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이리의 교사론○ 글을 쓴다는 것- 특정 대상에 관해 조직적으로 사고하는 활동- 사고하는 주체가 사고의 대상을 깊이있게 이해하는 과정이나 사고 대상의 존재 이유에 대해 배우는 과정을 다 거친 이후에 뒤따르는 기계적인 행동이 아님- 생각을 마친 후나 생각하는 도중에 자동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 생각하는 동안에도 의식적이고 명백하게 글을 쓸 가능성을 자각한다는 의미이며, 글을 쓰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이전에 이미 생각했던 바를 생각하고 다시 생각한다는 의미○ 첫 번째 편지 - 세계 읽기와 글 읽기- 배움 없이는 결코 가르칠 수 없음-> 가르침과 배움이 가르치는 사람이 배우면서 이루어짐- 교사들은 겸손하고 개방적인 자세로 끊임없이 이전의 생각을 재고하고, 자기 입장을 기꺼이 수정할 용의가 있어야 함- 배운다는 것에는 반드시 공부하는 일이 포함되어 있음. 우리가 학습자이면서 교사로 참여하든 교사이면서 학습자로 참여하든 간에, 교육 일상에서 행해야 할 또 다른 어떤 것이 있음을 보여줌- 공부한다는 것은 교사의 입장에서는 가르치는 일을 포함하지만, 가르치기 전에 그리고 가르치면서 배우는 것도 포함- 비판적인 관점에서 볼 때, 상식적인 수준의 지식과 더 체계적이고 정교한 지식. 이 상반된 두 지식의 종합을 추구해야 함-> 이것이 공부하는 행위- 읽기는 읽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찾는 일이며 새로운 이해를 창조하는 일- 읽기를 가르친다는 것은 참여한다는 것만이 아니라, 이해하고 서로 의사소통하는 이른바 이해를 둘러싼 창조적인 경험- 읽기와 쓰기에서 꼭 필요한 연습은 일상생활에서 나타나는 감각적인 경험에서 시작해, 학교 언어에서 얻어지는 일반화로, 그리고 다시 만져볼 수 있을 만큼 구체적인 것으로 쉽게 옮겨가는 연습-> 이 연습을 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세계에 대해 이미 읽었던 바를 읽는 것”- 공부를 한다는 것은 밝히는 것. 대상을 좀더 정확하게 이해하는 일이며 다른 대상들과의 관계를 깨닫는 것- 이해란 읽고 공부하는 사람들이 이루어내고 향상시켜야 하는 것를 논의하는 일은 읽은 내용을 분명하게 하고 읽은 것에 대한 집단적 이해를 새롭게 창조함- 읽은 것에 대한 이해를 창조하는 과정은 저자의 의도가 핵심적으로 들어 있는 부분에 대해 다양한 관점으로 대화하면서 조금씩 이루어짐- 헌신적인 읽기를 하고 논의하고 비판하고, 개선하고, 재구성하는 것이 중요.- 비판적 읽기를 하면서 독자가 점차 텍스트의 의미를 직접 생산하는 사람이 되어감- 호기심과 비판적 숙고는 읽은 텍스트를 재진술하도록 하는 창조적 읽기에 꼭 필요-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호기심을 자극할 필요가 있음-> 텍스트의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함- 읽기 학습에서 교육자가 매우 중요- 읽기 학습은 쓰기 학습과 분리될 수 없으며, 따라서 학습자들은 읽기와 쓰기에 동시에 몰두해야 함.- 학습자들이 읽기와 쓰기 과업을 점점 더 비판적으로 실험할 때, 그들은 언어, 의사소통, 지식 생산이 구성되고 재구성되는 사회적 구상을 파악해야 함○ 세 번째 편지 - 교사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교사는 학생들의 탐구를 도울 수도 있고 좌절시킬 수도 있음- 교육실천을 하는 우리가 무능하거나 준비를 소홀히 하거나 무책임하다면 학생들의 실패를 초래할 수 있음- 책임감, 과학적인 준비, 가르치는 일에 흥미를 가지면, 또 부당함에 맞서는 투쟁에 진지하게 임하고 몸소 실천하면, 학습자들이 세계 속에서 강한 존재로 조금씩 바뀌어가도록 도울 수 있음- 교사의 과업이 존엄하고도 중요하다는 인식은 교사들의 투쟁에 필수적임- 교사의 과업이 갖는 사회적, 정치적 중요성을 절감하고 확신해야 할 필요가 있음.- 봉급이나 교사 과업의 중요성 같은 문제에 집중해야 함.- 식민주의 전통에 대항해서 싸우는 것이 중요함- 사회가 교사 전문성의 정당성을 더 빨리 인식할수록 그 사회는 더욱 더 우리 교사들을 지지할 것- 교사는 지역 선거든, 주 선거든, 연방선거든 간에, 또 투표 대상이 시장이든 상원의원이든, 장관이든, 대통령이든 간에 우리가 선출한 사람들의 활동을 항상 감시해야 함. 투표로 재신임하기 전불안정한 안정감은 겸손의 또 다른 표현- 권위주의는 때로 어린이와 학생들이 모든 제약, 규율, 혹은 권위에 대해서 무례하게 대드는 반항적인 태도를 취하게 하는 요인이 됨- 권위주의는 무관심, 맹종, 무비판적인 동조, 권위주의자의 담론에 대한 무저항, 자기 부정, 자유에 대한 두려움 등을 유발- 어떤 어린이가 지독한 권위주의를 그냥 견뎌냈다고 해서, 반드시 반항적이거나 순종적으로 될 것이라고 장담할 수도 없고, 다소 덜 권위주의적인 사람이 되지 못할 것이라고 확실할 수도 없음- 민주주의를 헛된 꿈으로 만들지 않으려면, 발달 중인 아이들과 학생들의 상태 그대로를 존중해줘야 함- 사랑이 없다면 교사들의 활동은 의미를 잃게 됨- 사랑이란 학생들을 향한 것일 뿐만 아니라 가르치는 과정을 향한 것- 교사는 지식을 양육하는 어머니가 아니라, 분명한 자기 입장을 가지고 교원노조에 참가해 적극적으로 저항활동을 하고, 그 때문에 처벌받더라도 여전히 학생들과 함께 헌신적으로 활동하는 사람- 사랑은 싸우고, 고발하고, 선언할 권리와 의무를 믿는 사람들의 치열한 사랑, 즉“무장된 사랑”으로 전환되어야 함. 진보적인 교사에게 꼭 필요하고, 우리 모두가 배워야할 것은 바로 이런 형태의 사랑- 용기는 내가 가진 두려움을 정복하는 일을 포함하기 때문에, 두려움을 포함- 두려움을 통제하고 교육할 필요에서 용기가 나오는 것- 두려움을 부정해서도 안 되고, 두려움에 스스로 굴복해서도 안됨. 대신 두려움을 통제해야 함. 이런 통제를 실행할 때, 우리에게 꼭 필요한 용기를 가질 수 있음- 관용이 없으면 어떤 진지한 교육활동도 불가능- 관용은 서로 다른 것에서 배우고 서로 다른 것을 존중하도록 가르침- 자신을 역사적 존재성과 일치되게 하고 자신의 민주적인 정치적 선택과도 합치시키는 것으로서 관용을 경험해야 함- 관용은 존중, 절제, 윤리를 요구함- 자신의 편견을 극복하지 않고서는 결코 관용적이 될 수 없음- 진보적인 교육자가 되려고 한다면, 결단력, 안정감, 인내와 조급함 사이의 긴장, 그리고 삶을 인 관찰을 해버릴 위험을 감수한다는 의미- 교사들은 온화함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음- 자기 존재를 부정당한 사람들에 대한 애정 어린 관심이 부족해서도 안됨-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은 가르치는 일을 아무 감정도 없는 하나의 거래로 이해함- 브라질 민중계급이 지독하게 멸시당함으로써 그들에게 가해진 고통에 가슴 아파한다면, 우리는 세계를 근본적으로 변화하기 위한 정치적 투쟁을 하게 될 것- 욕망은 기본조건이지 결코 충분조건은 아님-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배우는 것도 반드시 필요함- 이것이 전략적인 꿈에 맞는 전술을 가지고 정치적으로 싸우는 방법을 배우는 것을 의미- 우리들이 있는 곳을 더 좋게 만들어가는 일이라면 품위 있는 행동과 과격한 행동을 구분할 필요가 없음- 진보적인 교육실천을 단지 정치적이고 당파적인 노력으로 환원할 의도는 없음- 교사들은 분명히 규율을 갖고서 상상력에 창조적 날개를 달아 주어야 함- 세계 속에서, 세상과 더불어, 다른 사람과 더불어 있는 나의 현 존재는 내 자신에 대한 온전한 지식을 의미- 학급공간, 즉 교실이라는 공간은 놀이터와 학교 전체를 둘러싼 영역으로 확대됨-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재정의해야 함-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세계 속에서 역사적으로 만들어졌을지라도, 이러한 이해는 또 세계와 더불어 상호 작용하는 의식적인 몸에 의해서 생산됨- 이해의 결과가 가르치는 일과 배우는 일, 그리고 발견에 대한 새로운 이해로 나타날 것임○ 여섯 번째 편지 -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의 관계에 대하여- 가르치는 사람들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교육실천은 하나의 재앙- 학습자를 교육하는 데 정말로 불행한 일은 말과 행동이 자주 모순되는 교육자가 말을 하면 학습자들이 그 말을 전혀 믿으려 하지 않음- 학생과 교사의 관계에서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되는 증언이 또 하나 있음. 그것은 정의와 자유, 그리고 개인의 권리를 위해서 계속 헌신하는 증언, 즉 강자가 약자를 착취할 때 언제나 약자 편에 서서 일하는 증언임- 우리 교육자와 간의 관계를 설정할 줄 알게 된다. 교육자와 학습자는 모임을 할 때마다 가장 긍정적으로든 가장 부정적으로든 자신에게 문제가 되는 순간들을 간단하게 적어두어야 함- 교사 맘대로 내리는 결정을 아이들은 근본적으로 거부한다- 아이들은 서로를 존중하는 민주적 관계를 희망하고 있음○ 일곱 번째 편지 - 학습자들과 함께 대화하기- 교육은 정치적 행동임이 명백함- 교육의 비중립성은 교육자들이 교육을 정치적인 것으로 받아들여 진보적이고 민주적으로 일관되게 살 것인가, 아니면 과거처럼 권위적이고 반동적이거나 무의식적이고 무비판적인 선택을 하며 살 것인가, 즉 그들이 스스로를 민주적인 인간으로 규정하든지 아니면 권위적인 인간으로 규정할 것을 요구함- 권위주의를 거부한다고 곧바로 규율의 부족에 빠져든다는 의미가 아닌 것처럼, 무법천지를 거부한다고 곧장 권위주의에 헌신한다는 의미도 아님- 조작적인 권위주의나 무조건적인 허용성의 반대는 민주적 급진주의- 교육자가 민주적이기를 선택하고 담론과 샐천 사이의 일관성을 유지한다면, 학문을 탐구하면서 끊임없이 비판적 분석에 따르고 학습자에게 말을 걸고 서로 대화하는 경험을 하며 살아갈 것- 대화가 배울 내용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이런 대화가 이루어진다면 가르치는 행동의 관점에서도 타당하고, 그들의 교실을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분위기로 만들 수도 있음- 학습자에게 그리고 그들과 함께 이야기하는 것은 민주적 교사가 학교에서 책임감 있고 비판적인 시민을 육성하는 아주 겸손하면서도 긍정적인 방식- 포스트모던의 진보성을 취하고 포스트모던의 회귀성이나 반동성은 거부하는 민주적 학교가 브라질에서는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음- 민주적 교사는 학습자들에게 귀기울이고 그들과 더불어 이야기하는 것을 배움으로써 학습자들이 교사에게도 귀기울이도록 가르침- 민주주의는 관념적인 말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반성과 실천으로 이뤄짐- 말과 행동 사이의 싸움에서 둘간의 거리르 없애려고 애써야 함- 말한 것 없음
“실재의 성격”에 대한 저널 : ‘Rashomon’ 감상에 기초하여진실이라는 것은 존재하는가, 영화 ‘Rashomon’에서는 하나의 사건을 놓고 벌어지는 각기 다른 진술을 통해서 인간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싶어한다. 영화는 숲 속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에 대한 네 가지의 다른 진술들을 아무런 도덕적 판단 기준 없이 보여주면서 사람들이 말하는 진실이란 것에 돌을 던진다.이야기는 한 산적이 사무라이 부부에게 다가가 사무라이를 속이고 부인을 겁탈했다는 것이다. 그 후 오후에 그 숲속에 들어선 나무꾼은 사무라이가 죽어있는 것을 보고 관청에 신고를 한다. 관청에 잡혀온 도적 다조마루와 사무라이 아내, 점쟁이(사무라이의 영혼)는 그 날 있었던 일들을 상세히 이야기하기 시작하는데 그 이야기가 전부 다르다.유명한 도적 다조마루는 사무라이 아내를 겁탈한 후 그냥 돌아가려 했으나 아내가 그를 붙잡으며 두 남자에게 욕을 보였으니 둘 중 한명이 죽어야 한다고 했다. 이긴 쪽을 따르겠다는 아내의 말대로 두 남자는 결투를 하게 되었고 오랜 싸움 끝에 자신이 사무라이를 죽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결투가 끝나고 사무라이 아내는 도망치고 없었다고 말한다.사무라이 아내의 진술은 다조마루가 그녀를 겁탈 후 어디론가 가버렸고 남편은 그저 포박된 채 그녀를 분노어린 눈으로 바라보고만 있었다고 한다. 결국 그녀는 더러워졌다는 수치감을 견디지 못해 남편을 풀어주고 죽어달라고 했지만 남편은 말없이 끝까지 분노어린 눈으로 지켜보기만 할뿐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정신을 차렸을 땐 남편의 가슴에 자신의 단도가 꽂혀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는 강을 배회하며 자살을 시도하지만 매번 실패했다고 한다.무당을 통해 말하는 사무라이는 겁탈한 다조마루는 아내를 위로했고 아내 역시 그를 따라가겠다고 말하며 대신 남편을 죽여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그런 그녀를 괘씸하게 여긴 다조마루는 사무라이 아내를 제압하고 사무라이에게 처분을 어떻게 할이지 물어본다. 한 눈판 사이에 사무라이 아내는 도망가고 혼자 남겨진 사무라이는 배신감에 슬퍼하다 자살을 했다는 것이다.재미있는 것은 다른 살인사건들과는 다르게 용의자들이 모두 자신이 범인임을 자청한다는 것이다. 이미 벌어진 사건의 결백을 주장하기보다 자신합리화 자신의 체면을 지키려 했다는 것이다. 다조마루의 경우 자신의 명예, 남편은 사무라이로서의 자존심, 사무라이 아내의 경우 겁탈당한 여성의 가련함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런 가치 혼란 속에서 인간이 갖고 있는 본연의 이기심을 인간의 참모습으로 보여준다.하지만 이야기는 다 끝나지 않았다. 사건을 전부 목격했다는 나무꾼은 여자가 울고 있었고 다조마루는 그녀 앞에서 무릎꿇은 채 잘못을 빌며 아내가 되어줄 것을 애원했다고 말한다. 그녀는 남자 둘이 알아서 결정하라고 남편을 풀어준다. 하지만 남편은 더럽힌 몸으로 자결해야 마땅하다고 말하고 분노한 아내는 두 남자를 충동질해 결투를 하게 만든다. 결국 사무라이가 도적의 손에 죽었다는 것이다.나무꾼의 이야기가 끝나고 혼란에 빠진 세 명은 아기를 발견하게 된다. 나무꾼이 아기를 감싸고 있던 비단을 훔치는 나그네를 비난하지만 나그네는 “당신은 달라? 위증을 한 사람은 바로 당신이잖아!”라고 말한다. 나무꾼은 값비싼 단도를 훔쳤기 때문에 위증을 했던 것이다. 또 한사코 자신은 인간을 믿는다고 말했던 승려는 아기를 달라는 나무꾼의 말에 순간 그를 의심해 버린다.비가 그치고 나무꾼이 자식들과 함께 키우겠다고 말하며 아기를 데려가고 승려가 끝까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영화는 나무꾼의 선의에 인간에 대한 희망을 걸며 끝이 나는 듯 했다.한 가지 사건을 놓고도 각자의 개인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증언을 하기 때문에 인간 사회에서 진실이라는 것은 영원히 찾을 수 없다는 것이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인 것 같다.
제1장몬태나의 드넓은 하늘 아래에서개발과 보호의 충돌문제는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가난을 삶의 일부로 생각하는 개발도상국들의 자연을 파괴해서라도 삶의 질을 높이기를 원하고, 삶의 질이 어느 정도 높아진 선진국들은 자연을 보호해서 여유로움과 풍족함을 느끼고 싶어한다. 하지만, 가진 자들이 원하는 여유로움과 풍족함은 오히려 자연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파괴하는 데 일조하는 면이 칼날로 작용함을 그들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데에만 급급하고 있다. 결국, 개발이든 보호든 자연을 있는 그대로 두지 않는다.세계 초일류국으로 성장한 나라 미국. 그 안에 작은 주 몬태나. 몬태나의 자연은 누구봐도 말로 표현하기 힘든 아늑한 기분이 몰려오는 천국같은 곳 이었다. 몬태나는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가졌지만 농업적으로 경쟁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풍요롭게 살지 못하였다. 문명이 발달하고 인간은 더욱 편리성과 효율성을 추구하는 사회로 나아가면서 몬태나 역시 유럽인들이 오면서 수렵에서 광업,벌목,농축산업으로 그리고 관광, 레크리에이션, 노후생활, 건강산업으로 분야를 옮겨가며 성장의 길을 걸어왔다. 이 길은 몬태나에 유독성 폐기물, 숲, 토양, 물과 공기, 기후 변화, 생물학적 다양성의 상실, 외래 해충으로 인한 문제 등 엄청난 환경 문제를 일으키고 말았다.가진 자들은 이미 파괴되어버린 자신 주위의 환경에서 벗어나 아직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곳에 환상을 가지고 그런 곳을 보호하고자 한다. 이미 문명의 이로움을 몸소 느끼고 살았던 그들은 인간이 자연을 파괴하고 만든 문명 속에서 염세와 정신 고통을 느끼고 그것을 치유하기 위해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정말 아이러니 하지 않을 수 없다. 쳇바퀴 돌 듯이 바쁘게 편리와 효율, 풍요로움을 갖기 위해 살다가 잠시 정신을 차려 뒤를 돌아보는 격이라니, 한심하다. 애초에 환경에 대한 관심과 교육이 이루어졌더라면 우리 지구가 이 지경까지 가지는 않았을 텐데, 한심하다. 나는 여기서 살지 않을 것이라고 우리가 사는 지구의 땅 토론주제 : 고엽제를 묻을 수 밖에 없었을까? 환경교육은 언제부터 시작해야 할까? 개발 전 예비시험 같은 걸 해볼 수는 없을까?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문명의 붕괴 제 2, 3장이스터섬에 내린 땅거미, 핏케언 섬과 헨더슨 섬 이야기인간은 자연을 파괴할 수 밖에 없는 것인가? 극단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인간의 손길이 닿는 곳들은 여지없이 자연이 훼손되고 더 이상 생명이 살 수 없는 불모지로 변해간다. 인간이 편리성과 효율성을 추구하면서 문명을 발달시키고 그 발달된 문명은 환경을 오염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단지 인간이 살아가기 때문에 스스로 붕괴해버린 사회의 모습을 보고 인간의 존재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인간이 살았기 때문에 스스로 붕괴한 사회, 바로 이스터 섬이 그러했다.이스터 섬에 정착한 폴리네시아인들은 ‘모아이’라는 거대한 석상의 조각에 전념한다. 이 석상을 만들기 위해 인력과 밧줄, 식량이 필요했고 결과적으로 삼림을 파괴하고 조류가 멸종되었다. 누가, 어떻게 만들었을까? 궁금하게 만들었던 미스테리 이스터섬의 거대 석상은 자연을 훼손하고 결국 몰락해버린 인간이 남긴 쓸쓸한 흔적이었다. 결국 인간들의 과도한 욕심은 파멸의 길로 가는 지름길임이 분명한 사실이지만, 현실에 급급한 안대를 찬 인간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인가 보다.태평양 섬들의 삼림 파괴에 영향을 미친 요인들 중에 화산재의 낙진이 없는 섬에서 파괴가 잘 일어난다는 글쓴이의 말에 의문이 든다. 화산재와 낙진에 식물의 성장에 필요한 영양분을 함유하고 있다고는 하나 식물의 잎에 쌓이고 하늘을 덮어 태양을 맞는 부정적인 측면이 있어 성장을 방해하지 않을까?망가레바 섬은 또 다른 이스터섬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이 망가레바 섬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핏케언 섬과 gps더슨 섬은 정말 안타깝지 않을 수 없다. 망가레바에 정착한 사람들 중 일부가 핏케언 섬과 헨더슨 섬으로 옮겨갔을 때 망가레바에서 생필품을 잔뜩 실은 카누는 새로운 거주지의 사람들에게 탯줄이나 마찬가지 정착했었을까?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읽어보면, 인구의 증가와 자연의 훼손은 비례하고 있었다. 인구의 증가를 적절하게 조절하고 지구가 수용할 수 있을 정도의 인구수를 유지한다면 우주에서 고립된 지구에서 인류가 좀 더 오래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인류가 이룩했던 위대한 문명도 결국 자연 앞에 무릎 꿇는다. 인간이 자연에 발길을 내딯지 않을수록 이 지구는 건강해지지 않을까?문명의 붕괴 제 4, 5장아나사지 문명과 그 이웃들, 마야의 붕괴여러 가지로 부족함을 모르고 풍족하게 먹고, 마시며 생활하고 있는 현대인은 더욱 많은 것을 원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법정 스님께서 말씀하신 ‘무소유’의 의미가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이끌어 낸 것은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욕심으로 넘쳐나는 모습에서 그래도 한 줄기의 희망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인간의 욕심으로 문명이 붕괴되어 가는 모습들은 1장에서부터 지금의 5장까지 살펴볼 수 있다. 인간이 자연에 발을 내디디면서 이미 자연은 훼손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간이 자연이 수용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자연을 이용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몰락의 길을 걷는 가장 큰 이유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은 자연을 통해서 식량을 얻어야만 하고 인구가 증가할수록 더욱 많은 식량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더 많은 식량을 얻기 위해 지나치게 많은 농부가 지나치게 많은 땅에 지나치게 많은 곡물을 재배하고 그로 인하 삼림이 파괴되고 삼림이 파괴되어 가뭄과 토양이 고갈되어 쓸모 있는 농지는 더욱 줄어들고, 그래서 자급자족이 불가능해지면 상호의존하거나 전쟁으로 치닫게 되는 일련의 과정들이 반복되는 모습들을 보면서 인간은 어쩔 수 없는 것인가 하는 회의감과 공포감에 휩싸인다.1978년 영국의 과학자 제임스 러브록이 이라는 저서를 통해 지구를 환경과 생물로 구성된 하나의 유기체, 즉 스스로 조절되는 하나의 생명체로 소개한 ‘가이아 이론’에 대해서 이야기해 볼 필요가 있다. 지구는 스스로의 조절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욕심을 마음껏 가 마땅히 해주어야 할 의무를 먼저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환경을 보호하는 것은 우리가 어린아이가 위험에 처하면 마땅히 구해야 하는 의무처럼 어떤 권리에 따른 의무가 아니며, 그저 마땅히 그래야 하는 의무인 것이다.지구가 수용할 수 있는 인구의 수를 맞추는 것 자체가 비윤리적인 문제로 비춰질 수 있지만 앞으로의 우리 미래세대를 생각하고, 이 지구를 생각한다면 현실적으로 생각해볼 문제이다. 최장시간, 최대다수를 위해, 최고의 이익을 생각한다면 환경을 보호해야 하는 사실은 저명한 사실이다. 우리는 많은 것을 얻을수록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 쉬고 싶어 한다. 결국 인간은 자연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으며 다시 돌아갈 자연이 없다면, 인간은 결국 자멸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문명의 붕괴 제 6, 7, 8장바이킹의 영토 확장, 노르웨이령 그린란드의 시작과 발전,바이킹, 용맹한 해적으로 기억되는 그 이름은 언제 어떻게 사라졌을까? 바이킹의 영토 확장은 자기촉매적 확장력으로 이야기 할 수 있다. 최초 바이킹은 무역을 통해서 새로운 이득을 얻었지만, 점차 무역이 아닌 약탈로 새로운 이득이나 땅을 발견한다. 이런 사례에 따라 더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이득이나 새로운 땅을 찾아나서고, 그 결과로 얻은 이득과 땅에 다시 더 많은 사람이 신세계를 향해 나아간다. 하지만, 새로운 땅을 찾아 용맹하게 떠났던 바이킹들이 정착한 곳에서 왜 보수적이고 경직된 사회 속에 안주할 수 밖에 없었는지는 의문이다. 아이슬란드의 환경적 취약성을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오랜 실패의 경험들을 벗어날 수 있는 바이킹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은가보다. 이누이트족의 유용한 처세법을 끝까지 거부하면서 결국 굶어 죽는 비극으로 발전하는 모습이 안타깝다.그린란드는 춥고, 변덕스러우며, 바람이 세고, 안개가 자주끼는 지역이며, 물고기가 풍부하다. 하지만 그들은 생선을 먹지 않았다. 굉장히 눈에 띄는 현상이다. 그들이 물고기를 먹지 않은 이유를 저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붉은 털 에리크가 그린란드에 정착한 첫 해에 생에 감염될 위험이 더 높다고는 하나, 그린란드의 기후를 고려했을 때 그런 확률은 낮지 않을까? 춥고 바람이 세게 부는 지역에서 건조도 잘 될 것이고, 음식을 장기간 보관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노르웨이인들이 이누이트와 교역하지 않고 이누이트에게 생존법을 배우지 않은 것은 노르웨이인들에게 큰 손해였으며, 결과적으로 종말을 가져온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것을 작가의 다섯 가지 요인 중에 세 번째 요인에만 포함시킬 수 있을까?변화를 두려워하면 살아남을 수 없다고 했던가, 빠르게 변화하는 요즈음의 시대에 얼마나 변화에 빠르게 적응하며 그 속에서 새로움을 창조해낼 수 있을지는 이 시대의 가장 큰 관건이다. 바이킹이 변화를 두려워하고 보수적인 가치관에 갖혀지내고 노르웨이를 비롯한 유럽인들의 자신의 몸에 베인 가치관과 생활습관을 그대로 가지고 새로운 곳에서 생활했기에 충돌이 생기고 갈등을 겪었던 것을 다시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문명의 붕괴 제 9장성공에 이르는 두 가지 방향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은 삼림파괴 및 다른 환경적인 문제로 최후를 맞아야 했던 사회들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살펴본 내용은 그들과는 달리 성공을 거두었던 사회의 모습이었다. 뉴기니 고지대, 티코피아 섬, 도쿠가와 일본의 성공담을 통해서 암울하게 번져가던 환경문제를 희망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한 줄기 빛을 보게 되었다. 물론 이 성공담은 성공한 지역의 환경적 요인이 유리했다는 한계가 있긴 하지만, 하의상달 방식이나 상의하달 방식을 통해서 작은 규모나 거대한 규모가 성공했다는 사실자체는 우리에게 기대감을 심어주기에 충분하다.뉴기니 고원지대는 하의상달식 접근법으로 커다란 성공을 거둔 사회였다. 이곳은 지속 가능한 방법으로 가장 오랫동안 식량을 생산해온 곳 중의 하나였다. 이들의 농경 기술은 매우 정교한 나머지 오늘날까지도 유럽의 농경학자들은 뉴기니 사람들의 방법이 왜 효과가 있고, 유럽의 혁신적 농법이 뉴기니에서 실패한 이유를 여전히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서 작은 사회의 이점을 볼 수다.
데카르트, 『방법서설』 요약제 1 부 학문(學問)에 관한 고찰(考察)나는 어릴 적부터 여러 가지 인문학을 배우면서 자랐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을 끝마치자마자 나는 생각을 달리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공부하려고 애썼는데도 더욱 내 무지를 발견했을 뿐, 아무 것도 얻지 못했다고 여겨질 정도로 여러 가지 의심과 오류에 빠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학과들을 소홀히 하지는 않았다. 모든 학문을 그 가장 미신적이고 그릇된 것에 이르기까지 그것들의 정당한 가치를 인식하고 거기 속아 넘어가지 않도록 조심하기 위하여 검토해 본 것은 좋은 일이라는 것, 등을 나는 알고 있었다.나는 수학을 특히 좋아하였는데 이것은 그 추리의 확실함과 명증성(明證性) 때문이었다. 또한 신학을 존경하였다. 철학은 논쟁의 여지가 없는, 따라서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직 하나도 없음을 보고서,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철학을 더 잘 해 나아가리라는 자부심은 조금도 가지지 않았다. 다른 학문들은 그 원리를 철학으로부터 빌려오고 있는 까닭에 나는 그렇게도 든든하지 못한 기초 위에는 견고한 것을 세울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선생들의 감독을 받지 않아도 되는 나이가 되자 나는 글공부를 아예 집어치웠다. 그리고 나 자신 속에서, 혹은 세계라고 하는 큰 책에서 찾을 수 있는 학문 이외에는 다른 어떤 학문도 찾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이리하여 나는 우리들의 자연의 빛을 흐리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이성의 소리를 잘 듣지 못하게 하는 많은 미망으로부터 조금씩 해방되어갔다.제 2 부 방법(方法)의 주요규칙(主要規則)나는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우리의 이성을 전적으로 사용하고 오로지 이성에 의해서만 이끌려 온 경우만큼 우리의 판단이 순수하고 확실하기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나는 논리학을 구성하는 많은 규칙들 대신에 단 한번이라도 그것들을 지키지 않는 법이 없도록 하겠다고 하는 확고하고 한결같은 결심만 가진다면 다음의 네 가지 규칙으로 충분하다고 믿었다. 첫째는 내가 명증적으로 참되다고 안 것 외에는 어떤 것도 참된 것으로서 받아들이지 않을 것, 둘째는 내가 검토할 난제의 하나하나를 될 수 있는 대로 그것들을 가장 잘 해결하기에 필요한 만큼의 소부분으로 나눌 것. 셋째는 내 생각들을 순서에 따라 이끌어 나아가되, 가장 단순하고 가장 알기 쉬운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계단을 올라가듯 조금씩 위로 올라가, 가장 복잡한 것들의 인식에까지 이를 것. 끝으로, 하나도 빠뜨리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있을 정도로 완전한 매거(枚擧)와 전체에 걸친 통관(通觀)을 어디서나 행할 것이 바로 그것이다.사실 내가 선택한 이 몇 개 안 되는 규칙들을 정확하게 지킴으로서 나는 논리학과 수학에 포함되는 모든 문제를 나주 쉽게 풀 수 있었으며, 마지막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문제들에 관해서도, 어떻게 하면 또 어디까지 그것들을 풀 수 있는가를 결정지을 수 있을 성싶었다고 나는 감히 말한다. 그러나 이 방법이 나를 가장 만족시킨 점은 그것을 통하여 내가 모든 일에 있어서 내 이성을 완전하게는 아니지만 적어도 내 힘이 미치는 한 가장 잘 사용한다고 확신한 것이었다. 또한 나는 이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다른 학문들의 여러 난제에도 똑같이 유효하게 적용할 것을 기약하였다.제 3 부 이 방법(方法)에서 나오는 도덕(道德)의 규칙(規則)이성이 내 여러 판단에 있어서 결정을 내리지 못하게 하고 있는 동안에도 내 행동에 있어서는 내가 결정을 내리지 않는 상태에 있는 일이 없도록, 또 이미 그때부터 될 수 있는 대로 가장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나는 임시로 하나의 도덕을 마련하였다. 그것은 셋 내지 네 개의 격률로 되어있는 것이다.첫째는 내 나라의 법률과 관습에 복종하여 하느님의 은총으로 내가 어렸을 적부터 배워 온 종교를 한결같이 지키며, 다른 모든 일에 있어서는 내가 함께 살아가야 할 사람들 가운데 가장 총명한 사람들이 실생활에서 보통 받아들이고 있는 가장 온건하고, 극단에서 가장 먼 의견을 따라 나를 다스리는 것이었다. 둘째 격률은, 내 행동에 있어서 될 수 있는 대로 가장 확고하고 가장 결연(決然)한 태도를 취하며, 또 아무리 의심이 가는 의견들이라 하더라도 일단 그것들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면 그것들이 아주 확실한 것인 양 어디까지나 그것들을 따르는 것이었다. 셋째 격률은 언제나 운명보다도 나를 이기며, 세계의 질서보다는 오히려 내 욕망을 바꾸려고 노력하는 것이었다. 또 일반으로 우리가 완전히 지배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우리의 생각밖에 없으며, 따라서 우리의 외부에 있는 것들에 관해서 우리가 우리의 최선을 다한 후에도 성공을 거두지 못한 모든 일은 우리에게 있어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믿는 습관을 붙이는 것이었다. 끝으로, 이 도덕의 결론으로 나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종사하고 있는 가지가지 직업을 훑어보고, 그 중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하려 하였다.제 4 부 하느님 및 인간영혼(人間靈魂)의 현존(現存, existence)의 명증(明證)나는 실생활에 있어서는, 매우 불확실한 것임을 알고 있는 의견들을 마치 그것들이 의심할 것이 아닌 양 따르는 것이 가끔 필요함을 깨닫고 있었다. 이리하여 우리의 감각이 때때로 우리를 속이기 때문에, 감각이 우리의 마음속에 그려 주는 대로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나는 상정하려 하였다. 그러나 금방 그 뒤에 그렇게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생각하고 싶어하는 동안도, 그렇게 생각하는 나는 반드시 어떤 무엇이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기서 나는 내가 하나의 실체요, 그 본질 내지 본성은 오직 생각하는 것이요, 또 존재하기 위하여 아무 장소도 필요 없고, 어떠한 물질적인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것임을 알았다.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있다 라는 명제에 있어서 내가 진리를 말하고 있음을 나에게 확신시키는 것은 생각하기 위해서는 있어야 한다는 것을, 내가 아주 명석하게 본다고 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음을 깨닫고, 나는 우리가 아주 명석하게 그리고 아주 판명하게 마음속에 품어 생각하는 것은 모두 참되다는 것을 일반적 규칙으로 인정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우리의 관념들과 개념들은 그것들이 명석하고 판명한 것인 한 현실적인 것들이요, 또한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에 참된 것이 아닐 수 없다. 결국 깨어 있건 잠들어 있건 우리는 이성의 명증이 없으면 아무 것도 믿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내가 여기서 우리의 이성의 명증이라 말하고, 결코 우리의 상상의 명증이라고도 감각의 명증이라고도 말하지 않는 것을 주의해야한다. 그러나 이성은 우리의 모든 관념 혹은 개념이 진리의 어떤 기반을 가지고 있을 것임을 우리에게 분명히 일러준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고서는 전적으로 완전하고 진실한 하느님이 그 관념들을 우리 속에 넣어 주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겠기 때문이다.제 5 부 자연학(自然學)의 문제(問題)의 순서(順序)우리는 창조의 기적을 손상시킴이 없이 오직 이것만으로 순전히 물질적인 모든 것은 시간과 더불어 우리가 현재 그것들을 보는 바와 같게 되었다고 믿을 수 있다. 우리가 인간인 한에서 우리에게만 속하는 기능들은 한 가지도 거기서 찾아볼 수 없었고, 다만 하느님이 이성적 정신을 창조하고, 내가 논술한 바와 같은 어떤 모양으로 그가 이 정신을 신체에 결합시켰다고 상정한 다음에야 나는 이 신체 속에 있을 수 있는 기능들을 모두 발견하였다. 나는 이 문제를 다루었는지 볼 수 있도록 심장 및 동맥들의 운동을 설명하였다.
사랑에 대한 가치관사랑. ‘사랑은 상대방에 대한 무조건적인 이해’라고 생각한다. 주위를 살펴보면 사랑이라는 감정을 가볍고 별 것 아니라고 취급하는 사람들도 많고 쉽게 사귀고 쉽게 헤어지는 냄비 같은 사랑을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은 것 같다. 하지만, 사랑은 그렇게 가볍게 취급할 것이 아니다. 남녀 간의 사랑은 인간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가장 소중한 감정 중의 하나이고, 평생을 좌우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다. 사랑이라는 감정 앞에서 인간은 순진한 어린 양이 되고 서로를 진정으로 배려할 줄 아는 마음을 알아가게 된다. 모든 인간에게는 장?단점이 있기 마련이지만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서로의 단점을 너그럽게 포용해주고 이해해줄 수 있는 힘이 있다. 더불어 그것을 장점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힘까지 말이다. 이처럼 진정한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는 서로의 노력이 매우 중요하다. 아름다운 사랑, 그 뜨거움보다는 은근한 따뜻함처럼 서로에 대한 존경심과 믿음을 조금씩 만들어가야 한다. 서로의 마음이 없이 돈, 명예, 지위만을 위한 사랑은 순간적인 쾌락만을 주고, 사람을 끝없는 욕망의 울타리로 끌어넣는다. 물질적인 것은 절대로 영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또 설사 그것이 영원 한다고 하더라도 사람의 욕망은 한없이 커지기에 점점 더 좋은 것을 바라게 되고 현실에 행복함을 느끼지 못하게 될 것이다. 물론 사랑에 있어서 물질적인 것들이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사랑도 이상이 아닌 현실 속에 존재하는 것이기에 현실의 조건들을 무시할 수는 없다. 비록 아주 많은 돈이 아니더라도, 작은 것에서부터 행복을 찾아보면 이 세상은 충분히 행복하게 살아볼만 하다. 삶을 살다보면 그 나이에만 꼭 누릴 수 있는 행복이 있다고 생각한다. 초등학교 시기에는 가족에게서 행복함을 느끼고, 사춘기 시절에는 친구들과의 우정 속에서 행복함을 느끼고, 성인이 되어서는 연인과의 사랑에서 행복함을 느낄 수 있었다. 아직 내가 살아가야할 삶이 많이 남은지라 그 이후의 삶에서는 어떤 행복함을 느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내 생각의 기준에서는 내 나이, 20대 중반에서만 꼭 해볼 수 있는 많은 것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직 돈을 버는 직장인이 아니고, 자식이 있는 부부가 아닌 평범한 연인은 차도 없고, 돈도 많지 않지만 함께 걷고 도시락을 싸서 소풍을 가고, 버스를 타고 또는 자전거를 타고 함께 여행을 다니는 것도 행복한 일이다. 값비싼 여행에 고급음식은 훗날 서로가 세월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것들이니 그것은 마음속에서 행복이라는 희망으로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사랑은 두 사람이 아름다운 미래를 계획하고 서로에게 항상 꺼지지 않는 빛이 되어주는 것이다. 사랑에 있어서 또 하나, 결부되는 것이 바로 ‘섹스’일 것이다. 세상이 정말 순식간에 개방적인 문화로 탈바꿈되어 성의 정체성도 잃어버리고 남녀 간의 ‘섹스’가 너무도 가볍게 보이기도 한다. 성인이기에 누가 뭐라고 탓할 수는 없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감이다. 바로 코앞의 쾌락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넓은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 인생이라는 큰 나무를 뿌리서부터 아름답게 가꾸어 나가고자 하는 마음 말이다.아름다운 사랑의 결실을 이루기 위해서는 미래에 대한 희망과 계획이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결혼이라는 사회적 풍속이다. 결혼은 연인의 사랑을 법으로 인정해주고, 서로에 대한 책임감이 더욱 강해지도록 하는 약속이다. 이때부터는 남녀 둘만이 아닌 두 집안의 결합으로 인해서 연예와는 또 다른 복잡한 양상을 보이게 된다. 2세를 계획하고, 가정을 꾸려가면서 이제는 정말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과정을 겪게 된다. 물론 이 과정에서 어느 정도의 갈등이 존재할 것이지만, 이것은 비단 결혼만의 일이 아니기 때문에 슬기롭게 극복해나가야 한다. 모든 일을 시작할 때는 갈등과 위기라는 것이 항상 다가오고, 이것을 잘 헤쳐 나갔을 때야 비로소 행복과 안정이 다가오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결혼생활에 있어서도 이는 당연한 진리라고 생각한다. 이 때 이런 순간순간의 갈등과 위기를 잘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부부의 사랑과 믿음이 가장 중요하다. 요즘 사회처럼 이혼이 너무도 쉬운 일처럼 된 것의 원인을 생각해보면 제대로 된 사랑과 결혼에 대한 인식의 부족과 책임감 부족인 것 같다. 이러한 인식은 일파만장으로 퍼져 이혼가정의 자녀에게까지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또한 우리 사회의 결혼풍습을 보면 조선시대의 유교풍습이 여전히 남아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호적제도를 폐지한다고 하였지만 아직 본격적으로 시행되지는 않고 있고, 아직도 남아선호사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시대가 변하면 사람도 변하고 문화도 변하는 것이 진리이다. 이제는 맞벌이 부부가 점차 늘어가는 추세이며, 그렇다면 집안일과 육아의 일은 당연히 부부 둘의 공동 책임이라는 것은 당연하다. 이때도 가장 중요한 것은 부부가 서로 일을 미루고 책임을 회피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의 결정체인 가정을 아름답게 가꾸어 나가려면 부부의 사랑과 협력이 필수적으로 필요하다. 계획적인 삶과 결혼생활에 대한 희망이 존재한다면 결혼 생활도 충분히 성공적으로 해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