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에서의 AMENITY어메니티에 대해서 논하기 이전에 어메니티란 무엇인지 종합적으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어메니티의 사전적 의미는 AMENITY (거주성):주택의 구조 ·마무리 ·시설 ·배치 ·디자인 ·주위환경 및 사회적 조건, 특히 경제성을 초월한 모든 점에 있어서의 편리함과 쾌적함을 말한다. 홀포드의 말을 인용하자면, " 어메니티는 단순히 하나의 성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복수의 가치를 지닌 총체적인 카탈로그이다. 그것은 예술가가 눈으로 보고 건축가가 디자인하는 아름다움, 역사가 낳은 상쾌하고 친근감있는 풍경을 포함해 일정한 상황하에서는 효용, 가령 주거, 따뜻함, 빛, 맑은 공기, 집안의 서비스 등 '있어야 할 것이 있어야 할 곳에 있는 것'(The right thing in the right place.) 또는 '전체로서 쾌적한 상태'를 말한다." 라고 하였다. 그렇듯 어메니티는 우리의 현재 도시속에서 일어나는 모든현상을 일컬어도 무방할 정도인 것이다.이렇듯 어메니티의 분류는 상당히 다양하고 우리가 살고있는 그어떠한 지역의 하나하나의 특성이 어메니티가 아닌 것이 없을 정도이다. 이러한 지라 모든 어메니티에 대하여 의견표현을 할 순 없고 특별히 우리조가 지정한 지역에서의 ‘자연 어메니티’에 관하여 생각을 해보았다. 어메니티의 근복적인 의미를 굳이 파헤치자면 그 본질은 인간 주거환경의 쾌적함 일 것이다. 인간의 쾌적함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이 자연환경에 의한 것이 아닐까 생각하여 자연환경의 커메니티에 대해 얘기해보려 한다.처음에 지역을 선택함에 있어 공원이 되도록 들어가도록 지역선정을 하도록 하였다. 공원은 도시내에서의 녹지공간 구성요소로서 상당히 중요하고 기능적으로나 미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인간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어메니티라고 할 수 있다. 어느 동네이건 조그만 공원하나 없는 동네는 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아파트 내부나 동네에도 공원공간을 구성하려는 시도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당연한 듯이 이루어져 왔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라고 생각해본다면 당연히도 사람에게 너무나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21세기의 어메니티 시대가 도래하면서 각종 분류에서의 어메니티가 발달하고 다뤄지고 있는데 그것의 핵심 목적은 인간생활의 편안함이다. 사람이 주거환경을 살아감에 있어 자연과 함께하며 느끼는 편안함보다 더한 것은 없으리라 생각한다. 따라서 도시내의 녹지공간이나 하천,강등은 사람들에게 마음의 편안함과 상쾌함, 쾌적함을 느끼게 한다. 그렇게 보았을 때 갈수록 도시화 인구밀집화 되고 있는 현 세태에서 자연환경을 어떻게, 얼마나 더 구성할 것이냐는 너무나도 중요한 일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우리조가 조사한 대지를 살펴보았을 때 아파트를 제외한 압구정동의 중심부에 위치했다고도 볼 수 있는 도산공원을 중심점으로 하여 그 반경을 조사하였다. 굳이 공원을 중심으로하여 그 반경을 조사했다는 것은 그만큼 도시내에서 공원이 갖는 의미가 크다는 것이다. 압구정동이란 곳은 상당히 상업적이고 도시화 되어있고 어느정도 경제적으로 상류층 계열의 사람들의 지역이란 인식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그러한 비싼 부지의 한가운데에 굳이 공원을 설치하는데에는 자연환경이 도시내에서 사람들에게 얼마나 필수불가결한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공기의 정화를 위해서도 녹지공간 구성은 반드시 필요하고 길마다의 가로수는 그러한 기능을 위해 끊임없이 심어지고 있다고 봐도 될 것이다. 우리가 조사한 반경의 위쪽에 살짝 걸쳐져 있는 한강도 자연어메니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이다. 강의 직접적인 역할은 용수공급, 홍수예방,환경 정화기능, 수생생물 보존등의 기능이 있을 것이고 그에 못지 않은 중요한 요소는 한강둔치에서 한강을 바라보았을 떄 사람이 느끼게 해주는 탁트임, 시원함, 상쾌함 등의 심리적인 요소이다. 서울의 가운데를 가로로 정확히 가로 지르고 있는 한강이 있기에 서울이란 도시는 물이란 자연환경과 끊임없이, 한강둔치라면 어디든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종묘제례악과 판소리’를 보고.한국의 민속 수업을 들으며 민속 수업이란 무엇에 대하여 배우는 것일까 궁금해 했었다.일단 ‘민속’이란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민간의 생활인 동시에 생활의 계속, 또는 반복에서 이룩되어 전승되는 민간 공통의 습속’ 이다. 게 중 에는 민속놀이도 있을 것이고 민속음악도 있을 것이고 민속 문학도 있을 것이고 더 많은 분류가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종묘제례악과 판소리’라는 음악의 종류를 우리에게 추천해 주신 교수님의 이유는 아무래도 음악이라는 것이 인간의 삶과 가장 맞닿아있고 일상적으로 쉽게 접할 수 있는 서민들의 문화라고 생각한 바에서가 아닐까 싶다. 물론 종묘제례악의 경우 서민적인 것보다는 왕족 계층에서 들을 수 있는 음악이고 ‘판소리’가 서민들 사이에서 널리 퍼진 음악일 것이다. 다른 많은 음악의 종류가 있을 것인데 전혀 다른 성질의 이 두가지 음악을 함께 묶어서 들려주는 것은약간 의아하기도 하다. 하나가 왕실층에서 제례를 올릴때 행해지는 전통 음악이라면 하나는서민들 사이에서 웃고 떠들며 흥을 내기 위한 음악이다. 이 두가지 음악이 왕실층과 서민층을 대표하는 음악이라고 생각한다면 왕실에서의생활은 서민들의 생활보다 재미가 없을 거라 는 쓸데 없는 생각을 해본다.‘종묘제례악과 판소리’란 공연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을 가지고 23일 공연인 ‘종묘제례악과박애리씨의 판소리‘를 보러 코우스, 한국문화의 집에 갔다. 들어가기전 많은 시간이 남아공연에 관한 책자를 한개 집어서 보았다. 종묘제례악이 무엇인지 잘 몰랐던 나는 사전지식을 쌓고 공연을 들으면 더 많은 것을 캐치할 수 있을 것 같아 차례대로 읽어 내려갔다.여러 가지 종묘제례악에 대한 설명이 나왔지만 눈은 글을 읽고 있는데 머리는 전혀 내용을 인식하지 못했다. 처음 읽는 사람은 이해하기 어려운 얘기가 나와서 그냥 한번 쭉~훑고 공연시간이 다되어 무대에 들어갔다. 지금까지 공연이란 건 단지 대학로 연극무대에서보던 소규모 무대에서 하는거란 잠재의식이 밑바탕에 있었는데 무대는 생각보다 크고깔끔했다. 쾌적한 분위기의 무대에 기분이 상쾌해져 공연에 대한 큰기대를 안은채 공연은시작 되었다. 먼저 한복을 입은 사회자분이 나와서 종묘제례악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셔서느낌이 한층 친근했다. 음악의 시작은 ‘축’이라는 악기에서시작이 된다고 한다. 여기서 축은재밌게 표현하여 ‘악의 축’이라 한다. 음악이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축이다. 첫곡은 ‘영신’ 이다. ‘드오~’라는 우렁찬 구호와 함께 박을 두드리고 축을 두드린 후 음악이 시작 된다. 시작함과 동시에 바로 느껴지는 것은 이런 음악은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듯한 느낌을 받는다. 우리가 무심코 티비에서 채널을 돌릴때 국악채널을 지나가면서 들리는 바로 그음악인 것이다. 무심결에 티비를 틀어놓거나 했을때나 들을 수 있던 그 음악이었다. 요즘사람들의 정서로는 즐기기 어려운 곡조였다. 요즘의 노래들과는 달리 방금 시작했는데 연주가 많이 진행된 듯이 가락이 늘어지고 석양이 지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우울함이든다. 지루한 음악이 계속되며 제사를 올릴때 쓰는 음악이라는점을 새삼 느끼게 된다. 그렇게 계속 진행이 되다 생각보다 짧게 한곡이 끝난다. 끝날때도 시작할때와 마찬가지로 집사의 ‘지오’라는 구령과 함께 연주를 마친다. 끝날 때 재밌는 점은 이상한 채 같은걸로 호랑이등을 쓰르륵~쓰르륵~탁탁 하면서 두들기는 것인데 그 소리가 은근히 상쾌한 느낌이다.두 번째 곡의 제목은 잘 듣지 못해 순간 놓치고 말았다. 두 번째 곡도 역시 마찬가지로 축을 두들기며 시작이되고 조금 다른점이있다면 큰북을 축다음 두들기고 동시에 모든 악기가연주가 된다는 점이다. 역시 제례음악이라 그런지 시작과동시에 연주가 많이 진행 된 듯한느낌을 받고 음이 늘어진다. 마치 호랑이가 굼뜨게 산을 넘어가는 듯한 장면이 상상되고 영화에서나 보았던 제사를 치룰 때 시신을 가마에 싣고 느릿느릿 사람들이 이동할 때 나오던음악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번 곡에서 특이한 점은 피리가 처음부터 끝까지 쉬지 않고 계속 불려 애달픈 느낌이 강하게 느껴졌다.사회자분이 나와 설명하시기를 첫,두번째 음악이 다소 밝고 명랑한 느낌의 음악이었다고한다. 내가 느끼기엔 상당히 우울해보이고 가락이 늘어져 지루한 느낌이 강하게 들었는데 이게 밝은 느낌이었다고 해서 좀 의아한 느낌이 들었다. 그다음곡 들이 남아있었는데 그것들에 비해 밝은 느낌이라하니 다음곡들이 얼마나 우울할지 기대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다음곡인 ‘황중음’이 시작되었다. 이 연주는 처음부터 끝까지 ‘아~’를 7초정도 끄는 음을계속 반복하는 형식이다. 그어떤 기교나 연주같은 것은 딱히 느낄 수 없이 단순한 곡조였다. 아~ 가 끝나자 다급하게 채로 호랑이 등을 쓰다듬으며 서둘러 곡을 마치는 듯한 느낌이 인상에 남았다. 그다음 ‘영신희문’을 직접 불러보는 시간을 가졌다. 사회자가 가르쳐주는것에 맞춰 사람들이 따라서 불렀다. 처음시작은 ‘세~더~어~~’ 였다. 직접 불러보니 성악가수준의 발성을 해줘야 음이 잘 나올 것 같았다. 농담삼아 사회자가 제삿날에 혼자 불러보라했는데 진짜 시골에서 제사드릴 때 부르면 어울릴 것 같았다. 따라부르기를 마친뒤 마지막곡인 ‘전폐희문’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언제나 그렇듯 구슬픈 노랫소리와 악기연주들. 마치내가 직접 왕앞에서 제를 올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연주를 가만히 듣고 있자면 자신도 모르게 음악에 몰입이 되어 돌아가신지 얼마 안된 왕의 명복을 빌고 있는 듯한 느낌이들었다. 떠난 사람은 떠나보낼 수 밖에 없다는 그 어떤 진리를 내포하는 듯한 강한 애절함을 표출하고 있었다. 그 중에 가장 도드라진 소리로 귀에 박히는건 단연 피리소리이다. 피리소리의 날카로우면서 높은음이 애절함을 한층 강화시켜주고 있었다. 영화 서편제나 고전 춘향가에서 남녀가 이별할 때 한번쯤 흘러 나왔을 법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이별이 느끼지는 곡이었다.종묘제례악 공연이 끝나고 판소리 공연이 시작되었다. 책자에서 보았던 우아한 자태의 여인이 판소리를 한다니 내심 기대가 되었다. 판소리라 함은 빠른 곡조, 구수한 말투, 시원 통쾌한 목소리 등이 키포인트인데 사진속의 여성은 판소리 보다는 성악에 어울릴 듯한 자태였다. 기대하던 창 박애리씨가 등장 하였다. 처음보기엔 우아해보였으나 입을 여는 순간 개그프로그램에서 볼 수 있는 듯한 친근하고 재밌는 목소리의 주인공이었다. 곧 나는 판소리란역시 많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노래인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고루 다가갈 수 있는 성격을 가지고 있구나 하고 느꼈다. 개그콘서트의 무대위에 올라가서 공연을 해도 전혀 이상함이 없는 소리꾼의 재치와 유머를 가지고 있었다. 판소리가 여느 음악과 가장 크게 다른 점은 소리를 하는 소리꾼과 청중이 직접 노래에 참여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청중이 직접부르는 것이 아니라 서로간의 교감이 된다는 것이다. 소리꾼이 소리를하고 이야기를 노래하면 청중들은 추임새를 넣으며 그 이야기의 상황속에 몰입이 되어 자연스레 이야기꾼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에 맞장구 쳐주는 청자가 된다는 것이다. 추임새란 것이 참 재미있는 것 같다. 창이 이야기를 하면 이야기의 상황상황에 맞춰서 ‘어이쿠~’ ‘제~’ ‘잘한다~’ 등의 다양한 추임새로 청중들이 대응을 하니 창도 자신이 노래하는 것이 더 재밌게 느껴 질 것이다.공연 초반부에 창 박애리씨가 유머러스하게 추임새를 안넣으시면 소리를 하고싶은 걸로 생각 하고 무대에 올려 소리를 시키겠다며 자연스레 청중들로 하여금 추임새를 넣게 만들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공연문화나 다른 무엇을 살펴봐도 보편적으로 무대에 선 화자와 청자간의 의사소통은 잘 되지 않는다. 대부분이 창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추임새를 잘 넣고 있지 않는데 어떤 대학생으로 추정되는 당돌차보이는 여자가 처음으로 추임새를 넣었다. 창이이야기를 할때 혼자서 계속 추임새를 넣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공연문화의 특성상 무대에서 공연하는 사람을 두고 객석에 있는 사람이 소리를 낸다는 것은 약간 이상하게 생각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우리가 연극을 볼때 무대에서 사람이 소리를 내거나 영화 볼때 소리를 내는 것이 이상하듯이 말이다. 그런데 판소리의 진정한 묘미는 이런 창과 청중들과의교감인데 그것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겐 쉽게 행동하기가 어려운 것 같아서 어쩔 수 없는아쉬움이 들었다. 추임새를 넣으면 사람들이 한번씩 돌아보고 쳐다보고 하니 부담스러워서추임새를 넣을 수가 있어야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여학생은 꾸준히 추임새를 넣었다. 그렇게 자신있게 추임새를 넣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국악과 학생이 아닐까 추정을 해봤다. 그런식으로 창이 이야기를 하면 옆에 있는 고수와 청중에서 추임새를 넣어주는 것이 판소리를 한층 흥겹게 해주었다. 첫 번째로 공연한 곡이 흥부가인데 거기서도 흥부가 박을타는 대목이다. 흥부보가 박을 자를때의 창의 소리는 흥미 진진하고 마치 우리가 진짜 박을 자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정도로 기대감에 찬 흥부보가 점점 흥을 고조해가며 점점 빨라지다가 박이 쪼개지는 장면이 자연스럽게 상상이 된다. 쪼개질때 창이 ‘쓱싹 특 탁~~’이라고 하는데 ‘특 탁’에서 시원하게 소리를 내지르는데 소리만 듣고도 진짜 박이 터지는 느낌이다. 판소리의 묘미는 여기에 있는 것 같다. 구성진 창의 소리가 그 상황에 맞게 기교를 부리고 시원한 소리를 내니 청중들은 자연스럽게 이야기의상황속에 빠져 탄성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추임새인 것이다. 흥부가 같은 이야기의 경우 유머러스하게 상황에 맞겨
피렌체 대성당_피렌체 두오모[산타마리아델피오레(꽃의 성모마리아)]대성당 [Santa Maria del Fiore]아르노강의 북쪽, 피렌체시의 중앙부에 자리잡고 있다. 고딕 양식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초대형 돔지붕 때문에 로마풍이 느껴지는데 이는 르네상스양식이 가미되었기 때문이며, 돔의 높이는 106m, 지름은 약 42m이다. 대성당 앞에 8각형의 산 지오반니(성죠반니) 세례당이 있고, 오른쪽에는 높이 82m의 종탑이 서 있다.붉은색 돔(쿠폴라)이 인상적인 이 성당은 셰계문화유산에도 등록되어 있을 만큼 아름답고 예술적 가치가 높은 건축물로 세계에서 4번째로 큰 성당이다.꽃의 성모마리아 성당이라고도 불리는 이 성당은 높이가 무려 106m이고 다른 지역의 두오모(대성당)와는 달리 녹색/분홍색/흰색의 대리석을 사용하여 전체적으로 우아하면서 부드러운 분위기를 풍겨 그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다.피렌체 두오모는 1294년 피렌체의 시민들이 낡은 산타 레파라타 성당 대신에 대성당을 짓기로 결의하고 1296년 아르놀포 디 캄비오의 설계에 따라 기공하여 몇차례 설계의 주체가 변경되고 공사의 중단을 겪으면서 1369년 라포 기니(Lapo Ghini)에 의해 구조물이 완성되었고두오모의 상징 붉은색 돔은 르네상스 명장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 1377~1446)가 14년(1420~1434)에 걸쳐 완성했으며 브루넬레스키의 붉은색 쿠폴라는 로마에 있는 성베드로 대성당의 미켈란젤로의 돔과도 비교되는 명작중의 명작이다.흰색 일색으로 지어진 고대 성당 건축과는 다르게 분홍색과 녹색, 흰색의 대리석을 기하학적으로 배열하여 만든 이 성당은 오랜 시간을 보내면서 또 차츰 변색되어 고딕양식의 예리함보다 오히려 유연하면서도 여성적인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주어 후일 피렌체 고딕양식이란 독특한 장르를 만들게 되었다.대리석으로 장식된 외부와는 달리 내부(길이 149m, 높이 106m)는 의외로 검소하게 꾸며져 있다. 돔의 안쪽의 천정화 최후의 심판은 죠르죠 바사리(Giorgio 피에타(Pieta)상은 미켈란젤로가 75세의 고령으로 시작하여 미완성으로 끝난 작품이라 더 가치가 높다.성당 왼쪽 벽 중간에는 단테(Dante)를 주제로 한 벽화가 있는데 1465년 작품이라고 한다.돔 내부, 최후의 심판"피렌체 있는 두우모 대성당은 연인들의 성지래.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는 곳.서른번째 생일날, 나와 함께 거기 가줄 거지?"- 일본영화 "냉정과 열정사이" 中 -참고로 '두오모'에 대해 설명해 두고자 한다. 원래 '두오모'는 건축용어로 영어의 돔(dome)과 같으며 HYPERLINK "http://100.naver.com/100.php?id=53928" t "_blank" 라틴어(語)의 도무스(domus)를 어원(語源)으로 한다. 영어의 돔은 반구형(半球形)의 둥근 지붕, 둥근 천장의 뜻으로 사용되는 데 대하여 HYPERLINK "http://100.naver.com/100.php?id=128470" t "_blank" 이탈리아어의 두오모와 HYPERLINK "http://100.naver.com/100.php?id=48881" t "_blank" 독일어의 돔은 HYPERLINK "http://100.naver.com/100.php?id=235359" t "_blank" 대성당(大聖堂:cathédrale)을 말한다.이탈리아에서는 특히 두오모가 보다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두오모는 주교신부가 미사를 집전하는 성당을 말하는데, 큰 도시에는 모두 두오모 성당이 있다. 이탈리아에서 두오모는 단순한 종교적 장소뿐만 아니라 지역민에게 가장 중심적인 장소인데, 과거 도시계획자들은 한 도시를 건설할 때 가장 핵심적인 위치에 두오모를 배치한 후 주변에 시민광장, 관청, 공공시설, 상가 등을 배치하였다고 한다.성 요한(산 죠반니) 세례당원래는 피렌체 대성당이라고 불리는 건물로, 두오모 성당 바로 맞은 편의 천국의 문이 있는 건물이다. 5세기 전에 최초의 건물이 세워졌으며, 로마네스크 양식의 팔각형 건물로 외벽은 흰 대리석의 줄무늬로 만들어져 있다. 천국의 한이 그려져 있는 남문은 안드레아 피자오에 의해 1330년 완성되었다.성 요한 세례당 전면 천국의 문천국의 문; 북/남/동의 3개의 문중 동쪽 문으로 원근법을 완성한 조각가 기베르티가 27년에 걸쳐 만든 10장의 판넬에 아담과 이브의 창조에서부터 솔로몬과 시바의 여왕에 이르기까지 구약성서의 갖가지 장면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지옥의 문;크기는 세로 635㎝, 가로 400㎝, 너비 85㎝이며, 청동으로 만든 조각이다. 로댕의 1880∼1917년 작품으로, 파리 HYPERLINK "http://100.naver.com/100.nhn?docid=66394" 로댕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 HYPERLINK "http://100.naver.com/search.nhn?query=%C4%AE%B7%B9%C0%C7%20%BD%C3%B9%CE" 칼레의 시민》 《 HYPERLINK "http://100.naver.com/search.nhn?query=%B9%DF%C0%DA%C5%A9" 발자크 기념비》와 더불어 로댕의 대표적인 작품이다.1880년 HYPERLINK "http://100.naver.com/search.nhn?query=%C7%C1%B6%FB%BD%BA" 프랑스 정부는 새로 건립하기로 한 장식미술관의 출입문을 로댕에게 의뢰하였다. 평소 HYPERLINK "http://100.naver.com/search.nhn?query=%B4%DC%C5%D7" 단테의 《신곡》을 즐겨 읽었던 로댕은 《신곡》의 〈지옥편〉을 조각의 주제로 삼았는데, 그 내용은 단테와 HYPERLINK "http://100.naver.com/100.nhn?docid=74281" 베르길리우스가 지옥을 방문하여 처절한 고통 속에서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목격한다는 이야기이다.지옥의 문우선 점토로 작게 제작된 186여 개의 작은 조각상들은 다시 석고로 제작되었고 그후 형상을 첨가하거나 떼어내는 등 여러 차례의 수정 작업을 거쳐 만들어졌다. 또 이러한 조각상들은 청동이나 석고, 대리석의 독립상으로 제작되기도 하였립상으로 제작된 작품들이다.《지옥의 문》은 2쪽의 패널로 구획되어 있는데, 이러한 구성은 HYPERLINK "http://100.naver.com/100.nhn?docid=28759" 기베르티(Lorenzo Giberti)의 피렌체세례당의 문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지옥문 속에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각기 다른 모습의 인간 군상이 한데 얽혀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는데, 이러한 구성은 네모로 나누어진 청동문의 형식을 무시하고 형상과 문이 한데 얽혀 녹아 흐르는 듯한 느낌을 준다.《지옥의 문》은 1917년 로댕이 죽을 때까지 제자리에 세워지지 못했다. 장식미술관 부지에 HYPERLINK "http://100.naver.com/100.nhn?docid=700997" 오르세미술관이 들어서고 장식미술관은 루브르로 자리를 옮기면서 본래의 계획이 취소되었기 때문이다. 1900년 로댕은 이 작품의 HYPERLINK "http://100.naver.com/100.nhn?docid=115191" 오리지널 석고 모형을 자신의 회고전에서 선보였다. 《지옥의 문》의 청동 작품은 모두 로댕의 사후에 제작된 것이다.이 작품은 로댕의 전생애에 걸친 집약적인 작품으로 간주된다. 즉, 여기에는 고딕건축과 HYPERLINK "http://100.naver.com/100.nhn?docid=128457" 이탈리아 HYPERLINK "http://100.naver.com/search.nhn?query=%B8%A3%B3%D7%BB%F3%BD%BA" 르네상스 그리고 단테와 HYPERLINK "http://100.naver.com/100.nhn?docid=75916" 보들레르 등 로댕의 주된 관심사들이 폭넓게 반영되어 있으며, 인간 신체에 부여한 로댕의 표현력의 정수를 엿볼 수 있다.《지옥의 문》은 파리 로댕미술관을 비롯하여 HYPERLINK "http://100.naver.com/search.nhn?query=%C7%CA%B6%F3%B5%A8%C7%C7%BE%C6" 필라델피아 로댕미술관, 도쿄 국립현립미술관 로댕관, HYPERLINK "http://100.naver.com/100.nhn?docid=767492" 서울 로댕갤러리 등 전세계 7곳에 소장되어 있다.조토의 종탑(Campanile Giotto)높이 85m의 거대한 고딕 양식의 종탑은 1334년 조토에 의해 기동되어 안드레아 피자노와 프란체스코 랄렌리에 의해 완성되었다. 당시는 페인트와 같은 안료가 없었기 때문에 흰색과 녹색 대리석을 사용하여 외관을 조화롭게 구성하였으며, 근처의 두오모 성당과 성 요한 세례당과 조화를 이루어 질식할듯한 규모와 경탄을 자아내게 한다.그 외에 이 두오모의 주변에는 볼 것이 굉장히 많다. 두오모 부속미술관(Museo dell'Opera del Duomo)에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pieta), 도나텔로의 막달라 마리아 등의 대성당에 관련된 예술품들을 소장하고 있다.대성당 정문; 당시 피렌체의 부와 영광을 나타내는 듯한 화려한 성당의 정면은 1587년에 파손이 된 것을 에밀리오 데 파브리스카에 의해 1887년복원되었다고 함.섬세한 조각내부모습당시에 그려진 도면들세워질 기둥의 위치단면도돔내부뼈대구조돔부분투시도조사하며 느낀점고딕양식의 건물 무엇을 조사할까 하다가 피렌체의 두오모 대성당을 발견했다. 이 성당은 영화 ‘냉정과 열정사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기억속에 각인 되었고 나또한 그러했다. 일단 이 성당을 처음보고 눈에 들어오는 곳은 딱 ‘돔’ 부분이다. 이곳이 이 성당의 키포인트이자 이렇게 거대한 돔을 이 시기에 건설했다는 것만으로 건축적으로도 의미 있는 건물이다. 고딕양식의 특성상 뾰족뾰족한 지붕들을 연상할 수 있는데 두오모 성당은 뾰족한 부분과 함께 돔이 자연스레 어울림으로써 건물이 안정적으로 보이고 어디도 어색하지 않았다. 그리고 건물 외부나 내부도 어느 한군데의 벽조차 그냥 두지 않고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는 것을 보고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엿볼 수 있다. 돔 내부 부분의 미켈란 젤로의 최후의 심판은 정말이지 인간의 능력으로는 그릴 수 없는 신의 작품으로 보여진다것이다.
발터 벤야민의 ‘기계복제시대의 예술작품’글이 상당히 난해하여 무슨 내용인지 이해하기가 어려웠고 번역문인만큼 우리의 언어에는 어울리지 않는 글이라는 인식을 받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의미라는 점에서 글의 내용을 파악해 본다. 일단 글을 이해하기에 앞서 먼저 발터 벤야민이 누구인지에 대한 이해가 먼저 이루어 진다면 그 글이 갖는 의미를 좀더 쉽게 파악해 갈 수 있을 것이다.발터벤야민베를린에서 태어났다. 좌익 학생운동을 하였고 나중에 시오니즘운동에 관계하였다. (1919)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대학교수 자격 심사를 위해 제출한 논문 (1928)이 프랑크푸르트대학에서 거부됨으로써, 교수를 단념하고 문필생활로 들어갔다. 보들레르, 프루스트에 심취하여 그들의 작품을 번역하는 한편, 1925년부터 마르크스주의 연구에 몰두하였다.매우 개성적인 그의 사상은 당시의 현상학과 신헤겔주의와는 현저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으며, 그의 유저인 《역사철학의 테제》에는 종말론적 역사관이 보인다. 나치스에게 쫓겨 1940년에 망명 도중 자살하였다. 저서로《괴테의 친화력》(1924~1925)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1936) 《계몽》(1961) 등이 있다.은 신생매체인 영화가 영향력을 획득해가고 나치가 승승장구하던 1936년에 쓰여져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하다가, 60년대 이후에 새롭게 재조명되었으며, 어떤 평론가에 의해서 "막스적 대중문화비평의 발전에 가장 중요하고 유일한 에세이일 것"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고, 지금은 영화이론, 문화이론, 대중매체이론 및 비판미학을 다루는 책에 빠짐없이 언급되는 문화에 대한 대표적 논문이다.이 논문에서 벤야민은 회화, 조각 등 전통적 예술작품과 당시 새롭게 등장하던 매체인 사진과 영화 등 새로운 매체를 '예술작품'으로 격상시켜 함께 비교하면서, 지각의 변화와 사회의 변혁을함께 고찰하고 있다. 아우라, 의식가치와 전시가치 등 벤야민이 새롭게 구성한 개념들이 등장하며, 특히 영화라는 매체를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영화가 대중의 지각에 어떤 식으로 등의 의미를 가진 그리스어이며, 예전에는 종교에서 예배의 대상물이 가진 장엄함을 나타내는 용어였다. 벤야민은 이 아우라를 “아무리 가까워도 아득히 멀리 존재하는 것의 일회적 현상”이라 부른다. 즉 아우라는 지금 여기서의 1회에 한정된 사건이며, 단 하나의 오리지널한 것이다. 원래 예술작품은 종교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교회에 묘사된 그림을 보는 것은 절대적인 신을 마주하는 것이며 아우라를 경험하는 것이다. 르네상스 이후 세속화된 예술 숭배에서도, 유일무이한 오리지널한 작품과 마주한다는 의미로 이 아우라는 존속되었다. 하지만 사진과 영화라는 복제 가능한 예술의 등장에 의해 단지 하나의 작품, 지금 여기라는 1회에 한정된 체험은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다. 이것이 벤야민이 말하는 ‘아우라의 상실’이다. 벤야민은 아우라가 유일한 원본에서만 나타나는 것이므로 사진이나 영화와 같이 복제되는 작품에서는 생겨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 일어난 결정적 변화를 ‘아우라의 붕괴’라고 정의했다. 또 아우라는 예술작품의 원본이 지니는 시간과 공간에서의 유일한 현존성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사진이나 영화처럼 현존성이 결여된 작품은 아우라가 없다는 것이다. 독특한 거리감을 지닌 사물에서만 가능한 아우라는 복제품이나 대량생산된 상품에서는 경험 될 수 없는 것이다.벤야민은 당시의 생산구조 속에서, 그 경향에 맞추어 전통적 예술양식과 다른 일련의 새로운 예술발전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고 파악한다. 새로운 예술발전 경향과 전통 예술의 차이를 드러내는 특징으로 그가 꼽는 것이 '기술적 복제'다. 예술작품은 원칙적으로 언제나 복제가 가능하였지만 기술적 복제는 좀 새로운 현상이라는 것이다. 주조와 각인, 목각판화, 석판인쇄를 거쳐 사진술이 나오면서 손이 담당해 왔던 예술적 의무를 이제는 렌즈를 투시하는 눈이 혼자 담당하게 되는 혁명적 변화가 이루어졌고 뒤이어 유성필름이 등장함으로써 전래적인 예술작품 전체를 복제의 대상으로 만들었고 또 이러한 영향을 통하여 예술에 깊은 변 경험할 수 있는, 또 고정될 수 없고 휴대될 수도 없는 현실성으로부터 나온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에서 아우라는 잡을 수 없는 채로 남아 있기 때문에 가까이에서도 영원히 먼 가까이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아무리 완벽하게 복제를 해도 한가지 빠져있는 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시간과 공간에서 예술작품이 갖는 유일무이한 현존성, 다시 말해 예술작품이 위치하고 있는 장소에서 그 예술작품이 지니는 일회적 현존성이다. 하지만, 기술복제로 인해 사물의 '진품성'이 사라지게 됨으로써, 작품의 ‘역사적인 증언적 가치’와 ‘사물의 권위’가 위험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또한 기술복제품은 '대량생산'으로 유통됨으로써 '대중운동'과도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벤야민은 여기서 영화는 이러한 대중운동의 가장 강력한 매개체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속뜻을 일찌감치 드러낸다.작품의 ‘유일무이한 현존성’과 ‘일회적 현존성’은 벤야민이 만들어낸 '아우라'라는 개념과 함께 생각할 수 있다. 아무리 가까이 있더라도 어떤 먼 것의 일회적 나타남,이라고 그가 정의했던 이 아우라는 일종의 마술적인 분위기로서, ‘예술작품의 일회적인 존재성’이기도 하다. 이것은 기술복제로 대량생산 유통되는 작품에서는 느낄 수 없는 신비한 분위기로서, 전통적 예술작품과 기술복제 작품을 구분하는 특징이 된다.예술작품이 본래 마술적 의식과 종교적 의식에 봉사하기 위해 생겨났다고 보는 벤야민은 대상을 감싸고 있는 분위기인 아우라를 가진 전통 예술작품이 이런 종교적 의식의 산물로 남아있는 것이라고 파악한다. 반면, 기계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는 아우라가 제거됨으로써 세계역사상 처음으로 예술작품으로 하여금 지금까지 종교적 의식 속에서 살아온 기생적 삶의 방식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벤야민은 의식가치와 전시가치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과거의 종교적 의식의 산물인 전통적 예술작품은 종교의식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어서 오늘날에도 예술작품이 숨겨진 상태에 머물러 있기를 요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계복제시대의 예술품의 특징을 제시하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수용자 곧 대중의 역할이다. 예술작품의 기술적 복제가능성은 예술을 대하는 대중의 태도를 변화시켰다. 이를테면 피카소와 같은 회화에 대해서 가졌던 보수적 태도가 채플린 영화와 같은 영상에 대해 갖는 진보적 태도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진보적 태도의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바라보고 체험하는 데 대한 즐거움이 전문적인 비평가의 태도와 긴밀하게 서로 연결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연결은 매우 중요한 사회적 의미를 갖는다. 다시 말해 어떤 예술형식의 사회적 중요성이 줄어들면 줄어들수록 수용자의 비평적 태도와 감상적 태도는 점점 더 분리된다. 그러나 영화관에서는 관중의 비판적 태도와 감상적 태도는 일치한다.벤야민은 전통적 예술의 대표로 회화를 기계복제시대 예술의 대표로 영화를 들면서 이 두 예술장르를 수용하는 대중의 태도가 다르다고 말한다. 쉽게 말해 새로운 기법의 회화를 보면서 비평자들이 아무리 칭찬을 해도 대중들은 그것을 혐오스럽게 받아들이는 보수적 태도를 갖는데 반해 영화의 경우에는 비평하는 것과 감상하는 것이 일치한다는 것이다. 예를들어 우리가 유명한 화가의 전시회에 가서 작품을 감상할 때 느끼는 이해정도를 생각해보면 도무지 설명이이 없이는 짐작할 수 없는 내용과 화법으로 구성된 작품들을 보면서 우리는 겉으로는 표시를 안하지만 속으론 매우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비평적 태도와 감상적 태도가 분리되는 것이다. 반면 영화의 경우는 물론 차이는 있겠지만 그 분리의 정도가 매우 미미하다. 대중은 집단적으로 영화를 감상하면서 동시에 비평한다. 맘에 들면 박수를 치고 맘에 들지 않으면 욕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즉 비평적 태도와 감상적 태도가 일치하는 것이다. 영화관의 관중은 배우를 판단할 때 스크린에 드러난 그대로 판단하기 때문에 '비평가의 태도'를 취할 수 있게 되었다는 벤야민의 말도 이런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다. 회화가 차분히 작품을 관조함으로써 감리를 이어 맞춰야 하고 따라서 사람들은 작품 속에 몰입한다기 보다 깨어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예술작품 앞에서 정신집중하는 사람은 그 작품 속으로 들어가는데 반해 정신이 산만한 대중은 예술작품속으로 빠져들 수 없다. 가령 회화를 볼 때는 관객이 그 속에 자신을 몰입시켜야만 그 작품에 대한 이해가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영화를 보는 관객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영상에 자신을 몰입시킨다기 보다는 그때그때의 장면을 각성하고 분석한다는 점에서 분리되어 어느정도 거리를 유지한채 관객들에게 수용된다고 볼 수 있다.벤야민은 영화라는 새로운 매체가 대중들의 지각방식과 수용방식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고 파악한다. 경제적 하부구조의 변화가 상부구조를 변화시킨다는 막스의 유물론을 받아들인 연유에서인지 벤야민 또한 영화라는 기술적 하부구조의 변화가 대중들의 의식과 행동이라는 상부구조를 변화시킨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또 전통적 예술작품을 마법과 종교와 신비의 영역에 놓고 근대적 예술작품을 탈신비의 영역에 놓음으로써 벤야민은 기계복제 예술작품에 시대적 정당성을 부여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술작품을 수용하는 '대중'의 위치 및 그들의 가능성을 낙관함으로써 예술의 미래는 대중의 손에 있다는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벤야민은 기계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이 대중운동과 변혁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이 된다는 사상을 피력하고 있다.그렇다면 벤야민이 그토록 기대를 걸었던 영화라는 매체가 과연 '변혁'에 기여했는가라는 의문점을 제시 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변혁은 물론 정치,사회적 변혁이다. 영화는 정치의 변화를 반영하기는 했을지언정, 벤야민이 예상하듯 대중의 지각양식을 변화시킴으로써 변혁을 이끌어내는 역할을 하지는 못했다. 영화는 벤야민의 생각처럼 변혁에 기여하지 못했다. 독일의 나치는 45년에 몰락했고, 소련은 2차 대전 이후 급속히 하락해가면서 영화라는 매체의 헤게모니는 헐리우드로 넘어가 버렸다. 마치 파시즘의 영화가 대중의 혼을 빼놓아서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에 이용하는 역할을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