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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건축가 김수근의 공간사옥
    空間 공간사옥 SPACE空間 김수근 김수근 [ 金壽根 , 1931.2.20 ~ 1986.6.14] 현대건축가 . 활동분야 : 건축 출생지 : 서울 주요수상 : 국민포장 (1970), 미국 범태평양건축상 (1971), 이탈리아문화공로훈장 (1979), 철탑산업훈장 (1984), 은탑산업훈장 (1986) 주요작품 : 자유센터 , 엑바탄 주거단지 , 올림픽 주경기장 , 마산 양덕성당 등 김수근 김수근 ( 金壽根 , 1931 년 2 월 20 일 ~ 1986 년 6 월 14 일 ) 은 대한민국의 건축가이자 , 교육자이며 , 잡지 발행인이기도 했고 예술가들의 후원자이었다 . 김중업과 함께 대한민국 현대 건축 1 세대로 평가 받으며 , 한국건축사에서 중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된다 . 그의 다방면에 걸친 한국문화에 대한 지원으로 인해 , 그는 1977 년 미국의 잡지 타임에서 ,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 후원가인 로렌초 데 메디치로 비유되기도 하였다 .空間 김수근 김수근 김수근은 1931 년 2 월 20 일 함경북도 청진 신압동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 경기공립중학교에 입학하고 , 그가 2 학년이 되는 해에 그는 건축을 전공한 미국 병사에게서 영어회화를 배운다 . 미군 병사의 소개로 처음으로 건축에 대해 알게 되었고 , 장차 건축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 1950 년에 서울대학교 건축학과에 진학하면서 , 당시 서울대학교에 교수로 재직하던 김중업을 처음으로 소개받는다 . 그러나 곧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휴교령이 내리고 , 부산으로 피난을 간후 , 일본으로 건너가게 된다 . 1954 년에 동경예술대학 ( 東京藝術大学 ) 건축과에 입학하면서 요시무라 준조를 스승으로 만나게 된다 . 학교를 다니던 중에 마쓰다 · 히라다 ( 松田平田 ) 건축 사무소 에서 일하기도 하였다 . 그는 1958 년 도쿄예술대학 건축과를 졸업하면서 , 1960 년 도쿄 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 1959 년에 남산에 건립하려던 한국 국회의사당 건축 설계안 현상 모집에 일등으로 당선되었으나 , 1 함경북도 청진 출생 1950 경기중학교 6 년 졸업 1951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건축공학과 2 년 중퇴 1954 도쿄예술대학 건축학과 입학 1959 국회의사당 건축설계경기 1 등 당선 1960 도쿄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취득 1961 김수근건축연구소 개소 , 홍익대학교 조교수 1962 도쿄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1966 종합예술지 월간 ‘공간’ 창간 1975 세계건축가연맹 (UIA) 이사 1976 한국건축가협회 회장 1986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타계空間 주요작품 1959 국회의사당 현상설계 당선안 1961 워커힐 힐탑바 1963 자유센터 ( 남산 ) 1967 부여박물관 , 한국기술연구소 (KIST) 본관 1968 세운상가 ( 종로 ) 1969 타워호텔 1970 오사카 EXPO'70 한국관 1971 공간사옥 1974 서울대학교 예술관 ( 미술대학 , 음악대학 ) 1975 이란 엑바탄 주거단지 ( 이란 테헤란 ) 1977 서울올림픽 주경기장 1979 종합문예회관 , 국립청주박물관 , 한계령휴게소 1980 경동교회 1982 인천상륙작전기념관 1984 국립중앙과학관 1985 주한미국대사관 1986 서울지방법원청사 , 라마다 르네상스 호텔 , 벽산빌딩 초기 공간사옥空間 주요작품 1960 년대 ‘ 조형의지의 진솔한 표현시대 ’ 라 할 수 있는 이 시절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힐탑바 (61), 자유센타 (63), 타워호텔 (64), 부여박물관 (67), KIST 본관 (67), MBC 건물 (67), HAPPY HALL(69) 등이 있다 . 특히 힐탑바 , 타워호텔의 대담한 구조적 형태표현과 분명한 조형미는 그 시절 , 젊은 건축가가 국내 건축계에 던지는 신선한 충격이었고 건축가 자신에게는 커다란 자부심을 획득한 작품으로 전해진다 . 자유센터 워커힐 힐탑바空間 주요작품 1970 년대 ‘ 조형의지의 완숙미와 자기어휘 ’ 에의 고집이 뚜렷했던 시기로 해석된다 . 70 년대초 공간사옥 (71) 을 필두로 서울대 예술관 (74), 덕성여자대학 캠퍼스 (76), 마산성당 (77 많은 후자들이 꾸준히 서로의 교류를 계속하고 있는 일면 또한 , 그 분이 남긴 교육적 큰 영향과 연결지어 생각지 않을 수 없다 . 샘터사옥 초기 공간사옥空間 주요작품 1980 년대 연대초에서 현재에 이르는 작업 속에서는 70 년대의 기본어휘와 그 범위를 확대 수용해 가는 암시적 몇몇 작품이 돋보이고 있다 . 공릉사옥 (85) 및 국민은행 전산본부 (81), 법원청사 (85), 뉴 자이안트 호텔 (85) 등 일연의 대규모 건축계획 속에서 70 년대의 두터운 어휘를 깨는 새로운 기법들이 엿보이고 있다 . 서울지방법원청사 경동교회空間 공간이론 일본 유학에서 귀국한 60 년 이후 노출콘크리트 기법으로 탄탄대로를 걷던 그는 67 년 부여박물관 전체모습이 일본 신사를 연상케 한다는 지적과 논쟁으로 자신만의 건축언어를 찾게 된다 . 그는 우리의 한옥과 초가를 돌아보며 한국 미래건축의 단초를 찾아낸다 . 건축가 김수근이 자신의 건축에서 한국성에 대한 고민을 하도록 하는 과정에는 전통문화에 대해 높은 안목을 가진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장 최순우의 영향이 컸다 . 그 영향으로 김수근은 전통건축의 조형과 공간이 가지는 특징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 이를 자신의 건축에 어떻게 반영할 것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 김수근은 전통건축의 형태적인 측면뿐 아니라 인문학적인 측면까지 현대건축이 계승해야 할 범주로 다루었다 . 부여박물관空間 공간이론 그는 한국인에 맞는 공간과 스케일 , 그리고 비례감 등에 대한 탐구에 몰두했다 . 서양의 건축가 르 꼬르뷔제 (le Corbusier, 1887~1965) 는 다양한 인체의 동작에 관련된 치수를 정리하고 이를 모듈러 ( Modulor ) 라고 명명했다 . 이는 서양건축의 규모를 결정하는데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 건축가 김수근은 한국의 건축은 한국인이 느끼기에 적절한 공간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 생활방식과 신체치수의 차이에 맞게 공간적인 치수도 다르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공간사옥 le Corbusier 의 Modulor원 옆 원서동에 위치한 공간사옥은 1971 년에 구관 ( 대지 130㎡, 연건평 360㎡) 이 완성되었고 , 1977 년에 증축되었다 . 공간구성의 기본원칙은 우리에게 친밀감을 주고 창작환경을 새롭게 조성한다는 의미에서 한국인의 체형에 맞는 human scale 을 적용 , 좁고 넓음 , 높고 낮음 , 막힘과 열림으로 다양한 공간을 연출해 냈으며 , 내외장 피부형성에도 재료 그 자체가 주는 질감을 그대로 표출하여 낯설지 않은 친밀감 또한 더해 주도록 하였다 . 이는 김수근의 건축철학과 건축이념이 담긴 종합예술이 총합된 작품으로 그 쓰임새에 따라 변화와 우연성으로 무한한 창작의식을 유발할 수 있는 장 이라 하겠다 . 공간사옥 *휴먼스케일 : 인간의 체격을 기준으로 한 척도 . 사람이 중심이 되는 공간 . 공간과 형태 구성에 있어서 인간적 척도를 매우 중요한 요소로 함 . 공간의 가치는 예전에는 크기가 가장 중요시 되었지만 최근에는 효용성을 위주로 함 .空間 공간사옥 공간사옥의 외부는 보기에는 긴 장방형 모양인데다 창이 별로 없어 폐쇄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 주변의 한옥과 창덕궁의 기와 등 전통건축과 어울리는 전돌과 흑벽돌을 재료로 하고 있으며 , 오랜 세월 담쟁이 덩쿨이 감싸고 오른 모습은 계절마다 건물의 표정을 변화시킨다 . 공간의 前소장은 검은 벽돌이 외벽 재료로 쓰인 것은 건축 당시 기와로 덮인 ㅁ자형 한옥 일색이었던 주변과 어느 정도 맥락을 같이 하려는 의도였다 고 설명한다 . 같은 방법으로 쓰인 듯하지만 검은 벽돌은 구관에서는 조적조의 구조체 이자 마감재로서 , 1977 년 증축된 신관에서는 철근콘크리트조 구조 위를 덮는 마감재로 그 성격이 달라진다 . 외부뿐 아니라 내벽의 대부분의 공간도 이 재료로 마감되어 있다 . 공간사옥空間 공간사옥 이 건물은 우선 외부로부터의 진입과정과 외부공간 구성이 독특하다 . 복잡한 도심가로와 연결된 골목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옆으로 비켜선 커다란 마당이 보인다 . 영역이 다름을 암시하는 몇 개의 계단을 내려서면 바로 커다 안내실과 담화실을 지나며 갖게 되는 마당으로 향한 내향적시선도 내부와 외부의 극적인 일체화를 꾀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 공간사옥의 출입구 부분 중정 , 과 중정에서 바라본 뒷마당空間 공간사옥 김수근 건축의 백미는 ‘인간을 위한 공간확보’에 있다 . 그 공간은 철저히 휴먼스케일이었다 . 계단의 폭이 좁은 경우 2 尺 정도 밖에 되지 않는 곳도 있고 , 천장 높이가 7 尺도 되지 않았다 . 이러한 그의 건축의지는 공간사옥에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 계단의 폭이 작은 경우 2 尺 정도 밖에 되지 않는 곳도 있고 , 천장 높이가 7 尺도 안되는 등 한옥에서 특히 친숙한 인간적 공간감을 맛볼 수 있게 되어 있다 . 또한‘휴먼스케일’을 강조하기 위해 전체 건물의 덩어리가 나뉘어 있음은 물론 , 계단이나 화단 , 담장 , 나아가 벽면의 벽돌 내어쌓기나 돌출창의 배열 등에서 모두 한국인에 친숙한 리듬감을 느낄 수 있도록 계획된 것이 이 건물의 특징이다 . 김수근의 공간사옥 단면 스케치 일부空間 공간사옥 일본 건축가 토요이토가 마치 미로와 같다 고 표현한 공간사옥의 내부는 외부의 절제된 형태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다양함을 보여준다 . 가장 먼저 느낄 수 있는 것은 공간의 적절한 크기이다 . 낮지만 답답하지 않은 높이의 천장 , 좁지만 불편하지 않은 계단 , 예상치 못하게 나타나는 뜻밖의 공간들이 가장 알맞은 기능과 형태를 가지고 모여 있는 것이다 . 특히 좁은 진입로를 따라가다 만나는 3 층의 트인 공간은 상대적으로 놀랍게 느껴질 공간이다 . 공간 자체가 드라마틱하게 구성되야 하고 작은 공간과 큰 공간들이 적절하게 잘 섞여져야 한다는 건축가의 의도가 잘 드러난다 . 그것은 평면적인 개념으로 생각해서는 결코 알 수 없는 공간의 미학이다 . 공간사옥空間 공간사옥 현재의 공간사옥은 1971 년 완공한 건축에 잇대어 77 년 증축된 구관과 20 년의 시간차를 두고 97 년 지은 장세양 (1947-1996) 설계의 신관으로 돼 있다 . 사면을 투명한 유리로 마감한 첨단공법의 how}
    공학/기술| 2013.06.13| 22페이지| 2,500원| 조회(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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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건축) 종묘의 기원과 증축과정 및 시설
    宗廟 종 묘宗廟 종묘 ( 宗廟 ) 조선시대 왕가 ( 王家 ) 의 신위 ( 神位 ) 를 봉안한 사당 . 왕이 국가와 백성의 안위를 기원하기 위해 문무백관 ( 文武百官 ) 과 함께 정기적 으로 제사에 참여한 공간 . 사적 제 125 호 . 태묘 ( 太廟 ) 라고도 함 . 구성 : 종묘 정전 , 별묘 ( 別廟 ) 인 영녕전 ( 永寧殿 ) 과 공신당 ( 功臣堂 ) · 칠사당 ( 七祀堂 ) · 재궁 ( 齋宮 ) · 전사청 ( 典祀廳 ) · 향관청 ( 享官廳 ) · 제문 ( 諸門 ) 종묘 정전宗廟 종묘 ( 宗廟 ) 의 역사 종묘의 기원 - 종묘제도는 삼국시대부터 시작 . - 시조묘 · 동명묘 · 국모묘 모두 종묘에 해당 . - 신라 남해왕 때 박혁거세 종묘에 봄 , 여름 , 가을 , 겨울에 제사를 지낸 기록 . 고려시대 - 본격적인 종묘제도 도입 . - 국초부터 종묘의 제도를 갖추기 시작하여 성종 때 완비 . - 고려의 종묘 : 9 실 ( 室 ) 로 되어 있었으나 때로는 5 실로 하고 동서에 협실을 두기도 했으며 종묘 정전 이외에 별묘를 설치하기도 함 . 숭의전宗廟 종묘 ( 宗廟 ) 의 역사 조선시대 - 조선왕조가 건국된 후 고려의 종묘를 철거 후 설치 . - 새 종묘가 완성되기 전까지 태조의 4 대 조상 신위를 임시로 효사관에 봉안 . - 낙성 : 공사에 착수한 지 1 년만인 1395 년 ( 태조 4) 9 월 . - 위치 : 한성부 동부 연화방으로 지금 종묘가 있는 곳 . - 규모 : 태실 7 칸 · 좌우 익실 ( 翼室 ) 각 2 칸 · 공신당 5 칸 · 신문 ( 神門 ) 3 칸 · 동문 3 칸 · 서문 1 칸으로 모두 담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 담 밖에는 행랑과 재궁을 비롯한 건물들로 구성 . 종묘宗廟 종묘 ( 宗廟 ) 의 건립 종묘의 건립 : 유교의 조상 숭배 사상과 밀접한 관계 유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혼 ( 魂 ) 과 백 ( 魄 ) 으로 분리되어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형체인 백은 땅으로 돌아간다고 생각 . - 사당을 지어 ‘ 혼 ’ 을 모시고 무덤을 만들어 ‘ 祧遷 ) . 종묘 ( 宗廟 ) 의 정착 세종 3 년 (1421 년 ) 의 정전과 영녕전 1 2 3 4 5 6 7 1 2 3 4 5 6 세종 3 년 (1421 년 ) 의 정전 세종 3 년 (1421 년 ) 의 영녕전 기존 창건宗廟 정전의 태실에는 태조를 첫째 묘 ( 廟 ) 로 두었고 , 정종과 태종을 둘째로 , 세종을 셋째로 , 문종과 세조를 넷째로 , 마지막으로 예종을 다섯째로 하여 오묘 ( 五廟 ) 의 제도를 지킴 . 연산군에 따라 세실 제도 시행 . - 세실 제도 : 살아생전에 공덕이 높은 임금의 신위를 조천 ( 祧遷 ) 하지 않고 불천위 ( 不遷位 ) 하는 제도 . 명종 2 년 (1546 년 ) 에 태실 4 칸을 증축 . 종묘 ( 宗廟 ) 의 1 차 증축 명종 2 년 (1546 년 ) 의 정전과 영녕전 1 2 3 4 5 6 7 8 9 10 11 1 2 3 4 5 6 명종 2 년 (1546 년 ) 의 정전 명종 2 년 (1546 년 ) 의 영녕전 기존 기존 증축宗廟 임진왜란으로 궁궐과 함께 종묘도 방화로 소실 . 임시로 어영집을 궁궐과 좀료로 삼음 . 궁궐은 정릉동 ( 지금의 정동 ) 의 월산대군이 살던 옛 집으로 하였고 , 종묘는 명종 때 영의정을 지낸 명신 심연원의 집으로 삼음 . 임시로 마련된 궁궐과 종묘에서의 궁실경영 ( 宮室經營 ) 은 환도 후 약 15 년 동안 지속 . 종묘 ( 宗廟 ) 의 소실 선조 25 년 (1592 년 ) 임진왜란 당시 방화로 종묘 소실 1 2 3 4 5 6 7 8 9 10 11 1 2 3 4 5 6 선조 25 년 (1592 년 ) 의 정전 선조 25 년 (1592 년 ) 의 영녕전 소실 소실宗廟 선조 41 년 (1608 년 ) 복구를 시작하여 광해군이 즉위한 후 완료 . 종묘 ( 宗廟 ) 의 재건 선조 41 년 (1608 년 ) 의 정전과 영녕전 1 2 3 4 5 6 7 8 9 10 11 1 2 3 4 5 6 7 8 9 10 선조 41 년 (1608 년 ) 의 정전 선조 41 년 (1608 년 ) 의 영녕전 재건 재건 증( 왕 19 위 , 왕비 39 위 ), 영녕전에는 34 위 ( 왕 15 위 , 왕비 17 위 , 황태자 1 위 , 황태자비 1 위 ) 가 모셔져 있음 . 조선의 27 명의 왕 중 연산군 , 광해군을 제외한 25 명의 왕과 왕은 아니지만 돌아가신 다음에 왕의 칭호를 받은 추존왕 9 명의 신주까지 모두 34 위 . - 추존왕 9 명 : 목조 ( 태조의 고모부 ), 익조 ( 태조의 증조부 ), 도조 ( 태조의 조부 ), 환조 ( 태조의 부 ), 덕종 ( 세조의 장남 ), 원종 ( 세조의 5 남 ), 진종 ( 영조의 아들 ), 장조 ( 영조의 아들 ), 의민황태자 ( 영왕 )( 마지막 왕 ) 신주를 모시는 일정한 원칙 - 5 대가 지난 왕은 원칙적으로 정전에서 영녕전으로 신주를 모셔 봉안 . - 공덕이 뛰어난 선왕의 신주를 옮기지 않고 영구히 정전에 봉안 . - 실제 왕위에는 오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세자들도 추존하여 봉안 . - 서쪽부터 선왕의 순으로 신주를 모심 . 종묘 ( 宗廟 ) 의 신위 봉안 1 실 2 실 3 실 4 실 5 실 6 실 7 실 8 실 9 실 10 실 11 실 12 실 13 실 14 실 15 실 16 실 17 실 18 실 19 실 신덕고황후 강씨 신덕고황후 한씨 태조고황제 원경왕후 민씨 태종대왕 소헌왕후 심씨 세종대왕 정희왕후 윤씨 세조대왕 정현왕후 윤씨 공혜왕후 한씨 성종대왕 문정왕후 윤씨 장경왕후 윤씨 단경왕후 신씨 중종대왕 인목왕후 김씨 의인왕후 박씨 선조대왕 장렬왕후 조씨 인렬왕후 한씨 인조대왕 인선왕후 장씨 효종대왕 명성왕후 김씨 현종대왕 인원왕후 김씨 인현왕후 민씨 인경왕후 김씨 숙종대왕 정순왕후 김씨 정성왕후 서씨 영조대왕 효의선황후 김씨 정조선황제 순원숙황후 김씨 순조숙황제 신정익황후 조씨 문조익황제 효정성황후 홍씨 효현성황후 김씨 헌종성황제 철인장황후 김씨 철종장황제 명성태황후 만싸 고종태황제 순정효황후 윤씨 순명효황후 민씨 순종효황제 서협실 1 실 2 실 3 실 4 실 동협실 5 실 6 실 7 실 8 실 9 실 10 실 11 다 . 역성 혁명에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한 의도로 해석하기도 하고 , 종묘를 창건할 때 공민왕의 영정이 바람에 실려 종묘경내로 떨어졌는데 조정에서 회의 끝에 그 영정을 봉안키로 하여 공민왕 신당이 건립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 공민왕 신당宗廟 재궁 일원 제를 위해 심신을 정결히 하던 곳 . 재궁은 왕이 머물면서 세자와 함께 제사를 올릴 준비를 하던 곳으로 , 어재실 , 세자재실 , 어목욕청으로 구성되어 있다 . 마당을 중심으로 북쪽에 왕이 머무르는 어재실 , 동쪽에 세자가 머무는 세자재실 , 서쪽에 어목욕청이 있고 , 담으로 둘러져 있다 . 왕과 세자는 재궁 정문으로 들어와 머물면서 목욕재계하고 의관을 정제하여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한 후 , 서협문으로 나와서 정전과 영녕전의 동문으로 들어가 제례를 올렸다 . 재궁 일원宗廟 정전 일원 역대 왕실의 신주를 모신 곳 . 정전은 왕과 왕비의 승하 후 궁궐에서 삼년상을 치른 다음에 그 신주를 옮겨 와 모시는 건물로 , 종묘에서 가장 중심이 된다 . 정전의 마당으로 들어가는 문은 세 곳에 있다 . 남문은 신문 ( 神門 ) 으로 , 혼백이 드나드는 문이다 . 동문으로는 제례 때 제관이 출입하고 서문으로는 악공 , 춤을 추는 일무원 , 종사원이 출입한다 . 정전에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 재위 중인 왕의 4 대 조상 , 역대 왕 중에서 특히 공덕이 큰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셨다 . 정전은 내부에 모실 신주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몇 차례에 걸쳐 옆으로 증축하여 늘렸다 . 건물 앞에 있는 가로 109m, 세로 69m 나 되는 넓은 월대는 정전의 품위와 장중함을 잘 나타낸다 . 월대 가운데에는 신문에서 신실로 통하는 긴 신로가 남북으로 나 있다 . 거친 월대 바닥과 위로 육중한 지붕을 떠 받치고 있는 모습은 숭고하고 고전적인 건축미의 극치를 이룬다 . 정전 일원 종묘 정전 종단면도 종묘 정전 평면도宗廟 정전 일원 공신당 ( 功臣堂 ) 정전에 모신 역대 왕들의 공신들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 창건할 때는 5 칸에 불과 하이유는 왕을 포함해서 제사에 참여한 제관들이 경박하게 빨리 걸어가면 안 되기 때문이다 . 일부러 거친 돌을 깔아 몸가짐을 조심하게 한 것이다 . 정전과 영녕전의 지붕 용마루 , 처마 , 기단 , 담의 높이를 유심히 보면 모두 다르다 . 지붕과 기단의 높이는 신실 · 협실 · 월랑 순으로 낮아지고 기둥의 굵기와 높이도 같은 순서로 가늘어지고 낮아진다 . 이러한 건축 형식은 위계질서를 중요시하는 유교의 세계관을 반영한 것이다 . 종묘 정전宗廟 기타 시설물 신로 ( 神路 ) 신로는 종묘제례 의식을 위해 낸 것으로 신 ( 神 ) 만이 다니는 길을 말한다 . 종묘에 는 신로 외에도 신향로 ( 神香路 ), 향로 ( 香路 ), 어로 ( 御路 ), 세자로 ( 世子路 ) 등이 있다 . 종묘 외대문을 들어서면 곧바로 거칠고 넓적한 박석이 세 가닥 길로 깔려 있다 . 가운데 길이 약간 높고 양옆은 약간 낮다 . 가운데 길은 혼령이 다니는 신로 ( 神路 ) 와 향ㆍ축문ㆍ폐백 등 제사 예물이 오가는 향로 ( 香路 ) 가 합쳐진 신향로이고 , 오른쪽 길은 왕이 다니는 어로 , 왼쪽 길은 왕세자가 다니는 세자로다 . 신향로는 종묘 정전과 영녕전 남쪽에 난 대문에 이르러 묘정 상월대 아래에 닿기 때문에 이 남문을 신문 ( 神門 ) 이라 한다 . 어로와 세자로는 재궁에 이르러 재궁 서문에서 정전 동문 , 영녕전 동문으로 이어진다 . 삼도宗廟 기타 시설물 판위 ( 版位 ) 종묘 정전과 영녕전 동문 밖 , 그리고 묘정 동북쪽에는 특별하게 만든 네모난 대 ( 臺 ) 가 있다 . 판위라고 부르는 이 대는 왕과 세자가 제례를 할 때 잠시 멈추어 예를 갖추는 자리다 . 왕이 멈추어 서는 자리는 전하판위 ( 殿下版位 ), 세자의 자리는 세자판위 ( 世子版位 ) 라 한다 . 판위宗廟 기타 시설물 월대 , 계단 정전과 영녕전 앞에 넓게 펼쳐져 있는 대를 월대라 하고 , 월대가 있는 공간을 묘정 ( 廟廷 ) 이라 부른다 . 월대는 상월대와 하월대로 구분되어 있다 . 정전과 영녕전 건물은 상월대 북쪽에 기단 w}
    공학/기술| 2013.05.29| 42페이지| 4,000원| 조회(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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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근대과학기술과 신건축사상
    Report근대과학기술과 신건축사상1.근대건축과 과학기술·근대건축은 과학이 제공하는 새로운 지식을 활용.->새로운 건축을 형성하여 점차적으로 착실한 진전을 보이기 시작.·실리적인 중요성을 크게 강조.·과학적으로 발명·개발된 새 재료와 새 공법을 사용하여 새로운 방향을 개척.·즉, 근대는 발달된 과학 기술에 의해 과거보다도 훨씬 정확하게 재료의 성질을구명하게 되었으며, 많은 새로운 재료를 발명하였고 새로운 공법을 발견하였음.->건축의 활동영역 확대 , 건축 표현 요소의 범위가 넓어짐.·근대 건축의 발전은 19세기부터 개발된 새로운 재료와 공법에 의존.·1851년 런던 박량회에 팩스턴- 수정궁(주철로 건축됨).·1855년 베세머-강재 대량생산 방법 발명.->주철보다 발성과 강도가 높은 강철이 건축구조제로 사용.·철근콘크리트~19세기 말엽에 발명된 일종의 활성재료.·강철·콘크리트의 이점은 큰 스팬(span)에 보를 걸칠 수 있으므로 큰 규모의 공 간을 용역하고 경제적으로 덮을 수 있는 것이 만들어졌다.·1878년,1889년 에펠에 의해 설계된 파리의 박람회용 홀, 에펠탑 (철강구조).·1916년 프레시네가 설계한 프랑스의 오를리(철근 콘크리트 구조물).·대형판유리의 제조법~건축물에 충분한 태양광선 도입과 통풍을 용이하게 하여 건 강과 능률에 많은 개선을 가져올 수 있게 되었다.·근대 건축이 공학과 기게 디자인, 고압전선탑, 비행기 등에서 얻은 것.① 신 재료의 사용기술.② 선의 단순미와 표현의 성실성.③ 방율, 비례, 대조 등에 의한 아름다움.·철재 콘크리트의 사용은 구조적으로 건물의 전체를 독립주군 즉, 필로티(piloti)를 사용해 평면계획상에 새로운 융통성이 생기게 하여 정원과 건물의 겅계가 없어지고 실내와 옥외공간이 관통하는 새로운 특징이 나타나게 되었다.·새로운 재료들의 개발로 건축활동에 새로운 가능성 초래.·신기술과 새로운 전기기계 설비의 발견.① 엘레베이터의 출현(1859).② 냉방 장치 및 각종 전기기기.③ 조명장치.④ 공기 조화 및 냉방장치.·동력 생산 방법에 의존한 공장조철과 관련, 제조과정의 속도가 높아짐.·프리페프리케이션(prefabrication)~건축 공사에 기성 부품을 조립하는 과정.·공업디자이너는 대량 생산되는 규격 부품의 질을 발전.->모든 건축부품이 근대 건축에 있어서 건축 전체의 종국적인 질을 높였다.·근대 건축은 천연재료의 적절한 활용에 의해 변화 있고 공감을 갖게 하는 질감과 형태 및 성격을 발전시킴으로서 인간성을 강조.·근대 건축은 기계문명에 의존하고 있기는 하나 건축가의 통찰력과 상상력에 좌우되 고 있다.2.신건축사상의 성장과정·19세기 후반에 신건축 사상이 출현될 징후는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때로는 ① 새로운 미학의 이론.② 새로운 장식을 사용하는 시도.③ 기묘한 새로운 건축형태.이러한 여러 가지 사상이 합쳐져서 새로운 건축사상의 구체적 형성을 보게 된것은 20세기 초 무렵 이다.·1859년 영국 켄트 필립 웨브(philip webb)의 붉은 집(red house).·1851년 하이드 파크 박람회를 위하여 엔지니어 팩스턴에 의해 설계된 수정군은 주철로 만들어진 것임.·아르누보운동.① 벨기에에서 앙리 바 드 벨드 의 지도하의 구조와 형태가 건축의 참된 기반이라 는 새로운 방향이 종형 예술가 사이에 퍼진 것.② 이 운동이 독일에 전파되었을 때에는 유겐트슈틸(jugendstill)이라 불리워 짐.③ 일반 직물형태에 기본을 둔 유창한 선의 표현이 주가 되었으나 새로운 종류의 장식을 발안하는 정도이상으로 큰 발전을 보진 못하였다.④ 영향을 받은 건축가로는 찰스 렌니 매킨토시(Charles Rennie Mackintosh) 와 안토니 가우디(antoni gaudi)가있다.·시세션운동(secesion) ~ 1897년 오토 바그너의 영향 하에 요셉호프만이시작한 이 운동은 과거 양식에서 분리와 해방을 지향하는 건축운동으로서 근대건축 의 저서이다.·바그너의 설계 방침① 목적을 정밀하게 파악하고 완전하게 충족시킬 것.② 시 공재료의 적당한 선택.③ 간편하고 경제적인 구조.④ 이렇게 하여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건축형태가 필요 양식이다.·그의 주장을 잘 나타내주고 있는건축물.오토바그너 ~ 빈의 우체국(1906).브뤼셀 ~ 스토클레 저택(1911).올브리히 ~ 시세션관(1899).다름슈타트 예술촌(1899).·아돌프 로스~ 오스트리아인 1910년에 지은 한 주택은 근대 설계의 주목할 만한 실례이다.“충분한 상상력을 가지고 설계된 건축은 그 형태를 솔직히 표현하여야 한다”는 지론으로 모든 장식을 반대.
    공학/기술| 2011.12.15| 5페이지| 1,000원| 조회(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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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콘크리트의 종류와 특징
    제 목 : 콘크리트의 종류담당교수 :과 목 명 :학 과 :학 번 :이 름 :1.경량 con'c? 콘크리트의 건조비중이 2.0이하의 콘크리트를 말한다.? 설계기준 강도 240㎏/㎠ 이하, 기건 단위 용적이 1.4 ~ 2.0t/㎥의 범위에 들어가는 것? 장점 : 자중이 가벼워 구조물의 단면축소가 가능열전도율 및 열확산율이 작아 내화성이 큼콘크리트 치기 및 시공 시 힘이 적게 듬방음효과가 큼? 단점 : 압축강도 및 탄성계수가 작음건조수축 및 수중팽창이 큼다공질로서 흡수성이 큼2. 한중 con'c? 동결할 위험이 있는 경우에 사용하는 콘크리트를 말한다.? 1일 평균기온이 4℃이하이면 콘크리트의 경화 및 강도증진이 느리고 동결 할 염려가있으므로 한중콘크리트로 시공해야 한다.? 비비기, 운반 및 치기는 열량의 손실이 적게 되도록 한다.? 콘크리트에 열을 공급하는 경우 콘크리트가 건조되거나 국부적으로 가열되지 않도록주의하고, 보온양생, 열공급 양생이 끝난 후 콘크리트를 급격히 냉각시켜서는 안된다.? 시멘트는 절대로 직접 가열해서는 안된다.? 한중콘크리트의 양생① 보온양생: 단열성이 높은 재료로 덮어서 시멘트 수화열을 이용하여 소정강도가얻어질 때까지 보온하는 것이다.② 급열양생: 기온이 낮은 경우 또는 단면이 엷은 경우에 보온만으로 동결온도 이상의온도를 유지할 수 없을 때 급열에 의하여 양생하는 것이다.③ 콘크리트를 친 후 적어도 24시간 동결하지 않도록 충분히 보호해야 한다.④ 급열양생시에는 콘크리트로부터 물의 증발이 심해져 건조될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하며, 급열양생 또는 보온양생을 마친 후 갑자기 건조될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하며,급열양생 또는 보온양생을 마친 후 갑자기 한기에 노출하면 콘크리트 표면에균열발생 우려가 있으므로 서서히 식도록 해야 한다.3. 서중 con'c? 월 평균 기온이 25℃를 넘거나 최고온도가 30℃를 초과하는 시기에 시공하는 콘크리트.? 서중콘크리트의 시공에 있어서 기온이 높으면 콘크리트의 온도가 높아져서 운반 중의슬럼프 저하, 연행 공기량의 감소, 콜드 조인트의 발생, 표면 수분의 급격한 증발에 의한균열의 발생, 온도균열의 발생 등의 위험성이 증가한다.? 문제점 : ①소요의 반죽질기를 얻기 위한 단위수량 증가②응결이 빨라짐③장기강도가 낮아짐④온도변화에 의한 체적변화가 커짐? 시공대책 : ①기온이 높은 시기에는 충분한 습윤상태를 유지해야 한다.②비빈후 1시간 이내에 타설하는 것이 바람직하다.③가능한 콘크리트의 온도를 35℃이하로 낮추는 것이 바람직하다.④애지테이터 트럭의 드럼을 천으로 감싸면 온도상승을 줄일 수 있다.⑤습윤양생을 24시간 이상 실시하지 않을 때에는 막양생제를 사용한다.⑥양생에 사용하는 물의 온도가 콘크리트 온도보다 너무 낮으면 온도응력에의한 균열발생의 우려가 있으므로 주의한다.⑦응결지연제를 사용하여 콘크리트의 응결경화를 늦추면 콜드 조인트의방지에 효과가 있다.4. 수밀 con'c? 콘크리트 자체를 밀도가 높고, 내구적?방수적으로 하여 물의 침투를 방지하도록 만든콘크리트? 지하실?수중 구조물?수영장?지붕 슬래브 등의 수밀성을 필요로 하는 장소에 사용된다.? AE제, 감수제, AE감수제 또는 포졸란 등을 사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단위수량 및 물-시멘트비를 가급적 적게 하고, 단위굵은골재량을 가급적 크게 한다.? 콘크리트의 소요 슬럼프는 가급적 적게 하고 18cm를 넘지 않도록 한다.? 혼화제를 사용하여도 공기량은 4%이하가 되게 한다.? 물-시멘트비는 55~60%이상이 되면 콘크리트의 수밀성은 감소하므로 55%이하를표준으로 한다.? 부어놓은 콘크리트의 온도는 30℃이하로 한다.? 진동다짐을 원칙으로 한다.5. 프리팩트 con'c? 굵은 골재를 먼저 넣은 후, 시멘트 모르타르를 주입하여 만든 콘크리트? 재료 분리가 적다. → 보통콘크리트의 1/2? 시공이 용이하며, 수밀성이 높고 내구성도 크다.? 기존 콘크리트나 철근과의 부착이 잘 되어 구조물의 수리, 보수공사에 유리하다.? 굵은골재 : 최소 치수 15mm이상의 것으로 한다.? 잔 골 재 : 1.2mm이하의 것으로 한다.6. 매스 con'c? 부재 또는 구조물의 치수가 커서 시멘트의 수화열에 의한 온도상승을 고려하여 시공하는콘크리트를 말한다.? 부재 단면의 최소 치수가 80cm이상이고, 내부 최고 온도와 외기 온도의 차가 25℃이상으로 예상되는 콘크리트? 단위 시멘트량은 될 수 있는 대로 적게 한다.? 성질 : ①내부의 온도상승은 단위시멘트량 10kg/㎥ 증감에 따라 약 1℃비율로 증감한다.②콘크리트 온도가 25℃이상일 때에는 파이프쿨링 등의 냉각조치를 취한다.7. 고강도 con'c? 부재 단면의 감소로 유효 면적이 증대되고 부재가 경량화된다.? 시공 능률의 향상과 공기 단축과 작업량이 감소된다.? 고강도콘크리트의 배합①물-시멘트비: 50% 이하②단위시멘트량: 가능한 한 적게 되도록 시험에 따라 정한다.③단위수량: 180kg/㎥이하, 소요의 워커빌리티를 얻을 수 있는 범위 내에서의 최소값④잔골재율: 가능한 작게 하도록 한다.8. 유동화 con'c? 미리 비빈 콘크리트에 시멘트입자의 분산성이 우수한 고성능감수제(유동화제)를 첨가하여유동성을 높인 콘크리트를 말한다.? 다량 사용해도 이상 응결 지연, 경화 불량, 과잉 공기 연행성이 없다.? 시공 능률의 향상과 공기 단축? 블리딩과 수화 발열량이 감소한다.? 사용목적: ①일반적인 묽은 반죽 콘크리트의 품질개선 도모②된반죽?보통반죽 콘크리트의 시공성 개선 도모③고강도?고품질의 콘크리트를 얻음④매스콘크리트의 수화발열량의 감소 도모9. 제치장 con'c? 외장 마감을 따로 하지 않고 노출된 콘크리트면 자체가 치장이 되게 한 콘크리트? 노출콘크리트라고도 한다.? 양질의 거푸집을 사용하며, 박리제를 충분히 사용한다.? 시멘트는 많이 쓰는 것이 좋으며 부배합으로 한다.? 자갈은 되도록 잔것을 이용한다.? 장점: ①건물 자중 경감②재료의 절감③안전하고 경제적10. 차폐 con'c? 방사선 차폐용과 같은 특수한 목적으로 사용되는 경우를 말한다.? 철광석, 중정석, 자철광, 적철광, 갈철광, 기타의 중량골재를 사용한 콘크리트로서단위중량이 3~5tonf/㎥ 범위이다.? 요구조건: ①시멘트는 수화열이 적고, 골재는 비중이 크고 방사선 차폐성이 커야한다.②콘크리트의 밀도는 높고 열전도율 및 열팽창율이 적어야 한다.③건조수축 및 온도균열이 적어야 한다.11. 프리캐스트 con'c? 벽체?바닥판 등의 각 부분을 공장 생산하여 현장에서 조립 접합하는 것? 장점: ①시공 능률이 향상②공기 단축이 가능③대량 생산이 가능④동절기 시공이 가능? 단점: ①운반 거리에 제약을 받음②접합부 처리가 어려움③부재가 공장 제품이므로 부재 변경이 곤란12. 프리스트레스트 con'c? 콘크리트의 인장응력이 생기는 부분에 미리 압축응력(프리스트레스)을 주어 철근콘크리트의 결함인 균열을 방지하여 전 단면을 유효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미리 인위적으로 그응력의 크기와 분포를 정하여 내력을 준 콘크리트? 장점: ①설계하중이 부재에 작용해도 미리 가해진 압축응력으로인해 균열이 발생하지않음②강재가 부식하는 위험이 없어 내구적이다.③균열이 발생하더라도 하중이 제거되면 원래상태로 복원한다.? 단점: ①고강도의 재료를 사용하여야 함으로 단가가 비싸진다.②PS강재가 온도의 상승으로 인해 해를 받기 쉬우므로 주의한다.13. 숏 con'c? 보수?보강공사 등에 적용되는 콘크리트? 장점: ①급결제의 첨가에 따라 조기강도를 발현시킬 수 있음②거푸집이 불필요하고, 급속시공이 가능? 단점: ①리바운드 등의 재료손실이 많음②숏콘크리트 작업시 분진이 발생③수밀성이 다소 결여됨14. 기포 con'c? 잔골재를 사용하지 않고 물-시멘트비를 아주 작게 하고 콘크리트 속에 많은 기포를생성시켜 중량을 가볍게 한 콘크리트? 경량성, 단열성, 내화성 등이 좋아진다.? 절대건조상태의 비중은 0.4~1.2 정도이며 압축강도는 70kfg/㎠ 이상을 표준으로 한다.
    공학/기술| 2011.12.15| 6페이지| 1,500원| 조회(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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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자설
    제 목 : 원 자 설과 목 명 :학 과 :학 번 :이 름 :1. 고대의 원자설원자의 세계는 우리 주위의 물체들에 비하면 아주 작은 입자의 세계이다. 원자의 반지름은 대충 1Å(1옹스트롬, 0.00000001cm)정도이다. 따라서 우리가 매일 대하는 물 한 컵, 설탕 한 스푼 같은 양에는 엄청나게 많은 원자가 들어 있다.원자의 크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비유 중에 ‘시저의 마지막 숨’ 이라는 말이 있다. 로마의 황제 시저가 믿던 브루투스에게 암살을 당할 때 “브루투스 너까지도...”라는 말을 하며 마지막 숨을 내쉬었다고 한다. 그때 그 마지막 숨에 들어있던 공기 분자들이 지구의 모든 공기에 골고루 퍼져 있다고 하자.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숨에는 시저의 마지막 숨에 들어 있던 분자가 평균 한두 개씩은 들어 있게 된다.시저 이야기는 분자와 원자가 얼마나 작은가를 짐작하게 해준다. 분자가 작기 때문에 한숨에 많은 분자가 들어 있고, 분자수가 많기 때문에 그 수가 지구상의 공기 전체에 퍼져도 0.5ℓ부피 안에 한두 개가 들어 있게 되는 것이다. 공기의 주성분인 질소와 산소 분자는 두 개의 원자가 결합해서 이루어진 분자이다. 질소 원자를 N, 산소 원자를 O라고 표시한다면, 질소 분자는 N2, 산소 분자는 O2이다. 즉, 원자는 분자보다 더 작은 입자인 것이다.사실 원자를 이루고 있는 소립자들에 비하면 원자는 큰 편이다. 한편 사람은 지구나 태양계, 또는 은하계에 비하면 대단히 작은 존재이다. 이와 같이 크고 작고 하는 것은 다 상대적인 이야기로 귀착된다.우리는 원자라는 말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사용하지만, 과연 원자는 존재하는 것일까? 그리고 인류는 어떤 과정을 통해서 원자에 관한 확실한 지식을 얻게 되었을까?19세기 후반까지도 많은 과학자들은 원자의 존재를 믿지 않았지만, 최근에 주사터널 현미경(Scanning Tunneling Microscope) 등 고성능의 현미경이 발명되어 원자 하나하나의 상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사람이 원자다른 원자들이 서로 결합해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다. 근대적인 원자설에서는 원자의 질량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데, 데모크리토스의 원자에는 질량의 개념은 들어 있지 않고, 크기와 모양이 원자의 성질을 결정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예를 들면, 물을 이루는 원자는 둥근 모양을 가지기 때문에 물이 흐르고, 돌이나 쇠붙이를 이루는 원자는 사각형 모양으로 생겼기 때문에 빽빽하게 공간을 채워 단단하고 무거운 성질을 갖게 된다고 생각했다.아무튼 데모크리토스로부터 모든 물질의 기본이 되는 입자를 찾는 일이 시작된다. 데모크리토스는 “원자와 빈 공간 이외에는 다른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머지는 우리의 생각일 뿐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그러나 데모크리토스의 생각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 중 어느 한쪽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증명할 아무런 자료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의 생각은 철학적인 사고에 그치고 말았다. 2천 년도 더 지나 17세기 말에야 비로소 영국의 보일(Robert Boyle;1627-1691)이 기체의 압력과 부피의 관계를 원자의 입장에서 설명하면서부터 근대적인 원자론이 시작된다.우리는 앞에서 원자를 정의할 때 더 가를 수 없는 단위라고 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얼마만한 힘으로 가르느냐가 중요하다. 물질의 세계에는 여러 상호 작용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 상호 작용의 크기에 따라 어느 정도의 에너지로 가를 수 있느냐 없느냐가 결정되기 때문이다.즉, 원자도 더 가를 수 없는 최소의 단위가 아닐지도 모른다. 실제로 원자에 충분한 에너지를 주면 원자도 더 작은 입자로 갈라진다. 이것은 소립자 물리학의 영역이지만, 아무튼 화학이 발견한 원자는 데모크리토스가 생각한 궁극적인 원자는 아니다.2. 근대의 원자설근대적인 원자설이 제창된 것은 19세기 초반이다. 데모크리토스 이후 약 2200년이 지난 다음이다. 그러나 이 새로운 원자론도 수십 년간 논쟁의 대상이 된다.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을 근대적인 원자설로 부활시킨 사람인 영국의 교사 출신인 돌턴(John Dalton;1766-1844은 그 질량이 같으며, 원자설의 (4) 에서 화합물을 만드는 원자들이 간단 한 정수비로 결합한다고 하였으므로, 일정 성분비의 법칙을 설명할 수 있다.? 배수 비례의 법칙: 원자설의 (2) 에서 같은 원소의 원자들은 같은 질량을 가지 며, 원자설의 (4)에서 원소로부터 화합물이 생길 때에는 각 원소의 원자가 간단 한 정수비로 결합한다고 하였으므로, 배수 비례의 법칙을 설명할 수 있다.돌턴은 자신의 원자설에 입각해서 배수 비례의 법칙을 제창하고 이를 증명했다. 예를 들면 과산화수소는 수소1g당 산소16g를 포함한다. 물은 수소1g당 산소8g를 포함한다. 따라서 물과 비교하면 과산화수소는 같은 양의 수소에 대해서 2배의 산소를 포함한다.원자의 질량에 대한 관심은 원자량이라는 개념과 나아가서는 원자번호라는 개념으로 발전했다.2천여 년 간 물질의 기본 성질에 대해서는 확실한 해답이 없었는데, 마침내 돌턴에 의해서 근대 적인 원자설이 확립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돌턴이 생각한 원자는 데모크리토스가 생각한 더 가를 수 없다는 의미의 A-tom은 아니다.(A-아니다,Tom-가르다) 왜냐 하면, 19세기가 다 지나가기 전에 원자 내부의 원자 보다 작은 다른 입자가 들어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이다.돌턴의 원자설이 자리를 잡는 데는 물질의 질량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런데 분자의 개념은 반응하는 기체의 부피를 조사하는 데에서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기체의 부피와 질량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1808년 프랑스의 화학자 게이 뤼삭(Gay-Lussac ;1778-1850)은 여러 가지 기체들 간의 반응을 조사하고, 반응하는 기체의 부피사이에는 정수비의 관계가 성립한다는 기체 반응의 법칙을 발표했다.예를 들어 질소와 산소가 반응하면 세 가지 다른 화합물을 만드는데, 이때 반응하는 질소와 산소의 부피 비율은 같은 온도와 압력하에 2 : 1, 1 : 1, 1 : 2로 세 경우의 다 정수비의 관계가 성립한다. 또 같은 온도와 압력하에서는 2ℓ의 수소는 1ℓ의 산소와 반응해서 물을 ‘같은 온도와 압력하에서 같은 부피의 모든 기체는 같은 에너지를 가진다’ 라는 내용은 맞지만 그것이 기체 법칙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3. 아보가드로의 법칙19세기 초반까지는 수소, 산소, 질소 등의 기체는 이들 원소의 원자 하나로 되어 있다고 생각했고, 같은 원자들이 결합해서 새로운 입자를 만들 수도 있다는 데에는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따라서 질소와 산소에서 산화 질소(NO)가 생기는 반응은 N + O → NO 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게이 뤼삭은 이 반응에서는1ℓ의 질소는 똑같이 1ℓ의 산소와 결합하는 것을 측정했다. 그런데 게이 뤼삭은 1ℓ의 질소와 1ℓ가 아니라 2ℓ의 산화 질소가 생기는 것을 발견했다. 만일 반응하는 모든 산소와 질소 원자가 둘로 갈라지고 이 반쪽 짜리 산소와 질소가 결합한다면 이 실험 결과를 설명할 수 있게 된다.그런데 그렇다면 질소와 산소 원자가 둘로 갈라져야 한다는 결론이 되므로 돌턴이 게이 뤼삭의 같은 부피-같은 입자수 법칙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러나 곧 이탈리아의 화학자 아보가드로(Avogadro;1776-1856)에 의해 중요한 발전이 이루어지게 된다. 그는 1811년에 돌턴의 원자설에 입각하여 게이 뤼삭의 법칙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 냈다. 만일 질소와 산소가 하나의 원자로 이루어진 기체가 아니라, 두 개의 원자가 결합한 분자로 되어 있다고 하자. 즉 질소는N이 아니라 N2 고, 산소는 O가 아니라O2 고 가정하자. N2분자가 두 개의 N 원자로 갈라지고, O2분자가 두 개의 O 원자로 갈라진 다음 이들 원자가 결합해서 NO 분자를 만든 다면 1ℓ의 질소와 1ℓ의 산소로부터 2ℓ의 산화 질소가 얻어질 것이다. 이와 같이 아보가드로는 분자라는 개념을 도입하고, 처음으로 분자(Molecule)라는 말을 사용했다. 화학이 분자에 관한 학문이라고 본다면 아보가드로 이후에 화학이 제 모양을 갖추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이와 같이 아보가드로는 분자를 도입해서 일정한 온도와 압력하에서는, 기체의 종류에 관계없이 같은 부피에는 1몰에 들어 있는 '입자'의 수를 아보가드로 수(Avogadro's Number)라고 한다.아보가드로 수는 602,300,000,000,000,000,000,000이라는 엄청나게 큰 수이기 때문에 6.023 X 1023으로 표시하는 것이 편리하다. 아보가드로 수를 이야기 할 때는 무슨 입자를 말하는지 잘 생각해야 한다.아보가드로 수는 1몰의 물질에 들어 있는 입자의 수라고 정의 할 수 있지만, 막상 그 수를 정확히 측정하는 데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 아보가드로 자신은 그 수를 측정할 일도 없었다. 단지 후일 그의 업적을 기리는 뜻에서 아보가드로 수라는 이름이 붙여졌을 뿐이다.19세기의 아보가드로 수는 기체 운동론에서 계산되었거나, 기체확산, 표면장력, 얇은 막의 두께 등으로부터 간접적으로 얻어졌는데 지금 알려진 정확한 값과는 큰 차이가 있다. 그렇지만 아보가드로 수는 엄청나게 큰 수이고, 원자는 대단히 작은 입자라는 사실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1909년에 미국의 물리 학자 밀리컨(Millikan;1868-1953, 1923년 노벨 물리학상)이 전자의 전하(Electrical Charge)를 측정해서, 1몰의 전자에 해당하는 1패러데이(Faraday)라는 양으로부터 아보가드로 수를 6.062 X 1023까지 정확하게 측정했다.지금은 소금과 같은 결정에 들어 있는 원자나 이온간의 거리를 X-선 회절 방법(X-ray Diffraction Method)으로 측정해서 아보가드로 수를 정확히 알 수 있다.5. 물의 전기분해오래 전부터 호박(琥珀)을 털과 문지르면 머리카락 같은 물질을 끌어당긴다는 것이 알려져 왔다. 누구나 물기가 없는 머리를 빗을 때 머리카락이 일어서는 것을 경험했을 것이다.16세기 영국인 의사 길버트는 유리, 유황, 여러 가지 보석 등도 비슷한 성질을 가진 것을 발견하고 이러한 성질을 전기적 성질이라 불렀다. 이것을 호박에 해당하는 일렉트론이라는 그리스어에서 유래된 말이다. 이러한 전기는 전선을 통해서 흐르는 전기가 아니라 전기를 띤 물체에 국한다.
    자연과학| 2011.12.15| 11페이지| 2,000원| 조회(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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