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전통문화Ⅰ. 머리말2002년 흥겨운 장단에 맞춰 한반도를 붉게 물들인 세계인의 축제 월드컵, 모두 하나 되어 ‘대한민국’을 외치던 그때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 벅찬 감동이다.사람들의 응원과 더불어 꽹과리, 징, 북, 장구 네 가지 타악기로 이루어진 사물놀이는 우리를 더욱 신명나게 만들었다. 그때뿐만 아니라 주위에서 흥겨운 우리가락을 들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우선, 사물놀이를 제대로 알려면 판굿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판굿은 사물놀이의 모태로 흔히 농악이라 불린다. 판굿은 꽹과리, 장구, 북, 징 외에도 태평소, 상모, 잡색 등 다양한 악기와 퍼포먼스가 결합된 형태로 그러다 보니 공연하는 인원도 적게는 20명 정도로 꽤 많다. 또, 관객과 공연자 간의 벽이 그리 높지 않기 때문에 예를 들어, 판굿 공연 중에 어르신들이 함께 춤추고 흥에 겨운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이는 70년대 말, 80년대 초 우리 고유문화를 알리기 위한 필요성이 대두 되었을때 판굿은 너무 규모가 큰 것이 흠이었다. 그래서 사물놀이는 이런 판굿의 형태와 가락을 가져와서 고도로 전문화시켜 무대공연화 시킨 것이다. 그러다보니 규모는 작으나 가락이 정교하고 화려한 반면, 공연자와 관객간의 거리가 생긴 것이 흠이 되었다.Ⅱ. 본문1. 사물놀이의 기원우리는 사물놀이라는 말을 마치 한국의 전통예술 중에서 꽹과리, 장고, 북, 징을 가지고 뭔가 예술적인 행위를 하는 어떠한 장르를 일컫는 보통명사로 쓰고 있지만 사실 사물놀이는 1978년에 생긴 한국 전통타악연주 단체에서 자기네들 스스로 붙인 단체의 이름이었다. ‘보통명사’가 아닌 ‘고유명사’였던 셈이다.'사물(四物)놀이'가 맨 처음 생긴 것은 1978년 2월의 일이다. 1978년 2월 공간사랑 소극장에서의 공연이 그것이다. 이때 풍물 악기 중 중심이 되는 타악기인 꽹과리, 징, 장구, 북 등 네 개의 악기를 이용해 연주를 하게 되었는데, 그 놀이패의 이름을 민속학자인 심우성이 사물놀이라고 명명해 준 데서 기인하였다.첫 공연 2개월 후 같은 장소에서 사물놀이의 성립을 알리는 제2회 연주('영남풍물 12차 36가락')가 있었으며, 이날 공연이 끝났을 때 민속학자 심우성 씨 등 지기들은 이들의 성공적인 공연을 축하하며 '사물(四物)놀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이어서 1979년 5월에 1978년의 작업을 종합적으로 발표하는 기회를 갖게 되는데, 이는 사물놀이의 희망찬 앞날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사물놀이의 창단 멤버는 김용배, 김덕수, 최태현, 이종대였으나 곧 김용배, 김덕수, 최종실, 최종석으로 재구성된다. 이어서 1979년에 김용배, 김덕수, 이광수, 최종실로 구성되면서 이들은 사물놀이를 일약 세계적으로 음악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이 무렵은 그들이 눈부신 활동이 국내외에서 호평을 받기 시작한 때였는데, 1983년 들어 꽹과리를 치던 김용배가 음악적인 견해차이를 이유로 탈퇴, 국립국악원 사물놀이를 창단했으나 1986년 복잡한 추측을 남긴채 자살하고 말았다. 사물놀이는 김용배 대신 강민석을 영입하여 이광수(쇠), 김덕수(장고), 최종실(북), 강민석(징)으로 자리바꿈한 채 이어오다가 1990년대 들어 이광수와 최종실이 떠나고 지금은 김덕수와 강민석이 사단법인 사물놀이 '한울림'을 창단(1993)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김덕수가 패의 중심이 되어 왔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김덕수패는 사물놀이의 대명사로 자리잡게 되었다.사물(四物)은 말 그대로 네 가지 물건이다. 그 네 가지 물건, 즉 기물(器物)은 꽹과리, 장구, 북, 징이다. 원래 사물은 불교 용어이다. 불교에서의 사물)도 마찬가지로 네 가지 타악기를 말한다. 전라북도에서는 1980년 중반 이후 사물놀이가 본격화 되었고 사회 풍물패인 갠지갱, 그리고 도립국악원 사물놀이패, 이어서 각 대학의 사물놀이패들과 시립국악단의 사물놀이패, 그리고 굿패 우리마당 등의 사물놀이패가 활발한 활동을 오고 있다.2. 사물놀이의 이해산조는 악장의 구분이 곧 장단의 구별과 상통한다. 즉, 장단의 변화에 따라 악장도 변한다. 그리고, 산조에서의 장단 변화는, 느린 것에서 빠른 것으로, 즉 느린 장단에서 점차 빠른 장단으로의 변화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산조의 장단은 예외 없이 '진양→중머리→중중머리→자진머리'라는 '느린 것'에서 점차 '빠른 것'으로 변화하는 네 가지 장단들이 그 골격을 이룬다. 그리고 여기에 악기 혹은 유파에 따라 단머리(세산조시, 혹은 휘머리라고 하는데, 휘머리는 유파에 따라 빠른 자진머리를 뜻하기도 한다.)나 엇중머리 또는 엇머리 등이 추가되기도 한다. 단머리, 엇중머리, 엇머리 등의 장단이 추가되는 산조는 대개 음악적 변화가 많은 가야금 산조, 그리고 일부 거문고산조에서 나타난다. 아무튼 이렇게 산조는 느린 음악에서 빠른 음악, 즉 느린 장단에서 빠른 장단으로 변화하는 속도 지향적인 형식 틀을 지니고 있다. 산조에서 장단의 변화는 악장의 성격을 결정지을 만큼 중요한 요소인 것이다.따라서, 이러한 속도의 변화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사물놀이 역시 느린 음악에서 점차 빠른 음악으로 변화하는 속도 지향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사물놀이는 '타악의 산조'라 불러도 좋은 것이다.풍물굿은 야외에서 여러 사람이 많은 악기를 동원해 계속 움직이면서 다채로운 춤사위와 발림 그리고 다양한 진법 놀이(진풀이)와 개인놀음 등을 통해 신명을 보여주는 놀이이다. 그러나 사물놀이는 실내에서 한 자리에 붙박이로 앉아서 오로지 사물의 리듬을 보다 치밀하고 정교하게, 그리고 보다 계획적이며 체계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우리 민속 장단의 극단적인 아름다움과 신명을 느끼게 하는 놀이이다.그리고 풍물굿은 가락에 있어서 맺고 푸는 가락이 계속해서 반복하는 구조로 되어 있는 반면,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사물놀이의 가락은 느린 것에서 빠른 것으로 이행하는 점층적 가속의 틀을 지니고 있다. 사물놀이를 탄생시켰던 김덕수 등은 모두 남사당의 후예이다. 동시에 교육을 통해 좋은 스승들 밑에서 삼도의 풍물굿을 두루 익힐 수 있었는데 이러한 타고난 재능과 교육을 통해 사물놀이와 같은 새로운 공연을 모색하고 예술성 높은 가락을 짤 수 있었던 것이다.사물놀이는 크게 앉아서 하는 방법(앉은반)과 서서 하는 방법(선반)으로 대별된다. 사물놀이를 조직하는데 있어서는 보통 1인 1악기를 원칙으로 하나, 성인 사물 팀은 가락의 변형이 많고 숙달된 기능으로 연주하기 때문에 적은 수(4인 이상)로도 흥을 돋울 수 있겠으나, 어린 초등학생들의 경우 가락의 내면화가 되지 못하여 흥을 주지 못하는 등 한계성이 있어, 악기 편성을 대부분 복수로 하여 더 많은 수의 인원으로 구성하고 있다.3. 사물놀이의 명칭① 굿 : 상고시대 칼이나 창으로 그릇을 두드리면서 그 소리로 노래와 춤의 반주를 삼아 뛰어놀았고 그 그릇을 우리말로 구유 또는 구사라고 하였으니 의 준말이 이 되었다. 그 후에 고구려, 백제시대에 구취의 한자 발음이 중국에서 들어와 가로 되어 이란 발음으로 불리어졌고 조선시대에 의 발음으로 또한이라하였다.② 군몰 : 군사훈련 및 전쟁에서 군사를 내몰아칠때 사용하는 고무, 고취한다는 뜻으로 우리말의 또는 등으로 쓰이고 궁중의 나례의식에서 귀신 쫓는다는 뜻으로 라고도 하였으며 굿을 할 때 신을 모시는 많은 깃발을 들고 굿을 치므로 , 이라고도 했으니 신라 시대에는 이라고 하였다.③ 매구 : 부여시대부터 이란 뜻의 가 성행 하였으며 나례굿에서 잡귀를 쫓거나 신을 맞이한다는 말이다. 신라 시대에는 원효 대사가 를 치며 불교적인 향가를 부르며 돌아다닌 일이 있는데 이것은 불교용어로 라고 불렸던 것이 아닌가 한다.④ 걸굿 : 사찰의 보수 및 건축 기금 등을 모금하는 굿으로 가정을 방문하여 집안 신에게 매굿 과 고사굿을 해주고 양식과 베 돈 등을 받는다. 이나 , 이라는 이름으로도 기록이 되어 있다.⑤ 두레 : 들굿, 두렁쇠등의 들농사를 뜻하기도 하며 으로 육은회, 윤경, 돌림 불경 등의 뜻도 된다. 신라시대의 ,화랑도의 도(徒)와 길굿(道)의 뜻으로 이란 말로 쓰이고 있다. 마한시대에는 소도의 도(塗)라는 뜻으로 을 뜻하였다.⑥풋굿 : 푸리굿과 살풀이 등의 뜻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