러했는데(좋았는데), 현재는 왜이래?’라고 말하는 것은 똑같나 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흥미로운 것은 저 말대로 하면, 세상은 가면 갈수록 지옥같이 변해야 할텐데, 어째서 장기적으로는 점점 살기 좋아지는 것일까?子貢問曰:“有一言而可以終身行之者乎?”子曰:“其恕乎!己所不欲,勿施於人.”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논어의 구절이다! 자공의 대사마냥 한마디 말로써 평생을 행할만한 구절이 아닌가 싶다. ‘내가 하기 싫은 것을 남에게 시키지 마라.’ 얼마나 좋은 말인가?子曰:“吾嘗終日不食,終夜不寢,以思,無益,不如學也.”하루 종일 먹지 않고, 자지 않고, 생각만 해봤자, 득 되는 것도 없으니, 배우는 것만 못하다는 뜻이다. 아마 공자도 배우는 것에 실증이 나거나 회의를 가져본 적이 있나보다. (그렇지 않고서 왜 하루종일 먹지도 않고, 잠도 자지 않고 생각만 해봤을까?)3. 생각해보기(1) 어떤 특정한 목적 없이 단순히 즐거움을 위한 취미의 목적의 공부, 혹은 학문, 배움이란 가능한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면 그러한 경험 혹은 비슷한 사례가 있는가?공부란 무미건조하고 따분한 것인가? 새로운 것을 안다는 것은 상당히 재미있는 일이 아닐까? 세상에서 가장 질리지 않고, 재미있는 것은 (새로운 것을 알아가는) 공부가 아닐까 싶다. 물론 세상에서 제일 재미없는 시험공부라는 것은 제외하고 말이다.
중국 광동요리는 종류가 많고, 재료가 아주 다양하다. 북경의 순펑이라는 이름의 식당은 손님들이 보는 자리에서 요리한다. 이 식당의 식사비는 한국돈으로 수백만원에 이른다.이는 중국 특유의 ‘체면문화’와 허영이 반영된 것이다. 중국은 개혁개방 이후 대규모 사영기업가 등장하여 현재 약 4000만명에 이르고 있다. 이들은 중국의 주요도시에 주거하고 있으며 이들로 인해서 그들이 주거하는 곳 근방에는 고급식당이 생겨났다.중국에서 부자란 언제든지 고급식당에서 식사가 가능한 사람을 말한다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중국인에게 ‘食’ 즉, 먹는 것은 그 어떠한 것보다도 중요하기 때문이다.과거 중국 대륙은 대약진 운동이 참담한 실패로 끝나면서 많이 사람들이 기아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개혁개방 이후 각지에 음식점이 생겨나기 시작했으며, 시장에는 노점이 탄생하였다.80년대 후반에 이르자, 딤섬을 판매하는 노점들이 점점 생겨났으며, 이러한 노점들은 각 도시 전역으로 번져 나갔다.중국에서는 대부분의 부부가 맞벌이를 하는 관계로 많은 사람들이 아침 식사를 밖에서 하는 문화가 생겨났는데, 이로 인해서 외식시장이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였다.북경의 왕후징이라는 곳은 중국 정부 주도로 중국 전역의 음식을 맛 볼 수 있게 조성된 노점거리이다.귀신가는 그 이름처럼 새벽에도 음식을 한다.중산층이 급속도로 늘어난 것은 경제발전 때문에 가능하게 된 일이었다.1990년대 이르자 북경에서 외지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베이징 올림픽과 사스의 영향으로 중국 정부의 주도아래 많이 노점이 식당으로 대체되었다.딤섬하나에 한국돈 몇 만원인 고급식당이 있는가 하면, 그와는 완전히 상반되게 간단한 흰죽에 밥과 야채볶음이 전부인 자전거 수리 노동자의 식사도 있다. 중국에서는 사실상 소득에 의해서 계급이 갈리며, 다른 계급은 다른 향유를 낳는다. 영상에 나오는 자전거 수리 노동자와 그의 가족들은 일년에 가끔 먹는 슈퍼마켓에서 파는 싸구려 ??만으로 행복을 느낀다.전취덕은 고급 ?? 식당이며 그곳에서 ??는 1마리에 한국돈 2만 5천원정도한다. ??는 고급과 저급의 가격 차이가 가장 확연한 요리 중 하나이다.사람마다 등급이 다르다. 이 등급은 돈을 기준으로 삼는다.民工이란 시골에서 상경한 건축 노동자를 일컫는 말인데, 중국경제가 성장하고 도시의 건설경기가 활황을 이루면서 이들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였다. 이들은 일하는 기간 동안 식사 배급을 받는데, 흰쌀죽과 밀가루빵 4개 그리고 무짠지, 배추국이 전부이며, 이것을 동료들과 같이 먹는다. 이러한 저급한 식단은 일년내내 하루 세끼 모두 똑같다. 이들은 하루에 10시간 이상 노동을 하며, 노동 계약은 보통 6개월에서 1년인데, 일하는 내내 위와 같은 식사를 한다. 이들에게는 도시락과 이불, 연장이 전부이다. 이들은 매일 먹는 싸구려 밀가루빵을 상상도 하기 싫을 만큼 먹기 싫어하며, 식당에서 제대로된 식사를 해보는 것이 소원일 정도였다.공사현장 감독관들 정도의 위치가 되면 식당에 가서 한국돈 1200원 정도하는 ?保?丁이나 ?香肉?같은 요리를 시켜 먹을 수 있다. 그러나 그들도 고급식당을 갈 엄두는 내지 못한다. 시내에 들어가면 좀 더 좋은 고급 식당이 있는데 이 식당은 주변의 소득이 비교적 높은 사무직 노동자들이 주로 이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