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 – ART – Historic event - Quality예술 Vs 낙서 ?! 어린이의 졸라맨 그림 장욱진 사람 Vs사 람 Instrumental reference perception individual texture Art 낙서 어린이 예술가 예술 Vs 낙서 ?!건축가의 설계 – 예술가 ( 현대화가 ) 의 창작행위 어떤 영감 ( 예술작품 ) 을 표현하기 위한 과정 예술가의 도구적 관계 맺기 “ 도구적 관계 맺기 ” 현대화가의 창작행위 자신 나름의 방식으로 해석 접근 , 표현영 감 Instrumental reference perception individual texture Art 예술가 박수근 – 마티에르 기법 김창열 – 박서보 - 박수근 민족적 정서 화강암의 질감 표현 한국의 야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화강석 민족적 정서의 표현 – 소박한 情 한국 석탑의 아름다움 예술가의 도구적 관계 맺기영 감 Instrumental reference perception individual texture Art 예술가 박서보 작품 제작 과정 = 예술 화선지를 바르고 또 바르고 선을 긋고 또 긋고 “ 이 과정이 모두 내 예술의 표현이다 . ” 묘 법 예술가의 도구적 관계 맺기Given event Historic event Quality art Instrumental reference perception individual texture : extend Emergent novelty Summary – 예술 / 역사적 사건 / 질의 창출Given event Historic event art Instrumental reference perception individual texture : extend Emergent novelty Architecture + @ 건축 - 예술 / 역사적 사건 / 질의 창출 Quality건 축 Instrumental reference perception individual texture “ 우리 ” 진정한 건축가 !! 건 축 관 설계 진행 방식 건축으로의 적용설계 진행 방식 건축가의 건축관 설계 진행 작가의 도구적 관계 맺기 건축관 ( 설계원칙 ) 르꼬르뷔제의 5 대 원칙 미스 반데로에 바자 자하드 이소자키 건축가의 도구적 관계 맺기 blocking건축관 ( 설계 원리 , 원칙 ) 르꼬르 뷔제 : 건축의 5 원칙 미스 반데로에 필립 존슨 바자 자하드 피터 쿡 : archigram 건축가의 도구적 관계 맺기건축가의 건축관 ( 원칙 ) 르 꼬르뷔제 건축의 5 대 원칙 필로티 옥상정원 자유로운 평면 수평 띠 창 자유로운 입면건축가의 건축관 ( 원칙 ) 미스 반데로에 건축의 5 대 원칙 건축적 요인으로서의 구조 , 그 가능성과 한계 공간의 건축적 문제 건축표현의 수단으로서의 비례 재료의 표현가치 회화의 조각과 건축과의 관계Rem koolhass – 땅 접기 건축가의 설계 진행 방식건축가의 설계 진행 방식 mvrdv – datascape Site data 분석 배치 형태건축가의 설계 진행 방식 김영준 – diagram 형태건축가의 설계 진행 방식 현상 설계 / 공모전 - 지형 읽기 - 형태로 접근 - 프로그램부산대학교 앞 공연장 계획 설계 주변 맥락 살피기 형태와 길 My workMy workInstrumental reference 하나의 맥락 기능 형태 맥락 이웃 자연 Quality individual texture “ 궁극적 목적 ” 질 을 확보하였는가 ? My work맥 락 적 건 축 Instrumental reference perception individual texture “ 서희 ” 진정한 건축가 건 축 관 설계 진행 방식 + 자신의 기법 개발설계 진행 방식 + 주변의 여러 맥락 통합되어 어우러져야 함 맥락 + 자신의 도구적 관계 맺기 도시라는 하나의 결은 건축이라는 가닥의 어우러짐 , 하나의 맥락 속에서 어우러져야 한다 . 결 론{nameOfApplication=Show}
구 고 현구고현 ? 동양 수학에서 직각삼각형의 직각을 사이에 둔 짧은 변 - 구 긴 변 - 고 직각을 마주하는 변 - 현 을 이르는말 = 직각삼각형EXT | WRITE TO ADD TEXT TEXT | ADD TEXT 구 고 현 중구 장현 단현 AB AC BD BC 가정 규구술 에 사용되는 물매는 고를 1 척 (30cm) 으로 뒀을 때의 각 선분 길이를 촌 (3cm) 으로 나타낸 값 AC 에 대한 각 선분의 비를 각 선분의 물매라고 보른다 . 이것은 삼각함수와 같다 .지붕귀가 직각에 바른귀 ( 마스미 ) – 평면도에 추녀가 도리에 대해 45 도를 이룸 홑서까래 ( 히토노키 ) – 부연을 달지 않고 처마 서까래만으로 된 처마 서까래 , 처마에 굴곡이 없는 경우가 가장 간단하다 . 허튼귀 ( 후레즈미 ) – 물매가 다른 지붕면이 교차하는 경우처럼 추녀와 도리사이의 각이 45 도를 이루지 못하는 경우를 이름 겹서까래 ( 후타노키 ) – 처마 끝에서 서까래 위에 짧은 서까래를 잇대어 달아낸 처마 서까래 , 처마가 굽은 경우일수록 복합해짐 평서까래 거 는 경우 선자서까래의 경우는 규구술의 최고 기술로 순차적으로 이론과 작도를 전개 해 나가는 과정이 경탄할만하다 . 교토 니시혼간지 한건물 창덕궁 희정당上 규구신서 ( 矩術新書 ) 에 실린 정방형 , 직각형 지붕의 규구 . 中 정방형 , 직사각형 지붕의 규구 설명모형 . 下 정방형 , 직사각형 지붕의규구 설명도 .곧은 지붕귀 ( 無反り 隅軒 ) 의 규구술 육각형 , 팔각형 선자서까래 간수표 ( 間数表 ) ( 각 상단 짝수표 , 하단 홀수표 )上 추녀 ( 隅木 ) 의 규구 ( 規矩 ) 에 의한 평고대 ( 木負 ) ( 右 : 부연평고대 ( 茅負 ), 左의 결합 ( 取付 ) 과 서까래의 이음 ( 垂木仕口 )) 中 허튼귀 ( 振隅 ) 각 선자서까래 사이의 치수 판독기계 ( 各扇垂木間數値讀取機械 ) 下 겹서까래 ( 二軒 ) 의 추녀 ( 隅木 ), 평고대 ( 木負 ), 서까래 ( 地垂木 ), 부연평고대 ( 茅負 ) 를 짜올린 상황 .규구술의 전승1827 년 生 1841 년 교토 상경 토오큐에게 기술 배우고 스승을 능가했다는 평을 얻고 양자가 됨 . 공포와 부채서까래 처마돌림을 담당하면서 규구술을 단련함 . 1874 년 안세이다이리 조영의 오오미야고쇼를 짓는 총감독 지권개정시 ( 토지의 사적소유권 확립 ) 오우미 ( 시가현 ) 지방의 측량에 종사 1876 년 오타니파 혼간지 양당을 재건 – 고격모범을 조사 13 년간 동량 ( 감독 ) 에 임명 67 년의 생애에 걸처 일본건축의 정통을 발전시 킴 규구술의 전승 EXT | WRITE TO ADD TEXT 헤이노우치 마사오미 키고 토오사이 - 히가시 혼간지본당 , 고야산 금당 규구술에 관한 저작물로 인해 일반화 촉진 . 막부봉건제의 붕괴를 맞아 근대화가 막 태동하기 시작 서양식계산법으로 치환되면서 , 규구술은 이론적 기초를 잃어버려 난해한 것으로 여겨짐 . 에도시대 장인의 신기 신비화되는 경향 . 서양건축법에 의해 쇠퇴 .막말에 규구술은 일본식 계산법을 바탕으로 고도의 발전을 이루지만 깊이 깨달은 장인은 드물었다 . 전해지는 서적에는 이론과 풀이법이 기록되지 않은 결과만 기록되어있음 . 특히 , 부채서까래의 등간격 나누기는 난해한 문제 . 나카무라 다츠타로 – 1894 년 - 건축학회에 부채서까래 등간격 나누기 계산법을 현상모집함 . 2 명을 서양식 , 2 명은 일본식 , 6 명은 도식해법을 취함 . 서양식 계산법을 바탕으로 부채서까래 간격의 각종 사례를 차례차례 증명하며 토오사이의 해법이 올바르다는 것을 입증함 . 1896 년 - 일본건축사전을 발간 토오사이 이하 장인들은 기술을 중요시하며 신사 , 사찰 건축을 통해 기술 유지 고사찰보존수리사업 , 신사의 국가적보호 등이 큰힘이 됨 . 한편 사회의 근대화로 전통적 기술자의 수가 줄어들기 시작함 . 헤이노우치 마사오미 – 에가와 도로자에몬 ( 서양식 포술가 ) 아래 미국의 패리함대에 대적하기위해 시나가와 다이바 ( 품해포대 ) 의 건조를 담당 . 1856 년 도중 세상을 떠나고 12 년 후 메이지 유신이 발생 . 그 이후 서양식 건축기술이 지식층에 의해 도입되었다 . 그러나 이 시기를 현명하게 대처해 관료의 기사 , 민간업자 , 교육자 , 연구자 로 성공한 예도 많다 . 그 사례를 일부 소개한다 . 규구술의 전승오시마 미츠모토 막부 작사방 ( 건축 , 수리 등을 담당했던 하급직 ) 대동량 10 대 코우다 치쿠젠의 문인 에도성 수리 닛코 토쇼쿠 수리및 설계 투쿠가와 이에모치 묘소 - 전통을 따르는 장인 , 1871~1900 신정부 공부성 철도료 ( 철도관리청 ) 에 들어가 교량 , 정거장 건축에 종사 – 신정부는 실지 경험자를 기용에서 시작2. 초대 시미즈 키스케 1738 년 엣츄에서 태어나 1758 년 우츠노미야 ( 도치기현 ) 에서 닛코묘의 조영에 참여 . 타카다 아나하치만구의 감독으로 명성을 얻음 고스케 ( 야마나시현 ), 신바시 ( 도쿄 ), 후카가와 ( 훗카이도 ) 의 모미쿠라 ( 흉작을 대비한 쌀 창고 ) 를 건립 요코하마 개항과 관련하여 선 박들의 공설건축 담당 오늘날의 시미즈 건설의 창립자이다 . 77 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남3. 2 대 시미즈 키스케 본명 : ( 藤沢清七 )- 후지사와 세이시치 1815 년 엣츄에서 태어나 20 세에 에도에서 초대 키스케를 따르다 양자가 됨 . 제후들에게 총애를 얻어 성과 칼의 소지를 허락받음 . 1871 년 도쿄에 미츠이환 사무소 ( 이후 제일은행 ) 1874 년 화양절충의 독창적인 스타일을 시작 목할 , 규구에 통달하고 서양 목조건축의 요점을 채득하기에 이름 4. 3 대 미치노츠케 – 2 대 큰사위 서양 건축 교육을 받은 공과대학 출신들을 채용 , 서양을 함께 돌아다니면서 서양식 건축공사를 해낼 수 있게 됨 . 일본 최소 건축청부제도 ( 도급제 ) 의 길이 시작됨 .1878 년 8 월 공학료 설치 1877 년 2 월 폐지 – 공부대학교로 개칭되면서 조가학과가 설치 영국인 교사 죠시아 콘더가 취임후 영국식 건축가의 양성이 이루어짐 타츠노긴고가 1879 년 1 회 졸업생이됨 1884 년 교수로 취임 . 서양식 건축 연구 , 후계자 양성 1886 년 3 월 제국대학 공과대학에 흡수 영국 유학중 어느날 스승 바르지스에게 일본 건축의 정화 ( 진수 , 핵심 ) 에 대한 질문을 받고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귀국궁내성 내장료 ( 궁전의 건축 , 토목에 관한 업무를 맡은 관청 ) 의 기사 – 키고 키요요시를 강사로 맞고 1888 년 11 월 일본건축에 관한 학문적 연구를 시작 . 키 고 키요요시의 일본건축 연구는 목할 , 규구 자체에 대한 것과 역사적 연구에 만 머뭄 이러한 배경으로 이토 츄타 , 세키노 타다시에 의해서 일본 건축양식사가 성립됨 . 만드는 입장이 아닌 이해하는 입장에서의 역사 양식 파악 1897 년 이후 이토 , 세키노에 의해 고신사 , 사찰의 조사가 진행 , 과거양식이 재조명됨 . 잘 알려지지 않은 아스카 , 나라 시대의 불사건축의 예술적 우수성이 알려짐 아스카 호류지 나라 토다이사에도 장인기술인 목할 , 규구는 지양되고 , 자유의장 정신이 고양되면서 제도즉 , 도면 에 의존하게 되고 일본만의 독특한 전통 대공기술은 건축가와 결별하고 단순한 기술자로 전락해버린 대공기술은 간신히 유지될 수 밖에 없었다 . 근대생산으로서의 제강 업의 발달로 철근 , 볼트 , 너트가 일반화되자 장인의 신의 기술이라 일컬어지던 이음 , 맞춤은 오히려 구조적 약점으로 지적되고 단순화한 철물이 응용됨 . 강철 , 시멘트 , 유리의 생산으로 철골 , 철근콘크리트 구조가 가능해지고 메이지 후기 무렵부터 시도되기 시작한다 . 서양수학과 역학 등에 기초를 두는 새로운 구조기술자를 탄생시킨다 . 그에 따라 대공의 업무는 극히 한정적인 마감공사 , 가설공사 , 거푸집공사 정도 밖에 남지 않고 , 도료의 응용에서는 예전 기술자가 필요하지 않았다 . 건축의 도급제는 저임금의 하청으로 기계력 노동력이 이득 . 기술의 부족을 노동력의 양으로 메꾸고 다른 공업에 비해 봉건성을 유지하여 2 차 세계대전 까지 이르렀다 .{nameOfApplication=Show}
왕권을 상징하는 궁궐건축차 례 경복궁 창덕궁 궁중행사경복궁 - 景福 경복궁은 1392 년 고려를 멸하고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에 의해 세워진 ( 만들어진 ) 첫 궁궐이다 . 조선왕조의 법궁 ( 法宮 ) 으로서 개국공신 정도전으로 하여금 시경 ( 詩經 ) 주아편의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 만년에 큰 복 ( 景福 ) 을 누리리라’라는구절을 인용하여 궁궐의 이름을 경복 ( 景福 ) 이라 정하게 했다고 한다 . 한때 , 이방원 ( 태조의 5 번째 아들 - 후에 태종 ) 주도의 왕자의 난으로 조선 2 대왕 정종 ( 태조 2 째 아들 ) 등극 및 정종의 개경환도로 잠시 경복궁이 제 기능을 하지 못했으나 , 3 대 태종의 한양 재환도와 4 대 세종의 즉위를 기점으로 법궁으로 써 제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 . 태조 이성계 법궁 : 조선의 왕은 조선의 주권자요 통치자였다 . 궁궐은 그러한 국왕이 거처하는 곳이었다 . 궁궐은 국왕의 사적인 주거 공간에 머무르지 않고 공적인 활동을 하는 공간이 포함되어 있었다 . 최고의 통치자인 국왕이 거의 모든 공적인 활동을 하던 곳이 바로 궁궐인 것이다 . 국왕이 들어가 거처하는 궁궐들 가운데 으뜸이 되는 궁궐을 ‘ 법궁 ’ 이라 하였다 .경복궁 공사는 1398 년 ( 태조 7) 1 월에 궁성을 쌓을 터전을 * 간심 ( 看審 ) 하기 시작하여 2 월에 책임자로 참찬문하부사 ( 參贊門下府事 ) 박위 ( 朴葳 ) 가 임명되고 문무 각품 ( 文武各品 ) 에게 쌓을 돌을 바치게 하여 진척되었다 . 6 월에 궁성 남문 ( 光化門 ) 을 착공하고 , 7 월에 경기좌도와 충청도 군인 3,700 명으로 공사를 진행시켰다 . 8 월에 무인난 ( 戊寅亂 ) 이 벌어지고 태조가 정종에게 양위하자 공사는 모두 중단되었다가 99 년 ( 정종 1) 에 재개하여 완성하였고 , 1426 년 ( 세종 8) 10 월에야 각 문과 다리의 이름이 정하여졌다 경복궁 전경 * 간심 – 자세히 보다 살피다 , 알아보다위치 :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 1 번지 (에는 경복궁 내 「조선총독부」신축으로 원래의 위치에서 철거당하여 건춘문 ( 동쪽문 ) 북쪽으로 이전 되었다가 1968 년에 현 위치로 자리 잡게 되는데 본 위치에서 약 15m 가량 뒤로 물러나게 되고 문루 ( 門樓 - 문의 상부 ) 는 6.25 동란에 소실되는 아픔도 간직하고 있으며 , 3 개의 홍예 ( 아치 ) 가 아름다움과 권위를 겸비한 조선궁궐의 정문이다 * 午 ( 낮 ) 門 - 성곽의 남쪽 문이 문은 본래 홍례문이라 했는데 고종 중건때 흥례문으로 바뀌었고 궁궐 내로 들어가는 두 번째 문이다 . 광화문과 흥례문 사이의 좌우공간은 궁궐을 지키는 군사들을 위한 관청 및 부속건물들이 자리하고 있었으며 , 기타 궁궐 내 작은 행사나 큰 행사의 준비가 이루어졌던 공간이었다고 한다 . 과거 일제에 의한 조선역사 말살과 왜곡의 희생지는 1 차로 이 지역에서 단행되어 이곳에 「조선 총독부」건물이 지어졌다 . 그런 연후 궁궐의 중심부를 시야에서 차단하여 역사의 관념을 지워버리려 했으나 다행스럽게도 오늘날 그 옛 모습으로 근간에 복원되어 중심축을 이루니 궁궐의 본래 모습이 조금씩 되살아나고 있다 . 2. 흥례문고종 4 년에 중건한 것이다 . 정면에서 보면 3 칸인데 아래층엔 문얼굴을 내고 큼직한 문짝을 달아 여닫게 하였고 , 위층은 사방에 널문을 달아 여닫을 수 있는 시설을 하였다 . 평소엔 문을 닫아 두고 대소의 신료들은 문무 ( 文武 ) 반에 따라 동쪽의 일화문 ( 문반 ) 과 서편의 월화문 ( 무반 ) 을 이용하였다 . 현존하는 조선왕궁의 정전 정문 중 유일하게 중층 건물로 남아 있다 3. 근정문근정문 : 근정전 앞 금천교 ( 錦川橋 ) 건너편에 있는 문으로서 정면 5 칸 , 측면 2 칸의 중층 ( 重層 ) 이며 , 외삼출목 ( 外三出目 )· 내삼출목 ( 內三出目 ) 의 다포집 우진각지붕이다 .궁궐 ( 宮闕 ) 은 나라를 다스리는 왕과 그 가족들이 거처하던 곳이며 그 외 나라를 다스리는 곳 , 즉 통치를 하는 공적인 공간이다 . 근정전은 이 공적인 공간의 대표격이라 축선위에 좌우대칭이 엄격하게 적용되어 지어졌다 . 강녕전을 등진 채 앞쪽을 바라보면 사정전과 강녕전의 대문지붕을 일부러 중심을 맞춘 후 크고 작게 만든 듯 그 비례가 조화를 이룬다 . 강녕전은 왕의 침전 중 대침 ( 大寢 ) 이며 소침 ( 小寢 ) 으로는 연생전 ( 延生殿 ), 경성전 ( 慶成殿 ), 연길당 ( 延吉堂 ), 응지당 ( 膺祉堂 ) 등 다섯채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중 연생전과 경성전은 강녕전의 앞쪽에 동서대칭으로 건물의 전면이 동서쪽으로 마주보도록 배치 되어있다 10. 강녕전교태전이란 왕비의 침전으로 강녕전 일곽에서 양의문을 들어서면 정면 9 칸 , 측면 7 칸 규모의 교태전과 좌우로 익랑이 연결된다 . 아미산을 볼수 있도록 동쪽 후면에 마루와 방으로 연결된 건순각을 배치하였다 . 현재의 건물은 1995 년에 복원한 것이다 11. 교태전왕비의 침전인 교태전의 후원이다 . 아미산이란 중국의 명산을 상징하는 이름인데 , 여기서는 아미산이란 산이 아니라 사방에 장대석으로 단을 쌓아 만든 것이며 , 남쪽에는 4 단의 화계가 조성되었다 . 이 화계의 단에 괴석 , 방형석지 , 연화형 수조 , 해시계대 , 돌절구 , 화전장식 굴뚝 등이 배치되고 , 매화 , 모란 , 앵두 , 반송 , 철쭉 등의 화목을 심었으며 , 단 위에는 배나무 , 뽕나무 , 느티나무 , 말채나무 등이 원림 ( 苑林 ) 을 이루고 있다 . 12. 아미산교태전 동쪽 자미당 ( 紫微堂 ) 터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하면서 조대비 ( 神貞翼王后 ) 를 위하여 자경전을 지었다 . 준공 후 불이 나서 다시 지어 고종 25 년 (1888) 에 완성한 것이 지금 남아 있는 일곽이다 . 고종때 지은 침전 건물로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물이다 . 44 칸의 자경전은 따뜻하게 겨울을 지낼 수 있도록 서북쪽에 설비된 침방인 욱실형의 복안당과 낮시간에 거처하는 중앙의 자경전과 여름에 시원하게 지낼 수 있는 동남의 다락집 청연루 ( 淸嘗樓 ) 로 구성되고 , 이어 12 칸의 협경당 ( 協慶堂 ) 이 부설되어 있 만든 풍혈이 끼어 있다 . 금천교는 길이가 12.9 미터 , 폭이 12.5 미터로 , 태종 11 년 (1411) 에 조성되었다 .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석교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 앞에 명당수와 관련되는 궁의 외당문인 진선문이 있다 .3. 진선문 창덕궁에는 궁 정문에서부터 정전에 이르는 주출입선에 세 개의 문이 세워져 있다 . 세 개의 문은 돈화문 , 진선문 , 인정문인데 , 돈화문은 제일 바깥에 위치한 창덕궁의 정문이고 , 다음 금천교를 건너 만나게 되는 진선문은 외행각 주출입문이며 , 마지막 인정문은 내행각 주출입문이다 . 이처럼 진선문은 창덕궁 주출입선상에 위치한 중문이므로 문의 전후로는 어도를 두었다 .동 - 숙장문 , 서 - 진선문 , 남 - 궐내각사 행각 , 북 - 인정문 4. 숙장문 ( 肅章門 ) 진선문 ( 進善門 ) 을 지나면 나오는 마당의 동쪽에 있다 . 정면 3 칸 , 1 층의 팔작 지붕 건물로서 , 일제 시기에 없어졌다가 근래에 와서 복원되었고 , 인정문 남쪽 마당을 구성하는 행각과 이어져 있다 . 진선문과 인정문 ( 仁政門 ), 숙장문이 이루고 있는 마당에서는 왕의 즉위식이나 각종의 행사와 잔치 , 그리고 중요한 재판이 열렸던 궁궐의 광장 역할을 담당했다 .5. 인정문 임금이 만조백관과 조회를 하려면 인정전에 모인다 . 인정문을 들어서야 참예할 수 있다 . 인정문은 인정전을 에워싼 행각의 대문으로 남쪽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 나지막한 댓돌에 설치한 돌층층다리를 올라서면 좌 , 우 , 중앙 3 간문을 들어서게 된다 . 다른 곳의 대문과는 그 구조와 장식이 다르다 . 원래의 모습에서 변형되었기 때문이다 . 행각 ( 行閣 ) 은 전시장으로 쓰던 것을 개조하여 복원하였다 .6. 인정전 ( 국보 제 225 호 ) 임금이 높이 앉아 내려다볼 수 있도록 어좌를 중앙에 두고 여러 가지 장엄을 베풀면서 권위있게 지은 법전이 각 궁궐마다 있다 . 인정전은 창덕궁의 법전으로 궁궐의 배설로는 외전의 중심이 된다 . 외전은 보통 내전의 남쪽에 있어 있기는 하나 , 그 요점을 길 ( 吉 ), 가 ( 嘉 ), 군 ( 軍 ), 빈 ( 賓 ), 흉 ( 凶 ) 의 다섯가지에 지나지 아니한바 , 이 다섯가지의 예의를 갖추어 행함으로써 사람의 도리가 구체화된다 .” 고 함을 보아 이 예제가 인간생활의 규범으로서 얼마나 소중히 여겨져 왔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 따라서 이 예서는 전래 ( 傳來 ) 의 고제 ( 古制 ) 와 중설 ( 衆說 ) 을 광범위하게 참작하여 의의 기본원칙과 그 시행절차를 통일 , 집대성하고 있다 .국조오례의 서문 공손히 생각하여 보건대 우리 태조 강헌대왕 ( 太祖 康獻大王 ) 께서는 위대한 창업 ( 創業 ) 을 이룩하시고 만세 ( 萬世 ) 의 규범 ( 規範 ) 을 마련하셨으며 , 태종 공정대왕 ( 太宗 恭定大王 ) 께서는 보위 ( 寶位 ) 를 이어받아 더욱 전열 ( 前烈 ) 을 빛내었으나 때는 바야흐로 혼미 ( 昏迷 ) 한지라 그 모든 제작 ( 制作 ) 에 있어서 겸양 ( 謙讓 ) 하다가 미치지 못하시고 , 우리 세종 장헌대왕 ( 世宗 莊憲大王 ) 에 이르러 문물 ( 文物 ) 로써 태평성대를 이루시다 . 때마침 천재일우 ( 千載一遇 ) 의 좋은 기회를 당하여 , 이에 예조판서 ( 禮曹判書 ) 신 허조 ( 臣許稠 ) 에게 명하여 모든 제사 ( 祭祀 ) 의 서례 ( 序例 = 차례 ) 와 길례에 관한 의식을 상세히 정하도록 하고 , 또 집현전 유신들에게 명하여 오례의를 상세히 정하도록하셨다 . 모두 두씨통전을 모방하고 한편 모든 서적을 참조하고 겸해 중국의 모든 관사의 직장과 홍무예제 , 동국 고금의 상정례등 서를 인용하여 더 하고 뺄것을 참작하여 , 성심의 재가를 받았으나 미처 시행하지 못하고 , 빈천하셨으니 아 쓰라리도다 ......조선왕조 궁궐에서 중요시한 것은 오례의 각종 의식을 어느 장소에서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 하는 기능적인 문제였다 . 궁궐은 종묘와 사진 다음으로 예의 질서를 실천하는 상직적인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 오례와 관련해서 궁궐에서 치르는 행사는 다양하다 . 가례와 관련한 행사가 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