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길택 글 | 정문주 그림실천문학사, 2004탄광마을의 애환Ⅰ. 들어가며고유가 시대에 들어서면서 경제적으로 부담이 적은 석탄산업이 다시 떠오를 것이라고 예측하는 말도 있지만, 탄광마을은 석유라는 자원에 의해 한구석으로 밀려나 여전히 우리의 관심에서 벗어나있다. 석탄산업이 한창 활기를 띄고 있을 땐 비좁던 마을이 하나 둘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아 떠나지 못한 이들만 남은 마을이 되었다. 하지만 탄광마을 사람들이 모두들 떠나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니다. 평생의 일터로, 삶의 터전으로 탄광마을을 생각하는, 애향심을 지닌 사람들도 있다.은 저자가 탄광마을에서 교사로 재직하며 그 곳에서 보고 들은 것을 토대로 만든 동시집이다. 아이들의 눈으로 바라본 탄광마을의 풍경에는 떠나고 싶지만, 그와 동시에 떠나고 싶지 않은 마음들이 녹아있다. 탄광마을 사람들의 애환을 담은 이 책 중에서 ‘햇빛(26쪽)’, ‘아버지 자랑(36쪽)’ 등의 두 편의 시를 자세히 살펴보겠다.Ⅱ. 햇빛, 그 찬란한‘햇빛’은 광부인 아버지가 일터인 굴속을 빠져나올 때면 만나는 가장 반갑고도 그리운 존재이다. 아버지는 말한다. 온 세상 햇빛으로 둘러싸였음을, 온 세상 햇빛으로 빛나고 있음을 비로소 볼 수 있다고. 컴컴한 굴속에서 오랫동안 있어보지 않은 사람은 알아채지 못할 존재인 햇빛은 광부인 아버지에게 특별한 존재인 것이다. 사람들은 항상 존재하던 것이 없어져야 그의 가치를 비로소 깨닫는다. 우리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를 이 시를 통해 새삼 인식하고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게 된다.을 구성하고 있는 삽화는 모두 검은 색을 포함하고 있다. 이는 탄광마을을 보다 사실적으로 가까이 느낄 수 있게 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떠나간, 아니 떠나가고 있는 마을의 허전함, 광부인 아버지가 죽은 슬픔 등 탄광마을의 애환을 드러내 주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햇빛’의 그림만은 이와는 달리 검은색이 포함되지 않아 밝다. 빨갛고 동그란 해를 중심으로 노오란 햇살이 온 세상을 비추고 있는 그림이다. 여기서 빨간 해는 탄광마을에서 어서 벗어나 환한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뜻이기도 하고, 힘들어도 정직하게 사는 이들이 모인 탄광마을에 대한 사랑이기도 하다.아무도 모르는 ‘햇빛’의 소중함을 알 수 있게 하는 광부의 삶이 과연 행복한 것인가, 아니면 불행한 것인가.Ⅲ. 즐겁지만은 않은 웃음소리(아버지 자랑)‘아버지 자랑’은 어느 수업시간의 일화를 그린 시이다. 새로 오신 선생님께서 아버지 자랑을 해보자 하셨지만 아이들은 광부인 아버지에 대해 자랑할거리가 도통 떠오르지 않는다. 영호가 손을 들고 일어나 “술 잡수신 다음날 일 안 가려 떼쓰시다 어머니께 혼나는 일입니다.”라고 말하자 교실 안이 웃음소리로 넘쳐흐른다. 이 시를 세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첫째, 아이들이 아버지 자랑이 무엇일까 하고 오늘에야 생각해 본 것이다. 도시의 아이들은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자랑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탄광마을 아이들에게는 아버지 자랑이 낯선 일이다. 이는 탄광마을의 힘든 삶을 나타내고 있다. 열심히 정직하게 일하지만 항상 가난한 탄광마을의 아버지들에게서 자랑할거리가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말 한마디 없이 // 불쑥 들어오시어그냥 앉아만 계시는 // 아버지보다는오늘처럼 술에 취해 // 흥겨워하시는 아버지가더 좋습니다. (30쪽 - 아버지1)둘째, 영호의 아버지 자랑은 객관적으로 보면 흉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항상 불평 없이 일을 하러 나가시던 아버지께서 술 잡수신 다음날에는 일 안 가려 떼쓰시는 모습이 왠지 영호에게는 자랑스럽게 느껴지는 것이다. 중 어느 시의 한 부분에도 비슷한 구절이 있다.영호의 아버지 자랑과 ‘아버지1’의 공통점은 바로 아버지의 솔직함을 좋아하는 것이다. 영호의 순수하면서도 어른스러운 마음이 단지 좋게만 와 닿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자랑이 될 수 있는 탄광마을의 사정이 슬퍼 보이기 때문이다.
황선미 글 ? 김환영 그림사계절, 2002‘소망’의 힘Ⅰ. ‘소망’이라는 것모두의 하루는 소망으로 시작해서 소망으로 끝난다. “조금만 더 잤으면...”, “내일은 좀 더 따뜻했으면...” 이와 같이 쉽게 극복하거나 쉽게 이룰 수 있는 소망이 있는가 하면, “아이들에게 존경받는 훌륭한 선생님이 되고 싶다.”와 같이 포기와 성취 모두 쉽지 않은 소망이 있다. 우리는 대개 ‘소망’을 후자의 개념으로 생각한다. 그것은 사회적 습관 때문만이 아니라 ‘일생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그 무엇’에 보다 많은 의미를 두기 때문이기도 하다.은 ‘잎싹’이라는 이름을 가진 암탉의 소망을 소재로 한 현실동화이다. 잎싹의 소망은 ‘알을 품어서 병아리의 탄생을 보는 것’으로 앞에서 나온 소망들 중 후자의 개념이다. 암탉에게 있어서 알을 품어 병아리를 보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이 책에 나오는 잎싹은 알을 얻기 위해 기르는 암탉이기 때문에 그 일은 절실한 소망이 되는 것이다. 에서는 잎싹이 소망을 어떻게 이루어 나가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잎싹은 어떻게 변해 가는지를 잔잔하게 그리고 있다.Ⅱ. 소망을 이루기 위한 시발점, ‘마당’난용종 암탉인 ‘잎싹’의 이름은 마당 끝에 있는 아카시아나무의 초록색 ‘잎사귀’로부터 나온 것이다. 철망 틈으로 고개를 내밀면 보이는 아카시아나무의 새하얀 꽃. 그 향기로운 꽃을 피워 내는 게 바로 잎사귀였고, 잎싹은 그것이 부러워 자신의 이름까지도 ‘잎싹’이라 혼자 지어 가진다.잎싹의 부러움을 사는 것은 잎사귀뿐만이 아니다. 마당식구들, 특히 그 중에서도 암탉을 볼 때마다 잎싹은 철망이 갑갑해서 견딜 수 없다. 그러던 중, 잎싹은 폐계가 되어, 죽은 닭들과 함께 구덩이에 버려진다. 과정이야 어쨌든 마당으로 나온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닭장에서 나가기만 하면 자신의 소망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던 잎싹이었지만, 현실은 냉정하다. 모두들 잎싹을 마당에서 쫓아내려고 하는 것이다. 자신이 폐계라는 사실을 모르는 잎싹은 암탉이 알을 품자 자신은 어쩐지 알을 낳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우울해진다. 게다가 마당식구들 중 유일하게 자신에게 호의적이었던 청둥오리 ‘나그네’마저 단짝이 생겨버려 외로워진 잎싹은 결국 마당을 나온다.닭장에 있을 때의 잎싹에게 마당이란 ‘알을 품고 싶다’는 소망을 가지게 한 눈부신 곳이었다. 하지만 기적적으로 가게 된 마당은 소망을 갖게 하고선 그것을 무너뜨리는 곳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마당은 잎싹을 벗어나게 함으로써 후에 오리알을 품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소망성취의 시발점이기도 하다.Ⅲ. 소망의 연결고리에서는 잎싹의 소망을 부각시키고 있지만, 잎싹 말고도 청둥오리, 족제비 등의 소망들이 ‘새끼’라는 하나의 고리에 의해 연결되고 있다. 서로 먹고 먹히는 관계에 놓여 있지만 자식을 품거나 배어 그 탄생을 보고, 자식이 건강하게 잘 자랐으면 하는 공통된 소망을 가지고 있는 그들을 하나하나 살펴본다.(1) 잎싹잎싹은 마당에서 나와 찔레덤불에서 ‘알’을 발견하고 어미가 없는 그 알을 품음으로써 기적적으로 소망을 이루게 된다. 오리와 닭이라는 차이를 넘어서서 잎싹은 사랑으로 새끼를 키운다. 족제비를 피해 잠자리를 옮겨 다니고, 밤잠을 설치며, 심지어는 그에 맞서 싸우면서까지 초록머리를 필사적으로 지킨다. 또한 청둥오리 떼가 저수지에 나타났을 때 잎싹은 초록머리를 가족들의 품으로 돌려보낸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초록머리가 날아서 떠나갈 때, 잎싹에게는 ‘날아가고 싶다’라는 두 번째 소망이 생기고 죽음으로써 그것을 이룬다. 이렇듯 잎싹의 소망은 ‘새끼’에서 시작하였고, 그로 인해 또 다른 소망까지 생기게 된 것이다.(2) 청둥오리청둥오리는 마당식구에게 천대받는 ‘나그네’이다. 마당식구들 중에서 잎싹에게 유일하게 호의적이었던 그에게도 단짝이 생겼고, 그로 인해 ‘나그네’의 외로움이 잎싹에게로 옮겨가게 되어 잎싹이 마당을 나오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주고 있다.잎싹이 찔레덤불에서 발견한 알을 품고 있던 어느 날 나그네가 나타나 잎싹과 알을 지켜준다. 가끔씩 나그네는 달빛이 환한 밤에 괙괙 거리며 날개를 펴고 뛰어다닌다. 잎싹은 그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것은 배고픈 족제비를 쫓아내기 위한 행동이었다. 결국 나그네는 족제비에게 목숨을 내놓으면서까지 알을 지켜낸다. 무사히 알에서 깨어난 것은 ‘병아리’가 아닌 ‘새끼오리’였고 그 사실을 통해 잎싹이 품었던 알은 나그네의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나그네는 자신의 알을 지키고 싶은 소망이 있었고 이는 잎싹과의 대화를 통해서도 얼핏 드러나고 있다.“잎싹아, 너는 사려 깊은 암탉이니까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알거야. 알이 깨면 여기를 떠나. 그리고 저수지로 가는 거야, 마당으로 가지 말고. 달이 기울었듯이 족제비의 배도 비었다는 걸 잊지마.” (76,77쪽)후에 저수지에는 나그네의 가족인 청둥오리 떼가 찾아온다. 나그네는 새끼가 알을 무사히 깨고 나와 자신의 가족을 찾길 바랐던 것이다. 이처럼 나그네의 소망 또한 ‘새끼’와 맞물려 있다.(3) 족제비족제비는 잎싹이 닭장을 나온 순간부터 위협을 주기 시작하여 알을 품고 있을 때, 새끼오리와 함께 저수지의 갈대밭에서 살아갈 때도 호시탐탐 배를 채울 기회를 노린다. 또한 배를 채울 대상은 잎싹에서 초록머리로 바뀐다. 자신을 탐했으면 좋으련만 족제비가 초록머리를 노리는 것이 잎싹은 더욱 두렵다. 그러던 중 잎싹은 네 발을 가진 아기들을 발견하고, 초록머리를 해치려는 족제비를 막으러 달려들 때 그들이 족제비의 아기임을 알게 된다. 자신의 아기들을 위협하자 족제비는 잎싹에게 굴복한다. 족제비도 어쩔 수 없는 어미인 것이다. 에서 잎싹과 족제비는 쫓고 쫓기는 사이지만 그 사이에도 공통된 ‘새끼를 지키려는 소망’이 존재한다. 그러나 족제비가 잎싹과 초록머리를 꾸준히 노려온 사실들을 단지 ‘배고플 때 눈에 띄었다’던가 ‘새끼들을 위해서’였다는 이유로 포장하려는 것은 다소 억지스러운 면이 있다.Ⅳ. 소망의 힘에서 소망은 그저 하나의 소망이 아니다. 마당식구들에게 면박을 당하고 우울한 채 마당을 나와 알을 발견했을 때 잎싹의 소망은 이루어지는 듯하지만 그것은 출발에 불과하다. 소망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알을 품기 시작하면 잘 부화되어야 하고, 잘 부화되어 새끼가 태어나면 새끼가 잘 자라야 하고...닭장에서 갓 나왔을 때의 잎싹과 초록머리를 떠나보낼 때의 잎싹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하나의 소망으로부터 빚어지는 소망들을 위해 많은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알을 지키기 위해서 청둥오리와 함께 족제비에 맞섰고, 이리저리 잠자리를 옮겨 다니며 족제비의 눈을 피했다. 잎싹은 고달프게 살았지만 소망이 있었기에, 그리고 그것을 이루었기에 행복했다고 말한다.
권정생 글 이철수 그림창비, 2002보이지 않는 손김윤지Ⅰ. 들어가며경제학자 애덤 스미스는 ‘개개의 모든 이해(利害)는 궁극적 ·자연적으로 조화를 이룬다.’ 즉, 외부의 개입 없이도 자연스럽게 조화가 이루어진다는 사상을 제시하면서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현대사회는 이러한 보이지 않는 손과 그 반대인 보이는 손 모두에 의해서 자유를 가짐과 동시에 통제를 받으면서 흘러가고 있다. 가끔씩 아니 어쩌면 항상 보이지 않는 손은 ‘투명해서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니라 ‘어두워서 보이지 않는 손’일지도 모른다. 그 손은 보이는 손보다 훨씬 강하고 약삭빨라서 우리가 미처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 자신의 목을 조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거나 분명한 것은 투명한 손이든 어두운 손이든 보이지 않는 손은 개입을 하지 않는다가 아니라 마치 공기처럼 항상 우리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는 사실이다.는 ‘어두워서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불행해진 인생들을 담고 있는 현실동화이다. 특히 이 동화의 주인공인 ‘몽실’의 굴곡진 인생을 통해 형제간의 전쟁과 살아남기 위한 전쟁의 아픔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전쟁을 일으키고, 애꿎은 사람들에게 아픔과 고통을 쥐어준, 지금도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해 의문의 싹을 틔울 물꼬를 터준다.Ⅱ. ‘몽실’의 절름발이 인생몽실은 해방 후 조국을 찾은 일명 ‘만주거지’이다. 살강마을에서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던 몽실은 아버지를 버리고 어머니 밀양댁이 도망치듯 시집간 댓골마을의 김씨네서 살게 된다. 밀양댁과 김씨 사이에 영득이가 생기자 몽실은 그 집에서 찬밥신세가 되었고 심지어는 다리뼈가 부러져 무릎이 굽은 채 뼈가 굳은 다리병신이 된다. 그러다 아버지와 함께 노루실 마을에서 새어머니 북촌댁을 얻어 평화로운 한 때를 보낸다. 북촌댁에게 마음을 연 몽실은 자신의 다리얘기를 한다.“ 아버지가 오셨기 때문에 그토록 큰 싸움이 난 거여요. 그러나 아버지가 오지 않았어도 김씨 아버지와 엄마는 자주 싸웠어요. 그러니까 언젠가는 내가 다리를 다치게 됐을 거여요.”“........”“다리 다친 건 내 팔자여요.” (74쪽)자신의 팔자 탓을 하는 몽실의 말은, 몽실이 힘든 삶을 살아가면서도 남을 탓하지 않는 착한 마음을 가진 점을 나타내기도 한다. 하지만 반대로 그 누군가에 의해 상처를 받으면서도 팔자 탓을 하며 당하기만 하는 민중의 답답한 미련함을 은근히 드러내고 있기도 하다. 또한 몽실이 다리를 다친 것(민중의 고달픈 삶)은 김씨 때문임(보이지 않는 손)을 강조하는 효과도 지니고 있다.전쟁이 난 후 아버지, 북촌댁과 헤어져 난남이(배다른 동생)와 둘만 남은 몽실은 마을 사람들의 도움으로 하루하루를 근근이 살아간다. 아버지는 한참 뒤에서야 아픈 다리를 이끌고 나타났고 치료 받을 날을 기다리다 자선 병원 앞에서 숨을 거둔다. 몽실 자매는 양공주인 서금년의 집으로 가게 되는데 처음엔 그 곳에 찾아오는 미군을 무서워하던 난남이 서서히 변해간다. 고향을 잊지 못한 몽실은 홀로 노루실 마을과 댓골 마을에 갔다가 영득이네가 서울로 이사를 간 사실을 알게 된다. 난남이마저 부잣집 양딸로 가버려 몽실은 정말로 혼자가 된다.몽실이 다니던 야학의 최 선생님은 사람들에게 배움의 필요성에 대해 말한다. 배우고 알아야 우리 인생의 길도 잘 걸어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들이 지금 공부를 하려는 것은 바로 우리의 인생길을 어떻게 걸어가야 하는가, 그 길의 내용을 정확히 알고 가자는 데 있는 것입니다. 개인의 인생은 물론 우리 마을, 우리 국가의 앞날에 어떤 장애들이 있는가 미리 잘 알아서, 우리는 튼튼한 준비를 해야 합니다.” (78쪽)“... 우리는 모르면 언제든지 속게 마련입니다. 속고 나서 후회하지 말고 정신 차려 똑똑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79쪽)이 같은 최 선생님의 말은 몽실이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 계기가 된다. 북촌댁은 몽실에게 인생은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몽실의 절름발이 인생은 최 선생과 북촌댁의 말과 같이 스스로 결정한 것이 못된다. 엄마손에 이끌려 댓골에 가고, 김씨 아버지에 의해서 절름발이가 된다. 전쟁 때문에 가족과 헤어지고, 구걸도 하게 된다. 결국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몽실은 절름발이 인생을 사는 것이다. 여기서 보이지 않는 손이란 어른이 될 수도 있고, 미군도 될 수 있다.Ⅲ. 그 누군가가, 그 어떤 것이에는 그 누구, 또는 그 어떤 것(즉,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보이지 않는 폭행을 당하는 사람들이 나온다. 그들은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 싸워야 하는 형제들이며, 살아남기 위한 전쟁을 해야 하는 우리 이웃들이다. 또한 남자에 의지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여자들이고,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났을 땐 더없이 착하지만 이익, 계급 등에 얽힌 채로 만났을 때 나쁜 사람이 되어야 하는 이들이다.(1) 형제간의 전쟁과 살아남기 위한 전쟁남과 북의 군인들은 무엇 때문에 싸워야 하는 지도 모른 채 어서 전쟁이 끝나길 빌며 서로를 때리고 죽인다. 사람들은 자신의 마을에 쳐들어온 인민군에게 쌀도, 소도 목숨도 빼앗긴다. 이리저리 피난을 가는 도중에 가족과 이별하는 사람도 있고, 전쟁고아가 대거 생긴다. 전쟁이 마을을 지나 북쪽으로 자리를 옮기자 이제는 목숨을 이어갈 삶이라는 전쟁으로 더 많은 괴로움을 겪게 된다. 사람들은 그 누군가를 위해 전쟁을 일으키고, 전쟁을 겪게 되지만 그 누군가에 대해 알고 있진 않다.(2) 여자의 삶에 등장하는 밀양댁, 북촌댁, 서금년 사이에는 공통점이 존재한다. 남자한테 매달려 살아가야 하는 여자인 것이다. 어쩌면 에 등장한 모든 여자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인지도 모른다. 밀양댁은 가난함에 지쳐 딸아이를 데리고 다른 남자에게로 시집간다. 북촌댁은 읍내 총각과 결혼해 잘 살다가 무서운 병에 걸려 남편에게 버림받은 이다. 그녀는 가난한 정씨에게로 시집을 와서 몽실의 새어머니가 되는데, 가난을 피하지 않는 점이 다른 두 사람과의 차이점이다. 서금년은 부산에서 미군들에게 몸을 팔며 살아가는 여자이다. 밀양댁은 ‘화냥년’, 서금년은 ‘양공주’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가난에서 벗어나려면 남자에게 매달려 살 수밖에 없다. 밀양댁, 서금년 말고도 북촌댁을 거론하는 이유는, 여자로 하여금 남자에게 매달려 살 수밖에 없게 만든 것의 이유가 가난뿐만이 아니기 때문이다.(3)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우리의 아버지들과 싸우고 있는 ‘인민군’이라 하면 보통 나쁘다고 생각하기 쉽다. 는 그러한 생각을 깨뜨려주고 있다. 인민국기가 아닌 태극기를 달아 죽을 위험으로부터 몽실을 구해 준 이는 청년 인민군이다. 여자 인민군 최금순은 배고픈 몽실 자매에게 식량을 주었고, 순철이라는 의용군 아이는 어머니 생각에 흐느낀다.
《빼앗긴 이름 한 글자》김은영 지음 / 남궁 산 그림창비, 1994현실과 동떨어진 아가의 방-아가의 방-김윤지Ⅰ. 들어가며동시가 아동의 현실을 외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다. 그러한 동시는 읽는 이에게 어떠한 감동도 줄 수 없다. 재벌 2세를 만나 팔자를 고치는 신데렐라의 드라마보다, 열심히 살아가려 노력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좌절하고, 그 와중에서도 어떠한 희망을 발견하는 이웃들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가 우리의 소탈한 웃음과 울음을 자아낸다. 마찬가지로 동시 또한 아동의 현실을 잘 반영하고 있어야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과 함께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이다.동시집,《빼앗긴 이름 한 글자》는 시골의 모습과 시골에서 땀 흘리며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표현한 작품이다. 그 중 이라는 시는 시골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기보다는 아가와 아가의 방이라는 단어에서 습관적으로 떠오르는 느낌을 기교를 섞어 표현해 놓은 것에 가깝다. 이 어떠한 모습으로 현실과 동떨어지고 있는지 살펴보자.Ⅱ. 외면당한 시골의 현실우선 시골의 현실이 외면당한 것은 ‘아가의 방‘이라는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다. 농사일에 쫓기는 부모가 아가의 방을 따로 마련하고 꾸며줄 여유가 있을 리 없다. 그러한 일은 도시의 부모에게서나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대체로 아가는 부모가 생활하는 방에서 함께 지내기 때문에 시골에 아가의 방이 따로 있다고 설정한 것은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 된다.아가의 방을 꽃내음이 가득한 곳이라 표현한 것도 문제가 있다. 같은 시집에 있는 라는 시와 비교해 보자.우리 집 냄새우리 집은 / 말끔히 청소해도 / 사라지지 않는 / 냄새가 있다 //마루 기둥에 걸린 / 옷에서 나는 / 절은 흙땀 냄새 //큰방에서 나는 / 청국장 냄새 //우리들 방에는 / 고추 곯는 냄새//학교 갔다 오면 / 금방 알 수 있다 //(148-149쪽)는 실제 시골집의 냄새를 잘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시골집에 아가의 방이 있다 하더라도, 시골집 특유의 냄새가 그 방만을 피해간다고 하는 건 무리다. 인위적으로 꽃향기를 피우려는 도시의 집들과 시골집이 같을 순 없는 것이다.이처럼 에서는 아가를 업고서 일을 해야 하거나, 아가를 누군가에게 맡겨야 하는 시골의 현실을 외면하고 있으며, 시골집만의 냄새를 무시하여 시골집을 도시의 집으로 만들고 있다.Ⅲ. 보편성을 지닌 현실의 외면은 특정한 공간(시골)을 떠나서 보편성을 지닌 현실 또한 외면하고 있다.첫째, 꽃으로 표현 하는 것이 적절치 못한 것을 그렇게 표현해 놓은 것이다. 이 시에는 이꽃, 밥풀꽃, 똥꽃 등의 세 가지 꽃이 나온다. 이꽃은 아가가 방긋 웃을 때 드러나는 작고 하얀 이가 예쁘고 올망졸망해서 꽃으로 표현했다고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밥풀꽃은 생기가 도는 빨간 볼에 붙은 작은 밥풀 하나가 눈에 띄어 그렇게 표현했다고 이해해보자. 하지만 똥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아이들은 유독 똥 이야기를 좋아한다고 한다. 그래서 간단한 그림책에서 가장 빈번하게 채택되는 소재가 바로 똥이다. 하지만 아이들이 좋아한다는 것과 이것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기호를 떠나 표현의 타당성, 읽는 이가 받아들일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라는 것이다. ‘꽃’은 아름답고 향기로운 것의 이미지를 대표한다. 시의 마지막 연에서 아가의 방에 꽃내음이 가득하다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 시에 나온 꽃들 중에서는 방을 가득 채울만한 꽃내음을 풍기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와 밥풀에서 냄새가 날 수는 없으며, 똥이 풍기는 냄새를 꽃내음으로 여기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둘째, 잠을 자는 아이의 모습과 시의 내용이 맞지 않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아가는 배설을 했을 때 얌전히 자고 있을 수 없다. 아가는 당연히 울음을 터뜨려야 하고, 부모는 아가의 기저귀를 갈아줘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가의 방냄새를 꽃냄새로 느끼고 있는 관찰자나 울지 않고 평온하게 잠들어 있는 아가의 모습은 현실을 외면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Ⅳ. 나오며은 《빼앗긴 이름 한 글자》에 나오는 시들 중 현실과 동떨어진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에서는 농사일에 바빠 아가를 제대로 돌볼 수 없는, 아가의 방을 따로 만들어 줄 여유가 없는 시골의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 또한 아가의 방을 꽃내음으로 가득 채우면서 시골집 특유의 냄새를 무시하고 있다.이 시의 배경이 된 시골의 현실만 외면당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인정할 수 있는 보편적인 현실 또한 외면당하고 있다. 꽃과 연관되지 않는 대상들을 꽃으로 표현하여 꽃내음을 풍기도록 하고 있으며, 기저귀를 비집고 나온 똥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이를 자게 만들고 있다.까아만, 하이얀, 빠알간, 노오란 등의 표현으로 외형적인 화려함-그마저도 식상한-만 추구하고 현실을 외면하고 있는 은 읽는 이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 꽃으로 포장하지 않고, 시골집의 냄새와 아가의 칭얼거림을 그대로 드러낸 작품이 오히려 마음에 와 닿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빼앗긴 이름 한 글자》김은영 지음 / 남궁 산 그림창비, 1994무시당하는 장래희망-우 식 이-김윤지Ⅰ. 들어가며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학생이 바로 한국의 학생이라고 한다. 식을 줄 모르는 교육열 속에서 학생들은 좋은 대학만을 목표로 땀 흘리며 공부해야 한다. 좋은 대학이란 어떤 것인가. 자신의 장래희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양질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곳? 이런 말을 들은 학생들은 자조 섞인 웃음을 지을지도 모르겠다. 한국에서 장래희망(또는 적성)은 대체로 점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우리는 어릴 때부터 잘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교육받아왔다. 나름대로의 꿈을 지니고 있던 아이들은 크면서 돈이나 명예를 가질 수 있는 직업을 바라보며 공부하게 된다. 그래서 고생한 만큼 대우받지 못하는 분야는 취약해지는 것이다. 이공계가 바로 좋은 예인데, 이를 기피하면 할수록 국가경쟁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당장의 이익만을 바라보면서 장기적인 이익은 놓치고 있는 셈이다.이처럼 높은 곳만을 바라보면서 정작 자신이 원하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보다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는 세태에 의해 어떤 아이의 장래희망이 짓밟히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시가 바로 다. 우식이의 장래희망이 무시되고 있는 한 교실을 살펴보면서 이 시의 의미를 알아보자.Ⅱ. 무엇이 우식이의 장래희망을 무시 하는가우식이의 장래희망은 농부가 되어 농사를 짓는 것이다. 말하기 시간에 주저하며 꺼낸 우식이의 말에 반 아이들은 웃음을 터뜨리고, 우식이는 눈물을 글썽인다. 우식이의 장래희망은 수업시간에 한 교실에서 공식적으로 무시를 당하고 있다. 무시하고 있는 사람에는 웃음을 터뜨린 반 아이들뿐만이 아니라 우식이 자신도 포함된다. 우식이와 반 아이들로 나누어 살펴보자.(1) 우식이우선, 우식이가 농사를 짓겠다고 말하게 된 계기를 살펴보자. 우식이는 공부를 못하는 아이다. 여느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우식이도 대통령 같이 높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봤을 것이다. 하지만 공부를 못하기 때문에 이미 어느 정도 자신감이 떨어진 그는 자신 있게 나서서 장래희망을 밝히지 못하고 있다. 그러한 연유에서 아버지를 이어 농사를 짓겠다고 말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아니면, 우식이가 커서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이라서 그렇게 말했을 수도 있다. 에서 농사를 짓는 것이 정말로 우식이의 장래희망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우식이가 말한 자신의 장래희망은 농사를 짓는 일이다. 공부를 못해서 선택한 길이든, 정말 하고 싶어서 선택한 길이든 자신의 장래를 말하면서 우식이는 부끄러워한다. 선생님이 다그쳐야 겨우 말할 정도로 주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장래희망에 대한 우식이의 태도는 《윗몸 일으키기》의 에 나오는 화자와 비교된다.
《시정신과 유희정신》이오덕 지음창비, 1999아동문학의 현실과 나아가야 할 방향Ⅰ. 들어가며길가에서 마주치는 많은 아이들 중에 동요를 부르는 아이를 만나기란 쉽지 않다. 아이에게 요즘 유행하는 최신 가요를 불러보라고 하는 것이 특정한 동요를 불러보라고 하는 것보다 반응을 얻기가 더 쉬운 일이 될 정도로 동요는 아이들에게 외면당하고 있다. 동요뿐만이 아니다. 도서관의 수많은 동시집은 아이들의 손길을 받을 기회가 거의 없어 갓 출판된 상태로 남아있다. 누구나 한번쯤 동시나 동요를 읽거나 부를 때 심한 어리광으로 인해 낯간지러움을 느껴봤을 것이다. 또한 진부한 내용 때문에 오는 시시함이나, 말뜻을 알아내지 못해 뜬구름을 잡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을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동요나 동시 등을 스스로 찾아서 접할 노력을 하지 않게 되었다. 결국 아동문학은 수업시간에만 보는 것으로 전락하였고 감동과 동심으로 아동을 키우는 문학으로서의 진정한 가치를 잃어버렸다.아동문학이 이토록 아동들의 외면을 받고 보기 싫은 것이 된 근본적 원인은 무엇인가. 또한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 아동문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어떠한가. 이러한 문제에 대한 답을 하고 있는 책이 바로 《시정신과 유희정신》이다. 이오덕 씨의 아동문학 평론들을 모아놓은 이 책을 위에서 언급된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겠다.Ⅱ. 아동문학의 현실진단《시정신과 유희정신》에서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동문학 중에서도 특히 동시에 관한 문제에 치중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이 글에서도 주로 동시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다.이 책의 글은 모두 1970년대에 쓰인 것으로 여기서 말하는 현실은 물론 1970년대의 것이다. 필자는 동시의 변천과정을 도표(20쪽)로써 나타내고 있다. 그에 따르면, 8?15 이전에는 식민지 상황에서 일어난 열등의식에 의해 대체로 현실을 도피하는 동심천사주의의 짝짜꿍 동요)가 생겨났고 해방 이후에도 여전히 이러한 동요가 아동문학의 주류를 이루었다. 60년대에 들어와서 동요의 자리를 채운 동시는 아동와 동감 없이, 일에 마음을 쓸 필요가 없는 천사들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고 비판한다. 또한 천진난만한 동심을 그려 놓은 작품들은 시인이 아동이 되어버린 상태에서 쓸 때가 많다는 것도 문제시되고 있다. 동시란 어른인 시인이 아이들에게 주기 위해 쓰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시인은 아동이 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어릴 적부터 전형적인 동심천사주의 작품을 접해왔고 그것이 높은 작품성을 띤다고 교육받은 자의 입장에서 이 책에 접했을 때 혼란스러운 감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현실을 외면한 동심주의 작품에 대한 필자의 의견에 동의한다. 실제 아동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심한 어리광이나 혀짤배기소리로 이루어진 아기자기한 동시는 오히려 유아에게 적절하며, 이를 읽은 아동이 시시하다느니 웃기고 있다느니 하는 반응을 보이는 것만으로도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른만이 쓸 수 있는’ 동시와 아동이 지은 시에 대한 필자의 견해에는 찬성할 수 없다. 이에 대한 필자의 의견은《시정신과 유희정신》중의 )라는 글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난다.아동문학의 장르로서의 동시는 어른이 쓰는 것이다. (중략)그런데도 우리 문단에서는 이것을 여기 좀 지루할 정도로 문제 삼아야 되도록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오해와 편견이 보편화되어 있고, 그런 편견을 밑바탕으로 한 기괴한 교육과 문학 현상이 나타나 있다. 그것은 아동이 쓰는 것도 동시라는 것,(중략)이다. (205쪽)시인이 말의 섬세한 선택과 치밀한 구성으로 그의 높은 지성(知性)을 바탕으로 한 시로서 쓴 동시가 그때그때 충동적으로, 거의 자연발생적으로 쓰게 되는 아동의 시와 같을 수 없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이 명백하다. (207쪽)만일 아이들이 쓴 글이 문학작품이라면 글을 쓰게 하는 것이 곧 문학작품을 쓰게 하는 것이고 이 된다. 또한 이 되지 않을 수 없다. (209,210쪽)필자는 10년 전부터 아이들이 써야할 것을 시, 어린이 시, 아동시라고 말하고, 성인의 문학작품은 종래 불러 온 그대로 동시라고 하고 있는데, 이보다 드러낸다. 충동적이며 자연발생적이라는 말이 긍정적이게 다가오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부정적으로 볼 수는 없다. 만약 그렇게 볼 수 있다면 충동적으로 쓴 아동의 시가 시인이 쓴 동시보다 더 산뜻하고 감동적이게 느껴지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또한 필자가 다른 글에서 매너리즘)에 빠진 동시를 구원할 수 있는 비상구로 아동들이 쓰고 있는 시의 세계를 제시한 것은 위 인용문에 나온 의견과 일치하지 않는다. 이는 아이들이 쓴 시는 충동적인 것이고 어른이 본받아서는 안 되는 것이라는 자기 견해를 스스로 뒤엎는 경우이다.세 번째 인용문에서 필자는 지나친 비약을 하고 있다. 그는 문학작품이 아닌 자신의 작품을 쓰는 것이 중요하며 그러한 의미에서 글짓기는 문학작품 창작교육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책에서 글짓기 교육은 매너리즘에 빠진 작품들의 기교를 따라하게 만드는, 아이들의 자율성을 통제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따라서 글짓기 교육이 진정한 문학작품 창작을 위한 것이 될 수는 없다. 또한 문학작품이 항상 의도적으로 창조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생각이 좋은 작품의 창작을 방해하는 것이며, 아동이 짓는 시는 그러한 의미에서 좋은 작품이 탄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많다고 할 것이다.마지막 인용문은 다른 인용문과는 달리 그 뜻을 인정할 수 있다. 지금껏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필자의 견해를 반박한 것은 ‘아동이 지은 시는 동시가 될 수 없다’는 것 말고 ‘문학작품이 될 수 없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른과 구분되는 문학작품이라면 그 명칭도 달라야 할 것이기에 인용문에 나온 필자의 마지막 의견을 받아들이는 것이다.위에서 언급이 된 동심주의와는 반대의 경향을 띠는 60년 이후의 동시에 대해서도 필자는 냉담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60년 이후에 쓰인 동시는 대체로 아동을 무시하고 동시인 의 취미로 쓰이는 경향을 띤다. 이는 구체적으로 자연관조적, 사색적인 작품으로 나타났다. 필자는 어려운 말이나 표현의 기교가 성인시에서는 통하지만 아동시에서는 그렇지신과 유희정신》에서는 그 원인을 크게 ‘열등의식’과 ‘평론 부재’의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첫 번째, 열등의식은 이 책의 처음부분에서 언급되고 있다. 필자의 말에 의하면, 아동문학작가들이 갖는 열등의식은 우리 민족의 대부분이 공통으로 갖는 일반적인 열등의식과 일반문학에 대한 차등의식이 겹친 두 겹의 열등의식으로 되어있다고 한다.전자는 우리나라의 역사적, 사회적인 특수성에서 나온 것으로 오늘날 이 열등감을 해소시키기 위한 불건전한 삶의 방식을 세 가지로 나누고 있다. 겉치레 생활, 약한 자를 짓밟고 올라서는 생활태도, 꿈 속에서 만족을 얻으려고 하는 자위 속은 자기마취 행위가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열등감들을 설명하는 도중에 문제점이 발견된다. 필자가 든 예들 중에서 자진해서 책보퉁이를 메어 나르는 아이와 책보퉁이를 그 아이에게 맡기는 아이들의 이야기가 있다. 필자는 전자도 문제지만 후자가 지닌 열등감에 주목하고 있다. 강자가 약자에게 책보퉁이를 맡기는 것은 농촌 아이들의 도시 아이들에 대한, 서울 학생들의 외국 학생들에 대한 열등감 때문이라는 것이다. 열등감 때문에 자기도 강자가 되고 싶어서 그런 행동을 할 수도 있다고 치자. 하지만 이는 너무 심한 억지이다. 농촌 아이들이 과연 도시 아이들과 외국 아이들을 자신의 처지와 비교하여 생각하고 있을지도 의문이지만, 책보퉁이를 둘러싼 아이들의 일을 봉건시대로부터 물려받은 노예의 습성 등의 사회, 문화적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다가 갑자가 농촌과 도시, 서울과 외국이라는 전혀 다른 기준을 들이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타당치 못한 전개는 ‘약한 자를 짓밟고 올라서는 생활태도를 열등의식으로 볼 수 있을까.’하는 의문을 일으키기까지 한다.아동문학 작가들은 또한 일반 문학에 대한 차등의식을 지닌다. 필자는 일반 문학 작가들이 하는 말(천대받는다, 소외당한다, 다른 일반 문학작품도 겸해서 쓰는 사람이 유능한 작가다.)을 빌어 그들의 자기모멸의식을 비판하고 있다.두 번째 원인은 평론의 부재이다. 평론 부재의 근본 원인은 창작의작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Ⅲ. 아동문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시정신과 유희정신》에서 필자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바로 ‘리얼리즘’이다. 이는 위에서 언급된 매너리즘에 빠진 아동문학의 현실에서 받아들여야 할 개념이다. 아동문학의 범위에서 강조되는 것은 리얼리즘이지만 이는 너무 광범위하므로 동심, 서민성, 시정신 등의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도록 하겠다.(1) 동심동심은 어른들의 장난감도 아니고, 옛날을 회상할 때 잠기는 늙은이들의 그리움의 세계도 아니다. 그것은 삶의 터전에서 온갖 부정과 역경과 싸우면서 끝내 지켜 나가는 순수한 인간 정신이며, 끊임없이 자라나는 선(善)의 마음바탕이며, 온 민족의 어린이와 어른의 마음바다로 확대해갈 수 있는 정심(正心)이며, 문학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키워나갈 수 있는 인간의 본성인 것이다. (151쪽)《시정신과 유희정신》에서 필자는 ‘동심’을 새롭게 정의를 하고 있다.이는 여태껏 동심을 ‘아이들의 티 없이 맑은 마음’ 정도로 인식해 온 우리에게 그러한 관념의 벽을 깨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그 단어에 비해서 다소 광범위한 느낌이 들지만 동심의 정체를 작가의 세계에서 제 나름대로 체득해 놓아야 한다는 필자의 생각과 그 시도는 높이 살만하다.이 책에 수록된 라는 글은 이윤복의 일기 《저 하늘에도 슬픔이》에 나타난 동심을 보여주고 있다. 필자는 윤복이의 일기에 나타난 동심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티묻지 않은 순수한 인간정신이며 우연히 자기 반 아이의 집에 구걸을 하러 간 윤복이가 놀라서 달아나는 것을 보고 착하고 아름다운 인간의 마음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타당한 해석인가. 필자는 살아가기 위해 같은 반 친구네라도 구걸 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뻔뻔한 행동을 하지 않은 윤복이의 마음을 높이 산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뻔뻔한 행동이라고 할 수 있을까. 착한 마음 즉, 필자가 말하는 동심을 지닌 아이라면 집에서 굶고 있는 동생들을 생각하여 부끄러움을 참고 구걸을 해야 하지 않았을까. 여기서 부끄러움이 곧바로 뻔뻔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