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테르의 강티드에 나타난 18세기 프랑스 사회상--목차-Ⅰ.볼테르와 캉디드1.볼테르에 대해서2. 캉디드에 대해Ⅱ. 캉디드의 줄거리Ⅲ. 캉디드에 나타난 18세기 프랑스 사회 모습Ⅳ. 캉디드의 감상평Ⅰ. 볼테르와 캉디드1. 볼테르에 대해서볼테르의 본명은 프랑스와 마리 아루에다. 볼테르(Voltaire)는 필명이다. 그는 1694년 11월 21일 루이 14세 시대, 당시 파리의 유복하고 교양있는 중산층 부르주아 가정, 공증인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에게서 직접 교육받아온 프랑스와는 1704년 10세 때 파리에 있는 예수회파의 루이 르그랑 중학에 입학하여 주로 문학과 신학공부에 열중한다.루이 15세의 섭정을 비난하던 프랑스와는 1717년 4월 16일 바스티유 감독에 투옥되었다. 그는 감옥에서 처음으로 볼테르라는 필명으로 ‘앙리아드’라는 장편시를 완성했다. 석방되자 그가 쓴 희곡 ‘외디푸스’가 무대에 올려져 대성공을 거두면서 문필가로서의 주목과 환대를 받기 시작한다. 1725년 12월 한 사교장에서 볼테르는 어떤 후작에게 불손한 언동을 보임으로써 결국 영국으로 추방된다. 3년 동안 계속되는 그의 영국생활은 그가 학자로서, 또는 사상가로서 성장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였다.제정치하의 불평등에 환멸을 느끼던 볼테르는 영국에서 자유의 공기를 마시면서 과학을 중시하는 영국 문화에 감동한다. 종교전쟁을 끝나게 한 앙리 4세를 찬양하는 서사시 ‘앙리아드’를 출판한 후, 1729년에 귀국하였다. 시인으로 영국에 갔다가 철학자로서 프랑스에 돌아온다. 셰익스피어극의 영향을 받은 사상극 ‘자이르’를 발표하고, ‘철학서간(영국서간)’을 통하여 영국을 이상화하고 프랑스 사회를 비판하였기 때문에, 정부의 노여움을 산다.‘철학서간’은 영국인이 누리는 자유에 비교하여 고국의 부패한 귀족들 및 그들과 결탁한 기독교를 신랄하게 비판한 것이다. 이 책 때문에 또다시 바스티유에 투옥될 위험에 처한 그는 샤틀레 백작부인과 함께 로렌지방의 그녀의 성으로 피신한다. 샤틀레 부인은 볼테르의 16년 연인이었집을 썼다. 1742년에는 모든 종교의 창시자를 인류의 사기꾼으로 묘사한 희곡 ‘마호메트’를, 그리고 1747년에는 철학자 자디그를 묘사한 소설집 ‘자디그’를 출판했다. 그러나 샤틀레 부인과의 생활은 1749년 그녀의 죽음으로 끝나고 만다.볼테르의 생전에는 많은 비극작품으로 17세기 고전주의의 계승자로 인정되었으나, 오늘날에는 간결한 문체의 ‘자디그’나 ‘캉디드’ 등의 철학소설, 그리고 문명사적 관점에 따른 역사 작품이 더 높이 평가된다. 한편 D.디드로, J,J.루소 등과 함께 백과전서 운동을 지원하였으며, 백과전서 운동을 지원하였으며, 백과전서파의 한사람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2. 캉디드에 대해저자 볼테르는 루소, 디드로, 몽테스키와 더불어 계몽주의의 대표적인 철학자이다. 볼테르는 총 26편의 ‘철학적 콩트’를 썼는데 그 가운데 1759년에 발표된 「캉디드」는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원제목은 ‘캉디드 또는 낙천주의’이다.캉디드는 철학을 알기 쉬운 소설 형식으로 풀어내어 웃음을 통해서 지성에 호소하는 철학적 콩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철학적 콩트’라는 것은 볼테르가 자신의 철학적 사유의 결과를 대중에게 널리 전파할 목적으로 창안해낸 새로운 문학형식으로 일종의 우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캉디드는 특히 18세기 프랑스의 전쟁과 종교적 오만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여 화제가 되었으며, 재치와 풍자를 잘 살린 독특한 문체로 공허한 형이상학을 버리고 실천적 예지를 역설한 걸작이다. 비참한 체험과 온갖 사회적 불합리에도 불구하고 낙천주의와 염세주의를 벗어나 인간의 운명은 스스로 개척하는 것이라는 작가의 계몽사상을 담고있다.Ⅱ. 캉디드의 줄거리캉디드란 ‘순박하다’란 뜻을 지닌 프랑스 말이자 이 소설 주인공 이름이기도 하다.부모가 확실치 않은 캉디드는 독일 베스트팔렌 지방의 한 영주의 성에서 자라나며 낙천주의 철학자인 스승 팡글로스로부터 이 세상은 조화롭고 완전한 상태, 즉 늘 최선의 상태에 있도록 신이 만들었기 때문에 악도 이 조화로운 세계를 위해서 없어서는 안의 철학자 마르탱을 만나 논쟁과 갈등을 겪는다. 스승 팡글로스의 낙천적 교육과는 반대로 세상의 온갖 염세적 면을 보게 되는 것이다. 결국 어느 곳에서도 인생의 목표를 발견하지 못하고 돌아와 유유자적 밭을 가는 노인의 삶을 통해 인생은 오직 밭은 경작해 나가듯 스스로 돌아와 유유자적 밭을 가는 노인의 삶을 통해 인생은 오직 밭을 경작해 나가듯 스스로 개척하고 발전해 가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통해 결국은 낙천주의적 결론을 내리게 된다.캉디드는 선생의 안부를 묻는다. 선생은 퀴네공드 양이 불가리아 병사에게 죽었고, 보호하려던 성주까지 무참하게 상해당했다는 말과 함께 자신이 병에 걸린 까닭을 말한다.“자네, 퀴네공드의 시녀 파케트양을 알지?”“바로 그녀가 성병을 감염시켰다는 얘기지.”“그녀의 병은 어느 공작 부인과 관계했던 한 젊은이로부터 얻은 거라네.”“그런데 그 공작 부인은 기병대장으로부터 전염되었고, 기병대장은 후작에게서, 그 후작은 어느 시종에게서, 그 시종은 어느 예수교도, 그 교도는 어느 수녀에게서 병을 받았지. 결국 그 병은 탐험가 콜롬부스의 동료 가운데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된 계통을 가지고 있는 셈이지.”“그건 아주 괴상한 계보군요. 그걸 만든 것은 결국 악마가 아니겠습니까?”“그럴 리가 있나! 그것은 그래도 최선의 세계 속에서 없어서는 안될 필연적인 존재인셈이지. 생각해보게나! 콜롬부스가 이 병을 가져오지 않았다면 이렇게 이 자리에서 자네를 만나 편안히 쵸콜렛이나 먹고 있을 수 있겠는가 말일세.”캉디드는 그 후 숱한 고생 끝에 엄청난 다이아몬드를 가지고 수리남에 도착한다. 그러나 그것도 사기당하고, 베네치아에 가는 배에서 아내에게 쫓겨나고 아들에게 매 맞는 마르탱이란 노인과 동행하게 된다. 이 여객선에서 캉디드는 식사가 끝날 때면 으레 노인과 대화를 나눈다.“마르탱씨는 이 세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세상 사람들의 내면에는 마귀가 도사리고 있지요. 나는 이 세상에서 이웃도시를 멸망시키려 하지 않는 도시를 본 적 없고, 다른 가정을 파괴하지 않는 관주의자를 통해 우울증에 빠지고 만다. 그러던 중, 캉디드는 우연히 죽은 줄만 알았던 퀴네공드 아가씨의 소식을 듣고 콘스탄티노플을 향해 배에 오른다. 그런데 뜻밖에도 배 안에서 팡글로스 선생과 재회를 한다. 선생은 리스본에서 화형이 실시되는 찰나에 폭풍우를 맞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으나, 회교도 지역인 이곳 콘스탄티노플로 와서 이단으로 지목되어 처벌을 받고 노 젓는 신세가 되었다는 것이다.“그러고도 선생님께서는 여전히 이 세상이 최선으로 가득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렇게 캉디드가 묻자,팡글로스는 “물론이네, 우주는 신이 정해 놓은 조화로운 질서에 따라 충만함과 오묘함으로 가득한 채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하네.”라고 말한다.마침내 캉디드는 퀴네공드와 재회하고 거의 흉물에 가까워진 그녀와 기꺼이 결혼한다. 그들 부부는 팡글로스와 마르탱과 함께 산다. 그들은 돌아오면서 어떤 노인을 만난다. 캉디드는 그에게 토지를 갖고 있느냐고 물었다.“조금 갖고 있긴 하지요. 일을 하고 있으면 권태도, 타락도, 궁핍도 나에게서 멀어진갑니다.”캉디드는 일행을 향해 외친다.“우리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땅에 농사를 지어야 합니다. 그들은 열심히 농사를 지었고 작지만 수확의 기쁨도 누렸습니다.”팡글로스는 일행을 향해 외친다.“우리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땅에 농사를 지어야 합니다. 그들을 열심히 농사를 지었고 작지만 수확의 기쁨도 누렸습니다.”팡글로스는 가끔 캉디드에게 이렇게 말했다.“이 모든 일이 역시 최선의 상태로 결말나게 되었네. 자네가 퀴네공드에게 키스한 뒤 추방당하지 않았더라면, 보석을 사기당하지 않았더라면, 자넨 결코 이렇게 수확한 맛있는 과일을 먹어보지 못했을 게 아닌가?”캉디드는 이 말을 듣고 대답한다.“그러나 지금 우리는 땅을 경작해야 합니다.”Ⅲ, 캉디드에 나타난 18세기 프랑스 사회 모습캉디드에는 18세기 프랑스의 계몽사상과 종교, 사회에 대한 배경이 담겨 있다. 전쟁과 지병, 불평등한 사회구조 등이 당시의 사회상을 그대로 담고 있을 뿐 아니라 사상적으로 계몽주의를 기저에 깔고리 인간세계나 자연?인생 등에 관한 지혜와 교양을 나타낸다. 또한 신학이 죽음을 주제로 하는 데 대해서 삶의 실학을 가리킨다. 따라서 계몽사상에는 어떻게 살 것인가는 영원의 물음에다가 어떻게 행복해질 것인가라는 현세의 과제가 덧붙여진다.본류는 몽테스키외, 볼테르, J.J 루소를 비롯한 프랑스의 사상가, 문학가의 여러 저작?작품에 있으나, 그 원류는 T.홉스, J.로크를 비롯하여 17세기의 영국에서 시작된다. 그리하여 T.레싱 J.G. 헤르더를 비롯한 독일의 여러 사상가에게까지 미쳤다. 이런 뜻에서는 18세기의 모든 문학운동?사상활동의 저류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으며, 각국에 싹트기 시작했던 시민정신의 형상화에 있어 매개자의 역할도 하였던 것이다.영국의 홉스는 프랑스의 R.데카르트와 함께 계몽사상의 원조라 할 수 있으나 고유의 의미에서의 영국 계몽철학은 로크와 D.흄에서 시작된다. 로크는 경험론을 인식론 안에 도입하여, 인간의 자연상태를 자유의 실존이라 규정하였으며, 자유로운 개인이 자유의지에 따라 공동체에 대한 복종을 선택한 이상, 선택은 강제에 의한 것이 아니라 계약에 의한 것이며, 인간의 자유의 지주가 사유재산권의 보유에 있는 이상, 국가는 시민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존재요, 국왕은 그 집행기관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프랑스의 계몽사상은 1734년에 출판된 볼테르의 철학서간에서부터 시작된다. 이어 몽테스키외가 법의 정신을 지어 삼권분립의 원칙을 밝히고, 절대왕정에 쐐기를 박았다. 또 D.디드로, J.R. 달랑베르, 뷔퐁, E.B. 콩디야크, P.H. 돌바크 등에 의해서 18세기 중엽부터 백과전서가 발간되었으며, 종교나 관습?제도의 주술에 묶여 있는 인간을 감성적?심정적으로 해방시키고, 앞으로 꽃필 과학에 대한 꿈을 고취하며, 각자가 자신의 주체성 위에 서서 새로운 세계관?처세술?창조에의 참가를 실현하도록 촉구하였다. 볼테르는 캉디드를 통하여, 디드로는 ‘마로의 조카’, ‘운명론자 자크와 그의 주인’을 통해서, 문명의 상식에 등을 돌리고, 태어난 그대로었다.
신윤복 풍속화를 통해서 본조선후기 성 풍속-기녀와 섹슈얼리티-목차1.머리말2.기녀와 양반사대부1)기녀의 변천2)기녀의 삶3)기녀의 동반자 ‘양반사대부’3.조선후기 섹슈얼리티1) 복식(여성복)에서 나타나는 ‘에로틱 존’2) 주막의 여주인 ‘주모’3) 춘화의 등장4.맺음말머리말성풍속사는 사회구조와 연관되어 있다. 성의 역사는 단지 도외시할 개인적인 모럴의 차원이 아니라 사회적인 모럴의 차원이고 그것은 또한 그 당시 사회를, 역사를 총체적인 역사를 연구하는 좋은 자료가 될 수 있다. 특히 신윤복은 한량과 기녀를 중심으로 한 남녀 간의 애정을 다룬 풍속화를 주로 그렸는데 화풍에 나타난 기녀와 섹슈얼리티)를 통해 단편적으로 나마 조선후기 성 풍속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1. 기녀와 양반사대부1)기녀의 변천전통시대 기녀란 연회 등의 궁중행사에 흥을 돋우기 위해가무나 풍류를 담당하는 일을 업으로 하던 여자들을 말한다. 말하자면 지배층 남성의 즐거움과 욕망을 위해 존재한 부류들인 셈인데, 우리나라에서 기녀가 발생한 기원은 언제라고 분명히 못 박을 순 없지만, 삼국통일을 한 명장 김유신이 사랑한 천관녀를 통해서 보듯이 최소한 삼국시대까지 올려잡을 수 있다. 기녀는 고려에 들어와 노비의 수적 증가와 함께 더욱 세분화되고 공식화 되었는데 중앙의 관료제도가 정착되자 개인 소유의 사노비들이 국가 소유로 귀속되면서, 이 와중에 국가에 소속된 기녀, 즉 관기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고려의 관기제도는 그대로 조선으로 이어졌는데 유교 윤ㄹ를 내세운 조선왕조였건만 아이로니컬하게도 기녀를 없애기보다는 더욱 세그림 1) 쌍검대무)분화하고 조직화했다. 조선시대 기녀는 각 지방마다 뽑혀 올려졌는데, 장악원에 소속되어 노래와 춤을 교육받았고, 이후에는 궁중에서 주관하는 여러 잔치에 동원되었다. 이와 같이 성리학적 윤리가 지배했던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기녀는 사라지지 않았을뿐더러, 초기의 기능적인 기녀들은 점차 줄고 매춘만을 전문으로 하는 기녀들의 수만 늘어갔다. 이러한 변화에 따라 기녀에 인식도 남자의풍류를 위해 존재한 계층이었다. 양반과 기녀는 양반의 풍류를 위해 존재한 계층이었다. 양반과 기녀는 악어와 악어새와 같은 생리를 지니면서도 조선시대 남녀 성윤리의 출발점이 다르다는 것 을 보여주는 대비적인 존재가 아닐 수 없다.그림 2)상춘야흥) 그림 3) 선유도)그림 4) 연소답청) 그림 5) 청금상연)한편 목숨보다 명분을 중시했던 양반들이었던만큼, 기녀의 존재 명분을 만들지 않았을 리가 없다. 이들이 내세운 기녀가 있어야 되는 제일 큰 이유는 ‘아내 없는 변방 군사들을 위해서’ 였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변방 군사들은 양반 군인들에 한정한 것이다. 그러나 조선시대 기녀는 변방의 위안부뿐 아니라 관아에서는 여흥을 돋우는 여악으로, 지방 관원들의 수청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역할을 담당했다. 여악의 일 외에 관원들 수청을 드는 일은 기녀의 의무이기도 했다. 수청이랑 높은 벼슬아치들의 분부대로 수종드는 일과 동침하는 일을 모두 의미하지만, 일반적으로 ‘수청들’다 하면 동침하는 것을 말한다. 조선시대 기녀들은 중앙의 경기와 지방기 형태로 구분되어 국가에 소속되었는데, 소속에 따라 역할이 달랐다. 서울 관기들이 각종 기예를 닦았던 반면, 지방 기녀들은 대체로 수청을 맡았다. 기녀라고 하면 이렇듯 국가 소속의 관기가 대부분이지만, 일반 기녀들도 있었다. 이들 중 혹 인물 좋고 가무가 뛰어나면 사대부의 첩으로 발탁되어 호화로운 생활을 보장받을 수도 있었다. 이들 중 혹 인물 좋고 가무가 뛰어나면 사대부의 첩으로 발탁되어 호화로운 생활을 보장받을 수도 있었다. 게다가 자식이라도 낳게 되면 기녀 신분에서 벗어날 수도 있었으므로 사대부의 첩이야말로 이들이 가진 최고의 소망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행운은 그야말로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격이고, 대부분의 기녀들은 매우 빈궁한 생활을 했다.기녀가 첩)이 되면 기녀 신분에서 일단 해방될 수 있으나 천인이라는 신분에서 벗어나 양인이 되는 일은 원칙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단지 기녀라는 직업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뿐이었다. 게다가 었다. 그러나 부인보다 기첩들이 더욱 사랑스러운 것을 어쩌랴. 본처들은 남편의 사랑을 잃은 대신 사회적 대우에 만족해야 했고, 기첩들은 남편의 사랑을 얻은 대신 개선되지 않는 차별을 감수해야만 했다. 불평등한 성윤리에서 나오는 불이익은 언제나 여성의 몫이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3)기녀의 동반자. ‘양반사대부’『조선왕조실록』에는 기녀로 말미암아 낭패를 본 양반사대부들의 스캔들이 수없이 나온다. 변방에 처가 없는 외로운 군사들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본령에서 벗어나 점차 지방 수령을 비롯한 관원들이 기녀들과 함께 음욕에 빠지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합법적으로 기녀와 어울릴 수 있었던 양반사대부였지만 금기나 제약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금기사항이란 이런 것들이었다. 즉, 기녀에게 수청이 아닌 강간을 해서는 안되며, 특히 국상이나 부모상, 국가 변란기에 기녀와 어울리면 탄핵받아 관직에서 파직되거나 좌천되었다. 이중에서도 특히 상중 음행은 파렴치한 불효 불충자라는 낙인이 찍히는 일이었으므로 조심해야만 했다. 그러나 기녀와 어울리다 파면당하는 일은 빙산의 일각이었다. 수령으로서 그 고을의 관비를 간음한 자는 모두 적발하여 삭탈관직하도록 법전에 엄연히 규정되어 있었으나, 대체로 지켜지지 않았다. 당시에 간음과 수청의 경계선이 불분명했기 때문이다. 수청받은 것뿐이라고 오리발을 내밀면 그뿐이었다. 기녀를 탐해서는 안된다는 선비윤리에도 불구하고 여체에 대한 본능적인 갈망은 누구도 막기 힘든 일이었다. 기녀제도는 오랜 논란에도 불구하고 폐지되지 않고 양반과 함께 흥망성쇠를 나누었다. 그러다 보니 『홍길돈전』을 지은 허균 같은 이는 “인간의 정욕을 어찌 막겠느냐”며 오히려 위선적인 선비윤리를 꼬집었다.)3. 조선후기 섹슈얼리티)1) 복식(여성복)에서 나타나는 ‘에로틱 존’조선시대 복식에도 위의 기녀와 성에 관한 유사한 패션 경향을 발견 할 수 있다. 물론 여성복에 한정되겠지만, 조선시대 여성 복식에서의 노출은 은폐라는 반대급부와의 기묘한 배합으로 섹슈 얼리티 적 효과를하체는 극도로 강조하여 윗단을 잔주름으로 촘촘히 주름잡고 허리밑을 부풀려서 잘록하고 가는 허리와 둔부를 강조한 치마가 에로티시즘을 나타낸다. 이런 복식의 특징은 신윤복의 대부분의 그림에서 볼 수 있으며 여성의 짧은 길이의 저고리와 치마사이에 가슴부분을 하얀 천으로 몸에 꼭 맞게 감싼 것 또한 에로티시즘을 나타낸다.) 위에서 말하는 노출이란 단순한 벌거벗음이 아니라 소위 'Erotic-zone‘ 이라는 남 성 시선이 담겨진 노출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패션은 은폐에 의한 노출이 주는 섹슈얼리티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데, 당시 여성들은 단속곳을 살짝 드러내거나 곧은 못 버선을 드러내어 발모양과 종 아리를 노출시킴으로써 섹슈얼리티를 한껏 강조했다.그림 6) 미인도)이와 같은 유행은 조선시대 기녀의 옷차림에서 비롯되었는데 이것이 남성들에게 어필하다 보니 세속의 남자들이 처첩에게 권하고 서로 전해져서 유행으로 번진 것이다. 말하자면 여성복의 변화에는 남성의 시선이 가장 큰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조선시대 여성복의 섹슈얼리티는 여성의 임신, 즉 출산 능력이라는 당대 여성의 최고 의무와 연결되어 있음을 알수 있는데,) 이 시대 관능적인 아름다움은 건강한 생산능력의 과시와 일맥상통되어 있는 것이다. 유교적 실천윤리가 완전히 파급된 18세기에 여성복의 섹슈얼리티가 강조되는 것도 이러한 현실적인 요청과 무관하지 않다. 조선시대 비실용적인 여성복은 한편으로 여성의 사회적 활동이 임신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2.) 주막의 여주인 ‘주모’머리를 땋아 한바퀴 돌려 틀어올리고 ‘팥닙댕기’라 하여 빨간색의 좁고 짧은 댕기로 한껏 멋을 부린 주 모들이 남정네들을 유혹하는 모습이다. 치마는 앞으 로 돌려 가슴에 닿을 듯이 치켜올려 중간에 허리띠 는 매었는데, 그 사이로 단속곳과 바지가 노출되어 있는 관능적인 모습이다. 이들의 관능적인모습과 매 무새에는 남성들을 유혹하려는 의도적인 허술함이 배어있다.그림 7) 주사거배)3) 춘화의 등장19세기에 풍속와희 한 경향를 갖춘 작품들이다. 따라서 이런 유의 그림들이 빠지기 쉬운 음란 외설적인 차원을 뛰어넘는 높은 회화성을 지니고 있다.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성교장면을 과장하지도 않고 그림 8이나 그럼 9와 같이 자연스럽게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으며 진솔하게 성애를 나누는 정감 있는 모습이 대부분이다.그림 8) 신윤복 춘화첩 그림 9) 신윤복 춘화첩그렇다고 해서 이들 그림이 모두 정상적인 부부관계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대체로 솟구치는 정욕을 해소하거나 성희를 즐기기 위한 성적 대상으로서 사회적 특수관계로 결합된 인물들이 등장한다. 말하자면 호색적인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기녀를 상대로 성애를 즐기는 모습이 주종을 이루고 있고(그림 8,그림 9), 주인이 여종과 관계하는 장면(그럼 10)이나 승려의 파계 광경(그림 11)도 다루어졌다. 단순한 성에 대한 노골적인 묘사를 하고자 한 것이그림 10) 신윤복 춘화첩 그림 11) 신윤복 춘화첩아니라, 사회풍자라는 안경을 가지고 성문제를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조선후기 춘화가 예술성을 넘어 사회성을 지니게 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조선후기 성 풍속도는 이와 같이 남녀 관계의 비밀스런 세계를 구체적이고도 적나라하게 그리면서도 이를 감칠맛나는 풍류의 세계로 승화시켜 독특한 예술적 경지를 이룩했다. 소탈한 실내와 야외의 서정적 경관은 일본의 화려한 장식적 분위기나 중국의 도식적으로 규격화도니 배경과 대조를 이루며 조선왕조 특유의 문인적 취향과 미감을 반영하고 있다.하지만 조선후기 춘화는 구한말에 이르러 급속히 퇴락하고 만다. 이 무렵부터 일본 창녀의 진출과 도시 매음이 크게 번창하면서 일본의 값싼 춘화류가 상당량 유입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춘화는 자극적인 음란성만이 강조되어 예술적 품격은 사라지고 저질화의 길로 들어섰다. 예술적 가치를 상실하고 단순한 도색물로서의 의미 외에는 다른 가치를 발견할 수 없게 될 때, 춘화의 역사적 가치도 사라지고 만다.맺음말조선왕조의 건국은 고려 왕조가 안고 있던 정치적?사회적 모순과 폐단을 는유교적 가치것이다.
문화 인류학과 한국 사회의 역사-몸을 통해 본 문화-목차1.머리말2.몸을 통해 바라본 문화1)문화현상으로서의 몸2)근대적인 몸3)몸과 차별4)몸과 권력3.몸을 통해 제시되는 사례1)비만에 대한 인류학적 시각2)낙태에 관한 한국사회의 담론4.맺음말머리말현대 사회에서 인간의 신체는 경제적 생산과 소비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다. 전통사회에서는 부를 확장시키기 위해 동물의 몸을 착취했던 반면, 새로운 경제체제에서는 인간의 몸이 전 지구적 경제 발전에 이용되고 있다. 1930년대 이전에는 신체 그 자체보다는 오히려 신체에 관한 제도와 생각, 그리고 물질적인 재화에 관심이 더 많았다. 이는 예전의 문화사가 ‘몸으로부터 먼’ 작업 관행을 갖고 있었던 것과 결부되어 왔는데 1970년 이후 구체적인 역사적 신체에 대한 시선이 비로소 열리게 되었다. 신체 행위는 일정한 문명의 한 표현으로 해명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정한 문명에 의해 각인된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리하여 몸의 다양한 의미를 알아보고 몸이 사회의 요구와 제도에 따라 어떻게 변화하여 가는지 낙태와 비만의 예를 통해 간단히 살펴보겠다.1. 몸을 통해 바라본 문화우리는 종종 몸과 분리하여 우리가 몸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곧 몸이기도 하다.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는 서구의 근대적 인식론은 몸을 마음의 반대 개념으로 이해해왔다. 17세기 서구에서는 몸을 내부의 자아와 외부 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자연의 영역으로 인식하였다. 즉, 몸은 생물학적으로 주어진 것이며,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과는 달리 눈에 보이는 물질적 영역으로 정의되어 이성에 의해 과학적으로 규명되어야 할 대상으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근대 이후 다른 사람이나 문화와는 분리되어 존재하는 가시적인 몸은 자연스럽게 자연과학의 연구 영역으로, 비가시적인 마음은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영역으로 나누어졌다.오랫동안 비서구사회를 연구해 온 인류학자들은 비서구사회에서는 서구와는 다른 방식으로 몸이 존재한다고 보고해 왔다. 서구에 움직임을 마치 자연적 사실인 것처럼 인식하게 만든다는 것을 지적해 왔다. 그러나 몸이 단순히 문화를 반영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견해가 있다. 이러한 입장에 선 인류학자들은 몸이 갖는 보편적인 생물학적 조건과 문화와의 상호작용을 강조하면서 이 두 가지를 결합해 몸은 생문화적(biocultural) 적응의 결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1) 문화현상으로서의 몸한국사회에서 몸은 다양한 의미를 나타낸다. 몸은 외모와 체형을 의미하기도 하고 건강이나 심리적 상태를 의미하기도 한다. 다양하게 표현되는 몸에 관한 말들을 살펴보면, 몸은 객관적인 것으로 이해하기보다는 몸을 갖고 있는 개인이 속한 사회와 문화에 따라 몸에 대한 의미가 만들어지고 이해된다.몸에 대한 느낌이나 정서, 그리고 몸에 발생하는 고통이나 쾌락은 그 몸을 지닌 개인의 것이다. 그러나 몸의 외양이 갖는 의미나 몸이 느끼는 고통과 쾌락의 의미를 개인이 스스로 창조하는 것은 아니다. 한 문화 속에서 개인이 경험하는 몸에 대한 감각이나 체험의 의미는 그 사회의 언어가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소통되고 이해된다.개인이 몸을 통해 느끼는 것을 타인과 나로 공유하고 소통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모든 문화에는 몸이 무엇이고, 몸의 내부에는 무엇이 있으며, 몸에서 일어나는 여러 현상들은 왜 나타나는 것인지에 대한 경험과 지식을 다루는 전문가 집단이 존재한다.몸이 특정 문화의 사고 체계와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에 대해서는 김성례가 연구한 제주도 무당의 예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몸이 초자연적인 힘에 의해 조절된다고 생각한 전통사회에서는 무당이 몸에 대한 지식을 독점하고 있었다. 제주도의 무당은 아픈 사람의 몸이 가족이나 친족 또는 지역사회에 속해 있다고 간주하고, 병은 바로 이러한 사회관계에 이상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징후의 하나라고 여긴다. 다시 말해 개인의 밖에 존재하는 집단 간의 원한, 누군가의 주술, 초자연적인 힘 같은 것들 때문에 병이 생긴 것이다. 이는 사람의 몸은 독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정이나 혼 있는 신경 화학적 요인이다. 이러한 자연과학적 사실에 대한 관심이 임상의학의 특징이고, 몸에 대한 과학적 접근이다.몸에 대한 경험이 과연 객관적일 수 있을까. 몸에 대한 체험이나 감각은 언어를 통해 소통되고, 언어 사용 또한 성별, 계급, 국적, 연령 등에 따라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다. 이렇게 볼 때 몸에 대한 경험은 객관적이지 않다. 의사들이 몸이 불편해서 의사를 찾는 사람들 가운데 대부분이 의학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는 환자가 느끼는 신체적 고통이 질병인지 아닌지를 환자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의 제도화된 치유체계, 즉 의료기관에서 결정한다는 것이다. 객관성이라는 것은 개인 경험의 의미를 해석하고 타당성을 증명하는 전문가 집단이 결정한다. 몸의 경험이 객관화되고 표준화되는 상황에서 표준화 과정에 포함되지 않는 많은 경험들은 무시된다.현재 한국 사회에서는 의료기관이 몸에 대해 가장 권위적이고 독점적인 권력과 지위를 갖고 있다. 한국 중산층의 젊은 여성들은 임신과 출산에 관한 대중적이고 경험적인 지식, 병원 중심의 고급 의료기술과 의학에 관한 많은 지식 및 정보를 갖고 있으나 한의학의 처방 등은 의사가 갖고 있는 의학적 지식과 만나면서 보조적이고 비공식적인 것이 되고 만다. 여성들이 갖고 있는 과학적?의학적 지식은 자신의 몸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의사나 병원에 대한 의존성을 높여준다.몸에 대한 근대적인 인식 체계는 몸을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존재로 파악하고 있다. 그래서 개인의 몸의 경험은 일반적인 몸의 경험 속에서 이해되고, 개별적인 몸의 경험은 특이한 것으로 여긴다. 특히 정치?경제적인 지배력과 함께 이성 중심의 서구 근대 세계관과 지식 체계가 비서구사회로 이식되면서 서구적인 것을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것으로 여기게 된다. 한국 사회에서도 서구화와 근대화의 과정 속에서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몸에 대한 언설은 의료 체계나 위생 관념을 통해 제도화되어 왔다.3) 몸과 차별모든 사회에는 몸에 대한 규칙과 규들이 지배적인 사회적 가치를 어떻게 몸으로 드러내고 있는지를 미국과 한국의 여성을 통해 알아보자. 미국의 여성 철학자인 수잔 보르도는 더 이상 음식을 몸에 저장해야 할 필요가 없는 풍요한 미국 사회에서 날씬한 몸에 대한 여성의 욕망은 현대사회에서 여성이 갖고 있는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고 했다. 이제까지 사적 영역에만 존재했던 여성이 남성과 함께 공적 영역으로 진출하게 되면서, 마르고 날씬한 여성의 몸은 약하고 작은 이미지와 잘 관리된 몸의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보르도는 이러한 마르고 날씬한 여성의 몸은 보호받아야 하는 전통적인 여성성과, 몸에 지방을 누적시키지 않기 위한 끊임없는 자기 관리와 자기절제라는 공적 영역의 남성적 가치를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두 가치를 실천하고자 하는 여성의 몸은 끊임없는 다이어트에 시달린다는 것이다.김은실은 남성 중심의 한국 사회에서 결혼한 여성이 혼인을 통해 속하게 된 집단에서 자신의 입지를 확보하기 위해 다양한 사회?문화적 장치들을 이용해 아들을 낳고자 하는 사례들을 제시했다. 여성은 가부장적 사회질서 속에서 적합한 성원권을 획득하고 남성 중심의 사회질서에 유리하게 편입되기 위해 아들 낳기를 원한다. 이러한 사례들은 여성의 몸에 남성 중심의 지배 가치가 어떻게 실현되는지를 보여준다. 몸에 적용되는 규칙들을 개인이 적극적으로 실천함으로써 몸은 그 사회의 지배적 가치와 질서 구조를 강화시키는 강력한 수단이 된다.또한 문화는 사회적 각본과 규범을 제공함으로써 사회적, 정치적 질서의 필요에 순응하는 개인적인 몸을 만드는 데 권력을 행사한다. 고문들은 체제에 순응하는 몸을 훈육하기 위해 개인의 몸에 가하는 정치적인 권력의 가장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몸에 가해지는 정치적인 권력에 맞서 저항하기도 하는데 대표적인 예가 단발령을 거부한 선비들이다. 반면 21세기 벽두에 나타난 젊은 남자의 염색한 긴 머리는 국민 또는 남성 정체성과 상관없는 취향과 스타일의 문제로 이해된다. 그러나 염색이나 성형수술을는 지방 획득률의 차이는 사춘기 대 크게 벌어지고, 재생산의 능력을 가질 수 있을 정도로 성숙해지는 시기에 그 차이는 더욱 확실해진다. 칼라하리 사막에서 수렵채취 생활을 하고 있는 쿵족은 보통 키가 아주 작고 비쩍 말랐지만 피하지방에 있어서는 매우 두드러지는 성적 동종 이형의 전형적 패턴을 보여준다. 성차는 비만율에서도 나타난다. 남성들보다는 여성들의 비율이 월등히 높지만 좀 더 풍요로운 서구사회에서는 저개발 사회의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것보다 비만율의 성차가 줄어든다.②비만은 근대화와 함께 등장인체측정학적 연구에 의하면 전통적인 수렵채취 사회에는 뚱뚱한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근대화를 경험하고 있는 전통사회에 대한 많은 연구들은 비만율의 급속한 증가를 보고하고 있다.③비만은 사회계층과 반비례의 관계를 갖는다.성인 여성들에게 나타나는 비만과 사회경제적 계급간의 관련성은 주목을 받을 만하다. 어린 시절에는 일반적으로 중산층과 상류층의 여자아이들이 가난한 계층의 여자아이들보다 더 뚱뚱하지만, 사춘기 무렵이 되면 이 두 집단의 여자아이들에게서 보이는 지방 획득 수준은 역전되고, 성인기에 들어서면 하층 계급의 여성들이 중산층 여성들보다 뚱뚱해지는 경향이 뚜렷이 나타난다고 한다. 이 사실을 볼 때 비만의 유행에 사회적 요소들이 작용한다는 사실은 의심 할 여지가 없다.(2) 진화와 비만의 관계 : 음식물 섭취패턴, 식량부족 그리고 적응비만의 원인으로 유전과 생화 양식 중 어떤 것이 더 중요한지, 두 요소 사이의 상호작용 방식이 어떠한지 확실하게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이들이 서로 관련되어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이 글에서는 비만을 유전적 성질과 문화적 요소 두 가지가 관련된 진화적 압력의 산물로 간주한다.①식량 채집으로부터 식량 생산으로의 문화적 진화가난한 사람들을 굶김으로써 부유한 사람들은 기근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따라서 비만은 단순한 문명병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조차 뚱뚱해질 수 있을 정도로 음식 공급이 가능한 정도의 점이다.
중국은 오랜 역사 속에서 우리와 서로 긴밀한 관계를 가져왔기 때문에, 정치?경제?사회?문화 모든 면에서 우리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우리는 과연 현대 중국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최근 중국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져 중국을 대상으로 한 출판물이 붐을 이루고 있으나 단순한 ‘관광적 관심’과 ‘경제적 관심’을 제외한다면 중국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은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이에 나는 지리적으로든 문화적으로든 역사적으로든, 가장 가깝고 오래된 ‘이웃 나라’ 중국에 대해서 올바른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중국을 지탱해온 시대의 정세 및 각 방면의 사상적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첫 출발점이라 생각하여 중국 현대 철학계의 거장 펑유란의『현대 중국 철학사』를 읽게 되었다.그리하여 단순한 역사책 보다는 좀 더 심도있는 철학책을 택하였는데, 수 천년 중국을 지탱해온 유교가 그랬듯 한 시대에서 한 국가의 사상적 배경을 형성하는 것은 한 철학자의 철학에 의해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역사는 철학에 영향을 줄 수 있고, 철학 역시 역사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보았다. 한 시대에는 그 시대의 시대정신이 있으며, 한 시대의 철학이 곧 그 시대정신을 결정한다고 생각했고, 한 철학자의 철학을 연구하려면 진실로 “그 사람을 알고 그가 살았던 시대를 규명해야”하고, 또한 한 시대 혹은 한 민족의 역사를 연구하려면 그 철학을 알아야 한다고 느꼈다. 물론 중국사의 전반적인 지식이 없는 나로서는 벅찰 수도 있는 책이였지만, 그 보람 또한 클 것이라는 생각에 결국에 이 책을 선택하게 되었다.이 책은 서론을 제외하고 모두 11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국 대륙의 혁명적 변화를 실감한 펑유란 선생은 신해혁명을 자산계급의 구민주주의 혁명으로 보고 1949년 마오쩌둥의 프롤레타리아 정권을 신민주주의 혁명이라 일컫으며, 이 책의 서문을 시작하고 있다. 간략하게 이 책의 각 장을 요약하자면 제 1장에서는 량치차오의 입헌파와 장빙린의 혁명파 사이에 일어났던 현대화 이론 투쟁을 소개했는데, 선생은 후자에 무게를 두었다. 제 2장에서는 쑨중산의 철학 사상을 소개하고 있는데, 국공합작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던 신삼민주의를 절반의 사회주의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삼민주의를 이데올로기로 삼고 있는 타이완 국민당 정권의 시각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제 3장에서는 5.4 운동을 촉발시킨 차이위안페이의 철학 사상을 논하며 그를 신문화운동의 창시자라 일컬었다. 그리고 미학 교육을 강조한 그의 미학 사상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그리고 제 4장에서는 신문화운동의 우익인 후스와 현대 신유학의 창시자라고 불리는 량수밍을 소개하고 있다. 저자는 량수밍을 현대신유학의 창시자로 보지는 않고 다만 새로운 문화론을 제시한 인물로 보았다. 제 5장에서는 신문화운동의 좌익인 천두슈와 리다자오의 사상을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제 6장에서는 1920년대에서 1940년까지 일어난 3대 논쟁을 소개하고 있다. 제 7장에서는 마오쩌둥과 중국 현대 혁명을 논하며 신민주주의 사싱에서 시작해 그의 모순론, 실천론 저술을 소개하고, 극좌 사상 단계에 있었던 문화대혁명의 실책을 비판했다. 제 8장에서는 진예린의 현대화된 이학사상을 소개하였으며 제 9장에서는 자신의 신리학 사상을 소개하며 그 이론적 모순을 지적했다. 제 10장에서는 슝스리의 신심학 철학을 소개하였다. 제 11장에서는 『중국 철학사 신편』을 총결하면서 ‘중국 철학은 사람을 연구하는 것을 중심으로 삼는 인학’이라고 규정하며, 공산당의 대립 투쟁을 지양하고 ‘원수는 반드시 화해하는’ 방향으로 현대의 역사가 진행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중국 철학이 세계 철학의 미래에 공헌할 것이라는 게 이 책의 결말이다.하지만 이 책이 나오기 전까지의 하지만 그의 삶은 순탄하지 못했다. 그의 삶은 중국이 외세침략과 공산당 정권, 문화대혁명과 개혁개방의 격변기를 관통한다. 펑유란의 최후작인 '현대 중국 철학사'에는 펑유란 개인의 고통과 중국현대사의 격변이 겹쳐져 있다.한 세기 가까운 펑유란의 지난날을 되돌아보면, 그것은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는데, 1948년 이전이 제 1시기이고 1949년에서 1976년까지가 제 2시기이며, 1977년에서 1990년까지가 제 3시기이다. 펑유란은 제 1시기에 철학사 두 편과 6서를 써서 자신의 학술적 지위를 확립하였으며, 제 2시기에는 자신의 과거를 회개하며 두 권이 『중국 철학사 신편』을 부정하고 처음부터 다시 써 일곱 권으로 이루어진 『중국 철학사 신편』을 완성하였다.세 시기로 이루어진 펑유란의 일생은 각각 자아실현, 자아상실, 자아회귀의 시기를 나타낸다. 이렇듯 펑유란이 겪어 온 고난의 과정은 현대 지식인이 겪은 고난의 축소판이다. 또한 중국 현대 학술 문화가 왜곡되고 꺽여 온 과정이 축소판이기도 하다.이처럼 거의 한 세기에 달하는 그의 인생은 중국현대사의 큰 물줄기를 좌우하였던 중요한 사건으로 점철되어 있기 때문에 그의 철학 혹은 철학사는 중국현대사 속의 여러 논란과 굴절 그리고 진보를 상당부분 반영, 체현하고 있는 것이다.이런 펑유란에 대한 평가는 중국 현대사를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또는 평가 주체가 처한 정치적 환경이나 철학적 입장에 따라 참으로 다양하다. 그의 모습은 중국철학이라는 거대한 체계에 하기 위해 그의 『중국철학사』를 읽은 사람에게는 친절한 안내자의 얼굴로 기억되지만, 신중국 성립 이전의 『중국철학사』와 이후의 『중국철학사신편』의 관점의 변화와 관련하여 혹자에게는 자기비판을 두려워하지 않는 철학적 구도자로, 혹자에게는 정치적 압력에 굴복한 초라한 ‘반유교사’적 지식인으로, 더 나아가서 ‘변절을 일삼는 불완전한 인격의 소유자일 뿐만이 아니라 중국철학의 진정한 면모를 파악하지 못한 인물로 비쳐지기도 한다.하지만 일찍이 펑유란은 미국 유학시절 “중국에서는 왜 근대과학이 발전하지 못하였는가” 라는 당시로서는 매우 선구적이고 중요한 과학사상사적 문제를 제기하여 미국학계의 주목을 끌었다. 중국 철학은 서양의 근대 문명이 도래하기 이전까지 수천 년에 걸쳐 동아시아 문명권에서 주도적 지위를 차지했지만 근대 국민 국가가 탄생하기 이전에는 ‘한국 철학’이나 ‘일본 철학’은 물론이거니와 ‘중국 철학’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단지 ‘유교’나 ‘도교’또는 ‘불교’와 같은 사상 유파의 이름만이 존재했을 따름이다. 철학이나 사상 앞에 특정 국가의 이름을 붙이는 관습은 근대 국민 국가가 탄생한 이후의 일이다. 근대 이전까지는 지리적 차단으로 인해 문명 간의 교류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동아시아 지역에는 단 하나의 중심 문명, 즉 한자 문명만이 존재한 현실에서 펑유란이 중국사상사에 대한 분석을 통해 중국인이 근대과학을 발전시키지 못한 것은 ‘하려고 해도 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할 수 있었지만 하지 않았다’고 결론지은 것은 다소 소극적인 것이지만 이러한 문제를 제기하고 중국의 사상사에서 내적 원인을 찾으려고 했다는 시도 자체만으로도 높이 평가할 수 있다.펑유란은 자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중국 철학사 신편』 여든 한 장을 쓰면서 나는 분명히 내가 본 그대로를 썼다. 아울러 친구들에게 ‘만약 어떤 사람이 이 책을 부당하다고 생각하여 출판할 수 없다고 한다면, 나는 왕선산(王船山)처럼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왕선산은 깊은 산 속에서 수백 권의 책을 저술했다. 아무도 그의 책을 출간해 주지 않았으나 몇 백 년 뒤엔 마침내 출판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문장은 스스로 목숨이 있어 사필(史筆)의 교훈에 의존하지 않는다(文章自有命, 不仗史筆垂)’는 것이다.
-제 3주차-지역사 연구의 이론과 실제지역적 지식, 지역적 역사 : 기어츠, 그리고 그를 넘어서- 알레타 비어새크 -목차머리말1. 클리포드 기어츠의 『문화의 해석』2. 살린스와 그의 『역사적 메타포와 신화적 실재』3. 새로운 텍스츄얼리즘의 경향맺음말머리말인류학과 역사학은 각기 유럽으로부터 용솟음쳐 나오는 동일하지만 여러 갈래의 지적 조류를 위한 물꼬를 터왔다. 본디 합쳐져 있었던 이들 분야는 오늘날 이론적인 흥분의 장소로서 여기에서 다양한 전통은 헤게모니를 위한 투쟁을 벌이기도 하고 항복하고 교차하고 병합하며, 여기에서 중요한 용어나 개념이 높은 도전을 받기도 한다. 이러한 충돌은 각 분야가 현재 자신의 미래를 창출하려고 고투하고 있는 비옥한 토양을 제공한다. 같은 원천의 다른 지류로서 동일한 지적 동력의 자양분을 받은 인류학과 역사학은 현재 동일한 가능성에 대면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학의 현 상황을 개괄하며 그 다양성을 확립하고 현재의 논점을 명확하게 밝히려는 것은 적절한 일이다. 여기서는 우선 클리포드 기어츠의 『문화의 해석』으로부터 출발하여 어떻게 상징적인 접근을 시도하였는지 살펴보고 기어츠를 넘어선 살린스의 업적을 통하여 앞으로 인류학과 역사학이 어떻게 통합 모색되어지는지 살펴보면서 새로운 텍스츄얼리즘의 경향에 대해 알아보자.1. 클리포드 기어츠의 『문화의 해석』『문화의 해석』에 실린 첫 논문에서 문화적 분석은 “두꺼운 묘사”를 포함한다고 기어츠는 우리에게 말한다. 물질적으로가 아니라 의미론적으로 두껍다는 “두꺼운 묘사”의 두꺼움은 예컨대 근육 경련이나 눈을 깜박이는 것과 같은 의미없는 반사 작용과 윙크와 같이 의식적으로 의사 소통을 위하여 사용하는 수단을 구분하는 능력에 달려있다. 두꺼운 묘사는 대중적 행위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고 하기 보다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검토한다. 이것은 행동의 상징적 내용을 “읽으며” 그것을 기호로서 해석한다. 이러한 기어츠의 대부분의 탄약은 순진한 객관주의와 경험주의를 지니고 설명의 일반적 법칙을 추구하는 실증해석적인 전환은 인류학의 외부 뿐만이 아니라 내부에서도 강한 영향력을 지녀왔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인류학자들은 그 단점에 대하여 그 어느때 보다도 날카롭게 인식하고 있다. 기어츠에게 방법론적인 엄격성이 결여되고 있었고 그의 모태였던 해석학이 인신론적인 곤경을 겪고 있기 때문에, 문화의 분석은 기어츠가 말한 바 “문학적이고 부정확한 것이라면 무엇에든 알레르기적 반응을 보이는” 회의론자들의 공격을 받기 쉬었다. ) 아마도 이런 것들은 기어츠가 설명 양식과 원인에 대한 추구를 거부한 결과로 나타난 것이겠지만 실제로 기어츠의 문화 분석은 여느 구조주의 만큼이나 정태적)이다. 동떨어진 장소의 지나간 시대에 대한 두꺼운 묘사를 제물로 바치면서 『네가라』는 지역적 지식으로서 지역적 역사를 추구한다. 시간은 단지 또다른 양식의 전위로서 다시금 소외된다. 의미는 결코 유도되지 않고 묘사될 뿐이다. 두꺼운 묘사와 텍스트라고 하는 기어츠가 사용하는 메타포)는 이러한 맥락에서 새로운 중요성을 지닌다.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더 나아가 “지역적 지식”이 상징적 영역으로서 가장 잘 이해될 수 있는 것인가를 의문시하는데 왜냐하면 지역적 지식의 이념적 정치적 성격을 검토한다는 것은 그러한 지식이 작용하고 있는 역사적 상황에 관심을 기울일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점을 가지게 되는데 문화란, 기어츠가 그랬듯이 “인식의 지역적 틀 속에” 위치시킴으로서만 알 수 있는 섬, 서로간의 섬인가? 아니면 문화는 지배의 구조 속에서 세계적으로 지정학적으로 위치하고 있는 것인가?종속 이론에 의해, 그리고 보다 최근에는 윌러스타인의 세계 체계의 이론에 고취되어 정치? 경제적 설명의 틀은 지역성을 범국가적, 서구 지배적, 자본주의적 체계라는 관점에서 조망한다. 역사학을 자연스럽게 동료로 받아들이는 새로운 세계적 전체론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러한 관점은 “세계를 자급자족적인 사회와 문화의 총계로 보기보다는 하나로, 전체로, 체계로” 보며, (의도적으로 비기어츠적인 혹은 반기어츠적인 방식으로까지)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것은 인류학, 역사적 사회학, 역사학의 관심을 공통적인 대상에 초점을 두도록 만든다는 효과를 지닐 수도 있을 것이다. 즉, 부분적으로는 유동적이고 부분적으로는 제한적인 다원적 구성 요인으로 이루어진 역사적이고 이질적인 실체로서의 세계 체계가 그 대상인 것으로서 그 내부에서 ”섬“과 ”세계“는 상대방으로 환원되지 않으면서 서로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2. 살린스와 그의 『역사적 메타포와 신화적 실재』살린스와 그의 『역사적 메타포와 신화적 실재』로 관심을 돌리면서 우리는 해석과 그것에 관련된 논쟁으로부터 구조주의에 의해 고취된 분석 양식으로 전환한다. 『역사적 메타포』는 하와이의 초기 접촉 과정의 역사를 재구성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재창출과 변형이라는 살린스의 두개의 관련된 주제에 대해 농도 짙게 논의하고 농도 짙게 설명한 미시적 연구이다.두개의 핵심적 장절 중 첫번째인 “재창출”에서는 하와의 초기 접촉과정의 사건들)이 “이미 구성된 것처럼 체계 속에 포괄되었다고”고 논한다. 그 요점이란 사건이 기호인 한, 역사는 “의미의 구조에 의해 구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살린스는 이러한 단순화에 저항하면서 역사에 있어서 구조가 지니는 생산적 역할을 입증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더 이상 단순화 될 수 없는 것이다. 역사는 문화에 의해 질서를 부여받으며 사물에 의미를 부여하는 틀에 따라 다른 사회에서 다르게 나타난다. 문화적 틀은 의미가 실천적으로 수행될 때 어느 정도 다시 평가를 받게 되기 때문에 역사에 의해 질서를 부여 받는다.두 번째의 중요한 장절인 “변형”에서 살린스는 역사적 행위자들의 실제적인 관행이 하와이의 체계에 새로움을 도입시켰다고 논한다.) (각주 7)에서 보여지듯 하와이의 의식을 논하건 그것과 쿡 선장의 운명적 관계를 논하건 추장이 금기를 상업적으로 이용한 것을 논하건 살린스는 그가 말하는 바 “행동 속의 기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것은 상황에 따라 전개된 범주와 가치를 말한다. “행동 속의 기호”는 “장소 속의 기계로 들어가게 된다.또한 『역사적 메타포』에서 살린스는 철학자 폴 리쾨르가 언어에 관한 논문인 “구조, 단어, 사건”에서 구조주의와 해석학을 절충시킨다는 도전을 공개적으로 받아들이며 이룩했던 것과 똑같은 지적 업적을 이룩하고 있다. 여기에서 리쾨르는 살린스처럼 단어는 언술 행위에 개입됨으로써 기호 용례의 “심원한 역학”에 노출되어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고 논한다. 단어란 구조화된 기호의 장 내부 뿐만 아니라 동시에 담론의 상황적 생산적 장 내부에도 위치하고 있는 “대치될 수 있는 실체”이다. (살린스의 언어를 사용한다면) 이것은 행동 속의 기호이자 동시에 장소 속의 기호이다. 사용된, 그리하여 새로운 의미가 부과된 단어는 “체계로 되돌아가며 체계에 역사를 부여한다.” 만일 언어가 “구조나 사건 어느 것도 아니라 그 중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담론 속에서 끊임없이 전환하는 것이라면”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와 클리포드 기어츠의 “문화적 분석”은 역사에 관련된 단일한 논의의 상호 보완적인 측면인 것이다.비록 살린스의 명백한 의도는 구조주의의 단점에 대해 수정안을 제공하려는 것이지만 레비스트로스와 기어츠를 조화시킴에 있어서 살린스는 이 책에서 논의되고 있는 문화적 분석의 취약점의 일부를 동시에 극복하고 있다. 살린스의 모델이 지니는 가장 중요한 특징중의 하나는 이것이 상황적 실용성에 대한 관심과 의미론에 대한 초점을 결합시킨 방식이다. 역사적으로 사용되었을 때 하와의 추장의 카푸는 기표이자 동시에 도구이다. 그 의미는 구조적인 뿌리를 지니고 있지만 그 도구성은 순간의 자기 이익적인 즉흥적 시행에서 파생되었다. 브로델의 장기적 시간과 단기적 시간은 이렇듯 정치적인 것과 문화적인 것, 물질적인 것과 이상적인 것, 하부 구조와 상부 구조로서 연결된다. 살린스의 관련성의 구조는 역사의 원동력으로서 이러한 관계에 중점을 둔다. 따라서 살린스의 변증법은 다차원적이며, 그것이 그의 연구가 E. P 톰슨의 역사적 유물론으로부터 리쾨르의 수정주의적 해석학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분야에견고한 표면” 에의 관심을 통하여 상징적 접근을 가하게 만들 기회도 제공할 것이다.이러한 종합은, 체계는 그 개방성 속에서 특징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살린스가 다루는 섬은 ‘역사의’ 섬이라는, 그의 다른 논점에서 벗어나는 것도 아니다. “작용하고 있는 동력적 요인은 인간 경험의 모든 곳에 존재하고 있다. 역사는 사회들 사이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주어진 사회 내부에서도 이와 동일한 일반적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관행의 변화를 논하건 쿡 선장의 도착을 논하건 살린스는 전례가 없는 미래가 그 원천을 찾을 수도 있는 지점으로서 ‘문화의 섬’으로 구성된 “세계”를 넘어서는 ‘아르키메데스의 지레점’을 규명함에 관심을 두고 있다. 살린스의 연구에서 쿡 선장은 이론적 실재의 역사적 메타포가, “세계” 너머의 세계가, “지평선” 너머의 지평선이, 미래를 가능하게 하는 마감의 파열구가 되는 것이다.3. 새로운 텍스츄얼리즘의 경향문화란 많은 목소리가 제기되고 동의보다는 이견이 지배하는 광장이다. 키징 역시 ‘해석’에 대해 비판하면서 문화적 실재가 지니는 다성적(多聲的) 성격을 고수한다. (원천적으로 오도되어을 가능성이 있는) 패러다임 설정에 중점을 두는 대신에, 인류학자는 “인식론, 종합, 표현 자체의 담론적 형식의 문제에” 그리고 나탈리 지몬 데이비스가 다중 매체적 계획이었던 『마르탱 게르의 귀향』에서 하였듯 장르의 실험에 관심을 둘 것을 권유받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표현 양식 위기”에 의해 발생한 패러다임의 간주곡은, 본디 해석학적 틀에 의해 유발되었던, 인류학에 있어서의 반응적 양식을 고양시키기 위한 기회로 이용된다.새로운 텍스츄얼리즘은 인류학적 텍스트 생산의 시학은 물론이거니와 정치학에 대한 비판으로 제기되고 있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은 서구가 나머지 세계를 대표한다는 주장이 지니는 모든 권위의 죽음에 조종을 울린다. 제국의 종언과 탈식민지 상황의 전개는 문화적 경계선의 내부가 아니라 그것을 가로질러 다성(多聲)이 퍼지고 있는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