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분단국가(베트남) 통일과정에서의 매혹적인 오류와 교훈- 목 차 -Ⅰ. 들어가는 말Ⅱ. 본론1. 통일전 베트남 구조적상황(1) 남베트남 상황(2) 북베트남 상황2. 정치적 통일과정(1) 통일정부 수립과정(2) 통일과정 평가3. 가치통합 과정4. 경제개혁과 사회통합문제5. 베트남 통합정책의 문제과정과 평가(1) 통합정책의 문제점① 권위획득과 정상의 문제점② 경제개혁 과정상의 문제점③ 가치 통합과정상의 문제점(2) 베트남 통합정책 평가6. 한국통일에서의 시사점(1) 베트남 분단 및 통일과정에서의 시사점(2) 베트남 통합 정책에서의 시사점① 권위획득과정② 경제개혁 추진과정③ 가치통합과정7. 통일 베트남의 향후 이데올로기Ⅲ.나오는 말 - 한반도 통일에서의 교훈Ⅰ. 들어가는 말베트남이 통일 된지도 올해가 33년째이다. 우리보다 훨씬 전에 분단국가에서 벗어났다. 현재 분단국가로 남아있는 나라는 우리나라뿐이라고 들었다. 우리나라도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논의 되는 것은 양국의 행동방침등이 고려되고 있다. 하지만 서툰 행동으로 움직일 수 없기에 많은 논의들이 필요하다. 우리나라도 분단국가가 아닌 하나로 통합된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통합한 국가들의 오류를 정확히 분석하고 판단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이번 발표 주제로 베트남 국가의 통합과정과 과정속에서 생기는 오류 등을 살펴봄으로써 하반도 통합의 교훈을 알아보고자 한다.Ⅱ.본론1. 통일전 베트남 구조적 상황(1) 남베트남 상황1948년 프랑스의 베트남 재진주 이래 남베트남에는 구우엔 왕조의 바오다이 정부가 실질적인 프랑스의 식민지로 존재 했다. 미국은 남베트남이 반공산주의 정부가 수립되길 원했으며, 민족주의 지도자로 알려진 고 딘 디엠을 선택하여 베트남 공화국을 수립하였다. 디엠정부는 폭력을 통한 철저한 독재정치를 실시하였다. 이는 필요한 국민적 지지기반을 갖고 있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1959년 총선거 이후 디엠은 국민에 대해 강경한 탄압정책을 택함으로써 정권의 불안정이 심화되었다. 디엠은 종교탄압을 위해 비밀정보 조직 투쟁 목적을 함께 하는 민족주의 세력과 연대함으로써 주민들 사이에서 독립을 주도한 민족주의 세력으로 인식되어 왔다. 따라서 남부베트남 주민을 포함하는 전베트남인 사이에는 공산주의에 대한 저항감이 적었고 정치적으로 남북 지역간 공산사회주의 중심의 통합에 관한 당위성을 수용하는 정서가 적지 않았다.결과적으로 정치적 측면에서 볼 때 남 베트남 정부가 정부 지도층이 스스로 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하는데 실패한 것과 중앙정부와 지역간의 간격을 메워 줄 행정조직 능력의 이완으로 통치체제 유지에 실패함으로써 북베트남에 흡수되는 통일을 맞은 반면, 북베트남 정부는 주민에 대해 지속적인 투쟁 목표는 제시함으로써 정치 체제의 유지 및 강화를 모색할 수 있었다. 이렇게 남북정치체제 간에는 통치 권위의 정당성에 있어서 상당한 차이가 존재하였으며, 이 차이가 남북베트남의 통일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즉 베트남의 통일은 북베트남 정부가 통일을 추진하는데 필요한 동인을 계속 확보하고 있었던 반면, 남베트남 정부는 수세적 입장을 반전시킬 요인을 찾을 수 없었던 데서 나온 귀결점으로 볼 수 있다.)3. 가치 통합과정남북 베트남간의 통일 이후 사회주의 통일 정부가 당면하게 된 주요한 과제 중의 하나는 양 지역간의 사회, 문화적 차이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억제하고 해소하는 작업이었다.통일에 이르기까지 남부지역의 사회, 문화적 특징은 토지 소유와 산업 구조에 따른 다원적 계층 구조, 오랜 기간 서구 사회-특히 미국과 프랑스-에 노출됨으로써 나타나게 된 국제주의 전쟁 기간에 심화되어 온 빈곤이 원인이 되어 나타나는 부정과 부조리에 따른 개인적 이기주의 등이었다. 또한 남부 주민들의 전통적 종교생활은 부정적 사회상황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어 정치적 통일 당시 전주민의 97%가 종교를 갖고 있었던 사실로 남부지역 사회 상황을 반영하는 하나의 특징이었다.남부지역에서 사회주의 체제 건설을 추진한 통일 정부로서는 사회주의 이념을 기초로 하는 남베트남 사회 개혁을 통해 남북 베트남 간 사농업생산은 1989년 현재 200만 섬의 쌀을 생산하여 그중 100만 섬 이상을 수출함으로써 세계 3위의 쌀 수출국으로 등장했다. 수출도 1987년에 8억 달러였던 것이 1989년에는 10억 달러로 늘어났고 1990년에는 전년도의 두 배인 20억 달러를 넘어섰다. 외국 기업의 베트남 투자액도 1988년에서 1991년 12월 말까지 약 26억 9천만 달러에 달했으며 1992년 12월 25일에는 37억 5천 2백 3십만 달라(371개 프로젝트)로, 1994년 5월 19일 현재 91억 달러로 계속 급격한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무엇보다도 베트남은 기존의 경직되고 교조적인 사회주의 경제체제가 개방과 개혁을 통해 자본주의 시장 경제 원리와 거기에 부수되는 여러 가지 자본주의 체제운영방식을 채택하여 새로운 사회체제로 변모하고 있다.베트남 사회에 대한 충격적이고 혁명적인 도전이 바로 도이모이 정책이다. 어느 의미에서는 1975년의 베트남의 통일이 영토적 민족적 권역을 탈환한 독립혁명, 정치 혁명이라면 도이모이 정책에 의한 베트남의 변화는 베트남인에게 삶의 질을 높이고 복지를 가져오는 경제적 사회적 혁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하지만 현재 개혁, 개방을 추구하는 베트남은 잠재된 내부적 모순과 외부의 충격이 어우러져 진통을 겪고 있다.첫째, 개혁개방으로 인해 외부자본이나 기업과 함께 묻혀오는 자유민주주의나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나 가치를 기존사회주의와 어떻게 조화를 이루게 하느냐하는 문제가 등장했다. 이 문제는 각 학교 교육이나 사회교육의 당면 과제이다. 종래에는 특수계층이나 선택받은 지단에게만 자녀들의 대학 입학이 허용되었는데 이제는 치열한 입시 경쟁을 통해 선발되고 있다. 또 대부분의 학생들에게 경상 계열이 더 인기가 있다.둘째, 도이모이 정책이후 중앙정부의 권한이 지방정부에 분산, 이양되어 이것이 지역 간에 경쟁을 유발하여 이것이 장래 지역 간에 격차를 벌릴 가능성도 있다. 현재로서는 과거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운영했던 남부 베트남 지역을 서방측의 자본이나 동남아의 화교자본이의 베트남화를 위해 실질적으로 노력하기보다는 표면적이고 형식적인 제도통합을 통해 사회주의 체제 건설에 치중한 데서 발생하였다.② 경제개혁과정상의 문제점통일베트남 정부의 제 2차 5개년 경제개발 목표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하에서 남부지역에 사회주의 체제를 건설하여 북베트남 지역과 통합을 이루는 것이었다. 그러나 남부지역 주민들의 저항적 태도와 열악한 경제기반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목표는 현실적으로 달성하기 어려웠다.첫째, 베트남 정책 결정자들이 남베트남 경제 상황에 대해 필요한 인식과 이해를 갖고 있지 못했다는 점이다. 북베트남 지도자들은 경제적 우위를 확보하고 직업분화를 이룬 남베트남의 다원적 사회를 획일적인 근로자 중심사회로 전환시키려는 데서 나타나는 문제점과 부정적 영향을 과소평가했던 것이다. 따라서 통일 베트남 사회주의 정부가 통일 이후 남부지역에 적용하려 한 북부지역의 사회주의 이념과 체제는 남부지역에서의 경제 활동의 위축과 빈곤을 발생시켰다. 이러한 상황은 사회주의체제라는 형식상의 통합에도 불구하고 남북지역간의 차별성을 오히려 심화시켜 베트남의 전사회적 경제개혁 방향을 남북간 통합에 역행하도록 만들었다.둘째로 통일 베트남 정부의 경제 정책 담당 관료들의 자질 부족을 들 수 있다. 남부지역 경제를 담당하는 관료들은 전문성을 결여하고 있었다는 사실 외에도 남부지역의 경제를 관리하기 위해 필요한 자본주의 경제의 기본적 이해조차 부족하였다. 또한 관료들은 관료 중심적 관리체제하에서 부패와 부조리에 쉽게 물들게 되어 사회주의체제의 특징인 경제의 계획 관리가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셋째는 사회주의 경제체제가 갖는 구조적 약점이다. 베트남의 경우 사회주의 경제체제가 갖는 특성, 즉 생산수단의 국가소유, 인센티브 제도의 결여, 유통 질서의 통제 등으로 말미암아 경제 성장을 이룰 수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사회주의 경제체제하에서 남부지역 주민들은 태업과 불법을 통해 그들의 불만을 표출하게 되고 베트남 사회 경제 구조의 변화는 생산성 저하와 주민소득의 하향적 평준화 방향으로트남 주민들이 좌경화함으로써 베트남 전쟁을 공산세력의 승리로 결말짓게 된 점이다. 즉 남베트남 정치지도자들은 체제유지를 위해 주민대중의 저항을 야기하는 비민주적 제도의 운영을 강행했고, 베트남의 공산화를 방지하려는 미국은 이러한 독재 정부를 지지함으로써 주민들로부터 반감을 사게 되었다.한국의 경우에도 오랜 시간 한국 정부의 민주화에 대한 요구와 주한미군의 철수문제가 북한의 정치 선전 대상을 되어 왔으며, 이 문제들은 한국 사회가 다원적 사회이므로 내부에 존재하게 되는 급진적 좌경세력에 의해서도 요구되어 왔다. 그러나 과거 국내 급진세력과 북한이 민주화를 빌미로 용공정부로의 전환을 요구해 온 사실을 감안하면 정부로서는 항상 다수의 주민이 정당성을 인정하는 민주화로의 발전을 지속해야 하는 당위적 필요성을 갖고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특히 베트남의 경우 경제, 사회적 모순성이 주민의 동향에 영향을 미친 바가 상당히 크므로 한국 사회의 민주화도 정치 분야만이 아니라 경제 및 사회 분야에서의 사회적 정의를 실천하는 노력이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둘째의 시사점은 남베트남의 경우 정치적 선전과 홍보 등의 수단을 사용하는 공산주의 세력의 전략과 전술을 충분히 이해하고 대비하는 노력을 소홀히 하였다. 이러한 행태의 결과로 공산주의 세력은 그들에 대한 남베트남 정부의 경계를 약화시키고 주민들과의 거리감을 좁히는 데 성공하였다. 북한은 1960년대 이래 남북한의 통일 방식으로 연방제를 주장해 오고 있다. 그러나 북한은 그들의 연방제 주장을 소위 ‘통일을 위한 선결 조건’과 연계시켜 남북간 평화적 통일을 목적으로 하기보다는 한국사회의 분열을 획책하는 정치적 선전으로 이용하러 온 것이 현실이다. 또한 북한의 연방제 통일방안의 선결조건에는 남한 사회내의 다양한 집단이 정부를 배제한 가운데 용공정권을 수립해야 한다는 주장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베트남의 중립제 정부 구성요구와 유사한 경우로 북한의 약화된 입장을 정치적 선전으로 만회하려는 의도를 엿볼 수 있게 한다. 따라서 한국으로서는 였다.
머리말저자 ‘유영숙’의 「태고보우 생애와 사상」은 한 폭의 그림이며, 한 편의 영화와도 같은 여정이었다. 태고 보우의 영화와도 같은 생애는 말할뿐더러 저자의 아름다운 표현력은 책을 읽는데 한 폭의 그림을 생각하게 할 만큼 아름다웠다.태고 보우의 생애를 이렇게 자세히 접한 것은 처음이다. 어쩌면 태고 보우스님이란 이름을 이렇게 확연하게 내 머리에 각인한 것 자체가 처음일 것이다. 보우스님은 그 어떠한 인물보다 더 한만큼의 긴 여정의 세월을 갖고 있다. 그 생애는 는 너무나도 거룩하고 훌륭하기 때문에 이색(李穡))은 「태고어록」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일찍이 연경(燕京)에서 개당하였을 때는 그 명성이 천하에 떨쳤었고,선조의 스승이 되어서는 그 사상이 온 국민에 입혀졌다. 30여년 동안순순히 가르치고 인도하여 주신 것은 붓과 먹으로 다 표현할 수 없다.더구나 그 도는 하늘과 땅을 덮었고 이름과 상을 아주 초월하였으나,거기에 무슨 문자나 언어들이 소용되겠는가. 이제 아무리 훌륭하게생각한다 하여도 이는 모두 고인의 조박(糟粕)일 뿐이다.)그러나 그 사상이 비록 언어를 초월하고 문자를 벗어났다 하더라도 오늘 이 시대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래도 언어 문자가 아니고서는 될 수 없으니, 그가 남긴 법어집을 통하여 스님의 사상을 비추어 볼 수밖에 없다.)태고 보우의 생애에서 미리 몇 가지를 짚어 보자면, 태고 보우는 임제(臨濟) 18대에 전승(傳承)한 석옥 청공의 자랑스런 법통(法統)을 사법(嗣法)한 것으로 되어진 점을 들 수 있다. 보우는 이에 따라 공민왕(恭愍王)의 왕사(王師)가 되어 쉽게 고려조(高麗朝)의 권승(權僧)이 되어 당시 세상에 하고자 하는 정치적인 활동을 쉽게 행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점을 들 수 있다. 선가(禪家)로서 외교관이 되어 원(元)나라와 고려(高麗)의 정치적 문제점을 해결해 나가는 길을 개척했다고 보아진다. 특별히 국가의 행정부에 속하는 원융부(圓融府)를 새우고 몸소 그 책임자가 되어온 점을 묵과할 수 없는 점, 특히 정삼품(正三品)에 해당되 것을 보면 틀린 이야기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태고 보우가 진리를 위해 공부 하고 있는 당시 불교는 확연하게도 교종과 선종을 구분 짓고 대립하고 있는 배경적 사상을 가지고 있다. 이는 후에 보우가 통 불교적 입장으로 ‘원융부’를 설치하는 모습에서 다시 한 번 확인 할 수 있다.태고 보우는 '만법귀일‘이라는 화두를 잡고 수행을 한다. 이 해답을 얻고자 하는 부분은 그의 깨달음을 위한 열정을 알 수 있을 만큼의 모습을 알 수 있다.만일 참선 공부를 하려 한다면 선이란 앉거나 눕는 따위에 있는 것이아니다. 부처란 정해진 형태에 구애 받는 게 아니다. 법(法)이란 한 곳에머물지 않는 것이니 우리가 법을 구할 때에는 어디에든 집착해서는 안된다. 네가 만일 앉은 부처가 되려 한다면 이것은 부처를 죽이는 것과같고, 만일 앉은 형태에 집착한다면 영원히 큰 도(道)는 이루지 못 할것이다.)이것은 보우가 든 예이다. 회양과 마조도일(馬祖道一, 709~788)의 대화를 인용한 예이다. 태고 보우는 자신이 화두에 머물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떤 것이든 한 곳에 머무르지 않는다. 법을 구하려는 참선도 앉아만 있는 다고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우는 깨닫게 된다. 이것은 후에 참선만 중요시해도 안 되고 교리만 중요시해도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열심히 정진하는 모습이 나온다.보우는 자신이 화두에 대한 답을 구하려고 했지만 그것조차 문자라는 화두에 걸려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달마대사는 ‘불립문자’를 이야기 하였다. 문자 속을 버리고 모든 논리는 벗어나서 깨닫겠다는 집착자체를 버려야만 그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이러한 의미를 알고 난 후 보우는 화두에 대한 답을 얻게 된다. 본래 화두와 보우는 별개의 존재가 아닌 상호 이입으로 구별 없는 존재가 되어 있던 것이다. 모든 진리는 아마 이러 할 것이다. 내가 무엇인가 구하려 한다면 그것은 너무도 까마득히 멀리 있어 구할 수 없다. 하지만 내가 구하려 한다는 마음조차 잊고 있다면 어느새 그와 ‘유(有)’에 얽매일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낸다.이것으로 보우는 견성을 깨닫게 되며 모든 것을 다르게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된다. 태고 보우가 우리나라 역사에 큰 영향을 줄 인물로서 발돋움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옛 시내 찬 샘물을한 입으로 마셨다가 토하도다뿌리치고 흐르는 저 물결 위로조주의 면목 드러나누나.)조주를 보았다는 것은 육조 혜능이자 석가세존이며 달마 조사이며 역대 조사를 본 것이니 우리들의 진면목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것이 어디에 있느냐는 질문이 있는데 육조를 보면 석존을 보고 삼라만상의 진면목을 보았던 것이다. 바로 “물결의 앞, 물의 뒤에서 보았다.”고 답을 한 것이 이것이다.이 세상의 모든 것은 불성 아닌 것이 없다. 물결의 앞은 물이요 물의 뒤는 물결이다. 물이나 물결 어디에나 조주의 진면목이 있다는 것이다. 물이나 물결은 일체다. 나타나기 이전의 물이 적정명명(寂靜明明)한 체(體)라면 물결은 그의 나타남이니 용(用)이다. 물이 일(一)이면 물결은 일체(一切)다. 일즉일체(一卽一切)요 일즉다(一卽多) 다즉일(多卽一)의 세계와 체와 융이 둘이 아닌 그대로 받아들여진 것이다.태고가 조주를 보았으니 자기가 조주요 조주가 태고가 된 것이다. 일체가 태고요 태고가 일체다. 여기에서 태고가 다시 ‘옛 시내의 찬 샘물을 한 입으로 마시고 뱉는다’고 읊었던 뜻은 온 천지가 문득 일시에 나의 몸이 되었고 천지와 더불어 영겁을 변치 않는 부처님이 내가 되었으니 이때의 심경은 마치 시원한 옛 샘물을 마시고 토하는 것과 같다고 한 것이다.‘뿌리치고 흐르는 저 물결 위로 조주의 면목 드러나누나’고 했으니 이는 자유자재한 무애의 경지이다. 흐름이란 일체의 시류(時流))나 관념이나 상념들이요 업의 흐름이기도 하고 윤회의 흐름이기도 하다.이러한 것들이 완전히 없어졌을 때에 조주의 모습이 나타난 것이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 게송에서 태고선의 극치를 볼 수 있다.)채홍철은 보우에게 “설산에서 소먹이는 일은 어떻습니까?”하며소 먹이는 일에 비유해서 장를 뵙고자 한 것이다.보우는 모친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푹 꺼진 눈꺼플 속에서눈동자는 반가움으로 빛나고 있었으나 얼굴에는 세월의흔적이 너무도 뚜렷이 각인되어 있었다. 매몰차게 집을나섰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은 이다지도멀었나 보다.)이 구절에서 보듯이 보우의 충효사상을 엿볼 수 있다. 충효사상은 자신을 낳아 주신 부모와 이 몸을 담고 있는 국가에 대하여 지극한 마음으로 효도와 충성을 다했다는 사실이다. 세간과 출세간은 본래 둘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세간을 버리고 출가한 승려의 사회에 있어서는 인정을 가지고 잘못 살아가다 보면 해탈의 불교가 도리어 업보를 초래하는 경향을 종종 보게 된다.그러나 태고 보우는 그와 같은 정으로서가 아니라 깨달음의 경지를 제일 먼저 알리고 그 깨달음의 생활을 보모님과 함께하였다는 사실이다. 세상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부모가 있고 부모에게는 마땅히 자식이 있는 법이다. 부모와 자식은 천륜이라 나면서부터 혈육으로 엉켜 정을 떠나기 어렵다. 그러나 태고 보우는 이미 해탈을 증득한 뒤 부모와 형제 고향 사람들을 찾아 교화한다. 그 덕분에 부모의 명예가 증성 되고 고향의 이름도 현에서 군으로 목으로 승격된다.)태고 보우는 이제 자신이 깨달은 바를 통해 많은 제자들을 육성하고자 노력한다. 그리고 제자들을 가르치는 틈틈이 좌선을 하면서 시를 지었다. 그 중 태고 보우가 생각하는 선에 대한 시를 하나 들어보겠다.거칠어도 음식이요, 정갈해도 음식이니그대들은 잡히는 대로 맛이나 보오운문의 호떡과 조주의 차 맛)인들어떻다, 우리 암자 맛 없는 밥만 하리오.)법은 평등하다. 좋고 그름이 없고 선하고 악함이 없으며 곱고 추함도 없다.법의 근본입장에서는 너와 내가 다름이 없다. 그러나 평등한 법속에 또한 서로 다름이 있는 것이다. 평등한 속에서 평등하지 않은 것이 법이다. 평등하면서 평등하지 않은 것이 법의 본성이다. 그러므로 본래 선도 악도 없으며 선은 선이요 악은 악이다.진실로 선도 악도 없는 무분별의 세계, 무차별의 평등부처님이 뜻했던 ‘염화미소’와 같은 문자에 얽매이지 않는 사상을 확립하게 된다.원나라에 간 태고 보우는 자신의 공부를 위해 떠났다기 보다는 많은 사람들에게 불법을 전하러 갔다고 보여 질 만큼 그에게 수많은 제자들이 따랐다. 저자는 많은 제자들을 들었는데 여기서 태고 보우의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원나라의 황제 궁으로 초청되어 수많은 관료대신들과 왕 앞에서 당당히 설법을 전하는 보우의 모습은 그만의 엄청난 기량을 느낄 수 있다.원나라에서 또한 경험하게 되는 것은 당시의 원나라와 고려의 사정을 알게 된 것이다. 저자는 그 사정까지 세밀하게 적어 내려갔다. 이것이 보우가 고려의 정치에 영향을 주게끔 만드는 계기가 되며 그는 고려로 발걸음 돌린다.원나라에서 설법을 하며 만난 공민왕인 왕자 기가 즉위하게 되면서 태고 보우의 승려로서가 아닌 정치인으로서의 여정이 시작된다. 보우의 등장은 한국 불교사에서 또 하나의 의미를 갖는 큰 사건이 되는 것이다.국왕은 보우를 옆에 모시면서 고려 불교계의 승풍을 그대로간직하고 있던 조계종을 진작시키고 왕실의 모든 의식을조계종 법식대로 따르게 하였다. 이로써 고려 불교계는 일연을이어 다시금 조계종 가지산문을 중심으로 부흥하면서 자주불교의 길을 걷게 되었다.)원에서는 고려의 정치적 측면뿐만 아니라 종교적 측면에서도 간섭하고 막아섰다. 때문에 당시 고려의 불교는 퇴폐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공민왕은 태고 보우와 함께 바로 잡아감으로써 한국 불교계의 큰 기둥을 바로 세운 것이라고 볼 수 있다.공민왕은 태고 보우를 위해 광명사(廣明寺)에 원융부(圓融府)라는 관청을 설치하였다. 공민왕이 “이 나라와 불교를 어떻게 해야 구원해 갈수 있겠습니까?”하며 물으니 태고 보우는 국사는 수도를 이전하여 민심을 수렴하는 것이 좋겠고, 불교는 원융부를 설치하여 통일 불교를 실천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이 원융부야 말로 자종자파(自宗自派)의 명예와 아집에 빠져 대립 분파하던 모든 불교를 근본불교의 대각정신에 입각하여 하나로 귀일시킨 대성사이고 한국불교를 다.)
불교는 부처님과 똑같은 큰 깨침을 우리들 모든 생명이 다 이루게 하려는 종교입니다. 여기에서 깨침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깨침은 우리가 가장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고, 진정한 자비의 삶을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불교에서 깨침과 자비란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이며, 또 깨침과 자비야 말로 불교를 받치는 양 기둥입니다.이런 불교를 공부 하려면 그 불교의 가르침을 말한 부처님의 일생을 아는 것은 기본 가짐이라 생각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생애에 대한 공부는 불교 교리의 시작이며, 마음 공부의 기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생애라고 한다면 아주 간단한 전설 정도만 아는 것이 다였습니다. 하지만, 부처님의 탄생뿐만 아니라 부처님이 어떤 깨달음을 가지고 출가를 선택하였는지 그리고, 출가 후에도 어떠한 깨침과 가르침을 알려주셨는지 상세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불교를 공부하는데 흥미를 더욱 가지게 하는 기회였는지도 모릅니다. 영국의 공리주의 철학자 밀(J.S. Mill)은 “소크라테스가 이 세상에 있었다는 사실을 인류가 아무리 상기해도 부족하다”고 했습니다.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사셨다는 사살이 우리에게 무한한 용기와 희망을 주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이야 말로 인간의 가능성을 여실하게 아셨고, 그 실현의 길을 우리에게 전해 주신 인류의 스승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히말라야 남쪽 산기슭, 겐지스 강의 한 지류인 라프티 하(河)의 동북 유역 로히니 천(川)의 주변에, 아리아인의 석가(釋迦)족이 몇 개의 왕국을 이루고 있었다. 이 석가족은 감자(甘蔗)왕의 후예들이며 카필라국도 그 가운데 한 나라였다. 지금의 네팔 타라이 지방에 자리잡고 있었다는 카필라 국은 쌀을 주식으로 하는 농업국이었다. 비교적 풍요한 이 나라의 왕은 숫도다나였다. 정확한 역사적 기록이 드물다는 견지에서 역사 없는 나라라고도 불리워지는 인도의 옛일이므로 때가 대략 B.C.E. 600년에서 500년쯤의 일로 볼 수가 있다.위대한 종교인 불교의 창시자 하로 가는 중이였다. 그러나 두 도시의 중간 지점인 룸비니 동산을 지나다 산기를 느끼게 되었다. 꽃이 만발한 무우수 그늘 아래서 왕비는 아들을 낳았다. 이때 오른쪽 옆구리로 아들을 낳았다고 하는데 그것은 사실적인 표현이기 보다는 상징적인 표현으로 태자의 신분이 왕족인 크샤트리아임을 나타낸다. 베다에 보면 브라만은 머리로 태어나고 왕족은 옆구리로 태어나고, 평민은 허벅지로, 노예는 발바닥으로 태어난다고 했기 때문이다.후에 아쇼카 왕은 이곳을 방문하고 돌을 깎아 높은 석조를 세우고 명문을 새겼다. 석주에는 아소칸 문자 93자가 다섯 줄의 비명으로 새겨져 있는데 그 가운데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즉위 20년에 친히 이곳을 방문하고 공양을 드리다. 여기가 사캬무니 붓다가 태어난 곳이기 때문이다” 19세기 말경에 이 석주가 발견되어 부처님의 탄생지를 확인할 수가 있었다.경전에 의하면 부처님은 태어나자마자 사방으로 일곱 발자국을 걸으시면서 한손으로는 하늘을, 다른 한 손으로는 땅을 가르키며 외쳤다고 한다. “하늘 위와 하늘 아래 오직 나홀로 높다. 온 세상이 고통 속에 있으니 내 이를 평탄케 하리라.”‘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 ’라 크게 외치셨다고 하는 부분이다. 이는 탄생계라고 불리는 유명한 선언으로 부처님, 나아가서는 불교의 기본은 잘 나타내는 가르침으로 이해되고 있다. 금방 태어난 아기가 어떻게 사방으로 걸을 수 있으며 그런 외침을 할 수 있겠느냐는 사실적인 입장보다는 거기에 담긴 뜻을 잘 이해해야 할 것이다. 당시 신 중심의 인간관과 세계관을 부정하고 인간의 존엄성과 자아 중신의 세계관이 불교의 핵심임을 선언한 것이다. 또한 부처님의 법은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다는 불법의 절대적 존엄성을 상징하고 있다. 나아가서 우리는 이 선언을 통해 이후 석가모니 부처님이 얻은 깨달음이 무엇에 관한 것인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즉 그것은 진정한 자아 회복에 관한 것이다.신화적인 이런 이야기는 역사 없는 옛 인도에서 부처님의 출현을 종교문학적으로 게는 이 말이 마음에 걸렸지만 장차 자신의 뒤를 이을 태자가 왕위에 오르는 것이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출가라는 말은 마음에 떨쳐버리고 노력하였다. 왕궁의 기쁨도 잠시의 일이었으니 태자가 태어난지 7일만에 그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어머니를 잃은 태자는 이모인 파자파티를 새어머니로 하여 자라게 되었다.태자가 탄생한 연대는 역사적 기록이 없기 때문에 정확하게는 알 수가 없다. 다만 후대에 와서 신앙적으로 불탄 연대을 정하여 기려왔다. 그러므로 부처님이 탄생한 때를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고 추측할 뿐이다. 이런 문제점이 남아있는 가운데, 현재 세계적으로 채택된 공통(共通)불기는 서기 1956년을 불멸(佛滅)후 2500년으로 보는 연대이다.< 새로운 길, 깨달음의 출가 >부처님의 개인적 배경은 일반적인 기분으로 봐서 장래가 보장되었다. 그리 큰 나라는 아니였지만 왕위 계승이 보장된 왕자였으며, 건강하고 총명한 사람이었다. 아소다라는 아름다운 부인도 있었고 귀여운 아들 라훌라도 있었으니 남부러울 것 하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29세에 일체의 것을 버리고 출가를 단행한다. 당시 인도적 배경으로 출가가 그리 생소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 길은 모든 것을 버리고 혼자 가는 외로운 길이었다. 그래서 서양인들은 부처님의 출가를 ‘위대한 포기’라고도 한다. 부처님이 출가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동기는 무엇일까? 우리는 출가의 동기를 간접적인 원인과 직접적인 원인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간접적인 원인은 먼저 싯다르타의 어머니인 마야 부인이 싯다르타의 생후 7일 만에 돌아가시고, 풍습에 따라 이모인 마하파자파티에 의해 자랐지만 심리적으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생가의 슬픔을 간직하고 있었을 것이다. 또 타고난 종교적인 감수성을 들 수 있다. 열두 살 때의 봄에 한 해 농사의 시작을 알리는 행사인 춘경식에서 있었던 일이다. 농부들이 힘들어 하는 모습, 쟁기를 끄는 소의 고통, 보습에 의해 벌레들이 잘려 나가고, 어디선가 날아온 새들이 그것을 쪼아 먹는 모습 등, 어자라난 그였지만 그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잡은 번민은 실로 심각한 것이었다. 그의 번민은 이 세상의 덧없음과 근본적인 인간고(人間苦)에 대한 것이었다. 그의 그러한 고뇌는 약육강식의 현장을 목격한 다음부터의 일이었다고 전해진다. 끝으로 카필라 국의 종교적 위치이다. 당시 인도는 강대국이 약소국을 병합해 가는 과정이었으므로 주변의 큰 나라에게 항상 침략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그때 인도인의 이상은 전륜성왕이나 종교적 성직자가 되는 것이었다. 싯다르타는 전륜성왕으로서의 한계를 잘 알았기에 자연히 종교적인 선택을 하지 않았나 하는 짐작을 해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직접적인 동기는 다른 곳에 있다. 생사의 문제에 대한 깊은 통찰과 그에 따른 회의이다. 이를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 이른바 사문유관이다. 맨 먼저 늙어서 쇠약하고 극도록 무력한 사람을 만났다. 두 번째는 극도로 불행하고 절망적인 상태에서 전염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을 만났다. 세 번째는 사랑했던 사람의 시신을 어깨에 매고, 그를 화장하러 가면서 비통해하는 어느 친척들의 장례 행렬을 보았다. 이런 비참한 광경들로 인해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네 번째 광경에서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고요하고 평온하며 초연하고 당당한 수행자를 보았는데, 그 수행자는 생의 의문을 풀어 줄 진리를 찾고 청정한 삶을 살기 위하여 가정을 버린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출가에 대한 생각이 섬광처럼 싯다르타의 마음을 뚫고 지나갔다. 궁 밖의 세상과 접촉하면 할수록 점점 더 그는 이 세상에는 진정한 행복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이 사문유관의 이야기는 극적인 표현이지만 출가를 결심하게 되는 직접적인 동기가 잘 표현되어 있다. 싯다르타는 다른 사람의 나이든 모습을 통해 자신의 나이먹지 않으면 안되는 실존을 통찰 할 수 있었고, 또한 다른 사람의 병들고 죽어가는 모습을 통해 자신도 병들고 급기야는 죽어야만 하는 생가의 문제를 꿰뚫어 본 것이다.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을 통해 싯다르타는 노병사의 근본적다. 그래서 그것이 없는 삶을 찾아서 출가하였다는 것이다.꽃다운 스물아홉의 젊은 나이에, 그것도 아름다운 아내 야소다라가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 라훌라를 낳은 바로 그날 그는 슬프고도 가슴아픈 이별을 했다. 초인간적인 의지로 아내와 아들, 아버지 그리고 권력과 영광이 보장되어 있는 왕좌를 버리고 영원한 진리의 삶을 찾기 위해 떠났다. 진정한 의미의 출가라는 것은 어줍잖은 것으로부터 단호하게 고개를 돌리는 것이 라고 생각한다. 몸으로 하는 출가가 아니라 마음의 출가가 분명해야 참된 출가이다.< 수행의 시작, 그리고 성도 >부처님께서는 출가하신 후 6년의 수행을 통해 큰 깨침을 얻었다. 따라서 수행은 출가를 깨침으로 이끌어 주는 과정이었다. 당시의 인도에는 극심한 고행을 해야 번뇌로부터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궁극적인 해탈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고행자들이 많았다. 그는 고행에 엄청난 열성을 보였다. 아무도 이 젊은 고행자의 수행을 따를 수는 없었다. 싯다르타는 그 당시 인도의 고행자들이 수행하던 가운데서도 가장 어려운 고행만을 골라 수행했다. 먹고 자는 것도 잊어버릴 정도였다. 어느날 싯다르타는 그가 지금까지 해 온 고행에 대해 문득 회의가 생겼다. 육체에 오히려 집착한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고행을 중지하고 단식도 그만두었다. 몸을 씻기 위해 강가로 내려갔다가 한 소녀에게 우유를 얻어먹었다. 그 모습을 본 다섯명의 수행자들은 크게 실망하고 떠나버린다. 싯다르타는 홀로 깨달음의 길로 나아간다.감관을 부드럽게 해 주고 마음을 고무시켜 주는 쾌적한 가야의 네란자라 강가에는 후에 깨달음의 나무, 지혜의 나무로 알려진 보리수가 이었다. 그 나무 아래서 결가부좌를 하고 앉아 불퇴전의 결심으로 마지막 수행을 시작하며 결의했다.“비록 이 가죽, 힘줄, 뼈만 남고 피와 살이 말라 비틀어 죽는다 할지라도 완전한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이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겠다.” 그는 끈기있게 노력했고 전념했으며 진리를 깨달아 완전한 깨달음을 얻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이레째 되는 날, 새벽녘쯤에 다.
『고종황제 역사청문회』▣ 고종은 근대화를 이룩한 군주였다.고종은 12세의 어린나이에 왕위에 올라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세력 다툼에 밀려 있었다. 일본과 청나라의 서구 열강의 세력다툼까지도 이어져 왔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고종은 국호를 새로 하고 이용익, 이채연 등을 등용해 광무개혁)을 실시했다. 최초의 헌법이라 할 수 있는 대한국국제가 반포되고, 양전사업을 실시했다. 이밖에 도로를 정비하고 철도를 부설하는 등 철도, 운수 사업에도 힘썼다. 뿐만 아니라 한성은행과 대한천일은행과 같은 금융기간을 설치하여 상업을 진흥시켰다.고종의 많은 업적을 살펴보면 먼저, 근대화를 시작하는 첫 단추라 할 수 있는 것은 갑오개혁의 신분제 철폐이다. 조선시대는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다. 오랫동안 지속되어오던 관습을 철폐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정조 때 민국이념 차원에서 결정한 공사노비 전면철폐, 이에 대한 고종의 사노비 세습 혁파 제천명(1886) 등을 배경으로 해서 가능했던 것이다. 광무양전 사업)에서는 농민의 의지와 정부의 노력이 만나를 접점을 최초로 구체화시켰다는 것에서 더욱 높이 평가되어 있다. 이러한 관점은 상공업, 금융, 국토개발사업 등에도 이러한 평가를 더욱 확대시켜야 한다는 아쉬움이 생긴다. 대한제국은 타율에 의한 것이지만 1895년 결세의 대전납 조치를 수용 계승해 국가 예산에서 조세 수입의 안정성을 확보하려고 노력했다. 또한, 19세기 한발과 농업경영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악성적으로 반복되던 한발 피해는 1888년 대한발에서 이미 극복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근대 경제성장’은 일제시대가 아니라 대한제국기에 이미 이뤄지기 시작한 것으로 판단하지 않을 수 없다. 1896년 무렵부터 인구와 농업 생산력, 지대량, 수리시설 확보량 등의 여러 부면에서 근대 경제성장으로 간주할 만한 반등세가 고루 나타났다. 그리고 이 반등세는 시간적으로 대한제국이 추구한 근대화의 성과로밖에 볼 수 없다. 이렇다 할 반문이 든다하여도 반등세를 대한제국 근대화 노력의 성과로 보면서 행한 전국 신설 철도노선 답사, 1902년 서북 철도 첫 구간 착공 등 자력으로 근대화를 실현하려는 노력이 끊이지 않았던 것을 기억해야 한다. 고종황제는 대외적인 교류를 통해서도 군사력 등 정부금을 빠르게 판단할 줄 알았다. 1903년 8월 15일, 고종황제는 러시아황제에게 비밀리에 친서를 보냈다. 아무래도 귀하의 나라와 일본은 머지않아 전쟁을 하게 될 것 같으며, 전쟁이 일어나면 일본은 한성을 먼저 점령해 속수무책이 될 것이니 그전에 귀국과 군사동맹을 맺어두고 싶다고 했다. 정세 판단을 이렇게 빠르고 정확하게 한 황제가 전시 비상금 비축을 고려하지 않았을 리 없다. 대한제국 정부는 1901년도부터 군사비를 350만~460만 원대로 올려 나름대로 군비 확장을 도모했다고 나와 있다. 금융적인 문제에서도 한 몫 한 것이 있는데, 1899년 출범한 대한천일은행이 백동화 유통 지역을 확대해 인플레를 진정시켜 경제 전망을 밝게 했다. 그래서 1903년 3월 24일자로 중앙은행 조례가 발표됐다. 황제는 서울도시개조사업 때 미국계 콜브란-보스윅사와 50퍼센트 출자로 한성전기회사)를 설립한 경험이 있다. 금융은 고종이 전환국) 설치 등 가장 많은 노력을 기울인 부분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일본의 화폐정리사업으로 대한제국의 금융시장이 붕괴되고 말았다. 조선왕조의 유교 왕정은 생활 개선을 가장 중요시한 전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물질의 우세가 뚜렷한 서양 기계문명의 수용에도 적극적이었다고 본다. 고종황제가 그것을 보여준 대표적인물이다. 이렇듯 대한제국의 근대화정책의 성과로 1896년부터 경제가 반등했으며 근대 경제성장이 개시되었다. 고종은 즉위 이후 10여 년간 행해진 1,300여회에 걸친 강연에 임하면서 당시 조선의 기강이 매우 쇠약할 뿐만 아니라 정치권력이 사적으로 남용되고 있다는 사실과 아울러 국가의 근본인 백성의 생활이 극히 불안한 상황에 놓여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위민=민본정치를 실현할 수 있도록 이끌어 가는 것이 군주인 자신에게 부여된 정치 개방정책은 청국의 속방화 정책에 부닥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런 과정에서도 청국 견제 목적으로 서양 열국과의 조약이 서둘러 체결되었다. 그 결과 대기근에 백성이 집단적으로 죽어나는 상황이 해소된 것이다. 1888년 10월 8일 대한발에 대한 대책협의 중에 고종은 실제로 흉년이 들 때마다 외국 쌀이 많이 들어와 피해가 줄고 있다는 것, 호남은 영남과 달리 개항장이 없어 그 혜택이 적다는 것, 미국이 부강한 것은 농사를 장려하기 때문이라는 것, 가뭄 극복을 위해 타국처럼 수차보급이 시급하다는 것 등을 직접 언급하고 있다. 고종은 내부적인 기강도 잘 다져질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고종은 제도적 부패를 경계하였는데, 광무개혁 기간에 황제는 국고 지출을 둘러싼 부정을 방지하기 위해 영국인 고문 맥그레비브라운에게 세관 업무를 총괄하게 하는 한편, 탁지부대신 고문을 겸하게 하여 그의 서명 없이 국고가 지출될 수 없도록 조치하였다. 대한제국의 근대국가 만들기는 일본의 심한 견제 속에 있었기 때문에 황제는 익문사란 대일 비밀 정보기관까지 만들어야 했다. 이런 상환을 내장원) 예산의 특별 운용체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고종황제가 추진한 근대개혁의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그 사고의 지향이 보수적이라기보다는 진보적이라는 데서 평가할 수 있다. 비록 근대화 정책이 외세의 압력과 대신들의 불신으로 많은 어려움 을 겪으면서 성공을 거두진 못했지만 어느 정도 그 성과를 인정하고 왜곡해서는 안 된다.▣ 고종은 속이 빈 정책을 주장할 뿐이다.‘진정하게 소민을 보호하는 군주와 백성의 관계’로 요약되는 영조, 정조의 ‘탕평군주’와 그 계승자 고종의 비전은 문제가 있다. 이러한 비전위에는 근대사회를 수립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또한 백동화 남발은 대한제국기 화폐제도 문란의 주범이라고 생각한다. 고종황제가 국가의 경제를 고민하였다고 하지만 대원군이 국력을 기울여 중건한 경복궁을 두고 새로 경운궁을 짓는 것이나 비명에 죽은 황후의 장례를 위해서 막대한 자금을 지출하는 것이 시급한 사업라도 그러한 왜곡을 바로 잡는다면 제대로 된 근대화가 가능하다고는 보고 있다. 당시의 식민지시기에 일어난 ‘구체제 극복’과 ‘이민족에 의한 지배’라는 두 가지 중첩된 역사적 과정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내재적 발전론자’들의 일반적인 오해를 짚고, ‘식민지 근대화론’의 솔직한 역사적 입장을 보아야 한다. 인구, 지대, 임금의 시계열이 보여주고 있는 반전을 두고 그것은 대한제국기에, 더욱이 대한제국의 근대화 정책의 결과, 근대 경제성장이 개시된 증거로 해석하는 것은 ‘고종시대’연구에서 보이는 일관된 경향인 ‘사실의 부족과 해성의 과잉’의 또 다른 사례라는 것이다. 우선 반전의 시점이 모두 대한제국기(1897-1904)에 국한된 것도 아니며 반전이 우연히 같은 시기에 겹친다고 하더라도 그 원인을 바로 대한제국의 근대화 정책에서 찾는 것도 근시안적인 것이다. 개항기 전체가 거대한 전환기로서 이러한 전환 위에 1905년 이후의 식민지와 과정을 통해 대한제국의 황실 재정을 정점으로 한 ‘구체제’가 해체되고, 토지조사 사업으로 대표되는 근대적 재산권 제도가 확립됨으로써 근대 경제성장이 개시될 제도적 환경이 갖춰졌다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재산권으로 인해 불안정하게 영위되는 '생산적‘ 활동 위에 국왕을 정점으로 한 지대 추구 체제가 누르고 있는 형국이 대한제국 실상이었다면 이러한 구체제의 극복 없이 근대 경제성장이 개시되기를 바라는 것은 근대에 진입하기도 전에 탈근대를 꿈꾸는 것만큼이나 초현실적이다. 고종황제가 18세기 영,정조의 근대 지향적인 민국 정치이념을 계승한 개명군주, 민국이념은 왕과 백성이 상호 의지해 일체가 되는 것, 왕이 본체라면 백성은 그 분신이 되는 것, 그만큼 색성을 사랑하고 아끼는 왕정을 베푸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그러한 정치이념이 왜 근대 지향적인지, 왜 그 이념을 계승한 왕이 개명군주가 되는지 납득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광무양전은 재정상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으며 신민들의 토지 사유와 군주의 통치권 간의 균열을 막기용익이 실각한 이후 비로소 회계책에 기록되고, 곧바로 ’내입‘됨으로써 황제에 의해서 전유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내장원의 수입이 1904년 이전에도 변함없이 황제에 의해서 사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던 것인데, 이러한 회계책의 기재 상황은 국가 재정의 막대한 부분이 내장원의 공식적인 회계 기구에서조차 파악되지 않은 채 내장원경 이용익을 통해서 황제 개인에 맡겨져 있었음을 증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고종황제가 금융 문제에 특히나 많은 관심을 기울여 신경썼다고 했다. 한성전기회사에 황실이 출자하고 있었으며, 궁내부)에는 통신사와 철도원, 서북철도국), 광학국) 등의 근대화 사업을 위한 기관들이 설치되었다. 1903년에는 중앙은행의 설립이 시도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대부분 성과 없이 끝났던 것도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며 황실의 투자액도 황실 재정의 규모에 비하면 미미한 것이었다. 일제 식민지시대에 근대적인 경제성장이 비로소 시작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대한제국의 근대개혁은 전혀 실체가 없고 일제의 침략이 없었더라도 스스로 멸망했을 왕국이라고 치부한다. 또 그런 관점에서 볼 때 고종은 개명군주라기보다는 부패하고 무능한 봉건군주로서 식민지로의 전략과 망국에 대해 준엄하게 책임을 추궁해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또한 대외적인 움직임을 보였다고는 하나 과연 일본의 무력적 압력이 없었다면 스스로 대외개방을 했을지도 의문이다. 더군다나 개방의 의미를 잘 파악하는 것에서부터 다르게 평가될 수 있다. 만약 고종황제가 능동적으로 개방을 하기위해 힘썼다면 어째서 무관세상황을 만들어 놓았는지 의문이다. 또한 청군을 불러들여 이도저도 못하는 상황을 자초했는지 그 물음을 계속된다. 우리는 식민지사회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것은 고종황제의 근대적인 역사를 발걸음하게 하는 밑거름이 되는 것이 아니라 부끄러운 식민지라는 역사가 우리가 원치 않던 무력적인 방법으로 일본식 근대화에 우리 역사를 맞춰버렸을 뿐이다. 식민지 시대에 경제성장이 이루어졌음은 인정해야한다. 대한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