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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로화 출범과 미국과 EU간의 통상마찰
    Ⅰ. 서론냉전시대가 종식된 이후 세계질서는 미국이라는 단일국가 중심의 단극체제로 전환되었다. 미국은 경제력과 군사력의 압도적인 힘을 바탕으로 패권국가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미국의 패권국가로서의 행위는 전 세계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증대시켰다. 미국은 군사적 측면에서 여전히 확고한 일국주의를 보이고 있으나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미국, EU, 일본의 3극에 의해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어가는 추세이다. 향후 중국이 경제대국으로 부상한다면 경제부분은 중국을 포함한 4극체제가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 경제 외적인 면에서는 군사력의 차이로 미국을 견제하는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중국의 경우 향후 패권국의 잠재가능성이 있으나 그 실현 여부는 불투명하다고 할 수 있다. 현재로써는 EU가 미국의 패권을 견제하고 현재의 속도로 결속하게 될 경우 인구, 자원, 경제적 부, 과학기술, 군사력에 있어서 초강대국으로 부상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그러나 세계 주요 강대국간 통상마찰이 확산되면서 국제무역환경은 예측하기 힘들 정도로 신보호주의가 심화되고 있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최근 들어 통상마찰은 선진국뿐만 아니라 선진국과 개발도상국간에도 발생되고 있어 신보호무역주의의 대두와 더불어 확산되고 있다. 미국과 EU간의 통상마찰은 바나나, 쇠고기, 항공기분쟁 등 다양한 부문에서 발생하고 있고 세계 여러 나라들은 두 진영간의 분쟁에 주목하고 있다. 이들 간의 분쟁결과가 앞으로 각국의 통상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각국의 통상 방향을 제시해 주기 때문에 세계경제의 두 거목이 어느 쪽으로 움직이는지에 대한 관심은 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이다.냉전 종식 이후 미 ? 소의 이념체제 대립에서 미 ? EU간 경제 대립으로 세계질서가 재편된 현시점에서 미국과 EU의 통상마찰은 과거 무력전쟁보다 더 큰 파급효과를 가져오고 있으며, 향후 세계경제의 흐름을 뒤바꿔 놓을 수도 있는 중요한 이슈라고 할 수 있다.따라서, 세력이 더욱 확대된 EU와 미국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과거부터 지속되어 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오히려 미국을 견제하고 유럽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90년대 들어서면서 미국의 패권주의에 대하여 유럽은 지역통합의 심화로 대응하여 왔다. 1991년 마스트리히트조약이 체결되면서 EC가 EU로 새로이 거듭나면서 유럽은 지역통합에 의해 경제 및 군사적으로 강해질 수 있었고 외부적으로 다른 강대국의 패권을 견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유로화라는 단일화폐의 도입은 유럽의 경제통합을 가속화시키고 달러화로부터의 의존도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도록 하였다.2007년 자료를 기준으로 유럽연합의 인구는 4억5천만 명이고 미국은 3억 1백만 명이다.) GDP는 유럽연합이 9조 달러, 미국이 12조 달러이며 일본이 4조 달러)인 것에 비하면 유럽연합의 영향력을 알 수 있다. 총 교역규모도 세계의 40%를 차지하고 있다. 지난 2007년 1월 1일 루마니아와 불가리아가 새로 가입하면서 유럽연합의 회원국 수가 27개국으로 확대되면서 유럽연합이 명실상부한 국제사회의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특히 경제적인 부분에 있어서 최대 단일 경제권을 형성하게 되었다.2. 유로화 출범프랑스와 독일의 갈등을 해소하려는 노력에 중점을 두었던 초기의 유럽통합운동은 그 후 공산주의와 소련팽창주의 위협에 공동 대응하는데 집중되었다. 그러나 1989년 이후 소련을 포함한 동구사회주의권이 붕괴되면서 이념적, 군사적 요인의 중요성이 희석되고 대신 국제질서에서 경제적 요인이 가지는 중요성이 증대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조류는 1951년 파리조약에 의해 성립된 6개국 참가에 의한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수립 이후 꾸준히 계속된 유럽통합운동이 유럽공동체(EC)를 거쳐 마침내 15개국이 참가하는 유럽연합(EU)을 형성하면서 유럽연합의 경제적 통합체로서의 수립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되었고 나아가 정치통합의 일보를 내딛게 되었다.)1999년 1월 1일 EU 15개국 가운데 영국, 스웨덴, 덴마크, 그리스를 제외한 11개국은 EU의 새로운 공식단일통화인 유로(하지만 문화, 언어, 전통이 다른 지역으로의 취업을 위한 노동력의 이동이 쉽지 않으며 지역에 따른 임금수준의 격차도 심하다. 여기에 유로랜드 참가를 유보한 영국 등 4개국이 유로통화체제가 불안정을 계속할 경우 유로체제에의 동참을 거부하게 되면 유로랜드는 체제붕괴의 사태마저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 더욱이 유로화 출범이후 당초의 예상과는 달리 유로화는 달러화에 비해 약세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한편, 경제정책을 둘러싼 유럽중앙은행과 유로 회원국들간의 갈등은 유로화의 문제가 단순한 경제문제가 아니라 정치문제도 포함됨을 의미하며 이러한 갈등의 해소가 용이하지 않음을 보여 준다. 이와 함께 유로화 출범에 따른 유로 참여국가들의 난점은 실업문제에 대해 유연하게 대처하기 어려운 점이다. 유로참여 11개국가의 평균실업률(10.9%)이 미국의 2배를 넘고 유럽중앙은행(ECB)이 주요 통화, 재정정책의 수단을 통제하는 상황에서 개별국가들이 자국의 노동자들을 배려할 수 있는 수단은 거의 전무한 실정이다.)따라서 현재 상황으로는 유로화가 달러화의 기축통화역할을 대체할 가능성도 매우 낮을 뿐만 아니라 유로체제 자체의 순항과 유로화 출범에 합류하지 못한 4국의 장래도 불투명하기 때문에 예상만큼 달러중심체제에 위협이 되지 못하고 있다. 단지 유로화의 잠재력만을 인정할 뿐이다.3. 미국과 EU간 통상마찰 사례)1) 바나나 분쟁미국과 EU의 바나나 분쟁은 양국이 모두 직접적인 바나나 생산국이 아니라는 점에서 마찰이 시작되었다. 미국이 문제 삼고 있는 EU의 바나나 수입제도는 명백히 차별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EU는 1975년 과거 유럽의 식민지였으며 경제적으로 빈곤한 ACP)국가들과 로메조약(Lome Convention)을 체결하였다. 이러한 로메조약을 통해 EU은 ACP국가들의 농산물과 지하자원 수출을 지원한다는 취지에서 무관세 혜택을 주고 있다. 따라서 ACP국가의 대유럽 바나나 수출 역시 이러한 특혜의 대상이었다. 미국은 바나나 생산국이 아니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EU 바나나 수라 제도를 수정했는데도 불구하고 미국이 일방적으로 보복관세를 부과하고, 바나나 분쟁을 다른 산업분야로 확대시키는 것은 무책임한 행동이라고 비난하였다. 그러나 2001년 미국과 EU는 재협상을 통해 분쟁을 종결지었다.2) 쇠고기 분쟁(호르몬 쇠고기 분쟁)쇠고기 분쟁은 미국과 EU 모두 세계 최대의 농산물 생산국이자 수출국이라는 점에서 바나나 분쟁과는 약간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 문제가 되고 있는 쇠고기 분쟁은 호르몬 쇠고기 분쟁이라고 불린다. 미국에서는 대부분의 축산업자들이 소를 빠른 기간 내에 키우기 위해 자연 또는 인공 성장호르몬을 투여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다. 이에 반해 유럽에서는 1980년대 초반부터 소를 사육함에 있어 어떤 종류의 성장호르몬 투여도 허용하고 있지 않으며, 이 같은 이유로 성장호르몬이 투여된 쇠고기의 수입이나 유통도 금지시켰다.미국은 EU의 호르몬 쇠고기 수입금지조치가 불공정하다고 비난하며, 여러 연구와 검사를 통해 호르몬 쇠고기가 인체에 유해하지 않다고 밝혀 EU의 제도는 보호주의적인 무역장벽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EU는 호르몬 쇠고기가 인체에 유해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으며, 국민들의 보건을 위한 수입금지조치는 정당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미국은 이 문제를 여러 차례 WTO에 제소하였고 1998년 1월 WTO 재심위원회는 EU가 주장하는 호르몬 쇠고기의 인체 유해 가능성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았다며, 1999년 5월까지 이 제도를 시정하라는 결정을 내렸다.3) 항공기 산업부문미국과 EU는 모두 상업용 항공기 산업에서 세계적 경쟁력을 유지하는 것을 핵심적 목적 중 하나로 삼고 있다. 그 이유는 산업용 항공기 산업은 기종별로 30~130억 달러에 이르는 거대 규모의 초기 투자가 필요하지만, 반면에 규모의 경제 효과가 뚜렷이 드러나는 분야로 기술개발, 경제성장, 고용확산, 국가적 위신 상승 및 국가방어의 관점에서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EU의 Airbus와 미국의 Boeing간 대결은 1960년대 이후 세계 지 않았다. 왜냐하면 Airbus의 보조금에 대한 문제를 제기할 경우 유럽 국가들의 국영항공사들이 Boeing 항공기 불매운동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980년 내 말 들어 미국과 EU는 상업용 항공기 제조업체들에 대한 보조금 지원을 제한하기 위해 협상을 시작했다. 그 결과 1992년 ‘대형민간항공기협정(LCAA:Large Civil Aircraft Agreement)’이 체결되었는데, 이 협정은 WTO의 보조금 관련 규정들보다 더 제한적인 규정들을 담고 있었다. 대형민간항공기협정은 Airbus 해당국 정부의 신규 기종 프로그램에 대한 직접적 지원을 엄격히 통제하고 있는데, 개발보조금은 전체 개발비용의 33% 이하로 제한하였다. 그리고 개발보조금은 정부의 차입비용보다 더 낮지 않은 이자율로 17년을 기한으로 상환되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한 유럽은 미국의 국방부, 상무부, 항공우주국(NASA)에 의한 간접적인 지원을 총 민간항공 매출액 대비 4%로 제한하였다. 개발보조금의 경우 상환조건이 있었지만 간접적 지원에 있어서는 상환에 대한 규정이 없었다. 대형민간항공기협정의 합의는 양측 기업으로부터 우호적 반응을 얻어낸 반면, 유럽에 관대한 결정을 내렸다는 미국 상무부와 국무부의 불만을 야기하기도 하였다.미국 정부는 이 협정으로 보조금 지급이 삭감될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오히려 EU가 Airbus에 보조금을 계속해서 지급할 수 있는 근거로 작용하였다. 그리고 1992년 협정이 체결된 이후 Airbus의 시장점유율이 지속적으로 상승하기 시작했으며, 1992년에 30%에 불과했던 항공기의 신규 주문이 2000년부터 2004년까지 해마다 50%를 넘어서게 되었고, 2003년에는 처음으로 Airbus의 시장 점유율이 Boeing을 앞서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2004년 Airbus가 총 305대의 민간 항공기를 출하함으로써 Boeing의 281대보다 무려 24대의 항공기를 더 출하시켜 시장점유율 53%를 달성하게 되었다. 또한 Airbus가 일본과 중
    사회과학| 2007.12.05| 4페이지| 2,000원| 조회(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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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의 방위정책 PPT 자료
    목 차Ⅰ. 자위대는 어디로... Ⅱ. 평화 헌법과 유사법제 1. 평화헌법 2. 평화헌법의 개정 움직임 3. 유사법제(有事法制) Ⅲ. 방위정책 1. 방위정책의 변화 2. 자위대의 활동 확대 Ⅳ. 방위정책에 대한 각 국의 반응 Ⅴ. 한국의 대응책Ⅰ. 자위대- 6.25전쟁 종료 직후 '스스로를 지키는 군대' - 치안유지 목적 - 1950년대 이후 계속해서 자위대의 전력 확충하고 있음.Ⅱ. 평화 헌법과 유사법제 1. 평화헌법 - 제 9조 : '일본 국민은 항구적인 평화를 염원하고 인간 상호간의 숭고한 이상을 깊이 자각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각국 국민들의 공정과 신의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우리의 안전과 생존을 유지해 갈 것임을 결의하며, 우리는 평화를 지향하고 전제와 예속, 압박과 편협을 지구상에서 영원히 제거하기 위해 노력한다.'2. 평화헌법의 개정 움직임- 1990년대부터 개헌론 유행 - 개헌론 확산 배경 3. 유사법제 - 위기, 비상사태에 대비해 각종 법,제도를 정한다 - 유사법제 주요 내용 및 특징Ⅲ. 방위정책1. 방위정책의 변화 - 1951. 9. 미일 안보조약 체결 - 1960. 1. 새로운 미일 안보조약 체결 - 1978. 11. 미일 방위협력 지침 제정 - 1997. 9. 미일 방위협력 지침 채택 2. 자위대의 활동 확대 - 해외파병 - 전력증강사업Ⅳ. 방위정책에 대한 각 국의 반응1) 미국 - 전략적 입장에서의 일본은 세계전략 및 아시아.태평양 전략을 전개 해가는데 주요한 동반자 2) 중국 - 군사 현대화, 군비증강 3) 북한 - 군사력 강화 4) 한국 – 한국의 입지가 좁아짐Ⅴ. 한국의 대응책- 일본의 군비증강, 법제정비에 경계 및 사전 저지 노력이 긴요 - 대일 경계심, 비난 공세 재정립 - 현실적으로는 한일 양국간 협력관계를 유지하는 군사교류가 강화되어야 함. - 북한과 일본의 관계 악화 개선{nameOfApplication=Show}
    사회과학| 2007.05.18| 7페이지| 1,000원| 조회(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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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의 방위정책
    ☆ 목 차 ☆서 론Ⅰ. 자위대는 어디로...본 론Ⅱ. 평화 헌법과 유사법제1. 평화헌법2. 평화헌법의 개정 움직임3. 유사법제(有事法制)Ⅲ. 방위정책1. 방위정책의 변화2. 자위대의 활동 확대Ⅳ. 방위정책에 대한 각 국의 반응결 론Ⅴ. 한국의 대응책Ⅰ. 자위대는 어디로...일본 자위대(自僞隊)가 출범한 지 올해로 51주년. 6?25전쟁 종료 직후 ‘스스로를 지키는 군대’로 출발한 자위대는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반세기 만에 ‘세계 5대 강군’의 대열에 올랐다.일본은 1945년 8월 15일,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하면서 육군·해군·공군의 전력을 보유하지 않을 것을 선언하였으나,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일본의 치안유지를 목적으로 연합군 사령부(GHQ: General Headquarters) 사령관 맥아더가 경찰예비대를 창설하였다. 이어 1952년 보안대로 재편한 뒤, 1954년 현재의 자위대로 명칭을 변경하였다.1947년 시행된 일본의 평화헌법에는 국가간의 교전권(交戰權) 포기와 어떠한 전력도 가지지 않는다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어, 엄밀한 의미에서 자위대는 군대가 아니어야 한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이 평화헌법의 정신과 배치되는 형태로 1950년대 이후 계속해서 자위대의 전력을 확충하고 있다.군대로 거듭나고 있는 자위대의 병력은 현재 육상자위대 15만명 등 총 24만명, 숫자상으로만 보면 한국군의 절반에도 못 미치고 중국(160만명), 북한(10만명)보다 훨씬 적다. 그러나 군사전문가들은 자위대를 세계 5대 강군으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한반도 정찰위성, 최신예 이지스함, 미사일방어(MD) 시스템에 이르기까지 자위대의 군비확장엔 거침이 없으며, 매년 미국 다음으로 많은 5조엔(약 50조원) 이상을 군비 확충에 쏟아 붓고 있기 때문이다. 독자적인 무기 개발능력은 러시아에 떨어질지 모르지만 보유 장비의 성능만 따지면 미국 다음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해상자위대는 잠수함 16척과 고성능 함정 140척, 최신예 이지스함 4척을 갖고 있으며, 항공자위고, 평화를 사랑하는 각국 국민들의 공정과 신의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우리의 안전과 생존을 유지해 갈 것임을 결의하며, 우리는 평화를 지향하고 전제와 예속, 압박과 편협을 지구상에서 영원히 제거하기 위해 노력한다.)’라고 전문을 요약할 수 있다.이 전문은 제9조와 함께, 전쟁포기, 비무장, 항구적인 세계평화라는 일본 헌법의 이념과 정책을 잘 나타내고 있다. 헌법 제9조 1항의 전쟁포기조항은 다른 많은 국가의 헌법에도 명기되어 있는 사항이다.일본 헌법의 중요한 의미는 제9조 2항에 있다. ‘육?해?공군 및 기타의 전력은 보유하지 않는다.’라는 것은 유사적 군대 및 민병을 포함한 어떠한 전력도 절대 보유하지 않겠다는 완전한 비무장 선언이다. 이렇듯 철저하게 비무장을 선언한 나라는 헌법이 시행된 1947년 5월 3일 시점에서는 단지 일본뿐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평화헌법이라고 불리게 되었다.2. 평화헌법의 개정 움직임과거에는 헌법 개정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터부로 받아들여져 언론의 강한 질타를 받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서는 거의 모든 정당들이 적극적으로 헌법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걸프전을 계기로 헌법 논의의 필요성에 대한 국민적 인식이 확산되면서 주요 언론 매체와 지식인들, 그리고 각 정당들이 활발하게 헌법론을 제기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PKO 문제가 불거진 1992년부터 개헌론이 급속히 유행하기 시작하였다.특히 흥미로운 것은 개헌론의 문제의식과 내용들이 과거의 개헌론들과는 달리 매우 다양하며 그 지지 세력도 폭넓게 확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개헌론의 백가쟁명 시대라고 할 만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고 보아진다. 이러한 분위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일본평화헌법은 이제 그 수명을 다한 듯 한 느낌마저 들 정도이다.1990년대 이래 최근까지 이렇게 개헌론이 확산되고 있는 배경)은 무엇인가?우선, 국제적인 배경에서 보자면 냉전 붕괴 이후 일본의 새로운 국제적 역할에 대한 활발한 모색이 이루어져 온 사회적 분위기를 들 수 있을 것이다’을 버리고 일본의 역사와 전통에 기초한 이념에 기초하여 새 시대에 상응하는 헌법을 작성하여 ‘얼굴이 보이는 일본’을 세계에 과시해야 한다는 것이다.그러나 역시 개헌의 실질적인 담당 세력은 정당이다. 우선 자민당의 전통적인 공식 입장은 “현행 헌법을 자주적으로 개정하도록 노력하여 국정에 즉한 개폐를 행한다.”는 것이다. 2000년의 ‘당운동방침’에서는 의회 중참양원의헌법조사회 및 여러 기회를 통해 21세기 신시대에 상응하는 헌법의 이상적인 모습을 국민과 함께 진지하게 논의한다는 식으로 완곡한 표현을 하였다. 자민당의 최대 파벌인 하시모토파는 당공약으로 헌법 문제를 제시하고 있는데, 평화주의를 유지하면서 “자위를 위해 필요한 군대의 보존을 명기한다.”, “집단적 자위권 및 집단안전보장을 위한 군대의 파견(무력행사)을 가능하게 한다.”는 입장에서 무력행사의 요건과 범위에 관해 새로이 안전보자기본법을 제정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민주당의 입장은 기본적으로 평화주의는 중요하면 유지되어야한다는 논리이지만 헌법에 대해서는 논의를 심화?확대하는 개헌이 중요하다는 시각이다. 논헌을 통해 헌법을 충분히 논의하여 만약 헌법과 현실이 괴리되어 있다면 안이하게 헌법 해석 등을 통해 넘어갈 게 아니라 개정하는 것이 성숙한 민주국가의 길이라는 입장이다.3. 유사법제(有事法制)'유사법제'는 특정한 법의 이름이 아니다. '유사(有事)'란 ‘위기상황’, ‘비상사태’이고, 법제(法制)는 '법과 제도' 또는 '법률로 각종 제도를 정한다'는 뜻이다. 결국 '유사법제'란 '위기, 비상사태에 대비해 각종 법.제도를 정한다'는 것이다. 자세히 말하면, 일본이 타국의 무력공격을 받았을 경우 자위대의 대응방침 등을 규정한 것으로, 지휘계통에 관한 체계적인 내용과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 간의 관계설정, 그리고 자위대의 원활한 활동을 위한 국민의 재산 수용문제를 규정하는 법률들이다. 다시 말해 무력사태에 대한 일본정부의 대처법안, 자위대법 개정 및 안전보장회의 설치안 등 3개 법률을 묶어 ‘유사법제’라고 한다는 능력과 법적 근거가 모두 마련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동 개정안은 안보회의(총리 등 각료 8명 참석)를 안보기구로서의 기능을 보강하기 위해 산하에 평상시부터 위기관리 대책을 연구·제언하는 전문위원회를 신설하도록 하고 있다.종합하여 보면 무력공격사태법안은 '위기상황이 무엇인지'를 정의하고 있고, 자위대법 개정안은 '위기상황 시 자위대가 원활하게 군사행동을 하는 데 필요한 조치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고 안전보장회의는 일본 정부의 최고 지도자인 총리가 위기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소집하는 국가최고대책회의이다).유사법제에는, 유사시 각 지방자치단체를 일본수상이 지휘, 명령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된다고 명기되어있다. 명령을 듣지 않는 지방 자치단체장을 즉각 해임할 수 있는 권한이 유사시 수상에게 주어진다. 이것은 주로 오키나와를 관심에 두고 삽입된 조항이고, 결국 유사시 미군이 오키나와에 자유로이 출입할 수 있도록 만들어, 일본에 핵무기 반입까지도 가능하게 만들기 위한 법적인 근거라 할 수 있다.Ⅲ. 방위정책1. 방위정책의 변화1950년 한국전쟁 발발과 그 후 미?소간의 군사적 대결이 첨예화 된 상황에서 1951년 9월 미?일간에 안보조약이 체결되었으며, 일본은 동 조약에 따라 미국에게 군사기지 제공과 함께 미군의 일본주둔을 허용하였으나, 미국이 일본을 방위한다는 명백한 조항이 없으며, 또한 일본 내에서 소요사태 발생 시 주일미군이 출동할 수 있다는 소위 ‘내란조항’ 문제로 인해 일본 내에서 불평등 조약이라는 불만이 고조되었다. 이에 따라 1960년 1월 새로운 안전보장조약이 미?일간에 체결되었으며 동 조약에 따라 일본에 대한 외부의 무력공격에 미?일 양국이 공동방위의 의무를 갖게 되었으며, 미?소간의 냉전심화 및 일본의 경제발전에 따른 방위력 증강 추세에 맞추어 1978년 11월 미?일 방위협력을 위한 지침이 제정되었다. 동 지침에 따라 자위대는 일본영역 및 주변 해?공역에서 방위작전을 수행하는 반면, 미군은 침공부대의 기지를 공격하는 등의 공세적 작전을 제 9조는 국가의 교전권을 인정하지 않고 있으므로 자위대는 어떤 경우에도 영토 밖으로 나가서 실력행사를 해서는 안된다. 즉 “국가의 자위”를 목적으로 하는 최소한의 실력조직으로 그 임무는 “전수방어”가 전부이다. 그러나 현재 보이고 있는 자위대의 활동반경은 헌법규정을 사문화 한지 오래다).일본은 자위대를 첨단무기로 무장시키기 위해 막대한 군사비를 지출하고 있다. 일본은 97년 기준으로 409억 달러를 지출했다. 이는 미국의 2730억 달러, 러시아의 640억 달러, 프랑스 415억 달러에 이은 세계 4위 수준이며, 한국의 147억 달러 보다는 3배나 많은 규모이다. 일본의 군사비 증대는 동북아의 경쟁상대로 간주되는 중국과 비교해서도, 절대 액수나 증가비율에서도 높은 것으로 나타나있다.이런 자위대의 군사력 강화는 비단 재래식 무기에 그치지 않고, 대량살상무기 개발 능력의 향상으로 확대되고 있다는 점에서 깊은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현재 일본은 비핵 3원칙에 따라 핵전력은 보유하지 못하지만, 필요시 핵무기 제조를 할 수 있는 능력은 충분하다. 이러한 핵무기 개발능력은 우익세력의 위험한 정치적 발상으로 연결될 수도 있다.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자위대의 역할 확대이다. 경찰예비대→보안대→자위대로 명칭 변경을 해오면서 자위대는 미군의 보조역할에서 벗어나고 있다. 1992년 6월 제정된 유엔평화유지활동(PKO)협력법은 자위대사에 한 획을 그었다. 그 후 자위대는 국제공헌을 명분으로 내걸고 캄보디아, 모잠비크 등에 요원을 보내고, 이어서 1994년에는 자위대법 제100조 8항에 명시하여 자국민 보호를 위해 자위대가 해외로 나갈 수 있는 길을 마련했다. 이후 활동범위가 더욱 넓어져 2001년 11월~12월 아프가니스탄에 6척의 함정을 파병하기도 한다.또한 일본 참위원은 지난 2001년 12월 7일 본회의에서 자위대가 유엔평화유지군 주요업무에 참가하도록 허용하고 무기사용 기준을 대폭 완화하는 것을 골자로 한 평화유지활동협력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이로써 지금까지 제한적으로만.
    사회과학| 2007.05.18| 11페이지| 2,000원| 조회(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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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과학]발칸전쟁
    Ⅰ. 서론복잡한 민족 구성을 이룬 발칸(Balkan) 반도는 그 타오르는 민족주의와 열강의 이해가 얽히고 합쳐서, ‘유럽의 화약고’ 라고 불리고 있었다. 1908년, 터키에 혁명이 일어나자 오스트리아는 슬라브인이 많이 사는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 두 주를 병합하였고, 슬라브계 세르비아의 반오스트리아 기운에 기름을 부었다. 러시아도 범슬라브주의의 기치 아래 이들을 이용하고, 그 영향 하에 발칸동맹을 결성시켰다. 이 동맹은 트리폴리 전쟁으로 약체가 된 터키에 개전 했으나, 터키로부터의 영토의 할양을 둘러싸고 또 다시 전쟁이 일어나게 되어 그 국제 긴장은 일층 더해 갔다. 이러한 발칸 문제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다.Ⅱ. 본론1. 발칸동맹(1) 세르비아와 불가리아의 동맹조약 (1912. 3. 13)① 배경- 이탈리아가 일으킨 트리폴리 전쟁은 발칸 전쟁을 잉태하고 있었다. 발칸 제국들은 발칸의 터키 영토를 서로 차지하려고 하였다.② 과정- 세르비아와 불가리아는 트리폴리 전쟁의 발발에 자극을 받아 1911년 10월부터 본 격적으로 교섭이 진행되었다.- 불가리아가 동맹의 목적을 대 오.헝 전쟁보다는 대 터키전에 두고 마케도니아를 자 치령으로 하자고 주장하여 교섭이 지연되었다.③ 내용- 마케도니아를 분할하기로 하여 터키와의 전쟁에 승리하는 경우⇒ 세르비아는 북부마케도니아를, 불가리아는 로도페산맥의 동남지역을 점유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리고 ‘분쟁지역’이라고 불리는 중앙지역은 차르의 중재에 회부하도 록 하였고 세르비아는 노비바쟈르 지방을 병합하기로 합의되었다.④ 의의- 이것은 비밀조약으로 불가리아는 트레이스(Thrace)와 콘스탄티노플을, 세르비아는 알바니아를 점령해서 아드리아 해의 진출을 구상하고 있었다.(2) 그리스와 불가리아 동맹 조약 (1912. 5. 29)① 과정- 그리스가 동맹을 제의하였으나 크리트(Crete)문제로 분쟁에 말려드는 것을 불가리아 가 주저하여 시간이 지연되었다. 따라서 조약에는 크리트 문제로 인한 전쟁은 규정 되어 있지 않았고 마케도니아에 관한 그리스의 요구도 후일로 미루었다.- 몬테네그로(Montenegro)는 서명을 하지 않았으나 터키와의 전쟁을 목적으로 하는 이 동맹을 적극 지지한다고 발표하였다.② 내용- 그리스는 조약에 아무런 규정이 없는데도 전쟁이 발발하면 살로니카(Salonika)와 콘 스탄티노플을 획득할 수 있기를 희망하였다.- 발칸동맹 형성 : 세르비아, 불가리아, 그리스, 몬테네그로- 각국의 희망이나 계획이 서로 상충되어 있어서 동맹 그 자체가 또 하나의 불씨를 마련한 것이었다.(3) 러시아1) 러시아 내부의 의견차이① 배경- 발칸 동맹은 러시아의 후원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런데 1911년 11월 스톨리핀 재상이 사망하였고 사조노프 외상마저 와병중이어서 러시아 외교는 일선 외교관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일선 외교관들은 두 그룹으로 나뉘어 있었다.② 내용- 해협 문제를 먼저 해결 해야 한다는 주장: 대표자 - 챠리코프(N.Charykov)해협 문제 해결을 위하여 터키가 발칸 동맹에 가입하고 그 대가로 유럽에 있는 터 키 영토의 현상유지를 보장한다는 구상으로 1911년 10~12월 적극적인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사조노프 외상의 거부로 그의 활동은 모두 무산되었다. 그의 행동을 ‘챠리코프의 연’(Charykov Kite)이라고 부른다.- 발칸 제국에 대한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 대표자 - 벨그라드 주재대사 하르트비그(N.H.Hartvig), 소피아 주재대사 내클루도 프(A.V.Nekludov)이들의 지원으로 발칸 동맹이 형성되었다.③ 의의- 정책상의 순위에 관한 의견차이에 불과하였고 발칸 지역에 대하여 러시아의 지위를 강화해야 한다는 근본취지에는 모두 동의하였다.2) 프랑스- 러시아의 동맹국인 프랑스에게도 발칸 동맹의 구체적인 내용을 상세히 알려주지 않 았다.- 프랑스는 그 내용을 1912년 8월 푸앵카레 수상이 러시아를 방문하였을 때 그 내용을 정확히 알게 되었다.- 그는 세르비아-불가리아 비밀조약 전문을 보고 사조노프 외상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 다. “독일이 러시아를 공격하지 않는 한, 프랑스는 팔칸 문제로 인하여 러시아에게 군사원조를 제공하지 않을 것이다 ”- 이것은 1892년의 군사협정을 다시 확인한 것이다.2. 제 1차 발칸 전쟁 (1912. 10 ~ 1913. 5)(1) 발발- 발칸 제국은 이탈리아-터키 전쟁이 끝나기 전에 터키에 대한 요구들을 관철시키려고 하였다.- 불가리아는 8월 14일 터키에게 마케도니아의 자치를 요구하는 각서를 전달하였다. - 열강은 발칸 제국에게 자중할 것을 권고하고 터키에게는 마케도니아의 개혁을 요구 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나 열강의 행동이 결실을 맺기 이전에 몬테네그로는 10월 8일 터키에 전쟁을 선 포하였다.(2) 전개- 세르비아 군과 불가리아 군이 승전을 계속하였다.- 불가리아 군은 10월 하순 콘스탄티노플 방어의 최후선인 차탗자(Chatalija) 선가지 진격, 콘스탄티노플을 눈 앞에 두게 되었다.- 세르비아 군은 11월 초순 알바니아 북부를 거쳐 아드리아 해에 도달하였다.※ 알바니아 문제의 대두- 오. 헝은 세르비아의 아드리아 해 진출을 묵과할 수 없어서 알바니아의 독립을 지지한다고 천명하였다.- 이탈리아는 오.헝과 같은 입장이었다.- 독일은 처음부터 오.헝을 지지하였다. 베드만-홀베크는 의회에서 “오스트리아가 그의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러시아의 공격을 받는다면 독일은 싸우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러시아는 공개적으로 세르비아를 지지하고 있었다. 내면적으로는 세르비아에게 러시아의 원조를 기대하지 말라고 충고하였다. 전쟁준비가 되어 있지 않던 러시 아가 후퇴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알바니아 위기는 모면되었다.- 12월 3일 그리스만 제외하고 불가리아, 세르비아, 터키간에 휴전이 성립되었고 17일 에는 런던 회의가 개최되었다.- 런던에서는 발칸 제국의 회의와 열강의 대사회의가 동시에 열렸다. 여기에서 알바니 아의 지위와 국경, 에게 도서, 노비바쟈르 문제 등이 토의되었다.- 1913년 2월 터키에 쿠데타가 발생하여 베이(E.Bey)가 이끄는 극우파들이 정권을 잡 고 발칸 제국에 대한 양보를 반대하게 되자 전투는 다시 계속되었으나, 전세는 터키 에 불리하게 되었다.(3) 전쟁의 종식- 1913년 5월 30일 런던 회의의 결정으로 제 1차 발칸 전쟁은 종식되었다.- 터키는 에노스-미디아(Enos-Midia)선 이서의 모든 유럽 지역을 포기하였다. 크리트도 포기하였다. 알바니아, 에게 도서 문제는 열강의 결정에 맡기기로 하였다.3. 제 2차 발칸 전쟁 (1913. 6 ~ 8)(1) 배경- 런던 회의 결정에 관하여 발칸 제국의 이해가 서로 상충되어 다시 전쟁이 발발하였 다.(2) 전개- 1913년 6월 1일 세르비아와 그리스는 대 불가리아 동맹을 체결하였다.- 아드리아 해 진출이 좌절되고 불가리아와 약속한 마케도니아 지역조차 얻지 못하게 된 세르비아가 이 동맹의 결성을 추진한 것이다.- 6월 말 불가리아 장군 사보프(M. Savov)가 정부의 승인도 없이 세르비아, 그리스를 공격하여 제 2차 발칸 전쟁이 발발되었다.
    사회과학| 2007.05.18| 5페이지| 1,000원| 조회(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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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과학]이탈리아의 통일
    이탈리아의 통일1. 이탈리아 통일의 배경(1) 이탈리아 문제의 성격신성 로마 제국 말기에 이르러서 이탈리아 반도는 프랑스, 오스트리아, 스페인의 각축장이 되었다. 이러한 이탈리아에게 통일 의지를 불어넣은 것은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의 영향이었다. 비엔나 체제에 의하여 유럽 국제정치 질서는 외형상 혁명 이전의 상태로 복귀하였으니 혁명의 영향은 사라지지 않았다. 봉건적인 모든 권리가 폐지되었고 법 앞의 평등사상이 도입되었다. 이탈리아에서의 자유주의 운동이랑 곧 자유주의 헌법의 채택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이탈리에서는 이러한 헌법채택 운동과 통일을 위한 투쟁이 동일시되어 있었다.(2) 이탈리아 통일의 3방안① 법왕 중심의 통일방안 : 법왕을 의장으로 해서 이탈리아를 하나의 연방으로 구성하자는 방안이다. 지오베르티(V.Gioberti)가 그의 대표적인 주창자였는데 자유주의 법왕으로 알려진 피우스(Pius) 9세에게 큰 희망을 갖고 있었지만 1848년 11월 로마의 폭동으로 법왕은 나폴리왕국으로 도피하였다. 따라서 법왕을 중심으로 하는 통일방안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었다.② 마치니(G.Mazzini)의 공화국안 : 마치니는 카르보나리에 참여했으며 1831년에는 ‘청년 이탈리아’라는 혁명단체를 조직하여 폭동계획과 공화국 이론의 전파에 주력하였다. 2월 혁명 이후 밀라노에서 폭동을 일으켜 이탈리아 공화국을 창설해야 된다는 구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이탈리아를 둘러싼 국제정치 현실과 이탈리아 국민의 수준으로 보아 실현성이 전혀 없는 것이었다.③ 피에드몬트 중심의 통일방안 : 피에드몬트를 중심으로 이탈리아를 통일시켜야 된다는 방안이 가장 현실성이 있는 것이었고 당시 이탈리아의 여러 국가 중에서 통일을 주도할 수 있는 국가는 피에드몬트뿐이었다.(3) 카루브(Camillo Cavour)카부르는 조국을 통일한 정치인으로 영국 의회주의 신봉자임 국제정치 현실을 바로 직시할 수 있는 능력과 현실 감각이 뛰어난 정치가이다. 그러나 최근 그의 서한집 발간을 계기로 그가 무자비한 정치인이었을 뿐 아니라 이탈이라 통일을 계획하거나 구상해 본 적도 없었다는 평가가 일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정권유지를 위하여 가리발디(G.Garibaldi)와 같은 과격론자들을 제거하는데 최대 관심이 있었다고 한다. 카부르의 첫번째 목적은 가리발디와 같은 과격론자들이 실패하는 것이었고 이탈리아의 통일은 부차적인 것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을 수 있다.(4) 리소르지멘토(Resorgimento)이탈리아어로 ‘부활’을 뜻하는 리소르지멘토는 19세기 초부터 이탈리아의 통일운동을 지칭하는 낱말이 되었다. 2월 혁명 이전까지의 리소르지멘토 운동은 이탈리아 문제는 이탈리아 인에 의하여 이룩될 수 있다는 가정에 입각하고 있다. 그러나 리소르지멘토 운동은 이탈리아 자체만의 문제가 결고 아니었고 비엔나 체제의 문제이며 따라서 열강들의 문제였다. 리소르지멘토 운동은 2월 혁명 기간중에는 피우스 9세에 대한 국민적인 실망과 마치니 공화국론의 비현실성이 노출되면서 피에드몬트를 중심으로 통일운동을 전개해야 된다는 방향을 바뀌게 되었다. 1861년 3월 이탈리아 왕국의 창립으로 리소르지멘토 운동은 성공을 거두게 된다.그 후 1866년 오스트리아, 프러시아 전쟁을 계기로 하여 다시 로마를 회복하게 되어 리소르지멘토의 큰 기틀이 잡히게 되었다. 그리고 트렌티노(Trentino), 이스트리아(Istria), 남부 티롤 (Tyrol)은 제 1차 세계대전 후에 획득하여 이로써 이탈리아의 리소르지멘토 운동이 완료되었다.(5) 카부르와 나폴레옹 Ⅲ세카부르는 러시아나 프러시아가 이탈리아 문제로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할 만큼 이탈리아 문제에 이해관계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동맹국으로 영국과 프랑스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영국은 1856년 파리조약에 의한 유럽정치질서에 만족하고 있었으며 러시아에 대신한 프랑스의 강대화를 저지하는 것에 주력하였기 때문에 사르디니아를 지원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카부르는 프랑스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고 나폴레옹 Ⅲ세에 추파를 보내게 되었다. 프랑스는 전통적으로 이탈리아 반도에 이해관계를 갖고 있었다. 특히 나폴레옹 Ⅲ세는 민족주의 운동에 지원을 보내 왔고 또 이탈리아 통일에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나폴레옹 Ⅲ세는 개인적으로 이탈리아 재편에 관여할 의향이 있었으나 공개적으로 지원을 표시 할 수 없었다.(6) 오르시니(Felice Orsini)사건 (1858.1)나폴레옹 Ⅲ세는 오르시니 사건을 계기로 이탈리아 문제에 개입할 수 있게 되었다. 1월 14일 이탈리아인 오르시니는 오페라 좌로 가던 나폴레옹 Ⅲ세와 황후를 암살하려고 하였으니 실패했다. 오르시니는 이탈리아 통일에 적극적인 지지자였으나 황제가 된 후 태도가 변한 나폴레옹 Ⅲ세를 배반자라고 지목하여 암살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 사건을 프랑스 정권과 관련된 문제로 보고 있었으나 나폴레옹 Ⅲ세는 도리어 오르시니를 영웅시하였고 이 사건을 계기로 이탈리아 문제에 관여코자 하였다.오르시니는 결국 처형당했으며 이탈리아의 통일을 염원하는 마지막 서한을 나폴레옹 Ⅲ세에게 보냈다. 카부르는 오르시니 사건이 터지자 나폴레옹 Ⅲ세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국내의 모든 혁명론자들의 탄압과 축출을 단행하였다.(7) 플롱비에르(Plombieres)의 비밀합의(1858. 7. 20)나폴레옹 Ⅲ세는 물리학자 코노(H.Conneau)를 튜틴으로 보내 엠마뉴엘 국왕과 카부르와 회견케 하였고 여기에서 카부르와 나폴레옹 Ⅲ세의 플롱비에르 비밀회동이 합의되었다. 7월 20일 자국의 내각에도 알리지 않고 비밀리에 그랜드 호텔에서 4시간 동안 밀담을 나누면서 중대한 음모를 꾸며 놓았다.‘플롱비에르 협약’(Pact of Plombieres)이라고 불리는 합의는 조인된 어떤 문서가 아니라 카부르의 조약 초안에 두 사람이 합의한 것이다. 다음해 1월 19일 양국간의 조약으로 확정되었다.※ 플롱비에르 조약 내용①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은 피에드몬트가 도발하고 이 전쟁으로 인한 열강과의 관계가 전쟁 의 국지화 노력은 주로 프랑스가 담당한다.② 전후 이탈리아는 다음과 같은 4개의 정치단위로 구성된다 : ⓐ 피에드몬트, 롬바르디, 베네치아, 파르마, 모데나 등으로 구성되는 북부 이탈리아 왕국 ⓑ 투스카니를 중심으로 하는 중부 이탈리아 왕국 ⓒ 로마와 주변지역으로 축소된 법왕령 ⓓ 나폴리 왕국③ 이들 4개의 정치단위는 연방으로 구성되며 법왕이 그 의장이 되나 실제로는 피에드몬트 가 지배한다.④ 프랑스는 피에드몬트 영토인 사보이를 합병한다. 1859.1.19일 조약에서 니스의 할양이 추가되었다.⑤ 빅토르 엠마뉴엘(Victor Emmanuel)국왕의 장녀인 클로틸드 공주와 나폴레옹 Ⅲ세의 조카 인 제롬공과 결혼한다.(8) 프랑스 ? 러시아의 비밀합의 (1859. 3. 3)라인강과 롬바르디 평야에서 동시에 전쟁을 수행하는 남북 양면전쟁의 가능성으로 인해 나폴레옹 Ⅲ세는 오스트리아와 프러시아간의 동맹이 체결되는 것을 저지하고 최소한 프러시아의 중립을 확보해야 했다. 프러시아 국왕 프레데릭 윌리암은 1858년 11월에 그의 동생인 윌리암이 섭정하였다.그는 자유주의자로 외교면에서는 영국과의 연결을 구상하고 있었으며 국내적으로는 독일적인 것을 강조하여 오스트리아와의 친밀을 도모하고 있었다. 따라서 나폴레옹 Ⅲ세로서는 러시아의 역할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러시아의 병력을 오스트리아 동부 국경에 집결시킴으로써 프러시아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동시에 오스트리아가 모든 병력을 이탈리아 선전에 투입하는 것을 저지시키려는 방안에 프랑스는 착안하였다.제롬 공은 프러시아가 오스트리아를 지원하는 경우 러시아가 프랑스 편에 서서 참전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러시아는 오스트리아와 프러시아를 대해 주겠다는 약속만 하였다. 1859년 1월 왈레브스키 외상은 제롬 공의 러시아 접촉 사실을 알고 제롬 공을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결국 왈레브스키 외상이 다시 러시아와 교섭하여 3월 비밀조약이 체결되었다.2. 이탈리아 통일전쟁(1) 전쟁의 도발1859년 나폴레옹 Ⅲ세는 “짐은 우리와 귀국 정부와의 관계가 과거처럼 우호적이 못되는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이다 ”라고 프랑스 주재 오스트리아 대사에게 공개적인 경고를 하여 물의를 일으키게 되었다. 이로부터 프랑스와 오스트리아간에 전운이 깃들게 되었고 열강 특히 영국이 국제회의를 소집하여 이탈리아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자고 제의하였다.오스트리아는 중부 이탈리아 국가들에 대하여 간섭하지 않으며 사르디니아를 중립화한다는 영국의 중재안은 성공할 수 없었다.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고 있던 롬바르디아 사람들이 사르디니아에 잠입하여 사르디니아 군인이 되는 것은 오스트리아에 대한 도전이었다.따라서 롬바르디아로의 귀환 문제가 전쟁의 구실이 되었다.(2) 전황과 빌라프랑카(Villafranca) 휴전조약 (1859. 7. 11)오스트리아 군은 피에드몬트를 침공하기 시작하였으나 신속한 군사 행동을 취하지 못하여 프랑스 군이 전장에 도착하기 이전에 어떤 결정적인 승기를 잡지 못했다.프랑스 ? 피에드몬트 연합군은 6월 4일 마젠타 전투에서 승리하였고 6월 24일에는 솔페리노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오스트리아 군을 4각 지대의 요새지로 후퇴시켰다. 이탈리아 전선에 투입된 부대는 주로 헝가리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이탈리아인 부대, 크로아티아인 부대의 경우와 같이 군기가 문란하고 전의가 전혀 없었다. 따라서 전투에 승리할 수 없었다.나폴레옹 Ⅲ세는 솔페리노 전투를 계기로 7월 11일 빌라프랑카에서 오스트리아 황제 요셉을 만나 휴전에 합의하였다. 그 이유는 ① 5월 투스카니, 모데나, 파르마 등지에서 혁명이 일어나 기존 지배자들이 축출되는 사태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 배후에는 카부르와 연결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탈리아 반도 전체가 나폴레옹 Ⅲ세 자신이 통제할수 없는 사태에까지 발전할지 모른다고 우려한 점. ② 오스트리아가 전투에서 패퇴하자 프랑스에게는 프러시아 문제가 야기되었다. 프랑스는 남북 양면전이라는 최악의 경우에 직면할 가능성이 있게 된 점③ 오스트리아가 4각 지대의 요새로 후퇴함으로써 전투가 장기전에 돌입하게 된 점.
    사회과학| 2007.05.18| 5페이지| 1,000원| 조회(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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