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과 사울 그리고 압살롬이 나오는 이 책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권위와 섬김에 관한 이야기. 누구나 추천하는 이 책을 처음 읽기 시작한 첫 장부터 기대가 컸다. 세상의 그 어떤 책에서 얻을 수 없는 깨달음을 기대했고 그것은 그 등장인물들이 성경 속 인물들이기에 더더욱 그랬다. 근데 이 책은 뭐랄까… 어릴적 리처드 바크의 을 읽을 때와 같았다고날까? 뻔한 얘기에 대한 일종의 배신감 마저 들기 시작했다.이 책은 내가 알고 있는 내용 이상의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반쯤 읽은 내 생각이었다. 그리고 지난 목요일, 디사이플스 집회에 갔다.천관웅 목사님은 팔복에 대해 설교하시면서 세상의 관점과 하나님의 관점이 다른 것에 대해 얘기했고 하나님의 관점에 복된 사람들이 되어 헌신하기에 대한 결의를 다지도록 격려하셨다. 그 설교를 듣는 가운데 하나님은 왜 세상의 관점에서 이해하기 힘든 상황 가운데서 가장 가까이 나를 만나셨는지를 깨닫게 하시고 주님의 ‘일’로 헌신하고자 하는 나 자신을 뒤돌아 보게 하셨다. 그런데 놀랍게도 뒤돌아 본 나의 모습은 ‘사울’의 모습이었다.나는 애통해 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다윗과 같은 사람으로 해 달라고 부르짖을 수밖에 없었다. 스-읍. 한 6년 전 쯤. ‘거룩한 욕망’에 대해 생각했던 적이 있다. 소명이라 말하고 주님의 일을 한다 하지만 사실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는 사람들. 그렇게 되지 말자고 생각했다. 근데 그게 힘든 일이었다. 인간은 누구나 꿈과 야망이 있기 때문이다.달란트라는 것. 주님 안에 비전이라는 것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본다. 나의 달란트는 무엇인가? 나의 비전은 무엇인가? 그게 그저 내가 잘하는, 혹은 좀 좋아하는걸 나의 달란트라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혹은 내가 이루고 싶은 일을 주님 안에 비전이라 착각 하고 있는 건 아닐까? 를 다 읽은 지금 생각해 보면 책이 말하는 다윗이란 사람은 아무런 꿈도 주관도 없는 사람이다. 인간적인 관점(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정말이지 바보 같은 사람이다. 그래 바보, 바보다 다윗은.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된 것은 ‘깨어진 사람’이 되었을 때였다. 그렇다면 다윗에게도 ‘깨어지는’ 과정이 있었다는 말인데 그 말은 다윗이 처음부터 바보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다윗은 사울 왕이 자신을 죽이려 할 때도, 압살롬이 반역을 꿰 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 때도 그들에게 직접적으로 반응하지 않았다. 다윗은 하나님의 관점으로 생각하려고 애썼다. 다윗은 왜 그랬을까? 왜 합리적으로 반응하지 않았을까? 그것은 왕권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목숨이 걸린 일이기도 했다.그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철저하게 하나님을 인정했기 때문이리라. 자기가 어디로부터 온지를 알았던 거다. 또 자신의 일(왕직)이 어디로부터 온지 안거다. 난 그런 생각도 해봤다. 다윗은 왕직을 너무 자기 개인에게 종속시키고 있지 않은가? 다윗은 백성들을 생각해서라도 사울과 압살롬에게 대항해야 하지 않았을까?
내게 포기하는 삶에 대해 가르쳐 가시던 주님은 결국, 이 책을 읽게 하셨다.네 신을 벗으라… 이 책은 내 신앙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뒤바꾼 책이다. 그것은 내게 가히 코페르니쿠스적 전환과도 같이 다가왔다. 그것은 내 의지가 아니요 요청도 아닌 불가항력적인 하나의 거대한 사건이었다. 첫 장에서 로렌 커닝햄은 이미 장래가 보장되는 교단의 목사직을 포기하고 앞으로 시작할 사역에 대한 막연한 희망만을 안은 채 캘리포니아에 있는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멕시코 국경에서 불과 수 킬로미터 떨어진 사막의 작은 도로에서 아내와 함께 자동차 전복 사고를 당하고 만다. 그가 당한 사고에 대한 묘사는 너무도 생생했고 나는 그 현장 곁에 서서 멍하니 그들의 사고 모습을 지켜 보고 있었다.로렌은 아내의 머리 뒤쪽으로 깊이 패인 상처를 발견했다. 그가 조심스레 그녀를 바로 눕혀 보니 이미 호흡은 멎어 있었고 눈은 동공이 확장된 채로 고정되어 있었다. ‘아, 이미 죽었구나!’ 그 순간 커닝햄은 모든 것을 잃었다. 그의 눈 앞에 보이는 것은 거친 사막의 정경과 널려있는 사고의 흔적들뿐이었다. 살아 있는 생명체라곤 아무것도 없는 그곳에서 그는 서있었다. 그 옆에 나도 있었다. 주위는 적막했고 지구의 자전 소리라도 들릴 것 같았다. 바로 그때 저 옛적 에덴에서나 들리던 거대한 소리가 로렌을 불렀다.“로렌!”나는 정말 깜짝 놀랐다. 그것은 하나님의 음성이었다. 로렌은 그것을 금방 깨닫고 응답했다.“네, 주님!”그리고 나는 로렌의 고백을 보았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취해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고 여전히 주님의 주님 되심을 고백했다. 이후에 하나님은 로렌의 아내를 돌려 주셨고 로렌으로 하여금 의 다음 장을 써 나갈 수 있게 하셨다. 로렌이 겪은 이 일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며 겪은 일에 비견 되는 것이고 또… 암튼 그런 일이었다. 그 사건 가운데 있던 나는 로렌을 부르던 주님의 음성을 분명히 들었다.나는 주님이 로렌으로 하여금 벌써 50년 가까운 세월 전에 이 사건을 겪게 하시고 YWAM 사역을 시작하고 또 이 책을 쓰게 하심으로 나를 부르고 계심을 로렌과 함께 그 사막의 도로 한복판에서 확인한 셈이다. 그렇다. 일은 그렇게 된 거다. 나는 수개월 동안 내게 왜 알 수 없는 일련의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나는 내 의지로 계획하고 꿈꾸던 모든 일을 박탈 당해야만 했고 원치 않던 곳에서 원치 않던 사람들을 알게 되고 그들을 사랑하고 섬길 수 밖에 없는 상황 가운데 놓이게 된 것이다. 그것은 주님의 계획하심 가운데 치밀하고도 주도면밀 하게 진행된 일이었다.주님~ 이렇게 나 한 사람을 위해 성경의 그 수많은 인물들과 초대교회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순교자들을 부르시고 결국 로렌과 그의 YWAM사역을 통해 당신의 부르심과 그 원리를 내게 알게 하시니 당신의 계획하심과 주도면밀 하심에 감사와 찬양의 박수를 아니 올려 드릴 수 없습니다. 헥헥…-.-;;나는 로렌이 이 사건 이후로 겪은 일들 가운데 동일하게 적용되는 주님이 일하시는 그 원리 가운데로 침잠해 들어갔다. 그것은 처음의 충격과 달리 매우 고요하고 잠잠하였다.이 책의 원제는 ‘making Jesus Lord’이다. Jesus는 예수를 말하고 Lord의 사전적 의미는 주지하다시피 주(主)를 말한다. making은 ‘만들기’이다. 그렇담 ‘making Jesus Lord’의 분명한 의미는 ‘예수를 주로 만들기’ 다시 말해 ‘주 예수 만들기’일 것이다. Right? 음…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생각나는 건 왜일까?... 그럼 로렌 커닝햄은 왜 이 책의 제목을 이렇게 정했을까? 예수는 원래 주가 아니었던가? 처음엔 주가 아닌데 점점 주로 만들어 가는 방법이 있기 때문에 그런 걸까? 그리고 이 책이 염두에 두고 있는 독자는 Christian 인가 non-Christian 인가? 물론 둘 다 일 수도 있다. 하지만 독자가 Christian 인가 non-Christian 인가에 따라 이 책의 제목의 의도는 크게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만일 Christian만을 위한 글이라면 ‘니들이 예수를 주라고 부르고 있지만 예수를 주되게 하는 법은 따로 있다’는 논지의 각성의 글이 되고 Non-Christian만을 위한 글이라면 ‘니들이 세상에 무엇을 섬기고 사는지 몰라도 예수를 주되게 하여 살면 이렇다’라는 기독교 입문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좀 머리 복잡해 지는 소리가 됐지만… 내가 읽어보니 이 책은 신자와 비신자 모두를 위한 글이다. 이미 신자인 내게 주를 주되게 하는 원리를 깨닫게 했기 때문이고 주를 주되게 하는 이 원리는 말씀에 근거하기에 보편적 진리로 받아들일 수 있겠기 때문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그것은 ‘내려놓음’에 대한 것이다.만주의 주되신 그이는 진정한 주시기에 나의 모든 것을 소유하기 원하신다. 내가 사랑하는 이들과 재물, 내 자신, 그리고 명예와 나의 사소한 감정들 마저도 주님은 소유하기 원하신다. 그것은 그가 엄청난 욕심쟁이이기 때문이 아니고 그것이 본래 그의 것이고, 아니 그것을 소유하고 있는 나 자체를 지으셨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창세기 1장으로 소급 되는 것이다.
플라톤의 대화편 제4권에는 소크라테스와 글라우콘의 대화 중 아글라이온의 아들 레온티오스의 예화가 언급되어 있다. 그는 어느 날 길을 걷던 중에 사형 집행자 옆에 시체들이 누워 있는 것을 목격하고서는, 한편으로는 보고 싶었지만, 꺼림직한 생각도 들어 외면하려 했다. 그렇게 갈등하던 끝에 보고 싶은 욕구에 압도당하자, 두 눈을 부릅뜨고 시체들 쪽으로 내닫더니, ‘그래, 똑똑히 보아라, 너희들 고약한 것들아! 저 좋은 구경거리를 실컷 맛보란 말이다!’ 라며 분노했다. 이처럼 인간은 이성에 의해 행동하지 못하고 욕구에 지배 당하게 될 때 당혹스러움과 함께 자신에 대한 분노에 휩싸이게 되기도 한다.지난 5월18일, 영화 가 개봉되었다. 그것은 예수의 신성과 인성을 왜곡시킨 반(反) 복음적인 내용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것이다. 이 소설은 이미 베스트셀러가 되어 기독교신자와 비신자들을 미혹되게 하며 크고 작은 이슈로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고 이제는 헐리웃 자본이 투입되어 올해 칸 영화제의 개막작으로 선정된 것을 시작으로 전세계에 동시 개봉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종교계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개신교단 중 하나가 세계최초로 법원에 상영불가 가처분 신청을 내면서 대중의 관심은 증폭 되었다.이러한 상황에서 영화를 사랑하는 기독교신자는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가? 이 영화를 봐야 하나? 아니면 보지 말아야 하나? 하하^^;;영화 는 영화적 재미와 완성도에 있어 수준 이하의 평가에도 불과하고 개봉초기인 현재, 연일 예매기록에 호조를 보이며 관람석을 메우고 있다. 이는 역설적으로 이 영화의 흥행은 영화자체에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관객의 관심은 ‘대체 무슨 내용이길래 이 난리들이냐’ 혹은 ‘종교적 금기를 소재로 불러일으킨 사회적 파장과 상상력을 헐리웃이 얼만큼 재현했을까’라는 등의 호기심들일 게다. 호기심은 욕구의 일종이다. 헐리웃 자본을 통해 제작된 영화 는 레온티오스가 시체들을 보고 싶어했던 것과 같은 호기심에서 탄생했고 결국 레온티오스가 자신의 눈에게 ‘볼 테면 보라!’며 호통하였던 분노와 같이 극대화 된 호기심이 되어 전세계 관객을 극장 좌석에 앉혀 놓고 있다.필자는 애초에 이 영화에 대한 리뷰가 아닌 영화 개봉을 둘러싼 사회적 현상만을 소고 형식으로 작성해 볼 요량이었다. 그러나 필자 역시 보고자 하는 욕망과의 작은 싸움을 피할 수 없었고 결국 영화를 보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볼 테면 보라’는 식으로 보고자 하는 욕망을 꾸짖게 된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보고자 하는 마음을 억압하려는 가학적인 나의 신앙관과 담합한 이성을 꾸짖게 된 결과이었다. 참고로 이런 나의 의도는, 성서와 교리로 명증된 진리를 자의적으로 판단한 경향과 거리가 멀고 오히려 비진리들로 점철된 거짓진리를 확인하려는 의도에서 행해진 것이지 자유주의적인 신앙관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은 경향으로 가톨릭교계 전반과 미국의 일부 개신교회들은 신자들에게 영화관람을 불가 하는 것이 비진리와 거짓진리를 부추기는 역효과라 하여 도리어 비신자들을 초대하여 ‘다빈치 코드’ 토론회를 개최하는 등 선교의 기회로 삼고 있다고도 한다. 이처럼 영화 를 ‘보느냐 안 보느냐’의 문제는 필자가 이 글에서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에 있어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소설 가 쓰여지고 영화로 만들어지기까지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현상들이다.지난 4월 6일, 부활절을 앞두고 미국 워싱턴 ‘내셔널 지오 그래피’는 이집트 사막에서 발견되었다는 를 전격 공개하였다. 총 26쪽 분량의 는 1,700여년 전인 서기 300년경 당시 이집트어인 콥트어를 파피루스에 쓴 것으로, 영지주의(靈知主義ㆍGnosticism)의 한 분파인 ‘카인파(Caintes)’가 만든 것으로 알려졌다. 이 복음서는 원래 그리스어로 쓰여졌다가 콥트어로 번역된 사본이라고 한다. 는 서기 180년경 프랑스 리옹의 교부(敎父)인 이레니우스가 이라는 책을 통해 통렬하게 비판함으로써 그 존재가 처음으로 알려졌었다. 이와 같은 영지주의자들의 ‘복음서’는 기독교계가 ‘정경(正經)’으로 인정하고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는 성경(聖經) 66권 이외로 존재하는 ‘외경(外徑)’도 아닌 ‘위경(僞經)’으로 분류된다.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참 인간으로 오신 예수의 신성과 인성을 왜곡 시키는 그들의 교리와 사상을 기독교계가 이단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영지주의자들의 복음서에는 , , 등이 있다. 이를 발견된 지명을 따 ‘나그 함마디’ 문서라 한다. 영화 의 원작 소설은 바로 이 문서들을 바탕으로 창작된 허구이다. 아니 그것은 소설과 영화의 형식으로 포장된 영지주의 사상과 교리의 부활일 것이다. 이러한 이단의 영들은 주지하다시피 초대교회 사도들의 시대 때부터 출몰하여 신자들을 미혹하였다. 사도들과 초대 교부들은 이들을 엄하게 경계하였고 이를 초석으로 기독교는 이단 사상들과 교리들을 원천적으로 불가 함으로서 순결한 복음과 신자들을 지난 2천년 동안 지켜왔다.그렇다면 오늘날 문화의 영역으로 그 옷을 갈아입고 다시 출몰하기 시작한 이단의 영들, 즉 와 같은 류의 것들에 대처하는 방법은 무엇이겠는가? 구습을 좇아 무조건 금기로 하고 배척하여야 하는가? 그것이 답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러한 강경책을 통해 신자의 순결이 지금까지 보존 되어진 것과 복음의 순정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역사를 말하려는 것이다. 우리는 이단의 영과 싸워온 지난 2천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 역사를 통해 진리는 진리로 더욱 명확해 졌고 거짓진리의 비진리성 역시 더욱 명확해 졌다. 하지만 그 과정의 강경함에 길들여진 진리의 신자들은 진리를 진리로 변증할 줄 모르고 거짓진리의 비진리 된 요소를 분별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러한 비진리로 미혹되게 하는 거짓진리의 영들 즉 그리스도의 적대적 무리들은 초세기부터 이제껏 수세기에 걸쳐 지속적으로 출몰해 왔다. 그러나 최근 문화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이와 같은 류의 집중적 공략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 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유다복음의 발견과 발표 그리고 소설 의 발간과 영화 의 개봉은 모두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같은 영으로 묶여 있다. 소설 와 영화 , 통칭 는 창작된 허구 임에도 불구하고 ‘나그 함마디’와 같은 왜곡된 역사서를 끌어다 근간으로 함으로서 마치 감춰진 것이 있고 그것에 어떤 진리가 있는 듯 보이게 하여 독자들의 지적 호기심을 충동질 하였다. 이러한 충동질이 영화화 되기까지 증폭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진리를 가장한 비진리였다는 것에 있다. 사람은 진리를 추구한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신 일은 진리이다. 때문에 가 이처럼 이슈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뤼미에르 형제와 영화의 발명영화(映畵/movie/cinema/kinema)는 연속 촬영한 필름을 연속으로 영사막에 비추어, 물건의 모습이나 움직임을 실제와 같이 재현해 보이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주지하다시피 사진술의 발달을 토대로 시작되었는데 1초에 24개의 정지된 화상(畵像:frame)을 연속적으로 돌려 그 잔상(殘像) 현상을 이용하여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한 것이다. 지금 우리가 보는 영화의 형태는 1895년 프랑스의 L.뤼미에르 형제가 시네마토그래프라는 촬영기와 영사기를 발명하면서부터가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뤼미에르 형제의 시네마토그래프는 매우 기동성이 뛰어났다. 그들이 행한 업적은 스튜디오 안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던 카메라를 세상 밖으로 끌고 나온 것이다. 이들의 이동식 카메라는 거리를 다니면서 무엇이든 흥미있는 소재면 영화로 만들 수 있었다. 뤼미에르의 작품 속에는 사람, 동물, 차들이 카메라 앞을 자주 지나다닌다. 비록 예술로서의 성찰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뤼미에르 형제가 보여준 영상세계는 영화와 현실과의 간극을 극명하게 표현해주는 수단이었다. 또한 영화의 쇼트, 화면의 사이즈와 같은 기본적인 개념들이 이들로부터 증명되어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1895년 12월 28일 파리의 '그랑 카페'에서 최초로 스크린 투사 방식으로 공개 영화 시사회를 가졌는데, 작품은 , 등이었다. 이 두 작품은 극영화는 아니고 단순한 기록영화의 형태로 찍힌 것인데 공장의 작업장 앞에서 나오는 작업자들과 기차역의 플랫폼에서 도착하는 열차와 열차에서 내리고 타는 승객들을 찍은 영상물이었다. 이것은 단순한 영상물이었지만 프레임 안에서 움직이는 사물을 구경하기 위해 수많은 관객들이 몰렸다고 한다. 물론 유료관객이었고 상업영화의 위대한(?) 탄생이기도 하다. 이러한 업적에 힘입어 1897년 죠르쥬 멜리에스는 몽트뢰이에 촬영소를 차리고, 표현주의 영화의 효시라 할 수 있는 (1902)이란 공상 영화를 만들어 흥행에 큰 성공을 거두었다.이렇게 시작된 영화는 불과 100여년의 과정 가운데 거대 산업화를 이룩하였고 예술의 영역으로까지 승화되었다. 그것은 영화가 가지고 있는 시청각적 속성과 그것을 응용하여 창조적 활동을 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앞서 말한바와 같은 과정을 통해 만들어 지는 일종의 ‘트릭’이다. 그것은 분절된 화상과 소리를 기계적 장치를 통해 연속된 정보로 만들어 우리에게 환상을 심어준다. (정지된 그림과 소리가 움직이고 흐르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받아들여진 시청각적 정보를 통해 우리는 무한한 꿈의 세계로 여행을 하고 사유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영화라는 매체의 시작은 촬영기와 영사기라는 기계적 발명을 통해 이루어졌지만 영화가 만들어내는 꿈의 세계로의 여행은 우리의 공상과 사유로부터 시작되었다. 그것은 호머 사피엔스(Homo sapiens ‘지혜 있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동물 분류학상 ‘현생 인류’를 가리키는 말. 지성인)로 명명되는 인간이 호머 파베르(Homo faber ‘공작인(工作人)’의 뜻으로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는 인간의 특질을 이르는 말)로서 역사를 일구어간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한다.■영화의 속성영화를 촬영하는 촬영기 즉 카메라는 우리의 공상과 사유를 표현하는 기재이다. 촬영자에 의해 구성된 프레임은 곧 촬영자의 시각이고 촬영자의 시각은 그의 의도이다. 나는 눈앞에 서있는 나무를 프레임 안에 담을 때 밑 둥만을 담을 것인지 줄기만을 담을 것인지 아니면 가지와 잎만을 또는 나무 전체를 담을 것인지 선택하게 된다. 그 선택은 내가 찍은 영상-나무를 ‘보이기’ 위한 의도사항이다. 그렇게 의도된 하나의 프레임은 촬영자의 취향을 반영하고 그러한 일련의 프레임들은 촬영자가 표현하고자 하는 하나의 이야기를 구성할 수 있게 한다. 그것은 시청각적 정보를 지닌 하나의 영상물이 되는데 필기구를 통해 활자화된 정보물 즉 책을 통해 얻어지는 상상은 독자의 시청각적 배경지식을 토대로 이루어지는 반면 영화는 이미 촬영기와 영사기라는 기재를 통해 투사된 결과물을 통해 관람자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그것을 토대로 무한한 상상을 도출해 낸다. 이것은 영화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속성이며 이를 통해 영화는 상업성과 예술성이라는 이중성을 갖게 된다고 생각한다. 영화가 지니는 특질은 감각적으로 충분히 자극적이며 그 표현방식은 충분히 창조적인 형태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영화와 현대사회 그리고 종교의 기능현대사회를 흔히 멀티미디어(음성·문자·그림·동영상 등이 혼합된 다양한 매체)세계라고 한다. 우리는 인류의 축적된 모든 정보를 손으로 그리고 쓰는 시대를 지나 이제 2진법의 체계 안에서 눈으로 보고 습득한다. (혹은 그러한 체계를 통해 제작된 결과물을 다양한 매체를 통해 시청각적으로 습득한다.) 나는 이러한 패러다임의 변화의 단초는 영화의 발명에 있다고 말하고 싶다. 영화는 내가 속한 시공간적 시점을 넘어서 존재하는 사물의 움직임을 관망할 수 있게 하였다. (이는 관조적 인간을 위한 산물임에 틀림없다.) 영화는 현재의 모습을 기록하고 현실을 모방한 모습을 그려내며 현상계를 넘어선 세계를 창조해 낸다. ‘본다’는 것은 인간이 가진 원초적 욕망의 발로이다. 맛보지 못한 실과의 맛을 보고 싶어 했던 한 사람의 꿈으로부터 우리는 휴머니즘을 물려받았고 (신본주의를 떠난 파토스적인 측면에서 볼 때) 눈에 보이는 사물의 심연과 하늘위의 세상을 보고자하는 탐구정신은 과학을 발달시켰으며 감각되는 물질세계의 본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종교화되었다.
■우리 시대 가장 큰 트랜드는 무엇인가? 웰빙, 다원주의, 포스트모던, 무정부, 인터넷, 정보통신… 등등. 이런 것들이 21세기 새로운 패러다임을 형성해 가고 있다. 지난 세기까지 횡횡하던 이념과 이념의 대립, 종교와 종교분쟁들은 이제 모두 화해와 연합의 무드로 헌신짝처럼 여겨지고 있다. 바야흐로 신휴머니즘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온고溫故…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과거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나를 존재하게 하기 때문이다. 인류는 왜 종교간의 분쟁과 이념의 대립으로 싸우고 서로를 죽였을까. 인종차별과 민족주의, 영토권을 둘러싼 전쟁 또 전쟁… 그 이면을 살펴보면 결국 ‘생존’에 관한 문제이다. 나 살자고 남 죽이는 거다. 내가 살아야겠으니 나와 비슷한 놈과 편 먹고 나와 다른 저 놈을 죽여야 하는 거다.십자군전쟁 이후 유대민족의 디아스포라와 이천년을 변방에서 표류하던 유대민족의 시오니즘 의지와 미국의 원조로 시작된 팔레스타인과의 중동지역 전쟁, 이로 인해 발생한 팔레스타인의 인티파다 그리고 영겁의 세월과 같이 반복되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유혈분쟁. 이뿐이랴 백인, 유색인종간의 뿌리깊은 차별과 학살극, 과거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진영과 구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진영의 냉전체제, 민족상잔의 비극으로 회자되는 한민족의 전쟁과 한반도 분단…… 말로 다할 수 없는 허울좋은 명목의 전쟁과 분열들이 기실, 나 살기 위한 생존의 피부림이었다.이 정도만 ‘온고’하자. 기원전으로까지 소급해 보면 우리네 인생 더 치졸해 진다. 이러한 과거사를 거친 21세기 신인류들(?)은 글로벌 세대이자 코스모폴리탄이고 평화의 수호자들이다. 모든 것은 좋은 게 좋은 것이고, 진리가 어딨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지, 싸우긴 또 왜 싸워. 피곤해 죽겠는데. 길어봤자 7, 80 인생, 생명 연장의 꿈! 게놈 프로젝트 시작하고 인륜이고 도덕이고 나발이고 논문에 써갈 긴 영어가 거짓부렁이든 말든 줄기세포 줄기차게 연구해서 너도 나도 오래오래 벽에다 뭐 칠하며 잘살아보세이다. 어쩔 수 없다. 인간이란. 들춰내면 들춰낼수록 그 냄새를 맡아 줄 수가 없다. 그래도 아직 희망을 가져보자.여기 또 한 사람의 ‘온고이지시너er’가 있으니, 할리우드의 거장이라 일컫는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가 그이다. 이이는 주지하다시피 미국 사회를 주도하는 2% 가운데 80%가 유대인이라는 그 유대인 혈통을 갖고 있는 이이다. 그는 70년대 의 대박을 시작으로 82년 로 자리매김 하더니, 스펙타클 영화의 대명사가 되어 과거 , 와 같은 모험 영화에서부터, , , , 과 같은 전쟁, 공상과학영화까지 그 스펙타클 함에 관한 한 일가견을 인정 받은 이이다.이는 사실 그의 대표작만을 손꼽은 것이고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주목할 것은 , , 과 같은 인종과 이념에 관한 고찰 흔적들이다. 물보다 진한 게 피라고 앞서 말한 것처럼 스티븐 스필버그는 유대인의 혈통을 지닌 사람이다. 디아스포라 이후 각지로 흩어졌던 유대인종이 이천년의 세월이 지난 후에 시오니즘으로 무장하여 팔레스타인 내에 이스라엘을 재건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민족성에 대한 끈질긴 집념 때문이었다.그러한 민족정신이 스티븐 스필버그에게도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미국을 주도하는 유대인종이자 할리우드를 주도하는 스필버그 감독에게는 뿌리깊은 ‘온고이지시너’로서의 기질이 있었다. 디스토피아적 21세기를 그리던 지난 세기 할리우드의 예상과는 달리 현실로 다가온 미래는 풍요롭고 화려하기 그지 없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우리의 ‘온고이지시너’ 스필버그 감독의 최신작 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까.■…이지신而知新은 조지 조너스의 (Vengeance)를 원작으로, 1972년 뮌헨올림픽에서 발생했던 이스라엘 선수단 테러 사건을 이 사건의 주범인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들을 수년에 걸쳐 추적, 암살한 이스라엘 비밀경찰, 모하드 단원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춰 구성한 것이다. 이 암살단의 리더는 이스라엘 정보장교 애브너(에릭 바나)이고, 이들을 조정하는 정부요원은 전 모사드 대원 에브라임(제프리 러시)이다. 이들은 처음엔 민족을 위해, 혹은 정의로운 복수를 위해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들을 암살해 갔지만 살인을 거듭해 갈수록 대의명분을 잃어가고 인간적인 회의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존재로부터 자신들 조차 암살의 위협을 받기 시작한다.이정도의 시놉시스라면 기존의 할리우드 생리상 장대한 스펙타클, 모험과 스릴, 그리고 눈물 쪽 뺄 휴머니즘을 가미하여 재미난 영화 하나 만들어 볼 만한 소스로 충분하다. 그러나… 이는 픽션이 아닌 논픽션. 실화에 바탕을 둔 시나리오였다는 것이다. 더구나 메가폰을 잡은 감독은 유대인 아닌가? 이것을 온 세상 사람들이, 온 유대인들이 알기에 스필버그 감독이 을 만든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논쟁이 끊이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겠느냐는 거다.그러나 뚜껑을 열어보니 그 내용은 모든 논쟁을 불식시키는, 복수는 복수를 낳을 뿐이라는 양비론적인 입장이었으며 스필버그 특유의 ‘가족애’라는 연막이 짙게 깔려 있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월드 트레이드 센터(쌍둥이빌딩)가 멀리 보이는 뉴욕의 어느 공원에 마주 선 애브너와 에브라임의 대화로 종결된다. 에브라임은 “집으로, 조국으로 돌아오게”라고 권하지만 임무에 회의를 느낀 애브너는 거절한다. 그리고 “이제 저녁 시간입니다. 저희 집으로 오세요. 유대교에서 가르치는 대로 저녁 식사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라고 응수한다. 에브라임은 그 제안을 거절하고 뒤 돌아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