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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고학]주먹도끼의 중요성 평가B괜찮아요
    한국 고고학에의 초대주먹도끼의 중요성전곡리 주먹도끼경기도 연천군 전곡면 전곡리에 있는 전기구석기시대 유적으로, 1978년에 당시 동두천주둔 미군인 보웬(Bowen G.)에 의하여 처음으로 발견되었고 1979년 이후 1993년 사이에 모두 9차례의 조사가 있었으며, 1980년에 사적 제256호로 지정되었다. 유적은 현재 전곡읍 남쪽 한탄강이 감싸고 도는 현무암대지 위에 분포하고 있다. 전곡읍에서 한탄강유원지를 연결하는 도로의 양편으로 북서쪽에 제1지구, 남쪽으로 서편이 제2지구, 그리고 동편이 제3지구이다. 제4지구는 제1지구의 강 건너편 대지 위에 분포하고 있다. 지도상의 위치는 동경 127° 03′, 그리고 북위 38° 01′에 해당된다.전곡리 유적은 추가령지구대의 서남부에 위치하고 있다. 이 지역은 경기변성암류인 편마암과 화강암이 선캠브리아기에 형성되어 지질기저를 이루고 있다. 전곡리의 동북편으로 연천과 철원사이의 지역에는 중생대 동안 형성된 것으로 보이는 응회암·현무암 그리고 역암 등이 형성되어 있다. 동남편에는 중생대의 쥬라기에 분출된 대보거정화강암류가 분포하고 있다. 전곡리 일원을 포함한 한탄강과 임진강 연안지역에는 강을 따라 신생대 제4기에 분출된 현무암이 분포하고 있다. 이 현무암은 철원·평강지역에 산재하는 소분화구(오리산)로부터 급격하지 않은 분류(噴流)의 양상으로 흘러 고기(古期)한탄강·임진강을 따라 분포하는 저지를 메우며 하류인 문산까지 진출하여 있다. 이 현무암분출은 중부홍적세동안 여러차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상류에서는 6매, 하류인 문산에서는 1매의 용암류층이 보이며 유적이 있는 전곡리에서는 2매가 관찰되고 있는데 이 2번의 분류가 가장 많은 양의 용암을 분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포타슘-아르곤 연대측정결과, 전곡리의 2매 중 하부의 것은 대략 60만년 전후, 그리고 상부의 현무암은 30만년 전후에 분류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현무암층들을 흔히 전곡현무암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브루네스(Bruhnes) 정지자기기(正地磁氣期)로 나타나고 있발견되고 있어서 초기 퇴적에 있어서 소규모의 호수환경이 다수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모래퇴적은 당시 이 지역의 유로가 활동적이었음을 반영하고 있는데 일부 사질층에서는 유물집중층이 드러나고 있으며 이는 유수에 의하여 재퇴적된 것으로 판단된다. 점토퇴적물은 유수에 의해서라기보다는 범람원퇴적으로 보여지는데 유물의 집중이 산발적으로 관찰되고 있다. 그래서 한탄강이 현무암대지 위에서 퇴적층을 형성하고 있는 동안 단속적으로 고인류가 출현하여 사냥과 채집을 하는 동안 유적이 형성되었을 것이다. 퇴적층 속의 유물은 일부 지질학적인 변동으로 재퇴적되었거나 퇴적시에 지표수 그리고 지중에서 벌레와 식물뿌리 등 생물학적인 요인에 의해서 변형되어 현재 고인류의 직접적인 행위파악이 가능한 생활면이 보이지 않고 있다.10 차 걸친 발굴에서 4,000점 이상의 석기가 출토되었고 이보다 많은 수가 지표에서 채집되었다. 석기는 주로 석영맥암과 규암을 이용한 것이 거의 대부분이며 이외에도 현무암, 편마암 그리고 운모편암도 소량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재료들은 거의 모두 당시의 하상에 존재하던 강자갈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1m 정도 크기의 냇돌(川石)도 있다. 가장 특징적인 석기는 아슐리안형의 주먹도끼(hand-axe)들인데 양면가공된 것과 단면가공된 것이 있다. 평면이 타원형인 것인 것과 첨두형인 것이 모두 있으며, 이들 일부는 몸통이 두텁고 큼직한 박편흔으로 덮여 있어서 아프리카의 상고안(Sangoan) 석기공작과 형태적인 유사성이 있음이 지적되고 있다. 주먹도끼 외에도 가로날도끼와 뾰족끝찍개(pick) 등의 대형석기가 존재하고 있다.찍개(chopper)는 양면가공과 단면가공의 것들이 있는데 대부분 냇돌 또는 냇돌조각으로 만들었다. 여러면석기(多角面圓球)는 상당히 구형에 가까운 것에서부터 불규칙다면체까지 여러 모양의 것이 있는데 대부분 한쪽 면에서 삼면까지 자연면이 남아 있는 것이 특징이다. 소형석기로는 긁개가 주류를 이루고 소량의 첨두기와 홈날석기 등의 채집되었다. 긁개는 직선날·볼강·임진강 유역에 대한 4기 지질학적인 연구가 이루어진 바 있으며, 이를 토대로 유적의 형성과정에 대한 고찰이 재고됨으로써 구석기연구의 방법론 발달에도 큰 기여를 하고 있다.참고문헌 전곡리 구석기 유적 1994-95년도 발굴조사보고서-(한양대학교 문화인류학과·경기도 연천군, 1996), 보성강·한탄강 유역 구석기 유적 발굴조사보고서-전곡리 5지구 구석기 유적 발굴조사보고-(문화재관리국문화재연구소, 1994), 전곡리 구석기 유적 발굴조사보고서-1992년도-(한양대학교 문화인류학과·경기도 연천군, 1993), 전곡리-1986년도 발굴조사보고-(서울대학교박물관, 1989), 전곡리(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 1984)주먹도끼(握斧, Hand-axe)프랑스의 성. 아슐(st. Acheul)에서 다량 발견되면서 알려진 아슐리안기의 전형적인 석기로, 아슐리안기에서 무스테리안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와 무스테리안기에서도 발견되고 있다.주먹도끼의 기술형태학적 특성은 석기의 양면 모두 박리된 것을 원칙으로 한다. 모양은 매우 다양한데 일반적으로 끝이 뾰족하고 하단으로 갈수록 넓어지는 형태 혹은 타원형이다. 가로날 도끼 중에 양면박리로 된 것을 포함시키기도 하며, 큰 자갈돌이나 격지, 암괴 등을 활용하여 만든다.서구학계에서 보편적인 주먹도끼의 개념은 다음과 같다. 다양한 변이를 보여주는 행인상(杏仁狀, Almond-shaped), 또는 타원형의 형태를 가지며 전반적으로 첨두부를 뚜렷이 가진다. 단면은 대체로 렌즈(lenticular)형태를 보여주며, 잔손질(trimming)한 흔적이 석기의 양측면을 가로지른다. 날카로운 측면날이 석기의 둘레를 거의 대부분 감싸고 있다. 자연면(cortex)이 남아 있는 경우도 있지만 제작기술의 발달이 이루어지면서 전반적으로 완전한 박편흔이 동체에 빠짐없이 채워져 있다.반면에 동아시아 주먹도끼의 전반적인 특성은 다음과 같다. 양면가공한 것도 눈에 띄지만 그 정도는 서구의 주먹도끼에 비해 양적·질적으로 미약한 수준에 그친다. 단면 가공을 위주로 하였으 해석이 더 강화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학자에 따라 문화적 측면에서 각 시대별 문화적 유사성을 보이는 석기군의 발견에 대해 위도상 문화 전파적 관점에서 석기문화가 이동한 것으로 보는 개념도 유지하고 있다.중국의 구석기시대는 학자에 따라 전기와 후기로 나누는 예가 최근까지 있지만 일반적으로 유적 발견수가 늘어나면서 전기, 중기, 후기로 구분하고 있다. 중국의 전기구석기시대 유적에 대하여 언급하기 전에 중국 최초의 인류가 단일지역기원론에 입각하여 아프리카로부터 이주한 호모 에렉투스라는 문제에 관한 중국학자들의 견해를 검토해야 할 것이다. 중국 학자들은 상당수 다지역기원론적 관점을 지지하고 있으며 그 기원은 중국에 살던 고원(古猿)으로부터 진화한 것으로 보고 있다.신중국 건립 이후 1958년 운남성(雲南省)의 小龍潭에서 발견된 800만년 전의 '森林古猿'이 발견되었다. 1975년 이래 雲南省 祿豊縣에서는 800만년 전의 녹풍고원화석(祿豊古猿化石)이 발견되었다. 1987년 이래 운남성의 원모(元謀)에서도 480만년 전의 일련의 고원화석이 출현하였고 기간토피테쿠스 화석도 다수 발견되었다. 원모인에서 170만년 전의 인류화석이 확인되었으며 그밖에 이 시기의 대표적인 인류화석은 藍田, 周口店, 金牛山, 元謀, 和縣, 梁山 등의 유적에서 확인된 바 있는데 호모 에렉투스로 판단되고 있다. 이러한 양상은 중국 자체 내에서 인류가 연속적인 변화과정을 겪으며 진화해 갔으며 중국은 인류기원의 중요지구의 하나일 가능성이 높다는 판단을 하게 한다.또 하나는 중국 구석기시대의 석기전통에 대한 문제이다. 그 중 한동안 주목받았던 관점이 중국 구석기문화를 크게 대형석기전통과 소형석기전통으로 나누고 전기, 중기, 후기로 구분하는 것이다. 최근에도 이러한 견해는 중국의 여러 학자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언급되고 있다. 張森水는 중국 남·북방 구석기문화의 차이가 뚜렷하다고 보았다. 북방지역은 대형석기가 적으며 긁개, 소형찌르개, 뚜루개, 새기개 등이 중심이 되는 격지석기전통이 강하다. 반면에 연관된 대표적인 유적들과 절대연대는 아래와 같다.大려 유적은 23만~18만년 전(우라늄측정), 金牛山 유적은 29~37만년 전, 許家窯 유적은 10.4~12.5만년 전·9.1~10.2만년 전(코뿔소 뼈에 대한 탄소연대측정치-16920±2000, 16450±2000), 丁村 유적은 16~21만년 전(우라늄측정)·8.3~15만 년 전, 周口店 제4지점은 약 25.7만년전(발열광측정), 廟后山 유적은 24~14만년 전(우라늄측정)이며 석기는 대략 40~14만년으로 추정하며, 馬패 유적은 12.9~13.5만년 전(우라늄측정), 巢縣 유적은 16-20만년 전(우라늄측정), 桐梓 유적은 16-20만년 전이며 최근자료를 추가하면 그 상한연대는 31만년 전이며, 觀音洞 유적은 A조 석기군은 57000±3000, B조 석기군은 7.6~11.9만년 전, 10~19만년 전으로 추정된다.결국 중국에서는 편년 상 일부 유적의 편년과 측정기술의 오차에 의해 그 상한을 30만년 전까지 올려보고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중기갱신세 후기, 혹은 후기갱신세 전기에 이르는 시기, 즉 20만년 전부터 시작하여 4만년 전후로 인식하고 있으며 盧山-大理 간빙기로부터 大理빙하기에 해당하는 후기홍적세 초기부터 중기구석기시대 유적들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생각된다.중국의 이 시기에는 몇 가지 동물상의 변화가 일어난다. 중국 화북지방에서는 중국 하이에나, 종골대각록, 갈씨반록 등이 가장 개체 수량도 많고 층위분포도 넓다. 赤鹿, 普氏羚羊 등은 중국의 중기구석기시대를 규정하는 중요한 동물화석이 된다. 하지만 화남지방은 大熊猫-劍齒象동물군이 전기갱신세 이래 후기갱신세까지 지속되고 있다. 이와 같이 동물상으로 뚜렷한 구분이 어려운 것은 넓은 지역에 다양한 기후변화를 갖고 있는 각 유적별 특징을 종합할 만큼 충분한 유적들이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이러한 동물상의 변화는 각 지역별로 나타나는 좁은 의미에서의 환경과 인류활동의 과제를 추정할 수 있다. 중국의 경우 가장 왕성한 기후 변화는 후기갱신세가 시작되는 시.
    사회과학| 2006.06.05| 9페이지| 1,000원| 조회(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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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사회의 아동]끄는 부모 미는 부모
    현대사회와 아동“끄는 부모 미는 부모”를 읽은 후 나의 자녀교육에 대하여“아이에게 재산을 물려주기보다 생각하는 방법을 가르쳐라.”매우 옳은 말이라고 생각한다. 아직 경험이 부족한 내가 보기에도 요즘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 생각하는 능력이 많이 결여되어있다고 보여 진다. 기회가 있어서 초등학교 3학년 학생들과 6개월간 인연을 맺고 있었는데, 아이들을 관찰해본 결과, 능동적이고 스스로 생각 할 줄 아는 어린이는 얼마 되지 않았다. 초등학교 3학년이라면 글을 읽고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거나 글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무리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이들은 그렇지가 못했다. 국어 문제를 풀 때 “이 후의 일을 상상해서 써 보시오.”란 말이 나오면 여지없이 80%는 별표를 쳐놓았다. 읽어보았냐고 물어보면 읽어봤는데 도저히 모르겠다는 대답이 나왔다. 내가 질문한 것은 그런 대답이 나올 수 없는 질문이었는데 말이다. 상상하는 것이 무슨 뜻이 가르쳐주고 “네가 만약에 그렇다면 어떻겠니?” 라고 질문을 던져도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아이는 60%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나머지 40%는 도저히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에게서 모범답안을 끌어내고자한다.이 아이들이 머리가 안 좋은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 할지도 모르지만 수학문제만큼은 나보다 더 빨리 계산해 낼 때도 있어서 놀라움을 가지게 한다. 국어 능력이 떨어지는 것이 아닐까란 생각도 해보았는데 말을 하는 것을 들어보면 그렇지도 않다. 하지만 초등학교 3학년이 매일 학원에 다니면서 여러 가지 학원에 다니고 밤늦게야 집에 들어가 지쳐 자는 요즘의 현실을 보면 아이들의 머리가 굳어버리고 있는 게 이상하게 보이지만은 않는다.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엄마들의 의식이 먼저 바뀌어야 할 것 같다. 아이가 반에서 일등을 하고 전교에서 일등을 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란 것을 엄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 자신의 잣대가 얼마나 아이를 바보로 만드는 지 커서도 답을 가르쳐줘야만 행동할 수 있는 아이를 만들 것인지 부모님들의 노력여하에 달렸다고 생각한다. 자연스러움이 최고로 좋은 교육 같다. 자신의 요구를 아이를 통해 해소하려고 하는 것은 자신의 못났음을 시인하는 것과 같다. 아이를 교육하기위해선 먼저 부모가 교육이 되어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숨겨진 아이의 가능성을 찾아라.”내가 존경해 마지않는 부모님께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나에게 있는 재능이 무엇인지 심각하게 생각해 보지 않은 게 아닐까 하고 생각될 때다.그래서 자주 묻곤 했다. “ 엄마, 난 어렸을 때 뭘 잘했어?” 그러면 엄마는 못하는 게 없어서 무엇이든 잘 할 줄 알았고 그래서 특별히 가르치지 않았다고 하신다. 나는 그런 말을 들으면 내심 서운하다. 엄마가 내게 관심이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지만, 나에게도 뭔가 특화된 재능이 있는데 엄마가 그걸 못 찾아줘서 지금도 이렇게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될 때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녀의 특화된 재능을 딱 꼬집어 찾아내는 부모는 거의 없다고 생각된다. 우리 부모님처럼 아이 스스로 좋아하는 것을 찾게 만드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나라면 내 아이에게 여러 가지 길이 있음을 알려주고 아이가 가장 흥미 있어 하고 뛰어난 실력을 보이는 것이 있다면 밀어주고 싶다. 생각해보니 나의 부모님도 특별히 강요해서 시키지 않으셨을 뿐이지 방임한 상태로 내버려두진 않으셨단 걸 지금 깨달았다. 부모님께서 제시해준 여러 가지 방향에서 내가 두드러지게 두각을 나타냈던 것이 없었던 것 같다. 그냥 보통 이상은 해냈기 때문에 부모님도 딱히 어떤 길이 네 길이라고 잡아주시지 못하셨던 것 같다.나는 아이가 무엇을 잘하는지 이것저것 다 시켜볼 생각은 없다. 하지만 아이가 원한다면 정말 애타게 원한다면 하고 싶은 의지가 충만해질 때를 기다려서 가르칠 것은 가르치고 그만둘 것은 그만 둘 것이다. 아이의 재능을 특화시키는 것은 부모님만의 노력이 아니고 부모의 작은 정성과 아이의 의욕 그리고 사회의 역할이 크다고 본다. 내 힘만으로 또 아이의 힘만으로는 재능이 특화되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큰 인물이 되지 못했다고 해서 나의 재능을 못 찾았다는 위험한 생각은 이제 버려야겠다. 지그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나의 재능은 찾아지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글을 쓰기 위해 생각하는 동안 나의 성격이나 긍정적인 사고방식도 넓은 범위로 본다면 재능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여기에 노력으로 얻게 될 미래의 내 삶의 방향은 나의 끝없는 재능을 변함없이 끌어내 주리라 생각한다. 내 아이도 꼭 그러리라 생각한다.“아이는 아빠와 엄마의 공동작품”나에게 있어 아빠는 나를 믿어주는 든든한 후원자로서의 이미지가 강하다. 아버지는 어렸을 때 오빠와 나를 데리고 동네 산책하는 것을 좋아하셨고 일요일에는 맛있는 음식 같은 것도 손수 만들어주셨다. 하지만 아빠가 편한 상대만은 아니었다. 항상 아버지가 앉으신 다음에 식탁에 앉도록 교육받았고 수저를 드신 다음에 밥을 먹었으며 아버지는 좋은 분이지만 위엄을 갖추신 상대로 기억에 남는다. 나는 아버지가 없는 삶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엄마가 없는 삶은 더더욱 그렇지만 교육은 엄마만 하는 것이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만약에 아버지 없이 살아왔다면 매우 정서적으로 불안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집에 있는 것도 불안으로 다가왔을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밖에서 일하시기 때문에 교육은 모두 엄마가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소리다. 나부터가 아버지 존재 자체로 위안을 받고 자신감을 갖고 있다. 거기에는 엄마의 중간 역할이 매우 컸다. 아버지가 잘못하신일이 분명 있었을 텐데도 아버지는 아이들 앞에서 아버지를 책망하는 것을 본 일이 없었다. 이 수업을 들으면서 나의 어머니가 얼마나 현명한 분이셨는가를 깨달았다. 만약 아버지 사업이 실패하고 이사를 다닐 때마다 엄마가 아버지를 원망하고 책망했다면 오빠와 나는 아버지를 우습게 여기고 기준 없는 삶을 살았을 지도 모른다. 자녀에게 있어서 아버지의 역할은 가장 큰 본보기이며 위엄의 대상이고 세상에서 날 지켜줄 보호자로서의 인식이 강하다고 생각한다.부모님이 안 계신 아이들은 아무리 바르게 자란다고 하여도 무의식중에 결여된 무언가가 분명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바른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나의 배우자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가 굉장히 중요할거라고 생각한다. 바른 사고방식을 가진 아버지가 아이를 키울 자격이 된다고 생각한다. 아이가 있다면 아이의 편에서 생각하고 아이의 입장이 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겠다. 내가 어머니가 되면 배우자와 함께 아이의 뒤에서 밀어주고 후원해주는 든든한 부모가 되고 싶다.요즘의 아이들을 보면서 내가 어렸을 때를 생각해본다. 나는 나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자녀 교육관을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또 존경한다. 현대사회와 아동 수업시간에 부모님께 한 번도 안 맞았던 사람 손 들어보라고 했을 때가 있었다. 나는 손을 들다 내려버렸다. 아무도 안 드는 것이었다. 순간 놀라고 손을 들 타이밍을 놓쳐버려 가만히 있었지만 맞는 것을 당연시 여기는 사람들은 정말 이해하기 힘들다. 나는 학교 다닐 때도 전체 기합이라는 명목 하에 선생님들께 몇 번 맞은 적은 있지만 어머니께 꿀밤 두 대 맞아본 것 빼고는 맞아본 기억이 없다. 나는 이 점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긴다. 부모님은 체벌이 아니어도 오빠와 나를 훈육하는 법을 아셨고 충분히 반성 할 수 있게 하셨다. 매를 맞지 않아도 부모님은 무서운 분이셨고 항상 옳다는 믿음을 주시는 분들 이셨다. 이 수업을 들으면서 왜 내가 부모님을 그렇게 신뢰하고 존경해왔는지 알게 되었다. 아기였을 때부터의 부모님과의 교류가 얼마나 아이의 정서적 성장에 도움이 되는지도 정확히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고등학생일 때까지 어머니는 전업주부로서의 위치에 계셨고 나는 학원 같은 곳은 다니지 않았었다. 중학생 때까지는 반에서 1등을 놓친 적도 없었고 부모님도 항상 신뢰하셨기 때문에 나의 유년 시절은 매우 행복했다. 다만 아쉬운 것은 남들 다 다니는 학원을 안 다녀봤다는 것과 나의 숙제나 모르는 것은 내 스스로 꼭 찾아야만 했다는 것이다. 나는 내 준비물을 엄마나 아빠가 챙겨준 적이 한 번도 없었고 6살 때부터 사전을 찾아야만 했다. 위에 오빠가 있었기 때문이었는지 나는 자연스레 오빠가 하는 것은 다 따라하게 되었는데 그래서인지 또래 아이들보다 똑똑하고 앞서나가는 아이였다. 지금 생각해도 유년시절의 나는 매우 자랑스럽게 여겨진다. 한 가지 나에게 부족했던 점은 발표를 한다거나 남 앞에 나가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반장도 여러 번 하고 친구와 다툰 적도 얼마 없었다. 내가 생각해도 내 자식이 나처럼만 커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공상하는 시간을 즐거워했고 텔레비전보다는 책 읽는 것을 좋아해서 어렸을 때는 아무 책이나 읽는 것 때문에 부모님께 여러 번 혼난 적도 있다. 책 읽다가 혼났던 것을 생각하면 자랑스러운 마음도 생긴다. 아무튼 나에게 있어서 부모님은 절대적이고 나를 신뢰해주시고 또 거짓말을 할 수 없게 만드는 분들이다. 나는 나의 부모님처럼 자식을 키우고 싶다. 공부는 못하더라도 항상 자신 있고 주눅 들지 않고 적응도 잘하고 스스로를 사랑할 줄 아는 아이로 만드는 것이 나의 자녀 교육 목표이다. 내 아이가 무엇이 되게 만들 생각은 없다. 스스로 생각할 수 있고 스스로의 방향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이 되게 도와주고 싶다. 내가 아이의 인생에서 10%의 영향만을 끼쳐서 나로 인해 아이가 좌지우지 되지 않게 하고 싶다. 나의 부모님께 교육 받은 나로서는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 수업을 들으면서 아이를 키우는 것이 생각만큼 수월 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깊이 알게 되었고 내가 모르고 있었던 것이 내가 나중에 키우게 될 내 아이에게 얼마만큼의 영향을 끼치는 일인지 깊이 생각해볼 수 있었다. 이 수업을 듣게 되어서 내 아이 에게 하나라도 더 보탬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순조롭게 나이가 들어서 바른 아이를 키우는 엄마가 되었으면 좋겠다.
    독후감/창작| 2006.06.05| 3페이지| 1,000원| 조회(5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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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카프카스의 포로 (코카서스의 죄수) 평가A+최고예요
    -러시아 문학과 영화-카프카스의 포로카프카스의 포로이 영화는 우리가 수업 중 보았던 러시아에 관한 영화 중 가장 현대적인 영화로서 반전영화를 표방하고 있다. 이 영화의 주된 기둥은 러시아와 체첸간의 전쟁으로부터 시작된다. 배경이 된 카프카스 지역은 러시아 연방 남서부 지역으로 흑해와 카스피 해 사이에 있다. 이 곳은 넓은 산지가 펼쳐져 있어 자연과 함께 살아 숨쉬는 느낌을 강하게 받을 수 있는 곳으로 여러 민족이 분포하고 있는데 그 중 체첸 민족은 러시아와 독립을 전제로 한 오랜 전쟁을 하고 있었다. 톨스토이나 프쉬킨 등이 이 곳을 소재로 시와 소설 등을 쓰기도 했다. 이 영화에는 햇병아리 이등병 바냐와 산전수전 다 겪어 노련한 중사 사샤를 주축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갓 임무를 맡고 전장에 나가게 된 바냐는 체첸 반군의 습격으로 인해 부상을 당하고 정신을 잃는다. 한참 후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은 중사 사샤와 함께 체첸 반군의 마을에 생포되어있음을 깨닫게 된다. 작은 창문이 두 개 달린 헛간에 서로의 발이 이어지게 묶어 놓은 족쇄로 그 둘은 원치는 않지만 일거수일투족을 함께해야 했다. 그들을 가둔 사람은 체첸 반군인 압둘이었다. 그에게는 한 가지 계획이 있었는데 그것은 러시아군에 포로로 잡혀간 그의 아들을 이번에 잡은 러시아 포로들과 맞교환하겠다는 것이었다. 지금껏 어떤 수단과 방법이든 모두 써보았지만 괘씸한 러시아 인들은 쉽사리 아들을 풀어주지 않는다. 그에게는 이제 이 방법뿐이었다. 그에게 필요한 포로는 단 한 명뿐이지만 그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두 명의 군인을 사로잡아온다. 그들을 잡아 자신의 헛간에 가둬두자 동네 사람들은 불안해하기 시작한다. 체첸 인들이 생각하는 러시아인은 마치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제 시대의 일본인을 생각하는 것과 같아서 그들에게는 러시아인 자체가 불안요소이고 보기 싫은 존재였다. 하지만 압둘은 아들을 찾아와야한다는 생각에 비난을 무릅쓰고 자신의 사위 핫산을 통해 그들을 감시하고 살려놓는다. 핫산은 압둘의 사위로 시베리아에서 징역을 살 당시 혀가 잘린 가련한 사내이다. 그는 자신의 부인이 불륜을 저지르자 부인과 불륜상대를 죽이고 징역을 살았다. 그는 본디 음악을 좋아하고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여 감옥에서도 쉬지 않고 노래를 부르다 결국 혀가 잘리고 말았다고 한다. 혀는 잘렸지만 그는 낙담하지 않고 잘 생활해 나간다. 그는 포로인 바냐와 사샤에게도 특별한 앙심을 품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기만 한다. 사샤가 뇌물마냥 바치는 선글라스도 선뜻 받아든다. 그는 러시아인에게 모진 고초를 겪었음에도 러시아인에 대해 그다지 앙심을 품지 않는다. 그것은 그가 카프카스의 자연 속에서 자연과 동화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압둘의 집엔 또 하나의 인물이 있다. 그것은 바로 압둘을 딸 디나였다. 그녀는 아직 혼인을 치룰 수 없는 어린 나이이지만 영리하고 아름다운 소녀였다. 러시아인들이 나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의 집에 포로로 잡혀 온 바냐를 보면서 러시아인에 대한 편견을 조금씩 무너뜨려간다. 물과 먹을 것을 가져다 줄 때만 잠깐 만나는 포로들이지만 생각만큼 나쁜 사람들은 아닌 것 같다.그들에게 여러 가지 생각을 가지게 하는 포로 바냐와 사샤는 어서 빨리 탈출하고만 싶다. 사샤는 이 애송이 이등병이 거추장스럽기만 하다. 그래서 그와는 별도의 생활을 강렬히 원하지만 그와 애송이를 묶어 놓은 족쇄로 인해 뜻을 이루지 못한다. 그에 반해 바냐는 마음이 여린 청년이었다. 그는 아직 전쟁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는 시기에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말았다. 자신이 왜 포로가 되었는지도 모르고 왜 죽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는 아주 뛰어난 손재주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으로 망가진 시계도 고치고 나무 조각으로 비행기를 만드는 등의 일로 주위의 환심을 산다. 그는 체첸인 들이 생각만큼 나쁜 사람들이 아니며 자신과 똑같이 생활해 나가는 인간임을 깨닫게 된다. 자신이 나중에 러시아로 돌아간다고 해도 체첸 인들에게 피해를 주거나 공격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어쩌면 이곳에서 못 떠난다고 해도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을 거란 생각도 든다. 이에 반해 사샤는 계속해서 탈출을 꿈꾼다. 그는 험한 세상을 겪어왔기에 능수능란했고 모든 일에 대처가 빨랐다. 그는 어서 이 애송이와 떨어져 군대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다. 이 영화에서 초점이 맞혀지는 것은 전쟁뿐만 아니라 부모님의 자식에 대한 사랑에도 있다. 압둘은 아들을 되찾기 위해 이러한 일을 꾸몄고 바냐의 어머니 또한 아들을 되찾기 위해 이런 일에 휘말리게 된다. 압둘은 생각처럼 포로교환이 쉽지 않자 바냐와 사샤에게 러시아에 포로교환을 요청해달라고 가족에게 편지를 쓰라고 한다. 바냐는 하나뿐인 어머니께 자신이 포로로 잡혀있음을 알리게 되고 바냐의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한달음에 압둘을 만나기에 이른다. 바냐의 어머니는 러시아공관에 찾아가 아들과 체첸포로의 맞교환을 계속해서 부탁하지만 이것 역시 쉽지는 않다. 한 편, 압둘의 마을 사람들은 불안요소인 러시아인들이 계속 생존해있자 불만을 토로하고 결국 체첸 반군은 이 포로들을 압송해간다. 그들은 체첸인과 격투기도 하며 포로라기보다는 나름대로 대우를 받으며 지내게 된다. 하지만 둘은 결국 탈출을 감행하고 이로 인해 불쌍한 핫산과 마을의 양치기가 죽임을 당한다. 양치기를 죽인 이유로 사샤는 잡혀가 죽임을 당하고 홀로 남은 바냐는 다시 압둘에게 감금된다. 차차 포로교환이 성사될 무렵, 압둘의 아들이 수감되어있는 곳에 아들을 만나러 온 체첸의 노인이 갑자기 아들을 쏘아죽이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갑작스런 일로 인해 압둘의 아들은 의지와는 상관없이 탈출을 감행하다 총살당하고 압둘은 이튿날 아들의 시체를 묵묵히 받아돌아온다. 그에게는 이제 더 이상 러시아 포로가 필요하지않다. 그는 남아있는 바냐를 죽이기로 결심한다. 한 편, 바냐와 지내면서 정이 들어버린 디나는 바냐가 죽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자신이 바냐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바냐가 죽으면 묻어 주는 것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바냐는 자꾸 자신의 족쇄를 풀 열쇠를 달라고 한다. 자신이 그것을 주면 바냐는 달아날 것이 분명하다. 자신의 오빠는 이미 죽어버렸고 바냐도 곧 죽을 것이다. 디나는 깊은 고민 끝에 족쇄를 풀 열쇠를 바냐에게 던져준다. 하지만 열쇠를 갈구하던 바냐는 족쇄를 풀고 나서도 도망가지 않는다. 그는 자신으로 인해 피해를 보게 될 디나를 생각해서 묵묵히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죽임을 당할 시간이 점차 다가오고 압둘은 바냐를 데리고 마을을 벗어난다. 바냐는 자신의 죽음을 직감하고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앞에는 죽은 것이 분명한 사샤가 보인다. 뒤에서 압둘을 총을 겨누고 있을 것이다. 바냐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간다. 총성이 들리고 눈앞의 사샤가 웃고 있다. 아... 죽었구나 하고 돌아봤는데 압둘이 뒤돌아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바냐는 자신이 죽지 않았음을 깨닫고 너무 기쁘다. 하지만 한 편으론 착잡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 그는 체첸인 마을을 등지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는 데 하늘 위로 러시아 군기가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그 군기들은 바냐가 죽었다고 단언하고 복수한다는 명목하에 체첸마을을 초토화시키러 가는 것이었다. 바냐는 달려가며 자신이 살아있음을 알리려 부단히 노력했지만 이미 자신이 한참동안 갇혀지내던 체첸 마을은 한 줌의 재로 변하고 만다. 자신과 러시아를 잠시나마 용서해준 압둘과 그의 딸 그리고 체첸인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순식간에 한 줌의 재로 변해 버렸다. 바냐는 다시는 그들을 볼 수 없음에 절망스럽고 책임을 느낀다. 이 영화는 카프카스와 함께 거기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자주 보여준다. 약간은 서늘하게 느껴지는 이 곳은 역시 우리와 같은 사람이 살고 있음을 알려준다. 서로가 추구하는 것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가 서로에게 원한도 없이 맹목적인 전쟁을 계속함으로서 전쟁을 하는 이나 어떻게 해서든 전쟁에 엮여드는 모든 사람들은 가해자와 피해자를 나눌 수 없을 만큼 모두가 상처를 받는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 영화였다. 이 영화를 봄으로서 러시아의 또 다른 이면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전쟁으로 인한 거대한 소용돌이에서 빠져나갈 수 없는 가슴 아픈 사람들을 바라보며 함께 가슴 아파 하는 것밖엔 해 줄 수가 없었다. 전쟁은 전 세계 어디에서나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독후감/창작| 2006.06.05| 5페이지| 1,000원| 조회(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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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사]삼국의 고분
    삼국의 고분고구려의 고분고구려 유적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에는 성곽외에 고분이 있다. 전자는 고구려의 국가 유지를 위한 고구려인의 땀을 의미한다면, 후자는 고구려인의 삶과 의식을 반영해 주는 건축물이다. 특히 고분은 단순한 "시체의 매장처"가 아니라 당시의 예술과 과학의 결합체인 동시에 고구려인들의 현세와 내세가 공존하는 종교관을 반영해준다. 무엇보다도 고분벽화는 미술, 음악, 무용, 기예, 풍속과 신앙세계가 공존하는 고구려 문화의 정수가 되기 때문에 그 존재 가치가 크다.(이러한 고구려 고분 벽화에 대해서 북한에서는 그 특징으로 "당시 사회 생활의 표현 "힘과 아름다움 '생동감 등을 들고 있다. 그리고 벽화는 당시의 계급적, 종교적 제약과 환상의 동물의 표현에 따라 '종교적 해독'으로 회화발전에 부정적 영향을 남겼다는 주장이다. 「고구려 문화」)무용총, 삼실총, 장천1호묘의 천마상(천마총)과 그 형태가 비슷하여 문화교류상의 새로운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 고구려 고분에는 석총과 봉토석실분(토총)으로 대표된다. 전자는 초기의 형태이며, 후자는 중후기의 양식으로 일반화 되었다.- 석총석총은 석광(石壙: 돌로 만든 굴)만 있을 뿐, 문과 연도가 없으며 토총은 석실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문과 연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두 무덤은 존재시기나 기원과 형태가 어느 정도 밝혀짐에 따라 4~5세기 경에는 적석총이 쇠퇴하고 봉토묘가 발달하면서 토총이 고구려후기 무덤을 대표하게 되었다고 보인다. 고구려는 문화적,종교적으로 고조선과 부여와 연결되기 때문에 고조선의 돌무덤과 부여의 돌널 무덤이 둘 다 고구려로 이어진 것이다. 적석총은 대체로 흙이 섞인 자갈로 터를 평평하게 고른 다음 주위에 큼직큼직한 돌을 쌓아서 묘역을 만들고 있어 고구려 초기의 무기단적석묘(無基壇積石墓)로 전통이 이어졌음을 알게 한다. 그러므로 고구려의 석총은 선행하는 하나의 특정묘제와 기원을 찾기보다는 앞선 여러 가지 묘제와의 관련속에서 찾아야한다고 하겠다.이 석총의 크기는 계급의 차이에 따라 달리 축조되었으인 예이다.참고 서적 『집안 고구려유적의 조사연구』적석총(積石塚)이란 말 그대로 돌을 쌓아 만든 무덤이다. 우선 바닥에 돌을 몇 겹 깐 다음 구획된 장소에 시체를 놓고 다시 돌을 쌓아 완성하는 형식의 무덤인데, 강이나 하천에서 사람 머리 혹은 소머리 크기의 돌을 구해 쓰는 게 보통이지만, 대형 석재를 가공하여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무덤의 양식은 시기별로 조금씩 변하여 일정하지 않다. 처음에는 대부분 기단(基壇)이 없거나 있더라도 1단에 그쳤지만, 나중에는 평면 사각형의 기단을 3층 이상 계단식으로 올림으로써 마치 피라미드의 한 부분을 연상시키게 된다. 적석총의 대표적인 예로는 집안지역에 남아있는 태왕릉(太王陵)과 장군총(將軍塚)을 들 수 있다. 특히, 태왕릉은 밑변의 길이가 60m를 넘는 대형의 계단식 적석총으로서, 맨 위의 7층에 묘실을 만들어 시체를 안치하였는데, 무덤의 돌무더기에서 '태왕릉이 안정되고 단단하기가 산 같기를 바랍니다'(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라는 명문이 새겨진 벽돌이 발견되어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명문의 이른바 '태왕'은 △△대왕의 약칭일 수 있지만, 광개토왕의 시호(諡號)인 호태왕(好太王)의 약칭일 개연성이 무엇보다 높기 때문이다. 더욱이 태왕릉은 광개토왕릉비[好太王陵碑]와 불과 500m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으므로, 이를 광개토왕릉으로 여기는 사람이 많다.한편, 태왕릉이 조사되기 전까지 광개토왕과 관련된 무덤으로 알려져온 장군총은밑변의 길이가 30m이며 높이는 14m인데, 전체 7단 중 제5단째에 횡혈식(橫穴式)의 석실(石室)을 만들었다. 횡혈식 석실이란 돌로 무덤 안을 마치 방처럼 만들고 거기에 바깥으로 통하는 길 혹은 복도를 낸 무덤 형태로서, 시체를 방에 옆으로 넣는다 하여 횡혈식이라 부른다. 그렇지 않고 시체 혹은 관(棺)을 위에서 아래로 안치하는 방식은 수혈식(竪穴式)이라고 한다.- 흙으로 덮은 돌방무덤 - 봉토석실분봉토석실분(封土石室墳)은 돌로 만든 방을 흙으로 덮은 무덤이다. 고구려의 봉토석실분은 대체로 땅을 파지 않고 지단촐하여 복도와 현실만으로 구성된 것이 많다. 즉, 이른바 다실묘(多室墓)에서 단실묘(單室墓)로 바뀌는 것이다.바뀌는 시기는 일정치 않으나, 대체로 6세기경이 기준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고구려의 봉토석실분은 귀죽임천정[말각조정抹角藻井]이라 하여 천장의 높이를 한층 높이면서 천장구조를 튼튼하게 하는 방법을 사용한 것이 특징이기도 하다.신라고분경상북도 경주시를 도읍으로 삼아 국가를 형성했던 신라의 건국에서 멸망까지, 좁게는 신라의 국가형태가 확립된 마립간시대(麻立干時代) 이후에 축조되었던 무덤을 말한다. 공간적으로는 신라 영역 내 모든 무덤을 일컫지만, 삼국시대에는 시기에 따라 신라의 영역이 변했으므로 도읍이었던 경주지역 고분과 이 지역 고분출토유물과 유사한 유물이 나오는 주변지역의 무덤을 포괄한다. 그러나 그 개념에 있어 신라 건국에서 가야가 멸망한 6세기 중반까지의 무덤에 대해 연구자들 사이에는 이견이 있다. 이는 신라의 국가형태가 확립된 시점 및 돌무지덧널무덤 이 축조되는 시점 문제와 신라 영역 내의 무덤구조가 지역적으로 다른 데 따른 문제이다. 따라서 연구자들 가운데는 극히 좁은 의미로서 경주지역 내에 분포하는 돌무지덧널무덤만을 신라고분이라 지칭하기도 한다. 대략적인 신라고분의 변천은 신라건국기인 원삼국시대 단계(제1기), 돌무지덧널 무덤이 축조되는 단계(제2기), 굴식돌방무덤 이 축조되는 단계(제3기)로 나눌 수 있다.[ 제1기] 매장시설로 널무덤과 덧널무덤을 사용한 시기이며 전기 ·후기로 세분할 수 있다. 전기는 구덩이 속에 널을 묻는 매장방법이 사용되었으며, 세형동검(細形銅劍)·전한경(前漢鏡) ·와질토기(瓦質土器) 등의 유물이 출토된다. 무덤은 구릉사면과 평지에 위치하며 경주의 조양동· 구정동·입실리 등의 유적이 이에 해당된다. 후기는 구덩이 속에 나무덧널을 설치하고 그 속에 널을 사용하거나 피장자만을 안치하는 매장방법이 사용되었다. 무덤은 구릉사면과 평지에 위치하나 부분적으로 구릉정상부에도 있다. 많은 철제품이 출토되며, 특히 후기말에는 철제무기·황오동·인왕동·교동·노서동· 노동동이 주요분포지역이며 경주군 금척리와 경주 남천(南川) 이남의 오릉(五陵) 이대에도 고분군이 형성되어 있다. 평지에 축조되는 것이 보편적이지만 제2기말에는 평지를 벗어나 보문동의 산록에도 일부 축조되었다. 1906년부터 조사되기 시작했으나 1911년 우연히 발견된 금관총(金冠塚)에서 금관 을 비롯한 많은 유물이 수습되자 이후 일제의 조선총독부 주관하에 대규모 발굴이 있었다. 해방 후 파괴되어가던 고분을 중심으로 조사되었으며, 1973년 고분공원인 대릉원(大陵苑) 조성시 황남동 고분군을 중심으로 대규모 발굴조사가 있었다.지금까지 발굴조사된 돌무지덧널무덤의 일반적인 구조는 지하 또는 지상에 매장시설인 나무덧널을 설치하고 그 속에 널과 껴묻거리를 넣은 후, 냇돌로 원형의 돌무지를 쌓고 그 위에 다시 흙을 덮은 원형의 봉토로 되어있다. 봉토외곽에는 봉토의 흙이 흘러내리는 것을 막고 무덤의 범위를 나타내기 위해 무덤둘레돌이 둘러싸여 있다. 무덤에 따라서는 덧널 하나에 널과 껴묻거리가 함께 있는 것, 으뜸덧널과 딸린덧널을 각각 따로 만들어 으뜸넛널에는 널과 껴묻거리를 넣고 딸린덧널은 부장곽 (副葬槨)으로 사용한 것, 3개 이상의 덧널이 한봉토 내에 있는 것이 있다. 이러한 무덤구조는 한 덧널 속에 한 번만 장사를 지낼 수 있으므로 합장이나 그 외의 추가장을 위해서는 봉토의 일부를 제거하고 그 옆에 붙여 다시 무덤을 만들어 봉토외형이 쌍무덤 형태를 이루게 하거나 한 봉토 내에 돌무지가 이중으로 겹치는, 즉 먼저 만든 무덤을 파괴하고 들어서게 되어 있다.돌무지는 대형고분에서는 덧널 위에까지 덮여 있으며 중형고분에서는 덧널 주위에만 쌓은 경우도 있다. 초대형고분의 봉토는 지름이 80m, 높이가 20m에 달하나 주로 지름이 50m내외인 대형고분과 10m 내외인 중형고분이 많다. 출토유물은 무덤구조의 특이성 때문에 쉽게 도굴할 수 없어 매장 당시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왕릉급 고분으로 추정되는 금관총·서봉총·천마총·황남대총 북분에서는 금총의 봉토무덤축조와 연결된 현상이다. 그러나 출토유물 중 고구려에서 만들어진 호우총의 이라는 명문이 있는 청동합(靑銅盒), 서봉총의 라는 명문이 있는 은제합(銀製盒), 고구려 계통의 기마전술용 마구류를 통해볼 때 고구려 돌무지무덤과의 관계도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돌무지 덧널무덤의 등장은 원삼국시대 덧널무덤의 전통과 고구려 돌무지무덤의 영향 아래 신라의 마립간 시대 왕권을 반영하는 고총고분(高塚古墳)의 축조가 맞물려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 돌무지덧널무덤이 축조된 시기는 신라가 내부적으로 국가형태를 완비하고 왕권을 확립해가던 4세기 후방에서 6세기 중반까지이며, 역사적으로는 신라 마립간시대에서 동양적 왕권국가가 완비된 중고기(中古期)의 전기까지에 해당된다.이 시기의 경주지역과 유사한 유물이 출토되는 주변지역의 고분은 변형 돌무지덧널무덤, 구덩식 돌방무덤, 덜널무덤, 독무덤이 있다. 변형 돌무지돌널무덤은 신라의 영토확장과 직접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며 경주군 안계리고분(安溪里古墳), 삼척갈야산고분(葛夜山古墳), 창녕 교동고분 (校洞古墳), 을주 양동고분(良東古墳) 등이 있다. 구덩식 돌방무덤은 주로 가야의 무덤구조이나 신라적인 유물이 출토되는 고분은 경주지역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지방수장층의 무덤으로 보이며, 대구·경산·양산·창녕 등 낙동강의 동쪽지역에 흩어져 있다. 이들 고분에서는 금동관·환두대도 ·은제허리띠 등 경주지역고분 출토유물과 흡사한 유물이 출토된다.[ 제3기] 돌무지덧널무덤이 점차 사라지고 굴식 돌방무덤이 만들어진 시기이다. 굴식 돌방무덤은 대충 다듬은 돌로 장방형 또는 방형의 널방[玄室]을 만들고 한쪽 벽에는 널방과 통하는 널길을 두는 구조이다. 널방은 돌문으로 닫혀 있는 것이 정식이나 나무문을 두거나 그냥 두는 경우도 많다. 널길 바깥은 자연석으로 막혀 있으며, 부부합장 등의 추가장(追加葬)이 있을 때 널길 막음돌을 걷어내고 먼저 묻힌 시신 옆에 다시 피장자를 묻을 수 있다. 이러한 무덤구조는 고구려·백제에서 발달한 것으로 신라에는 6.
    독후감/창작| 2006.05.30| 6페이지| 1,000원| 조회(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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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사 (삼한)]삼한을 어떻게 볼 것인가
    삼한삼국시대 이전 한반도 한강유역으로부터 중남부지방에 걸쳐 형성되어 있었던 여러 부족에 대한 통칭. 마한(馬韓)·진한(辰韓)·변한(弁韓)을 말한다. 삼한의 지리적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마한은 한강유역으로부터 충청·전라도에 걸쳐 있었으며, 진한은 경기·강원도 일부, 변한은 낙동강유역 경상도에 비정된다. 삼한사회에 대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기록은 《후한서》 <동이전(東夷傳)>이며, 이를 부연하여 정리한 것이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동이전이다. 이에 의하면 마한은 55개, 진한과 변한은 각각 12개의 소국으로 구성되었다.0 《사기(史記)》 <조선전>과 《한서(漢書)》 <조선전>에 의하면 BC 2세기 경까지도 한반도 중남부지역은 <진국(辰國)> 또는 <중국(衆國)>으로 기록되었으며, 진한 또는 삼한 모두가 이 진국으로부터 발전된 것으로 되어 있다. 삼한의 형성과정에 대해서는 견해가 다양하나, 종래 마한족·진한족·변한족의 별개 종족집단이 한반도 남부지역으로 이주, 정착하여 이루어졌다는 주장보다는 선주토착집단의 점진적인 발전 결과로 삼한이 대두하였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그리고 고고학적 자료를 근거로 할 때 한강유역을 경계로 남부지역이 특색있는 문화를 형성하기 시작한 때는 청동기시대이며, 이들이 <한족(韓族)>으로 불리게 된 것은 초기 철기시대라는 견해가 유력하다. 따라서 <한>이라는 칭호가 사용되기 시작한 시기와는 별개로 한족사회의 형성과 토착화과정은 청동기문화 단계에 이미 진행되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0 삼한사회를 구성하는 기본단위인 각 소국의 형성과정은 민무늬토기문화 단계의 대소규모 단위집단들이 다수 통합되어 단일한 정치집단으로 기능하게 되는 역사적 발전과정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삼한사회의 70여 소국들은 지역과 문화배경, 형성 주체에 따라 시기와 과정이 다양하게 대두하였다. 종래 삼한의 각 소국들은 <부족국가>로 통칭되어 왔는데, 1970년대 이후 고대국가의 기원을 재검토하는 과정에서 <성읍국가(城邑國家)> <읍락지(臣智)·험측(險側)·번예(樊濊)·살해(殺奚)·읍차(邑借) 등의 정치적 통솔자를 세우고 대내외적으로 단일한 단위집단의 기능을 유지하고 있었다. 국읍의 주수(主帥)는 읍락간의 교역과 소국간의 교역활동을 주관하는 경제적인 지배권을 행사하고, 읍락 거수(渠帥)가 개별적으로 행사하던 군사력을 전체적으로 통솔하는 군사책임자였다. 이와 함께 마한의 여러 국읍에는 정치를 맡은 군장 이외에 천신을 제사하는 <천군(天君)>을 두어, 5월과 10월 곡식의 파종과 추수가 끝날 때마다 행하는 제천의식(祭天儀式)을 주관하게 하였다. 정치·경제적인 지배권력 못지않게 종교적인 영향력이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던 이러한 상태는 국읍의 지배권력이 미약한 초기단계의 일반적인 특징이기도 하며, 제정(祭政)이 기능적으로 분리되어 있었던 삼한사회의 지배성격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 뒤 BC 2세기 이후에는 정치적 지배기능만을 가지는 새로운 성격의 지배자가 대두되기 시작하여 삼한사회의 보편적이고 주도적인 지배세력으로 성장하게 되는데, 이러한 변화는 철기문화의 보급을 배경으로 단위집단 지배자로서 제사장의 기능보다 정치·군사적 통솔자로서의 구실이 중요시된 전반적인 추세를 반영한다.0 삼한에서는 철이 많이 산출되었는데, BC 1세기 후반 이래 철기사용이 보편화되고 철을 매개로 활발한 물자교역이 전개되면서 각 집단간의 세력격차가 심화되었다. 이러한 사회·경제적인 변화를 배경으로 소국의 정치적 지배기능의 강화와 새로운 편제질서의 확립이 이루어졌다. 국읍의 주수는 유력한 읍락과의 혼인, 교역의 성공적 수행, 대외국적인 군사활동의 전개를 통하여 지배권력을 강화하고, 거수를 지배세력으로 흡수하면서, 읍락집단에 대한 통제력으로 한계를 극복하게 된다. 또 군대지휘, 조세징수와 관리 등 중요 통치기능이 전문화되면서 지배조직의 체계화도 진행되었다. 이와 동시에 소국의 대내적 성장과 대외적 팽창, 무력대립 등에서 상승작용을 거듭함에 따라 지역별로 유력한 소국을 중심으로 소국연맹체가 대두되었다. 그 중에서 변진(弁辰)의 미오야는 풍속이 있었는데 이것은 남방 해양족속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마한의 여러 나라에서는 소도(蘇塗)라고 하는 신역(神域)을 두고 제사하였는데, 소도는 도망하여 들어간 죄인도 잡지 못할 정도로 법률의 힘이 미치지 못하던 곳이었다. 이러한 삼한의 풍속은 뒷날 신라·백제·가야문화의 기초가 되었다.진한진한(辰韓)은 한(韓) 지역에 있는 진(辰:龍 즉 해님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즉 진한(辰韓)은 한반도(韓半島)에서 해님의 아들이 다스리는 나라라는 뜻이다.삼국지(三國志)에 적혀 있는 진한(辰韓)은 경상도 지방 진한(辰韓)과 평안도 지방 진한(辰韓:일명 樂浪)이다.1). 경상도 지방 진한환단고기(桓檀古記) 북부여기(北夫餘紀)에는 진한(辰韓)과 변한(弁韓)은 기자조선(箕子朝鮮) 유민(遺民) 중 일부가 경상도 지방으로 이주하여 세운 나라라고 적혀 있다.「정미(丁未) 원년 정미년 번조선왕 기준은 오랫동안 수유에 있으면서 백성들에게 많은 은혜를 베풀어 백성들이 모두 풍요하였다. 뒤에 떠돌이 도적떼들에게 패하여 망한 뒤 바다로 들어가더니 돌아오지 않았다. 제가의 무리들은 상장군 탁을 받들어 모두 산을 넘어 월지에 이르러 나라를 세웠다. 월지는 탁의 태어난 고향이니 이를 일컬어 중마한이라 한다. 이에 변.진 2한도 역시 각 자기들이 받은 땅 1백 리를 가지고 수도를 정하고 나름대로 나라 이름을 정했는데, 모두 마한의 다스림을 따르며 세세토록 배반하는 일이 없었다.환단고기 북부여기 문구에는 B.C 194년에 진한(辰韓), 변한(弁韓)이 생겼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B.C 194년경에 경상도 지방으로 이주한 무리들은 마한왕(馬韓王)에게 복속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때부터 박혁거세가 신라를 세운 B.C 57년까지는 경상도 지방에 진한(辰韓)이라는 칭호가 사용되지 않았을 것이다. 고대에 복속국은 함부로 해님의 아들을 뜻하는 진(辰)자를 사용할 수 없었다.환단고기 고구려국본기에 의하면 경상도 지방에 진한(辰韓)이라는 칭호가 사용된 시기는 박혁거세가 신라를 세운 B.C 58년부터이국본기 내용이 맞을 것이다. 그리고 변.진 2한도 역시 각 자기들이 받은 땅 1백 리를 가지고 수도를 정하고 나름대로 나라 이름을 정했는데 진변한은 세세토록 마한의 다스림을 따랐다고 적혀 있는데, 땅 1백리는 제후국을 뜻하므로 변, 진 2한은 마한의 제후국이었다.박혁거세가 신라를 세운 후 진한연맹에 속한 소국들은 마한왕에게 복속하지 않았다.「혁거세(赫居世) 38년(B.C 20년) 봄 2월 호공(瓠公)을 보내어 마한(註 홍성 금마 마한)을 예방하니 마한왕이 호공을 꾸짖으며 진.변 두 나라는 우리의 속국(屬國)인데, 근년에 들어 조공을 바친 일이 없으니 사대(事大)의 예(禮)가 이러할 수 있소...후략." 변진한은 모두 24국인데 그 중 12국은 진왕(마한왕)에 속했다.경상도 지방 진한(辰韓)에 관한 삼국지(三國志) 한전(韓傳) 문구를 살펴본다.진변한을 합쳐서 24국이었고, 큰 나라는 4-5천 가, 작은 나라는 6-7백 가 정도였다. 弁辰韓合二十四國大國四五千家小國六七百家」그곳의 노인들에 전해 내려오는 말에 옛날의 망인(亡人)들이 진역을 피하여 한국으로 들어오니 마한은 그 동쪽 땅을 떼어주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6국이었는데 점차 나뉘어 12국이 되었다. 또 제소별읍이 있었다. 각 거수가 있었는데, 가장 높은 자는 신지, 그 다음은 험측, 그 다음은 번예, 그 다음은 살해, 그 다음은 차읍(읍차?)이었다.「정미(丁未) 원년 정미년 번조선왕 기준은 오랫동안 수유에 있으면서 백성들에게 많은 은혜를 베풀어 백성들이 모두 풍요하였다. 뒤에 떠돌이 도적떼들에게 패하여 망한 뒤 바다로 들어가더니 돌아오지 않았다. 제가의 무리들은 상장군 탁을 받들어 모두 산을 넘어 월지에 이르러 나라를 세웠다. 월지는 탁의 태어난 고향이니 이를 일컬어 중마한이라 한다. 이에 변.진 2한도 역시 각 자기들이 받은 땅 1백 리를 가지고 수도를 정하고 나름대로 나라 이름을 정했는데, 모두 마한의 다스림을 따르며 세세토록 배반하는 일이 없었다.진한의 의(衣) 생활누에치기, 뽕나무 재배하는 것을 알았고 韓) 무리를 공파(攻破)하여 나라를 세우고 나라 이름을 마한(馬韓)이라 불렀으나, 그 해 토착 한(韓) 무리의 반격을 받아 기준(箕準)은 죽고 남은 무리는 대장군 탁(卓)의 인솔하에 한수(漢水) 이남으로 남하하였다. 기자조선(箕子朝鮮) 유민(遺民)을 한수 이남으로 쫓아 버린 평안도 지방의 한(韓) 무리는 그 곳에 나라를 세웠는데, 이 나라 이름은 삼국지(三國志) 한전(韓傳)에는 진한(辰韓)으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나라(樂浪)로 각 적혀 있고, 후한서(後漢書)에는 이 나라(樂浪)의 왕이 진왕(辰王)으로 적혀 있다.「전략..부종사 오림이 말하기를 본래 나라(樂浪:註 後漢의 樂浪郡)가 한국을 통치해 왔으므로 진한(辰韓) 8국을 나누어 나라(樂浪:註 魏의 樂浪郡)에 주었다. 前略..部從事吳林 以樂浪本統韓國 分割辰韓八國 以與樂浪」三國志 韓傳「준 후 대가 끊어지고 마한인들이 다시 진왕을 세웠다. 準後絶滅 馬韓人復立爲辰王」後漢書 韓傳일부 사학자들은 평안도 지방의 진한(辰韓)과 경상도 지방의 진한(辰韓) 이름이 같은 것에 착각을 일으켜 평안도 지방 진한(辰韓)이 한강을 거쳐 경상도 지방으로 남하(南下)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평안도 지방 진한과 경상도 지방 진한은 전혀 다른 나라이다.3). 경상도 지방 진한(辰韓)을 세운 무리는 기자조선 유민인가 아니면 진역(秦役)을 피해서 한국으로 온 진인(秦人)인가?삼국지(三國志) 진한전(辰韓傳)에는 "避秦役來適韓國" 문구가 들어 있는데, 이는 삼국지를 지은 진수(陳壽)가 마치 중국의 진인(秦人)들이 경상도 지방으로 이주하여 진한(辰韓)을 세운 것처럼 한전(韓傳)을 왜곡한 것이다. 원래 진한(辰韓)은 한(韓) 지역에서 해님의 아들이 다스리는 나라라는 뜻이고, 앞에 나온 환단고기 고구려국본기에 의하면 진한이라는 명칭은 박혁거세가 신라를 세웠을 때부터 사용되었다. 앞에 나온 "其耆老傳世自言古之亡人" 문구는 고지망인(古之亡人)인 기자조선 유민이 경상도 지방으로 이주하여 나라를 세운 것을 말하는 것이다.환단고기 북부여기 문구에 의하면 餘紀
    인문/어학| 2006.05.30| 7페이지| 1,000원| 조회(4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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