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중국문화과 20060361 정지웅대약진운동의 전개1957년 경제 건설 사업의 빛나는 업적과 제 1차 5개년 계획의 초과 달성은 전당과 전국 인민의 사회주의 건설에 대한 열정을 크게 고무시켰다.) 전당과 인민은 졍제적으로 빈궁하고 문화, 기술 면에서 뒤떨어진 중국의 모습을 하루빨리 탈피할 것을 요구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당에서는 ‘대약진’을 발동하고 계속해서 농촌에서 인민공사화 운동을 진행할 것을 제기하였다.우리가 지금 ‘대약진’이라고 부르는 것은 정식으로는 ‘사회주의 건설의 총노선’ ‘대약진’ 인민공사의 삼면홍기(三面紅旗)정책을 말하는 것이다.) 대약진이 노리는 것은 철강, 에너지, 식량을 중점으로 한 생산의 대발전이며 목표는 당시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인 영국은 15년 내에 추월할 것이라고 선언하고 추진하였다.개발전략으로서는 ‘두발로 걷는’ 방침을 내세웠는데, 그것은 농업과 공업, 중앙공업과 지방공업, 근대공업과 전통공업 등을 동시에 발전시킨다는 것이며, 그 중에서도 중시된 것은 지방 소형 공장의 건설이었다. 이것은 적은 투자로 효과가 빠르게 나타나며 누구나 참가할 수 있는 간편함 때문에 중국의 조건에 적합한 공업화 방식으로 인기가 있었다. 또한 농업집단화의 강화가 사회주의화를 가속시킨다는 흐름에서 보면 필연적이고 당연한 일이었다. 1958년 8월 중앙정치국 확대회의를 통해 ‘농촌에 인민공사를 설립하는 것에 관한 결의가 채택된 이후 전국 각지에서 합작사를 합병하여 인민공사가 설립되었다.인민공사의 특이성은 하나의 인민공사가 고급합작사의 20~30배에 해당하는 2천호로 대규모였을 뿐만 아니라 농업, 공업, 상업, 교육, 군사(민병)의 멀티 기능을 겸비하고 있는 점에 있었다.) 그리고 인민공사는 파리 코뮌과 같은 지역주민의 자치조직 모델이 된 것이다.대약진 운동은 8월경부터 그 속도가 빨라졌으나 이 와중에서 식량생산이나 선철 등의 생산계획 목표에 대한 배증 내지는 조기 달성이 각 부문과 각 지구정부에게 커다란 압력으로 부과된 것이 문제라할 수 있다.대약진운동은 점차 많은 문제점을 드러내는데 공업제품에서 식량에 이르는 기본건설투자는 잇따른 대증산운동에 의하여 천정부지로 팽창하고 경제는 과열상태가 되었다. 그 결과 노동력뿐만 아니라 석탄생산과 그 수송, 전력의 공급이 달리는 등 국민경제의 각 방면에서 병목현상이 나타났다. 이러한 상황은 정부의 통제를 벗어나 국민의 부담을 더더욱 가중시켰다. 조건을 고려하지 않은 대규모 집단화, 농촌사회의 전통을 무시한 공동식당, 공동보육, 절대평등주의라는 좌익편향이 농민의 의욕을 상실시켰다.이처럼 국민경제가 대혼란에 빠져 있는 가운데 1959년 여름부터 남부에서의 홍수와 북부에서의 한발, 병충해가 잇따라 발생하여, 해방 후 최대의 재해를 입고 만다.)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 기아상태가 발생하고 인민이 죽어가는 사태가 발생하고 만다.이처럼 상황이 악화되자 용기를 가지고 대약진과 인민공사에서의 ‘프티부르주아적 열광주의’의 오류를 비판한 팽덕회는 마오쩌둥에 의해 숙청당하고 만다.) 계속된 대약진 운동의 속행으로 인민 2천만명이 식량부족으로 사망하였으며, 6억6천만명의 전 중국인을 고난과 희생으로 몰아넣었다. 결국 마오쩌둥도 1960년 대약진 정책을 포기, 경제조정정책을 이행하면서 대약진 운동의 끝을 보게 된다.대약진운동의 의미와 문화대혁명과의 관계대약진 운동은 비록 결과적으로 많은 희생을 낳고 실패를 한 운동이었으나, 당시 전 중국인구인 6억 6천만명의 참여를 이끌어난 최대의 정치경제운동이라 할 수 있다.) 과도한 점이나 미숙한 부분이 많았지만 인류의 이상을 추구하고, 보편적인 의의를 가진 개발전략의 실험이었다는 평가도 있다.이러한 대약진운동은 문화대혁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마오쩌둥은 전처럼 앞에 나서서 강력한 권력을 보여주지 않고 일선에서 영향을 주며 소극적인 활동을 하고 있었다. 또한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야기된 경제침체를 극복하기 위한 정책을 추진하던 동료들의 혁명에 대한 열정이 감소된 것이 아닌가에 대한 의구심과 함께 자신의 영향력이줄어든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중국이 전통적으로 정예주의가 강한 사회인 만큼 새로운 도시사회계층이 형성되며 농민의 입지가 축소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었다.)이는 마오쩌둥이 문화대혁명을 추진하려 마음 먹게된 강력한 계기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즉 대약진운동의 실패가 문화대혁명으로 이어지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문화대혁명의 전개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대약진 운동에서 쓰라린 실패를 맛본 마오쩌둥이 자신의 권력을 지킴과 동시에 엘리트 집단의 출현을 막고 혁명의 주력인 농민들을 혁명의 주된 수혜자로 해야 한다는 생각을 문화대혁명을 통해 드러내게 된다.마오쩌둥은 엘리트 집단의 또 하나의 지배계급을 형성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이들 내부에서 발생할 수 있는 개인적 특권과 부패현상을 두고 말한다면 마오쩌둥의 우려가 단순한 우려에 그칠 수 만은 없었다. 그러므로 마오쩌둥은 이러한 엘리트 집단의 출현이 곧 사회주의의 퇴조와 수정주의의 출현, 그리고 돈, 기술과 특권층에 기반을 둔 사회로 후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기에 대중노선에 바탕을 두고서 정치의식을 최우선으로 삼고 집단적인 결정을 공고히 해야만 했다.그럼 대중노선의 실현 주체를 누구로 선택할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인데, 마오쩌둥은 자신의 주변에서 지속적으로 혁명을 같이 해온 동지들보다 젊은이들이 정치투쟁을 통해 성장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바로 이 젊은이들에게 혁명을 이어가게 해야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을 혁명의 길로 나서게 하는 충격적이고 혁명적인 방법이 필요했다.이것이 바로 홍위병의 선택이었다. 마오쩌둥은 1949년 이후에 형성되어온 관료계급을 무시하고 홍위병이라는 젊은 세대들에게 모든 기득권을 무시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라고 호소하였다.또한 마오쩌둥은 문화대혁명을 일으키면서 제거해야한 타도의 대상을 분명히 설정했다 그 대상은 단지 마오쩌둥과 권력투쟁을 일으킨 대상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50년대를 거치면서 중국이 어떤 유형의 사회를 선택할 것인가에 관한 기본적인 결을 두고 일어난 분쟁의 대상이라고 볼 수 있다고 할 수 있다.)결국 1966년 4월 당시 베이징 시장이었던 펑전과 당 선전부장이었던 루띵이의 권력이 박탈되자 결국 이 비판의 칼끝이 당시 당 주석이었던 류사오치를 향하고 있었음이 분명해졌다. 마오쩌둥은 베이징에서 발생한 비판운동을 정부와 당 조직을 넘어선 것으로 보고 기층으로부터 출발해야하고 일부 지도적 간부를 철저히 비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마오쩌둥이 결성하였던 홍위병은 문화대혁명의 약탈과 파괴의 행위를 도맡아했다. 당의 공식기구에서는 과격해지는 홍위병들의 행위를 일정 수위까지 통제하기 위해서 문화대혁명 공작조를 결성하여 각 기관에 파견하였지만 그들을 통제하기가 너무나도 어려웠다.)조직적인 체계를 갖지 못한 탓으로 홍위병의 내부는 여러 갈래의 분파현상을 보였으며, 그들 사이에서 극심한 대립투쟁을 보이면서 혼란으로 치닫게 되었다. 심지어는 홍위병과 당의 공식기구에서 조직한 ‘적위대’ 사이에 무력충돌을 빚는 사태까지 일어나게 되었다. 그 와중에서 모든 관리들은 직책에서 쫓겨났고, 그들의 직위는 행정적으로 아무런 경험이 없는 청년층으로 대체되었으며 그들 역시 여러분파로 나뉘어져 서로 충돌을 하기 시작했다.마오쩌둥이 구상했던 아래로부터의 혁명은 당과 행정기구의 파괴에 성공했지만 그것을 효과적으로 수습하고 행정과 정치를 대신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리고 마오쩌둥 역시 그들의 무분별한 행위를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결국 마오쩌둥은 홍위병을 하방시키고 마오쩌둥은 그들을 대신할 혁명조반파를 결성하였지만 그들 역시 잔인한 약탈행위와 무분별항 행위를 일삼기는 마찬가지였다. 다시 모든 혁명위원회를 인민해방군에 의해 장악되도록 하였으며, 그리하여 마오쩌둥 한 사람과 그를 충실하게 보좌하는 린빠오, 그리고 린빠오가 장악하고 있는 인민해방군에 의해 전국은 통제되었다. 이러한 통제의 정점은 1969년 4월에 열린 9전대회였다. 이 9전대회에서는 새로운 당 규약을 채택하여, 마오쩌둥 사상과 계급투쟁을 강조하고 당원자격은 출신계급에 따라 한되었으며, 당 및 행정기구의 대부분이 군인들에 의해 장악되었다.9전대회에서는 린빠오를 마오쩌둥의 계승자로 명문화 하기에 이르나, 71년 9월 린빠오는 반혁명무장쿠데타를 일으켜서 마오쩌둥을 암살하고 따로 중앙을 만들려고 하다 음모가 실패하자 소련으로 가다가 죽고만다. 1976년 쩌우언라이가 사망하자 공석인 국무원총리에 화궈펑이 대리로 임명되자 실무파의 실용주의 노선을 공격하는 문혁파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문혁파의 공격에 대한 실무파롸 그 지지세력의 반발과 저력은 마침내 천안문사태로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9월 마오쩌둥이 사망하자 쟝칭, 장춘챠오, 왕홍원, 야오윈웬 등 4인방이 제거되는 것으로 문화대혁명은 종결되었다.문화대혁명의 의미와 교훈문화대혁명은 마르크스주의에서 보통 말하는 문화혁명이 아니다. 그 내용은 근본적으로 교육과 과학, 문화 사업을 발전시키려는 것도 아니었으며, 문맹을 퇴치하고 인민의 지식 수준을 높이거나 사회주의 문명 국가를 건설한다는 것도 아니었다. 그와는 반대로 그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과정이 문화를 파괴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수많은 전문가, 학자들은 ‘자본가 계급의 반동적인 권위’로 몰려 타도되고, 지식인은 여러 가지 오명을 얻었다.)또한 박해받은 간부와 교사는 14만 2000여명이나 되며, 수많은 저명한 전문가와 교수들이 박해를 받거나 죽었다.그리고 문화대혁명은 마르크스주의에서 말하는 정치 혁명도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에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정치혁명은 일정한 경제적 기초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화대혁명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중국은 생산 수단 사유제를 소멸시켰으며, 사회주의적 공유제를 건립하고 사회주의의 노동에 따른 분배원칙을 실행하였다. 당시의 중국은 무산계급의 독재였으며, 중국의 의식 형태에서는 마르크스주의가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정치 혁명을 이용한 무슨 탈권이니 상부구조의 개혁이니 하는 것들은 필요가 없었다. 문화대혁명에는 경제적 기초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기초도 없다.)
중국문화과 20060361 정지웅-주원장에 대해 인물을 평하고 역사적 위상을 가늠하여 정리하시오-몽고민족의 정복왕조 원나라 말기는 여느 왕조와 다를바없이 백성의 극심한 빈곤, 부패한관료들의 착취와 이러한 문제점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무능한 정부의 모습까지 망조의 모습을 너무나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또한 몽고인의 정복왕조였기 때문에 기존의 한족과 발생되는 문제들 역시 원 말기에 주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난세에 영웅이 등장하는 기존의 역사에서 볼 수 있듯이 주원장 역시 원나라 말기의 혼란스러운 사회배경 속에서 등장하게 된다.주원장이란 인물에 대해 생각을 하던 중에 주원장이 한나라를 세운 유방과 비슷한 점이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주원장이란 인물을 한고조와 비교하여 평하고, 한나라와 명나라, 한고조와 주원장을 비교하면서 역사적 위상을 살펴보기로 하겠다.한고조와 주원장 두 인물 모두 미천하고 보잘것 없는 출신이라는 것이 맨 처음으로 알 수 있는 공통점이다. 한고조는 부모도 알지 못하며 자기 이름조차도 잘 모르던 미천한 출신이며 주원장 역시 원말의 혼란스러운 사회배경 속에서 가난한 농민의 아들이었을 뿐이었다.이러한 두 인물이 황제의 자리에까지 오르는 것은 기존의 계급과 인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먼저 주원장이 명나라를 건국하고 황제에 오르기까지에는 남들과는 다른 배경과 과정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첫 번째는 인재등용과 경쟁자와 비교되는 인화(人和)라고 할 수 있다. 주원장은 자신의 무지함을 깨닫고 그것을 보완할 수 있도록 뛰어난 인재를 등용하고 각각의 요소에 배치하여 효율적인 성과를 거두었고,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사람과 화합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군주가 될 수 있는 덕망 또한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대표적으로 진우량과의 최후의 결전을 치룬 뒤에 주원장이 군사회의에서 장수들에게 ‘천시가 지리보다 못하고 지리는 인화보다 못하다’)라는 주원장의 말에서 인화를 중요시 한 주원장의 모습을 알 수 있다. 이와 비교하여 한고조 역시 한신이라는 뛰어난 인재와 함께 한나라를 건국하는 모습에서 주원장과 비슷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할 수 있다.두 번째는 과감한 전술의 시행이라고 할 수 있다. 주원장은 경쟁자 진우량과의 전투에서 군대를 나누어 배치하고 파양호에서 치른 수군전투에서 인력과 장비면에서 열세를 보임에도 불구하고 안정적인 군수물자의 보급과 강에서 전투의 이점을 살린 소선(小船)의 활용으로 진우량을 물리침으로서 원나라와의 전투 기반을 구축하고 나아가 명제국의 건국을 위한 기반에도 큰 이점을 얻게 된다. 한고조 역시 한신을 주축으로 항우를 공격할 때 십면매복(十面埋伏)으로 사면초가(四面楚歌)에 이르게 한 전술로 한 제국의 건국에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게 된다.세 번째는 그 당시의 시대적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주원장이 명을 건국하기 전의 원나라 말기의 사회는 실로 엄청난 혼란과 부패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원나라의 몽고족 우대정치는 백성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한족의 반항심을 한없이 키웠다. 군사, 관직에서는 한족은 말직에만 임명하고 군인임에도 불구하고 허가받지 않으면 칼의 소지조차 불허하였다.그리고 법에 따른 처벌에 있어서도 몽고인과 한족의 차별을 두어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는데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부패한 관료들의 끝없는 횡포와 착취로 인해 백성들은 피폐해져 갔으며, 비밀종교조직(미륵교, 대명교, 백련사)을 주축으로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하지만 무능한 정부와 관료의 부패 속에서 원 정부는 이를 완벽하게 진압하지 못함으로 후에 주원장이 세력을 키워 명나라를 건국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고 할 수 있다.유방의 한나라 건국의 시대적 배경 역시 진나라 말기 엄격한 법치로 인한 백성들의 거부감과 노역으로 인한 백성들의 반발, 환관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정치로 인하여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게 되면서 유방이 한나라를 건국하는 배경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위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주원장과 한고조의 건국과정과 배경 역시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이러한 건국과정과 배경을 통해 주원장과 한고조는 각각 명 제국과 한 제국을 건국하는데, 건국 후에도 나라의 기틀을 확립하기위한 여러 정책을 펼치고 제도를 정비하는데 힘을 쓴다.주원장은 명 제국을 건설한 뒤에 가장 먼저 20년간의 전란으로 만신창이가 된 국토를 정비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가난한 농가의 출신인 주원장은 유가에서 주장하는 ‘백성은 물과 같고 군주는 배와 같아서 물은 배를 실을 수도 있지만 전복시킬 수도 있다.’) 라는 명언을 인용하여 군주와 백성의 관계를 깊이 인식하고 초기에 조세를 경감하는 정책을 시행하고흉년에는 백성을 구제하기 위해 조세를 대폭 인하하였다. 그리고 부호들의 토지 점유를 막고 한고조처럼 부호를 수도로 이주시킴으로 수도를 튼튼히 하는 동시에 통제함으로서 농민의 고충을 덜어주었다. 이러한 농민을 살피고 민생을 돌보는 정책을 실시함으로 나라의 근간을 세우로 명 제국의 번영에 기반을 마련하였다.또한 주원장은 새롭게 법률제도를 마련하는 동시에 엄격한 관리감찰제도를 시행하였다. 그리고 행정체계를 개혁하였으며 국경의 방어에도 힘썼다. 새로운 법률제도는 대명율(大明律)이라고 하여 당률을 기본 틀로 하여 엄격한 법률제도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대명령을 통해 각 지방의 주, 부, 현의 관리는 3년 임기가 끝나고 심사를 받도록 하여 실적을 점검하였는데 이를 고만(考滿)이라고 하였다. 고만 외에도 고찰(考察)이라는 제도를 통해서 관리의 진급과 관리의 파면에 중점을 두어 관리심사제도로 사용하였다.)그리고 승상과 일반행정을 돌보는 중서성을 폐지하고 환관을 두어 개인적 측근과 통치를 함으로서 왕권강화와 중앙집권적 국가를 이루는데 노력하였다. 또한 신하 또는 외척, 친척들을 변방으로 보내어 국경을 튼튼히 하여 훗날 문제가 될 수 있는 씨앗을 제거하고 왕권강화에도 노력을 기울였다.또한 주원장은 명 제국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인식시키기 위해서 몽고색채를 없애는 일에도 힘을 썼다. 몽고식의 복장, 변발, 성씨의 사용, 언어를 금지하였다. 하지만 원나라의 관제 등 필요한 부분은 이어받아 사용하였다.마지막으로 주원장은 지식인을 양성하는 교육에도 힘써 학교제도를 정비하고 국자감(國子監)을 설치하였다. 지방의 각각 행정단위마다 부학(府學), 주학(州學), 현학(縣學)을 설치하였으며 과거제도의 정비와 실시를 통하여 관료선발에 힘썼다.이렇듯 주원장은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데 제도, 정치, 민생 등 여러 방면에서 힘을 쓰면서 국가의 기틀을 확립함으로서 300년간의 명 제국의 통치에 기반을 닦았다.한의 고조 역시 건국 후 나라의 기틀을 확립하는데 주원장과 비슷하게 중앙집권화 된 정치체제의 확립에 힘썼으며, 민생안정, 국경의 문제가 되는 흉노족을 토벌하는데 노력을 기울이면서 제국의 기반을 닦았다.주원장은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한 나라를 건국하는데 충분한 역량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을 현명하게 적시적소에 사용할 줄 알았고, 뛰어난 군주로 평가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하지만 한 제국을 건설하여 중국 역사에 큰 획을 그은 한 고조는 후세에 무난한 평가와 함께 추앙받고 있는 반면에 주원장의 인물의 평가와 역사적 위상은 조금은 학자 또는 민간의 평가가 양극화를 보이고 있다.그 이유는 주원장의 왕조를 유지하기 위한 극단적인 숙청, 제거, 음모 등이 엇갈린 평가를 보이는 까닭이라고 생각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호유용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주원장은 호유용이 승상의 지위를 이용하여 당파를 만들고 사사로운 감정을 개입하여 인사를 결정하였으며 천자를 음해하려는 음로를 꾸몄다고 하여 죽여버린다. 이 사건을 통해 정확한 증거도 없이 호유용과 연관되어 무려 15.000명이라는 사람이 사형당한다. 이러한 주원장의 포악한 성격 때문에 문무백관들이 아침에 조회에 나간 후에 저녁에 무사히 퇴청하면 오늘 하루도 무사히 지냈다며 축하까지 하는 모습에서 비인간적인 모습을 여지없이 볼 수 있다. 이러한 성격 탓에 주원장전의 책 표지에 나와있는 초상화처럼 여느 황제와는 달리 너무나도 다른 모습의 그림을 보이는 것 같다. 이러한 점들 때문에 주원장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 남성과 여성의 지위적 차이로 인한 문제점(남성, 여성의 사회적 고정관념) -중국문화과 20060361 정지웅어느 날 어머니의 편의점에서 일을 하다가 야간 파트타이머의 채용공고를 쓰게 되었다. 그런데 파트타이머의 조건에 남자만 지원이 가능하며 군대를 다녀온 사람은 우대를 해준다고 쓰고 있는 나의 모습에서 문득 의문점이 들었다. 왜 밤에는 남자만 일을 할 수 있는지 그리고 군대를 다녀온 사람은 왜 우대를 해주는지에 대해서 의문점이 들었다. 그리고 이러한 조건들이 성차별적인 조건이 아닐까라는 생각까지 해보게 되었다.여자도 분명 밤에 일을 할 수가 있으며, 군대를 다녀오지 않는 여자도 우대를 받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차별적인 요소가 분명 사회 곳곳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남성과 여성을 하나의 지위로 생각하고 이러한 차이로 발생하는 문제점, 즉 사회적 고정관념을 신체적 차이와 정서적 차이, 사회적 차이 세가지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본 뒤에 이러한 사회적 고정관념으로 일어나는 문제점과 해결책, 그리고 현재 변화하고 있는 사회적 풍토를 알아보도록 하겠다.우선 남성과 여성의 가장 큰 차이점은 신체적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신체적 차이는 즉 생물학적 차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남성과 여성으로 나누어 구분지을 수 있다. 생물학적 성은 여성의 난자와 남성의 정자가 만나 수정란을 이루는 순간에 결정되고, 태아가 자궁에서 성장함에 따라서 완성된다. 그리고 성을 결정하는 염색체가 XX이면 여자로 XY이면 남자로 태어난다.) 이렇게 남성과 여성으로 생물학적으로 구분지어져 출생한 후에는 성 호르몬의 분비에 따라 신체적 차이가 특징적으로 나타나는데 남성은 목소리가 굵어지고 근육이 발달하고 체모가 늘어나고, 이에 반해 여성은 가슴이 발달하고 월경을 시작하며 주로 체모가 겨드랑이와 음부에만 집중적으로 발달한다. 또한 몸무게와 신장, 완력, 근력 등에서 확연하게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보여준다.이러한 남성과 여성의 신체적 차이에 대한 고정관념이 문제점을 일으키는데 단순하게 신체적 차이로만 인해 문제가 발생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신체적 차이와 다른 요인이 결합하여 문제가 발생한다고 생각하는데, 그 다른 요인이 사회적 영향이라고 생각한다. 남성과 여성은 출생 후에 전통적 문화양식이나 부모의 양육 태도에 따른 성에 대한 정체감을 형성하는데, 대부분의 남성은 터프하고 용감하고 튼튼한 남성스러움을, 여성은 연약하고 조신하고 의존적인 여성스러움을 요구받았다.위와 같은 차이로 인하여 신체적인 차별로 인한 문제점이 발생하는데 남성은 여성보다 몸무게와 신장, 근력 등의 신체적 조건이 우월하기 때문에 남성은 좀 더 위험한 직업에 종사해도 가능하다고 여긴다.) 그래서 군대에 가거나, 소방작업, 중장비 등 기계를 다루는 직업, 야간에 주로 일하는 파트타이머, 경비원 등 직업적인 측면에서 여성이 소외되는 부분이 많았다. 반면에 간호사, 스튜어디스 등 세심함을 필요로 하는 직종에서는 대부분 여성이 종사하는 등 기본적인 신체적 차이로 인한 직업의 차별이 문제가 되고 있다. 물론 요즘은 이러한 인식이 점차 파괴되어 여군이나 여자 소방원, 남자 간호사, 스튜어드 등의 직업이 폭넓어 졌으나 아직까지는 신체적 차이에 인한 직종 차별이 만연히 남아있다고 할 수 있다.또 스피드, 힘, 근력을 특히 필요로 하는 스포츠는 전통적으로 남성의 영역으로서 인식되었다.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남성은 몸무게, 신장, 근력 등의 신체적 조건이 여성이 비해 좋기 때문에 스포츠는 남성의 전유물이라고 인식되어 예전에는 여성의 경주는 올림픽에 없었으며, 중장거리의 경주는 여자는 힘이 들어 할 수 없다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는 지속적인 훈련을 통해 신체적 능력이 향상될 수 있는 가능성을 무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예로 중장거리에서 세계기록의 남성과 여성간의 차이는 30년에 걸쳐 점점 좁혀지고 있다는 것이다.이렇듯 남성과 여성간의 신체적, 생물학적 차이로 직업의 선택이나 스포츠의 활동에서 문제점을 나타내고 있다. 하지만 남성과 여성의 신체적 차이는 단순한 생물학적인 차이일 뿐이며, 사회적 인식의 개선이 있다면 이러한 차이는 얼마든지 좁혀질 수 있으며 해결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한다.두 번째로 남성과 여성의 정서적 차이로 인한 문제점이 있는데, 이는 남성과 여성의 성격에 대한 고정관념이 일으키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지어져 태어난 뒤부터 줄곧 획일화된 고정관념 속에서 자라왔다고 할 수 있다. ‘남자는 어떤 성격을 가져야 한다, 여자는 어떤 성격을 가져야 한다.’ 라는 고정관념에서 자라왔기 때문에 서로 다른 정서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이러한 고정관념으로 인해 발생하는 가장 대표적인 사회적 문제가 이혼이다. 이혼하는 부부의 가장 큰 이유가 남성, 여성간의 성격차이인데, 남성은 여성에게 순종과 인정, 신뢰, 격려를 받고 싶어하는 반면에 여자는 관심과 이해, 존중, 확신을 받고 싶어한다. 위와 같은 차이로 인하여 부부간의 사이가 멀어지고 이혼하는 경우가 많이 발생한다. 늘어나는 이혼 역시 사회적 문제이지만 이혼으로 인하여 그 다음에 발생하는 문제들 역시 간과할 수 없는 사회적 문제이기 때문에 결코 쉽게 볼 수 없는 문제이다.지금까지 살펴본 남성과 여성의 신체적 차이로 인한 문제점과 정서적 차이로 인한 문제점, 두가지 모두 궁극적으로 남성과 여성이 성장하면서 겪은 사회화와 사회적 영향 등 성역할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마지막으로 살펴볼 남성과 여성의 사회적 차이로 인한 문제점은 위에서 언급한 문제들과 그 원인에 대한 포괄적인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여성과 남성은 애초에 다르므로, 그 사는 모습도 다른 것이 당연하다고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다. 한 사회에서 많은 구성원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이러한 생각들을 일컬어 심리학에서는 ‘성역할 고정관념’이라고 한다. 우리가 태어나서 자라는 과정에서 사회는 우리가 고정관념에 따라 자신에게 적합한 성역할을 배우고 그 테두리 안에서 살아 갈 것을 기대하고 격려한다.)이러한 사회화를 통해서 남성은 씩씩하고 권위적인 남성스러움을, 다정다감하고 순종적인 여성스러움을 강요받은 채 자라왔다.남성과 여성으로 구분지어지는 획일화되고 고정적인 사회화는 우리에게 성역할을 강요하는데 이것이 바로 남성과 여성의 사회적 차이로 인한 문제점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우리사회는 위와 같은 사회화를 통해 자라왔기 때문에 남성과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지니고 있고 조용하고 순종적인 남성, 씩씩하고 용감한 여성은 비주류로 취급하며 사회에서 도태되게 만들고 있다.남성과 여성의 사회적 고정관념 차이로 인한 문제점 중 하나가 바로 트랜스젠더 문제라고 생각한다. 성전환 수술을 한 트랜스 젠더의 경우 주로 남자가 여성으로 성을 바꾸는 것이 많은데, 이렇게 성전환 수술을 한 트랜스 젠더의 대부분이 자신이 그간 받아온 사회화와 자신의 정체성 혼란을 겪다가 결국에는 성전환을 택한다. 남성은 남성스러워야 하고 여성은 여성스러워야 한다는 사회적 고정관념이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트랜스젠더처럼 자신의 성을 바꾼다고 해서 또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는 이들을 성적소수자로 구분지어 남들과 다르다고 하여 따가운 눈초리로 바라보기 때문에 이들은 결국 살아가기 위해 성매매 업종에 종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얼마전에는 자신의 여자친구가 트랜스젠더였다는 사실을 알고 남자친구가 살해를 한 사건도 있었는데 결국 이 사건도 남성과 여성에 대한 사회적 고정관념이 일으킨 결과라고 할 수 있다.남성과 여성에 대한 사회적 고정관념이 위와 같은 사회적 문제를 발생시키고 있으며 또한 직업의 선택이나 특수한 상황에 부딪혔을 때도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두어 문제가 되고 있다.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남성과 여성에 대한 신체적, 정서적, 사회적 차이가 여러 가지 사회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남성과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은 예전부터 뿌리깊게 내려온 것이기 때문에 한번에 이것을 고치기에는 쉽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고정관념은 뿌리깊은 유교적 문화를 바탕으로 한 우리나라에는 더더욱 쉽게 고쳐질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요즘 세계적 문물이 교류되고 넘나드는 시대에서 우리사회는 전에는 찾아볼 수 없을만큼 급속한 변화를 겪고 있다. 이렇게 변화하는 사회의 요구에 따라 남성과 여성의 사회적 고정관념 역시 급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우리 사회는 아직까지 급속도로 변화하는 고정관념에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데, 남성과 여성의 사회적 고정관념을 해결하기 위해서 가져야 할 우리의 시각은 양성성이라고 생각한다.
-젓가락을 통해 살펴본 동아시아국가(중국, 한국, 일본)의 문화와 교류-중국문화과 20060361 정지웅우선 동아시아 문화권이라는 범주 안에서 생각해 보았을 때 공통점은 무수히도 많았다. 그리고 동아시아 문화권에 속하는 중국, 한국, 일본 이 3국간의 문화적 공통점은 더 많았는데크게 몇가지를 살펴보자면 한자를 사용하고 쌀을 주식으로 하고 유교의 영향을 받은 유교권의 나라이며 불교를 믿는 것 또한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다.이 중 나에게 가장 흥미롭게 다가온 점은 모두 젓가락을 사용하는 문화라는 것이었다. 중국, 한국, 일본 뿐 아니라 동아시아권의 국가에서는 거의 대부분 젓가락을 사용하며 그 모양이나 재질, 사용방법은 조금씩 다르지만 젓가락 사용이라는 하나의 공통점을 또 가지고 있었다.이러한 젓가락의 기원과 중국, 한국, 일본 3국의 젓가락의 역사, 사용이유, 특징, 젓가락 문화의 전파 등을 통해서 동아시아간의 교류를 살펴보고, 젓가락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을 통해흥미로운 부분이나 역사적인 내용도 알아보자.젓가락의 역사를 가장 먼저 살펴보자면 언제부터 사용하였는지 아직 정확하지 않지만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은나라의 주왕이 상아로 된 젓가락을 사용하여 나라를 망하게 하였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중국에서 가장 먼저 사용되었음을 대략적으로 알 수 있으며 춘추전국시대의 기록에도 있는 것으로 보아 젓가락은 고대부터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젓가락은 공주의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것이 최초이다. )한국에서는 젓가락이 벼농사 전래 후에 보편화 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통설이므로 중국보다는 짧은 젓가락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일본의 젓가락은 우리나라의 젓가락 역사보다 더 짧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의 젓가락은 어디에서 기원하였는지 확실한 근거가 없지만 중국에서 전해졌다고 한다. 당나라에 사신으로 보내졌던 소야매자가 중국에서 가지고 들어왔다는 설이 지금까지 가장 유력한 이야기라고 한다. 젓가락은 나라시대부터 본격화되어 궁정에서 먼저 사용하였고 헤이안 시대에 널리 퍼졌다고 한다.위와 같이 젓가락의 역사를 조사하다 보니 왜 젓가락을 사용하게 되었는지 의문이 들었는데가장 큰 이유는 식문화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동아시아의 공통적 문화인 쌀을 주식으로 하는 식문화가 젓가락을 사용하게 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서양에서는 빵을 주식으로 하였기 때문에 포크가 나오기 전까지는 손으로 식사를 하는 수식 문화였던 것에 반해 동아시아는 음식을 대부분 조리하는 형태였기 때문에 음식을 건지거나 뜨거운 음식을 먹기 위해 젓가락의 사용이 필수적이었다.이렇듯 젓가락을 사용함에 있어서 공통적인 부분이 있었지만 나라별로 각각의 특징이 다르게 있었다. 먼저 중국의 젓가락 특징에 대해서 살펴보면 중국의 젓가락은 우선 나무재질로 된 젓가락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그 길이가 길고 잡는 부위가 비교적 뭉툭하다. 중국의 음식 조리 특성상 뜨거운 기름을 사용한 경우가 많고 식탁 가운데에 음식을 두고 덜어먹는 문화가 발달되었기 때문에 젓가락 역시 이를 위해 길이가 길어졌다고 생각한다.한국의 젓가락은 주로 쇠로 된 젓가락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 길이는 중국보다는 짧고 일본에 비해서는 약간은 긴 중간정도의 길이이다. 쇠로 된 젓가락을 주로 사용하는 이유는 아마도 국 문화가 발달되어 있기 때문에 나무로 된 젓가락을 사용하였을 경우 위생상 문제가 발생할 수 있어 쇠로 된 젓가락을 사용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금속을 다루는 문화가 발전하였기 때문에 자연스레 쇠를 젓가락의 재질로 사용하였다고 생각한다.일본의 젓가락은 중국과 같이 나무재질의 젓가락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그 길이는 중국, 한국, 일본 3국 중에 가장 짧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섬나라의 특성상 생선 문화가 발달하였기 때문에 긴 젓가락에 비해 짧은 젓가락이 사용에 유용하였다. 이로 인해 젓가락의 길이가 짧다고 할 수 있으며 그릇을 손에 들고 먹는 식문화로 인해 젓가락이 길 경우 식사함에 있어서 불편을 초래할 수 있어 젓가락의 길이가 짧다고 할 수 있다.중국과 한국, 일본은 젓가락의 교류가 역사상 확연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유물의 발견과 역사자료의 추측을 통해서 교류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이러한 교류에 대해서 알아보면 중국 한나라 시기의 청동젓가락의 출토와 백제 무령왕릉의 청동젓가락 출토는 비록 시대적 차이는 있을 수 있으나 중국에서 시작된 젓가락 문화가 한국으로 넘어오게 되었고 비교적 금속다루는 기술이 뛰어난 한국에서 청동젓가락을 쓰게 되지 않았을까 하고 추측해보았다. 그리고 중국에서 출토된 청동젓가락과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청동젓가락의 길이와 모양이 일치하는 것 역시 문화교류의 증거라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한국의 젓가락은 중국과는 달리 삼국시대 이후부터 계속 청동 젓가락을 사용해 왔었는데 반해 중국에서는 청동 젓가락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진장기(陣藏器)의 본초습유(本草拾遺)에서 알 수 있듯이 동기는 독이 있어서 악창과 종기를 일으키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고려시대 한국의 청동젓가락이 북경 북서쪽 장가구에서 발견된 거란 귀족 장공유의 묘에서 출토된다. 중국에서 사용하지 않던 청동 젓가락이 고려시대 청동젓가락과 일치하는 모습으로 출토된 것은 고려와 거란이 교류를 하고 있었음을 확연히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또한 일본의 젓가락 사용 역시 쇼토쿠 태자가 수용했다는 학설, 당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소야매자가 들여왔다는 학설 등 여러 학설이 존재하지만 시기상으로 보았을 때 당나라 시기에 중국으로부터 받아들여진 것을 알 수 있다.이렇듯 중국에서 한국으로 또한 중국에서 일본으로 젓가락 문화가 전파 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젓가락 뿐만 아니라 중국, 한국, 일본 동아시아 3국간에는 여러 가지 문화의 교류가 있는데, 젓가락과 연관된 쇼토쿠 태자는 고구려, 백제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여 일본에 불교가 중흥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는데 이 역시 동아시아간의 교류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불교의 전파가 일본의 젓가락 문화에도 일조 하였다고 생각하는 데 그 이유는 섬나라 때문이기도 하지만 불교의 살생을 금하는 규율이 육식위주의 식문화보다 생선위주의 식문화를 유도하였고, 주된 생선을 먹기 위해서 일본 고유의 특징적인 젓가락이 생겼다고 생각한다.지금까지 동아시아에서 젓가락의 역사와 특징, 사용이유, 젓가락 문화의 전파, 교류 등을 살펴보았다. 젓가락은 흥미롭게도 동아시아 국가의 역사적인 사실에도 간간히 등장하고 있는데, 중국 은나라의 주왕이 상아로 된 젓가락을 사용하였다는 것은 그만큼 사소한 먹는 도구에까지 상아를 사용함으로써 사치와 향락을 보여주었으며 이로 인해 나라가 멸망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일본에서는 젓가락을 처음에는 귀족들만이 향유하는 문화로 발전시킴으로서 일반 서민과는 다른 귀족문화중의 하나로 젓가락을 사용하였으며 거란의 귀족 장공유의 무덤에서 젓가락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거란 역시 귀족들이 우선적으로 젓가락을 사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동아시아 국가간의 교류를 통해 깊이 스며든 젓가락 문화는 동아시아 국가에 미친 영향이 적지 않다고 생각했다. 우선 국가의 흥망을 표현하는데 이용되기도 하였으며 젓가락 수용 초반에는 대표적인 귀족문화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젓가락을 통해 동아시아 국가들의 식문화가 다양하게 발달할 수 있었으며, 주식이 되는 쌀의 품종에 따라 젓가락의 모양이 변화하고 쓰임이 달라지는 등의 변화는 동아시아 국가들의 문화를 세세히 알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 5.4운동과 신문화운동에 대하여-중국문화과 20060361 정지웅청나라 말기 이래 중국경제는 혼란과 개혁정책의 부진, 서양열강의 침투로 인해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가운데에서도 도시지역은 민간자본으로 인해 점차 성장하였는데 반해 농촌은 파탄에 이르렀고, 농촌인구가 도시로 유입되고 국내외 정치의 불안 등으로 중국사회는 엄청난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중화민국의 성립 이후 약 10여년은 정치 분야뿐만이 아니라 경제와 사회문화면에서 변화를 겪어가는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군벌정치와 제국주의의 침략은 중국인들의 민족의식과 자립정신을 한층 증대시키는 계기가 되었다.이러한 역사적 상황이 지식인에 대한 문화혁명이라 불리는 5.4 운동의 토대가 되었다. 이 운동의 핵심은 신문화운동에서 시작하여 민족운동으로 전개되었다는 것이며, 훗날 중국이 국가로서의 기틀을 잡아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이처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5.4 운동과 신문화 운동의 배경과 전개과정, 역사적 의의를 알아보면서 중국 근대사에서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와 그 특징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다.우선 5.4 운동의 배경과 특징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면 5.4 운동은 5.4 사건으로 인해 일어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5.4 사건의 직접적인 배경은 베르사이유 강화회의에서의 산동(山東)문제에서 기인하였다.) 중국인들은 세계 1차대전의 종결 이후 낙관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연합국의 승리가 전제·군국주의에 대한 민주주의의 승리이며 압제자들에 대한 노동자·평민의 진정한 승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파리에서 날아온 일본이 중국에서 독일의 권리를 인계받고, 상황이 더 악화될 것이라는 회의 소식은 중국인들에게 한없는 절망감을 안겨주었다. 또한 이러한 회의의 결과에 책임이 중국정부에 있다는 민중들의 생각은 5.4 사건의 배경이 되었다.이로 인하여 1919년 5월 4일 중국에서는 혁명운동이 발발한다. 먼저 북경대학의 학생들로부터 시작된 5.4 운동은 3000여 명이 천안문 광장에 집결하여 중국 정부의 대표가 ‘파리강화조약’에서 국가의 주권포기에 서명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이러한 항의 시위를 군벌정부로부터 진압을 받게 되자 민중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상해 및 주요도시의 노동자, 학생, 상인들 역시 민족위기를 호소하고 국산품 장려, 일본상품의 불매를 외치며 대규모 시위를 진행시켰다. 또한 민족사업과 외국기업의 증가로 인해 늘어난 노동자들이 5.4 운동에 한 몫을 하였다. 이렇게 사태가 심각해지자 군벌정부는 구속된 학생들을 석방하고 ‘파리강화조약’의 서명을 거절함으로서 5.4 운동은 성공을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5.4 운동은 중국 근대사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으며 새로운 단계를 그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첫째로 5.4 운동은 대규모적인 민중운동으로 추진되었다는 것이다. 학생, 노동자, 상인 등이 궐기하여 스스로 조직을 형성하고 연합하여 시위를 주도하고 파업을 일으키고 일본상품에 대한 불매운동을 추진하여 정부를 움직였다고 할 수 있다. 5.4 운동 속에서 ‘국권을 옹호하고 국민의 정치를 촉진하기 위한 조직’인 ‘전국각계연합회’가 탄생하였는데 이처럼 많은 민중이 광범위한 지역에서 단결하여 투쟁을 한 것은 지금까지 없었던 일이라고 할 수 있다.둘째로 5.4운동 과정에서 노동자 계급이 처음으로 정치무대에 등장한 것이다. 중국의 노동자는 제국주의 아래에서 가장 고통을 받는 계급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상해의 도시노동자들은 전례 없는 파업을 하였다.) 당시 중국에는 단합되고 효과적인 노동조직이 없었으므로 파업의 개시일은 여러 공장별로 각기 달랐지만.) 파업의 의미는 파업의 경제적 영향이 아니라 성격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노동자들의 임금인상이나 처우개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중국사에서 최초의 정치적·애국적 파업이었다.)이러한 부분에서 노동자 계급의 5,4 운동 참여는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마지막으로 5,4 운동을 거치면서 ‘반제국, 반봉건주의’라는 중국혁명의 과제를 확고하게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5.4 운동의 시작은 산동지방의 이권 회복과 친일파 관료의 파면, 파리강화조약의 서명 불가였지만 좀 더 나아가 5.4 운동을 하는 동안 제국주의적 구조와 군벌의 지배가 자신들을 얽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지금부터는 신문화 운동의 배경과 전개과정, 역사적 의의에 대해서 살펴보겠다.중국의 군벌세력이 확장되면서 그 중 원세개 치하의 중국정치는 극히 반동적으로 나타나 구 도덕, 구문화의 부활까지도 꿈꾸게 되었으며 복고풍조가 지배하는 정치적, 문화적 상황 속에서 중국의 지식인들은 절망하고 있었다. 또한 파리강화조약에 의한 일본의 21개조 요구는 새롭고 근본적인 개혁을 필요로 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신지식인들은 이러한 실태에 대해서 중국을 변혁시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 민중이 각성하고 자아를 확립하는 신중국의 건설이 효과적인 해결책이라 생각하고 이에 따른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이를 신문화 운동이라고 한다.신문화 운동의 추진 중심이 된 것은 신청년(新靑年)지와 북경대를 중심으로 집결된 신지식인들이었다. 상해에서 진독수(陣獨秀)에 의해 청년지가 발간되었으며 청년의 사상과 행동의 개혁을 촉구하였다. 신문화 운동의 전개과정과 내용은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서 살펴볼 수 있는데 신사상운동과 신문학운동으로 나누어서 볼 수 있다.신사상운동은 진독수(陣獨秀)에 의해 전개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봉건적인 정치형태와 도덕문화의 기초인 유교에 대한 비판의식을 보였으며, 서구사상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이 시기는 사실주의와 공리주의가 널리 성행하였다. 진독수는 동·서양간의 차이의 하나는 동양이 예법에 더 유의하는데 비해 서양은 실제문제에 더 기울인다고 주장하며, 중국 교육원칙의 하나로 사실주의의 채용을 강조하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국민통일의 필요와 국가의 중요성을 인식하던 시기에 진독수와 일부 신지식인들은 개인주의를 강조하였다. 그리고 진독수는 근대 문명에 기여한 프랑스에 대한 언급을 하면서 경제·사회적 평등이란 사회주의 사상을, 근대 유럽문화의 최신경향으로서 환영했다.)과학 면에서는 대개의 신지식층이 다윈의 진화론에 대해 알게 된다. 생활이 투쟁으로 유지되는 반면 상호부조는 인간성을 증진시키는 최선의 길이라고 하며 중국사회사상에 다윈의 진화론은 큰 영향을 주었다.또한 신지식인들은 당시의 봉건적 전제정치 상황이 유가 또는 공교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보아 2000년 중국 전제정치의 정신적 지주이며 인간해방을 병행하는 봉건적 정치, 도덕문화의 근간인 유가와 공자에 대한 비판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유교비판을 통해 유교윤리와 가족제도 하에서 억압 받아온 부녀의 인격을 회복하기 위한 여성해방이 시작되었다. 결국 신지식인들의 사상적 혁신운동이 전통을 타파하고 유교를 부정, 민주주의와 과학적 정신에 입각하여 서구식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개인주의를 가치를 표방하였다고 할 수 있다.신문학운동은 ‘호적’이라는 사람에 의해 널리 펼쳐졌는데 그는 혁명사상을 선전하였고 ‘문학개량추의’라는 논문에서 고전적 암시나 진부한 상투어대구의 사용을 반대하고 속학, 속어의 사용을 주장하였으며 백화가 살아있는 문학이 창조의 적합한 매체라고 하였다. 그리고 신개혁자들은 진취적으로 중국문어는 ‘민중이 이제는 말하지 않으니’ 죽은 언어라고 선언했다.)문학운동은 문자상의 전달 매체를 혁신하였다고 할 수 있으며, 중국인의 사고방식에 큰 변화를 주었다고 할 수 있다.그리고 신문학운동 역시 프랑스와 유럽 등 서양 국가의 영향을 받음으로서 사실주의 문학을 추구하였으며, 중국문학이 타락한 이유도 실질(質)보다 문체(文)를 지나치게 강조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또한 1918년은 신중국문학의 탄생의 해로 불릴 만큼 문학운동의 결실을 맺은 해라고 할 수 있다. 새로운 번역기법에 의한 근대 유럽문학의 소개, 새로운 수필방식, 근대 중국단편소설의 창시, 새 희곡운동 등 신문학운동의 확대로 인한 여러 변화가 이루어졌다. )이렇듯 신문화운동은 이렇듯 신지식인들의 주도하에 학술, 학문, 사상 등에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청나라의 대표적 학문이던 고증학은 서양의 실증주의적 학풍에 영향을 받아 새로운 방향을 찾게 되었다. 학문의 발달로 인하여 고전비판과 역사연구의 신천지를 개척하고 신비에 싸여 있던 중국의 고대 모습도 밝혀지게 되면서 중국의 실체를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유교를 부정하고 전통을 타파하는 사상적, 사회적 개혁을 통하여 신중국을 건설하고자 한 근대화 운동이었다는 점에서 신문화운동의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정신개조와 윤리혁명을 통한 개인의 독립과 개성의 해방을 추구함은 여성해방운동의 시발점을 낳았으며 민주주의 정신과 과학적, 비판적 사고의 제창이 청년학생층에 미친 영향은 5.4운동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는 것에 그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5.4 운동과 신문화운동의 배경과 전개과정, 역사적 의의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여기서는 5.4 운동과 신문화 운동을 나누어서 살펴보았지만 5.4 운동과 신문화운동에 대하여 조사하고 책들을 읽어보면서 과연 5.4 운동과 신문화운동을 나누어 살펴보는 것이 옳은 것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5.4 운동과 신문화 운동이 비록 주도하였던 계층이 다르기는 하지만 운동의 성격은 궁극적으로 구시대의 산물을 타파하고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임으로서 개혁을 하고 새로운 중국을 건설하여 제국주의를 몰아내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5.4 사건을 통하여 넓은 뜻의 5.4 운동을 이루었고 비록 일찍 시작되긴 하였지만 신문화운동 역시 5.4 운동을 통하여 지식인사회를 넘어서서 크게 확산된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