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란 교수님께『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성의 사회학 report목차...서론...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나를 이해하고 상대방을 이해하자...생활 속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에 대한 지침서...남자와 여자는 왜 다른가?...책을 읽고 난 후서론‘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이 책을 선택하게 된 이유는 워낙 유명한 책이기도 하면서 책 제목 또한 너무 위트가 넘쳐 책 제목부터 마음에 쏙 들어서 인지 읽다보니 상당히 공감 가는 부분도 많았고 전혀 몰랐던 내용을 알게 되는 기회가 되었다.이 책은 남녀 간의 차이가 왜 생기는지에 관한 다각적 통찰보다, 남녀가 서로간의 차이를 기억하고 서로의 감정을 존중함으로써 갈등을 극복하고 사랑을 꽃피울 수 있다는 점을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다. 예를 들어 남자는 여자의 기분이, 변화가 심한 파도와 같다는 점을 이해하고 그녀의 마음이 맨 밑바닥을 칠 때 더욱 사랑 받고 있음을 느끼게 해주어야 하며 또한 여자는 남자가 요청을 들어주도록 하는 몇 가지 비결이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할 수 있느냐는 우회적인 표현을 피하고 해 주겠느냐는 정확한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또한 남녀는 스트레스를 해결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다른 양상을 보인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남자는 자신만의 동굴로 들어가 자신을 괴롭히는 문제에 대해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비해, 여자는 자신의 문제를 누군가에게 얘기하고 싶어 하는 욕구가 있다. 이렇게 상대방 이성의 속성을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항상 애정이 충만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우리가 사는 세상과 마찬가지로 사랑에도 계절이 있다. 포근하고 따뜻한 봄, 여름이 지나면 언젠가는 매서운 바람이 부는 사랑의 겨울이 찾아온다. 따라서 상대방이 항상 사랑으로 가득 차 있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서로간의 차이를 이해하고 기억한다면 봄은 필연적으로 다시 다가온다.남녀 관계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각자의 개체로서 바라보는 것. 나와 다른 것을 인정하는 것. 이 책을 통해 얻어낸 크나큰 교훈이고 앞으로 살아가는데 있어서 늘 상기해야 할 사항이었다.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사랑에 대한 지침서와 같은 책은 시대의 욕구에 부응하는 바가 클 텐데, 그렇다면 그레이의 책이 테마로 삼고 있는 성차이의 문제, 그리고 남녀 간의 소통의 문제가 상당수 우리나라 사람들에서도 꽤 절박한 문제라고 봐야 할 것이며, 이 책을 서점에서 집어든 나도 그런 문제를 안고 사는 사람의 하나구나 생각해 본다.화성인이 남성과 금성인인 여성으로 일컬어지는 우리들, 화성인들이 금성에 도착해서는 서로에게 차이가 있다는 점을 인식하며 사이좋게 잘 살았는데 지구로 오면서 기억을 잊어버려 이렇게 다투게 되었다는 비유, 똑같이 발음되는 단어인데도 완전히 상반되는 의미, 다른 언어, 다른 습관들, 그로부터 빚어지는 오해들, “대체 얘는 왜 화내고 토라지는 건지 모르겠다.”며 지쳐가고 포기하는 커플들, 서로 상대방은 자신을 사랑하고 있지 않는 거라는 믿음. 하나같이 말도 안되는 단어의 배열인 듯 보이지만 그 안의 내용을 접해보면 ‘아’하고 탄성을 내뱉을 것이다.화성인들은 능력과 효율, 업적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들은 자기 능력을 입증해 보이거나 힘과 기술을 신장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목적을 이루는 능력을 통해 그들은 자기 존재를 확인하다. 그리고 주로 성공과 성취를 통해서 충족감을 맛본다. 아무도 그를 대신해서 목적을 달성해 줄 수 없다. 화성인들은 전적으로 혼자 일을 처리해 냈다는데서 자부심을 느낀다. 자율은 능률과 힘, 능력의 표상이다. 반면 금성인들은 사랑, 개인 간의 친밀한 관계, 아름다움 등에 높은 가치를 둔다. 서로 도와주고, 관심을 쏟고, 보살펴 주는 일에 그들은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여성들은 자기의 느낌을 남들과 관계를 맺고 함께 나누는 일을 통해 자기 자신에 대한 만족을 느낀다.남자와 여자는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의식적으로는 당연히 알고 있지만 무의식적으로 생활 속에 있어서는 서로의 다름을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거기에 따라 작기도 크기도 한 문제들이 발생한다. 이러한 문제들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서로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오해도 적어질 것이고 마찰도 줄어들 것이다.또한 미스터 수리공과 가정진보위원회, 동굴에 들어가는 남자와 이야기하는 여자, 고무줄인 남자와 파도인 여자 등등이 그렇다. 성 차이를 인정하는 법, 논쟁을 피하는 법, 사랑의 편지를 쓰는 법, 도움을 청하는 법, 이성에게 점수를 따는 법 따위의 실용적인 처방과 구체적인 테크닉의 제시도 꽤 설득력 있는 책이기도 하다.나를 이해하고 상대방을 이해하자사람들은 그것이 설령 옳은 말이라 할지라도 나를 바꾸라는 충고에는 거부감을 느끼거나 어려운 일로 여겨 실행에 옮기기를 포기하고 만다. 하지만 현재의 나를 인정한 뒤 마찬가지로 나와 다른 상대방(이성)도 이해하라는 말은 심리적인 반발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모든 사람이 일상생활에서 부딪히는 일련의 소소한 사건들을 수긍이 가는 설명과 친절한 어조로 전달하기 때문에 책을 끝까지 읽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든 것이다. 그레이는 이 책에서 남녀가 서로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상대방이 나와 비슷해지기를 기대할 때 긴장과 원망과 불화가 생겨난다고 말한다. 마치 다른 행성에서 온 사람을 대하듯 서로 차이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많은 문제가 풀릴 수 있다고 본다.그레이는 남녀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재미있는 비유를 든다. 화성에서 온 남자는 수리공, 금성에서 온 여자는 가정진보위원과 같다는 것이다. 여자가 남자의 공감을 얻고자 할 때 남자는 항상 문제를 해결해 주기를 바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상황을 악화 시킨다. 또 여자는 천성적으로 남자를 좀 더 낫게 변화시키려 하지만 능력을 인정받고 싶은 남자는 이를 모욕으로 받아들여 싸움이 시작된다.이 책은 내가 주는 사랑은 상대가 필요로 하는 사랑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상대가 지금 무얼 필요로 하는지 알아냄으로써 불필요한 논쟁과 이로 인한 상처를 미리 방지할 수 있다는 것을 역설한다. 참 사랑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생활 속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에 대한 지침서어디선가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남자는 믿는다는 말에 약하고, 여자는 사랑한다는 말에 약하다.'남자는 자신이 늘 듬직한 존재이기를 원한다. TV에서 나오는 멋진 터프가이의 모습에 여자친구가 좋아하면 질투심을 느낀다. 모든 일을 혼자 힘으로 해낼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고 한 가지 일에 몰두한다. 그럼 여자는 어떨까. 남자와는 달리 늘 관심을 받기를 원한다. TV에서 나오는 공주님의 모습을 동경하고, 멋진 백마 탄 왕자님을 꿈꾼다. 고민이 생기면 친구들과 이야기를 통해 해결하고, 수다를 즐긴다. 친구들끼리 몰려다니는 것을 좋아한다.남자와 여자는 다르다. 신체적 조건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사고방식까지 물론 다르다. 남자들은 여자들이 화장실 갈 때도 같이 가는 이유를 죽었다 깨어나도 알지 못할 것이다. 분명히 여자와 남자는 다르다. 문제는 우리가 그런 점을 인식하지 못하는데 있다. 아마도 생활 속에서 이성을 쉽게 접하고 부딪치고 살아가기 때문인 듯싶다. 그래서 쉽게 자신의 기준에 맞추어 상대편을 바라보는 일이 많다. 그러다보니 오해가 생겨나고 다툼이 생겨난다. 서로 자신을 이해해주지 못한다고 화를 낸다. 그런 이유들 때문에 이 책은 '꼭' 우리가 읽어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 별개의 행성에서 살지 않는다면 말이다. 늘 생활 속에서 같이 해야 한다면 서로에 대한 이해쯤은 기본이 되는 게 아닐까.이 책은 꽤 실질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다. 우리가 흔하게 접하는 그런 내용 말이다. 남자는 고민이 생기면 신문을 펼쳐들고는 혼자의 시간을 갖는다. 이러면 여자는 남자가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고, 오해를 할지 모르지만, 이것은 남자만의 고민을 해결하는 방법이다. 반면에 여자가 '당신은 평생 나에게 관심한번 보이지 않아요.'라고 하면 남자는 화를 내며 지금까지 잘해준 게 얼만데, 평생이라고 하느냐며 말다툼을 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표현이 단지 지금 관심이 필요하다고 하는 말일뿐이라는 걸 알면 서로 오해하는 일은 없지 않을까.서로 알지 못하면 오해가 생겨나고 다툼이 생겨난다. 앞으로 오랜 시간을 함께하게 될 결혼을 앞두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서로에 대해 이해하는 시간은 필수적이지 않을까. 오해에 빠지지 않고, 남자와 여자가 서로의 마음을 보다 잘 읽어내는 방법을 배울 수 있는 유익한 시간들이었다.남자와 여자는 왜 다른가?이 책은 남자와 여자는 생각이나 행동에 있어서 다르다는 내용에서 출발한다. 화성이라는 환경과 금성이라는 환경 그리고 지구라는 비유적인 환경 속에서 여성과 남성이 공생공존하면서 갈등 없이 살아가는 삶. 그러한 삶을 영위하기 위하여 저자는 여성과 남성의 심리적인 특징을 너무나도 자세히 그리고 정확히 그려내고 있다.
김승환 교수님께몬드리안, 칸딘스키, 말레비치(서양 현대 미술 report)미술대학 미학미술사학과 20054681 이슬비2005. 05. 31목 차1. 서론2. 몬드리안(1) 몬드리안의 생애(2) 몬드리안의 작품경향3. 칸딘스키(1) 칸딘스키의 생애(2) 칸딘스키의 작품경향4. 말레비치(1) 말레비치의 생애(2) 말레비치의 작품경향5. 몬드리안, 칸딘스키, 말레비치의 비교(추상에 관한 세 가지 해석)▣ 참고 자료1. 서론1900년대 초, 추상회화는 폭발적으로 일어나 여러 가지의 사상이나 이념들을 내포한 바탕에서 다양한 방향으로 발전하게 되고 1920년대 유럽에 있어서는 하나의 보편적으로 인정받는 조형적 형태 언어가 된다. 현대 미술에서 인상주의에 반발하여 색채, 형태 등에서 전통적인 회화 관념을 거부하는 추상 미술은 몬드리안을 시조로 하는 ‘기하학적 추상’과 칸딘스키를 시조로 하는 ‘서정적 추상’ 여기에 더불어 말레비치의 ‘절대주의’로 나눠 볼 수 있다. 결국 네덜란드에서는 몬드리안이 ‘신 조형주의(Neo-Plasticism)’를 러시아에서는 말레비치가 ‘절대주의’를 프랑스에서는 칸딘스키가 추상화를 통한 회화의 혁명을 주도하며 추상미술의 대변자가 되었다.2. 몬드리안(1) 몬드리안의 생애본명은 피터 코르넬리스 몬드리안이며 1872년 암스테르담 부근의 아멜스포르트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부친은 정통적 칼빈파였다. 태어날 때부터 엄격한 종교적 분위기에 젖어 있었으며 이런 분위기에서의 성장이 몬드리안 예술을 결정지은 인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숙부인 푸리츠 몬드리안에게서 그림의 초보를 배운 뒤 1892년 암스테르담의 아카데미에 들어가 그림을 배웠다. 어려서부터 회화에 매혹되었던 그는 처음엔 자연주의적 수법으로 풍경과 정물을 그렸으나 1908년 마티스에 감명을 받고 새로운 방법을 찾아 순수색으로 전환하였다. 또한 얀 트로푸와 알게 되어 1909년에는 공동 전시회를 열었다. 1910년 파리로 나와 들로네, 레제, 피카소의 영향을 받아 큐비즘으로 전향하여 대상의 추상선 검은색의 직각망 조직은 사라지고 빨강, 노랑, 파랑색의 수많이 채색된 작은 정사각형이 그 자리를 대신 하였다.1940년-1944년, 작고하기까지 몬드리안 세계는 분명 20년대와 30년대의 단순하고도 엄격한 기하학적 포름의 연장은 아니었다. 수평, 수직, 삼원색, 삼비색이란 기본적 조형요소를 그대로 간직하면서도 더욱 복잡하고 더욱 경쾌한 리듬과 구조의 풍부함을 드러낸 것이었다. 엄격하고 무거운 구성과 절제의 세계에서 벗어나 어린아이 같은 천진한 감성과 생애 즐거움을 화면에 표현했다. 특히 빅토리 부기우기 작품은 연합군의 승리를 확신하는 염원으로, 제작 의도는 확실히 이전의 제작태도에선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연합군의 승리를 보지 못한 채 1944년 2월 1일 72세의 나이로 머레이힐 병원에서 폐렴으로 사망하였다.이와 같이 몬드리안은 자연주의 화풍이 철저했으며, 쓸쓸한 겨울 풍경과 정물 등을 그렸는데 특히 뭉크의 영향을 받아 섬세하면서도 어딘지 병적이었다. 그 후 신비주의의 화가 얀 투로프를 알게 되어, 의 연작을 권유받아 차차 추상으로 바뀌었다. 칸딘스키의 우발적인 비대상의 추상에 비교하면, 그의 경우는 문자 그대로 나무면 나무, 모래 언덕이면 모래 언덕의 핵의 추상으로서 추상화가 탄생한다. 1910년 파리에 가서 포브의 감화를 받았으나, 17년 되스부르크 등과 데 슈틸 운동을 일으켰으며, 끝내는 수평과 수직의 순수추상으로 향하였다. 이는 질서와 비율과 균형의 미이며, 그 자신도 평생토록 고독과 청빈에 만족하며, 몹시 종교적이고 엄격한 경지를 지냈다.(2) 몬드리안의 작품경향* 몬드리안 그림에 있어서의 수직·수평선몬드리안의 그림에 있어서 추상으로 향하게 하는 추진력은 첫째로 신지학에서의 신비적인 영역, 보편적이면서 불가시적인 것, 즉 감추어진 것에 대한 추구를 들 수 있다. 둘째로, 추상적인 기하 형태를 통해 사회 질서를 추구하고, 현재의 지적인 창조력을 나타내려 한 것을 들 수 있다. 이런 배경으로 볼 때, 수직·수평선은 몬드리안의 은 또한 '형태와 관련된 불변의 진리가 존재함'도 보여준다. 즉 모든 형태와 모든 선은 그 자체의 표현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객관적인 형태의 표현은 우리의 주관적인 시각에 의해 수정될 수 있으나 그것은 항상 그 자체로 진실하다. 원은 항상 원이며, 사각형은 항상 사각형이다. 몬드리안은 이것을 '언제나 진실 되고 고정된 법칙'이라고 부르고, 그 법칙에 의해 조형 요소들의 내적인 상호관계를 이루어 나간다고 한다.몬드리안의 수직, 수평선과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사각형은 원래가 절대적으로 미적 가치를 지닌 것이며, 어떤 형태를 모방한 것이 아니다. 몬드리안은, 모든 자연에서 기본을 이루고 있는 가장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두 요소 ― 즉 수직, 수평선 ― 는 어디에서나 존재하지만 자연 현상들의 개인적이고 특정한 형태들에 의해 감추어져 왔기 때문에, 진정한 예술가는 그 감추어진 보편적인 요소를 찾아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3. 칸딘스키(1) 칸딘스키의 생애칸딘스키는 모스크바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비록 생애 절반을 독일과 프랑스에서 지냈지만 자신이 태어난 도시에 대한 강한 그리움을 마음에 지니고 있었다. 그는 법학과 경제학을 공부하고 에스토니아의 교수직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는 교수직을 포기하고 그림에 몰두하기 위해 1896년 뮌헨으로 이주한다. 칸딘스키는 초기 작업시기인 당시 중세부터 내려오는 독일의 전통적인 회화 기법인 목판화를 제작하였게 야블렌스키와 클레를 알게 된다. 또한 가브리엘레 뮌터를 알게 된다. 이 시점까지의 칸딘스키 그림은 동화와 같은 역사적이고 낭만적인 주제나 풍경 등에 뿌리를 두고 있었는데 가끔 그것을 팔레트 나이프로 그리곤 했다.1895년 칸딘스키에게 결정적인 예술적 인상을 끼친 사건이 일어나는데 하나는 바그너의 「로엔그린(Lohengrin)」이라는 공연 관람, 또 하나는 모스크바에서 열린 인상주의 전시회에서 클로드 모네의 [건초더미]라는 작품을 보게 된 것이다. 칸딘스키는 모네의 작품을 통해 점으로 이루어진 그림에서 대상이 없다고 예술적 아방가르드 중의 한 사조를 조장하고 있었다.그로피우스는 그에게 교수직을 제공하며 1922년부터 1933년까지 여기서 장식미술 공방과 기초 교육 반을 지도하였다. 이시기에 칸딘스키는 상호관계성이 첨가되고 바우하우스의 시기구분에 부합하는 여러 사조들이 잘 이용된다. 이 무렵부터 종래의 유동적 터치와 형태 대신 상징?기호로서의 확정적 형태를 구사한 서정적 기하학주의 양식이 시작되었다. 26년 회화적 이론체계와 강의 요강의 틀을 체계화시킨「점?선?면(1926)」등의 저서에는 그의 그림에서 기본이 되는 색과 개념들(차가움, 뜨거움, 고요함, 흥분), 예술적 관념들이 나타나고 새로운 경향들을 보급시키는 원천이 되었다.1933년 칸딘스키는 그의 작품을 퇴폐 예술이라고 낙인찍은 나치주의로 인해 독일을 떠나 파리 근교의 네울리에 정착하게 되며 39년 프랑스에 귀화하였다.그의 마지막 작품들은 바우하우스의 기하학적 형태와는 거리를 둔 유기적이고 미생물적인형태를 담고 있다. 그의 예술은 이미 유럽의 추상 미술에 큰 공헌을 하였지만, 그의 말년 회화의 활동 범위는 그다지 넓지 않았다. 초보적인 유럽의 추상 미술과 쉽게 화합되지 못했고 비평가들도 그의 작품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많은 위대한 화가들의 노년기의 경우처럼 편견 없이 조용하고 자유로운 작업을 계속해 나갔고 신비적이고 환상적인 우주의 미시적 존재의 이미지를 그리기 위해 그의 기하학적 구성을 포기하였다. 이렇게 추상미술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칸딘스키는 1944년 겨울 파리에서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2) 칸딘스키의 작품경향*추상화를 통한 회화의 혁명을 주도20세기 초, 유럽은 산업혁명 이후 장밋빛 미래를 꿈꾸며 도약을 준비한다. 하지만 1914년에 일어난 1차 세계대전은 유럽의 꿈을 무참히 깨뜨리고 말았다. 이 시기에 즈음하여 미술계에는 추상적인 패턴의 작품들이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특히 바실리 칸딘스키(Wassilly Kandinsky 1866~1944)는 추상화를 통한 회화의 혁명을 주도예술에 대한 생각을 받아들여 공감각의 원리로 발전시켰다. 공감각이란 이미지와 음 또는 냄새와 맛과 같이 서로 다른 영역의 감각을 함께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즉 그의 작품에서 보여 지는 색조와 형태의 배치는 음악적 요소들이 함께 어우러져 영혼을 감동시키는 것이다. 그는 색의 상호작용과 기하학적인 경향을 파악하고 궁극적으로는 색채에 음악적 감정을 부여하고자 했다. 작품에 명시되어 있는 ,과 같은 음악적 용어가 등장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1910년부터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던 1914년까지 칸딘스키의 작품 세계는 절정을 이루게 된다. 구상적인 작품에서 비구상으로의 전환을 꾀하면서 그는 당대의 신 미술가협회와 결별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칸딘스키는 음악가 친구들과 우정을 더욱 돈독히 하며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이제 그의 작품에는 더 이상 어떤 형상이나 사물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보는 이들에게 자신의 그림을 이해시키려 하기보다 상징적인 물음표를 하나씩 더 던져주고 있었다. 1933년 파리에 정착한 이후 칸딘스키는 유럽의 추상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만년의 칸딘스키는 자유롭고 조용한 작품 제작의 시간에 또다시 몰입한다. 기하학적인 구성을 포기하고 부드러운 곡선과 유기체의 형태를 만들어 나간 것이다. 그는 즉각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인식의 사물을 대신해 신비적이고 환상적인 이미지들을 화폭 위에 펼쳤다. 무의식으로 느껴지는 내면의 상황, 비록 형태는 없지만 그는 캔버스 위에 피 인지 물감인지 구분조차 안되는 불길한 얼룩을 그려 넣기도 하고, 선의 움직임을 통해 격정적이고 흥분된 느낌을 살리기도 했다.*직관과 심리 상태에 의한 추상화뒤집어진 그림을 보면서 색채와 선만으로도 강렬한 느낌을 전달할 수 있다고 확신한 칸딘스키. 칸딘스키에 의해 발전되어 온 추상화는 일반적으로 구체적인 대상을 묘사하지 않는 회화를 뜻한다. 언뜻 보면 아무런 의미와 감정도 없어 보이지만, 칸딘스키는 추상화 속에 영혼을 울리는 감동'이 담겨져다.
머리말우리는 여러 가지 관점에 의해서 성에 대해 알게 되고 느끼며 살아가게 된다. 그러한 여러 가지 관점 중 나는 학습에 의한 관점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생물학적 관점이나 사회학적 관점보다는 성을 인식하는데 많은 편견과 오해가 있기 때문이다. 학습의 효과는 예부터 누적되어 오늘날 우리들이 생각하는 성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사회적으로 하나의 인식이 완성이 되어지고 있다. 사회라는 틀 안에서 학습론적 관점은 옳은 것이며 여성과 남성에 대해 명명되어져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하나의 고정된 관념이며 항상 옳은 것만이 아닌 것을 알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학습론적 관점이 얼마나 옳은 것이며 어떤 점에서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그에 대한 방안은 어떤 것이 있는지 얘기해 보고자 한다.성에 관해 여자는 여자답게, 남자는 남자답게라는 학습과정은 가정에서 교실에서 크게는 사회라는 틀 안에서 교육되며 주입되고 있다. 수년전부터 이러한 학습과정을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익히며 옳은 것이라 생각해왔다. 나아가 우리들의 대대손손 부모님과 선생님, 사회제도가 후손들을, 우리들을 교육시키는 큰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결과로 여자는 언제나 순종적이며 조신해야하고 내형적인 삶을 살아야한다는, 남자는 용감하고 난폭해도 되며 가정을 위해 외형적인 삶을 살아야한다는 결과가 생기게 된 것이다. 만약 이것에 조금이라도 벗어나게 되면 특히 여성은 안 좋은 사회적 눈초리를 받게 되며 행동이 바르지 못한 여성으로 낙인찍히기 일쑤며 남자에게는 호모가 아니냐는 오해를 받기도 한다. 이러한 고정관념은 우리의 옛 유교사상이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같다.또한 여성과 남성을 구분 짓는 학습론적인 관점은 태어나면서부터 느낄 수 있다. 만약 아들이 태어나면 떡두꺼지 같다거나 장군감이라는 말로 남자아이를 대변하기 때문이다. 어린아이의 장난감이나 옷 색깔에서도 우리는 많은 차이를 쉽게 느낄 수 있다. 로봇이나 자동차 그리고 파란색은 남자아이만의 것이며 인형과 분홍색은 여자아이만의 것이라는 편견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또한 놀이로서 성유형화를 시키기도 한다. 이러한 모든 편견의 기본요소를 우리는 아동기에 자리잡으며 성장하기 때문에 우리가 잘못된 인식으로 살아가는 쉽게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학습론적 관점이 우리에게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감정이 아닌 외적인 경험이나 관찰에 의한 철저한 이분법적인 논리가 적용된다는 것이다. 성역할과 행동에 심지어 직업에 관해서도 이 논리가 적용되어 지고 있다. 현대에 와서는 이러한 문제가 많이 완화되었지만 아직도 적잖이 볼 수 있다. 이러한 학습은 학교를 다니게 되면서부터 익히게 되며 동화되게 되어 확실한 개념으로 자리 잡는 것이다. 더불어 부모는 자녀에게 어느 정도 성유형화된 행위를 조장함으로써 어린이들은 성에 관한 역할에 관한 여성과 남성에 대해 확실하게 구분을 짓게 되는 것이다.이렇듯 우리는 어릴 때 부모와 학교, 또래 친구들에게 성에 대해 배우게 되며 성장하는 동안에는 대중매체와 사회적 체제에 의해 배우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어른이 되는 동안 이러한 올바르지 못한 교육을 받으며 학습하며 자라기 때문에 어른이 된 지금에 이르러도 성에 관한 잘못된 인식들을 고치기가 어렵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여성과 남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가지고 살아가기란 어렵다. 세상은 점점 발전되어 가고 우리들의 생각과 의식에 있어서도 점점 수준이 높아져가고 있는 지금, 우리는 어떠한 학습과 태도로 성을 대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바람난 ‘가족’에 대하여(성의 사회학 리포트)개요1. 바람난 가족을 보고2. 바람난 보다는 ‘가족’에 초점을 맞추어3. 가족 안에서 길 잃은 개인4. 한국 가족사회의 변화와 여성과의 관계5. 리포트를 마치고2007. 04. 17바람난 가족을 보고바람난 가족을 보고 난 후, 묘한 기분에 빠졌다. 일명 문제작인 바람난 가족.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았다. 흔희들 부정적 의미로 사용하는 ‘바람’과 그와는 대조적인 ‘가족’을 결합한 아이러니한 제목이라니. 처음 이 영화를 보고 난 후에도 여러 생각이 들었지만, 과제 때문에 다시 보게 되니 생각할 거리를 참 많이 안겨주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람난 가족은 말 그대로 온 가족이 바람난 이야기다. 코메디처럼 온 가족이 바람나버리지만, 절대 코메디가 아니었다. 영화는 현실을 반영하는 거울이라고 한다. 이 영화는 현실의 가족이 가지고 있는 문제의 부분 부분을 지나치게 집중해 반영했을 뿐,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이 영화는 이렇다하고 정의를 내릴만한 영화도 아니었고 그럴 수도 없었다. 여성이 일어서 자신의 목소리를 외치는 페미니즘 영화인가 하면 상업성으로 포장된 노출씬과 정사씬으로 남성을 현혹하는 단순 상업 영화 같기도 하기 때문이다.이 영화의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돈 안되는 일이라도 올바르다면 도맡아 하는 정의로운 변호사이면서 남편인 영작(황정민)과 전직무용수이면서 현재는 동네의 무용학원에서 춤추는 30대 주부이면서 영작의 아내인 호정(문소리)이 주축을 이루면 이야기가 전개된다. 영작은 자신 보다 한참 어린 연과 바람이 났다. 거기에 호정은 몰래 자신을 훔쳐보던 고등학생 지운에게 호감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호정의 시어머니인 병한은 병든 남편인 창근을 두고 초등학교 동창과 바람이 난다. 그리고 이들의 가족해체에 중심에 있는 영작과 호정의 아들인 수인은 자신이 입양아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혼란을 겪는다. 이후 병한의 남편인 창근은 간암으로 죽게 되고, 병한은 남편이 죽자 초등학교 동창과 결혼하겠다고 아들 내외에게 말한다. 아들인 영작은 어이없다는 듯 콧방귀를 끼지만 며느리인 호정은 그런 병한의 말에 호응을 해주고 적극 지지한다. 그러는 사이 영작은 출장 간다는 핑계로 연과 여행을 떠나고 여행 중에 술이 취한 상태로 오토바이를 몰던 지루와 교통사고가 나게 되고, 자신의 불륜현장을 무마하려는 듯 이 일을 대충 무마시키려다 자신의 아들인 수인이 지루의 손에 어이없게 잃게 된다.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사이 호정은 고등학생 지운과 섹스를 하게 되고 남편과는 불임이었지만 지운과의 사이에서 임신을 하게 된다. 이런 지운의 행동은 안 지운의 아버지가 호정에게 찾아와 지운과 관계를 끊지 않으면 남편에게 말하겠다고 협박을 하고, 결국 남편인 영작이 알게 된다. 이들 부부는 아들 수인을 잃은 슬픔도 잠시 서로의 바람에 대한 얘기로 심하게 다투게 되고, 이로 인해 호정은 상처를 입어 병원에 간다. 영작과 호정은 병원을 나와 서로 반대방향으로 택시를 타고 간다. 이런 상황에서 영작은 연에게 찾아가지만 연이의 집엔 또 다른 애인이 있다. 결국 연에게 버림받게 된 것이다. 영작은 두 여인에게 버림 받는 것이 두려워 아내 호정에게 찾아가지만 호정은 남편과 아이사이에서 아이를 택하게 된다. 결국 부부는 이혼을 하게 되며 이 영화는 끝이 난다.영화를 보는 내내 콩가루 집안이구나 하고 생각했던 내 자신이 부족하게 느껴졌던 이유는 현대 사회에서 해체되어가고 있는 가족에 대한 생각이 깊어졌기 때문이다. 전적으로 거짓이 아니었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졌다.바람난 보다는 ‘가족’에 초점을 맞추어영화는 사회 정의에 반해 ‘바람’을 피웠기 때문에 온 가족이 불행해진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따지고 보면 정말 불행해진 것은 아니다. 단지 그들을 덮고 있던 살얼음이 깨져나간 것뿐이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바람난’이 아닌 ‘가족’에 주시해서 보려고 노력했다. 영화는 바람난 가족을 통해 가족의 의미를 한번 더 새겨주는 영화인 듯하다. 다시 말하자면 가족들의 바람이 아니라 바람이 난 가족에 초점을 맞춰 봐야한다는 것이다. 가부장적인 삶을 추구하는 시아버지 창근과 남편 영작이 페미니즘을 추구하는 시어머니 병한과 아내 호정과의 대립에서 결국 지게 되는, 다시말해 페미니즘 여성이 인정을 받게 되는 그런 모습을 보여준다. 거기에 현대 사회의 가족을 아주 끝까지 갔다고 해도 될 만큼의 극단적인 가족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바람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가족 자체가 문제가 되어 가족 해체를 가져오게 한다. 요즘 현대 사회에는 대가족화에서 핵가족과, 결국 가족 해체로 이어지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가족들의 바람에 초점을 맞추어 단순한 재미만으로 보기보단 이 가족이 무엇 때문에 바람을 피는 것으로 욕구를 충족하려 했는지, 왜 가족 해체까지의 상황까지 오게 되었는지에 대해 생각하며, 우리 생활의 가족의 의미를 다시 한번 더 일깨워 보게 되었다.가족 안에서 길 잃은 개인영화를 보는 동안 나는 영화가 제시하는 새로운 ‘가족상’에 관심이 갔다. 영화의 제목처럼 모두가 바람이 났다. 하지만 사회의 통념처럼 이 바람난 가족이 콩가루 집안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것은 그 중심에 여성인 호정이 있기 때문이었다. 호정이 가족의 구성원을 위해 희생하거나 봉사하며 한 없이 이해하는 현모양처이기 때문이 아니다. 호정은 간암 말기의 시아버지에게 술을 사드리고 15년 만에 초등학교 동창과 바람이나 새로운 인생을 찾겠다는 시어머니를 지지하며 자신의 입양 사실을 알고 혼란스러워 하는 아들과 진심으로 대화를 나눈다. 남편인 영작을 제외하면 이 4명은 그 누구도 혈연관계로 이어진 가족이 아니지만 이 영화 안의 누구보다 떳떳하고 즐거워 보인다. 특히 아들 수인이 엄마 호정에게 ‘다른 얘들은 엄마 배 아파서 낳지만 나는 엄마 가슴 아파서 낳았으니까 나도 엄마 아들 맞아요’라고 말하는 순간 혈연에 얽매이는 것만 가족인 관계인 보다는 비록 혈연으로 엮여있지는 않지만 사랑과 믿음으로 된 호정과 수임의 가족이 더 아름답게 보였다.영화는 확실히 전통적인 윤리관에 지배받고 있는 우리들에게 충격과 함께 가족을 바라보는 코드를 확실히 변모시킨 것만은 사실이다. 이 영화에서 가족의 규칙은 이렇다. ‘성’을 결혼제도 안에서의 구속물로 보지 않는 것, 여성이 가족 제도 안에서 무조선 희생당하지 않는 것, 서로의 삶에 간섭하지 않는 것이다. 즉, 가족을 구성하는 어떤 제도적 억압이 없었기에 이 영화의 흐름이 가능하게 보인 것이다. 따라서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잃은 개개인은 자신의 행복을 찾는(가족을 찾는)결론이라는 생각이다. 가족을 구성하는 새로운 윤리로 나름의 행복을 찾는 다는 생각이 들었다.이쯤되면 그게 무슨 가족이냐 동거나 남남보다 못한 사이가 아니냐라는 말이 나올법하다. 우리나라는 유교적인 지배가 너무 내려오기 때문에 입양도 재혼도 미혼모도 안좋은 시선으로 보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외국의 경우를 보면 능력이 되면 결혼하지 않은 여성도 남성도 아이를 입양할 수 있으며 재혼을 떳떳하게 밝히고 크게 축하받는다. 가족이라는 기본 적인 집단이 행복해야 나도 나아가 나라도 행복하게 산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처럼 대가족에서 스트레스와 참고 견디는 생활은 화목과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행복과 욕망만을 추구하자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욕망과 행복을 찾는 다고해서 가족을 져버리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솔직한 사람은 그만큼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할 수 있고 끌어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에서도 어머니와 며느리가 아버지와 아들보단 사랑이 깊어 보인다. 아들인 영작도 힘들 때 자신이 조금 더 솔직할 수 있는 내연녀를 찾게 되는 것이다. 물론 무조건 하고 싶은 대로 살아가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신이 어떤 욕망이든 행복이든 감추기에 급급한 사람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이 영화는 현실을 벗어나는 일탈의 해소구가 되어 주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 뿐이다.한국 가족사회의 변화와 여성과의 관계영화가 극단적이고 과장될 수 있는 소지가 많다고 하더라도 바람난 가족에서 알 수 있듯이 최근 몇 년 동안 우리 사회의 가족모습에는 많은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과거에 소위 특수하게 대했던 이들을 이제 더 이상 특별하게 취급하지 않는 새로운 가정이 형태로 자리매김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여성이 사회의 동등한 구성원이자 동반자로 인정되었다는 전제가 필요하다.우리는 혹은 우리 곁의 수많은 여성들은 오랜 세월동안 누군가의 어머니로 아내로 그리고 딸로서 이름 없이 살아왔다. 현재 여성의 사회진출이나 지위는 확장되고 높아졌지만 다수의 인식 저변에는 여성의 본연의 역할을 단정 지으며 공공연히 가족으로의 회귀를 강요한다. 아마도 여성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특성인 ‘생산과 모성’이 완전한 사회화가 되지 못한 것이 주된 요인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영화는 현대의 무너져가는 가족에의 책임을 이러한 남자들에게 돌리고 있는 것이다. 여성의 자유로운 섹슈얼리티가 한심한 남자들과 가부장제를 타파할 수 있다고 감독은 말하고 싶은 듯 했다. 거침없이 ‘인생은 솔직하게 살아야 하는 거다’라고 말하는 시어머니 병한이나 아버지 없는 아이를 기른다는 보통의 걱정 따윈 제껴두고 당당하게 ‘당신은 아웃이야’라고 선언 할 수 있는 호정의 캐릭터도 매우 쿨 하면서도 당당한 미래의 여성을 대표하듯 어필되었다. 자신을 사랑하고 충실하며 그럼으로써 이루어지는 개인의 행복이 가족을 구성하는 본질이며 가부장제를 옹호하는 ‘가족의 화목’이 아닌 진실된 가족 개개인의 화목을 이루는 것이 바람직한 ‘가족의 화목’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