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
Bronze개인
팔로워0 팔로우
소개
등록된 소개글이 없습니다.
전문분야 등록된 전문분야가 없습니다.
판매자 정보
학교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직장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자격증
  •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판매지수
전체자료 14
검색어 입력폼
  • 갑골의 세계
    갑골의 세계1. 서 : 사유체계를 대변하는 문자1899년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진 갑골문은 ‘상’이란 전설의 왕조의 실체를 드러낸 결정적 근거로 작용하였다. 3000여년의 역사 속에 묻혀있던 상의 실체가 비로소 드러난 순간이었다. 이처럼 역사는 기록을 통해 보다 근거 있는 설득력을 획득할 수 있다. 이 기록에 필요한 것이 바로 문자이다. 문자는 그 시대속의 사람들이 생각하고 삶을 영위해 나가는 구체적 사유체계가 반영된 산물이다. 문자와 이를 통해 구성된 기록물은 우리가 오늘을 살아가면서, 적게는 수십년 길게는 수천년전의 사건들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끔 해준다. 다시 말해, 그 당시 문자로서 기록된 사료들을 통해 우리는 그 시대상에 한 걸음 다가갈 수 있으며, 이를 통해 구체적인 삶의 흔적에까지도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일반적으로 문자와 사유체계 간의 관계는 일방적 영향 내지는 반영이 아닌, 상호의존적인 양방향으로 진행된다. 즉 문자는 인간에 의해 사용되는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해당 문자체계를 사용하는 민족의 사유체계가 반영될 수밖에 없다는 측면에서 인간의 사유형식은 문자 창조에 영향을 미치며, 일단 사유체계가 반영되어 만들어진 문자체계는 다시 역방향으로 해당 문자를 사용하는 민족의 사유를 발전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그래서 문자의 창조는 이미 존재하는 사유적 성과를 보존하고, 교류하고, 전수하게 하기 위한 것이며, 인류의 성숙된 사유는 바로 문자의 창조와 사용과정에서 이뤄지는 것이다. 왜나하면 어떠한 사유든지 보존될 수 있을 때만 비로소 반복적으로 교류되고 전수될 수 있는 것이며, 이러한 교류와 전수를 통한 토론과정 속에서만 비로소 성숙되는 것이기 때문이며,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성숙된 사유 혹은 인류의 진정한 문명은 문자의 창조와 사용에 의해 점진적으로 형성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이러한 의미에서 갑골문이 갖는 의의는 매우 크다고 느껴진다.우리는 갑골문을 통해 단순히 ‘상의 시대가 어떠하였다’에 그치지 않고, ‘상의 사람들은 어떠한아갈 수 있게 된다. 이를 통해 시대를 관통하는 중국인들의 사유체계는 물론, 한자라는 문자를 공유하고 그에 기반한 문화를 형성했던 동아시아 많은 국가들의 사유체계 까지 엿볼 수 있을 것이다.자칫 전설로 남을 뻔한 상의 실체를 드러낸 갑골문은 ‘갑골학’이란 새로운 학문의 출현을 통해 100여년이란 짧은 기간 동안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갑골문 자체의 학술적 가치, 3000여년이란 긴 세월동안 묻혀있던 역사에 대한 관심, 중국인들의 특유의 역사 자존심 등이 맞물려 현재 은허 유적지는 중국정부의 주관 하에 대대적인 역사 메카로 자리잡았으며, 은허 유적지는 2006년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된 상태이다. 그러나 이처럼 단기간에 갑골문의 해석이 원활이 이루어진 가장 큰 이유는 한자가 수천년의 긴 세월 동안 끊임없이 사용되었고 글자와 언어체계를 바꾸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한자는 중국은 물론 일본, 한국 등 한자문화권이라 불리는 문화권 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갑골문은 한중일 동아시아 3국을 가로지르는 한자문화권의 원류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그 연구의 적실성이 비단 중국 뿐만이 아닌 동아시아 한자 문화권 전체에 있기 때문에 이 책일 비롯한 일련의 작업들에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2. 책의 요약1) 기후기후에 관련한 각사는 전체 중 7%에 이를 정도로 상대 인들의 기후에 대한 관심은 컸다. 비, 바람 등에 왕의 행사, 농업과 관련하여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였으며, ‘바람을 잠재울 목적’ 과 같이 기후에 관한 특정 목적의 달성을 위해 희생물이 수반된 일련의 의식을 취한 각사도 존재한다.2) 농사갑골을 통해 기장이 당시 주요작물이었을 것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농사는 생존에 직결되는 중대사였으며, 따라서 비, 바람, 홍수, 가뭄 등의 풍수해와 메뚜기 떼와 같은 병충해의 위협은 상대사회 모든 구성원들에게 심각한 경제적, 종교적 도전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이러한 풍수해, 병충해의 위협을 딛고 이룬 성공적 추수는 경제적 안도감 뿐 아니라, 깊은 정신적 만족을 상대 사람들즉, 성공적인 추수는 왕조가 지속되고 신들이 이를 승인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3) 시간여타 고대 사회가 그렇듯이, 상의 사회 역시 태양과 달 그리고 계절의 운행에 따라 시간을 맞추었다. 특히, 상대 사람들은 시간을 헤아릴 때 점친 날을 포함하여 계산함으로써 시작날을 결코 빼놓지 않았는데, 이는 그들이 시작날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했다는 점을 알 수 있게 한다.또 하나의 특징은 바로 ‘간지’이다. 상대 사람들은 후대에 ‘간지’라고 불린 두 개의 독립적으로 연속되는 짝을 결합하여 60일의 순환주기를 만들었다. 다소 복잡한 간지표는 일반 민중이 접근하기에는 무리였으며, ‘간지’의 전문적인 사용자체로서 정인들은 종교적 권위를 부여받을 수 있었다.민중들은 60일 주기보다는 10일을 주기로한 ‘순’의 시간체계를 공유하였다. 60일 주기가 일종의 전문가용이었다면, 상대 대부분의 민중들이 공유한 시간체계는 10일 주기의 ‘순’체계 였다. 어느 순의 마지막 날인 ‘계’날에는 항시 “다음 순 동안 재앙이 없을 것이다”란 점복이 행해졌음은 이를 뒷받침 해준다.또한 상대사람들은 조상들에게 바친 제사일정표를 가지고 시간을 기록했다. 다소 복잡한 제사는 제사전문가들의 끊임없는 주의 필요로 하였다. 제사의 시간은 고도로 조직화되었고, 또한 그것은 날짜를 헤아리는 데도 사용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특정 날짜를 제공할 수는 없었다. 이러한 한계를 뛰어넘어 왕조 말기에 이르면 명사의 부사에 제사주기를 기록함으로써 상대의 사람들은 직선의 시간을 기록할 수 있게 되었다. 점복하는 방법이 바뀐 것처럼 시간을 다루는 방식도 왕이 통치하는 기간 마다 많이 변하였던 것이다.하지만 상대 정인들이 기록한 날짜도 역사적 의미를 갖는 날짜로 보기는 힘들다. 그 이유는 날짜를 기록한 목적이 해당 사건을 좀 더 긴 시간의 범위 안에 위치시키는데 있었던 것이 아니라 현재의 몇 번째 제사주기 안에 어떤 사건을 위치시키는데 있었기 때문이다.4) 공간 : 중심과 주변상대 공간에 대한 인지능력은 엘리트층과존재했다. 각종 시찰, 조공, 공물납부, 혼인동맹 등으로 외부지역에 익숙한 엘리트층은 광범위한 지리 지식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 민중은 자신들이 사는 지역 이외의 곳에 대한 정보를 보유하지 못했으며, 적의 침공이나 메뚜기 떼의 습격 등 외부의 간헐적인 침범으로 외부세계에 대한 막연한 인식만을 보유했을 뿐 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는 땅을 벗어나지 못했기에 자신들이 작고 익숙한 세상 속의 중심에 살고 있다고 인식했을 것이다.상왕은 자신의 통치 아래 있었던 영역에서만 지도력과 통치 기능을 직접 행사하였다. 마찬가지로, 상과 다양한 형태의 친족관계나 종교적 신념, 이해관계로 연결되어 있었던 지역통치자들 역시 자신들의 영역에서 상왕과 동일한 역할 수행을 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이른바 ‘분절국가’로서의 상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또한 각사에 자주 등장하는 ‘방’은 상이 아닌 집단이나 적을 가리키는 접미사이다. 방에 대한 추수 점복 기록 또한 없으며, 추수 점복은 상의 영역과 동맹집단에 한정되었다. 방에 대한 수많은 군사 행동 기록들은 각사 곳곳에 나타난다. 세상의 기본성에 대한 상대 후기의 관심이 ‘사방’을 상대 후기의 종교적, 정치적 우주론의 심층구조의 일부로서 받아들이게 했다고 여겨진다.5) 공간 : 우주와 방위우주론적 측면에서 상대 사람들은 자신들이 동-서-남-북의 사면 방위기점에서 중상으로 알려진 중앙의 핵심지구가 존재하는 정사각형의 세계에 살고 있다고 인식하였다.이러한 방위에 대한 관심은 신석기 시대부터 나타난 매장방위의 지역적 차이를 통해 알 수있다. 다시 말해, 상대 사람들은 죽음과 제례에 대해 자신들의 우주론적 가치관을 가지고 그 방향성을 나름대로 부여하였던 것이다.상왕 또한 ‘중상’이라는 곳에 위치하여 그 곳에서 중요한 제례를 거행하고, 제정이 일치된 소둔지역의 중심성을 강조하였다. 상왕은 자신이 혈연적, 영적, 지리적 그물망의 중심에 위치했다고 생각했고, 그의 권위는 이러한 방위의 중심적 위치에서 파생되었을 것이다.6) 공간 : 땅과 친족관계는 하나의 문화적 발명품이었다. 긴밀하게 연결된 혈연적 관계의 왕실집단은 철저한 조상숭배의 조직화를 통해 그들의 권위를 확보하고 왕권 승계의 정당성을 확보하였다. 제사로 매개된 혈연관계는 복잡하고 상호적인 사회, 정치, 종교 공동체였다.상왕은 점복과 제사를 통해 지배체제의 공고화를 꾀하였다. 신이 상의 땅을 보우하고, 상을 지지한다는 메시지를 제사를 통해 드러냄으로써 상왕의 지배권을 정당화하는 기제로서 활용하였다.또한 당시 동물들에 대한 점도 많이 치러졌는데, 동물들에 대한 농작물의 피해와 같은 인간과 짐승사이의 충돌을 종교적 관계로 파악하려는 의도로 보여진다. 더불어, 왕의 사냥은 종교적 의미 뿐 아니라, 지배자로서의 왕의 지위를 입증해주고, 군사훈련의 기회, 농업과도 관련된 행위로 간주되었다. 사냥을 통해 제사에서 얻을 수 없는 주변세계와의 접촉을 상왕은 시도하고자 하였던 것이다.이렇듯, 상왕의 주요한 역할 중의 하나가 바로 제사수행이었다. 그들은 주변의 자연신, 동물신 등을 제사대상에 포함시킴으로써 이들 신에 대한 숭배를 자신들의 조상들에 대한 숭배와 결합시키고, 그들에게 조상의 지위를 부여하였다.7) 상대 ‘풍’상은 완벽한 통일제국이라 할 수 있었을까? 답은 ‘아니오’ 이다. 기록에 의하면 한 대까지도 백리마다 예절이 다르고, 천리마다 습속이 다르다고 나타나 있다. 즉, 그보다 1200년전 빠른 상대에는 더했으면 더했지 매우 다양한 문화들이 혼재한 상태였을 것이다. 하지만 상의 주류문화에 대항한 개인들에 대한 어떤 자료도 찾아볼 수 없다. 우리는 단지 그 가능성만을 유추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상대는 오늘날 중국의 원류로 여기지는 왕조이다. 상이 그들의 후대에게 자신들의 업적과 혜택을 물려주었다면, 후대에 이르러서는 역으로 상이 후대들에 의해 정리되고 다시 창조될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 상대의 주류를 형성했던 문화의 습속과 양식들이 살아남아 후대에 유효하게 전수되었고, 이를 전수받은 후대에 의해 상의 문화와 양식들은 더욱 정교하게 가다듬어.
    인문/어학| 2014.05.09| 5페이지| 1,500원| 조회(150)
    미리보기
  • 기술의 사회적 구성론을 통해 분석한 한국 원자력 기술의 사회적 채택과정과 향후 대응방안
    기술의 사회적 구성론(SCOT)을 통해 분석한한국 원자력 기술의 사회적 채택과정과 향후 대응방안1. 문제의 제기2011년 동일본 대지진의 발생과 그로 인한 후쿠시마 원전의 방사능 유출 사태는 일본인들에게 그리고 인접한 우리들에게도, 또한 전 지구적 차원에서 원전의 위험성에 대한 경각심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점은 오늘날 현실이 된 ‘위험사회’ 속에서 이미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태를 경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이런 사고가 발생했다는 점과 원전 기술의 위험성에 대한 인식이 그 때의 수준에서 별로 나아지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후쿠시마 사건을 계기로 원전에 대한 재검토, 원전의 전면 폐기와 같은 국제적 정책 흐름이 나타나고는 있다지만, 이는 이전의 체르노빌 사태 이후에도 그랬던 것처럼 원전의 효율성과, 에너지 구조의 개혁, 에너지 주권회복 이란 수사 아래서 얼마나 지속될지 모르는 실정이다.따라서 현 시점에서 원전 문제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문제제기의 필요성이 대두된다. 다시 말해, 원전의 기술적 측면의 위험성은 누구나 인식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원전의 설립과 추진이 체르노빌, 후쿠시마 사태와 같은 큰 재앙을 겪고도 지속되었다는 점은 기술적 차원의 접근만으로는 문제의식의 확립과 위험에 대비하는 자세의 제대로 된 구축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더구나, 현재 우리 사회로 시각을 돌려보아도 이러한 문제점은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다. 뉴스와 신문에서는 심심치 않게 원전의 가동 중단 사고가 보도되고 있으며, 원전에 대한 체계적인 위험 대책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빗발치는 상황과는 대조적으로, 현 정부는 현재 31.4%인 전력 공급의 원전비중을 2030년까지 50%까지 높이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추진 중에 있다.)이렇게 볼 때, 원자력의 위험에 대한 태도 설정에 있어서 기존의 기술적 차원에서의 접근에 대한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이는 현 인류의 과제이기도 하며, 더욱이 많은 원전이ological flexibility)'라고 부른다. 이러한 다양한 유연성들은 기술을 둘러싼 사회집단들 사이의 해석차와 갈등으로 나타난다. 갈등은 핵심적인 문제가 새로운 기술에 의해서 해결됨으로써 해소되며, 그 결과는 특정 기술이 표준으로 채택되는 것이다. ’논쟁의 종결‘은 기술 그 자체의 논리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기술을 둘러싼 사람들 사이의 일종의 합의과정인 것이다. 즉 기술의 방향, 내용, 그 결과가 사회 그룹들의 상호작용에 의해 사회적으로 만들어진다는 주장이 바로 SCOT의 핵심이다.기술의 사회적 구성론이 모든 과학기술학자들을 설득한 것은 아니다. 비판자들은 우선 사회구성론이 기술의 출현에만 초점을 맞추고 그 영향에는 무관심하다는 비판을 하곤 했다. 즉 기술이 선택된 이후에 그것이 개인의 경험이나 사회관계를 바꾸는 양식은 기술의 사회구성론에서 논의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기술의 사회구성론자들은 이러한 비판을 수용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이와 관련된 몇몇 사례연구를 추진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이들은 포드가 생산한 자동차가 처음에는 운송수단의 의미만을 가지고 있었지만 농촌지역에 확산되면서 다른 기계를 작동시키는 동력의 역할도 담당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또 이들은 기술변화에 수반되는 사회구조나 권력관계를 무시하며, 기술을 둘러싼 정치적 문제에 대하여 무관심하다는 비판도 받았다. 즉 기술의 사회적 구성론은 기술변화에 대한 서술에 그치고 있으며, 기술변화의 방향을 어떻게 재정립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무심하다는 비판이다.이러한 비판자들은 기술철학과 기술사회학의 핵심적인 문제가 “기술이 어떻게 구성되는가”가 아니라 “우리의 기술중심적인 사회를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가”에 있다고 주장한다.그러나 기술의 사회적 구성론이 이러한 문제에 전적으로 무관심한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기술의 사회적 구성론은 기술이 가진 유연성을 드러냄으로써 기술결정론을 비판하고 “기술이 지금과 다를 수도 있다”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사회구성론자들은 이러한 이론적 틀을 논쟁적인 기술을 평5년에 체결된 한미 원자력 협정에서 시작되었다. 제 2차대전 종결 직후, 미국은 러시아와의 원전 확대 경쟁 속에서 동맹국을 늘리기 위해 한국이 필요하였으며, 한국 정부는 당시 그 역량이 충분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정부의 원자폭탄 소유욕에서 협정을 추진하게 된다. 이처럼 매우 우발적으로 이루어진 한국 정부의 원자력 수용은 이후 미국에 의해 비군사적인 용도로 제한되었기 때문에 합당한 활용책을 놓고 많은 논란을 야기하였다.)하지만, 1960~70년대 정부 주도의 빠른 경제성장과 이에 따른 전력부족 문제는 한국 원자력 산업을 농업이나 의료부분의 활용이 아닌, 전력을 생산하는 발전산업으로 자리잡게 하는 계기로 작용한다. 이후 정부는 원자력 기술 자립화, 에너지 주권 회복, 친환경적 에너지 정책의 수사 아래 원자력의 전력 공급 비중을 확대하고, 원전 5개년 계획을 분기별로 수립하는 등 적극적인 진흥과 이용의 정책방향을 추구하게 된다.? 핵카르텔한국사회에 원자력이란 기술을 이식한 것이 정부라면, 이것이 한국 사회에 공고하게 뿌리내리게 하는 중심에는 서울대 원자력공학과를 필두로 한 핵공학계의 지식엘리트, 핵에너지 업계, 핵에너지 관료들 간의 강력한 카르텔이 있다. 이들은 원자력진흥위원회, 한국수력원자력, 한국원자력문화재단)과 같은 원자력과 관련된 주요 요직들을 돌아가며 맡으며 카르텔을 공고히 구축해 나간다.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는 최근 ‘탈핵 에너지 전환의 정치?사회 시나리오 연구’ 보고서를 통해 강고한 핵 카르텔이 현재의 에너지 시스템을 떠받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어서 원전 중심 전원정책(관료), 핵 관련 기술인력 양성(지식), 신규 핵발전소 건설에 따른 시장(자본)의 확장이라는 관료?지식?자본 카르텔을 강화하는 순환구조를 갖추게 되었으며, 이러한 핵 카르텔 강화과정에서 에너지 정책은 폐쇄적인 소수 전문가)에 의해 결정되게 되었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폐쇄적인 회전문 인사도 문제이지만, 더욱 문제점은 이들이 핵에너지의 규제와 안전보다는 진흥과 이용에 그 목적을 두고 ‘교토의정서’의 체결로 인한 온실가스 감축이란 전 지구적 노력의 필요성의 제기는 원자력 진흥과 이용의 좋은 환경적 요소로서 작용하였다.2) 안정화 단계원자력 기술이 1986년 체르노빌 원전사고, 2011년 후쿠시마 원전사고라는 원전의 위험성과 관련한 중대 사건의 발생 이후, 어떻게 우리사회에서 사회적으로 채택되어 나올 수 있게 되는지에 대하여 ‘수사적 종결’과 ‘문제의 재정의’의 과정을 통해 고찰해 보겠다.? 수사적 종결수사적 종결과정은 연관사회집단들 사이의 사회적 협의를 통하여 논쟁이 종결되고 기술이 안정화 되는 과정이다. 비록 이것이 실질적 문제해결과 무관한 것일 수도 있고, 완벽하게 해결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합의를 통해 종결된다는 측면에 주목하여 한국 사회의 원자력 기술의 수사적 종결과정과 그 시점에 대해 분석해 보고자 한다.1955년 한?미 원자력 협정을 통해 원자력 기술이 한국 사회에 처음 도입되고, 원자력이 전력생산을 위한 발전산업으로 그 방향이 결정되면서 한국 원자력 기술의 경로는 아래의 표)와 같은 과정을 따라 전개되어 왔다. 1978년 고리 원전 1호기가 완공되며 원전을 통한 전력의 생산이 시작되긴 하였지만, 그때까지의 한국 원자력의 기술적 자립성은 확보되지 못한 상태였다. 따라서 1980년대 접어들어 한국 원자력의 최우선 목표는 기술의 자립화 달성이었고, 이는 아이러니 하게도 1986년 체르노빌 원전사고를 기점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1986년 체르노빌 원전사고는 그 이전의 1979년 미국 스리마일 원전사고 보다 심각한 최악의 원전사고로 평가받는다. 체르노빌 이후 많은 국가들이 원자력의 안정성에 문제제기를 하기 시작하였고,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원전 건설계획을 철회하게 된다. 하지만, 한국 입장에서 볼 때에는 이것이 기회로 작용하였다. 당시 개발도상국에 불과했었던 한국에 체르노빌 이전까지는 원전 기술을 이전해주겠다는 나라는 없었다. 하지만, 체르노빌 이후 국제원전 시장은 구매자가 주도권을 장악하는 상황으로 전환되었다. 따라서, 한국은 체르노 주입시키는 과정 속에서 원전 기술의 자립화를 달성함에 따라 논쟁의 종결이 이루어지는 형태로서 한국사회 속에서 원전 기술이 안정화 단계에 접어들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문제의 재정의1986년의 체르노빌 사태가 한국 원전 기술의 ‘수사적 종결’의 기제로서 작용하였다면, 2011년의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한국사회의 원전에 대한 인식들에 대하여 새로운 논쟁의 계기로 작용하였다는 측면에서 ‘문제적 재정의’의 과정으로 볼 수 있다.21세기의 한국사회는 20세기의 그것과는 다른 사회 지형을 나타낸다. 1987년 민주화를 이룩하였고, 근대화와 산업화의 기치는 어느 정도 그 역할을 다한 채 수면 밑으로 가라앉았다. 보다 다양한 목소리가 나올 수 있는 사회 구조적 변화가 이루어졌고, 보다 다양한 가치(환경, 여성, 문화, 성 등)에 주목할 수 있는 시각적 역량이 갖추어진 사회로 한국사회는 변화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후쿠시마 원전사고로 촉발된 환경의 가치, 위험성, 안전의 욕구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과 참여는 과거의 국가 주도의 사회 구조 속에서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양상으로 전개된다. 많은 환경단체들과 그에 연대한 원전 지역, 원전 건설 예정지역의 주민들은 후쿠시마 사태를 계기로 한층 더 심각하게 원전의 위험성을 인식하고 원전에 관한 안전과 규제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한국 사회의 원전 기술의 역사에서 강조되었던 ‘진흥과 이용’ 이란 측면이 이제 ‘안전과 규제’의 측면으로 문제가 재정의 되는 과정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이러한 측면을 반영하듯이 후쿠시마 사태 이후 변화된 모습이 나타난다. 원전에 대한 불안감이 커지며 안전과 규제를 담당할 전문적인 행정기구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되었고, 이에 따라 2011년 6월 ‘원자력안전위원회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원자력 안전법)’이 제정되었고, 이 법에 의거하여 그해 10월 원자력 안전위원회가 출범하게 된다. 우리나라도 이제는 국제 기준을 따라 핵에너지 진흥·이용(원자력진흥법)과 규제·안전(원자력안전법) 기관이 번듯하게 구분
    사회과학| 2013.01.15| 9페이지| 2,000원| 조회(236)
    미리보기
  • 조선이 그린 세계지도
    「조선이 그린 세계지도」1. 들어가며지도는 고대에 또한 여전히 오늘날에도 그 유용한 기능을 인정받아 여러 방면에서 활용되고 있다. 처음 가는 낯선 곳을 여행할 때, 새로운 곳으로 이주해서 주변 지역 파악할 때,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에 대한 정보를 알고자 할 때, 심지어 “맛집”을 찾아갈 때도 지도는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다. 이처럼 우리 생활과 깊숙하게 관련되어 그 유용성을 발휘하는 지도. 과연 인류는 언제부터 지도를 만들기 시작했는지, 또 만들어 졌다면, 오늘날 만큼 상세한 지도의 제작이 가능했는지에 대해 의문이 생긴다.과학기술의 진보와 함께 오늘날 우리는 어디서나 손쉽게 지도를 구할 수 있으며, 지도의 제작 또한 더욱 정교하게 발전해왔다. 과거만큼은 아니지만, 우리는 여전히 지도에 의존하고 있다. 더욱이 교통이나, 이동수단이 발달하지 못한 과거 사람들에게 가보지 않은 세계는 무궁무진했을 것이고, 따라서 이들에게는 지도의 제작과 정확한 주변의 파악이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과거인들이 인식했던 지도는 단순한 지리의 반영물이 아니다. 거기에는 당시 사람들의 사고방식, 그들이 바라보는 세계관, 그들이 가진 문화 등을 바라 볼 수 있는, 때로는 역사서보다 더욱 가치 있는 기록물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고대 지도의 제작은 단순한 지리적 호기심에 의해 시도된 측면도 있겠지만, 한 국가의 위상을 높이는 목적이나 다른 국가에 대한 정복전쟁을 위한 목적 등 정치적 목적에 의해 촉구된 측면도 크기에 더욱 그 역사적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지도 제작의 목적 여부를 불문하고, 지도는 과거인들이 우리에게 남긴 소중한 기록임은 분명하다. 지도에 포함된 지명의 변천과정, 그들이 나타낸 세계관을 보며 우리는 시대의 변화상, 사람들의 사고 방식의 변화상을 포착할 수 있고, 이를 통해 과거의 모습을 재구성하며, 역사의 변천과정을 인식해 낼 수 있는 것이다.따라서 우리의 조상인 조선이 1402년 제작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매우 놀라운 지도임 하여, 어떠한 정보를 바탕으로 지도를 제작했는지에 대한 설명과, 결론에서는 이 책을 읽고 느낀 지도가 가지는 역사적 의미에 대해 간략히 기술해 보도록 하겠다.2. 인류의 지도 제작지도는 구석기 시대에도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지금처럼 종이에 필기구를 사용한 지도는 아니였지만, 스페인 나바라 북부 지역의 동굴에서 발견된 돌에 자신들만의 기호로서 자신들이 거주하던 지역의 정보들을 나타내려는 흔적이 보인다. 그들은 이 돌에 주변의 강과 산을 기록하고, 위험한 늪지대를 표현했으며, 수렵의 대상이 되는 짐승들이 있는 곳은 짐승의 형상을 그려서 표현하였다. 또한, 인류문명의 발흥인 티그리스 강 유역의 바빌론 문화권에서도 점토판에 지도를 표현하였다. 2600여년전, 그들은 점토판의 중심에 바빌론을 상정하고, 바빌론은 지나는 유프라테스 강, 티그리스 강을 표현함으로써 물을 관장하는 바빌론의 모습을 나타내었다. 이러한 발견은 아시아의 중국에서도 나타났는데, 후난성 일대의 재상가 무덤에서 발견된 약 2200여년전의 「지형도」에는 강, 호수 등의 물줄기, 관청의 위치, 마을의 위치를 표시하였고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지도가 고도의 축척을 사용한 매우 기술적인 지도 였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들 지도는 모두 자신들의 세계에 국한되었다는 한계를 낳는다. 고대인들에게 넓은 세계를 그려내는 것은 불가능한 작업이었을까?그리스의 프톨레마이오스가 (AD 150년경)그린 세계지도는 이러한 생각을 여지없이 깨뜨린다. 그의 세계지도는 유라시아 대륙을 포함, 아프리카 일부, 그리고 서양지도로는 최초로 중국까지 나타내고 있다. 여기에 26장의 지역도도 덧붙여 있고, 중국을 비단의 땅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시안(장안)과 같은 구체적 도시이름도 등장하여 중국에 대해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고대 인류가 그린 가장 위대한 지도로 평가받고 있다.그렇다면 당시 프톨레마이오스는 어떠한 인식의 기초 하에 이러한 지도를 만들었을까? 여기엔 바로 그리스의 정복왕 알렉산더가 있다. 알렉산더문과 동방의 문화, 학문이 상호교류하는 일종의 ‘헬레니즘적 문화’의 기반 속에서 이러한 혁신적인 세계지도의 제작이 가능했던 것으로 생각된다.초기 인류에게 지도는 생존의 수단이었다. 지도에는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는 길의 정보와 식량을 채취할 수 있는 곳에 대한 정보 등을 기록하여 생존을 도모하였다. 그 후, 서서히 문명의 발전이 이루어지면서, 인류는 점차 자신들의 영역의 확장을 도모했다. 확장을 시도하면서, 확장된 영역을 지도를 통해 기록하고, 다시 확장하고, 기록하는 것들이 반복되면서 지도의 범위도 넓어지고,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에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다. 또한 지도는 자신들의 문명을 드러내고자 하는 의식의 소산으로서 기능하였다. 세계의 중심을 자신들로 보는 문화관에 입각하여 지도를 제작하기 시작한 것이다. 문명의 발달과 함께 이루어진 지도의 확장과 변화된 세계관을 통해 인류는 더욱 먼 곳으로 이동하고 더욱 큰 세상을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이를 통해 정복전쟁, 새로운 영역의 개척 등이 이루어졌고, 인류는 새로운 문화와 교류하고 상호 보완함으로써 더욱 나은 지도, 더 확장된 세계관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공간을 이해하고 표시하는 인류의 본능적인 감각에서 시작된 기록이 범위면에서도 더욱 확장되고, 나아가 이제는 자신들의 상징, 사고를 나타내는 표상으로서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인식 속에서 아시아권, 서구문명 모두 많은 지도의 제작을 시도하였고, 실제로 지도를 국력의 원천으로 인식한 로마제국, 몽고제국은 많은 나라를 정복하고 거대한 제국의 성립에 성공한다. 이처럼 지도는 고대 문명에 있어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처럼 국가 정보력의 핵심이었으며, 정확한 지도의 제작 여부는 정복왕조의 성패를 결정할 만큼의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이다. 근대에 와서도 지도의 중요성은 여전히 강력하였다. 일본은 지도를 손에 넣고 시대의 승자가 되려고 했으며, 그들은 자신들의 앞바다로 들어온 근대 유럽 열강들의 지도를 모방하기 시작했다. 아시아 항로를 연 네덜란드 지조선이 로마나 몽고와 같은 정복왕조는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그들은 어떤 의도에서 이 같은 세계지도를 제작하였는가?3.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제작 배경현재 일본 류코쿠 대학과 나가사키 본광사에서 소장 중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지도의 놀라운 점은 포르투갈의 탐험가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아프리카 희망봉에 도달한 것이 1488년임을 고려할 때, 그보다 86년이나 앞서 중국, 인도, 아라비아 반도, 아프리카 대륙을 비교적 온전한 형태로 그려내었으며, 특히 바다에 둘러싸인 삼각형 형태로 완전하게 그려진 아프리카의 모습이다. 조선은 어떻게 이렇게 정교한 지도를 만들어 내었을까?미야 노리코는 조선의 세계지도에 영향을 준 지도로서 청준의 「혼일강리도」, 이택민의 「성교광피도」란 두 지도를 제시한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는 조선시대 문인 권근의 ‘발문’이 존재한다. 권근은 발문을 통해 지도의 제작시기가 건문 4년(1402)로서 명대 초기의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지도에서 나타나는 ○○로(路)는 이전 왕조인 대원울루스의 행정구역으로서, 이는 대원울루스 치하의 산물로 보이며, 이후 몇몇 부분만 가필된 것으로 판단된다. 청준, 이택민 모두 대원울루스와 명의 시대를 거쳤지만, 대원울루스의 문화적 지원 정책과 명 태조 주원장의 암흑기를 비교해 볼 때, 대원울루스 때의 지도라는 것이 훨씬 설득력을 가진다. 그렇다면「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살펴보기 이전에, 이 지도에 영향을 준 대원 울루스의 지도 제작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대원 울루스 즉, 대원울루스를 포괄하는 몽고 제국은 지도 제작에 많은 심혈을 기울였다. 본래 정확한 지도를 작성하기 위해서는 우선 측량을 위한 천문관측과 그를 처리할 수학, 그 중에서도 대수학의 능력이 중요하다. 그러한 측면에서 칸 뭉케는 알라무트 산성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이슬람 수학자 ‘나시르 투시’를 구출하여 등용함으로써 몽고의 지도제작과 관련한 중요한 기반을 마련한다.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몽골고원에서 발원하여 유럽일대와 중국대륙을 평정한 몽고으로 완성) 와 「천하지리총도」로서 결실을 맺게 된다. 비록, 전자가 대원울루스만을 기록했다는 한계와 방대한 양, 비공개의 원칙의 한계를 갖는 지도이지만, 몽고의 지도제작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의 깊이를 잘 알 수 있는 지도라고 생각한다. (후자는 몽고의 업적을 일종의 ‘보여주기’위한 목적을 가진 지도였다.) 중요한 것은 몽고가 정복국가로서 이슬람의 발달된 천문학, 수학을 수용하여 상당히 발달된 지도제작기술을 보유하게 되었다는 점이며, 중국의 전통적 ‘화이사상’에서 탈피하여 세계를 바라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이렇게 본다면 대원울루스 시절을 경험한 청준, 이택민 역시 당시의 지식인 계층이었다는 점에서, 또한 새로운 정보, 문화가 유입되는 항구도시 경원로에 생활의 거점을 두었다는 측면에서 새로운 아프리카, 유라시아에 대한 세계관에 대한 인식을 분명히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이 제작한 「혼일강리도」, 「성교광피도」역시 이러한 세계관 속에서 몽고의 지도제작기술을 반영한 지도였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러한 선진적 문물이 조선의 정치적 상황과 맞물리게 되면서 조선으로 유입되었던 것이다. 당시 조선의 상황을 살펴보면, 건문4년(1402)년은 태종 2년의 시기로서, 이방원이 왕위에 오른지 얼마되지 않은 시점이다. 이방원은 그 왕위 등극 과정이 형제들 간의 살육이란 과정을 거쳤다는 점에서 대외적, 대내적 정당성의 기반이 매우 취약하였다. 이방원 자신도 이를 인식하였는지, 스스로 학문에 열중하는 모습을 보이고, 효(孝)를 강조하는 등 자신의 결점을 보완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작업의 일환으로서 주목할 만한 것이 있는데, 그것을 바로 태종의 생일을 맞아 헌상된 이회가 작성한 ‘본국(조선)의 지도’「팔도도」이다. 이 「팔도도」에는 「일본도」에 근거한 일본의 모습이 나타나 있는데, 이 「일본도」의 유입시기가 문제가 된다. 사실 이 「일본도」유입과 그에 따른「팔도도」의 제작은 태조 이성계 시기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즉,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중국 한다.
    인문/어학| 2012.12.16| 5페이지| 1,500원| 조회(193)
    미리보기
  •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비판적 검토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Ⅰ. 서Ⅱ. 임나일본부의 주체는 누구인가?1. 야마토 왕권 파견설3. 제왜파견설2. 백제 파견설4. 외교사절설Ⅲ. 임나일본부설의 비판적 검토1. 야마토 왕권의 전제화 여부3. 광개토대왕릉비에 기록된 왜5. 영산강 유역의 전방후원형 고분2.「일본서기」분석4.「삼국사기」에 보이는 왜6. 「송서」에 기록된 왜Ⅳ. 결론Ⅰ. 서임나일본부설이란 일본의 역사서 「고사기」「일본서기」등의 내용을 바탕으로 일본의 고대국가 야마토(大和)정권이 4~6세기 약 200여년간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학설이다. 임나일본부설은 일본의 조선 강제합병과정에서 일본의 조선침략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서 ‘과거로의 환원’이라는 인식하에 일본학계에 의해 주도면밀하게 재구성 된 측면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2차 세계대전 이후, 1949년 스에마쓰(末松保和)의 「임나흥망사」를 통해 소위 ‘한반도 남부 경영론’ ‘남선경영론’이라 불리는 임나일본부설의 학문적 체계를 구축하였다. 그 후 스에마쓰의 임나일본부설은 오랜 동안 일본의 사학계에서 정설로 인식되어 왔으나, 1970년대 들어서며, 역사적 타당성에 대한 의문과 함께 학계의 논의가 시작된다. 이후 한-일 양국 간 많은 논의들의 전개되어 왔으나 그 실체에 대한 정확한 역사적 분석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현재 임나일본부설은 일본 역사교과서에 실리고 있는 실정이다. 동북공정, 임나일본부, 왜곡된 역사교과서와 같은 역사 분쟁의 쟁점들은 동아시아 국가들 간의 협력과 상생의 질서를 깨뜨리고 갈등과 분쟁으로 나아갈 소지가 매우 크다. 따라서, 향후 전개될 동아시아 국제적 질서를 위해서도 올바른 역사인식과 교육의 확립은 매우 중요할 것이며, 평화적 공존의 동아시아 국제질서로 나아가기 위한 길목인 한-일간의 첨예한 역사전쟁의 중심에 바로 이 임나일본부설이 있다.Ⅱ. 임나일본부 설의 연구동향1. 야마토 왕권 파견설종래 일본학계의 견해로서, 최초의 전형은 「대일본사」의 신라전 ? 임나전(1720) 으로서 신공왕후의 삼한, 가라 7국 평정을 그리라의 내부적 힘의 통일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임나를 지배했던 주체, 즉 야마토 정권이 일본열도를 완전히 통일한 중앙집권적 정부였는지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일본 측이 야마토 정권의 전제화를 뒷받침하는 근거로서 제시한 두 가지 유물이 있다. 하나는 강전 선산고분 대도 명문(江田 船山古墳 大刀 銘文), 다른 하나는 도하산 고분 철검 명문(稻荷山古墳 鐵劍 銘文)이다. 일본 측은 이 두 유물의 금석문 분석을 통해 5세기 말 일본열도의 전제화를 상정한다. 이 두 유물의 핵심은 대왕명에 관한 논의이다. 여러 의견이 분분하나, 일본학계는 도하산 고분 철검 명문의 해석을 바탕으로 ‘大王’을 명문의 ‘획가다지로’로를 와카타케루로 읽고, 이를 웅략(雄略;유라쿠)천황으로 비정하여 이것을 다시 「송서」의 왜 5왕 중 ‘무(武)’와 일치시키면서 5세기 말의 야마토 왕권의 전제화를 상정한다. 이를 근거로 도하산 고분 철검 명문의 신해년을 471년으로 보아 웅략천황 제위기간(456~479)으로 설정함으로써 다시 한번 웅략조임을 분명히 한다. 하지만, 「송서」에는 ‘흥’이 죽고 ‘무’가 즉위한 시기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이 의문으로 대두된다. 「송서」견사기사)를 통해 무의 즉위시기를 추정하자면, 478년 5월 송조에 사신을 파견한 왜왕의 이름이 ‘무’로서 처음 등장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 이전인 477년대의 왕을 ‘흥’왕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무가 즉위한 연도는 477년이나 478년이 되어 타당치 않게 된다.)또한 명문의 내용을 통해서도 모순점을 찾을 수 있다. 먼저, 명문에 등장하는 치천하(治天下) 사상을 살펴보면, 신해년을 471년으로 본다면, 이는 478년 왜왕 무가 송에 상표문을 제출한 것과 배치될 수 있다. 상표문(上表文)을 보냈다는 것은 곧 중국에 대한 왜의 복속의식을 나타내므로, 이러한 치천하와 같은 자주적 사상은 중국과의 외교 속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이는 6세기 이후 중국과의 외교가 단절된 왜의 모습으로 상정함이 더욱산(古沙山: 고부)에 올라 함께 반석 위에 앉았다. 이때 백제왕이 맹세하여 말하였다. “만약 풀을 깔아서 자리를 만든다면 불에 탈까 두렵고, 나무로 자리를 만든다면 물에 떠내려갈까 걱정된다. 그러므로 반석에 앉아 맹세하는 것은 오래도록 썩지 않을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니, 이로써 지금 이후 천년, 만년 끊이지 않고 항상 서번(西蕃)이라 칭하고 봄 가을로 조공하겠다.” 곧 지쿠마나가히코를 거느리고 도읍에 이르러 후하게 예를 더하고 구저 등을 함께 보냈다.(「진구공기」49년조)이 신공황후 49년 기록을 자세히 살펴보면 야마토정권의 작전이라기보다 오히려 백제의 작전이 아닌가 의문이 든다. 우선 이 작전에서 왜에서 동원된 군대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 기록의 작전은 두 갈래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백제장군으로 되어있는 목라근자의 군대가 탁순(대구)에서 집결해 신라를 격하파고 가야7국을 평정한 후 남해안의 서쪽으로 진격해 고해진(강진)에 이르러 남만 침미다례(강진)를 취해 백제에 주고있다. 그리고 백제의 근초고왕(재위 346~75))과 왕자 근구수(뒤에 근구수왕, 재위 375~84)의 군대가 한성(서울)에서 남하해 고해진으로 내려가고 있다. 이때 양군 사이의 지역에 해당하는 비리(전주), 벽중(김제), 포미지(미상), 반고(나주 번남) 4읍이 스스로 항복한 것으로 되어있다. 따라서 두 갈래 군대는 전부 백제군으로 이 작전은 가야7국을 평정하고 옛 마한 지역을 정벌한 백제의 작전임을 알 수 있다. 일본 학계에서는 목라근자의 군대를 야마토정권의 군대라고 주장한다.하지만 탁순에 집결해 가야 7국을 평정하는 군대의 책임자는 야마토정권의 아라타와케(荒田別), 가가와케(鹿我別)가 아니라 목라근자였다고 생각한다. 먼저 아라따와케, 카가와께는 성과 씨만 기록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문헌에서 전혀 확인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가공된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또한 이들은 '신라를 격파했다'는 간단한 한마디뿐이고 실제로는 가야7국 평정과 같은 다른 작전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생각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 지방장관이 소속될 '임나**부'는 당연히 백제의 기관이 될 것이다.2-3. 임나경영이 일본의 것으로 나타난 이유일본서기에 나타난 야마토정권의 임나경영의 내용을 살펴본 결과 사실은 이것이 백제의 이야기였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렇다면 이제는 왜 일본서기에는 목씨로 대표되는 백제세력의 임나경영이 일본천황의 명에 따라 이루어졌다고 기록되었는지 의문이 생긴다.일본서기에는 목라근자를 백제의 장군이라고 명시)하면서도 그 아들인 목만치는 왜인으로 인식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런데 원인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일본서기에 인용된 백제기의 오오진천황 25년조나 일본서기를 보면 목만치가 한반도에서 활약하다 도일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목만치가 실제로 도일하여 일본에 정착해 왜인이 되었기에 일본서기에서 그를 왜인으로 서술한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목만치가 도일한 뒤 삼국사기나 일본서기에서는 전혀 그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비슷한 시기에 일본에서 소가씨의 조상으로 목만치와 이름이 일치하는 소가만지가 등장하는데 이는 일찍부터 일본 학계에서도 소가만지가 백제의 목만치가 아닐까 하는 의문이 제기되어 왔다. 소가씨는 백제가 5~6세기에 걸쳐 보낸 기술자들을 장악하고 그들을 바탕으로 야마토정권의 실권을 장악한 호족이었다. 소가씨가 백제에서 건너갔음은 한국과 관련한 이름들을 가진 소가씨의 계보, 소가노 우마꼬가 조상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아스까사의 준공식 때 참석자 100명과 더불어 백제의 의복을 입었다는) 기록 그리고 신찬성씨록에 소가만지의 6대손인 소가입록을 '백제국 목씨의 후예다.'라고 기록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400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백제는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왜를 끌어들였음은 삼국사기와 광개토대왕비문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475년 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이 전사하는 국가존망의 위기에서 신라의 구원을 청하면서 이미 400년 전후부터 동맹관계에 있던 왜에게 구원청하지 않았을리 없고 그 사절로는 목라근자 때부터 임나를 관장하5년) 김부식에 의해서 편찬되었다. 삼국사기에는 일본서기만큼이나 왜에 관한 기사가 많이 보인다. 그 중 혁거세 8년(BC 50)에서 소지왕 22년(AD 500)까지 왜의 침입내용이 29건이나 보인다. 그중에는 왜군이 신라의 서울이었던 금성 즉, 경주를 포위했다는 내용이 4건이 있다. 따서 일본 학자들은 삼국사기에 보이는 왜의 침입 내용은 일본서기에서 보이는 야마토 정권의 한반도 남부 경영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삼국사기는 더구나 한국의 사서이기 때문에 더욱 좋은 증거가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하지만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왜는 일본서기의 왜와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인다. 일본서기의 왜는 모두 낙동강 하구로 진출하지만 삼국사기에서는 동해로도 왜가 들어오는데 이는 당시 야마토 정권이 외에 이즈모(出雲, 현재의 시마네현), 쓰쿠시(筑紫, 현재의 후쿠오카시), 기비(吉備, 현재의 오카야마현) 등의 세력이 존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는 당시 왜가 야마토정 권에 의해 통일된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그리고 일본서기에서 보이는 왜는 대부분 임나경영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되어있고 왜에 의한 임나경영은 6세기에 절정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삼국사기에는 임나경영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그리고 왜에 대한 기록도 500년을 끝으로 전혀 보이지 않다가 7세기 후반에 다시 나타나고 있다. 이는 야마토 정권이 6세기에 임나를 경영한 사실이 없다는 것과 잘 합치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사실은 앞서서 살펴본 야마토 정권은 임나를 경영한 주체가 아니라 백제를 지원하는 입장에 지나지 않았다는 일본서기에 대한 검토 결과와도 일치한다.5. 영산강 유역의 전방후원형(前方後圓形) 고분영산강 유역의 ‘전방후원형 고분’에 앞서, 일본이 자랑하는 ‘전방후원분’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자면, 3세기 중엽부터 야마토 지역에 나타나기 시작해서 점차 그 영역을 확대해 나가는 야마토 왕권 전제화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고분형태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990년대 이후, 고고학적 발굴이 활발히 이루.
    인문/어학| 2012.05.13| 14페이지| 2,000원| 조회(304)
    미리보기
  • C.Mills의 사회학적 상상력 서평
    사회학적 상상력 서평미국 사회학자 C.라이트 밀즈는 「사회학적 상상력」이란 책을 통해 사회과학 전반에 대한 재인식을 요청하고자 한다. 즉, 그간의 미국 사회과학 내의 관료주의적이고, 보수주의적인 관점의 획기적 변환을 추구하며, 이 과정에서 사회학적 상상력은 그 변환의 중심에 서있는 밀즈의 핵심개념이다. 우리는 이 사회학적 상상력을 몸에 완전히 체득함으로써 그간의 사회를 바라보았던 낡은 시점에서 벗어나 사회과학의 올바른 방향설정과 사회학도로서의 태도를 재정립할 수 있는 기회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사회학적 상상력이란 일종의 정신적 자질로서, 정의하자면 사회를 바라보는데 있어서 어느 하나에 국한된 시각이 아닌, 다양한 시점을 넘나들며, 그 이면에 작동하는 사회구조의 작동을 포착할 수 있는 능력으로 정의하고 싶다. 오늘날 많은 부분들이 서로 복잡하게 상호작용하는 사회 속에서 어느 하나에 매몰된 시각은 피상적, 수박 겉 핥기 식의 통찰만 가져올 것이며, 또한 사회과학의 본질인 인간성, 더 나아가 역사 속에 위치하는 인간을 볼 수 있기 위해서도 이러한 사회학적 상상력의 자질은 매우 필요한 것으로 인식된다.예를 들어, 우리가 흔히 운동할 때 사용하는 ‘축구공’ 또는 요즈음의 트렌드인 전문점 ‘커피’를 살펴본다면, 그 이면에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든지, 아프리카와 동남아 일대의 아동노동, 약탈적 노동에 대한 사회현상의 문제도 대두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의 사회현상 이면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많은 개인, 집단, 환경, 구조들이 작동하고 있으며, 사회문제의 올바른 인식은 그 이면을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을 때 더욱 분명해 진다.이 책은 이러한 사회학적 상상력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우선 전반부(제1~6장)에서는 사회학의 방법론에 대한 이론적인 주제를 다룬다. 즉, 개인문제와 공공문제, 그리고 사회구조를 이해시키는 보편적 도식으로서의 거대이론, 이러한 도식을 정신적 측면에서 고찰하는 추상적 경험주의, 합리화된 사회 속에서 인간 이성이 갖는 의미, 과학철학 등을 다룬다.후반부(제7~10장)에서는 1장 ‘약속’에서 제시한 사회과학에 대한 ‘약속’의 구현에 대한 것을 구체적으로 서술한다. 개인적 문제를 구조적 변모의 문제로 인식하지 못하는 오늘날의 사회 속에서 어떻게 하면 역사와 개인의 일생을 연관 지어 바라 볼 수 있게 하는지, 더불어 현대사회의 불안과 무관심의 문제를 명백히 인식할 수 있는지에 대한 밀즈의 의견이라 볼 수 있다.사회학도라면, 아니 사회과학자라면 밀즈가 이야기하는 ‘사회학적 상상력’은 오늘날에 있어 한층 더 적합한 의미를 가진다. 현대 사회과학자의 핵심적 임무 중 하나가 바로 현대인의 불안과 무관심을 규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현대사회의 개인들은 ‘올가미’에 걸린 듯한 느낌을 받거나, 매우 불안한 상태 속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이 불안들이 모두 ‘개인문제’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또한 대중들의 무관심도 마찬가지로 모두 사회문제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여기서 사회학적 상상력이 역할을 수행한다. 즉, 막연한 불안을 개인의 문제로, 대중의 무관심을 공공의 문제로 인식하고, 나아가 참여를 이끌어내는 역할을 사회학적 상상력이 수행하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개인문제와 공공문제를 구별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개인문제를 사회전체문제로 또는 개인만의 문제로, 나의 탓으로 돌리지 않을 수 있게 된다. 여기에서 나아가 개인문제와 공공문제는 상호작용하며 연결되어 있음을 인식하여, 어떻게 개인의 문제가 공공문제가 되는지, 공적인 이슈가 나의 삶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그 이면에 작동하는 사회구조를 직시할 수 있다면 이는 사회학적 상상력의 목표이자, 밀즈의 의도에 한층 더 가까이 다다르게 되는 길이 될 것이다. 사회구조의 관념을 인식하고 그것을 분별 있게 이용한다는 것은 극히 다양한 환경 중에서 그러한 관계를 추적할 줄 안다는 의미이며, 그것을 할 줄 안다는 것은 곧 사회학적 상상력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그렇다면 오늘날에도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사회문제들은 어느 때 발생하는 것인가? 밀즈는 개인의 또는 공공의 가치가 위협받게 될 때 그것은 사회문제로서 대두된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듯이, 불안과 무관심이 만연한 현대사회 속에서 개인들은 이러한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지도 못하고 있기에, 이것들이 사회과학의 문제로 상정되어 토론, 합의의 과정을 거칠 수도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회문제를 바로 인식하고 나아가 해결하려는 시도가 사회학적 상상력이란 자질의 배양이며, 이는 밀즈가 사회과학의 ‘약속’을 풀어나가는 구체적 제시를 통해 드러난다.사회는 ‘다양성’으로 정의된다. 오늘날 사회에도 수많은 개인들이 존재하며, 역사적으로 본다면 더욱더 무수한 과거의 개인들이 더해질 것이다. 이렇게 다양한 인간들을 포괄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물론 개개인의 특성을 하나하나 살피는 것을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각 개인 행위의 이면의 사회구조를 본다면 그것은 가능할 수 있다. 이는 한마디로 전체 사회구조의 다양성을 그 구성요소와 전체를 분리하는 시각으로 바라볼 것을 요청한다. 수많은 개인 - 그 개인들의 집단 - 그들을 둘러싼 환경 - 환경들이 모여 구축한 제도 - 그 제도들이 형성한 사회구조의 순으로 환경과 구분된 사회구조를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밀즈는 요청한다.보편적 인간이란 없으며, 무수히 다양한 인간들이 거대한 역사적 흐름 속에 만나는 지점을 포착해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과학에 있어 역사는 필요한가? 우리는 역사 속에 존재하고 현재 또한 역사는 흘러가고 있다. 우리가 이 단순한 진리를 부정하지 않는 한, 어떠한 사회과학도 역사를 초월하는 것이 될 수 없으며, 사회과학도는 역사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의 다양성을 고려하지 않는 연구는 피상적이며 잘못된 결과에 다다르기 쉽고, 또한 역사의 변동 속에 포함된 사회구조 변화의 메커니즘을 놓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역사의 변동 속에는 그 역사적 특수성을 통해 나타나는 사회구조가 있으며 이 사회구조는 개인의 일생과 깊은 연관성을 가지는 제도로 구성된다. 사회구조의 관념은 특정 개인이나, 환경속의 개인만을 고려해서는 성립될 수 없으며 이와 같은 제도와 그를 통해 구성되는 구조를, 나아가 역사속의 변동과정을 살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역사로부터 도피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그렇다면 현대 사회의 주요 문제인 불안과 무관심의 근본적 원인은 무엇인가? 근대 이래, 과학적/기술적 사고에 입각한 효율성의 원리로서 개인의 ‘합리성’은 현대인의 주요 생활원리로서 자리 잡았다. 문제는 이러한 합리성의 확대가 인간행위와 사회구조형성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이성과 자유라는 가치를 보장해주느냐 이다. 밀즈는 개인 또는 공공이 소중히 여기는 가치를 이성과 자유라고 상정하고 있으며, 이것이 위협받는 시대가 불안과 무관심속의 현대사회라고 바라본다. 현실로 돌아와 보면 합리성은 이성과 자유의 증진을 보장하지 못한다. 오히려 관료제의 사례처럼 인간을 소외시키고, 인간을 가두는 틀로써, 베버의 표현을 빌리자면 ‘새장’을 형성하여 이성과 자유를 억압하는 현실이다. 합리성과 이성간의 모순이 현대 불안과 무관심의 근본적 원인이 되며, 이를 제대로 인식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사회학적 상상력인 것이다.
    독후감/창작| 2012.04.18| 3페이지| 1,000원| 조회(273)
    미리보기
전체보기
받은후기 1
1개 리뷰 평점
  • A+최고예요
    1
  • A좋아요
    0
  • B괜찮아요
    0
  • C아쉬워요
    0
  • D별로예요
    0
전체보기
해캠 AI 챗봇과 대화하기
챗봇으로 간편하게 상담해보세요.
2026년 05월 22일 금요일
AI 챗봇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 AI 챗봇입니다. 무엇이 궁금하신가요?
3:41 오후
문서 초안을 생성해주는 EasyAI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의 20년의 운영 노하우를 이용하여 당신만의 초안을 만들어주는 EasyAI 입니다.
저는 아래와 같이 작업을 도와드립니다.
- 주제만 입력하면 AI가 방대한 정보를 재가공하여, 최적의 목차와 내용을 자동으로 만들어 드립니다.
- 장문의 콘텐츠를 쉽고 빠르게 작성해 드립니다.
- 스토어에서 무료 이용권를 계정별로 1회 발급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바로 체험해 보세요!
이런 주제들을 입력해 보세요.
- 유아에게 적합한 문학작품의 기준과 특성
- 한국인의 가치관 중에서 정신적 가치관을 이루는 것들을 문화적 문법으로 정리하고, 현대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를 비교하여 자신의 의견으로 기술하세요
- 작별인사 독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