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아시아의 블루오션‘아제르바이잔’목 차1. 아제르바이잔 선정이유2. 일반사항3. 경제사항4. 한국과의 교역현황5. 한-아제르 문제점과 개선점6. 참고문헌 및 출처1. 나라 선택이유한국은 자원 부족 국가다. 석탄과 석유는 매장되어있지 않을뿐더러 텅스텐, 흑연 등의 자원들조차도 매장량이 충분하지 않아 자원의 해외 의존도가 상당히 높다. 이러한 부존 자원상의 열위를 보완하기 위해 한국 정부는 기술 개발 집중 투자 및 수출 지향 전략을 펼쳤고 그 결과 반세기도 채 안 되어 한국은 15위(2009년 기준)의 경제 국가로 탈바꿈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경제 발전에 따른 에너지 소비량 급증은 자원의 해외 의존도를 더욱 증가시켰고 단순히 기술력에 집중하는 것만의 한계가 점차 드러나기 시작했다.중앙아시아는 잠재매장량 기준으로 2,500~3,000억 배럴의 석유와 15~20조 입방미터의 가스를 보유하고 있으며, 가채연수가 길어 향후 개발 잠재력이 매우 풍부하다. 이처럼 중앙아시아는 석유 가스와 각종 광물자원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어 중동을 보완할 새로운 자원공급원으로 떠오르고 있으며 중앙아시아의 CIS 국가들 중에서도 가장 큰 경제 성장률을 보이는 국가, 아제르바이잔이 그 중심에 있다.아직도 땅속에서 불(가스)이 뿜어져 나오는 불의 국가 아제르바이잔은 유라시아에 속해있고 이란과 러시아 중간에 위치하며 옆으로는 터키, 아르메니아 위로는 그루지아가 있고 세계에서 제일 큰 호수인 카스피해 옆에 위치한 이슬람 국가로 석유, 가스, 우라늄, 철 등이 풍부한 중앙아시아 자원의 보고로서 장차 중동의 자원을 대체할 자원국이다.미래 자원에 대한 관심 증가로 천연 자원의 개발 및 연구가 확대되고는 있지만 아직은 대체적 자원으로서의 영향력이 미비하다. 그리고 대부분의 생산 공정들이 유한 자원을 사용하고 있고, 이러한 자원의 수요가 상당한 생산 공정은 점차 줄어드는 유한자원과는 반대로 더욱 많은 양의 자원을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결국 ‘누가 얼마나 자원을 확보할 수 있는가.’가 경쟁력의 척도가 8달러주요 교역품목? 수출- 석유제품(97.1%), 식료품(1.1%), 금속제품(0.8%),화학제품(0.2%), 플라스틱(0.2%), 기타(0.6%)? 수입- 기계장비(30.8%), 운송수단(17.0%), 식료품(15.8%),금속제품(10.6%), 화학제품(6.1%), 기타(19.7%)자료 : EIU Country Report 2010. 3월3. 경제현황(2009년 주요 경제지표)① 경제동향 및 전망? 경제성장률아제르바이잔은 카스피해 유전 개발로 인한 오일 달러 유입으로 2007년에는 CIS 내 최고의 경제성장률인 25.0%를 기록하며 급성장하고 있다. 2000년 이후 GDP 성장률이 줄곧 10%를 상회하였으나 2008년 하반기 세계 경기 하강에 따른 국제유가 급락으로 2007년 정점으로 증가율 둔화세가 나타나고 있다. 2008년에도 꾸준한 석유·가스 생산 및 수출 증가에 따라 10.8%의 두 자리대 GDP 증가율을 유지하였으나 2009년에는 한 자리대(9.3%)로 증가 폭이 소폭 감소되었다.? 주요산업오일 산업의 호황은 통신, 운송, 건설 분야 spillover 효과를 낳고 있으며 다시 이러한 사회 인프라 개발이 전체적인 경제성장을 견인하고 있다. 하지만 높은 인플레이션, 인건비 인상 및 마나트화 통화절상은 非 오일 부문의 경쟁력 약화를 초래할 위험요소로 작용하고 있으며 실제로 제조업 비중은 꾸준한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원유 및 가스 산업에서는 2009년 세계 경기 침체로 인한 국제유가 하락 및 원유 수요 감소로 인한 심한 경제적인 압박 속에서도 9.3%의 실질 GDP 증가세를 보여 상대적으로 양호한 경제 기조를 유지하였다. 1999년 이래 지속되어 온 두 자리 수의 고속 경제성장 추세는 비록 무너졌지만 2009년에 원유 및 가스 생산량을 13.5%나 늘리며 유가 하락의 충격을 완화시킬 수 있었다. 2010년에도 원유 생산을 늘리며(2009년 50.4백만 톤에서 2010년 52.5백만 톤) 약 10%의 높은 경제 성장률을 달성할 전망이다. 2010년에는 세계 아제르바이잔은 EU, 일본, 미국으로부터 일반특혜관세(GSP: Generalized System of Preferences) 우대를 받고 있다. 아제르바이잔은 2009년 하반기 WTO 가입을 목표로 가입 노력을 적극적으로 기울이고 있다.FTA체결국체결일1러시아1992. 09. 302우크라이나1995. 07. 283그루지야1996. 03. 084투르크메니스탄1996. 03. 185우즈베키스탄1996. 05. 276카자흐스탄1997. 06. 107타지키스탄1997. 08. 138키르기즈스탄2004. 01. 129백러시아2004. 03. 31자료: 아제르바이잔 외무부③ 수출입동향? 수출입현황- 아제르바이잔 통계청에서 발표한 2008년도 수출통계(표1 참조)를 보면 총 수출액은 약 477억 달러이며 석유 제품이 전체의 97.0%(약 463억 달러) 점유하고 있다. 그 밖에 금속(3.6억불), 식료품(1.5억불) 등을 수출하고 있다.- 자국 통화절상 및 정부의 재정지출 확대에 따른 국민소득 증가로 소비재 수입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으며 특히 자동차 등 운송기기 수입 비중이 전년대비 가장 큰 폭으로 증가(표2 참조)하였다. 유전 및 가스전 개발, 공공인프라 건설 공사에 쓰이는 각종 기계장비나 금속제품 소비는 꾸준하게 증가하고 있다.표1. 2008년도 아제르바이잔 품목별 수출현황(단위: US$ 백만 %)구분2*************08금액비중금액비중금액비중금액비중석유제품3,33776.85,39084.64,93581.446,36397.0금속제품1062.41502.31823.03630.7식료품3277.53225.15078.41530.3운송기기3736.3851.31011.71300.2플라스틱, 고무731.71011.6721.21230.2화학제품1323.01933.0931.51070.2합계4,3471006,3721006,05810047,756100자료 : 국가통계위원회, 2009년 09월 현재 최신 자료표2. 2008년도 아제르바이잔 품목별 수입현황(단위: US$ 백만 %)구분2과의 주요 이슈연도주요 사항1992.3.23외교관계 수립2006.03주 아제르바이잔 한국대사관(1 인공관) 개설(류광철 대사 대리)2006.12류광철 주아제르바이잔 특명전권대사 임명2007.03주한아제르바이잔대사관 개설(Rovshan Jamshidov 대사)주요 협정·약정 체결 현황체결 협정체결 약정- 2006년 5월 : 문화협정- 2006년 5월 : 항공협정- 2007년 4월 : 투자보장협정(발효대기 중)- 2007년 9월 : 이중과세방지협정(가서명)2006년 5월 노무현 전 대통령 아제르바이잔 방문. 2007년 4월 일함 알리예프 대통령 방한 등을 계기로 경제 분야별 약 30여 개 협력 약정 체결자료 : 외교통상부② 한국과의 교역동향 및 특징? 2002년 이후 對 아제르바이잔 수출 증가 추세가 지속되었다. 유전개발 및 고유가로 인한 수입증대로 우리나라의 對 아제르바이잔 수출은 증가 추세이며 특히, 2006년 5월 고 노무현 대통령의 아제르바이잔 방문, 2007년 4월 아제르바이잔 대통령의 답방을 계기로 수출 증가세가 가속화되었다. 그러나 2008년 9월 세계 금융 위기 발발을 계기로 2008년 정점을 찍고 ‘09년부터 하강 곡선을 그리고 있으며 2010년 2월까지의 수출도 전년 동기대비 30.2%의 감소율을 보이고 있다. 2009년 주요 수출 품목은 자동차 및 부품, 합성수지, 엘리베이터, 무선전화기 등 생활가전, 의료기기, 건설중장비 등이며, 그 기조는 ‘10년 초에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우리나라의 對 아제르바이잔 수출입 동향구분단위2**************************82009교역규모수출백만 달러4*************5150교역규모수입백만 달러00100316129무역(상품)수지백만 달러411183247-185243141수출증가율%4.0189.974.468.646.9175.295.5-41.3수출국 순위순위*************15958592수입국 순위순위*************1257116121자료 : KITA.net? 對 아제르바이잔 , 항만, 도로, 건설 등 인프라사업에 한국기업 참여 확대를 촉구한 결과라 볼 수 있다. 한편 산유국으로서의 아제르바이잔에 대한 업계의 기대감도 동시에 작용한 것으로 판단된다. 향후 한국의 대 아제르바이잔 투자는 발전소, 레저복합단지 및 처리 등 인프라개발 참여활동을 중심으로 지속적으로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자국기업 자본 투자는 건설 부문이 전체의 96%를 차지하고 있으며 연도별 투자 현황은 다음 표와 같으며, 아제르바이잔의 대 한국 투자는 실적이 없는 것으로 조사된다.연도신고건수신고금액투자건수투자금액1997120151998-20*************.3693762008102.86962.3732091911.42516771누계3944.684263.224자료 : 수출입은행, 2010년 3월 기준 최신 통계(단위: 천 달러, %)5. 한-아제르 문제점과 개선점① 교역 및 투자 확대아제르바이잔은 높은 시장성과 성장성을 가진 신흥 수출시장으로, 국가차원에서의 적극적인 교역확대 전략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한국은 아제르바이잔에 대해 자본재 및 고부가가치 소비재에서 비교우위가 명확하나 그동안 수출시장 개척 및 체계적인 수출지원책 부재로 교역실적의 변동이 심했다. 그로인해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 인근 중앙아시아시장에 비해 한국 제품 인지도가 낮게 형성되었고 상대적으로 교역이 안정적인 일본제품의 수요가 높은 양상이 전개되었다. 하지만 적극적인 기술 원조 및 수출전략으로 한국 제품의 안정적 교역을 추진한다면 일본을 추월해 한국제품에 대한 수요를 점차 확대할 수 있을 것이다.한국은 기술적 우위를 점하고 있는 부문과 아제르바이잔이 한국과 협력을 희망하는 부문이 IT, 건설, 운송 등 첨단산업 및 인프라 부문으로 상호일치하기 때문에 한국은 이 부문을 중심으로 對아제르바이잔 투자를 적극적으로 확대해야 한다. 아제르바이잔은 석유?가스 중심의 산업구조를 탈피하고 경제 성장 동력을 다원화하기위해 각종 사회?경제 인프라 구축 및 IT 등 첨단산업 육성에 한국이 참여해주기를 희망하고 원 확보
과제 1 : 이슬람금융과 우리의 대응 전략1990년대 후반의 IMF와 최근의 금융위기는 기존 서구식 금융에 대한 불신의 확산 계기가 되었다. 때를 같이하여 서구식 금융과는 달리 이슬람 금융은 눈에 띄는 성장을 하였으며, 이에 세계 금융권에서는 ‘이슬람 금융’이 이슈화되기 시작하였다. 이슬람 금융은 서구식 금융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이자’가 금지되며, 실물의 거래를 수반해야하는 특성이 있다. 따라서 서구식 금융과는 다른 독특한 금융상품을 발전시켰다.이슬람금융이 세계자본시장의 한 분야로 편입되는 양상을 보임에 따라 많은 국가들이 이슬람자금의 활용방안을 적극 모색하고 있다. 2000년대 중반부터 이슬람금유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우리나라는 이슬람 금융에 있어서 후발 국가이다. 이러한 후발 국가가 이슬람 금융 시장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이슬람 금융에 대한 이해와 특화된 전략이 필요하다.이슬람권 자금 유치를 위해서는 이슬람 금융상품의 개발과 중동지역 국부펀드 투자유치 등이 필요하지만 아직까지도 국내 금융기관들의 이슬람금융에 대한 이해는 부족하다고 사료된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이슬람금융에 전반적인 특성의 분석을 통해 우리나라의 이슬람금융에 대한 대응 전략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1. 이슬람과 이슬람금융이슬람금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슬람 종교를 이해해야 한다. 이는 여타의 종교에서 경제문제를 윤리적인 수준에서 다루는 것과 달리 이슬람은 경제사항들을 종교적 유리와 결부하여 규범화하는 경제관이 성립되어 있다.이슬람경전에 있는 경제관은 우선 사유재산의 인정과 합법적인 부의 축적을 장려하며 사회적 평등의 실현하고자 한다. 빈부격차는 서로 나눔을 통해 극복할 수 있는 일시적인 차이라고 인식하고 있다.이슬람금융을 간단히 정의하면 이슬람법(샤리아 : Sharia)에 부합하는 금융으로 정의할 수 있다. 따라서 이슬람금융은 샤리아에 부합하는 상품만을 취급할 수 있으며, 특정 금융상품이 샤리아에 부합하는지 여부)를 판단하여야하며, 이를 이슬람법학자들로 구성된 샤리아 위원회(Sharia C으로 이슬람금융의 투자형식의 거래형태에는 수쿡, 무다라바, 무샤라카와 상품거래 형태인 무라바하, 이스티슨, 이자라 등으로 분류되고 보험과 유사한 타카풀이 있다.수쿡(Sukuk)은 채권에 해당하며 이자 대신 배당금 같은 형태로 수익금을 지급, 채권발행 기금을 실체가 있는 자산에 투자해 수익을 추구한다. 무다라바(Mudharabah)는 자본을 제공하는 투자자가 금융기관을 통해 특정 사업에 참여하고 경영을 제공하는 기업가는 이를 운영하여 수익이 발생할 경우 사전에 약정한 이익 배분율에 따라 이익을 공유(profit sharing)하는 상품이다. 무샤라카(Musyarakah)는 출자금융의 형태로 투자자와 사업가가 공도출자 및 공도경영을 하며 사전계약에 따라 이익 또는 손실을 분배한다. 무라바하(Murabahah)는 소비자금융의 일종으로 자본을 제공하는 금융기관이 실물자산(주택, 자동차 등)을 가지고 있는 판매자로부터 사들인 후 마진을 붙여 수요자에게 재판매하는 형태의 금융계약이다. 이자라(Ijarah)는 리스와 비슷한 개념으로 기계, 설비, 건물 등 비교적 대규모 금융이 필요한 경우 금융기관이 이를 구매하여 사용권만을 수요자에게 이전하고 금융기관은 리스 기간도안 수요자로부터 사용료를 정기적으로 받는 형태이다. 타카풀(Takaful)은 보험의 형태로 불확실성, 도박, 이자와 같은 요소가 내포되어 있어 이슬람법에 의하면 허용될 수 없으나 상호협조의 원칙과 이슬람법의 준수에 근거하여 허용되며 구성원의 출연 기금으로 특정손실 손해발생시 참여자의 손실을 보존하는 형식이다.3. 이슬람금융의 전망과 동향이슬람금융은 오일머니 축적 등으로 2000년대 들어와 연간 15% 이상 성장해 오면서 비이슬람권으로도 확산되는 등 국제금융시장에서도 빠르게 성장하고 있으며 향후 중장기적으로도 성장세가 전망되면서 국제금융의 지속가능한 축의 하나로 발돋음 하고 있다. 이슬람금융의 급성장 배경으로 오일머니 급증 외에도 이슬람권의 적극적 개발정책, 인구증가(2010년 전세계 무슬림인구 16억), 다양한 08년 금융위원회·금융감독원이 공동으로 IFSB)의 준회원으로 가입하였고 2009년 1월에는 IFSB와 공동으로 이슬람금융세미나를 개최하였으며 5월에는 싱가포르에서 열린 제6차 이슬람금융 연차총회에서 한국 설명회를 개최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또한 정부는 이슬람채권에 비과세 혜택이 적용될 수 있도록 하는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을 추진 중에 있고, 국내 금융 회사들도 이슬람채권 발행을 위한 준비에 나서고 있다.)2) 우리나라의 이슬람금융 현황국내 금융기관들은 증권업계 중심으로 세계 금융시장에서 이슬람금융의 중요성 및 잠재력을 인식하고 도입 준비중이다. 대표적으로 한국투자증권은 일찍이 국내 금융기관 최초로 이슬람금융팀을 조직하고 이미 2008년 7월에 이슬람금융 전문가를 자문가로 영입하여 국내 금융기관 최초로 이슬람채권인 수쿡 발행 준비를 완료하였다. 그 외 SK증권, 신한투자증권, 대우증권 등도 수쿡 발행 준비를 하고 있으며, 우리투자증권과 신한투자증권은 중동지역에 사무소, 현지법인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기관주요 내용한국투자증권·국내 금융기관 최초로 이슬람금융팀 조직·2008년 7월, 이슬람금융 전문가를 자문가로 영입하여 국내 금융기관 최초로 수쿡 발행 사전준비 완료SK증권·2008년부터 말레이시아 현지 투자은행고 수쿠 발행 추진우리투자증권·2010년 3월, 카타르의 카타르 이슬람은행과 전략적 제휴 체결·UAE의 아부다비에 사무소 설립추진신한투자증권·중동 이슬람국가에 현지법인이나 사무소 설립 추진·샤리아에 맞는 국내 우량기업으로 구성된 이슬람지수 “신한 샤리아 100” 개발 고려·수쿡, 이 자리(Ijara, 리스) 발행 추진대우증권·수쿡 발행 추진산업은행·중동지역 사절단 파견비금융기업중에서는 1차적으로 공기업 위주로 이슬람자본 유치를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이는 이슬람자본 측에서 아직 우리나라 금융시장에 대한 정보나 경험 부족으로 일단은 안전한 공기업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검토 중인 주요 공기업으로는 한구수력원자력, 한국광물자원공자 등 1차적으로 공기제 2 : 바젤 III와 국내 은행의 자기자본규제1988년 BIS가 제시한 최초 기준인 ‘바젤 I’은 국제적으로 활발히 영업하는 선진국 은행이 위험에 대비해 적정자본을 보유하도록 하자는 취지로 탄생했다. 이후 금융혁신과 규제완화 추세에 부응해 ‘바젤 II’가 나오게 된다.2004년 등장한 바젤 II는 금융회사 자본을 세분화했다. 자본은 회사가 어떤 권리를 갖느냐에 따라 다양한 등급으로 나뉠 수 있다. 자본금을 구성하는 보통주는 전적으로 회사가 권리를 갖고 있다. 그러나 회사가 망했을 때 우선적으로 돈을 물어줘야 하는 선순위채에 대해서는 회사가 행사할 수 있는 권리가 크게 제약된다. 이처럼 회사가 자본에 대해 갖는 권리에 따라 권리가 비교적 많으면 기본자본, 적으면 보완자본이라 불립니다. 바젤II는 자본별로 적정 보유비율을 정해 금융회사가 부실에 대비하도록 했습니다.그러나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바젤 II가 제시하는 기준이 충분한 방패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 드러났다. 기본자본 중에도 보통주같이 진짜 내 자본이라 할 만 한 질 높은 자본은 턱없이 부족했다. 바젤 III는 이 같은 문제를 극복하고 자기자본 규제가 위험에 진정한 대비가 되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1. 국제적 은행 감독 기준의 변천 : 바젤 I, 바젤 II1988년 바젤위원회는 국제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은행의 자본규제 기준을 발표했는데 이는 바젤위원회가 위치한 지명을 따라 바젤 Ⅰ이라 한다. 바젤 I은 신용리스크(대출이 부실화되는 위험)에 초점을 맞춘 규제로서 자기자본을 위험가중자산의 8% 이상 적립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G10 국가들은 1992년부터 바젤 I 규제를 시행했으며 우리나라는 1997년부터 BIS비율 8% 준수를 의무화했다.)2004년 바젤위원회는 기존 최저 자기자본규제(Pillar 1)의 개선, 감독당국 점검의무 신설(Pillar 2), 시장규율 강화(Pillar 3) 등을 내용으로 하는 바젤 II 규제를 발표했다. 바젤 II 규제에서도 BIS비율 8%와 기본자본비율 4%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이에 따라 바젤위원회는 기존의 감독 기준을 보완 · 개선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해 왔으며, 마침내 지난 9월 12일 은행에 대한 기존의 자본규제를 강화하고 유동성규제를 신설하는 내용의 바젤 III에 합의했다. 이로써 은행의 자본적정성과 유동성을 효과적으로 관리 ? 감독하기 위한 국제적 기존이 마련되었으며, 가중치 등 규제 비율 계산을 위한 구체적 사항은 늦어도 2010년 말까지 바젤위원회를 통해 확정될 예정이다. 바젤 III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첫째, 이번 위기 과정에서 기존의 은행 자본금 규제가 질적, 양적으로 충분하지 못하다는 지적이 나옴에 따라 은행 자본금의 질을 높이고 최저자본금 기준을 대폭 상향 조정했다. 금융회사가 자본을 보유하는 양은 위험자산에 비례해서 결정된다. 가령 은행이 기업에 빌려주거나 부동산·증권에 투자한 돈은 기업의 경영 상태나 주식 시황 등에 따라 위험도가 달라진다. 순이익을 많이 내는 기업에 빌려준 돈은 돌려받을 가능성이 크지만 이자를 몇 개월째 연체한 기업에 빌려준 돈은 떼일 가능성이 크다. 이처럼 위험도에 따라 가중치를 매겨 위험자산의 총액을 계산하게 된다. 그리고 금융회사는 위험자산 총액의 일정비율에 해당하는 양만큼 자본을 쌓아야 한다. 바젤 II와 바젤 III 모두 위험자산 총액에 대해 쌓아야 하는 자본 비율은 8%이다. 이를 채우지 못하면 감독당국으로부터 건전성 제재를 받게 된다.하지만 쌓는 자본의 질적 측면에서 바젤 III는 바젤 II와 다르다. 바젤 III은 보통주나 유보이익과 같은 질 좋은 자본을 위험자산 총액 대비 4.5%만큼 쌓도록 규정한다. 바젤 II의 2%보다 배 이상 많은 양이다. 이에 따라 기본자본(Tierl)의 양도 바젤II보다 2%포인트 높아진 6%만큼 적립해야 한다. 반면 질이 낮은 자본인 보완자본의 양은 4%에서 2%로 줄었다. 규제자본비율의 절대 수준이 크게 상향되었을 뿐만 아니라 시기별 · 국가별 · 은행별로 규제비율이 차등화되었다. 특히 경기순응성에 대응하기 위해서 경기에 보인다.
목 차Ⅰ. 서론Ⅱ. 본론1. 광복이후 시대적 상황- 미국과 소련의 이해관계 : 지리적 분단2. 모스크바 3상협정- 모스크바 3상회의의 해석문제- 모스크바 협정 내용의 의의3. 왜곡된 보도와 국내의 반응4. 찬탁과 반탁의 대립- 찬탁과 반탁의 입장- 찬탁과 반탁의 화합을 위한 노력5. 정치적 분단에서심리적 분단으로 이어지기까지Ⅲ. 결론3상협정과 찬반탁운동- 분단의 비극의 시발점Ⅰ. 서론지난 세월 동안 우리는 산업화와 민주화 등 많은 것들을 성취하였지만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문제인 남북분단의 문제가 남아있다. 우리는 아직 전쟁의 종전이 아닌 휴전이라는 상황에 놓여있으나 마치 전쟁의 종결이라도 된 것처럼 지금과 같은 현실을 당연한 듯 여기며 살아간다. 너무 오랫동안 분단 상태로 지내온 탓에 남과 북의 통일 문제에 대한 사고가 변화하여 통일을 부정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과거에 비해 많아진 것도 사실이다. 남과 북의 좀 더 적극적인 대화를 통해 분단으로 고착되어 있는 역사의 응어리를 풀어야 하나, 광복 이후 우리가 걸어온 역사에 대한 이해와 해석이 극단적으로 엇갈리고 있어 대화로 이를 풀어가기에 많은 한계가 있다는 것이 안타깝다.남북분단 비극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을 과연 어디서 찾아야할까. 남과 북 모두에게 심각한 상처를 남긴 전쟁. 이 전쟁은 서로간의 정치적인 이념 대립에 있었으며, 남과 북에 각각의 정부가 세워지는 과정에서 그 배후에 있었던 미국과 소련의 이해관계까지 파고 들어가야 남북분단의 근본적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식민지시기 이전에는 광복이라는 하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각 이념에 따라 독립활동을 하였다. 그토록 원하고 원하던 광복을 이룬 후에도 각 정치세력들은 독립국가를 세우기 위해 정치세력의 이념에 따라 단체를 만들고 활동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 뒤에는 미국과 소련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다. 이는 식민지 시기의 일제에 맞서 싸웠던 독립운동가들의 독립노선의 방향이 서로 달랐다는 것과는 또 다른 정치적 상황인 것이다. 이에 우리는 남북분단의 력으로 한 단체가 많이 조직되기 시작했다. 흩어져 있던 우익세력을 통합하여 만든 한민당, 한민당 보다는 그 세력이 약한 우익정당에 속하는 국민당, 여운형을 위원장으로 한 조선인민당,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독립촉성중앙협의회, 그리고 김구를 중심으로 한 중경 임시정부 등의 정치 세력 단체들이 생겨났다. 이들 중 조선인민당과 중경 임시정부는 좌우 갈등을 최소화 하고 민족통일전선을 형성하여 좌우연합 정부 수립을 하려했지만,) 서로 자신의 세력축이 중심이 되어 통일정부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인해 합의점을 찾지 못한다.- 미국과 소련의 이해관계 : 지리적 분할미국은 에서 “한국의 정치?경제적 상황이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의 수용에 유리한 조건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에, 상당한 대중적 인기를 획득할 것이다. 미국은 한국의 군정과 과도 정부에 참여해서 강력하고 민주적이며 독립된 국가를 건설하도록 원조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소련은 (1945. 8. 1)라는 보고서에서 “미국은 코리아에 큰 이해관계를 가지며 상황에 의해 규정된다. 소련의 참여 없이 코리아 문제를 결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야심에 찬 포부를 밝혔다. 이처럼 일본의 무장 해체라는 명분으로 들어온 미국과 소련은 단순한 무장 해체뿐 만 아니라 바로 점령을 의미했으며, 자국의 제국주의 팽창욕구의 대상으로서만 한반도를 주시하고 있었다.2. 모스크바 3상협정해방된 첫해를 마무리할 때 쯤 어수선한 상황에서 또다시 파동을 일으킬 커다란 사건이 터졌다. 그것은 지리적으로 분열되어있는 한반도에 관한 강대국 간의 국제협정인 모스크바 협정이었다. 1945년 12월 16일 모스크바에서는 미국, 영국, 소련의 3국 외상회의가 열렸고 이 회의는 12월 27일까지 진행되었다. 모스크바 3상회담은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처리 문제를 놓고 계속된 강대국 간의 협의의 연장선에서 열린 것이었다. 한반도 문제가 처음 거론된 것은 1943년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의 워싱턴 회담에서였고, 그 해 11월 카이로 회담, 1945년 2월 얄타회담시정부와 협의한 후 제출되어야 한다.4. 남? 북 조선에 관련된 긴급한 제 문제를 고려하기 위하여 또한 남조선 미합중국 관구와 북조선 소련군 관구의 행정? 경제면의 항구적 균형을 수립하기 위하여 2주일 이내에 조선에 주둔하는 미? 소 양군 사령부 대표로써 회의를 소집할 것이다.모스크바 협정에 관한 사항 중 가장 중요한 요소는 우리나라의 통일 된 정부를 만들기 위한 조선인들로 구성된 ‘임시조선민주주의정부’에 있었다. 강대국의 개입을 배제할 수 없는 당시의 상황을 감안할 때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민족의 역량을 하나로 모아 임시정부를 세우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힘에 기초해서 외세 문제를 풀어갔다면 통일적인 국가 건설의 가능성도 있었다. 어쩌면 현실적으로 분단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국내에서 가장 많은 논란이 된 것은 임시정부의 수립에 대한 논의가 아닌 신탁통치의 문제였다. 신탁통치는 그 방안이 구체적으로 제시된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에 끼치는 영향은 매우 컸다. 모스크바 협정에서 신탁통치는 5개년에 걸친 4개국 신탁통치가 실시될 것이라고 막연히 결정되었을 뿐, 신탁통치를 실시하더라도 몇 년으로 할지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이 결정된 것은 아니었다.- 모스크바 3상회의의 해석문제모스크바 협정의 해석과 관련하여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협정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미국과 소련이 신탁통치를 다르게 규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 번도 실행된 적이 없었던 신탁통치를 미국은 불평등한 지배의 의미가 부각된 ‘정치 훈련’의 의미로 받아들인 반면, 소련은 도와준다는 의미가 부각된 ‘협력?원조’의 의미)로 받아들인 것이다. 기본적인 명칭 면에서도 신탁통치와 후견으로 다르게 표기했던 것이다.또한 한국문제에 관한 모스크바 협정의 한글번역문이 해방 직후 좌익측 번역문와 우익측 번역문이 다르고, 또 그 후 국내 학자들의 번역문도 약간씩 다르다는 점이다. 실제 많은 서적에서 언급된 모스크바 협정 내용문을 보면 각 어순의 배열이나 조사의 선택이 사람들이 객관적인 분석보다는 주관적인 감정이 앞서 일제의 식민통치와 동일한 것으로 이를 받아들인 탓도 있다. 그러나 모스크바 협정의 가장 중요한 내용인 임시정부수립에 관한 사실은 모든 방송과 신문들이 머리기사로 보도하지 않음으로써 국민들이 모스크바 협정에 대하여 객관적인 인식을 하지 못하게끔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열강들이 독립 대신에 한반도에 신탁통치를 실시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한반도 전체는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여론으로 가득 찼다. 정치적 이념을 불문하고 좌익에서 우익에 이르기까지 모든 세력들이 신탁통치에 대한 전면적 반대를 선언하였다. 광복 이 후 비록 각 정치 세력단체들이 통일정부를 구상하는데 있어 서로의 합의점을 찾지 못해 이해관계가 대립하고는 있었지만, 모스크바 3상회의가 이루어진 시기까지만 해도 이들 모두는 하나의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들은 우리나라를 위한 통일정부를 수립하여 독립국가로서 힘을 길러야 한다는 것을 주장했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발표된 협정안의 신탁통치 문제이 대해 좌우세력 모두 계속적인 반대지지를 표시한다.< 각 신문에 보도된 좌우익 단체의 신탁통치 반대 의사 >이승만 : 신탁통치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안 될 것이다.)독립촉성중앙협의회 : 우리는 단연코 공동신탁제를 거부하며, 기타 여하한 종류를 막론하고 완전독립 이외의 모든 정책을 반대하는 것이다.)한민당 : 신탁관리제는 조선인을 모욕하는 것이니)조선공산당 기관지 : 이 무슨 3천만 민중과 5천년 역사를 완전히 무시하고 모욕한 언사이냐.)인공중앙위원회 : 우리 조선은 어떠한 이유로도 신탁통치를 실시 할 근거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건국동맹 : 우리는 신탁관리를 절대 반대한다.국민당위원장 안재홍 : 신탁관리문제가 제국주의적 야심을 떠난 주관적 호의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그것은 객관적으로 보아 중대한 착오라고 아니 할 수 없다.)그러나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왜곡 보도에 있었다. 특히 동아일보는 모스크바 협의안이 발표되기 이전 12월 24일경부터 3상회의 협의안에 탁통치의 문제가 소련이 아닌 미국에 의해 제시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반탁운동에 참여했던 일부 세력들이 일탈하기 시작했다. 소련군 로마넨코는 박헌영과 김일성에게 “미국이 신탁통치를 주장해 소련도하는 수 없이 절충안으로 5년간 후견제를 실시하기로 했다. 후견제는 신탁통치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라고 말하면서 모스크바 협정의 실행을 지지하도록 지시한 것이다.) 공산당의 이러한 갑작스런 찬탁지지는 우익의 반탁운동이 찬탁하는 이들을 비판하는 데 유리한 구실을 만들어주어 실제로 찬탁세력과 반탁세력의 치열한 대립 구도를 야기시켰다.- 찬탁과 반탁의 입장우익세력에게는 좌익이 반탁에서 찬탁으로 그 지지를 바꾸었다는 점은 자신의 세력을 확장시키기에 유리한 점으로 다가왔다. 우선 국민들에게 호소하면서 해방이후 좌익 세력이 정국을 주도하는 위치에 있었던 분위기를 뒤엎은 절호의 기회였던 것이다. 해방 직후 실시된 최고의 인기 지도자를 가리는 여론조사에서 장차 조직될 임시 정부 내각 명단에 추천된 인물은 좌익이 여섯 명, 우익이 네 명으로 좌익이 우익보다 더 많았으며) 한민당은 단 한명도 1위를 차지하지 못했다. 이는 여론조사를 실시한 선구회가 우파 성향의 조직임에도 불구하고 초기 좌익이 더 높은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반탁운동은 우익 정치세력의 정치적 주도권 장악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이 기회를 틈타 친일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들은 그 동안 자신들이 저지른 죄로 인해 숨을 죽이고 숨어 지낼 수밖에 없었지만 신탁통치 분쟁과정에서 친일파라는 이름을 벗어던지고 애국자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반탁운동을 열렬히 지지하여 찬탁을 주장하는 세력은 매국노라는 논리를 강하게 내세웠으며, 우익세력의 주장에 힘을 실어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다져나가기 시작했다.좌익세력이 모스크바 협정 지지로 태도를 갑작스럽게 바꾸었던 것은 소련의 지시였다. 이러한 지시를 받은 좌익세력은 모스크바 협정지지운동 전개방법을 논의했는데, ① 모스크바 협정지지 입장을 발표할 것. ②반다.
박정희 ‘경제기적‘에 대한 문제제기미국과의 관계를 중심으로목 차Ⅰ. 서 론Ⅱ.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과정과 성과1. 경제개발계획의 시초2. 경제개발 5개년계획Ⅲ. 1차계획을 둘러싼 박정희와 미국과의 관계1. 미국의 한국에서의 목표2. 최초의 자생적 경제발전안과 미국의 견제3. 수출드라이브 정책과 외적 자금확보Ⅳ. 박정희의 경제정책1. 외적 자금확보 방안1) 한일 협정2) 베트남 파병2. 중화학 위주의 공업정책Ⅴ. 결 론Ⅰ. 서 론박정희는 지금으로부터 90년 전인 1917년 경북 선산에서 가난한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그는 이후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만주 신경군관학교를 거쳐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으며, 8.15광복 이전까지 관동군 소속 중위로 근무하였다. 광복 이후에는 귀국하여 조선경비사관학교(육사 전신)를 2기로 졸업하고 대위로 임관하였다. 그리고 남로당이라는 공산주의 정당에서 활동하였는데, 이를 빌미로 후에 여순사건에 연루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지만 만주군 선배들의 구명운동과 군부 내 남로당원 명단을 알려준 대가로 실형을 면하고 예비역으로 강제 편입되었다. 이후 무급문관으로 군에서 일하다가 6.25전쟁이 발발하자 군에 복귀하여 진급을 거듭하고,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등을 거쳐 1960년 제2군 부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961년 5.16군사정변을 일으켜 당시 대통령이던 윤보선에게 대통령권한대행을 역임받고 육군대장을 맡았으며, 민주공화당 총재에 추대되었다(1963). 그해 12월 제5대 대통령에 취임하였고 재선에 성공한 후 장기집권을 위하여 ‘3선 개헌’을 통과시켰다(1969). 제3공화국 재임동안 ‘한일국교정상화’와 ‘월남파병문제’를 강행하였다. 1972년에는 국회 및 정당해산과 계엄령을 선포하고 또다시 대통령에 취임하였으니 이것이 유신정권인 제4공화국이다. 유신 초기에는 새마을운동의 전국민적 전개로 농어촌의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였고, 제5차 경제개발계획의 성공적 완성으로 국민들의 절대적 빈곤을 해결하는 데 상당히 기여했다. 그러나 상대적 빈곤의 심0만 달러였다. 이 중 6억 달러가 1965년의 한일국교 정상화로 들어오게 되었고, 같은 해 1월 베트남 파병 결정으로 전쟁특수에 의해 한국 경제는 발전의 계기를 마련하였다.2차 5개년계획은 개발전략을 대외 지향적 공업화에 목표를 두고 수출 촉진, 관세인하, 수입제한 완화 등의 정책을 실시하였으며, 소비재의 수출 증대와 중간재의 수출대체에 주력함으로써 공업구조의 고도화에 노력하는 한편 적극적인 외자도입과 사회간접자본의 확충에 개발 방향을 설정하였다. 그리하여 이 기간에 수출이 크게 신장하여 국민경제의 수출의존율은 1차 계획기간의 평균 8%에서 2차 계획 기간 중에는 평균 15.8%로서 거의 2배로 증가하였다. 그리고 1차 계획 기간에는 전력·비료·섬유·시멘트 등 기초산업과 내수산업이 경제성장을 주도하였으나, 2차 계획 기간에는 합성섬유·석유·화학·전기기기 등 수출산업이 성장을 주도하였다. 이 기간에 우리나라의 공업화는 급진전되어, 1966년에 전혀 생산되지 않았던 화학섬유·소모사 등이 생산되기 시작하였으며 합판, 정유, 자동차, 기계 등의 제조공업이 눈부시게 발전하였다. 그리하여 수출은 연평균 38%나 증대되었고, 1971년에는 수출액이 10억 달러의 고지를 돌파하였다. 이것은 1967년의 3억2천만 달러에 비하면 3배 이상 신장하였다. 이와 같이 수출주도의 공업화는 산업구조면에 있어서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국민총생산에 대한 광공업의 비중은 1967년 15.1%에서 1971년에는 20.9%로 켜졌다. 1차 산업은 같은 기간에 있어 37.5%에서 28.8%로 축소되었음에 비하여 2차 산업은 5% 이상 커졌다.공업화의 결과 산업구조가 달라지고 수출품 중에서 공산품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차 높아졌음에도 불구하고 고도성장을 위한 투자수요를 초래하였다. 즉, 국민경제의 수입의존율이 1차 계획 기간보다 2차 계획 기간에 더욱 높아졌고, 무역 수지상의 적자폭도 크게 확대되었다. 제2차 5개년계획에서 추진된 높은 수출 신장은 고도성장과 공업화에 크게 기여하였으나 투자재의 수수출이 예상보다 많이 이루어지면서 이들 제품을 중심으로 수출 목표를 높이 잡을 수 있었던 데에서 연원한다. 1964년 2월 수정안 제출 시점이 아닌 1964년 중반 이후에 수출드라이브 정책이 채택되는데 미국의 직접적인 종용이나 압력 행사는 없었던 것으로 판단되며 경공업 수출의 호조 등에서 기인한 기업가들의 조언과 박정희 자신의 결단에 의존해서 이루어진 비교적 자율적인 결정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고 박정희가 처음부터 체계적인 대외지향적 공업화 전략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 예상을 뛰어넘는 수출실적에 의해 사후적으로 유인된 것이었다. 군정기간인 시행 2개년간 경제개발에 필요한 외자도입이 순조롭지 못했으므로 외환파동을 초래했고 곡가파동까지 겹친 상황에서 1차산업과 경공업 제품 수출만이 상대적으로 호조를 보였던 것이다.미국은 경제개발계획을 수정하라는 압력은 가했으며 성장률을 하향 조정하라고 권고했다. 또한 공장시설에 투자하지 말고 사회간접 자본에 투자하라고 권고했으며 수출지향적 산업화를 하라고 종용하지는 않았다. 단지 환율현실화라는 압력을 가해서 수출지향적 방향으로 유도한 측면은 있지만 이것도 미국이 한국의 정책을 수출지향적 방향으로 몰기 위해 내어놓은 카드는 아니었으며 한국정부가 1964년 5월 원화절하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동년 6월 한국정부의 주체적 수용에 따라 수출종합시책을 내놓아 수출지향적 방향으로 점진적으로 변화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박정희 자신은 ‘민족주의적’ 성향 때문에 미국의 종용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으며 1962~1963년간은 미국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자주적 발전전략을 채택하다가 기업가-친미파 관료의 반대에 직면해 노선전환을 시도했다. 한국이 독자적인 정책 수립과 시행착오, 정책수정과정을 거쳐 수출드라이브 정책을 내어놓자 미국은 받아들일 만하여 수용했다. 즉 한-미간에 적당한 양해와 타협 속에서 수출드라이브 정책이 유기적으로 입안되었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3. 수출드라이브 정책과 외적 자금확보수출입국이 추진되기 시작한 196때문에 국내정치사정에 따라 회담을 서두르기도 하고 일부러 지연시키기도 해 박정희 정권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특히 일본은 선거가 있을 때면 회담을 소홀히 했다. 또 국제적으로 문제가 생길 때마다 고의적인 지연작전을 구사하기도 했다.이렇게 양측 주장이 팽팽한 회담이 진행되는 가운데 한일회담 타결의 최대 분수령인 청구권문제를 결판 짓기 위한 김종필?오히라 간의 첫 대좌가 이루어졌는데, 이 대좌에서 무상원조 3억불, 유상원조 2억불, 상업차관 1억불 이상으로 청구권협상의 큰 테두리를 만들게 되었다. 하지만 김종필은 총액타결에만 주력함으로써 청구권의 명분이나 독도문제 처리와 관련하여 훗날 굴욕적, 매국적 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과오를 저질렀다.1차 회담에서 김종필이 청구권의 명분과 독도의 국제사법재판소 문제에 관해 정확한 의사표시를 하지 않았다. 일본 측에서는 이 문제들에 대해 김종필이 양해했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대표부와 외무부 관계자들은 몹시 당혹스러운 입장에 빠지게 되었다. 해석차이로 말썽이 빚어지게 되자 ‘단독회담에서 생길 수 있는 해석 차이를 막기 위해 메모를 남기자’해서 2차회담시 김종필-오히라 메모를 작성하게 되었다. 하지만 백지 두 장에 만년필로 작성된 「김-오히라 메모」상에는 단지 ‘무상, 유상’이라는 명목만이 표시되어 있을 뿐 ‘청구권’이라는 표현은 어느 곳에도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이 메모가 작성된 이후에도 명목을 둘러싼 양측 교섭대표간의 논란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일본 측은 이미 회담에서 양해가 끝난 사항임을 주장하면서 ‘양국정부는 경제협력조치로서 양국 간의 청구권문제가 해결된 것으로 간주한다.’는 문구만을 넣자는 입장을 고수했고, 한국 측은 이를 거부했다. 그후 이케다는 「김-오히라 메모」의 재가를 유보시킴으로써 청구권교섭은 다시 2년반 남짓 미로를 헤매야 했다.그 후 1964년 6월 3일에는 한일회담과 한일협정을 굴욕적인 것이라고 규탄한 학생시위가 전국을 흔들어 계엄령이 떨어졌고 회담은 잠시 중단되었다. 1964년 12월 7차회담이 주한 미군 철수를 막는다는 것이었다. 박정희는 1967년 선거유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솔직한 이야기를 하자면 만약 우리 한국군이 파견되지 않았다면 당시의 내 추측으로는 주한 미군 2개 사단이 월남으로 갔을 것이다.(중략) 당시 월남, 미국정부가 한국군을 보내달라고 했을 때 우리가 보내기 싫으면 안 보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럴 경우 미군 2개 사단이 갔을 겁니다.(중략) 우리나라의 국방을 위해서도 한국군이 월남에 가지 않을 도리가 없지 않습니까?주한미군의 철수와 함께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는 한국군의 감축문제였다. 한국군의 감축은 곡 박정희 정부의 지지기반이 축소되는 것을 의미했다. 당시 한국군의 규모는 한국 경제를 넘어선 것이었기 때문에 1950년대부터 한국군 유지비의 일부가 미국의 원조에서 충당되고 있었다. 따라서 1950년대부터 한국에 대한 원조의 감축을 꾸준히 추진해왔던 미국으로서는 한국군의 감축이 對韓 원조를 줄이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② 박정희 정부의 태생적인 한계로 인한 미국과의 관계 개선박정희는 1961년 5월 16일 군사반란을 일으켜 선거로 선출되니 정통성 있는 민주정부를 전복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그 무렵에 세계 각처에서 민주정부를 전복하고 출현한 군사정권들처럼 박정희 정권도 정통성의 부재는 출발부터 발목을 잡는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민주주의의 파괴, 이는 박정희 정권의 지울 수 없는 태생적 한계였다. 박정희 정권이 그 어떤 민주주의에 관한 수사를 동원하거나 몇 가지 전시적 조치를 취한다고 해서 이런 한계를 지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때문에 박정희 정권은 어차피 얻을 수 없는 민주적 정통성 대신 경제발전을 들고 나와 대중적 지지를 창출하려 하였다. 한편 박정희 일당을 출발부터 괴롭힌 또다른 문제는 박정희 등 군사 반란 핵심인물들의 좌익경력이었다. 남로당 군사부가 군에서 포섭한 고급 프락치였던 박정희는 여순사건 이후 신분이 노출되자 숙군과정에 적극 협력하여 살아남았다. 군사 반란을 주도한 세력들이 반공을 국시로 한다는 것을 혁명공약의 있다.
박정희 ‘경제기적’ 에 대한 문제제기 수출지향의 정부주도 산업화 , 박정희의 편승인가 ? 리더십인가 ?Ⅰ. 서론 Ⅱ. 경제개발 5 개년계획의 과정과 성과 1. 경제개발계획의 시초 2. 경제개발 5 개년계획 Ⅲ. 1 차계획을 둘러싼 박정희와 미국과의 관계 1. 미국의 한국에서의 목표 2. 최초의 자생적 경제발전안과 미국의 견제 3. 수출드라이브 정책과 외적 자금확보 Ⅳ. 박정희의 경제정책 1. 외적 자금확보 방안 * 한일 협정 * 베트남 파병 2. 중화학 위주의 공업정책 Ⅴ. 결론 ContentsⅠ. 서론 Ⅱ. 경제개발 5 개년계획의 과정과 성과 1. 경제개발계획의 시초 2. 경제개발 5 개년계획 Ⅲ. 1 차계획을 둘러싼 박정희와 미국과의 관계 1. 미국의 한국에서의 목표 2. 최초의 자생적 경제발전안과 미국의 견제 3. 수출드라이브 정책과 외적 자금확보 Ⅳ. 박정희의 경제정책 1. 외적 자금확보 방안 * 한일 협정 * 베트남 파병 2. 중화학 위주의 공업정책 Ⅴ. 결론 ContentsⅠ. 서론 박정희 정권 18 년 동안 한국경제가 비약적 발전 을 했다는 것은 사실 중공업우선 정책 , 수출주도형 산업 육성 , 베트남 파병 , 새마을 운동 등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 내에 한국의 근대화 측면에서 뛰어난 업적 But, 경제성장은 박정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국제적 요인에 의해 조성된 역사적 대세 내지는 필연이었는가 ? 또한 , 경제발전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 성과위주의 경제활동에 치중 + 경공업과 노동집약적인 산업에 올인 ⇒ 국가주도의 개발방식에는 엄청난 후유증Ⅰ. 서론 Ⅱ. 경제개발 5 개년계획의 과정과 성과 1. 경제개발계획의 시초 2. 경제개발 5 개년계획 Ⅲ. 1 차계획을 둘러싼 박정희와 미국과의 관계 1. 미국의 한국에서의 목표 2. 최초의 자생적 경제발전안과 미국의 견제 3. 수출드라이브 정책과 외적 자금확보 Ⅳ. 박정희의 경제정책 1. 외적 자금확보 방안 * 한일 협정 * 베트남 파병 2. 중화학 위주의 공업정책 Ⅴ. 결론 ContentsⅡ. 경제개발 5의 경제재건과 원조 계획을 다룬 것 1958 년 부흥부 산하의 산업개발위원회 경제개발 3 개년계획 ⇒ 1962 년부터 실시할 예정이었으나 1960 년 4.19 혁명으로 좌절 이것이 한국 경제에 관한 최초의 독자적 종합계획Ⅱ. 경제개발 5 개년계획의 과정과 성과 2. 경제개발 5 개년계획Ⅰ. 서론 Ⅱ. 경제개발 5 개년계획의 과정과 성과 1. 경제개발계획의 시초 2. 경제개발 5 개년계획 Ⅲ. 1 차계획을 둘러싼 박정희와 미국과의 관계 1. 미국의 한국에서의 목표 2. 최초의 자생적 경제발전안과 미국의 견제 3. 수출드라이브 정책과 외적 자금확보 Ⅳ. 박정희의 경제정책 1. 외적 자금확보 방안 * 한일 협정 * 베트남 파병 2. 중화학 위주의 공업정책 Ⅴ. 결론 ContentsⅢ. 1 차계획을 둘러싼 박정희와 미국과의 관계 1. 미국의 한국에서의 목표 : 공산화 방지를 위한 경제안정 1945 년 이래 미국의 최우선적인 대한정책 목표 ‘ 공산화 방지 ’ 1960 년대 초 한국의 경제정체와 그에 따른 정치 , 사회적 불안이 한국을 공산화시킬 가능성이 높다고 인식 ∴ 한국의 경제발전을 통한 경제안정이 최선의 안전보장정책이라고 미국은 판단 급작스러운 변혁이 아닌 장기적인 계획에 의거한 성장을 추구 : 경제성장 7.1% 라는 수치에 반대 로스토우는 박정희의 방미시 가진 회담에서 “ 한국에 가장 필요한 것은 농부의 생산성을 높이는 것이며 전력을 공급하는 것이 그 다음 과제 ” 라고 주장 이에 비해 한국정부의 당국자들은 안정보다 성장을 선호Ⅲ. 1 차계획을 둘러싼 박정희와 미국과의 관계 2. 최초의 자생적 경제발전안과 미국의 견제 미국의 1 차계획 시안의 비판 한국정부는 1964 년 2 월 수정안을 내놓게 되었음 : 수정안은 성장률면에서는 성장지향보다는 안정지향으로 후퇴했지만 외향적이고 대외지향적 , 개방적인 성격을 보다 많이 함축하고 있었음 1 차산업 제품과 합판 등의 경공업 제품의 수출 실적이 예상보다 높았음 따라서 1964 년 중반 이후 수출드라이브 정책 채택 미국은 렇게 밝지만은 않았으나 대일청구권 자금의 확보와 베트남전 참전 등으로 인한 외부적 자금 확보 때문에 수출드라이브 정책이 성공 But, 수출지향적 개발 전략의 부정적 측면 농업개발 및 식량자급 , 국내지하자원 개발 등 국내산업 육성에 대한 투자배분 은 상대적으로 축소되어 결과적으로는 오늘날 지나친 대외의존적 경제구조Ⅰ. 서론 Ⅱ. 경제개발 5 개년계획의 과정과 성과 1. 경제개발계획의 시초 2. 경제개발 5 개년계획 Ⅲ. 1 차계획을 둘러싼 박정희와 미국과의 관계 1. 미국의 한국에서의 목표 2. 최초의 자생적 경제발전안과 미국의 견제 3. 수출드라이브 정책과 외적 자금확보 Ⅳ. 박정희의 경제정책 1. 외적 자금확보 방안 * 한일 협정 * 베트남 파병 2. 중화학 위주의 공업정책 Ⅴ. 결론 ContentsⅣ. 박정희의 경제정책 1. 외적 자금확보 방안 : 한일협정 ① 한일회담의 배경 1960 년대 이후의 한일국교 정상화 교섭은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 의 하나 미국은 박정희 경제정책에 대해서 마땅치 않다는 입장으로 자금지원을 거부 ‘ 이제 미국에게만 원조를 요청하지 말고 일본 등 다른 국가들에게 요구하라 . 미국은 경제적 여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지금과 같은 내용의 한국의 경제 전략에 동의하지 않는다 ’ 1962-64 년 외화자금의 부족을 메우고 자본주의에 깊숙이 편입되기위한 방편 4.19 혁명으로 탄생한 정통성 있는 민주당 정권을 뒤엎어 버린 데 대한 국민적 저항을 누그러뜨릴 수 있는 적절한 방책 ∴ 박정희에게는 명분을 세울 수 있으면서도 정권 안정 기반 구축에 도움이 될 만한 자금줄 , 즉 일본이 필요Ⅳ. 박정희의 경제정책 1. 외적 자금확보 방안 : 한일협정 ② 한일회담 진행과정 일본 은 청구권 명목이 아닌 한국의 독립축하 및 경제원조라는 명목이라면 금액 면에 있어서 어느 정도의 타협을 할 수 있다고 언급 한국 은 한일간의 불미스러운 과거를 청산한다는 상징적인 측면에서도 청구권 형식의 해결은 꼭 필요하고 청구권 문제의 뼈대가 지불명목과 금액이기 때문에 이 두 의 경제협력만으로 해결하려고 했던 박정권은 결국 한일관계의 재정립을 처음부터 뒤틀리게 만들었음 셋째 , 일본으로부터 경제협력이 엄청난 대일 구조적 적자를 가져왔음 마지막 으로 한일국교정상화로 미국 중심의 한미일 안보체제가 형성되었음Ⅳ. 박정희의 경제정책 1. 외적 자금확보 방안 : 베트남 파병 ① 군사정부 초기 정책의 실패와 새로운 돌파구로서의 베트남 참전 대중적인 동의를 거치지 못한 채 굴욕적으로 강행된 한일협정으로 인해 5.16 쿠데타 세력들은 스스로의 국민동원 논리를 상실 Berger Plan – 주한 미군의 감축과 한국군의 감축 위협 1961 년 박정희 방미 시 베트남에 한국군을 파병하는 문제를 먼저 제안할 정도로 ,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질서에의 적극적인 개입을 통해 국내외 위기상황을 풀어나가고자 함 ② 박정희 정부의 태생적인 한계로 인한 미국과의 관계 개선 군사반란을 일으켜 정통성 있는 민주정부를 전복하고 정권을 장악 + 군사반란 핵심인물들의 좌익경력 노출되자 반공으로 숙청 ⇒ 박정희 정권의 지울 수 없는 태생적 한계Ⅳ. 박정희의 경제정책 1. 외적 자금확보 방안 : 베트남 파병 ③ 파병의 긍정적 영향 한국과 미국의 관계 호전 한반도 보안의 강화 막대한 외화 획득 및 실업자 처리 ④ 파병의 부정적 영향 대외이미지 하락 전쟁피해자 남북관계 악화 박정희 독재권력 확립Ⅳ. 박정희의 경제정책 2. 중화학 위주의 공업정책 1) 한국에서의 안보상황의 변화 1960 년대 말부터 1970 년대 초반까지의 한국 안보상황의 변화 : 1969 년 닉슨독트린으로 미국의 대아시아 전략이 변화되어 1971 년 3 월 한국에서 주한 미군 7 사단 병력과 2 만 여명이 박정희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철수를 단행 ∴ 자주국방에 목소리가 높아짐 → 중화학공업을 촉진하는 역할 1973 년 1 월 12 일 박정희 대통령은 ‘중화학공업화 선언 ’ 2) 국제 질서에 따른 국내의 경제적 변화 필요성 미국의 원조물자 축소가 이루어지면서 1950 년대 대외 의존적 경제 구조의 문제점이 분명해지향적 공업화 정책을 권고한 미국과 타협 수출의 성장잠재력을 확인하면서 기간산업과 수출산업을 육성하는 전략수단으로 재벌을 활용하는 정책결정 70 년대에 들어서면서 경공업 중심 수출 정책이 한계에 부딪히고 경제가 불황에 빠지자 박정희 정권은 중화학 공업화를 추진하기 시작 But, 자신들이 처한 정치 , 경제 , 사회적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급작스레 중화학 공업화를 추진함으로써 많은 문제점Ⅳ. 박정희의 경제정책 2. 중화학 위주의 공업정책 4) 중화학 공업의 문제점 첫째 , 중화학 공업화는 경제논리가 무시되고 정치논리에 의해 무리하게 추진 둘째 , 가시적인 성과를 보이기 위해 중화학 공업에 단기간 집중적으로 투자했는데 , 이는 곧 중복 과잉투자를 가져옴 셋째 , 산업구조의 유기적 관련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대기업 중심의 집중투자가 진행되었기 때문에 , 결국 무차별 다각화를 통한 재벌의 팽창이 초래Ⅰ. 서론 Ⅱ. 경제개발 5 개년계획의 과정과 성과 1. 경제개발계획의 시초 2. 경제개발 5 개년계획 Ⅲ. 1 차계획을 둘러싼 박정희와 미국과의 관계 1. 미국의 한국에서의 목표 2. 최초의 자생적 경제발전안과 미국의 견제 3. 수출드라이브 정책과 외적 자금확보 Ⅳ. 박정희의 경제정책 1. 외적 자금확보 방안 * 한일 협정 * 베트남 파병 2. 중화학 위주의 공업정책 Ⅴ. 결론 ContentsⅤ. 결론 수출지향적 개발 전략의 부정적 측면 농업개발 및 식량자급 , 국내지하자원 개발 등 국내산업 육성에 대한 투자배분 은 상대적으로 축소되어 결과적으로는 오늘날 지나친 대외의존적 경제구조 경제 발전 계획은 민족 내부의 결단에 의해 시작됐지만 그 집행은 민족 내부의 치밀한 계획과 노력에 의해 성공했다기 보다는 외적인 자금확보에 의거해서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 다른 나라들과 비교되었을 때 경제발전을 이룬 우리나라 민족의 능력 발휘는 결코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 선택은 독자적으로 했지만 그 집행은 미국 등의 외국에 의존적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Ⅴ. 결론 ∴ 1962 년 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