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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전]세종, 그의 업적과 이면
    세 종(世宗)그의 업적, 그리고 이면세종은 1397년 태종의 셋째아들로 원경왕후 소생으로 태어났다. 1413년에 대군이 되었고 1418년 왕세자에 책봉, 같은 해 8월 22세의 나이로 태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세종은 군사면에서 상왕인 태종에게 맡기고 자신은 주로 정치, 경제, 문화면에 힘써 치적을 쌓았다.세종은 정치적으로 중앙집권체제를 운영하기 위해 1420년 집현전을 설치하고 황희, 맹사성 등을 등용하여 왕권과 신권의 조화에 노력하여 의정부를 견제하였다. 또한 집현전을 왕실학술기관으로 확장시켜 신숙주, 성삼문 등의 젊은 학자진을 등용하여 정치자문, 왕실교육, 서적 편찬 등 이상적 유교정치를 구현하였다. 그리고 정음청을 설치하여 신숙주,성삼문 등으로 하여금 한글을 창제하게 하였다. 이렇게 하여 1443년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3년간의 검증을 거쳐 1446년 반포하였다.혹자는 신숙주, 성삼문 등의 학자들이 한글을 만들었고 세종대왕은 단지 그들에게 명령하는 왕이었다는 이유만으로 한글을 창제한 위대한 왕이라 평가받고 대왕이라는 칭호를 받았다고 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그렇지 않다. 물론 한글에 대해 연구하고 만든 장본인들은 신숙주, 성삼문 등의 젊은 학자들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세종의 명이 아니었다면 그들이 한글을 만들 생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세종은 학자들로 하여금 한글을 만들 기회를 제공하고 동기를 부여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한글창제에 큰 영향을 끼치고 한글창제의 중심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것이다.그러나 한글창제가 새로운 문자를 만들어 낸 것은 아니었다. 한글은 단군시대에 이미 만들어져 있던 가림토문자라는 것을 토대로 만든 문자라고 한다. 실제로 세종대왕은 성삼문을 가림토문자가 새겨져 있는 비석이 있는 만주방면으로 여러 번 보내 가림토문자를 토대로 우리글을 연구하도록 했다고 한다. 한글이 새로운 문자가 아니라는 것은 실록에도 나와 있으며 가림토문자가 새겨진 비석은 국내에서도 발견되었었다.세종은 한글창제 뿐만 아니라 이천, 장영실 등으로 하여금 금속활자인 경인자, 갑인자, 병인자 등을 만들게 하였다. 이 때 만들어진 갑인자는 정교하기로 굉장히 유명한 활자이다. 이 갑인자는 활자 크기를 일정하게 하고, 조판방식을 개량하여 하루 인쇄량을 크게 늘리는 등 조선 초기의 활자 인쇄술을 크게 발전시켰다.세종은 초기에 억불정책을 펼쳐 5교 양종(천태종?조계종)을 선종과 교종의 2종으로 통합하고 각 18개씩의 사찰만 인정하고 경행(승려가 좌선을 하다가 졸음이 오거나 피로할 때 심신을 가다듬기 위해 경문을 외면서 일정한 장소를 조용히 걷는 행보)도 금지했다. 그러나 말년에는 궁중에 내불당을 짓고 승과제도, 경행을 인정하는 등 왕실부터 불교를 장려하여 불교 발달에도 도움을 주었다.세종은 음악에도 관심을 기울여 1425년 관습도감을 설치하고 박연으로 하여금 아악을 정리하게 하여 음악을 장려하였다. 또한 실록 보관을 위하여 춘추관?충주?전주?성주에 4대 사고를 설치하였는데,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만 남고 모두 불타버렸다. 불타버린 3개의 사고에 있던 많은 실록들이 있었더라면 조선의 역사에 대해 더욱더 자세한 연구가 가능했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사고의 소실은 크나큰 역사적 손실이 아닐 수 없다.과학기술 측면에서도 세종은 많은 업적을 남겼다. 1442년 이천, 장영실로 하여금 강우량을 측정할 수 있는 측우기를 만들도록 하였다. 이 측우기는 1639년 이탈리아의 B.가스텔리가 발명한 측우기보다 약 200년가량이나 앞선 것이다. 우리 민족의 과학기술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또한 궁중에 과학관인 흠경각을 설치하여 과학기구를 비치하도록 했고, 혼천의, 해시계, 물시계 등 각종 과학기구를 발명했다.또한 세종은 김담, 이순지 등을 시켜 역법서를 만들도록 하였다. 당시에는 우리나라에 맞는 역법서가 없어 중국의 역법서를 빌려 썼는데 이것 역시도 중국의 위도와 경도를 중심으로 만든 것이어서 그대로 사용할 수가 없었다. 우리나라에 맞지 않는 것을 쓰다보니 일출, 일몰, 그리고 절기 등에 있어서 오차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이런 불편한 점을 없애기 위해 이전부터 역법을 배워오려 했었지만 세종 때에 이르러서야 중국 원나라의 수시력, 중국 명나라의 대통력을 참작하고 아라비아의 회회력을 빌어 역법서를 편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혼천의와 간의와 같은 천문관측기구를 통해 한양의 경위도와 동 하지점의 정확한 위치를 측정하여 칠정산내외편을 편찬하였다. 이 칠정산내외편은 우리나라 최초의 역법서로서 현재 규장각에 소장되어있다. 그 외에도 이순지는 천문, 역법, 의상 등에 관한 지식을 종합한 을 펴냈다.경제?사회적 측면에서도 세종은 공법상정소를 설치하여 각 도의 토지를 비척에 따라 3등급으로 나눠 세율을 달리하는 안을 실시하였으나 결함이 많았다. 이에 세종은 공법상정소의 안을 시정하기 위하여 전제상정소를 설치하고 풍흉에 따라 연분9등법,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전분6등법을 사용하여 조세의 공평화를 도모하고, 전국의 토지를 20년마다 측량하여 양안을 작성하도록 했다. 또한 의창, 의료제도, 금부삼복법을 제정했고, 노비에 대한 지위 등을 개선, 사형을 금하도록 했다.복지제도 중 의창은 고구려의 진대법, 고려의 의창과 유사한 것으로 먹을 것이 없는 봄에 식량을 빌려주었다가 가을에 되돌려 받는 제도였다. 의료시설로는 혜민국, 동?서대비원, 제생원, 동?서 활인서 등을 두었다.대외정책면에서는 국가의 주권확립과 영토확장에 대한 치적이 있다. 명나라와의 관계에서는 처녀를 바치는 것을 폐지하고 금, 은 대신 마, 포로 대신하도록 했다. 여진과의 관계에서는 무력으로 강경책을 사용하거나 회유하는 정책을 썼다. 4군과 6진을 설치한 뒤 여진족의 귀순을 장려하고 무역을 허용하는 한편 여진족이 침입할 때마다 군대를 동원하여 토벌하였다. 일본과의 관계에서는 이종무로 하여금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 섬을 토벌하게 했다. 이후 쓰시마 섬의 도주가 사죄하고 간청해오자 삼포를 개항하여 무역을 허락하였다. 이후 왜인의 출입이 많아지자 협상을 통해 계해조약을 체결하였다. 계해조약의 내용으로는 1년에 입항할 수 있는 세견선을 50척으로 제한하고, 세사미를 200섬으로 제한하는 한편, 반드시 수도서인에 한해 왕래하도록 무력과 출입을 통제하였다.이렇듯 세종대왕은 많은 업적을 세워 대왕이라 불릴 만큼 크나큰 치적을 세운 왕이다. 그러나 세종도 인간인 만큼 성군이면서도 다른 이면이 있었다.자신이 아끼는 신하인 황희가 사위의 청탁을 받자, 사간원이 황희를 탄핵하였다. 세종은 황희가 자신이 아끼는 신하이므로 벌을 주지 않으려 했지만 사간원의 성토가 너무 심해 결국 유배를 보냈다. 그러나 세종은 8개월 뒤 황희를 청탁받을 때의 벼슬인 우의정보다 더 높은 영의정의 자리에 앉혀 조정에 복귀시켰다. 사간원과 사헌부에서는 당연히 왕의 잘못이라며 황희의 복직이 잘못되었음을 간쟁하였다. 왕은 리더로서 당연히 잘못을 인정하고 황희의 복직을 취소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세종은 오히려 사간원과 사헌부의 관리들을 모두 하옥시켜버리고 말았다.
    인문/어학| 2006.11.16| 5페이지| 1,000원| 조회(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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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후감]하멜보고서
    는 대개 로 잘 알려진 책으로 1600년대 배를 타고 가던 중 표류를 당해서 제주도에 떠내려 온 ‘헨드릭 하멜’이 조선에 억류되어 있다가 조국인 네덜란드로 돌아간 뒤에 억류기간 동안 밀린 임금을 청구하기 위하여 쓴 보고서이다. 를 읽어보면 하멜의 문체가 상당히 건조하고 사무적인 것을 느낄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기행문이 아니라 임금청구를 위한 보고서였기 때문이다. 하멜은 이 보고서에서 당시 자신이 조선에 억류되어 있으면서 보고 느낀 것을 모두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이 는 유럽열강들에게 조선이라는 알려지지 않은 나라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고 열강들은 조선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하멜이 탄 스뻬르베르호는 원래 일본의 나가사키로 가려고 했었다. 자카르타에서 대만으로 간 뒤에 일본의 나가사키로 향해 가고 있던 도중에 배가 난파되어 제주도에 표류한 것이다. 당시 조선사회는 상당히 폐쇄적인 사회였으므로 조선인들에게 파란 눈의 외국인들은 괴물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하멜 일행 이전에 박연이 표류한 적이 있기에 그들은 하멜 일행을 국가차원에서 보조해주려고도 했었다. 그들이 지방에서 머무를 때는 그 지방의 지방관의 성격이 어떠하느냐에 따라 그 대우가 달라졌다.하멜일행은 제주도에 표류한 이후 서울로 갈 때까지 여러 일들을 겪으면서 살았다. 원래 있던 목사에서 다른 목사로 한번 바뀌었는데 두 목사의 하멜일행에 대한 대우는 완전히 달랐다. 선임 목사는 하멜일행에게 최대한 편하게 해주고 베풀어주려고 노력했었으나 후임목사는 그와 달리 그들에게 최소한의 먹을거리를 줘서 하멜일행은 받은 곡식을 되팔아 돈을 마련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던 중 하멜일행은 탈출계획을 세웠는데 그 계획이 실패하는 바람에 탈출하려 했던 자들은 처벌까지 받았었다.서울의 조정에서 하멜일행에 대한 서신이 내려온 뒤, 하멜일행은 서울로 올라가게 되는데 도중에 들른 도시들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서술되어있다. 그들은 해남-영암-나주-장성-정읍-임안산성-태인-금구-전주-여산-은진-연산-공주 의 순으로 제주도에서 서울까지 올라왔는데 이것은 제주도에서 전라도, 충청도를 거쳐 경기도, 서울까지 들어오는 먼 길이다.조정에서 왕을 만난 뒤 그들은 왕의 호위부대로 임명받아 매달 급료를 받게 된다. 나중에 청나라의 사신이 조선으로 찾아 왔을 때 왕은 하멜 일행에게 남한산성에 가서 지내게 하는데 이것은 하멜일행이 청나라사신을 만나 자신들을 조선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아예 만나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한 것으로 보인다.1655년, 청나라의 사신이 다시 조선으로 온다. 하멜일행은 바깥출입을 하지 말라고 명령을 받지만 일행 중 몇 명이 사신을 만나기 위해 거짓으로 장작을 구하러 나간다고 한 뒤에 청나라 사신 앞에 나타난다. 그러나 사신일행 중에는 네덜란드어를 알아들을 수 있는 인물이 없었고 결국 왕에게 그 소식이 알려져 박연이 보내지게 된다. 그러자 왕과 대신들이 이 사실을 청나라 황제에게 알리지 않기 위해 사신에게 뇌물을 주었고 결국 사신을 만났던 이들은 감옥에 갇히고 얼마 뒤 죽었다.뒤에 또다시 청나라 사신이 올 때가 있었는데 이때에 하멜일행은 또다시 외출금지의 명령을 받았고 그 명령을 어겼을 시에는 처벌을 받을 수도 있었다.그 때 일행 중 몇 명이 제주도로 좌초된 배를 조사하러 갔었는데 그들이 편지에 쓴 내용에 따르면 그들을 제주도로 보낸 건 청나라 황제가 하멜일행이 조선에 억류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 요구할 경우 제주도로 가던 배가 좌초해 그들이 죽었다고 알리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한다. 조정에서는 청나라 사신이 올 때마다 하멜일행을 집안에 연금하였다.청나라 사신이 떠난 뒤 조정의 대신들은 왕에게 하멜일행을 죽일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왕과 왕의 동생, 총사령관, 몇몇 고위관료 들은 하멜일행에게 호의적이었기 때문에 그들을 죽일 것을 원치 않았고 결국 하멜일행을 전라도로 유배보내는 것으로 일이 마무리 되었다.1656년 하멜일행은 서울로 올라올 때와 같은 길로 전라도를 향해 갔다. 그들은 전라병영에 들른 뒤에 일행 33명이 함께 살 수 있는 집을 받아 그곳에서 다함께 살았다.그 뒤로 사령관이 바뀔 때마다 하멜일행의 생활수준은 달라졌다. 어떤 때는 매우 잘해줘서 땔감도 구하지 않아도 되고 편하게 살다가도 어떤 때는 무척 가혹한 통치를 하는 사령관을 만나 산으로 다니면서 땔감을 구하고 급료가 줄어들기도 했다.에는 우리나라의 위치와 풍습에 대해서 자세하게 기록이 되어있다. 한반도의 위치는 위도.경도 와 일본과 중국의 위치를 기준으로 설명이 되어있다.에는 조선의 군대, 형법, 백성들의 생활모습, 무역 등에 대해서 하멜이 보고 느낀 것에 대해 상세히 기록이 되어있다. 무역에 대해서 기술해 놓은 부분을 보면 당시 조선의 해외무역과 조선인들의 세계관등을 알 수가 있다.당시 조선에서는 해외무역이 상당히 폐쇄적이었다. 무역을 하는 대상국가는 일본과 청나라로 한정되어 있었으며 청나라와의 국가적인 무역은 청나라에 바치는 조공이 전부였고 민간무역은 조선 내에서는 불가하였고 북경이나 중국 일부 지역에서 행해졌다. 청나라와의 무역에서 수송은 주로 말을 이용해 육로로 하느라 많은 비용이 들었기 때문에 주로 많은 양을 거래하는 상인들만이 했다. 이 상인들이 만상과 같은 조선시대 거상일 것이다. 양반과 거상들은 거래를 할 때 은으로 거래를 했지만 일반 평민이나 농민들은 쌀이나 다른 곡물로 거래를 했다.일본인들과의 무역은 부산의 왜관에서만 이루어졌다. 대마도의 도주가 왜관을 관리했다. 일본인들은 그곳에 후추, 피륙, 명반, 들소 뿔, 사슴가죽, 상어가죽 및 다른 여러 가지 물건들을 가져와 일본에서 필요로 하는 물건들과 교환을 했다.하멜의 기록을 보면 당시 조선인들이 보는 세계는 상당히 좁았다. 조선인들은 중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알고 중국의 황제가 세계의 국왕이며 그 이전에는 중국에 조공을 바쳐야 한다고 알고 있었다. 그러다가 하멜이 조선에 있을 때에는 청나라가 중국을 지배하고 있던 때였으므로 청나라가 다른 나라들을 지배하지 못하고 나라들마다 왕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조선인들은 네덜란드를 남반국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이것은 일본에서 담배를 들여올 때에 일본사람으로부터 담배를 남반국에서 들여왔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담배가 조선에 들어올 때 조선인들은 일본사람으로부터 담배의 재배법과 피우는 법을 배웠는데 하멜이 조선에 있을 때에는 너무나 담배를 많이 펴서 네다섯 살짜리 꼬마아이들부터 시작해서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담배를 피웠다고 한다.조선의 옛 문헌에는 세계에는 84000개의 나라가 있다고 적혀있으나 조선인들은 그것이 꾸며낸 이야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하멜일행이 조선인들에게 몇몇 나라의 이름을 말해줬으나 조선인들은 그것들을 도시의 이름이라고 생각했다고 하니 당시 조선인들의 좁은 세계관을 알 수 있다.당시 조선에서는 모든 식량을 스스로 공급하며 쌀과 곡물이 넘쳐날 정도로 재배되고 면과 삼으로 직물을 짰다고 한다. 누에도 많이 쳤으며, 은, 철, 납, 호피, 인삼뿌리 및 다른 물품들도 생산되었다.1662년에는 3년 째 흉년이 들어 상당히 힘든 해였다. 결국 하멜일행은 급료조차 받기가 힘들었고 결국 그들은 여수, 순천, 남원에 흩어져서 살게 되었다.떨어져 살게 되었어도 상황은 별로 다를 게 없었다. 여전히 어떤 사람이 그들을 통치하느냐에 따라 하멜일행에 대한 대우는 달라졌고 어떤 때는 정말 가혹할 정도로 힘들게 살 때도 있었다.하멜일행은 언제나 탈출할만한 배를 구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일은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그러다 배를 살만한 돈이 모이고 1666년에 하멜일행은 어떤 조선인을 통해 한 어부로부터 배를 구하게 되었다. 하멜일행은 탈출하기 위해 계획을 치밀하게 세웠고 9월 4일 다른 사람들 몰래 밤에 배를 타고 탈출을 시도했다. 탈출은 성공해서 하멜일행은 일본에 당도했다. 일본에 도착한 뒤 며칠 뒤에 그들이 원래 가려고 했었던 나가사키 지역으로 갔다.에는 당시 하멜일행이 나가사키 총독으로부터 질문받은 것과 대답한 내용이 있다. 총독이 하멜일행에게 물어본 것은 하멜일행이 조선에 가게 된 경위와 하멜일행이 있었던 조선의 지역에 대한 것과 조선인들의 생활모습에 관한 질문이 상당히 많다. 이것으로 추측해보건대 당시 일본에서는 또다시 조선을 침략할 생각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질문들에 하멜일행은 정성껏 대답했고, 그 내용들은 일본에게 있어 조선에 대한 좋은 정보가 되었을 것이다.나가사키에서 질문을 받은 뒤에 하멜일행은 출국을 허락받고 자신들의 조국을 향해 떠났다. 맨 마지막 부분에 조선에 대해서 간략하게 기술한 부분이 나온다. 그 부분에서는 조선의 대략적인 위치와 지리, 서울의 모습에 대해 쓰여 있다. 그 부분에 따르면 서울에는 양반과 중국, 일본과 거래하는 큰 상인들이 살고 있으며 조선의 모든 상품들은 서울을 거쳤다가 지방으로 퍼져 나갔다고 쓰여 있다. 또 많은 거래를 은으로 하기 때문에 대부분 고관들의 손에 달려있고, 다른 도시나 시골에서는 면과 곡식 등으로 거래가 행해진다.
    독후감/창작| 2006.11.16| 6페이지| 1,000원| 조회(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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