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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사 교과서 (중세사부분)
    * 주제4 - 일본의 개항과 근대화: 일본이 개항 이후 근대국가로 급성장하게 된 배경을 이해하고, 제국주의의 길로 나아가게된 원인과 과정을 설명한다.* 미국의 강요로 개항한 일본생각열기 - 일본은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근대적 개혁에 성공하여 제국주의 국가 대열에 끼일 수 있었다. 일본이 유독 성공적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일본은 200여 년 간 쇄국 정책을 펴다가 미국인 페리의 강요로 개국( 1854 )한데 이어, 미·일 수호 통상 조약을 맺고(1858) 완전히 개항하였다. 이 조약은 관세 자주권을 포기하고 미국에게 치외 법권을 인정한 일본 최초의 불평등 조약이었다. 일본은 그 후 다른 유럽 국가들과도 비슷한 내용의 조약들을 맺었다.개국 후, 일본에서는 굴욕적인 외교를 한 막부에 대한 비판이 거세어지면서막부 체제가 불신받기 시작하였다. 또한, 외국 상품의 수입으로 국내 경제가 타격을 받게 되자, 생활이 어려워진 하급 무사를 중심으로 외세 배격(양이) 운동이일어났다. 1868년에는 사쓰마와 조슈 번이 주도하여 국왕 중심의 새로운 정권을 세웠다(왕정 복고).새로 들어선 메이지 정부는 대대적인 개혁을 추진하였다(메이지 유신). 우선,봉건제를 폐지하고 중앙 집권적인 입헌 군주제를 추진하였다. 또, 신분제를 폐지하고 토지와 조세 제도를 개혁하였으며, 신식 교육 제도를 실시하고 유학생과사절단을 미국과 유럽 등지에 파견하였다. 아울러 징병제를 실시하여 근대적인군대를 조직하였다.메이지 정부는 서양의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고 상공업을 장려하는 등 근대 산업의 육성에도 진력하였다. 그 결과, 광범위한 산업 혁명이 진행되어 19세기 말에는 자본주의의 성숙 단계에 진입하였다.*미·일 화친 조약일본이 개국을 하게 되는조약으로 1854년 3월 가나가와에서 조인. 주요 내용은 시모다·하코다테의개항과 여행권, 미국 선박에 대한 식량·연료·식수공급, 외교관의 시모다 주재, 최혜국 대우의 승인등이다*일본의 개국. 일본은 미국인페리의 강압에 못 이겨미·일 화친 조약을 맺고개국하였다.* 활동5일본정부가단행한근대적개혁을열거해보자.과제2 자료를통하여메이지유신이후일본사회의분위기를짐작해보자.* 제국주의 따라하기- 생각열기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이 제국주의로 돌아서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그리고 오늘날의 일본인들은 과거의 침략 행위에 대하여 어떻게 인식하고 있을까?본문아시아 각국이 식민지나 반식민지 상태로 몰락할 때, 일본만은 중앙 집권적 입헌 군주제를 기초로 하여 근대 국가로 성장하였다. 이것이 일본을 제국주의의 길로 들어서게 하였다.메이지 정부의 개혁은 성과도 많았다. 그러나 농민 측에서 보면 소수의 재벌만 육성될뿐이었다. 새로운 조세 제도와 징병 제도, 의무 교육 등은 오히려 농민의 부담을 가중시켰으므로 각지에서 농민 폭동이 일어났다. 또한, 무사들도 새로운 정부가 등장하여 실권을 잃게 되자 반란을 일으켰다.이러한 국내의 불만을 무마하고 대륙 진출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하여 조선을 정벌하자는 주장(정한론)이 메이지 정부 안에서 일어났다. 정한론은 내정의개혁이 더 급하다고 주장하는 세력이 권력을 잡음으로써 실행되지 못하였지만, 그들 역시 조선 정벌의 필요성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았다.이듬해부터 일본의 침략이 본격화되었다. 일본은 타이완을 침략하고 류큐를합병하였으며, 강화도 조약을 강요하여 조선을 개항시킨 후에 일본인의 치외법권과 관세 철폐 등을 허락받았다. 이어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후 맺은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중국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였고,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여 만주의 영토적·경제적 이권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조선의 주권마저 빼앗아 대륙 침략의 기지로 삼았다.* 시모노 세키조약 - 일본은 조선에 대한 청의불간섭을 확인받고, 랴오둥반도와 펑후 섬, 타이완 등을 할양받았다. 또한, 당시일본 예산의 두 배가 넘는막대한 배상금을 받아서산업 혁명을 위한 자금으로 이용하였다.* 일본의 침략 논리 - 대동아공영권- 일본의 일부 정치가와 학자들은 최근에도 과거 일본의 아시아 침략과 식민지 지배를 미화하는 발언을 공개적으로 하고 있다.“일본이 조선을는 식의 억지를 부리고 있다. 이러한 ‘대동아 공영론’의 뿌리는 어디에 있을까?“아시아 전체를 하나의 축으로 하여 주의(主義)로 내세워야 할 것이다. ‘주의’로 하기 위해서는 오직 탈아(脫亞)라는 두 글자가 있을 뿐이다. 서양과 진퇴를 같이 하여 중국,조선을 접수해야한다.”(후쿠자와 유키치)후쿠자와 유키치는 19세기 말에 일본의 문명 개화를 이끌던 대표적인 계몽사상가였다. 그의 문명 개화론은 김옥균 유길준 등 조선의 개화파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그러나 그는 탈아론을 통하여 문명 개화론의 침략주의적 성격을 스스로 드러냈다. 탈아론은 일본의 군국주의적 침략에 이론적 발판을 제공하였으며, 1945년 패전 이후에는 일본지배층의 사상적 재무장에 지침 역할을 하고있다.* 주제 5 - 인동의 민족 운동과 근대적 성장; 인도의 식민지화 과정을 파악하고 인도에서 진행된 근대화 운동의 성격과 그 운동의 한계점을 분석한다.* 민간회사를 앞세운 영국의 인도침략- 생각열기 : 인도는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벌어진 식민지 쟁탈전의 최종승부처였다. 두 나라는 동인도 회사라는 명목상의 민간 회사를 통하여 인도의 식민지화를 꾀하였다. 최종승자는 누구였을까?*본문무굴 제국은 말기에 힌두·이슬람 교의 분쟁이 심해지고 지방 세력이 자립함으로써 이름만 남아 있는 상태였다. 이때 서양 세력이 인도에 침입하였다. 특히,영국은 동인도 회사를 앞세워 인도 경영에 주력하였고 플라시 전투에서 프랑스를 물리쳐 인도 지배의 우위를 다졌다.그 후, 영국은 각지의 제후국을 보호하고 힌두·이슬람 교 간의 종교적 대립을 조장함으로써 인도 사회의 분열을 부추겼다. 그리고 그 틈을 타 남인도의 마이소르 왕조를병합하고마라타 동맹과 시크 교도를 격파하여 인도 전역에 세력을 확대하여 갔다.영국은 인도인들에게서 세금을 많이 거두어들였고 면화와 아편을 강제로 재배시켰으며 영국산의 값싼 직물을 팔았다. 이 때문에 인도는 영국의 원료 공급지와 상품 시장으로 전락하고 말았다.영국의 경제적 착취에 대한 인도인의 불만은 세포이의 항쟁으로에 대한 인도의 저항- 영국의 인도 침략과정과 인도인들의 저항운동을 살펴보자.과제1. 세포이의 항쟁에 인도인들이 대거 참여한 이유를 추론해 보자.* 분열정책에 분노한 인도인들생각열기 : 영국의 인도 식민 통치방식은 어떠하였고, 이에 대한 인도인의 저항은 어떠했을까?*본문영국은 인도를 직접 통치하게 되자, 인도의 사회적·종교적인 분열과 복잡한민족 구성을 교묘하게 이용하면서 경제적인 착취를 더욱 강화하였다. 그러한 가운데 19세기 후반부터는 서양의 근대 교육을 받은 지식인이 많아지고, 면직 공업을 중심으로 민족 자본가도 성장하였다. 그리하여 인도의 지식인들은 반영 독립 운동과 근대화 운동을 함께 추진하였다.영국은 이러한 지식인 중심의 민족 운동을 저지하기 위하여 인도 국민 회의를성립시켰다. 국민 회의는 처음에 영국측에 협조하면서 인도인의 권익을 확보하려 하였으나, 영국이 내린 벵골 분할령을 계기로 반영 운동의 중심 세력으로 변화하였다.국민 회의파는 인도인의 스와라지(자치), 영국 상품의 배척, 스와데시(국산품애용), 국민 교육 등의 4대 강령을 중심으로 민족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운동에는 대다수의 국민들이 참여하였고, 이슬람 교도도 합세하여 전국적인 민족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이에 영국은 벵골 분할령을 취소하고 명목상 인도인의 자치권을 인정하는 등 회유책을 모색하였다.*벵골 분할령이슬람 교도를 중심으로반영 운동을 벌이던 동벵골 지방을 힌두 교도 중심의 서벵골과 분리시키려던계획* 민족 의식에 눈뜨는 동남 아시아인들생각열기 : 열강의 식민지로 분할된 동남 아시아 이지역의 종교적, 문화적 전통은 각국의 민족운동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본문유럽 열강은 동남 아시아에서 경쟁적으로 식민지를 확대하였다. 그리하여 19세기 후반에 이르면 시암(현재의 타이)을 제외한 동남 아시아의 모든 지역이 열강의 식민지가 되었다.1802년에 수립된 응우옌 왕조는 선교사를 박해하고 크리스트 교 포교를 금지시켰다. 중국 진출의 기지를 찾고 있던 프랑스는 이를 구실로 함대를 파견하여사이공(현재심으로 광범위한 반프랑스 투쟁이 일어났다. 이를 근왕 운동이라고한다. 다음 세대의 민족 지도자 판 보이 쩌우는 베트남 유신회를 조직하고 청년들을 일본에 유학시켰으며(동유 운동), 하노이에는 통킹 의숙을 세워(1907) 문맹퇴치 운동과 새로운 사상을 보급하는 데 힘썼다. 중국에서 신해혁명이 성공하자, 판 보이 쩌우는 이에 자극되어 광둥에서 베트남 광복회를 조직하고 국내에조직을 확장하였다.*본문한편, 인도를 장악한 영국은 동으로 진출하여 꼰바웅 왕조를 멸망시키고 미얀마를 식민지화하였다. 이에 미얀마에서는 불교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반영 운동이 전개되었고, 탕군 대학이 설립된 후에는 지식인들도 이 운동에 참여하였다.영국은 또 1819년에 싱가포르 대학을 건설하고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말레이 반도의 여러 이슬람 국가와 싱가포르를 합쳐 말레이 연방을 성립시켰다.시암은 동남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식민화를 면하였으며 1782년에 수립된 차크리 왕조가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시암이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몽쿳, 출라롱콘 등 역대 왕들의 적극적인 제도개혁과 외교적인 노력 때문이었다.이들은 시암이 서쪽에서 동진하던 영국과 동쪽에서 서진하던 프랑스의 완충지대라는 지리적 이점을 충분히 활용하면서, 영토 할양이나 불평등 조약의 감수와 같은 과감한 외교정책을 펼쳤다.필리핀은 16세기 말에 에스파냐의 식민지가 되었다. 에스파냐는 마닐라를 중심으로 중국과 멕시코를 잇는 삼각무역을 펴는 한편, 필리핀 인에게 커피, 사탕수수 등 상품작물을 재배시켰다. 19세기에 들어 카톨릭 신부와 지식인들이 중심이 되어 계몽운동과 독립운동을 전개하였고, 미국.에스파냐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하여 필리핀을 지배하자 미국과의 항쟁으로 전화하였다. 그러나 수만흥ㄴ 희생에도 부룩하고 끝내 미국의 식민지가 되었다.인도네시아의 자바 섬에는 17세기 이래 네덜란드가 진출하여 향료무역에 종사하던 포르투갈 , 에스파냐 세력을 몰아내고 동인도 해상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 대부분을 지배하는 세력으로 성장하였한다.
    인문/어학| 2011.12.19| 16페이지| 3,500원| 조회(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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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굴의 이상주의자 “밀턴평전”
    불굴의 이상주의자 “밀턴평전”“JHON MILTON”이 400주년 해인 2008년 지난 지 몇 년이 되었다. 그렇지만 나는 불굴의 이상주의자 밀턴평전이라는 책을 끝까지 읽지 못하고 한자리에만 맴돌고 있었다. 늦었지만 JHON MILTON의 400주년을 축하하면서 책장을 넘겨 보았다.이 책은 머리말부터 어떠한 내용을 담고 있는 있다는 것을 내 머리에 인식하게 해주었다. 누구나 밀턴이라는 이름을 보면 “실낙원”의 저자이다라고만 생각할지 모른다. 그리고 밀턴의 이야기를 접하기 전에는 밀턴이라는 사람은 도대체 어떠한 업적을 세웠고, 불굴의 이상주의자라이라 부르는 것일까 라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나부터도 부끄럽지만 밀턴에 대해 무지를 표하는 1인이다. 그러나 누구나 이 책을 읽게 되면 알게 될 것이다. 또한 근대사를 배우고 있는 사람이라면 역사적 흐름을 꾀뚫고, JHON MILTON과 연관지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나는 밀턴평전을 읽고 몇 가지 인상 깊은 것이 있다. 첫째. 머리말에 나온 밀턴생애의 3대 위기 , 둘째. 모국어에 대한 사랑 이렇게 두 가지가 있다. 밀턴평전은 책제목을 보면 어려워 보이지만 그렇게 어렵지 않고 챕터별로 천천히 읽다보면 어느 순간 내가 그 시대를 사는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하고 내가 밀턴이 된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인지 머리말이 머릿속에 더 남겨져 있다. 밀턴생애의 3대위기의 내용은 첫째 시력의 완전상실, 둘째, 이혼문제 , 셋째 왕정복고 이다. 그 중에서도나는 시력을 상실한 밀턴에 대한 부분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사실 교양과목으로 장애인의 이해라는 과목을 들은 적이 있다. 그래서인지 44세의 나이에 시각을 모두 잃어버린 밀턴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처음 태어나서부터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 차제도 답답한데 44세의 나이가 적지 않은 나이이기 때문에 살아온 날들이 있기에 힘들었을 것이라 생각 든다. 그런데도 밀턴은 치료를 하면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겪어야만했고, 그는 이 시력 상실이 신의 징벌로 규정하고 공격을 퍼붓기까지 했다고 한다. 시력상실에 대한 이야기는 p270쪽에서 자세히 나오게 된다. 여기서 보면 실명의 원인을 3가지로 나누고 있다. 첫 번째는 선천성매독, 두 번째는 낭종에 의한 시신경교차 압박과 마지막으로 녹내장이라는 가설이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시력이 약화되면서 분노표출과 거친 표현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이것 또한 설득력이 없는 이야기라고 한다. 여러 가지 가설 중에서도 오늘날에 가장 지지를 받고 있는 녹내장설이 유력하다. 그런데 내 생각은 이 부분을 읽고 나니 이가설도 맞는 것 같고 저가설도 맞는 것 같다 그렇지만 나는 열정적인 삶을 살고 자신의 몸을 챙기지 못한 밀턴의 불찰이라 생각한다.마지막으로 모국어를 사랑한 밀턴이다. 사실 이 부분이 기억에 남는 것은 교수님께서도 역사학개론시간에도 그렇고 번역은 반역인가 책을 통해서도 모국어에 대한 말씀을 자주하셨다. 그래서인지 밀턴의 모국어 사랑를 보고 교수님 모습이 떠올랐다. 밀턴은 자신의 모국어에 대한 애정을 ,등으로 표출했다. 그당시에는 라틴어가 공용어 였기때문에 영어로 작품 활동을 하면 국제적으로 명성을 올리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모국어인 영어로 한 것은 자신의 조국을 명예롭게 하겠다라 의지를 보여준다. 이것을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당시 사람들도 모국어를 사랑하는데 우리나라 현실을 보면 영어가 주류를 차지하고 우리나라의 표준어조차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고 표준어가 아닌 단어를 사용하는 경향도 있으며 이런 식으로 우리나라가 간다면 어느 순간 우리나라의 자랑 스런 한글이 그저 방언에 불과한 언어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하다가는 훗날 하늘에서 세종대왕의 얼굴을 쳐다볼 수 있지 내 자신도 부끄럽고, 내 밑에 세대를 사는 아이들에게도 부끄러워진다.
    인문/어학| 2011.12.19| 2페이지| 2,000원| 조회(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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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양중세사 - 중국고전정리, 25사정리
    중국에는 중국의 역사를 기록해 놓은 책이 상당히 많다. 제일 대표적으로 드는 것이 중국의 25사인데 중국의 25사란 국가에서 인정한 정사(正史)를 이야기한다. 이 정사의 종류에는 사기, 한서, 후한서, 삼국지, 진서(晉書), 송서(宋書), 남제서(南齊書), 양서(梁書), 진서(陳書), 위서(魏書), 북제서(北齊書), 주서(周書), 남사(南史), 북사(北史), 수서(隋書),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 구오대사(舊五代史), 신오대사(新五代史), 송사(宋史), 요사(遼史), 금사(金史), 원사(元史), 명사(明史), 신원사(新元史)가 있다. 사실 엄밀히 따진다면 중국 25사라는 용어는 잘못된 표현이고 중국 21사가 올바른 용어라고 한다. 요사, 금사, 원사, 후금사는 한국사나 몽고사에 편입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중국의 25사라고 현재는 많이 알려져 있다.정사 25사에는 천자 치세(天子治世)의 연대기인 본기(本紀)와 저명한 개인의 사적(事績)을 기록한 열전(列傳)을 불가결의 요소로 하여 기전체(紀傳體)에 따른 중국 역대의 역사. 그 밖에 연표(年表)·계보(系譜) 또는 제도를 기록한 지(志, 또는 書) 등을 포함하는 것도 있는데 이것들은 필수 조건은 아니다. 한(漢)나라의 사마 천(司馬遷)이 상고(上古)로부터 한나라 무제(武帝) 때까지 기록한 에서 시작되는데, 이하는 단대사(斷代史)로서 1 왕조마다 1 부씩 사서(史書)가 만들어져 반고(班固)의 , 범엽(范曄)의 , 진수(陳壽)의 를 합하여 사사(四史)라고 부른다. 이후의 왕조에 대해서는 가 만들어졌고, 남송(南宋)시대에 와서 를 더하여 17사(史)로 총칭되었다. 원(元)나라 말기에 가 저술되었고, 명(明)나라 초 가 성립되었으므로 이들을 합하여 21사(史), 청(淸)나라 초 만들어진 를합하여 22사라고 하였다. 청나라 왕명성(王鳴盛)의 , 조익(趙翼)의 등의 이름은 여기에 유래한다. 건륭제(乾隆帝)는 이에 더하여 와 를 내어 24사로서 궁중의 무영전(武英殿)에서 蜀), 오(吳) 삼국(三國)의 역사를 깊이 탐구하여 기전체(紀傳體)의 65편(篇)을 완성하였다. 는 사람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아 당대에 명문장가(名文章家)로 이름이 높던 하후담(夏侯湛, 243~291)은 진수의 를 보고 감탄하며 자신이 저술한 를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장화(張華)도 진(晋) 역사의 편찬도 진수에게 맡겨야 할 것이라며 감탄하였다. 결국 는 진수 개인이 편찬한 사서(史書)이지만, 무제(武帝)의 뒤를 이은 혜제(?帝, 재위 290~306) 때에 삼국시대(三國時代)의 정사(正史)로 인정되었다.진수(陳壽)는 에서 사료(史料)들을 매우 엄격하게 선별하여 다루었으며, 문장도 매우 간결하고 명확하게 표현하였다. 특히 그는 삼국시대(三國時代)의 정치, 경제 등의 사실만이 아니라, 문학과 예술, 과학과 기술 등과 관련된 인물들이나 주변의 국가나 민족들과 관련된 사실들도 폭넓게 기록하였다. 그리고 그는 위(魏)의 선양(禪讓)을 받아 세워진 서진(西晋)에서 벼슬을 했기 때문에 위(魏)를 정통(正統)으로 해서 를 서술하였다. 하지만 위(魏)를 정통으로 한 다른 사서(史書)들은 등의 제목 아래 촉한(蜀漢)과 오(?)의 역사를 다루었지만, 진수는 제목도 로 하고, 본문도 ‘위서(魏書)’, ‘촉서(蜀書)’, ‘오서(?書)’로 나누어 삼국(三國)을 상대적으로 대등하게 서술하였다.진수(陳壽)는 치서시어사(治書侍御史)의 관직까지 올랐지만, 모친(母親)이 뤄양[洛陽]에서 죽자 유언(遺言)에 따라 그 곳에 장례를 치렀다가 불효자(不孝子)라는 비난을 받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고향(故鄕)에 장례를 치러야 한다는 당시의 관습에 어긋났기 때문이다. 그 뒤에 다시 태자중서자(太子中庶子)의 직위를 제수(除授) 받았지만, 명(命)을 따르지 못하고 죽었다.에는 진수(陳壽)가 를 저술하면서 개인의 사사로운 원한(怨恨)으로 제갈량(諸葛亮)과 그의 아들인 제갈첨(諸葛瞻, 227~263)을 폄하했다거나, 위(魏)의 문인(文人)이었던 정의(丁儀, ?~220)의 후손들에게 그의 전기(傳記)를 쓰는 대신’에서 많은 것을 빌어 왔다.삼국지는 와 함께 중국 전사사(前四史)로 불린다. 위서(魏書) 30권, 촉서(蜀書) 15권, 오서(吳書) 20권, 합계 65권으로 되어 있으나 표(表)나 지(志)는 포함되지 않았다. 위나라를 정통 왕조로 보고 위서에만 를 세우고, 촉서와 오서는 의 체제를 취했으므로 후세의 사가(史家)들로부터 많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저자는 촉한(蜀漢)에서 벼슬을 하다가 촉한이 멸망한 뒤 위나라의 조(祚)를 이은 진나라로 가서 저작랑(著作郞)이 되었으므로 자연 위나라의 역사를 중시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 때문에 후에 촉한을 정통으로 한 사서(史書)도 나타났다. 그러나 찬술한 내용은 매우 근엄하고 간결하여 정사 중의 명저(名著)라 일컬어진다. 다만 기사(記事)가 간략하고 인용한 사료(史料)도 지나치게 절략(節略)하여 누락된 것이 많았으므로 남송(南宋) 429년에 문제(文帝)는 배송지(裵松之)에게 명하여 주(註)를 달게 하였다.에 합각(合刻)되어 있는 배송지주(裵松之註:裵註)가 그것이다. 이 배송지의 주는 본문의 말뜻을 주해하기보다는 누락된 사실을 수록하는 데 힘을 기울여, 어환의 을 비롯한 하후담(夏侯湛)의 이하 당시의 사서와 제가(諸家)의 계보(系譜) ·별전(別傳) ·문집(文集) 등 140여 종의 인용문이 기재되어 있다. 이 제서(諸書)는 그 후 태반이 산일(散逸)되었는데, 여기에 인용된 글들이 당시의 사실을 고증하는 데 귀중한 사료가 된다. 그 중에서도 어환의 은 특히 귀중한 사료가 많이 있어, 이것을 배송지가 인용한 주를 바탕으로 하고, 거기에 다른 일문(逸文)을 추가하여, 청(淸)나라 때 장붕일(張鵬一)이 25권을 편찬하였다.또한 동이전(東夷傳)에는 부여(扶餘) ·고구려 ·동옥저(東沃沮) ·읍루(?婁) ·예(濊)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 ·왜인(倭人) 등의 전(傳)이 있어, 동방 민족에 관한 최고의 기록으로 동방의 고대사를 연구하는 데 유일한 사료가 된다. 에 관하여는 후세에 많은 참고서가 만들어졌으며, 그 하나이며 당 태종의 칙령에 따라 방현령(房玄齡)을 비롯한 많은 사관들이 편찬했다. 제기(帝紀) 10권, 지(志) 20권, 열전(列傳) 70권, 재기(載記) 30권의 총 130권으로 이루어져 있다.동진부터 남조 시대에 진사의 편찬이 많아서 당초에도 18가의 것을 볼 수 있었다. 서진 무제 태시 원년부터 동진 공제 원회2년까지 모두156년의역사를 쓴 것이다. 는 당의 사관에서 집체적으로 편찬하였는데 참여한 사람이 21명에 달하며 방현령,저수량,허경종이 주편자이다. 그리고 ,의 논찬은 당태종이 직접썼기 때문에 어참이라 불렸으며 불과2년여만에 완성하였기 때문에 집체 편찬의 우월성을 입증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그러나 는 좋은 점 이외에 결점도 갖고 있다. 인과응보나 천명신권관을 선양하고 귀신과 괴이한 전설들을 수록하였으며, 충군효도의 윤리를 크게 강화하여 황권을 공고히 하고자했다. 예를 들면 열전가운데 과을 넣은 것이다.는 5호16국에 관한 기록은 귀중한 사료이다. 판본은 백납본(百衲本)을 비롯해서 그 종류가 많다. 고증류(考證類)로는 청(淸)나라 왕명성(王鳴盛)의 〈십칠사상권 十七史商權〉, 이자명(李慈銘)의 〈진서찰기 晉書札記〉, 노격(勞格)의 〈진서교감기 晉書校勘記〉 등이 있다. 중화민국 시기 오사감(吳士鑑)·유승간(劉承幹)의 〈진서각주 晉書脚注〉 130권은 〈진서집본 晉書輯本〉 등에 집록된 진사의 일문(逸文)과 둔황석실본[敦煌石室本] 〈진기 晉紀〉 등 많은 자료를 수집하여 본문을 교정·보정한 필독 참고서이다.3.주서(周書)* 지은이: 영호덕분(令狐德?)- 영호덕분(令狐德?) 583-666. 당나라 선주(宣州) 화원(華原) 사람. 영호희(令狐熙)의 아들이다. 문사(文史)를 널리 섭렵하여 어릴 때부터 이름을 떨쳤다. 고조 무덕(武德) 초에 기거사인(起居舍人)이 되었다가 비서승(秘書丞)으로 옮겼다. 당시 경적(經籍) 가운데 흩어지거나 빠진 것이 있었는데, 그가 천하의 유서(遺書)들을 구매하자고 주청하여 몇 년 안에 많은 책을 대략 갖추게 되었다. 태종 정관(貞觀) 연 보충한 부분이많으며, 현존하는 〈주서〉는 당대의 원저와는 다르다. 현재 명대의 국자감본(國子監本), 청대의 무영전본(武英殿本) 등이 있다.는 참고한 사료가 많지 않았고 또한 북주의 국사가 없었기 때문에 북주 사관유규가 쓴기거주와 수의 비서감 우홍의 를 참조하였다. 의 자료가 풍부하고 내용이 충실학 편이며 서술이 간결하게 잘된 특징을 가지고 있다.특히, 서위 북주를 위주로 천하를 다 볼 수 있도록 남북 각왕종의 교체를 서술하고 같은 시대인 동위,북제와 남조의 양, 진의 사정도 서술하였다.그리고 의 자료가 풍부하며 내용도 충실하게 쓰여 졌다. 그러나 통치자에 대한 곡필과 회호가 확연하게 나타나 있다. 예를 들면 우문태에 대한 칭찬은 극치에 달해있다. 송대에 이르러 이미 없어진 부분이 많아 와등을 가지고 보충하여 50권으로 만들었다.4.위서(魏書)*지은이: 위수(魏收)- 위수(魏收) 506-572. 북제(北齊) 거록(巨鹿) 하곡양(下曲陽, 지금의 河北 晉縣) 사람. 사학자. 문학가. 자는 백기(伯起)고, 소자(小字)는 불조(佛助)다. 15살에 글을 지을 줄 알았다. 처음에 북위(北魏)에서 벼슬하여 태학박사(太學博士)를 지내다가 절민제(節閔帝) 때 산기시랑(散騎侍郞)과 수국사(修國史)가 되었다. 효무제(孝武帝)가 관중(關中)으로 달아나자 산기상시로 왕흔(王昕)을 따라 양(梁)나라로 사신을 갔다. 나중에 고환(高歡) 승상부에 속해 뜻을 얻지 못했다. 동위(東魏) 때 중서시랑(中書侍郞)이 되었다가 비서감(秘書監)으로 옮겼다. 북제 때는 중서령(中書令)과 저작랑(著作郞)이 되어 군국조책(軍國詔冊)은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문선제(文宣帝) 천보(天寶) 2년(551) 황명으로 130권을 3년에 걸쳐 찬술했다. 당시 사람들은 원한은 갚고 은혜는 보답했다면서 역사서가 불실하다고 지적했는데, 문선제가 상서성(尙書省)으로 불러 왕가의 자제들과 함께 토론을 벌이도록 했다. 황제가 그 재주를 아껴 죄를 주지 않으려고 하자 사람들이 ‘예사(穢史)’라며 비난했다. 상서좌복야(尙書左僕.
    인문/어학| 2011.12.19| 16페이지| 3,500원| 조회(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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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뉴턴에서 조지오웰까지 」
    「뉴턴에서 조지오웰까지 」* 미래와 과거를 바라본 야누스 뉴턴- 「뉴턴에서 조지오웰까지」라는 책은 어렵사리 읽은 책이라 할 수 있다. 통학버스에서 책을 잃어버렸는데 이틀 만에 겨우 찾았다. 사실 책을 다 읽고 오늘은 감상문을 써야지 하는 날에 잃어버렸기 때문에 이 책을 다시 열어 볼 수밖에 없었다. 이 책은 내가 싫었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여러 가지 일들이 있기도 하고, 강의 시간에 많이 듣던 인물과 DVD를 통해 보았던 내용들이 나와 생각보다 ‘ 재미있어 보인다.’ 라는 느낌을 받았다.가장 위대한 과학자 뉴턴은 청교도혁명이 일어난 해인 1642년 1월 4일 영국 링컨셔의 울즈소프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그는 17 살 때 까지 평범한 생활을 하다 외삼촌의 탁월한 안목으로 그를 캠브리지 대학에 입학시켰다. 그리하여 뉴턴은 과학의 재능을 맘껏 펼치게 되었다. 그리고 책에서 그는 언제나 말수가 적었고, 말을 많이 하는 것은 필요 이상으로 증명 단계를 늘리는 것처럼 세련되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고 한다. 이러한 구절에서도 뉴턴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설에 대해 논박의 여지 가 없는 답변을 하였다고 한다. 사람들의 논박을 받기 싫어서 가설을 만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당시 유명한 과학자가 되지 못했다. 누구나 말하듯이 그는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난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이 당시는 낡은 과학을 믿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의 연구발표는 언제나 항상 비난을 받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경이 있었기에 뉴턴은 ‘탁월한 실험과학자인 동시에 최고급 이론 과학자’라는 말을 듣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책 내용에서 보면 최고의 이론과학자인 아인슈타인이 재치있게 표현해서, 그는 매우 알맞은 시기에 태어났다라고 했다고 한다. 역시 천재들은 천재들끼리 특별한 무언가가 있는 것 같다.뉴턴은 여러 분야에서 연구를 하였는데 그 종류만 해도 물리학, 수학, 천문학, 연금술, 신학 이 있다. 이렇게 여러 가지 분야에서 연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자신의 성격에서 비롯된 것인 것 같다. 왜냐하면 그는 혼자서 생각하는 것을 좋아 한다. 나 또한 혼자서 멍하니 생각하다 보면 오지랖이 지구 끝까지 펼쳐진다. 그렇듯이 뉴턴도 이리저리 생각하다 보니 이런 연구 저런 연구에 대해 궁금증이 폭발했을 것이고 그러다보니 결국 이론을 만들게 되고, 이 이론이 제대로 된 이론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실험을 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뉴턴을 사랑한 여러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 할지 모르지만 말이다. 여러 가지 연구를 했지만 그중에서도 내가 생각하는 으뜸은 만유인력의 발견과 무신론을 주장하지 못하는 연구를 꼽고 싶다. 사실 모두 다라고 하고 싶다.만유인력을 발견하기 까지 아이작 뉴턴은 수학 교수로 임명되어 캠브리지에서 강연을 했지만 그의 수업 내용은 재미도 없고, 이해하기도 힘들기 때문에 청중이 없었다. 그리고 그가 만유인력의 연구를 오래전부터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 당시에는 케플러의 행성 운동에 관한 3가지 법칙, 갈릴레이의 지상 물체의 운동 연구, 호이겐스의 진동론 등 여러 연구들이 있었고, 이 연구들을 종합해서 통일 시키고자 이론적으로 많은 연구 시간을 들였던 것이다. 오랜 연구 시간을 들인 것은 오류를 싫어하였기 때문이다. 오류를 남겨 두었다간 이상주의적 사상가들에게 배척당하기 쉬었다. 그리하여 결국 만유인력의 법칙을 알아냈고, 그 후에 에드먼 핼리라는 천문학자가 찾아와 만유인력에 대해 설명해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리하여 뉴턴은 20개월 동안 노력한 끝에 를 완성했다. 를 저서한 뒤에도 여러 가지 자연현상의 작동원리를 규명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두 번째로 뉴턴은 독실한 성공회집안 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느 제자가 하느님이 없다고 주장하자, “하느님에 대해서 불경하게 말하지 말게. 나는 하느님에 대해서 연구하고 있다네.”라면서 무신론을 주장하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그는 성경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고 성도들이 부활되어 하늘에 살면서 눈에 보이지 않게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릴 것이라는 종말론적인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심판 날 후에도 사람들은 계속 땅에서 살 것이며, 단지 1000년 동안이 아니라 영원히 그러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역사가 스티븐 스노벨렌의 말에 따르면 그는 그리스도의 임재가 여러 세기 후에 먼 미래에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는데 그 이유가 주위에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사상들이 뿌리 깊이 퍼져있는 것을 몹시 비관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큰 환난이 오기 전에 복음 전파 활동이 전 세계적으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고 한다.뉴턴의 연구정신과 집중력 노력이 오늘날까지 모든 사람들이 뉴턴을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아이작 뉴턴에 대해 무지였던 저에게 뉴턴이라는 사람이 어떠했는지를 알려주었고, 만유인력 이외에도 여러 연구를 했다는 것이 신기했다. 아이작 뉴턴은 한마디로 표현해서 양파 같은 사람이다. 그리고 세계를 변화 시킨 과학자라는 말을 칭하고 싶다.* 로만주의의 반란- 로만주의가 뭘까? 라는 생각을 잠시 하게 되었다. 낭만주의의 어원인 로맨티시즘(Romanticism)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런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는게 부끄럽기 짝이 없다. 무지를 없애기 위해 오늘도 책을 읽고 ,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우선 처음 고전주의와 로만주의의 용어의 사용을 반대하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로만주의는 18세기 후반에 ‘균형’과 ‘단정함’을 표방하는 낡은 이론에 싫증을 느낀 사람들이 좀 더 자유분방하고 개인주의적인 자기표현 방식에 중요성을 부여한 결과라고 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로만주의는 고전주의를 사람들이 점점 싫어하면서 생겨났는데, 이것이 고전주의보다 자유분방하고, 개인주의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고전주의를 벗어나기 위한 신세대들의 행동이 ‘로만주의의 반란’ 이라 칭해졌을 지도 모른다.로만주의의 첫 타자는 계몽주의 시대의 ‘루소’ 였다. 그는 느낌과 감정을 강조하였으며 계몽주의들이 설파 했던 이성에 대해 강한 회의를 품었지만, 로만주의자들은 이성이라는 것을 무시하거나 거부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과거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의미로 파악 되었던 이성을 역사적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것으로 수정하여 고려하였다. 또한 로만주의는 개성을 강조하고, 사회를 과거와 달리 하나의 “유기체”로 보았다. 탄생과 성장, 쇠퇴와 소멸을 겪는 것은 사회의 한 특징이라 말하였으며, 이것은 후에 《문명 형태학》- 아놀드 토인비 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독후감/창작| 2011.12.19| 3페이지| 1,500원| 조회(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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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란무엇인가? 2장 사회와개인
    E . H Carr의「역사란 무엇인가?」- 2장 .사회와 개인‘1장. 역사가와 그 사실’ 을 읽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읽게 된‘ 2장. 사회와 개인’ 을 읽게 되었는데, 역시나 E. H Carr는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생각을 과거의 역사관에 바라보면서 과거의 역사가들의 오류를 비판하고, 또 올바른 역사관에 대해서 긍정적인 태도를 취한다. 어떤 역사가의 관점이 꼭 틀리고, 어떤 역사가의 관점이 맞다는 논리는 제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의 역사관점에 대해서는 확고하게 다음과 같은 관점을 취한다. 역사란 바로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주장을 내세우면서 또 다른 주제로 서술하는 것 같다.2장. 사회와 개인에서 보면 상식적인 역사관은 역사를 개인에 의해서 쓰여진 개인에 관한 어떤 것으로 간주 한다 .그리고 역사를 쓰는 역사가는 개인인 동시에, 사회에 속해져있는 개인이기 때문에 역사가는 과거사회의 연관 속에서 행동하며, 사실을 역사로서 만드는 과정을 진행시킨다. 역사의 경로를 ‘움직이는 행렬’이라고 할 때 ‘역사가는 역사의 일부이다’라고 한다. 그 행렬 속에서 역사가가 있는 지점이 과거에 대한 그의 시각을 결정하게 된다. 그러므로 역사를 파악할 때 그 역사를 기록한 역사가의 입장을 파악하지 않고서는 그의 연구를 충분히 이해하거나 평가할 수 없다. 이러한 말을 하면서 저자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그 의문으로는 ‘역사가들은 어느 정도까지 단일한 개인들이며, 어느 정도까지 그들의 사회와 시대의 산물인가? 역사의 사실은 어느 정도까지 단일한 개인들에 관한 사실이며 어느 정도까지 사회적 사실인가? 에 대해 말하고 있다.그리고 E . H Carr는 여러 견해들과 논쟁하고 싶지 않다고 하였다. 이 말에 대한 목적이 2가지의 중요한 진리를 설명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첫째. 역사가 자신이 연구에 들어가면서 가지게 되는 입장을 파악하지 않고서는 그의 연구를 충분히 이해하거나 평가 할 수 없다.둘째. 어떤 사회적, 역사적 배경에 뿌리박고 있다.이 2가지 목적의 결론은 역사가는 역사책을 쓰기 시작하기 이전에 이미 역사의 산물이다. 즉, '역사를 연구하기에 앞서서 우선 역사가를 연구하라. 역사가를 연구하기에 앞서서 우선 그의 역사적 사회적 환경을 연구하라.'역사가와 그의 사실들과의 상호작용이라는 상호과정은, 현재와 과거와의 대화라고 지적한 바 있지만, 추상적인 고립된 개인들 사이의 대화가 아니라 오늘의 사회와 지난날의 사회와의 대화인 것이다.그로트와 몸젠, 트리벨리언과 네이미어 등 역사가들은 역사서를 저술방식은 하나의 사회적 ,정치적 틀 안에서 주조되었다고 말한다. 그 말은 한마디로 말해서 역사는 그 시대의 사회적 배경을 바탕으로 역사를 서술 한다고 말해야하나?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그렇게 생각했다.그래서 다른 개인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사회현상으로 보며 자기가 속해 있는 사회의 산물인 동시에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그 사회의 대변인이다. 위대한 역사란 과거에 대한 역사가의 전망이 현재의 모든 문제에 대한 통찰에 의하여 빛을 받을 때만 가능하다고 하였고, 역사의 올바른 이해 및 평가를 위해서는 역사가를 연구하기에 앞서 그의 역사적, 사회적 환경을 연구하라고 충고하고 있다.요컨대 역사가는 개인인 동시에 역사와 사회의 산물이다.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과의 상호작용이라는 상호과정은, 현재와 과거와의 대화라고 지적한 바 있지만, 추상적인 고립된 개인들 사이의 대화가 아니라 오늘의 사회와 지난날의 사회와의 대화인 것이다. 과거는 현재의 빛에 비쳐졌을 때에만 비로소 이해될 수 있는 것이며 또한 현재도 과거의 조명 속에서만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으로 하여금 과거 사회를 이해시키고 현재 사회에 대한 그의 지배를 증진시킨다는 것이 역사의 이중적 기능이라는 것이다.
    인문/어학| 2011.12.19| 3페이지| 1,500원| 조회(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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