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란 무엇인가?-포스트모더니즘을 통해 역사 찾아 가기-◎‘역사’와의 첫 만남.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중학교시절까지 가장 동경했던 인물은 엉뚱하게도 ‘춘향전’의 ‘이몽룡’이였다. 시원스레 그네를 타던 예쁘고 사랑스런 여인인 춘향이를 생각하며 열심히 공부하여 급기야는 장원급제하여 암행어사가 된 이도령. 자신을 위해 끝까지 정조를 지킨 춘향이를 구하기 위해 악랄한 변사또에게 당당히 마패를 내밀 때의 그 모습이란 상상만 해도 멋있었다.그러나 현실에서는 아무리 주변을 둘러보아도 춘향이가 타던 멋진 그네는 없었다. 그토록 다소곳한 여인도 없었다. 결정적으로 내 주변의 여자애들은 한복이 안 어울렸다. 손에는 ‘엽전’대신 ‘100원짜리 동전’이 있었고 옆구리에는 묵직한 쇳덩이 마패 대신 플라스틱 마패가 하얀 실에 묶여 있었다. 그리고 그 당시 어머니의 말씀을 빌리자면 장원급제는 꿈도 꿀 수 없는 성적이었다.그래도 가끔씩 민속촌으로 소풍을 가면 이미 난 ‘이몽룡’이였다. 민속촌에는 내가 상상한 과거가 고스란히 있었다. 초가집 뒤뜰로 발을 옮길 때면 그 옛날 그 집의 주인이 그곳에 있을 것만 같아서 살짝 눈만 내밀곤 했다. 포도청 같은 곳에 들어갈 때면 보이지도 않는 변사또를 향해 막 기념품점에서 산 묵직한 마패를 손을 뻗어 보이곤 했다. 몰래 짝사랑하던 여자아이를 멀찌감치 바라보며 ‘장원급제’를 다짐하기도 했다.이렇게 ‘역사’는 전래동화라는 이름으로 내게 말을 걸어 왔지만 내게 있어 그것은 동화가 아닌 사실이었고 역사였다. 더군다나 나에게는 눈에 보이는 초가집, 한옥, 기념품, 경복궁, 광화문, 남대문 같은 유물들이 있었다.◎‘진리’로서의 역사(?)한창 사극 드라마에 매료되어 있던 때가 있었다. 그 당시 TV속의 허준은 나에게 우상이었다. 그는 삶의 어려운 고난들을 이겨나가고 스승 유의태보다도 훨씬 뛰어난 의술을 지녔던 최고의 의사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많은 대적들의 음모 속에서도 오직 정직과 인내로 악한 대적들을 물리치고 결국에는 어의 자리에 까지 오르는 정의의 사도 것이다. 이런 역사에 대한 인식이 비단 나에게만 존재하는 것 같지 않다.최근 충남 공주시 웅진성에서는 ‘웅진성 수문병 교대식’ 재연 행사가 열렸었다. 서울 송파구에서는 백제대왕 시가행렬이 펼쳐지기도 했다. 그 시가행렬 주변에는 신기한 눈초리를 한 수많은 시민들과 관광객들이 줄지어 서있었다. 무언가 다른 복장을 한 사람들이 신기하기만 한 아이들에게 부모들은 역사 교육을 하기 시작했다. 지금 살고 있는 곳이 옛날에는 백제 땅이었다는 것부터 시작하여 백제의 마지막 왕은 의자왕인데 삼천궁녀를 데리고 살만큼 문란한 생활을 하다가 망했다는 사실(?)에 이르기까지 자세한 설명을 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아이들은 내가 역사를 바라보았던 동일한 눈빛으로 그 시가행렬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러나 진정으로 그 시가행렬은 옛 백제대왕의 시가행렬을 완벽히 재현해 낸 것일까? 의자왕은 삼천궁녀를 데리고 있었을까? 조선시대 암행어사는 정말 힘이 막강했을까? 기생인 춘향이를 얻고자한 변사또는 법적으로 정말 나쁜 놈일까? 허준의 스승이 정말 유의태일까?오늘날의 역사는 대중매체로 인해 왜곡되어진 채(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우리에게 남아 있다. 설령 그 왜곡된 역사에 대해 바로 알게 되어도 오히려 왜곡된 역사를 더 선호하는 경향마저 보인다. 그렇다.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 역사는 그 정도이다. 오늘날 우리의 역사는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수단이자 교훈의 우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그것이 역사적 사실인지 아닌지에 대한 큰 관심도 없어 보인다). 역사는 단순히 우리의 상상을 만족시켜주기만 하면 되는 한낱 이야기에 불과하다. 이러한 현상을 역사가들은 포스트모더니즘 때문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천만에 말씀. 일반인들은 포스트모더니즘에는 관심도 없다. 다만 역사 연구가 귀찮을 뿐이다. 역사는 현실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하는 삶의 경험 때문이다. 일반인들에게 역사는 시간과 돈을 들여 연구해 볼 가치가 없다. 가끔씩 자존심 상하게 하는 일본과 중국의 역사 왜곡이 기분인간을 위한 이야기’인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몇 가지 특성을 살펴보는 것을 중심으로 역사를 연구하는 이유(필요성)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첫째, 인간은 본능적으로 과거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어떠한 이유에서든 인간은 과거에 대한 호기심을 갖고 있다(혹은 갖게 된다).‘과거의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왜 이런 물건들이 과거에는 사용되었을까?’등과 같은 궁금증을 갖게 되기 마련인 것이다. 나아가‘인류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하는 것은 우리의 현실의 삶에 직접적인 유익을 주지는 않지만 모르고 지나가기에는 너무도 궁금한 역사임이 분명하다.둘째, 인간은 자신의 근원(뿌리)를 찾음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세우려고 한다.자신을 낳은 부모님의 살아온 삶과 부모님을 낳은 조부모님의 삶과 그 조상들의 삶은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한 원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부모님들이나 자신이 살아온 국가가 어딘지에 따라, 그 당시 국가의 정세가 어떠했는지에 따라, 각자의 정체성이 달라진다. 지금의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형성된 것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과거를 알아야만 한다.셋째, 인간은 현재와 미래에 일어난 어려운 일들을 극복해 나가고자 한다.이러한 인간의 특징은 과거가 아닌 미래를 연구하는 미래학에 있어서도 나타난다. 세계적인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한다.“오늘날의 커다란 변화들을 이해하고 전략적으로 대처하려면 단편적인 정보, 영상, 목록표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여러 가지 변화들이 서로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알아야 한다... 따라서 이 책)은 내일의 폭발을 유발하게 될 사태, 즉 새로운 문명이 낡은 문명의 공고한 요인들과 충돌함에 따라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여러 가지 분쟁들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제 3물결])은 기술 및 사회분야에서 일어난 최근의 혁명적 변화들을 설명함에 있어서 이 변화들을 역사적으로 조명하면서 그 결과로 나타나게 될 미래의 모습을 묘사했다...”미래학은 과거와 현재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을 연구함으로써 ‘앞으로) 어하지는 않지만 한끼 식사 정도는 해결해줄 수 있는 방안이 될 수 있다고 본다. 그 밥상이 풍성하지 못한 이유는 이미 빼앗겨 버린 역사 연구의 자부심 때문이다. 세상을 움직이는 원리로서의 자부심이 갈기갈기 찢어진 역사가들의 밥그릇 찾기의 행보를 좇아보지 아니하고서는 ‘역사란 무엇인가’를 논하기란 참으로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생각하는 역사란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과정 속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하는 칼을 도구로 삼고자 한다. 그 칼로 기존의 역사관을 도려내고 다시 수술하는 과정을 통하여 역사가들과 역사에 관심 있는 사람들(나는 이 부류에 속할 것이다)의 입맛에 맞는 밥상을 차려보고자 한다.역사는 기본적으로‘사건(과거에 일어난 일 그 자체)’과‘사관(역사를 바라보는, 평가하는 관점)’그리고‘사건의 기록(언어)’으로 구성되어 있다. 과거에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그 당시 과거의 역사가는 그 사건을 기록하고 그 기록된 것을 현대의 역사가가 발견하여 과거의 사건을 해석해 낸 것이 바로 역사인 것이다.역사의 기본 구성요소인 사건, 사관, 기록과 그에 따른 해석의 관계를 잘 설명한 역사의 정의가 있다. 유명한 역사학자 E. H. Carr가 말한‘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대화이다’라는 정의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 정의를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이것은 정의 자체가 잘못 되었다기 보다는 담고자하는 내용 자체, 즉‘과거의 사건이 현대에 재현되는 과정’에 이미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E. H. Carr의 정의를 통해 역사란 무엇인지 추론하여 보고 그것의 문제점은 무엇인지 밝힌 후 내가 생각하는 역사란 무엇인지 결론을 내리고자 한다. 특별히 E. H. Carr의 정의에서 문제점을 발견 하는데 있어서는 포스트모더니즘 개념을 사용하고자 한다.◎‘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대화이다’속에 보이는 역사의 정의.먼저‘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대화이다’라는 명제 속에 있는‘대화’라는 단어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대화’는 대화하는 상호간에‘정보’를 교류)다음으로‘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대화이다’라는 명제는 문장 자체에 대화의 중재자가 필요함을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과거나 현재 모두 스스로에 대한 말을 서로에게 전달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역사에 있어서‘역사가’는 바로 이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한다. 역사가를 통해서만 그 둘의 대화가 가능하기 때문에 역사가는 그만큼 중요한 위치에 자리하게 된다. 이것은 곧 역사가가 과거를 바라보는‘관점(사관)’이 중요해짐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의 관점이 어떠한 가에 따라‘과거’는‘역사’로서 존재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역사란‘역사가의 사관에 의해 재현된 과거’라고 볼 수 있다.◎무엇이 문제인가?●‘과거의 사건에 대한 정확한 재현’은 불가능하다.과거는‘기록’을 통해 해석자인 역사가에게 말을 건낸다. 그것은 역사가가 정확한 과거를 보기 위해서는 과거에 일어난 모든 일이 다 기록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절대로 일어난 모든 일을 다 기록할 수는 없다. 즉, 기록이라는 과거의 사건에 대한‘언어로의 전환’과정 자체에 문제가 발생한다는 뜻이다. 기록이 되는 순간 이미 기록하는 자의 어떤 필요나 의도에 의해 과거의 사실 중 일부만이 선택되어 지는 것이다. 이것은 풍경을 그린 그림이 풍경 그 자체일 수 없고 한반도의 지도가 실재하는 한반도와 같은 것일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그렇게 선택되어져 기록된‘사료적 사실’) 이 전부 역사로 인정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기록이 역사가에게 이해되어져야 하고 이해되었다고 할지라도 역사가의 사관에 의해 또 한번 선택되어져야 한다. 그러나 우선적으로 사료에 나타난 과거의 언어를 현재의 역사가가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믿음은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전제에 불과하다. 역사가에 의해 생략된 것은 망각되어 사라진다. 역사가의‘사관(주관)’은 어떤 것을 특별히 기억하기 위해 그 밖의 다른 것들을 망각시킨다.◎수술 뒤에 남겨진 찌꺼기: 역사가의 사관.이제 역사는 역사가의 사관에 의해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역사가것일까?
목 차Ⅰ. 서론 ................ 1A. 문제제기와 연구목적................ 1B. 연구 방법 및 범위... 1Ⅱ. 기독교와 사회주의............. 1A. 기독교와 맑스주의... 2B. 기독교와 종교사회주의............. 3C. 종교사회주의자들과 칼 바르트. 31. 아버지 불룸하르트와의 관계..........42. 아들 불룸하르트와의 관계..............53. 헤르만 쿠터와의 관계....54. 레 연구 방법 및 범위위에서 언급한 연구목적을 수행하기 위하여 본 논문은 다음과 같은 연구방법과 순서로 서술된다.먼저, 제 2장에서는 기독교와 사회주의의 관계를 기독교와 맑스주의 그리고 종교사회주의의 관계 속에서 고찰하고, 종교사회주의자들을 통한 칼 바르트에 대한 사회주의적 영향에 관하여 서술한다.제 3장에서는 칼 바르트의 생애와 신학적 사상의 흐름의 변천을 따라 각각의 시기에 나타나는 사회주의에 대한 칼 바르트의 입장을 분석한다.제 4장에서는 결론의 장으로서 본 논문 전체에 대한 결어와 칼 바르트와 사회주의의 관계에 대한 요약 및 제언하며 글을 정리하였다.Ⅱ. 기독교와 사회주의A. 기독교와 맑스주의맑스에 의하면, 인간의 곤궁의 핵심은 물질적 곤궁에 있다. 종교 속에는 이 물질적 곤궁이 투사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물질적 곤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의 그 원인이 되어 존재하는 사회 경제 질서를 고쳐야 한다. 즉, 자본주의체제가 갖고 있는 사악한 구조적 관계를 부수어야 한다.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돈이 전능한 신이 되고, 인간은 그것에 매여 있는 종으로 전락한다. 또한, 이 돈을 가진 자가 전능한 지배자로 군림하게 된다. 여기에서 인간은 소외되고 인간은 그 참된 인간성을 상실하고 자본가를 위한 도구로 전락된다. 이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노동자 계급은 노동의 참 기쁨을 상실하게 되고 물건화(verdinglichung)된다. 따라서 이 심각한 인간의 소외 현상을 극복하고 인간다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체제의 핵심인 사유재산제도를 폐기하고 생산 수단을 사회화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혁명이 불가피하고 계급투쟁이 불가피하다. 자본가 계급의 지배에 종식을 고하게 하고, 노동자들의 인간다운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그런데, 맑스는 이 인간의 곤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종교의 역할은 지극히 부정적이라고 주장한다.)맑스에 의하면, 종교는 현실을 개혁하기 위한 의지를 인간에게 심어주는 것이 아니고, 현실 도피의 길을 제공할 뿐이다. 종교는 현실의 곤궁을 잊게 하는(Christoph Blumhardt)는 기독교의 복음의 본질이 하나님의 나라와 관련되어 있고 이 하나님의 나라는 현실의 구체적인 물질적인 삶의 변혁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명백히 드러내 주었다.)블룸하르트는 예수께서 육체로 오셨다는 복음의 선포가 이미 기독교가 영혼만의 종교가 되기를 거부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블룸하르트는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가 신약성서의 핵심적 선언임을 강조했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을 변혁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늘과 땅이 변화되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 블룸하르트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립되는 사회 속에 나타나는 사탄의 전형적인 형태가 세상을 지배하고 파괴하고자 하는 자본주의 속에 나타나고 있다고 보았다. 즉, 그 본질이 돈을 숭배하는 것(Mammonismus)인 자본주의는 “반신적”(Antigott)인 것이다. 그러므로 블룸하르트는 사회민주주의 운동은 하나님께서 자본주의에 심판을 선언하는 “하늘에 있는 불꽃”(ein Feuerzeichen am Himmel)이라고 보았다. 사회민주주의 속에는 오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어떤 징표들이 들어 있다. 그는 사회민주주의의를 계층간의 정의를 이룩할 수 있는 좋은 도구로 생각했고, 그 속에 이웃 사랑의 따스한 정신이 살아 움직이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렇게 블룸하르트가 원했던 사회주의는 프롤레타리아의 증오를 기초로 해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거쳐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나아가는 계급 투쟁적인 노선이 아니고 참된 형제애에 기초를 둔 계급 없는 공동체였다. 그리하여 그는 1899년 6월 19일 사회민주당원이 되고, 1900년 독일 뷔르템베르그에서 사민당의원으로 당선되었으나 사민당이 교조화된 사회주의 이념을 근거로 폭력 혁명의 길을 가고 있다고 판단하여 1906년 이후부터 사민당과의 간격을 두게 되었던 것이다.)블룸하르트의 이러한 종교사회주의는 1903년 쿠터(H. Kutter)의 『여러분은 행해야만 합니다』와 라가츠(L. Ragaz)의 『벽돌공 파업 설교』의 출현을 통해 이어졌고, 그러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무신적인 사람들이 옳다고 긍정적으로 대해 주어야 함을 밝히면서 하나님 나라를 대망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허락된 자유스러운 사회 참여의 모습에 큰 영향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불룸하르트에 대한 긍정적인 영향에도 불구하고 바르트는 불룸하르트의 사회 참여 문제에 대해 비판을 갖는다. 즉, 적극적인 사회 참여가 교회의 증언과 선교의 사정 거리 안에서 일어나고, 하나님 나라의 도래가 교회의 활동 여하에 의해 저지되어도 선교와 고백하는 교회의 테두리 안에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불룸하르트는 그러한 테두리를 고집하지 않고 당신의 사회민주당으로 대표되는 노동자의 격동 그 자체가 하나님 나라의 표징이었다고 주장함으로 인해 강력한 바르트의 비판을 받게 된다.3. 헤르만 쿠터(Hermann Kutter)와의 관계쿠터와 바르트의 첫 만남과 관련된 것은 산업 노동자들의 곤경에 대해 바르트가 종교 사회주의의 목소리 즉, 복음은 하나님 앞에서의 개인 구원뿐만 아니라 세계의 변혁, 세계 혁명에 관계한다는 생각들 때문이었다. 이는 바르트로 하여금 교회 선포의 이기적인 구원론과 정신적인 개인주의에 대해 비판하도록 만들었다. 또한, 쿠터는 『여러분은 해야만 합니다』에서 하나님에 관한 말씀과 현실의 이중구조와 긴장을 나타내면서 하나님에 관해 설명하는데, 그는 이 책에서 사회민주주의가 직접적인 것을 대변하고 있다는 것, 즉 무의식적 그리스도교로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있음과 보수주의자들이 사회주의자들을 무신론이라고 비난할 때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계신 직접적인 하나님의 역사를 이해 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이러한 이해는 바르트의 신학에 있어서 근본적인 숙제가 되었다. 이상과 같이 바르트에게 하나님에 관한 쿠터의 영향력이 정치적, 특히 사회적 현실에 대해 기획했다는 점에 있어서, 그리고 후기 바르트에 있어서 함축적으로 전개되었다는 점에 있어서 바르트는 자신을 쿠터적 의미의 종교 사회주의자라고 말한다.)4. 레온하르트 라가. 이 사회주의 운동이 하나님의 의지를 구체적 삶의 현장에 실현시키는 복음적 운동이라고 바르트는 주장했다.“사회주의는 복음의 중요하고도 불가피한 적용이다.”“참된 그리스도인은 사회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참된 사회주의자는 그리스도인임에 틀림없다...”) 그는 더 나아가 스위스 사회민주당에 입당함으로써 조직적인 노동자들과의 연대성을 확립하기에 이른다. 부쉬(Eberhard Busch)에 의하면 바르트가 스위스 사민당에 입당한 것은 1915년 1월 26일 이라고 하는데, 그는 이때부터 자펜빌 노동자들에게 목사동지(Comrade Pastor)라고 불렸다고 한다. 그가 입당한 당은 그 당시의 가장 ‘좌익적 정당’이었으며 바르트는 항상 그 당의 좌익에서 활동했다고 한다.) 이러한 바르트의 모습을 볼 때, 우리는 자펜빌에서의 바르트는 분명한 사회주의자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자펜빌에 부임해 왔을 때의 바르트는 아직 변증법적 신학자도, 말씀의 신학자도 아니었다. 그는 자유주의자였으며 종교사회주의였던 것이다.B. 『로마서 강해』1판의 변증법적 신학사회주의 운동과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바르트의 태도 변화는 1914년 8월 발발한 제 1차 세계대전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93명의 독일 지식인들이 빌헬름 2세(Kaiser Wilhelm Ⅱ)의 전쟁 선포에 지지 성명을 발표한 부끄러운 사건에 바르트가 그토록 존경했던 자유주의 신학의 스승들의 이름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 1차 세계대전은 물론 독일의 국가적 이기주의를 위한 전쟁이었지만, 전쟁의 타당성을 위해 독일은 사회주의 이념을 사용했다. 즉 타락한 영국의 자본주의와 무절제로 방종에 빠진 자유주의를 독일의 사회주의 이념으로 전세계를 구원한다는 전쟁을 위한 윤리적 타당성을 내세웠던 것이다. 이 전쟁이 세계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선전이었고, 사회주의를 신봉하던 많은 이들이 사회주의의 정치적 실천을 위해 이 전쟁에 기꺼이 가담했다.)바르트는 불룸하르트의 영향을 받아 성서에 대한 새로운 연구를 시작했고, 그 성서.
목 차Ⅰ. 서론 ................ 1A. 문제제기와 연구목적................ 1B. 연구 방법 및 범위... 1Ⅱ. 구조주의의 등장배경......... 2A. 시대적 배경............. 2B. 학문적 배경............. 3Ⅲ. 구조란 무엇인가? ............. 3A. 구조의 일반적 개념. 3B. 구조의 유사개념...... 4Ⅳ. 구조주의란 무엇인가? .........것이 2차 대전 후의 프랑스적 징조로서 곧 민주주의에 대한 의혹과 사회주의에 대한 절망의 표현이었다.이때는 프랑스를 위시한 전유럽의 사회적 격동기였으며 이러한 일련의 사태는 새로운 인식론과 새로운 철학을 요구했다.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여 새로이 등장한 사조가 바로 구조주의였다. 즉, 구조적 요인에 대한 인간적 능력의 한계, 표면적 갈등 이면의 구조적 모순의 존재, 역사주의와 정통맑시즘을 대체할 새로운 학문의 긴요성, 실존주의적 사고의 한계 등을 지적하며 사회과학으로서의 구조주의가 전면에 부각되기 시작한 것이다.)B. 학문적 배경당시의 학문적 주류는 한 마디로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유럽류의 인간중심 학문인 실존주의 계열과 미국중심의 행태주의 계열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학문적 풍토는 더 이상의 혼란을 수습할 능력이 없었고, 따라서 구조주의의 등장배경을 제공하게 되었다. 본래 프랑스의 철학은 과학성을 그 근간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베르그송(Henri Bergson: 1859~1941)류의 지속이론이나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1905~1980)류의 실존주의 철학은 이러한 과학성을 반대했다. 특히 실존주의는 사물의 고유성과 실존의 특수성?초월성을 주장하여 과학성을 근저부터 부정했다. 헤겔의 변증법 역시 개념의 유희에 빠져 과학성을 무시했다. 이러한 반과학적 학문풍토에 대해 구조주의는 과학성을 주장하며 등장했다. 즉, 구조의 체계적 특성, 변형과정의 성격, 일반법칙 추구성 등을 기치로 했는데, 이것은 일찍이 언어?기호학적 구조주의로부터 본받은 것이었다. 이러한 주장이야말로 본래의 프랑스적 철학전통으로의 복귀였다.구조주의가 반대한 또 하나의 학문풍토는 미국식 경험주의류였다. 그것은 유럽전통의 기능주의, 실증주의 베이컨적 경험주의, 과학주의, 도구주의, 실용주의 등과 결합된 지나친 과학성 위주의 풍토였다. 이러한 경험주의는 주체를 대상에 대립시키고 주체가 추상화시킨 대상의 본질을 지식으로 간주하는 모든 인식론을 일컫는 것으로, 관찰 가능한 것만y)의 구분에 있어 전자를 선택한다. 여기에서는 구조주의의 반역사주의적 경향이 나타난다. 즉, 역사란 설명의 방법이지 대상이 될 수 없으며, 어떤 사회현상 이면에는 복잡한 심층적 구조와 역사성을 포괄하고 있기 때문에 그 현상의 역사를 캐는 것보다는 그것과 그것의 환경 등과의 구조적 관계를 탐구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한다.일곱째, 형태동일적(isomorphic)구조를 가정한다. 이것은 동일한 구조가 여러 가지의 전환과정(transformations)을 거쳐 서로 상이한 구조가 될 수도 있지만 그 성격이나 형태는 결국 유사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여덟째, 어떤 현상의 주체(subject)설정에 있어 인간주의(humanism)보다는 구조주의(structuralism) 입장에 선다. 이때의 구조는 인간을 제약하는 요인(constraints)으로서의 그것으로서, 어떤 현상은 이간의 의지에 의해 결정된다기보다는 그것을 제약하는 구조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아홉째, 주체를 대상에 대립시키고 주체에 의해 추상화된 대상의 본질을 지식으로 간주하는 포괄적인 인식론, 곧 광의의 경험주의를 반대한다. 이점에서는 고전적 관념론, 포이에르바하와 청년 맑스의 인식론도 경험주의에 포함되지만, 좁은 의미의 그것은 영국의 베이컨(Francis Bacon)에 의해 체계화되고 오늘날 미국식 심리학 및 사회과학의 주류가 된 그것을 말한다. 구조주의는 원자주의, 환원주의를 반대하고 선험성을 인정하며 비경험적이고 심층적인 논리구조도 인정한다.열 번째, 구조주의는 환원주의(reductionism)와 원자주의를 반대하며 방법론적 전체주의(methodological holism)의 입장에 선다. 즉, 연구대상을 구성요소로 나누어 연구하는 원자주의와, 높은 수준의 내용을 알기 위해 그것을 구성하는 내용으로써 추론하는 환원주의를 반대하는 것이다. 본래 환원주의란 사회가 각 개인과 집단으로 구성된다는 전제하에 그 구성요소를 분석함으로써 사회현상의 설명으로 추론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경험주의의 가장 중요한 속성의의 등장영어의 poststructuralism을 놓고 탈구조주의로 번역할 것인지 후기구조주의로 번역할 것인지는 재론의 여지가 많다. 즉, 시대적인 흐름에 착안한다면 후기구조주의로 부르는 게 적합할 것이고 이전의 구조주의적 이론과 대조된다는 의미에서는 탈구조주의로 부르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부르든 그것이 구조주의의 연장임에는 틀림이 없고 시대적으로 구조주의와 그것을 구분 지을 공통적 사건이 애매하기 때문에 후기구조주의로 부르는 것이 틀리지 않을 것이라 생각된다.먼저 후기구조주의의 여섯 가지 특성을 살펴보면, 첫째, 전체적인 구조보다는 개체의 존엄성과 자유를 인정한다. 둘째, 사고의 경직화 및 학문의 과학화를 배격하며 인본주의적 태도를 지향한다. 셋째, 역사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역사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표명하며 과거를 향수가 아닌 탐색의 대상으로 취급한다. 넷째, 자아와 주체를 중요시한다. 다섯째, 절대적인 진리나 센터, 근원의 독선과 횡포를 거부하며 이분법적 사고방식으로부터 탈피하여 타자를 인정하고 포용한다. 여섯째, 모든 기호와 그것들의 재현능력을 불신한다.)이러한 후기구조주의에 속하는 사람들을 분별하기는 쉽지 않게 되어 있다. 즉, 혹자는 알뛰쎄르 이후부터 후기구조주의자로 지칭하는 가하면, 혹자는 푸코, 데리다, 사이드 등만을 후기구조주의자로 분류하기도 한다. 이러한 혼동은 구조주의와 후기주조주의 사이에 어떤 연속성과 함께 비연속성이 동시에 나타나기 때문에 생겨난다. 그렇지만 푸코, 데리다, 사이드, 바르뜨 등을 후기구조주의자로 부르는 데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후기 구조주의는 구조주의의 연속이면서 또 그것에 대한 반발이기도 했다. 따라서 후기 구조주의를 구조주의라 할 수 있을 지는 의문이 많지만, 기본적으로는 그것이 구조주의를 근간으로 출발했고 또 그것을 비판하면서 성숙되었다는 점에서 구조주의의 연속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Ⅴ. 구조에 대한 해석자들구조주의라 불리워지는 유파 안에는 수많은 학자들이 있다. 구조주의 자체가 다양한 분과학문에든 동질적인 방식으로 적용된다. 셋째, 언어학의 방법은 다른 인문?사회과학에 비해 훨씬 폭넓은 보편성과 엄격한 과학성을 지닌다. 이제 레비-스트로쓰는 보편적이며 동질적인, 그리고 정밀하고 과학적인 것을 자신의 영역에서 추구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이런 연구방법을 통해 모든 문화에 공통된 질서를 찾아내고자 한다. 마치 야콥슨이 모든 언어에 공통된 어떤 보편적 구조를 발견하려고 했던 것과 같다. 레비-스트로쓰는 이를 통해 인간의 삶에 공통된 질서를 발견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다양한 종족의 문화를 연구하는 사회인류학을 연구했다. 즉 ‘모든 문화에 공통된 질서’가 바로 레비-스트로쓰의 인류학적 연구대상이며, 이것을 흔히 ‘심층구조’라고 한다.)레비-스트로쓰는 다른 한편 공통된 사회적-문화적 질서를 찾으려는 데 머물지 않는다. 왜냐하면, 만약 그러한 공통적이고 보편적인 질서가 존재한다면,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공통된 보편적 사고구조가 인간에게 있으리란 생각을 끌어내는 건 차라리 쉬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데카르트처럼 인간 이성의 보편적 형태에 대한 가정을 하지 않고, 이성의 집합적 형태에 대한 경험적 연구를 통해서 그것을 찾아내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상이한 주체들이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게 해줄 그런 무의식적인 조건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를 ‘사회적 무의식’ 또는 ‘구조적 무의식’이라고 한다. 결국 그는 사회인류학이란 경험적인 연구를 통해 모든 인간이 공유하고 있는 이성을, 그리하여 인간이 진리에 도달할 수 있게 해줄 무의식적 기초를 찾아내려고 한다. 이것이 곧 그의 철학적 연구대상인 것이다. 또한, 그는 역사주의를 비판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야생의 사고』마지막 장에서 사르트르의 역사주의를 비판한다. 역사란 그것을 사고하고 쓰는 사람들에 의해 취사선택된 것이지 객관적이거나 과학적인 것이 아니라고 한다. 반면 구조주의는 어떤 대상이 갖는 요소들을, 상호관계 속에서 체계화한다는 점에서(공시적으로 연구한다는 점)
슐라이에르마허의 신학과 현대 개혁 신학- 그는 현대 신학의 아버지인가, 현대 개혁신학의 아버지인가? -Ⅰ. 서론적지 않은 사람들이 개혁신학과 현대 신학이 다르거나 심지어는 상충되는 신학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개혁신학을 어느 특정한 시기에 발생된 신학으로 규정하는 한정된 이해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즉, 모든 시대의 개혁신학이란 그 ‘본래의’ 16세기의 종교개혁신학을 잘 보존하고 계승하여 당대의 상황에 적용하는 데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만일, 개혁신학의 정의가 이와 같다면, 개혁신학은 현대 신학과 전혀 다른 신학이라고 충분히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로마카톨릭신학과 개혁신학간의 차이를 규정할 때, 그 기준이 “신학적 방법론”이 아니라 그 신학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근본적인 정신”이라면, 현대 신학은 개혁신학과 그 연계성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교리나 신학적 체계, 방법론의 동일성 때문이 아닌 당대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응답하기 위해 끊임없이 개혁하는 영성 그 자체),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하는 교회이다”라는 표어가 개혁교회 전통의 핵심적 영성을 나타내고 있고 그 영성을 현대 신학이 계승하고 있다면, 현대 신학은 현대 개혁신학이라 불리워 질수 있다는 것이다.본 발제의 목적은 현대 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슐라이에르마허(Friedrich Daniel Ernst Schleiermacher, 1768-1834)의 신학사상의 특징)과 그의 신학사상에 영향을 준 사상적 배경을 살펴봄으로써 소위 “개혁신학”)과 “현대 신학”의 연계성을 찾아보는 것이다. 즉, 현대 신학이 현대 개혁신학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현대 신학의 문을 연 슐라이에르마허의 신학사상의 연구를 통해 가늠해보고자 한다.Ⅱ. 슐라이에르마허의 사상적 배경슐라이에르마허는 19세기에 현대 신학방법론을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개척한 신학자이다. 그는 성서와 교리의 명제적 진리에서 출발하지 아니하고 일반적인 종교 감정, 그리고 나아가서 기독교의 신앙 지렛대가 되게 하였으며, 이에 따라서 주관적인 경험이 신앙과 기독교 교리의 기초임을 확신하는 근대 신 개신교 신학으로의 이행이 이루어지게 하였다.)슐라이에르마허는 이러한 계몽주의시대에서 살았고 그 영향을 받으며 그의 사상을 펼쳐나갔다. 그는 신학을 철학에서 분리하고, 철학을 경멸하고, 철학을 신학적 기도에서 배제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계몽주의의 영향아래에 있었다는 것이 계몽주의를 그대로 따랐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는 계몽주의적 사조에 대항하여 신학의 학문성을 변증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폴 틸리히는 슐라이에르마허를 신학의 영역에서 계몽주의에 대한 승리자로 표현한다. 그는 슐라이에르마허의 계몽주의의 극복자이자 승리자로서의 면모가 데카르트, 칸트, 스피노자 사상의 신학적 영역에서의 위대한 종합에서 나타난다고 말했다.)2) 데카르트와 칸트: 계몽주의의 또 다른 얼굴계몽주의 이후 계시된 진리로서의 성서 대신에 사유하는 주체로서의 인간 이성이 실재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최고의 법정이 되었다. 이러한 특징은 사고하는 주체로서의 인간의 자아의식(cogito)을 통한 명증적 관념을 탐구하려 했던 데카르트에게서 나타났다. 그에게 있어서는 전통이나 기성의 권위보다 사유하는 주체로서의 자기의식이 궁극적인 진리의 척도가 되었다. 데카르트가 사고하는 주체로서의 자아의식을 철학의 중심 주제로 부각시킨 이래 자기 의식의 문제는 칸트와 독일 관념론에서 현상학과 실존철학에 이르기까지 서구 철학의 근본적 주제가 되어왔다.칸트는 다양하게 변화하는 대상의 근거를 대상에 대응하는 대상의식에서가 아니라 의식의 다양성을 통일하는 근거인 또 다른 근본의식에서 구했다. 인식론에 있어서의 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의 귀결은 계몽주의와는 달리 인간의 주관 ‘밖에’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으로서의 하나님은 유한한 인간에게 ‘직접적으로’ 알려질 수 없다는 것이었다. 즉, 하나님에 대하여서는 (순수)이성에 근거한 인식이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이러한 칸트의 인식론적 제한은 고전적인 형이상학적 신학과비안 교단과 루터교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슐라이에르마허는 그가 베를린 대학교의 신학부 교수가 되었을 때, 루터교 신학자들의 저서를 교재로 선택했으며, 자신의 교의학서에 개혁 교회 신학자들보다 루터 교회 신학자들을 더 자주 인용했다. 이는 루터 교회와 개혁 교회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는 확신과 이 두 개신 교단의 연합에 대한 강력한 지지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신학적으로 개혁 교회뿐만 아니라 모라비안 경건주의와 그것을 통한 루터 교회의 유산을 물려받았다고 할 수 있다.)4) 낭만주의: 계몽주의의 극복낭만주의 운동은 계몽주의적 합리주의에 대항해서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에 유럽에서 일어난 운동으로서 당시의 철학, 문학, 음악, 그리고 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슐라이에르마허가 1795년 6월부터 베를린 자선병원에서 원목설교로 활동했을 때, 그에게 강하게 영향을 끼친 모임이 있었다. 그것은 프리드리히 슐레겔(Friedrich Schlegel, 1772-1829)중심의 낭만주의 모임이었다. 이 시대의 낭만주의자들은 18세기의 계몽주의적 연장선상에 서 있었지만, 계몽주의나 합리주의의 기계론적인 관점에서 벗어나 직관과 느낌, 그리고 상상력 등에 관심을 두었다. 슐레겔은 슐라이에르마허를 자극하여 1799년에 낭만주의의 정신이 뚜렷한『종교론』을 저술하도록 하였다.)슐라이에르마허는 데카르트와 칸트의 자아의식에 기초한 초월철학이 만들어 놓은 무한자와 유한자 사이의 인식론적 간격을 극복할 수 있는 원리를 낭만주의 운동에서 발견했다. 틸리히는 낭만주의의 본질이 니콜라스 쿠사누스의 “반대의 일치”(coincidentia oppositorum)의 원리와 같이 "무한이 유한 안에 존재한다“는 명제로 규정된다고 본다.) 쿠사누스는 모든 것은 신으로부터 떨어져 있지만, 동시에 신은 모든 것 안에 있다고 함으로써 유한속에서의 무한의 존재를 이야기한다. 낭만주의에서도 역시, 유한과 무한의 균형은 모든 유한한 형식을 넘어서는 무한자의 생동력에 의해화편 가운데 3개를 제외한 모두를 소개, 번역, 주해했다. 슐라이에르마허는 플라톤 저서의 번역으로 당대의 가장 훌륭한 고전학자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을 뿐 아니라, 독일에서의 플라톤 연구에 새로운 장을 열였다. 왜냐하면 신플라톤 학파 이후 처음으로 진정한 플라톤 사상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사실, 쿠사누스의 "반대의 일치”도 플라톤의 변증법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선(善) 자체의 이데아로부터 나눔(Diairesis)의 도움을 받아 모든 많은 것들을 이끌어낼 줄 아는 것이 플라톤의 변증법이기 때문이다.) 슐라이에르마허는 플라톤의 영향으로 기계론적인 윤리관을 거부하고 결정론적 윤리관을 주장하게 되었으며 낭만주의와 개인주의적 주관주의를 극복했다.5) 스피노자: 칸트의 초월철학의 한계 안에서의 이원론 극복을 위한 동반자슐라이에르마허는 칸트가 현상과 물자체, 욕구와 선험적 자유 사이에 이원론을 설정함으로써 비정합성에 빠졌다고 비판한다. 그는 내재적인 원인으로서 모든 유한의 통일적인 근거인 무한을 확보하는 스피노자에게서 칸트의 오류에 대한 수정의 길을 발견한다. 슐라이에르마허는 스피노자의 철학을 유기적인 일원론으로 보았다. 여기서 하나님은 인격적이지는 않지만 ‘natura naturrans'(주체적, 또는 능동적 자연)로서, 'natura naturata'(대상적, 또는 수동적 자연)로서의 자연과는 구별되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다.) 모든 유한한 것들 안에는 무한자가 존재한다. 스피노자에 의하면 오직 한 실체인 하나님만이 존재하며, 이 실체는 하나이며 나누어지지 않으며 무한하다. 그 밖의 모든 것들은 바로 이 한 실체의 변형일 뿐이다. 모든 실체와 양태들은 신적 본성 안에 존재하고, 오직 그것을 통해서만 인식될 수 있다. )스피노자의 이러한 신개념은 계몽주의의 괴리와 분리의 원리에 맞서는 동일성의 원리에 바탕하고 있다. 그러나 “신은 지금 여기에 있다. 신은 모든 것(만유)의 깊이에 존재한다.”는 말은 흔히 “범신론”으로 오해되어지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증명해준다. 그러나 그의 위대한 업적에 감탄의 표정만을 짓고 있을 수는 없다. 슐라이에르마허의 신학사상과 개혁신학 사이의 연속성을 규명하고 그가 과연 현대 개혁신학의 아버지가 될 수 있는지 확인해 보아야 한다. 그러나 슐라이에르마허의 사상이 개혁신학과 굳이 유사성을 띠어야 한다거나 신학적인 방법론에 있어서 연속성이 있다는 것만으로 그 연계성을 규명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연계성은“개혁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써 규명되어질 것이다.슐라이에르마허는 현대 신학의 아버지다. 이것은 19-20세기에 걸쳐 그에게 주어진 공식적인 칭호다. 다만 신정통주의신학이 그의 신학의 상속을 거부하고, 그에게서 아버지의 자리를 빼앗고, 그를 신학의 왜곡자로 만들려고 할 때까지는 그랬었다. 그들은 슐라이에르마허의 신학사상이 소위 “개혁신학”과 연계성이 없으며 “개혁신학”과 후대와의 만남을 단절시킨 장본인으로 만들었다. 심지어는 “현대 신학의 아버지”가 아닌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아버지”로 그 위치를 바꾸었다. 그러나 슐라이에르마허는 다음과 같은 이유들로 인해 “현대 신학의 아버지”일 뿐 아니라 “현대 개혁신학의 아버지”라 할 수 있다.첫째, 슐라이에르마허의 감정의 신학은 종교개혁신학의 또 하나의 원리인 ‘오직 신앙으로만’(sola fide)의 슬로건이 잠재적으로 함축하고 있던 개인적인 신앙체험의 중요성이 계몽주의의 도전을 받으면서 발전적으로 꽃 피우게 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둘째, 개혁되어야 할 것은 개혁되어야 한다. 즉, 개혁된 교회는 계속 개혁될 수 있는 자성적인 용기가 있어야 한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사제적 중개에 대해 만인제사장을 외쳤던 개혁자들이 종교개혁 시대의 성령운동에 대하여 성서의 문자에 성령을 복종시키려고 시도했던 경직성에 대해 슐라이에르마허는 일침을 가한다. 그는 사제나 귄위에 대하여 반발했다. 이것들은 필요치 않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누구나 하나의 사제가 되고, 그리고 신의 영으로 가득하도록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다.)셋째, 그리스도와시했다.
중세수도원- 프란체스코회와 그 학파를 중심으로 -Ⅰ. 들어가면서스콜라 신학의 발전은 13세기 동안에 그 절정을 이루었다. 특별히 13세기 초에 창설된 도미니쿠스 학파와 프란체스코 학파는 학구적인 신학 연구를 향상시키는 데 상당한 기여를 했다. 당시의 주요 신학자들은 이 수도회들과 관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점차적으로 늘어난 신플라톤주의에 대한 지식과 무엇보다도 그때에 이르러 사용하게 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전성기적 스콜라 신학의 교리 발전에 심대한 공헌을 하였다.Ⅱ. 수도원 운동의 형성배경과 발달수도원주의(Monasticism): 4세기 초에 교회사에 등장.‘monastic’은 ‘은둔’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monachos’에서 유래수도생활: 세상과 연락을 끊고 인간적인 애정과 세상의 보화와 자유의 포기를 요하는 희생의 생활이며, 자신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드리는 봉헌의 생활을 의미.)3세기에 그리스도교에서 수도원운동이 일어난 배경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데시우스(Desius)시대의 박해(250-251)를 피하기 위해 사막으로 숨어들었던 이들에게서 연원을 가지며, 또 하나는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A.D. 313)한 뒤에 파생된 기독교의 변질과 세속화이다.)수도원 제도가 발달해 간 역사는 네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단계는 아직 조직되지도 않았고 교회로부터 분리되지도 않은 금욕 생활이다. 둘째 단계는 독거 형태의 은둔생활(anchoretism)이다. 셋째 단계는 수도원을 짓고 거기서 공동생활을 하는 일반적 의미에서의 수도원주의이다. 성 파코미우스에 의해서 동방에, 훗날 성 베네딕투스에 의해서 서방에 보급되었다. 넷째 단계의 수도원주의는 그리스도교를 널리 보급하고 학문을 증진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고,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실제적인 제 소임을 충분히 했으며 여전히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독일 종교개력의 요람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3세기의 수도원 운동 이후 수도원은 주기적인 부패와 개혁으로 이체스코회였다. 프란체스코회와 도미니쿠스회는 다섯 가지 주요한 점에서 기존 수도회들과 달랐다. 첫째는 절대청빈, 둘째는 실천적 사회 참여, 셋째는 평신도 형제회, 넷째는 대학교에서 펼친 교육활동, 다섯째는 교황청에 직속되었다는 점이다.)1. 도미니쿠스의 생애)도미니쿠스 데 구즈만(Dominic de Guzman)은 카스티야의 갈레루에가에서 1171년에서 1173년 사이에 태어났다. 팔렌시아 유학 시절 이후인 1196년에 그는 마드리드에서 북동쪽으로 90마일 지점에 위치한 자신의 고향 교구인 오스마에 있는 성당 공동체 안에서 어거스틴 수도회 수사가 되었다. 1216년, 도미니쿠스는 교황 호노리우스 3세로부터 “수사 설교자 수도회”(Order of Friars Preachers, fratres praedicatores) 설립을 승인받은 후, 자신의 수사들을 신학자들로 훈련시키고자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도시 빈민의 수가 계속 증가하고 있는 당신의 사회에서 효과적으로 설교하기 위하여 탁발과 집단적인 청빈을 채택하였다. 그리하여, 도미니쿠스회의 이상은 세상과 분리된 명상적인 삶이 아니라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봉사의 생활이 되었다. 도미니쿠스는 1221년에 볼로냐에서 죽었고, 1234년에 교황 그레고리 9세가 된 그의 옛 친구이자 후원자였던 오스티아의 후골리노 추기경에 의하여 시성되었다.2. 프란체스코의 생애)지오반니 베르나르도네(Giovanni Bernardone)는 1181년에 이탈리아 중부의 아시시에서 부유한 직물 상인인 피에트로 베르나르도네와 그의 아내 피카의 아들로 태어났다. 프랑스를 지지하였던 피에트로 베르나르도네는 자신의 아들에게 프란체스코(Francis, 프랑스인)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는데, 그 별명이 아기의 세례명을 대신하게 되었다. 젊은 시절에 프란체스코는 사치품을 좋아하고 화려한 옷을 입고 다녔으며 잘못에 대하여 관대하였다. 그는 기사가 되어서 군사적으로 영예를 얻으려는 꿈을 가지기도 했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가 아시시의 바로 바깥 쪽에 있는, 폐허작으로 ‘작은 수사들의 수도회’(Friars Minor, fratres minores, 비천한 형제들)가 시작되었다. 프란체스코의 단체는 사랑으로 함께 결속되고 극도의 청빈과 단순성과 겸손을 실천함으로써 결합된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하는 사람들의 자발적인 연합이었다. 프란체스코는 1226년 10월 3일에 포르티운쿨라 근처의 작은 오두막에서 죽었다. 1228년에 교황 그레고리 9세는 그를 교회의 성인으로 선포하였다. 중세의 경건은 아시시의 프란체스코에게서 가장 고상하고 가장 감동적인 대표자를 발견하였다고 볼 수 있다.프란체스코는 수도원이 배출한 성인들 가운데서도 가장 온유하고 점잖고 사랑이 많았다. 도미니쿠스는 냉철하고 조직적이고 근엄했다. 프란체스코는 사도의 면모를, 도미니쿠스는 교회 정치가의 면모를 지녔다. 프란체스코는 생각과 행동이 겸손한 것으로 유명했던 반면에, 도미니쿠스는 이단들을 때려잡는 망치라 불렸다. 그리하여 단테는 프란체스코를 사랑으로 세상을 타오르게 한 열정으로, 도미니쿠스를 세상에 빛을 가득 채운 광명으로 묘사했다.Ⅳ. 도미니쿠스 학파와 프란체스코 학파도미니쿠스 학파와 프란체스코 학파라는 두 수도회의 학문생활은 가장 규모가 큰 것이었다. 이 시대는 중세 스로라주의의 황금시대로써, 이 두 수도회는 옥스퍼드, 로마, 나폴리, 쾰른 등지에 거대한 수도원 연구기관을 가지고 뛰어난 후진학자들을 양성했다. 또한, 여러 교황들은 이 두 수도회에다, 여러 대학의 교수직들을 마련해 주었다.)1. 도미니쿠스 학파도미니쿠스학파의 회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이었다. 그러나 프란체스코 학파나 도미니쿠스 학파가 나름대로 신학을 갖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토마스주의가 생길 때까지 도미니쿠스와 프란체스코학파는 많은 일반적 신학 입장들ㅇ르 견지하고 있었고, 그 정신에서는 물론 내용에서도 구체적으로는 다양했다. 그들은 검은색 수사복을 입었기 때문에 “흑의수사”(黑衣修士)라고 불리기도 했다.a)알버트 마그누스(Albertus Magnus, 1280년 사망)알버트투스 마그누2. 프란체스코 학파프란체스코 학파는 플라톤-아우구스티누스의 전통을 따랐다. 이들은 이성에 대한 의지의 우위, 모든 인식이 신의 정신 안에 있는 영원한 근거에 뿌리박고 있다는 것, 창조되지 않은 빛에 의한 조명, 물질의 원동력, 형상의 다양성, 세계창조가 영원하지 않다는 것, 정신적인 질료, 육체에 비해 영혼이 비교적 독립적이라는 것, 영혼의 능력과 영혼의 실체가 동일하다는 것, 영혼의 본질에 의한 영혼의 직접적인 인식, 특히 철학의 전체를 일종의 그리스도교 철학으로 보는 것, 이렇게 봄으로써 철학적인 사고가 종교와 신학에 대립된다기보다 훨씬 더 강하게 이들과 연결된다고 하는 것 등을 주장했다.)a)헤일스의 알렉산더초기의 프란체스코 학파는 헤일스의 알렉산더(Alexander von Hales, 1170-1245)에 의해 시작된다. 그의 저서 중 『신학대전』은 철학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로저 베이컨은 『소작』(Opus ninus)에서 “그(알렉산더)가 쓴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쓴 것이지만 말 한 마리보다 더 무거운 위대한 『대전』을 그에게 돌렸다”라고 말했는데, 이는 『대전』이 알렉산더가 직접 집필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진짜 작품에서 빌려온 요소들이 축약되고 확대된 것이며 후대 프란체스코회 신학자들에 의해 완성된 편집서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이 책 이외의 그의 저작들을 보면, 그는 이미 아리스토텔레스 전체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론들에 관한 논쟁에 휘말렸을 때에는 언제나 플라톤적ㆍ아우구스티누스적인 사고를 더 존중했었다.그의 세계관에서 지배적인 기본사상은 최고선(summum bonum)이라는 개념이다.) 이 개념은 “모든 움직이는 것은 그 자체로 보아 움직이지 않는 회고의 원리를 전제한다. 그렇지 않으면 무한히 나아가야 한다. 그처럼 존재하는 것은 어떤 것도 자신으로부터 그 존재를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지 않다면 존재는 아무런 명사를 갖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높은 존재의 실존으로부터 존재를 추론할 수 있다.”고 내리기 위하여 그 입자들에 대한 신학적 진술을 넘어서려는 열정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b)루펠라의 요한네스알렉산더의 제자였고, 빠리 대학에서 그의 교수직을 이어받은 요한네스(Johannes de Rupella, 1200-1245)는 『영혼에 관한』대전을 썼는데, 이 대전은 아비센나와 신플라톤적-아우구스티누스적인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합리적 영혼은 신체를 생기돌게 하고 신체에서 다양한 활동을 성취할 수 있는 단순한 실체라고 본다. 그 본질에서 단순한 영혼은 몇몇 서로 다른 능력에 관하여는 다원적이다. 영혼은 이 능력들의 활동을 신체와 함께 혹은 신체 없이 행한다. 이 활동들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그 대상의 특색을 주목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거기서부터 이 활동의 특색으로 나아가고 그 다음에는 이 활동들의 본성의 특색으로 나아간다.그는 인식론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이 인식론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하고 있는 바와 같이, 경험적인 사물들에 관한 진리는 추상을 통해 얻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보다 높은 인식의 진리, 예컨대 신과, 지식의 제일원리에 관한 진리는 신이 빛을 비춰줌으로써 이룩된다고 한다.) 그는 그리스 아랍의 능동 지성 교리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신적 조명 교리를 조화시키기를 바랐다. 그는 능동 지성이 하나님이 자기 손으로 만든 작품에 남긴 표시로서 인간 영혼 속에 있다고 생각했으며 이 지성을 영혼의 가장 높은 기능(intellectus agens, id est vis animae suprema)라고 했다.)c)보나벤투라프란체스코 학파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인 보나벤투라(Bonaventura, 1221-1274)는 토마스 아퀴나스와 나란히 전성기의 스콜라철학을 이끌고나간 인물이다. 그에게 있어서 단순한 신학과 구별되는 분야로서 파악되는 신학의 고유한 과제는 ‘믿을 만한’ 것에 이유를 주어 그것이 ‘가시적인’것이 되게 하는 것이다. 소위 ‘보나벤투라의 철학’을 연구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의 신학적 사변으로부터 그가 신앙을 이해하기 위하여 신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