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촌수필’에 대한 감상 및 서평관촌수필은 70년대에 쓰여졌다. 70년대란 우리나라가 본격적으로 근대화, 산업화 되던 시대이다. 이 시대는 과거 전통이 사라지고 사람들의 가치관이 성립되지 않은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로 예상된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개인 삶의 가치를 인정하고 동시에 사람들 간의 공동체 삶을 나타내고자 한 것 같다.일제시대에 많은 굴욕과 수모를 참고 견디면서 향교, 서원을 지키고 언행일치를 주장하던 할아버지, 자신의 사상을 실천하다 돌아가신 아버지, 수많을 검열에 꿋꿋했고 미군의 음식쓰레기를 절대 못 먹게 하던 옹점이, 마을사람들의 괴롭힘 속에서 순심이를 지켜준 대복이, 꿩을 잡은 죄 아닌 죄로 법정에 서게 되었지만 자신의 인격을 당당히 주장한 용모 등 이를 모두 각자의 가치관과 인격을 주장하면서 한편으론 이들이 모여 고동체적 삶을 보여준다.특히, 당시로서는 있을 수 없던 아버지의 모습, 빈부격차와 신분에 관계없이 모든 마을사람들이 춤을 추면서 잔치를 열었을 때 진정한 공동체의 모습이 느껴졌다.자신의 이익을 떠나 서로를 위하고 즐거워 할 줄 아는 삶이라고나 할까. 이러한 책속에 반영된 삶을 보면서 이것이 우리 민족 전통의 삶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오늘날과 같이 급속히 현대화되고 각박한 사회에서 필요한 모습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약간 벗어난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최근에 박정희 향수라는 신드롬이 대두되고있다. 왜 박정희 향수가 나타나는지에 대해선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내 생각에는 그 시절이 유신체제로 많은 고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때 당시의 사람들의 모습 속에는 정이 넘쳤던 것 같다. 물론, 경제적 어려움이 불러일으킨 신드롬이라 할 수 있겠지만 지금보다 어려웠던 그 시절의 정이란,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이책과 관련해 생각해보자면 박정희 신드롬이 결국 관촌수필에 나타난 사람들의 삶에대한 그리움이 아닐까.
제1장 고대이집트이집트의 예술문화 발전에 기여했던 나일강은 지역생활 전반에 영향을 끼쳤으며, 사막과 바다로 둘러싸인 지역적 고립성으로 외부 침입에 대한 방어 및 질 높은 문화가 지속적으로 보존될 수 있었다. 건축물의 형태는 장방형과 직선이 많았고, 거대함, 견고함, 영원성이 건축의 주요한 표현 특성이었다. 원주 사이를 가로지르는 들보인 상인방(lintel)은 크기나 무게가 굉장하고 길이가 짧아 이를 지지하기 위해서는 지주를 많이 사용해야 했는데, 넓은 실내일수록 지주가 많이 사용되어 실내는 마치 원주의 밀림과 같았다. 그리고 원주에는 화려한 색채와 우아한 조각이 장식되었다. 이러한 원주와 상인방의 이용방식은 이집트 건축디자인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으로 상인방식 구조라 한다. 주택의 벽에는 일상생활 및 풍유적이고 종교적인 표현이 찬란한 색채로 묘사된 벽화가 그려졌다. 건축, 조각, 장식품에 광범위하게 사용된 주제로는 순수성의 상징인 연꽃 봉오리, 왕권의 상징인 뱀 외에 길로슈, 팔메트, 파도, 나선 형태 등이 있다. 이집트 예술은 근본적으로 이집트인의 순수한 미적 표현으로써, 환경과 자연에 맞는 재료가 사용되었다. 재료나 도구의 제한에도 불구하고 이집트인들은 뛰어난 기교와 풍부한 상상력으로 지식과 기술을 최대로 발휘하였다.그리스그리스예술의 특징은 지적이며, 정교한 비례와 우아한 선에서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다. 그리스인은 형태, 선, 비례에 대한 감각이 뛰어나고, 지적이며 창조적인 본능과 뛰어난 영감을 가지고 그들의 예술을 높은 경지에 오르게 하였다. 건축에 있어서 초기에는 이집트의 영향을 받았으나 그대로 모방하지 않고 보다 우아하고 장식적인 많은 몰딩을 사용하였다. 원주에 플루팅이라는 오목선의 세로골 장식을 사용하고, 건물 외부에 구조물로서의 기둥을 최초로 사용하였다. 비례와 세부사항을 중시한 그리스 건축은 단일체를 이루는 완전한 구성미를 보여준다. 그리스 건축미를 대표하며 건축사상 최고의 걸작품으로 간주되는 파르테논 신전은 선과 구성의 조화, 기발한 세부표현, 사람과 동물형상을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비잔틴의 건축 특성은 성 소피아 사원에서 설명된다. 그리스 바실리카 정십자형 평면으로 지붕은 돔과 반돔의 연속으로 이루어졌으며, 펜던티브라는 새로운 건축 형태가 창조되었다. 펜던티브는 주두 윗부분에 오목하게 삼각형을 까아 올리기를 부채꼴처럼 하고 삼각형 부분 안쪽각 끝까지 수평을 만들어서 여기에 위로부터 내려 드리운 돔의 하부를 떠받치게 하면서 지주역할을 하도록 세공을 가한 것이다. 모자이크 예술은 성소피아 사원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건물내부의 벽은 다채로운 색으로 장식되고 벽면의 작은 부분까지도 눈부신 금색을 배경으로 하여 찬란한 색유리의 모자이크로 장식해서나 곱게 다듬은 대리석판에 무늬를 맞추어 모자이크를 조화시켰다. 모자이크를 통해 비잔틴 예술의 기초를 형성한 동양의 근엄한 형식주의와 연결된 그리스 문화의 극치를 볼 수 있다.초기 기독교 양식동방의 번영과 대조적으로 서부유럽이 점차 몰락해 가면서 희망적인 위안이나 윤리에 대처할 만한 것으로 기독교가 대두되었다. 초기 기독교란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후 로마와 이웃도시들에 존재했던 예술양식이다. 신앙의 테두리에서 신의 지배와 권위 하에 모든 예술이 제작되고 예술적인 개성은 종교적 규범과 제약 하에서만 성립되었다. 장식미술에 있어서 모자이크, 벽화, 프레스코 조각, 스테인드 글라스등은 예술적 가치보다 신의 권위를 알리는 성격으로 문맹의 민중에게 그림을 통해 관념을 심어주었다. 모티브는 단순하게 십자가가 주로 사용되었다. 미술적 가치는 없지만 기독교 미술로 연결되어 순수성과 위대성을 지니고 발전하였다.로마네스크 양식로마네스크 건축 특성은 로마건축을 모방하여 기독교적 요구에 맞게 적용한 디자인으로 방어를 위한 건축으로 사용되어 강직하고 단순하다. 돌로 될 반원 아치형 볼트가 지붕건축에 사용되었고, 로마네스크의 가장 특징적인 장식형인 반원아치가 모든 문과 창문 등의 개구부에 사용되었다. 교회 내부 장식은 주로 성서의 장면을 사용하여 교훈적인 내용으로 되어있고기, 그리고 플렌더즈 영향이 혼합되고 벽판넬이 많이 사용되며 장식적인 효과가 강조된 후기로 구분된다.영국 르네상스이태리 르네상스 이후 100여년이 지 영국의 르네상스 시기는 고딕형이 주도적으로 이태리 르네상스가 소개된 시기인 튜더, 르네상스 전성기를 이루었던 엘리자베스시대, 플렌더스 영향으로 스트랩 윅 조각의 르네상스 형태가 사용되고 건축가 이니고 존스가 등장한 자코비안, 그리고 혁명시대인 크롬웰 시기로 구분된다.제4장 바로크이태리 바로크바로크는 이태리에서 생긴 마지막 중요한 양식으로, 고전의 엄격성과 정신적 측면의 결여에 대한 반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고대의 틀에 맞추기보다는 17세기의 넘쳐흐르는 우수한 질에 대한 표현으로 디지안상 자유가 필요하였으며, 따라서 르네상스에 비해 열정적인 특성을 가진다. 바로크는 로마의 성베드로 성당에서증거를 찾을 수 있는데, 이태리는 17세기 초 바로크 양식의 개발 및 전파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1650년경 절정을 이루었다. 그 후 이태리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지배력이 프랑스와 영국으로 옮겨지면서 이태리가 주도해 온 바로큰는 퇴하게 되었으며, 바로크는 프랑스에서 전성하게 되고 이후 로코코 양식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태리 바로크 절정의 건축 및 실내장식은 매우 화려하고 사치스러우며 다양한 형태를 이루었다. 바로크 시대의 교회장식은 궁전과 별장, 정원 디자인에도 융합되었는데 발코니, 전망대, 분수대, 테라스, 화단에서 동적인 효과를 느낄 수 있다. 건축 형태를 모방한 정교한 프레스코도 도입되었으며, 천장은 높고 거대하며 석고로 된 아기천사가 날아 다니는 모습으로 가득차 있는 등 극적으로 처리되었고, 벽에는 옻칠이나 래커 칠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색은 세련된 감각을 보여 거대한 규모의 방들은 원색의 강한 색조로 신중하게 배색되어 있었다.프랑스 바로크프랑스 바로크 양식은 육중하고 웅장하며 과장된 이태리 양식에 그 기원을 두었다. 그러나 1660년경부터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프랑스 예술가들은 단순히 모방하는 대신 지나중국풍 양식으로 시느와제리와 샹제리라 불리는 중국적인 주제의 장식 디자인이 유행하였다. 로코코 양식은 1760년경에 절정을 이루었으며 그 이후 지나치게 복잡한 것에 싫증을 느껴 쇠퇴하게 되었다. 봄베나 세펜타인이라 하는 가구 전면이 불룩 튀어나오게 하는 수법이 사용되었다. 색채는 엷은 중간색조가 사용되었고 몰딩은 이와 대조되는 색을 칠해 강조하였으며, 중국 래커칠이 발달하였다.영국 로코코조지 1세 시기 이태리의 영향으로 팔라디안 양식의 건축이 유행되었다. 고상한 비례미와 화려한 재료의 건물과 안락함보다는 우아한 정형미가 대저택 실내의 특징이었다. 18세기 중엽부터 프랑스 로코코와 고딕, 중국의 영향이 실내장식에 나타났으나, 주로 세부 장식적으로 표현되었다. 실내에 건축적 요소가 도입되었고 이는 가구디자인에서도 구체화되었다. 퀸 앤 및 초기 조지안 양식 가구는 매혹적인 간결성과 세련된 비례, 우아한 곡선과 조각, 화려한 무늬의 비니어 표면, 그리고 꽃병 형태의 스플렛과 케브리올 레그가 주된 특징인데, 케브리올 레그는 밑 부분이 둥근 클럽 푿이나 동양에서 유래된 것으로 진주를 잡고 잇는 용의 발톱 모양의 클로우 엔 볼 푿으로 끝처리가 되어있었다. 조개 모티브의 장식이 사용되었는데, 이는 1720년경 의자에 장식으로 사용된 사자얼굴 조각으로 대치되었다. 디자인은 프랑스 로코코형, 중국형, 고딕형의 장점을 딴 환상적인 형태로, 조각이 아름답고 뚜렷하며 날카로운 특성을 가진다.미국 로코코18세기 중엽 정착민이 거주한 지역에는 초기 목조건축이 사라지면서 돌, 벽돌, 나무 등으로 지은 비교적 우아한 건물이 들어섰고 사람들은 가정환경을 꾸미는데 열중하였다. 방이 얿어지고 천장이 높아졌으며, 건물외부에만 사용했던 원주, 벽기둥, 돌림띠, 코니스, 몰딩 등이 실내 장식에 도입되었으나 부정확하고 지나치게 중후하여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제6장 전기 신고전프랑스 전기 신고전신고전 양식의 실내는 원주, 벽기둥, 돌림띠 같은 건축적 양식이 부활되었고, 로코코의 자유곡선은 반원, 활꼴, 파르테논 신전에 기본을 둔 사원형태의 건축이 공공건물과 교회로 사용되었으며 주택구조에도 응용되었다. 그리스 건축양식으로 고전적인 기둥양식과 장식 등이 건물의 실외와 실내디자인에 모두 사용되엇다. 던컨 파이프는 19세기를 대표하는 양식가로 뉴욕에서 활동하였다. 1795년에서 1818년 사이에 제작된 작품들은 거의 영국의 쉐라톤 다지안을 따랐는데, 마호가니와 새틴우드로 만들어진 가구는 아름다운 선과 섬세함으로 우아한 비율을 보여주었다. 의자 등받이와 다리에 사용된 그리스 곡선 및 오목한 나팔꽃처럼 벌어진 다리의 피데스탈 지지대는 기본적으로 많이 사용된 형태였다. 그 이후 1830년까지는 프랑스 엠파이어와 영국 레전시의 영향을 받은 디자인으로, 그리스 형태 및 조각장식을 모방하였다. 우아한 비율이 잘 조화되는 던컨 파이프의 디자인은 세계적으로 좋게 평가되었다.제8장 빅토리아영국빅토리아 여왕이 즉위한 1837년부터 1901년까지가 빅토리아 시대이며, 산업의 발달이 상상할 수 없게 이루어진 시대이다. 19세기를 지배했던 양식은 역사주의로 과거의 것을 모방하려고만 했던 양식이었다. 세부적인 시기마다 유행하였던 양식도 달랐으며 그 예로 1830년대와 40년대는 특히 그리스와 엘리자베스 및 고딕 스타일이 유행하였다. 대중적인 빅토리아 스타일은 기본적이고도 고전적인 영감을 받은 구조의 단순함에 19세기 초반에 유행했던 단순하고 견고한 그리스적 스타일의 마호가니 가구들이 19세기 중엽까지 계속 인기 있게 사용되었다. 중기 빅토리아 시대의 다른 특징은 외형선에 대한 선호이다. 직선은 레전시 시대의 소용돌이 문양과 루이 14세 시대의 바로크적 소용돌이 문양, 루이 15세 시대의 로코코적인 곡선으로 대체되었다. 과다한 빅토리아 시대의 곡선은 부유하고 자신감 넘치는 중산층에게 각광을 받았으며 이들의 기호가 19세기의 지배적인 기호가 되었다.미국미국에서의 빅토리아 양식이라는 용어는 19세기 중반 미국의 장식 예술에만 적용시켜 사용할 정도로 그 당시 미국 사회 전반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광장처음에 눈에 띤 것은 무엇인가를 의미 하는듯한 문장, 그저 단순해보이지만 깊은 뜻이 있을 것만 같은 문장, 참 기억에 남는 문장인 “바다는, 크레파스보다 진한, 푸르고 육중한 비늘을 무겁게 뒤채면서, 숨을 쉰다.” 이다.학창시절 때 누구나 한 번 쯤은 접해보았을 책, 광장(廣場). 나 역시 이 책을 예전에 읽어 보았지만 지금까지 주인공 이명준이 왜 죽었는지 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다. 대학생이 되어 다시 이 책을 읽고 나서야 내가 광장이란 책에 대해 너무 겉으로만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몇 년 전에 큰 인기를 모았던 “공동경비구역 JSA”라는 영화는 분단의 현실을 다룬 영화다. 그 영화를 보고 감동을 받아 몇 번이고 영화를 다시 보았던 기억이 난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벌어진 총격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중립국인 스위스에서 한국계 소피소령이 파견되는데, 그녀는 그녀의 아버지가 한국전쟁에 참가했다가 포로수용소에서 남(南)도 북(北)도 아닌 제3국행을 선택한 것이 밝혀져 갑작스런 해임통지를 받게 된다.비슷한 부분이어서 그런지 나는 책을 읽으면서 자연스레 이 영화를 떠올리게 되었다. 영화나 소설이나 그 시대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이는 결국, 그 당시에 수많은 주인공 ‘이명준’이 살았다는 이야기가 된다.그렇다면 이명준은 왜 전쟁이 끝난 후에도 남쪽이나 북쪽이 아닌 제 3국을 선택했을까?이명준이란 인물은 이해하기 힘든 인물이었지만-이명준이 철학과 학생이고 아버지가 월북한 사회주의자라서 그랬는지 몰라도-현실적인 문제를 이쪽저쪽으로 편 가르는 흑백논리(黑白論理)적 사고를 하고 있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광장은 주인공 이명준이 겪어온 여러 이야기를 현실 도피적 사랑과 그가 뛰어든 정치로 풀어내고 있었다. 끊임없이 광장과 밀실의 비교, 남한과 북한의 비교를 하는 이 소설은 아마도 둘 다 가질 수 없었던 6.25전쟁 이후의 상황을 말하려 하는 것 같았다.이명준은 남쪽에서 그가 원하는 광장을 발견하지 못한다. 물론 그는 밀실에서 만족한다. 아니, 어쩌면 폭군들이 너무나도 강한 광장에서 싸울 자신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는 밀실 속으로 숨어사는 삶을 선택하려 하지만 남쪽에서의 취조경험은 그에게 ‘그가 숨을 수 있는 밀실조차 없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래서 그는 어두운 광장이 밀실을 습격하는 남쪽대신 북쪽의 광장을 찾아 월북을 결심한다.사랑하는 사람마저 버리고 떠난 그는 과연 광장을 찾았을까? 아니다.북쪽은 오히려 남쪽보다 더한 사상적 탄압이 있는 곳이었다. 자아비판을 통한 광장은 그가 꿈꾸던 광장이 아니었다. 북쪽에서도 광장을 찾지 못한 명준은 ‘은혜’라는 밀실을 찾게 된다. 그러나 현실을 도피한 때문일까? 역사는 그를 밀실에 머물지 못하도록 만든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전쟁 중에 은혜가 죽자 그는 더 이상 북에 머물 이유를 잃어버리고 이후의 포로생활을 겪으며 그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을 간단히 중립국행이라고 해버린다.그가 마지막으로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중립국뿐이었을까? 사람에게는 광장과 밀실이 모두 필요하듯 그 또한 광장과 밀실이 조화된 세상을 원했다. 둘 중 하나만 존재하는 세상, 그나마도 거짓된 공간이라면 그것은 삶을 삶답게 살지 못하는 것이 될 테니까 말이다.중립국행...어쩌면 이것은 그가 선택한 최후의 밀실이 아닐까?하지만 이명준은 지나치게 관념적인 사람이었다. 제 3국으로 가는 타고르호 선상에서 결국엔 자살을 하게 되니 말이다.그가 생전에 그렇게도 찾아다니던 광장...처음 이 ‘광장’이란 단어를 접할 땐 넓은 어떤 곳을 떠올렸지만 지금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단 한 뼘의 광장! ‘혹시 이명준이 찾으려한 광장은 그만의 밀실이 아닐까’라고..어쩌면 그의 광장은 밀실과 같은 개념일지도 모르겠다고 말이다.이제 그가 중립국을 택한 고뇌를 조금은 이해할 듯하다. 어떤 면에선 시대가 강요한 선택에서 용기 있게 제 3국을 선택했다고도 할 수 있으나 그가 결국 택한 것은 중립국도 아닌 푸른 광장, 바로 바다였다.선상 처음부터 따라다녔던 갈매기는 그에게 불안감을 주었지만 나중에는 죽은 은혜와 딸의 표상임을 깨닫고 함께 할 수 있는 바다를 택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다는 그에게 밀실이자 푸른 광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바다는 개인적으로 봤을 때만 광장이지 결국은 현실도피이다.이러한 한계상황에서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일은 죽음 밖에 없을 것이고 해방 후 남북한은 개인들에게 이러한 상황을 강요했다.물론 현실도피를 한 이명준이 잘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꼭 그렇게만 보고 싶지는 않다. 바다... 그가 뛰어든 바다는 죽음이 아닌 새로운 생명의 탄생지로, 어쩌면 인간의 희망을 담고 있는 공간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조금은 이해하기 힘들지만..아직도 광장과 밀실의 의미를 확실히 이해하긴 어렵지만, 단순하게 밀실은 자신만의 자유로운 삶의 공간이며 광장은 사회적 삶을 의미한다고 했을 때 사전에서처럼 대립적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될 것 같다. 그리고 사회적이라는 말은 상호관계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으니 밀실이 곧 광장 안에 포함되기도 하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