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공공도서관의 발전 과정- 목차 -1. 근대 공공도서관의 발생2. 일제 통치 시기의 공공도서관3. 해방 이후 공공도서관1. 근대 공공도서관의 발생우리나라 근대도서관 사상의 맹아는 19세기말 개화기에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이 시기에 와서 비로소 근대적 시민의식의 자각이 싹트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근대도서관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자각하게 된 사람들은 주로 개화기 인사들이었다.1881년 4월에는 신사유람단이 일본 동경에 파견되어 70여일 간 체류하면서 일본의 각 관서, 고장시설, 군사, 경찰제도, 교육, 문화기관 등 많은 부문을 시찰조사하였다. 신사유람단 일행 중 윤치호(尹致昊)은 우리나라 최초의 도서관인 ‘대한도서관’ 창립의 발기인이 되었으며 유길준(兪吉濬)은 「서유견문」이라는 그의 저서를 통하여 서양제국의 근대도서관을 비교적 소상히 소개함으로써 당시 지식층들에게 도서관의 중요성을 인식시키는데 한 몫을 하였다.그러나 이들의 근대도서관에 대한 인식은 일본의 근대도서관을 둘러보고 생긴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신사유람단을 계기로 우리나라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 되었고, 서양의 근대도서관을 직접 보고 이용해봄으로써 도서관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인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유길준의 「서유견문」의 서적고의 내용을 살펴보면 이때 유길준은 도서관에 대한 인식이 분명히 형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문맹을 없애고 국민의 지식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근대도서관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으며, 또한 그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러한 글을 쓴 것이라고 볼 수 있다.이외에도 개화기 인사들 중 도서관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필요성을 역설한 이들에는 박영효, 장지하 등이 있다. 특히 황성신문의 주필 또는 사장으로 활약한 장지하는 세계 각국의 주요 도서관을 소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도 고려시대에 이미 수서원과 같은 서적원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중국에 사람을 보내어 서적을 많이 구득하기도 하였다는 사실들을 열거함으로써 도서와 도서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의미하며, 결과적으로는 근대도서관의 성립과 발전을 앞당기지 못한 요인 중의 하나가 되었다고 생각한다.그 다음으로 일부의 지식인들은 도서관을 인쇄시설도 갖추어 서적의 출판도 함께하는 곳이라고 이해하고 있었다. 당시 많은 지식층들은 새로운 학문과 문화를 섭취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학교를 많이 설립하여 인재를 양성해야 하고, 다음은 교육에 필요한 신교과서와 긴요한 외국의 서적을 번역 출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도서관도 이러한 사상적 맥락에서 이해되고 있었던 것으로 서적을 많이 출판하려면 판매도 하고 열람도 시키는 곳이 도서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그러나 근대도서관은 국민의 지식계몽을 위해 존재하는 공익사업기관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그 견해가 일치되고 있었다.이와 같이 개화기 한국에 있어서 근대도서관 사상의 기반은 서구의 영향을 받아 이루어졌으나 그 밑바탕에는 국권을 수호하고 국력을 배양하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국민에게 새로운 지식과 문화를 보급하고 교육해야 한다는 애국적 계몽사상이 흐르고 있었다.1) 대한도서관1906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 도서관인 ‘대한도서관’이 발기되었다. 이 때 이범구, 이근상, 박종화, 문이식, 윤치후, 이봉래 등이 도서관 설립을 인정하며 한국도서관의 설립을 발기하고 이를 위한 평의원회를 구성하였다. 당시 새로운 도서관의 설립은 국민의 절실한 요구와 뜻있는 인사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어 각계로부터 많은 도서를 기증받기도 하였다.대한도서관이 일종의 국립도서관의 성격을 띠고 종정부의 관사를 사용하게 되자 이것을 궁내부에 예속시키는 동시에 더욱 확장할 계획 아래 구규장각 도서와 궁중에 있던 모든 장서를 모아 제국도서관을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계획에 불과했으며 대한도서관은 개관을 앞두고 한일합방이 됨으로써 도서관 설립의 의지는 좌절되었고 장서 10만여권은 모두 총독부취조국에 몰수되고 말았다.2) 대동서관대한도서관이 정부인사들에 의해서 설립되고자 했던 움직임인 반면 같은 시기에 민간에서도사조도 엿볼 수 있다.대동서관은 설립 당초에 만여권의 신간서적을 구입하여 일반의 열람에 무료로 제공했으며, 또 불과 개관 일주일도 못되어 대출권수가 수천권에 달했다고 한다.3) 동지문예관 ? 서적종람소대한도서관, 대동서관의 설치에 자극되어 신원영, 오성근 등이 서울에 설립한 사립도서관이 동지문예관이며, 김광제, 이장제등이 주축이 되어 설립된 것이 서적종람소이다. 비록 소규모의 시설들이었지만 근대도서관에 대한 당시대의 국민적 여망을 잘 반영하고 있다는 증거라 할 수 있다.2. 일제 통치 시기의 공공도서관한국의 공공도서관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것은 근대적 의미의 공공도서관 설치가 시작된 일제통치시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일제 통치 36년 동안의 도서관활동은 무력에 의해 나라를 빼앗긴 한민족의 구국을 위한 순수민간주도의 도서관활동과 일제가 이를 탄압하고 그들의 통치정책을 실현하기 위한 식민지 이데올로기 주입기관으로서 관주도로 집행된 도서관 활동 간에 갈등의 연속이었다.일제치하 1910년부터 1919년 3·1운동까지는 일본의 무단통치시기로 강압적인 총. 칼로 우리민족을 억압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3·1운동 후 일제는 더 이상 무단통치보다 더 악랄한 소위 문화정치라는 유화적, 기만적인 통치술로 지배하고자 했다.이러한 어느 정도의 유화국면 속에서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는 도서관이 급격하게 많이 설치되게 되었다. 1920년 11월 5일 ‘경성도서관’의 설립을 필두로 하여 1924년 진남포 도서관, 1925년 해주도서관, 1931년 인정도서관 등 그 수는 거의 30여개나 된다.1) 조선총독부도서관한국민족의 독립운동이 3?1운동에 이르러 정점에 달하자 일제는 이에 당황하여 통치원칙에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이른바 문화정책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총독부도서관을 설립하게 되는데 1945년 해방때까지 우리나라의 본격도서관으로서 그위용을 자랑하다가 광복과 더불어 국립도서관이 되었고 이어 이것이 한국도서관법 제정에 따라 1963년 10월 23일에 국립중앙도서관으로 개칭되었 신서에 한하고, 고?양서는 열람할 기회가 극히 적었으며, 특히 우리나라 민족사연구에 관한 것은 정리라는 명목하에 열람을 제한시켰다. 비록 일본인에 의하여 세워진 것이기는 하나 총독부도서관의 활동은 두가지 점에서 평가된다. 하나는 이전까지 산발적으로 설치되어 아무런 상호협력없이 시행착오 속에서 운영되어 온 관계를 지도 통제하여 발전을 꾀하여 노력한 것과 다른 하나는 오늘의 국립중앙도서관의 제도적 기틀을 마련한 점이다.2) 철도도서관1910년 일본이 만주 침략기지로 설립한 남만주 철도주식회사에서 도서관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만주에 대규모의 도서관을 설립하였다. 조선철도도서관은 처음에는 만철 경성도서관으로 설립되었다가 1920년 7월에 총독부 철도국에 그 운영이 이관된 것이다. 철도도서관은 주로 부산을 기점으로 대련-하르빈 등 한-청 직통의 급행열차에 열차문고를 싣고 한국내 각 연선의 30여군데를 순회문고의 회송범위에 포함시켰다. 매일 20여개의 상자가 반납되고 발송되었으며 국원 및 일반 개인의 대출도 활발하여 매일 1만여권의 책이 이용되었다. 철도도서관은 1934년 12월까지 체신국 소관이었던 항공, 해사 등의 행정이 철도국에 흡수됨에 따라 교통도서관으로 기구를 확대, 개편하게 되었는데 1937년 4월 1일 다시 직제를 개편, 업무의 효율을 도모하였으니 이와같이 철도도서관은 비록 일제에 의하여 특수목적으로 설립, 운영되었으나 업무의 세분화와 관에 활동면에서 당시의 우리나라 도서관발전에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철도도서관은 일본의 팽망과 함께 소멸되었다.3) 그 밖의 공공도서관문화정책을 표방한 일제는 1925년 조선총독부도서관의 설립을 계기로 전국에 공공도서관을 계속적으로 설립하였다. 이것은 시대적 조류와도 관계가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문화정책으로 우리민족의 민족의식을 약화시키고자 한데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땅에서 서구식 근대도서관이 생기고 이른바 도서관문화가 형성된 사실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일제하의 우리나라 공공도서관을 분석하면 관립 6월 김인정여사가 회갑기념으로 평양에 설립한 인정도서관은 건평 140평의 2층건물로 사무실, 응접실, 서고, 보통열람실, 부인열람실, 특별열람실, 신문열람실 등을 고루 갖추고 있었으며 유지재산으로서 강서군에 토지 9만평의 튼튼한 재원을 가지고 시작되었던 것이다. 또한 인정도서관은 강연실, 신문실, 강습회장 등을 증설하여 관서지방의 문화전당으로 크게 기여함과 동시에 우리나라 사립도서관 중 해방될 때까지 존속되어 온 역사적인 도서관이다.이 밖에 한국인에 의해 설립된 사립도서관으로는 1924년 강위정이 부친 강준식의 유지를 받들어 설립한 진남포도서관, 1925년 3월 독지가인 유훈영의 기부금 일부와 지방비 등으로 설립한 황해도 해주도서관이 있다. 1939년 중헌 문용규의 유지에 따라 설립한 평안남도 안주읍의 중헌문고, 1939년 평북 선천의 유지 이창석의 투자로 설립을 본 선천회관내 도서관, 1939년 12월 전라북도의 김종대, 엄찬호가 지방문화개발을 위해 설립한 남원문고 등도 있다.2. 사립공공도서관 - 일본인에 의한 설립일본인에 의한 설립은 합방이전부터 이미 시작되었는데 1901년 일본 홍도회 부산지부에 공공시설로서 도서관을 설립하여 1911년 부산교육회로 이관된 후 계속 운영되어 온 부산도서관을 비롯하여 순천도서관, 대전문고, 천안문고, 논산문고, 광주도서관 등 초창기에는 주로 일본인에 의한 설립이 많았으며, 이들 도서관 중 대부분은 그후 거의 공립으로 이양되거나 또는 경영난으로 폐관된 것도 많다.3. 사립공공도서관 - 향교재단에 의한 설립사립도서관 설립에 가장 주도적 역할을 담당한 것이 향교재단이다. 향교는 조선시대 지방의 교육기관으로 서당과 함께 주로 지방영재들의 등용문 구실을 담당했으며 정부에서는 학전을 주어 그 수세로 비용을 충당케 하였다. 이와 같은 향교재산은 학교 건립에 전용되기도 했지만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이 재산을 도서관건립으로 전용하려는 움직임이 많았다. 이들 도서관은 대부분 소규모로서 신문열람소나 간이도서실 등의 명칭으로 불리웠으며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