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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근현대사 - 근대민족의 형성
    근대민족의 형성Ⅰ. 서론Ⅱ. 본론1. 근대민족주의의 성립과 성격2. 위로부터의 개혁3. 아래로부터의 개혁4. 을사조약과 통감정치5. 독립협회와 의병전쟁Ⅲ. 결론Ⅰ. 서론조선은 1876년 개항을 단행한 이후 전근대적 단계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근대화의 계기를맞게 되었다. 그리하여 대내적으로는 봉건적인 사회질서와 문화풍토를 개혁하여 근대사회와 문화를 형성시키고자 하는 움직임이 강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개항을 계기로 세계자본주의 체제에 편입될 것을 강요당했으며, 선진자본주의 열강의 침략에 직면하였다. 이에 조선은 대외적으로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에 맞서 국권을 수호하고자 하는 반침략운동을 전개해나가게 되었다.개항기 조선사회에서 반봉건과 반침략은 동시에 요구되는 가치였으며, 이를 위해서는 전방위적(全方位的)노력이 요청되었다. 이 시기 역사학분야에서도 전근대적 수사방법(修史方法)과 역사인식에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역사인식을 가져야 한다는 판단이 점차 강화되어갔다. 새로운 역사인식은 국가의 독립을 수호해야 하며 국가의 근대화를 성취해야 한다는 것으로 집약되었다.한편 조선사회의 전통적인 역사관으로는 성리학적 역사인식체계를 들 수 있는데, 조선 후기 18세기를 전후하여 성리학적 역사관의 폐해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일어났다. 실학자들에 의해 제시된 새로운 역사인식의 틀과 연구방법론은 기존의 성리학적 요소와는 일정한 차이가 있었다. 실학자들은 문화적 민족주의의 경향을 취하며 역사연구를 통해 민족의 존재를 확인하였던 것이다.이러한 지적 풍토가 배경이 되어 개항기에 이르러서는 역사연구가 새롭게 착수되었다. 개항기의 역사연구는 우선 국권을 수호하고 문명 개화를 달성하려는 반침략적ㆍ계몽주의적 경향을 띠며 진행되었다. 개항기에 이르러 조선의 문화적 전통을 폄하하고 역사적 독립성을 약화시키려는 시도가 진행된 것과 병행하여 조선의 학계에서는 반제국주의적 역사인식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러한 경향으로 민족주의의 역사인식이 출현하게 되었다.이 글에서는 근대 민족주의 성립과 성격 그通心)을 혈퉅로 전화시켜 실전(實戰)과 행동을 직접적으로 고취하기 위한 문제의식에서 씌어진 것이었다. 그러므로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한국통사』의 속편이라고 볼 수 있다.박은식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도 국혼의 개념에 입각한 역사관을 계속하여 피력하였다. 즉 “대개 나라가 서로 경쟁하는 세상에서 약한 나라가 강한 나라에 병합되는 것은 자주 볼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만약 그 인종의 자격이 동등하고 종교ㆍ역사ㆍ언문ㆍ풍속에 국혼이 존재한다면, 한때 병합당했다 하더라도 끝내 분리하여 독립하는 것을 세계사에서 많이 볼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이어서 그는 “우리 민족은 단군의 신성한 후예로서 충의와 도덕의 근원이 깊은 4,300년의 역사가 있으며, 종교와 문학도 뛰어나서 일찍이 일본에게 큰 영향을 미쳐주었다. 따라서 이러한 모든 요소를 종합하여 우리의 국혼을 생성시키고 그것을 강고하게 하면 반드시 광복의 날을 맞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결국 박은식의 역사관과 역사서술은, 민족의 종교ㆍ언어와 풍속 속에 불멸의 국혼이 존재한다면 비록 한때 다른 민족의 병탄을 당한 민족일지라도 마침내 분리하여 독립하게 된다는 확신을 갖고 있는 이른바 국혼유지(國魂維持)의 사학이었다.한편 『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한국통사』에 비해 발전적인 역사인식을 보여주었다. 즉 『한국통사』에서는 난(亂)으로 평가되거나 소극적으로 평가되던 운동들이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는 혁명으로 높이 평가되어 서술되었다. 『한국통사』는 갑신정변을 혁당(革黨)이라 하여 기본적으로 난으로 다루었으나, 『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근대독립운동의 기점으로서 혁명으로 규정하였다. 또한 『한국통사』에서 갑오동학당의 난은 이후 갑오동학당의 대풍운으로서 혁명의 기치를 들었다고 평가되었다.나아가 『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역사발전에 있어 민중의 역할과 민권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의병을 민군으로 규정한 것이라든지 3ㆍ1운동을 전민족적인 혁명운동 혹은 맨손혁명으로 규정한 것은, 박은식이 독립의식을 고취시키면서 독립운동의 주체로서까지 평가했다. 이처럼 문일평은 진정한 반역아를 연구함으로써 그 당시 시대와 사회를 파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사 창조의 일대 동력으로서 발랄한 기백을 찾을 수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그의 민중지향적 사안을 통해서 본 한국사 인식의 일단을 표현한 것이었다.박은식의 ‘혼’, 신채호의 ‘낭가사상’, 정인보의 ‘얼’등 민족주의 사학에서 제시하고 있는 정신사관적인 요소가 문일평의 ‘조선심’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이것은 식민사관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문일평의 논리는 민족주의사학의 일원이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문일평은 1920년대 신채호가 제시한 ‘민중’의 개념을 그의 역사 속에 보다 심화시켰으며, 또한 근대정치외교사에 깊은 관심을 갖고 『대미관계오십년사』를 저술하는 등 국가의 존속 유지를 최대의 목적으로 한 탄력적인 외교인식을 보이는 그만의 독특함도 아울러 갖고 있었다.한편 문일평의 역사인식과 서술은 새로운 역사적 사실의 발굴이나 심도있는 연구라기보다는 오히려 이미 알려진 역사적 사실의 정리와 해석을 민중에게 전달ㆍ보급하는 민중계몽과 역사의 대중화에 더 역점을 두었다. 이것은 1930년대 난해한 문체의 민족주의사학의 역사서술이나 민족사에 대한 객관적인 이해의 통로가 막혀 있던 당시로서는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근대적 학문으로서의 역사학이라는 측면에서는 역시 문제점이 없지 않았고, 관념주의적인 경향을 갖고 있다는 민족주의사학 일반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였다.2. 위로부터의 개혁 (갑신정변, 갑오개혁, 광무개혁)(1) 서론19세기 후반 개화기 조선의 정치외교사는 급변하는 정세속에서 조선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지향한 일련의 다양한 정치세력들이 개혁운동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사라져간 비운의 역사였다. 위로부터의 개혁에 대한 연구사적 평가를 살펴보면 우선, 갑신정변은 학문적 접근방법과 정치관에 따라 다르게 평가되고있다. 19세기 조선에서 근대 지향적 또는 서구 지향적 사상과 정치변동의 흐름을 찾고자하는 입장에서는 제에게 육해군의 최고통치권과 입법권, 행정권, 관리 임명권, 조약체결권 그리고 사신임명권 등 모든 권한을 황제에게 집중시켰다. 그리고 의회나 국민의 참정권, 사법권에 대한 규정을 두지 않았는데 이는 민권에 대한 배려가 없어서가 아니라 독립협회의 활동이 서구적인 민권운동으로 발전되면서 왕조질서를 부정하는 방향으로 나가는 것을 우려한 까닭이다.왕권강화의 움직임은 군제개편에서도 잘 나타난다. 황제는 군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원수부를 설치하고 이 안에 육군 헌병대를 설치하였다. 수도의 경비와 황제 호위를 위해 친위대, 시위대의 개편, 증설, 지방에 진위대를 대폭 증강하였다. 황제 자신의 복장을 프러시아식 군복을 착용하여 위엄을 높이며 군사강국으로의 발전의지를 표명하였다.왕권강화뿐만 아니라 근대화를 위한 경제, 산업분야의 개혁도 계속해서 실시되었다. 1899년~1903년까지 실시된 양전지계사업은 전정을 개혁하여 민생안정, 국가재정확보를 목적으로 전국토의 2/3인 218군에서 두 차례에 걸쳐 시행되었다. 비록 중단되긴 하였지만 한국 최초의 근대적 토지소유권제도가 마련된 점에 의의가 있다. 토지사업 이외에도 근대적 공장설립, 상무사조직, 서북철도국설립, 대한철도회사, 전화와 전차설치, 금본위제도 실시 등 식산흥업정책이 진행되었고, 교육적인면에서는 신교육령반포(1897.10.)로 소학교, 중학교, 사범학교 등이 설립되었고 근대적 실업학교와 기술학교등도 설립되었다.광무개혁은 갑오개혁에서 나타났던 외세 의존적인 한계를 비판하는 가운데 구본신참의 맥락에서 자주적인 개혁을 추진하였고, 강력한 황제권을 바탕으로 짧은 기간동안 국방, 산업, 교육, 기술면에서 급속도로 근대화 성과를 거두었다. 황제는 국가의 자주성을 실질적으로 밑받침 할 수 있는 물질적 바탕으로서 국방력과 재정력, 상공업 육성에 주력하였다.(3) 결론갑신정변에서 광무개혁에 이르기까지 외세의 간섭과 국내정세의 악화 등 많은 어려움이있었지만 지배층들은 자주국가와 근대화를 위해 여러 방면에서 노력을 하였다. 물론 백성들을 위한로 해결하기 위해서 전국차원의 무력투쟁을 전개해야했다. 전주화약을 경계로 서울진격, 민씨 타도의 목표를 중단했으나, 전라도에서는 폐정개혁안 실시를 목표로 하는 집강소 활동을 전개한다는 조건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구축하는데 그 본의가 있었다. 이는 동학농민군의 목표가 봉건적 지배체제의 대항뿐만 아니라 외세의 침탈에 맞서 봉기한 민족적 운동임을 말해준다. 이러한 민족운동은 집강소에서 수행한 폐정개혁안 등의 혁명적 운동으로의 발전과 함께 몇 단계를 거치면서 점점 격화되었다.또한 동학농민운동은 민중을 위한 신분 평등 운동이었는데 그들이 주장한 평등사상은 오랜 기간 봉건적 신분체제하에서 억압받던 하층민의 입장에서는 공감을 얻었으나, 일반 민중들에게는 근대적 의식이 적용되기는 미숙한 것이 아직 많았기 때문에 전반적인 계층의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하지만 집강소에서의 동학농민군의 폐정개혁요구는 오히려 일본의 내정개혁 강행요구에 대항해 조선정부가 독자적으로 개혁하기 위해 6월11일 교정청을 설치하는 계기가 되었다.* 집강소의 정치?경제?사회적 활동동학농민운동은 활동은 크게 반봉건사회운동과 반외세 민족운동으로 구분 할 수 있으나 집강소에서의 농민군의 활동은 거의 반봉건사회운동의 개혁을 단행한 것이다. 동학농민군들은 폐정의 원인을 국가 차원의 구조적인 모순에까지 점차적으로 인식을 확대하면서 이해했다. 봉건적 지배체제의 청산을 위한 실천의지가 강했으며, 탐관오리의 제거는 격문과 폐정개혁안에서 모두 지적하고 있다.집강소 활동에서 정치적인 요구와 활동은 폐정개혁안 중 1,4,9조에 나타나는데 정치 분야에 해당하는 것은 주로 탐관오리의 숙청과 인사부정의 척결에 관한 것으로 대별된다. 하지만 정치 분야에 관한 개혁은 집강소 활동에서는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한다.집강소 개혁방침 가운데 사회적인 개혁내용으로는 폐정개혁안 5,6,7조에 나타난다. 천인의 대우개선, 노비문서의 소각, 과부재혼 등은 조선사회질서의 근간인 신분질서의하다.
    인문/어학| 2010.07.11| 27페이지| 4,000원| 조회(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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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적대장 연구 현황과 과제
    Ⅰ. 머리말Ⅱ. 호적대장의 연구현황1. 일제시대 시카타 히로시(四方博)의 연구2. 1960년대 김용섭의 연구3. 1970년대의 연구4. 1980년대 이후의 연구Ⅲ. 호적대장 연구의 과제1. 호적대장의 성격 규명 필요2.《慶尙道丹城縣戶籍大帳》 관련 과제 설정Ⅳ. 맺음말호적대장 연구 현황과 과제Ⅰ. 머리말조선시대 사회사 연구에 있어 호적대장은 조선후기 사회변동 양상 특히 신분 구조 변동을 구체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자료로 주목받아 왔다. 조선시대에는 국가에서 민을 대상으로 각종 역을 부과하기 위해 3년에 한 차례씩 호적대장을 개수하도록『경국대전』에 명시되어 있다. 호적을 개수하기 위해 민들은 自家의 호구 상황을 호구단자에 적어 보고하면 관에서는 그 착오 여부를 확인 정정하고 이를 토대로 호적대장을 작성하게 된다. 또한 법전에는 호적대장에서 호구를 누락할 경우 그 고을 수령과 담당 色吏에 대해서는 매우 엄한 처벌을 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호적대장의 기록은 당시 호구 등에 대한 매우 정확한 정보를 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호적대장에는 각 主戶 또는 솔거인의 직역, 성명, 나이, 본관, 四祖의 직역과 성명, 가족의 직역, 성명과 나이, 그리고 노비에 대한 사항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당시의 가족 구성, 인구, 신분, 혼인 등에 대한 많은 정보를 담고 있어 여러 방면 연구에 활용 될 수 있었다.) 일제시대 시카타 히로시의 연구로 시작된 호적대장의 연구 현황과 과제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Ⅱ. 호적대장의 연구 현황1. 일제시대 시카타 히로시(四方博)의 연구호적대장의 분석을 토대로 조선후기 사회의 변화상을 총체적으로 해명하고자 하는 연구는 매우 이른 시기부터 시작되었다. 호적을 활용한 초기의 대표적인 연구자는 일제시대 시카타 히로시(四方博)와 해방 이후의 김용섭을 들 수 있다. 두 사람의 연구는 연구자가 역사에 대해 어떤 시각과 전망을 갖느냐에 따라 동일한 자료의 분석 결과가 전혀 다른 해석을 낳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결론부터 州) 지역의 양안과 호적을 이용하여 조선후기 농업경영의 변동과 신분제 해체를 규명하였는데, 이에 따라 호적상의 양반호 격증 현상은 중농층 이상의 평민·천민이 잉여생산물의 축적을 통해 면천과 양반으로의 신분상승 결과라고 설명하기에 이르렀다. 김용섭의 호적대장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상주군의 1720년 양안과 1738년 호적을 이용하여 발표한 1963년의 논문에서였다. 김용섭은 이보다 앞서 1961년에 현존하는 조선후기의 양안을 분석하여 농민의 토지소유 상태를 밝힌 바 있는데, 1963년의 연구는 앞서 양안 연구에서 가설적으로 제시한 중농층 이상 평민층이나 천민층에서 잉여생산물의 축적을 통해 면천(免賤)과 양반층으로의 상승이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그의 추론의 해명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그의 연구는 상주양안에 등장하는 토지 소유자인 기주(起主)와 경작자인 시작(時作)을 비슷한 시기의 상주호적에서 찾아 호적에 기재된 직역(職役) 등을 분석함으로써 기주·시작의 신분제 변동 양상을 밝히는 것이 핵심이었다. 분석 결과 18세기 초반에 이미 양반과 평민, 평민과 천민 사이에 중간 신분층이 다수 확인되었고, 평?천민 토지소유자와 양반 경작자가 확인되는 데서 보듯이 농민층의 신분 구성이 다양화되었다는 점에서 그는 농민층내부에 신분제의 변동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시카타가 대구호적을 이용하여 인구, 도시·농촌 문제, 호적 기재 내용에 대한 다각도의 분석을 진행시킨 것에 비해, 상주 호적 분석 이후에 김용섭은 농업사 연구에 집중함으로써 호적대장을 활용한 본격적인 연구를 제출하지 못했다. 아울러 또 하나 지적할 것은 초기 호적 연구의 불가피한 한계이지만, 시카타와 김용섭 모두 호적대장 자체에 대한 자료적 검토가 다소 미흡하여 호적상의 ‘유학(幼學)’을 통시대적으로 양반 신분으로 간주하는 등 직역과 신분 분류 방식의 문제점을 안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그렇지만 해방과 분단, 전쟁 등으로 이어지는 민족국가의 수립과정에서 과거의 낡은 식민사학을 비판하고 민족의 발전 가능 이동이 특징적이었음을 확인하였다. 다만 이 시기 신분변동이 모든 신분에서 확인되는 것은 아니고 通婚圈은 身分內婚이 지배적이었으며 도시와 농촌 지역 간에 변동의 차이가 적지 않음을 지적하여 기존의 조선후기 신분 변동 이해에 다소 의문을 제기하였다.이와 함께 기존 연구를 통해 나타난 조선후기 신분의 상향 이동 현상에 대한 부분적인 이견이 제시되기도 하였다. 1972 Susan Shin은 하버드 옌칭도서관에 보관된 1672년 金化 호적을 분석한 결과 일반적인 경향과 달리 이 지역에서는 신분 하락의 경향이 압도적이었음을 밝혀 임진왜란 이후 신분의 상향 이동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는 통설에 최초의 의문을 제기하였다. 또한 Edward Wagner도 같은 학술지에 수록된 논문에서 1663년 서울 北部帳 호적을 분석하여 양반에서 양인으로, 그리고 양인에서 노비로 전락하는 하향적 이동의 비중이 상당히 컸음을 밝혔다.조선후기 신분변동이 일반적으로 상향적이었다는 연구 경향에 대한 국외의 문제 제기는 국내 연구자들에 적지 않은 자극을 주었고, 곧 이와 비슷한 분석을 내놓는 연구 성과가 나오기 시작하였다. 盧鎭英은 17세기 초반인 1606년, 1630년의 산음현 호적대장에 나타난 主戶와 그 四祖의 직역 변화를 분석하여 이 시기 산음현에서는 신분 하락 경향이 지배적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연구는 임진왜란 이후부터 신분의 이동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하였고 이는 상향 이동이 일반적이었다는 기존 연구에 부분적인 수정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 연구는 주로 17세기의 자료를 이용하였다는 점에서 기존 학설에 대한 근본적인 수정을 가하기는 어려웠다.이상의 신분 변동에 대한 역사학 분야의 연구 이외에 최재석, 이광규 등 일부 인류학자들은 한국의 가족제도 및 동족 촌락 연구를 위해 호적대장을 활용한 연구를 수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연구는 호적대장의 기록 내용을 액면대로 믿고 이를 통계 처리하는 방법을 사용하였으므로 다소 그 결과에 대한 신뢰성이 떨어지는 문제가 있다. 198수단이 되었음을 주장하였다. 특히 신분상으로 중간 신분에 속하여 하위 신분의 편입이 보다 용이하면서 동시에 경제력을 바탕으로 하여 양반 신분으로의 편입도 보다 용이하면서 동시에 경제력을 바탕으로 하여 양반 신분으로의 편입도 용이한 향리 계층의 신분 변도 양상을 호적대장을 통해 분석하여 조선후기 신분 구조 양상을 확인하고자 하는 연구가 다수 제출되었다. 이를 통해 향리층의 신분상승 경향이 적지 않았음이 규명되었다. 최근에는 부족한 향리를 보충하기 위해 관노비 등 하위 신분에서 선발된 '假吏'의 사회적 지위 등을 호적대장을 통해 분석하여 조선후기 신분변동의 일 양상을 밝힌 연구도 주목되고 있다. 여러 직역 중에서 향리층이 우선적인 검토 대상이 된 것은 이들이 양반과 상민의 중간 계층으로 상하 신분 변동의 양상이 잘 나타날 것이라는 기대와 함께, 향리는 세습 직역인 까닭에 다른 신분에 비해 각 신년별 호적대장 상에 가계별로 時係列的인 추적이 용이하였기 때문이다.호적대장에 나타난 특정 계층의 가계 추적을 통해 신분 변동 양상을 살피는 형태의 연구 경향은 이후 향리 이외에 다른 직역층으로 점차 금 범위를 넓혀가게 되었다. 山內弘一은 단성호적에 나타난 生鐵匠, 水鐵匠 등 工匠의 가계를 추적하여, 이들의 직역이 최초 공장에서 세대가 내려옴에 따라 納通政, 業儒, 幼學 등 상위 직역으로 변함을 밝혔다. 그리고 이는 조선후기 신분제도 변동의 한 특징인 신분, 직역 상승의 전형적인 사례임을 주장하였다. 단성호적을 이용한 기존의 연구들은 대체로 影印이 이루어진 18세기 말까지의 가계 추적에 그치고 있는데 비해, 이 연구는 일본 학습원대학 도서관에 보관된 19세기 단성호적도 함께 이용하여 자료적 외연을 넓힌 점에서 연구의 의미가 있다. 일부 직역의 가계를 대상으로 이루어지던 이전의 연구와 달리 1990년대 중반 임학성은 단성호적에 나타난 사노비와 공노비, 그리고 평민층의 가족을 추출하여 이들의 신분, 직역 변동 양상을 추적하는 일련의 연구를 진행하여 왔다. 이 결과 이들 신분의 일 상승의 階梯的 역할도 수행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직역의 계제적 성격은 당시의 신분이 상향 조정되어 가던 사회임을 보여주는 것으로 중세 해체기 사회의 구조적 특징을 반영한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다른 연구들이 대부분 호적대장 상의 변동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과는 달리 호적대장 분석과 함께『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 다양한 사료를 아울러 활용한 점은 그의 연구가 지니는 또 하나의 장점이었다. 최근 그는 향리, 백정 등 일부 계층에서는 고착화된 세습성을 보임으로써 신분 지속성의 경향도 있음을 지적하고 있으나, 대세는 신분직역의 상향 이동에 의한 중세적 신분 질서의 해체라는 점을 다시금 확인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그동안 호적대장을 이용한 연구는 대부분 신분, 직역 변동 여부를 규명하기 위한 경우가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이와 달리 1980년대 중반 이후 일부 연구자들에 의해 호적대장이 다른 각도에서 분석, 활용하기 시작하였다. 아울러 호적대장에 기록된 내용을 검토하여 그 속에 나타난 기재상의 특징, '戶'의 성격 등 호적대장 자체를 검토한 연구도 나타났다.1980년대 초반 언양 호적이 발견되면서 그 속에 기재된 挾戶, 挾人의 존재가 주목되었다. 이영훈은 다른 호적에는 나타나지 않은 挾戶의 존재가 19세기 초 언양 호적에서 나타난 원인을 戶摠에 비해 口摠이 지나치게 과다하였던 당시 이 지역의 특징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를 통해 당시의 戶政 운영상황은 크게 보아 '主戶의 挾戶化', '挾戶의 主戶化'라는 큰 흐름이 있었다. 이 연구는 이후 挾戶, 挾人의 성격에 대한 부분적인 이의 제기에도 불구하고, 그 이전까지 호적대장을 신분사와 가족사 등에 국한하여 활용하던 것에서 각 군현의 戶政을 반영하는 자료로 이용할 수 있는 연구의 실마리를 제공하였다. 따라서 호적대장 이해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점에서 이 연구는 연구사적인 의미가 있다.이와 함께 사회학, 인류학 분야에서 호적대장을 인구사 및 가족사 자료로 활용하는 연구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있다.
    인문/어학| 2010.07.11| 10페이지| 2,000원| 조회(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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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좌우합작운동
    좌우합작운동Ⅰ. 서론좌우합작운동은 1946년 3월 20일부터 5월 8일까지 열렸던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직후인 5월 25일에 분열된 국내정국을 통일한다는 명분으로 미군 점령지역인 남한에서 좌우합작위원회가 발족하면서 시작되었다.) 운동의 주체세력은 김규식과 여운형을 중심으로 하는 중간 좌?우파들이었다. 이 운동에는 미군정과 북한지역의 세력 등 많은 세력이 직간접으로 간여했다.)1946년 가을 위원회는 남한 좌우익간의 조정을 거쳐 통일원칙인 '좌우합작 7원칙'을 발표하였으나 이 과정에서 좌우양익의 실시들이 이탈해 버려 좌우가 각각 배척하는 중간파만의 합작으로 귀결되었으며 1947년 12월 6일 좌우합작위원회가 공식 해제를 선언함으로써 결국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지금까지 좌우합작운동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다.) 좌우합작운동은 해방 직후의 기본적 대립관계를 좌우대립에서 구하는 일련의 연구자들에게 일찍부터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강만길, 안정애, 서중석 등은 좌우합작운동이 조공으로 대변되는 극좌노선과 이승만, 한민당 등의 극우노선 때문에 결국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 시기의 제반 사회적 모순과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고 하면서 좌우합작운동의 역사적 의의를 높이 평가했다. 서중석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좌우합작운동이 1차 미소공위 휴회 후 제기되는 민족적 위기의 산물도 미국의 정책 변화의 산물도 아닌, 조공의 편향된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노선에 대립하여 건준 이래 지속되어온 여운형의 선민족국가건설노선이 구체화 된 것이라는 평가를 내렸다.이러한 견해에 대해 양동주, 정해구 등은 좌우합작운동이 미군정의 입장에서는 좌익세력에서 여운형을 끌어내어 우익세력과 중도세력을 연대시키고, 이에 바탕 하여 남한에서 대표성을 가질 수 있는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을 설치하기 위한 공작적 차원에서 추진되었다고 한다. 한편 여운형은 온건노선인 합작노선의 일환에서 이에 참가했다. 좌우합작운동은 조공이 신전술로 전환하고, 9월 총파업, 10월 항쟁이 전개되면서 실패로성하여 서로 대립했다. 특히 이해의 3?1운동 기념행사마저 두 진영이 대립적으로 따로 개최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후 제 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사실상 결렬되고(5.6) ‘조선정판사위폐사건’이 일어나면서(5.15) 좌우익의 대립, 좌익과 미군정의 대립이 심해졌다.이 무렵 38도선 이북에서는 일본인 소유 토지와 5정보 이상 소유지 및 소작지 등을 무상몰수?무상분배하는 토지개혁이 실시되고(3.5) ‘반동분자’와의 투쟁을 강조한 ‘20개 정강’이 발표되었다(3.23). 이남에서는 이승만을 중심으로 하는 일부 우익세력의 남한 단독정부수립설이 외신으로 전해졌고, 마침내 단독정부수립필요성을 짖접 발표한 이승만의 정읍발언이 나왔다(6.3).이 같은 정세 하에서 김규식과 여운형을 중심으로 좌우합작을 위한 접촉이 시작되었다. 우익 측의 한만당 총무 원세훈, 좌익 측의 민전 의장단 허헌 등과 함께 ‘좌우합작 4자회담’이 성립되었다(6.14). 뒤이어 우익 쪽 대표 김규식?원세훈?안재홍?최동오?김봉준과 좌익 쪽 대표 여운형?성주식?정노식?이강국 등으로 구성된 ‘좌우합작위원회’가 발족하여 덕수궁에서 제1차회담이 열렸다(1946.7.35).이에 따라 좌익 쪽에서 먼저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 지지와 미소공동위원회 속개에 의한 임시정부 수립, 무상몰수?무상분배에 의한 토지개혁, 주요 산업 국유화, 친일파?민족반역자 제거, 남한 정권의 인민위원회의 이야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좌우합작 5원칙’을 내어놓았다(7.26).우익 쪽에서도 신탁통치문제는 임시정부 수립 후에 해결할 것, 정치?경제?교육과 모근 제도?법령은 균등사회 건설을 목표로 하여 임시정부 수립 후에 구성될 국민대표회의에서 결정할 것, 친일파?민족반역자를 징치하되 임시정부 수립 후 즉시 특별법정을 구성하여 처리하게 할 것 등을 중요 내용으로 하는 ‘좌우합작 8원칙’을 제시했다.좌우합작위원회 성립 이전의 좌우익의 합작원칙을 비교하면 과 같다. 좌우합작위원회 성립이전 좌?우익의 합작원칙우익좌익1미소공위 재개미소공위 재개2즉시독립 ?를 막을 수 있다고 전망했다.미군정은 중도세력의 집권기반을 굳히고 미군정에 대한 지지를 넓히기 위해 좌익 쪽의 반대 속에서도 김규식을 의장으로 하는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을 구성하고(1946.12.12) 안재홍을 장관으로 하는 ‘남조선과도정부’를 발족시켰다(1947.2.5). 간접선거로 당선된 ‘입법의원’의 민선의원 45명에는 부정선거 말썽을 빚으면서 이승만계와 한민당계가 대부분 당선되었고, 관선의원 45명은 좌우합작위원회계를 비롯한 중도노선의 각계 인사가 임명되었다.1947년에 접어들면서 미국에 간 이승만이 그곳에서 단독정부 수립을 강력히 주장하고 미국 국무부가 단독정부 수립계획을 시사한 후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사실상 결렬되고(7.10) 좌우합작위원회의 좌파 쪽 주석이던 여운형이 암살되었다(7.19). 이후 미국이 모스크바 3상 회의의 결정을 포기하고 한반도 문제를 자국 지지 세력이 절대 우세한 유엔으로 가져감으로써 좌우합작운동은 실패하고 단독정부수립안이 확정되었다.좌우합작운동은 좌익세력 통일전선체 민주주의민족전선에 대한 미군정 쪽의 분열책동으로 시작된 것이라 보는 관점도 있다. 그러나 조선민족혁명당?건국동맹과 같은 식민지시대 민족해방운동 과정에서 추진된 통일전선운동을 주도했던 김규식?여운형 등을 중심으로, 8?15 후 좌우익 대립의 심화과정에서 그것을 극복하려는 중간파적 정치세력이 비교적 광범위하게 성립됨으로써 일어날 수 있었던 통일민족국가 수립운동이었다고 볼 수 있다.전체적인 수치 자체에는 문제가 있었으나, 미소공동위원회에 보고된 중간파 세력의 정당원 수가 우익이나 좌익의 그것에 못지않았다는 점, 미군정청의 여론조사에서 자본주의 지향세력이 17%, 공산주의 지향세력이 13%인 데 비해 사회주의 지향세력이 70%로 나타났던 점 등으로 보아 ‘8?15 공간’에서 좌우합작운동의 기반은 비교적 넓게 형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아래 에서 보는 바와 같이 좌우합작위원회에는 1946년 7월 전정파가 참여했다가 9월 극좌가 배제되고 10월 우익이 이탈하여 11월 목적은 전 한반도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확보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미군정은 자문기관으로 남조선민주의원을 발족시켜 남한 내 정치세력을 자신의 통제 아래 두고, 이를 기반으로 미소공위를 통해 성립될 과도임시정부의 주도권을 획득하려 했다. 그런데 당시 국내의 정치정세는 이런 미국의 구도와는 다르게 전개되었다. 인공과 인민위원회에 대한 미군정의 탄압과 우익세력의 적극적인 육성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익세력의 역량은 좌익에 비해 열세를 면치 못했다. 특히 좌익은 삼상결정에 대한 단결된 모습을 보인 데 반해, 우익은 각기 분열되어 있었다. 장래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는 임시정부의 모태로서 상정했던 민주의원은 미군정 관리 스스로가 고백하듯이 대표성도 민주성도 갖지 못했다. 삼상결정이 전해졌을 때 우익이 획득한 일시적인 대중적 세는 이 시기에 오면 거의 잠재화되었고 좌익의 입장이 세를 얻어갔다. 따라서 미국은 미소공위를 통해 수립될 과도임시정부가 미국의 영향력을 벗어나 좌익에게 장악될 것을 우려했다. 더군다나 1946년 2월에 북한에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수립되고 3월에 토지개혁이 실시되는 등, 북한지역의 ‘민주개혁’진행은 전 한반도의 지배라는 의도에 커다란 위협으로 다가왔다.)1) 미국의 추진의도)좌우합작에 대한 발의는 여운형이 미소공위가 결렬된 후 김규식을 만났을 때 했을 가능성이 크지만, 이 구상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것은 랭던(William Langdom) 버치(Leonard Bertsch) 등 미군정의 정치고문관들이었다. 여운형과 김규식의 첫 접촉 후 5월 25일 원세훈을 포함한 확대 모임이 있은 후 보도된 원세훈을 포함한 확대 모임이 있은 후 보도된 원세훈의 말과 여운형, 황진남, 버치, 아펜젤러, 김규식이 모인 장소에서 원세훈이 첫 인사말로 "나는 당신에게 부끄럽소, 우리 일을 우리가 못하고 외국인의 알선으로 이같이 함은 대단히 미안하오"(동아일보 1946/5/29)라는 말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좌우합작에 대한 발상은 누가 했든 간에 이를 추진한 것은 미국 의 제안을 전보로 워싱턴에 보냈다.이 중 좌우합작과 관련된 내용을 살펴보면, "우리의 견해로는 민주세력의 통합문제는 군정에의 참여를 증대시키고 우리의 점령군 및 군정의 힘이 필연적으로 약화됨에 따라, 그들이 점점 더 많은 책임을 떠맡을 수 있도록 준비시킴으로써 가장 잘 완수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한 전제조건은 민주정당의 진정한 연합세력을 형성하는 것인데, 이러한 일은 첫째로 남한 내에서의 통일, 둘째로 각 독립정당의 연합세력으로서의 행정참여,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 후에 그들의 통일된 권위를 북한과의 통일에 대한 압력으로 사용하는 일 등이 최종적인 독립을 성취하는 가장 빠른 길임을 그들에게 확신시킴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 민주주의민족전선이 다수의 진보적 교육을 받은 진실로 애국적인 한국인들에게 지지를 받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가 없는데, 만일 이들이 자기 입장을 내세울 경우에 이들의 한국정치에의 참여는 가장 바람직스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을 공산주의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게끔 격려하고, 정부사업에 그들의 더욱 많은 참여를 당연한 것으로 정당화시켜 줄, 현재 작업 중이 협정에 다른 정당들과 합의를 할 수 있도록 고무한다는 것이 하지장관의 일관된 정책이었습니다. 지난 2주간에 소위 좌익세력들을 상당히 우울하게 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 이들 사건은 민전에 어두운 영향을 미쳐 동 전선의 명망 있는 위원들로 하여금 술렁거리게 하였으며, 원로 여운형은 개인적인 협상을 민주의원 의장대리 김규식에게 제의해 왔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이러한 추세를 격려하였으며, 그러한 제의를 친절하게 받아들이도록 우익에 압력을 가했습니다. …… 공산주의자들의 개입 없이 애국적 정당들 간의 만족할 만한 통합이 이루어진다면, 하지장군은 그의 최고 권한 하에서 모스크바 결정에 의한 통일된 임시정부가 수립되기 전까지 법력을 제정하게 될 비행정적 한국인 내각(a Korean Nonadministrative Cabinet)및 입법기구(Legisl걸었다.
    인문/어학| 2010.07.11| 13페이지| 3,000원| 조회(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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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지/정서/행동상담 요약 평가A+최고예요
    인지?정서?행동 상담1. Albert EllisREBT의 창설자이자 개발자인 Albert Ellis(1913~ )는 REBT에 관하여 725편의 논문들과 60여 권의 저서들을 출파하였다. 특히 REBT의 이론과 실제를 제시한『Reason and Emotion in Psychotherapy』(1962)는 중요하다.『Humanistic Psychotherapy : The Rational-Emotive Approach』(1973)는 REBT의 인본주의적 측면을 보여준다. Ellis는 또한 대중을 위한 책들도 많이 출판하였는데 Robert Harper와 함께 쓴『A New Guide to Rational Living』(1997)가 가장 돋보인다. 이 책은 지금 제3판이 출판되었으며 REBT의 개념들을 개인의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합리적-정서적 행동치료에 대한 중요한 책들을 계속 공동 집필하고 편집한다.2. REBT의 이론적 기초1) 주요특징1950년대에 Albert Ellis에 의하여 개발된 인지?정서?행동 상담(REBT)은 내담자의 사고과정을 강조한다. 합리적 사고와 인지적 치료과정을 상담에 시도한다. 내담자의 사고, 신념, 판단, 결정, 분석, 정서, 행동에 관심을 갖는다.어떤 사실에 대해 우리가 경험하는 정서나 행동은 사실 그 자체에 의해서라기보다는 그 사실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념이나 생각에 의해서 결정된다. 합리적 생각을 하게 되면 바람직한 정서와 행동을 경험하게 되지만, 비합리적 생각을 하게 되면 바람직하지 못한 정서와 행동을 경험하게 된다.REBT는 내담자의 비합리적인 생각을 합리적 생각으로 대체시키거나 최소화시켜서 내담자가 보다 합리적이고 융통성 있는 인생관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데 강조를 두고 있다.2) REBT의 기본 원리① 인지는 인간 정서의 가장 중요한 핵심적 요소 : 과거나 현재의 외적인 사건이 정서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사건에 대한 지각의 평가가 정서적 반응에 강한 영향을 미친다.② 역기능적 사고(과장, 과잉 일반화, 과잉 단순화, 잘못된 유추, 절대적 관념 등)는 정서장애의 중요한 결정 요인③ REBT는 사고의 분석부터 시작④ 중대요인은 불합리한 사고이거나 정신병리에 대한 원인인 선행사건들⑤ 행동에 대한 과거의 영향보다 현재에 초점⑥ 신념은 적극적?지속적 노력에 의해 변화 가능3) A-B-C 모형A(Activating Event) : 선행사건B(Belief) : 개인의 신념체계C(Consequence) : 정서적?행동적 결과⑴ A-B-C 기본 모형정서적?행동적 결과는 선행사건(A)에 의해 야기되는 것이 아니라, 대체로 개인의 신념체계(B)에 의해 야기된다.선행사건(A)신념?사고(B)결과(C)S(자극) O(매개요인) R(반응)⑵ ABC의 확장된 모형비합리적 사고(IB)적절한 정서적?행동적 결과선행사건합리적 사고(RB)부적절한 정서적?행동적 결과선행사건(A)이 즐거운 것일 때 결과로써 생기는 신념은 해가 되지 않는 듯하다. 개인들이 자신들의 신념체계(B)와 일치하는 방식으로 선행사건을 경험하지 않을 때는 비합리적 신념들로써 반응할지 모른다. 비합리적 신념은 종종 어려운 정서적?행동적 결과를 야기한다. 상담자의 주요 역할은 이런 비합리적 신념을 다양한 논박 기법들을 통하여 도전함으로써 논박(D ; dispute)하는 것이다. 또한 많은 다른 인지적, 정서적 및 행동적 기법들이 상담효과를 야기하도록 사용된다.4) 합리적 사고와 비합리적 사고특성합리적 사고비합리적 사고비합리적 사고의 예논리성논리적으로 모순이 없다.논리적으로 모순이 많다.상황에 대한 극도의 평가적인 과장:“끔찍하다”, “지긋지긋하다”현실성경험적 현실과 일치한다.경험적 현실과 일치하지 않는다.“만약 나의 남편이 나를 버린다면 이는 참을 수 없다.”실용성삶의 목적 달성에 도움이 된다.삶의 목적 달성에 방해가 된다.끊임없이 걱정한다면 행복 달성에 곤란하다.융통성융통성이 있다.경직되어 있지 않다절대적/극단적/경직되어 있다.나는 반드시(잘 ; 인정받아야)해야만한다./당신은 반드시(나를 사랑)해야만 한다./ 세상은 반드시(나를 공정하게)대해야만 한다.파급효과적절한 정서와 적응적 행동에 영향을 준다.부적절한 정서와 부적응적 행동을 유도한다.“내가 이렇게 한심하게 행동하다니 이것은 끔찍하니 아니한가”/ 극도의 불안감 경험3. REBT 상담의 과정1) 상담의 목표REBT의 일반 목표는 사람들로 하여금 정서적 장애를 최소화하고 자기패배적인 행동을 감소시키고, 그리고 더 행복한 실존을 인도할 수 있도록 더욱 자기 실현되게 되도록 돕는 것이다.주요 하위목표는 개인들로 하여금 더욱 분명하게 그리고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더욱 적절하게 느끼고, 그리고 생활의 목표를 행복하게 성취함에 있어 더욱 효율적이고도 효과적으로 활동하도록 돕는 것이다.2) A-B-C-D-E 모형A(Activating Event) : 선행사건B(Belief) : 개인의 신념체계C(Consequence) : 정서적?행동적 결과D(Dispute) : 논박E(Effect) : 효과? 논박(D)의 3가지기본 형태① 비합리적 신념 탐지하기, ② 비합리적 신념과 합리적 신념 구별학, ③ 비합리적 신념을 토론하기? 신념이 성공적으로 논박되었을 때, 내담자는 새로운 효과(E)를 경험할 것이다.자극(S) 매개요인(O) 반응(R)선행사건(A)Activating Event비합리적 생각(B)Irrational Belief부적절한 정서적? 행동적 결과(C) Consequence논박(D)Dispute합리적 생각(B)Rational Belief효과(적절한 정서적?행동적 결과(E) Effect3) REBT 상담의 단계별 주요 내용? REBT 상담의 주요 단계① 정서적?행동적 결과의 탐색(C) : 상담자는 질문이나 추측으로 문제 요인을 알아낼 수 있다.② 상담 목표의 설정: 상담자와 내담자가 합의하여 설정/ 상담자 입장에서 볼 때 파급효과가 큰 문제를 초기 상담에서 선택/ 내담자가 빨리 해결하고 싶어하는 문제에 우선순위/ 내담자의 입장에서 실현 가능한 구체적 목표 설정③ 선행사건의 탐색과 명료화(A) : 문제가 유발된 외적인 상황 기술④ 정서적?행동적 결과와 사고 간의 관계 교육(B?C) : 내담자의 정서적?행동적 결과가 신념(사고, 생각)에 기인한 것, 다른 사람이 내담자의 정서적?행동적 결과를 유도한 것이 아님, 과거가 내담자의 정서적?행동적 결과를 유도한 것이 아님을 교육⑤ 생각의 탐색(B)과 상담의 과정적 목표 설정 : 문제와 관련된 내담자의 비합리적 사고를 탐색하여 이를 합리적 사고로 변화시키는 상담의 과정적 목표를 설정한다.⑥ 논박(B)의 수행 : 논박은 내담자의 비합리적인 신념체계에 대한 도전이다.
    교육학| 2010.07.11| 4페이지| 1,000원| 조회(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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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송변혁기의 제변화
    동양근세사 - 唐宋變革期의 諸變化唐宋變革期의 諸變化목차1. 당송변혁기2. 당송변혁과 시대구분론3. 당송변혁기의 제변화4. 송대 사회의 특징과 변화1. 당송변혁기(唐宋變革期)중국 역사에서 당송변혁기(唐宋變革期)는 단순히 왕조의 교체만이 아닌 정치?경제?문화 등 모든 면에서 역동적인 변화가 일어난 시기이다. 아직도 변혁기 이전과 이후의 시대성격을 어떻게 규정하는가에 대하서는 이론(異論)이 병존하고 있고 일치된 결론을 도출하기는 어려운 문제이지만 변화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특히 당송변혁기를 거치면서 중국의 영역 내외에 다민족 왕조가 병존하였다. 이것은 당 후기 이래로 통일적 봉건 중앙 정부 아래 지역적인 정권이 할거(割據)를 거듭하면서 발전한 결과이자 주변 정세의 변화에 따라 많은 이민족 왕조가 출현하였다. 이들은 송대 이전의 분열과 다른 양상을 보여주기도 한다.동아시아 세계의 중심으로서 주변(周邊) 제(諸) 지역에 매우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당제국(唐帝國)이 멸망하고 중국이 오대십국(五代十國)이라는 분열의 시대에 돌입했던 10세기 초에는 당이라는 거대한 구심점이 소멸했던 거대한 변화의 파동에 휩싸였다. 북방의 초원지대에는 위구르(回紇)가 있었고, 거란(契丹)이 자립하여 요(遼)왕조를 건립하여 남쪽의 중국 내지의 일부, 즉 연운16주(燕雲十六州)를 영유하고 그 후에 북송대(北宋代)에까지 큰 군사적 위협(威脅)을 가하였다. 서북변에는 토번(吐藩)이 쇠퇴하면서 그 지배권이 당항족(黨項族)에게 넘어가 하투(河套)에 거점을 확보하고 서하왕국으로서 송을 괴롭혔다. 그러한 중국의 주변의 제(諸)민족은 민족적인 자각을 강하게 여러 가지 독자적인 민족국가를 형성하면서 동아시아세계의 다극화가 진행되는 10세기를 이루었던 것이다.당송변혁기는 최근 중국사 연구방법론에 변화가 일어나면서 그 의미가 더욱 중요시 되고 있다. 역사연구방법에 있어 왕조사로 나눠 제왕을 중심으로 이해하는 방법은 황제의 업적에 대한 설명이 주류를 이루고 정치?제도사를 중심으로 설명한다. 정사의銀)이 중요한 역할을 하며 지폐가 사용되는 등 경제면 에서 화폐경제가 시작된 점.⑻ 경학면(經學面)에서 춘추학(春秋學)이 발흥하고, 문학면(文學面)에서는 변려문(騈 麗文)이 쇠퇴하고 자유로운 사문체(斯文體)가 그 자리를 대신하는 등 문학?음악?예 술에서도 귀족풍(貴族風)이 서민풍으로 변했다는 점.그는 이처럼 당송간에 단순한 왕조의 교체만이 아니라 사회의 성격을 달리하는 획기가 존재한다고 지적함과 아울러, 서구세력의 침략 이전의 송대에 이미 근세로 진입했다고 주장했다. 송대 이후 서유럽의 르네상스와 마찬가지로 민중이 대두하는 추세를 인정하고 그 역사적 흐름 위에 공화정이 실현되었다고 여겨, 혁명 후의 새로운 중국사회의 기초를 송 이후 사회를 지도해 온 부로(父老)의 향촌자치에 둘 것을 기대했다.3. 당송변혁기의 제변화(諸變化)당송을 경계로 다방면에 걸쳐 사회 생산력의 발전이 이루어졌고, 이에 의해 광범위한 사회적 변혁이 일어났다.이전의 토지를 매개로 한 생산활동 위주에서 송대에는 토지이외의 생산활동도 확대되었다. 사회생산영역이 확대되었고 사회 생산관계를 새롭게 규명하였다. 농업과 함께 수공업과 상업이 발전하였다.사회상에 있어 토지에 대한 지주와 소작농의 예속관계가 완화되어 신분상승과 경제력 향상이 이루어졌다. 정치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으며 신진사대부계층이 등장했다.당의 정치주체세력은 세습문벌귀족로 신?구 관료의 교체가 대단히 느리고 거의 없었다. 당대에는 신분제도가 고정적이었다. 과거제도가 있었으나 아직 발전단계로 음서?음보제도에 의해 관리에 등용되는 사례가 압도적으로 많은 세습 문벌귀족 사회였다. 그러나 안사의 난 이후로 과거제도가 음서?음보제도를 뛰어넘기 시작했다.송의 정치주체세력은 사대부(사(士)는 지식인, 학문 의미/ 대부(大夫)는 관직명, 관료의미)로 학문과 정치가 일치된 사회로 정치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과거제도의 정형화?완성기로 과거에 있어 자유?평등?경쟁 원칙이 확립되었다. 유학이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된 신유학이 중심을 이루었다. 관리등용법인 과 실시된 속(粟)-맥(麥)-두(豆)의 결합에 의한 이년삼모작과 수도작에서 행해진 도(稻)-맥(麥)의 이모작이 그것이다. 이년삼모작은 화북의 한지(旱地) 전작(畑作)에 적합한 농법이었고 이모작은 강남지역에 적합한 경작방식이었다. 화북지역은 양세법이 실시된 이후 징세 품목에 두(豆) 등이 포함된 것을 감안한다면 당대에 이년삼모작이 실제적으로나 제도적으로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고 보아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다만 이년삼모작의 시행지역이 화북 전체라고는 말하기 어려우며 기후나 지력 등의 조건에 따라 제약을 받는 농법이었음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도(稻)-맥(麥) 이모작도 개시기에 대해서 논란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보급된 시기가 당송시기였다는 것은 확인 가능하다. 이럴 경우 이모작의 실시를 위해서는 조도(早稻)의 응용이 필수적이고도 조도?만도(晩稻)의 분화가 전제되어야 하므로 도의 품종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이 역시 당대를 경계로 조도가 분화?보급된 것이 확인된다는 점에서도 다시 역으로 실시 시기를 당송기로 여기게 되는 근거가 된다고 볼 수 있다.경작 품종도 지역적인 차이를 보이면서 눈에 띄게 변화했다. 강남 수도작 지대에서는 경작 품종의 다양화와 신품종의 도입?보급이 이루어졌고, 화북 한지에서도 지역의 특성에 맞도록 소맥작(小麥作) 및 분식(粉食)이 정착되었으며 이후 강남의 수도작 지역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우선 강남 수도작의 경우 품종이 다양화하면서 당송을 경계로 조?만도의 구분이 명확해졌고, 남송대가 되면 조?중?만도의 구별이 분명하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조도는 6~7월, 중도는 8월, 만도는 9~10월에 성숙한다고 하는데, 품종이 점차 개량되고 보다 다양화하게 됨에 따라 또 지역에 따라 일정하지는 않았다. 이모작이 가능하게 된 것도 바로 이 조도를 소맥(小麥)과 함께 경작하게 되면서부터였다는 점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다.당대를 거쳐 송대가 되면 농업 생산, 특히 미곡의 생산이 급격히 확대되었고 그 주산지는 양자강 하류지역이었다. 이는 송인(宋人) )에서 2경(頃; 10ha)의 토지를 소유한 농민으로서 자급자족을 기본적 특질로 하고 있었으며, 지역에 따라 그 수적인 비중은 달랐으나 농촌 사회에서 하나의 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또 대토지소유자라고 하더라도 직접경영보다 전복, 지객(地客), 장객 등을 통한 간접경영으로 전화하고 있었음을 감안한다면, 또한 전술한 농업생산력의 발달에서 이년삼모작이나 이모작과 같은 토지의 효율성 제고, 수노동용(手勞動用) 농구와 그것을 이용한 집약적인 농법 등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을 고려한다면 경영규모는 확대되었다기보다는 소규모경영이 확립되어 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할지도 모르겠다. 이것을 ‘소경영’ 내지 ‘소경영생산양식(小經營生産樣式)’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의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생산의 단위 자체는 토지의 집중에도 불구하고 한가족 내지 2~3인이 분산적?고립적으로 경영하고 있었던 것만은 인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2) 상업과 도시의 발달당?송을 경계로 농업생산력의 발달의 양상과 경제 중심의 남이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았는데, 이것은 비단 이 분야에 국한된 현상은 아니었다. 당송을 경계로 상업 또한 현저한 발달을 보이게 되는데, 그 단적인 실례가 바로 전술한 당말의 여러 제정 시책이라고 할 수 있으며, 농업생산력의 발전, 유통경제의 활성화와 아울러 ‘상업혁명(商業革命)’이라고까지 불릴 정도의 평가까지 받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당 중기 이전까지 상업이 발달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몇 가지 특징이자 약점이 있었다. 첫째, 상업에 대한 통제가 강했다. 곡물과 견포(絹布)는 징세와 그 재분배를 통하여 국가에서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품으로서 시장에 대량으로 방출되지 못했고, 중요한 시장의 입지였던 행정도시에서 정부의 감독과 감시가 심해 도시화의 유인이 위축되었다. 둘째, 도시화는 도시와 인접지에서 불균형적으로 높았던 반면, 도시와 도시 사이에는 넓은 변지(邊地)가 존재하였으므로 상업은 비능률적이었고 모험적이었으며 고가(高價)였다. 셋째, 농촌수공업의 미성숙, 호족의 개재, 교통과 상규모의 개별 자본을 출현시키는 경우이다.이에 따라 상업을 직접 담당하는 상인세력 내지 중간층의 대두가 현저한 하나의 사회현상이 되었다. 이미 당말에도 투명(投名)?영비(影庇)라고 불리는 존재, 즉 관청이나 중앙의 금군(禁軍) 특히 지방의 번진 기구에 들어가 관직을 얻어 중앙과 지방의 정치기구와 결부되어 국가의 부세를 면해가면서 사회적으로 성장하는 존재가 있었다. 이들은 관직이 있다고 해도 대개 실무는 맞지 않고 군적 등에 이름을 올릴 뿐, 급여를 받으면서 본래의 생업을 영위하고 있었으며, 지방에서 토착적인 성격을 띠고 할거세력(割據勢力)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이들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주로 연애(??; 탈곡 제분용 기구)를 경영한다거나 고리대 사업을 했기 때문인데, 심지어 금군에 들어가 절도사까지 된 경우도 있고 상인의 자식으로 공거(貢擧)에 합격해 진사가 된 경우도 있을 정도로 어쨌건 부상층(富商層)의 관계에의 진출은 당말에 보이는 사회적 변화 중 하나이다. 물론 그 배후에는 상업이나 상인을 바라보는 전통적인 사회적 가치관이 바뀌고 있다는 점을 아울러 고려해야 할 것이다.상업의 발달은 또한 전국적인 규모의 도시화 현상을 가져왔다. 관리, 부호, 지주의 거주지이자 행정적?정치적인 성격이 강했던 도시의 성격이 변해 상업적 내지 상공업적 기능의 비중이 커졌다. 이와 아울러 유통경제의 보급?확산 및 상인의 활동의 장으로서 지방의 중심적 도시 아래에 진시(鎭市), 초시(草市), 허시(虛市;墟市) 등 누층적인 상업유통기구가 형성되어 농산물의 집하 및 유통과 원격지 상품의 농촌으로의 침투가 용이해졌다.도시가 당송을 경계로 가장 크게 변한 것은 도시와 상공업에 대한 국가의 간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시제(市制)와 방제(坊制)의 붕괴이다. 중국의 도시는 전통적으로 주위에 성벽을 쌓은 방형(方形) 혹은 장방형(長方形)의 계획도시가 대부분이며, 남해무역의 거점인 광주(廣州)나 대운하의 교통상의 요충지인 양주(楊洲)처럼 경제상의 이유로 발달한 몇몇 도시를 제외하면있다.
    인문/어학| 2010.07.11| 12페이지| 3,000원| 조회(5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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