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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주도의 역사와 문화재
    목 차1. 제주의 역사탐라국의 성립백제에 복속신라에 입조고려에 입조원의 지배조선의 제주 관할2. 관덕정3. 제주목관아지4. 제주읍성1. 제주의 역사① 탐라국의 성립전설에 의하면 고을나·양을나·부을나 3신인이 모흥혈에서 용출하여 나라를 세우고 살았다고 한다. 중국의 역사책인 “후한서”와 “신당서”에 의하면 사람은 키가 작고 언어는 한(韓)과 같지 않다고 하였다. 신라의 삼국통일 이전의 사회는 3성씨족의 공동연맹체제를 보인다.② 백제에 복속탐라는 지리적으로 가까운 백제와 476년(문주왕 2) 4월에 사신을 파견하여 방물을 바쳤으며 백제왕은 사신에게 좌평이란 높은 관등을 수여하였다. 498년(동성왕 20) 8월에는 탐라가 공부를 이행하지 않으므로 동성왕이 직접 탐라 정벌에 나섰다. 이 소식을 들은 탐라왕은 사신을 파견하여 사죄하며 공부할 것을 약속하였다.※ 고구려와는 정식으로 국교는 없었으나 백제에 복속될 때까지 가옥(珂玉)을 수출하는 등 교역이 이루어 졌다.③ 신라에 입조탐라는 662년(문무왕 2) 2월에 탐라국주 좌평 도동음률(徒冬音律)에 와서 항복함으로써 이때부터 신라의 속국이 되었다. 그리고 탐라는 일본과 가깝게 지내다가 678년에 신라의 경략을 받은 뒤로는 신라 일변도의 국교가 이루어 졌다.※ 한편 중국과의 관계는 신라가 삼국통일을 계기로 661년 8월에 탐라왕 유리도라가 당에 사신을 보내었고, 또 일본과는 661년 당에서 일본으로 귀국하던 일본사신이 탄 배가 풍랑을 만나 탐라국에 대피하였다가 귀국할 때 탐라의 왕자 아파기 등 9명이 이들을 따라서 일본에 간 일이 있은 뒤로 매우 교섭이 활발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 많은 왕자와 좌평이 일본을 다녀왔으며, 또 680년 9월과 686년 8월에는 일본에서 사신의 왔다는 기록도 있다.④ 고려에 입조신라 말기에는 점차 복속관계에서 벗어나 신진세력인 고려에 우호관계를 맺고자 하여 925년(태조 8) 11월 사신을 파견하여 방물을 바치고,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뒤 938년 12월에는 탐라국주 고자견(高自堅)이 태자 말로(末老)를 파견하여 입조하였다. 이때 고려는 신라의 예에 따라 성주·왕자의 작위를 수여하였다. 이때부터 탐라는 고려의 번국(蕃國)으로서 독립적인 체제를 유지해 나가다가 1105년(숙종 10) 고려의 지방행정구획인 1개의 군으로 개편되면서 반독립적인 체제는 사라졌다.1153년(의종 7) 탐라군은 다시 격하되어 탐라현으로 된 뒤로는 고려조정으로부터 파견된 현령에 의하여 행정업무를 관장하게 되어 실질적인 면에서 탐라국의 체제는 없어지고 성주와 왕자의 관직만이 남아 상징적 존재로 유지되었다.⑤ 원의 지배고려 원종 14년 몽고군이 제주를 침범해 삼별초 진압한 후, 탐라총관부에 의해 제주는 원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 후 원이 쇠퇴하자 고려 공민왕 23년 최영장군이 제주로 내려와 몽고군을 토벌하였다.⑦ 조선의 제주 관할조선 태종 3년 성주와 왕자의 칭호가 폐지되고 조선조 중앙에서 실질적인 행정력을 가진 목사를 두어 제주를 관할하였다. 제주는 주로 조선조의 정객과 학자들의 유배지로 이용되었는데, 이러한 정객과 학자들의 훈학은 제주에 유학의 보급과 문화에 기여되었다.※ “탐라국은 고려에 입조하는 45대 고자견왕까지 왕국을 유지하였다. 백제나 신라에 복속하였다는 의미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가 백제와 신라쪽 관점에서 쓰였기 때문이고, 사실은 탐라국은 복속된것이 아니라 백제나 신라 같은 강국으로부터 왕국을 보존하고자 조공을 바치고 한 것이다. 마치 조선이 중국 명이나 청나라에게 조공을 바치고 사대관계를 유지하면서 조선이라는 나라를 유지한 것과 같다.”는 견해도 있다.2. 관덕정(觀德亭)위치 : 제주도 제주시 삼도1동건물 : 이중기단 위에 세운 정면 5칸, 측면 4칸짜리 단층 팔각지붕이다. 창호문 없이 사방이 개방된 정자 형식으로 처마가 길었던 것이 특징이나 일제 때 처마를 2척 이상 잘라버려 외형이 크게 손상되었다.설명 : 관덕정은 1448년인 조선 후기 세종 30년에 제주 목사 신숙청이 군사 훈련을 위해 세운 곳이다. 이후 여러 차례 개건과 중수를 거쳤는데, ‘관덕’은 “사자소이관성덕야(射者所以觀盛德也)”라는 의 글귀에서 유래된 것인데 그 뜻은 ‘활을 쏘는 것은 높고 훌륭한 덕을 쌓는 것이다’이다. 이는 제주지방의 사림화를 위한 것이었다.)에 의하면 창건한 후의 용도는 연무를 지휘하고 사열하는 곳으로 뿐만이 아니라 관민이 함께 공사를 의논하거나 잔치를 베푸는 곳, 또는 죄인을 다스리는 형장으로도 이용되었다고 한다.)를 보면, 관덕정은 현재 복원 상태와는 달리 동쪽을 향한 관덕정 광장을 가운데 두고 북쪽과 남쪽에 건물이 나란히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북쪽 건물은 ‘상아’라고 하며 제주 목사가 집무하는 곳이었다. 남쪽 건물은 ‘이아’라고 하여 판관이 집무하는 곳이었다. 조선 후기 제주는 형식상 전라도였으나 섬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독자적 행정체계를 갖추고 있었기에 제주 목사가 전라감사의 업무를 일부 대행하였고 목사는 군사 업무도 맡게 되었다. 때문에 목사 외에 추가로 판관을 파견하였다. 보편적으로 ‘이아’는 지방 사림의 권력기구인 향청을 뜻하지만 제주도의 경우 사림 세력이 강성하지 못했고 대신 목사의 보좌역인 판관이 주요 업무를 담당했기 때문에 ‘이아’는 중앙에서 파견된서울 양반의 몫이었다.관덕정 현판은 본래 안평대군의 글씨였으나 그 현판은 불에 타 없어졌고 현재는 이산해)가 쓴 편한이 남아있다.관덕정의 대들보 아래 창방 부분을 살펴보면 벽화가 있는데 제주도에서 발견되는 벽화로는 유일하며, 작자를 알 수는 없으나 상당히 격조 높은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워낙 흐릿하고 훼손되어 자세히 그림을 알아볼 수는 없다.3. 제주목 관아지위치 : 관덕정 일대설명 : 제주목 관아지는 탐라국 이래 제주의 최고 행정 관청이 모여있던 자리이다. 발굴을 통해 유구 최하층에서부터 탐라시대, 통일신라, 교려시대에 이르기까지 연속적인 문화층이 확인된다.제주목 관아터는 최근 (1702년)와 (1760년)을 활용하여 조선 후기의 모습을 복원하였다. 민관이 합심하여 복원한 이 제주목관아는 1999년 9월에 복원을 시작하여 2002년 12월에 복원을 완료하였다.구조 : 이 터의 구성을 살펴보면 우선 연희각은, 목사가 집무하던 곳으로 상아의 동헌, 목사의 정아 등으로 불리웠다. 이원조 목사의 '연희각기'에 의하면, "연희각은 예전에 기문(記文)이 없어서 건치(建置) 연월일을 상세히 알 수가 없다. 현판도 누가 명명하고 누가 쓴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건물은 겹처마에 깊숙한 지붕으로 좌대(座臺) 위에 높게 지어져 있다. 그 이름을 연희라고 한 것은 외신이 충성을 다하고자 하는 정성을 표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본 건물의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3칸, 이익공 겹처마에 팔작지붕으로 41.33평이다.또 홍화각은 예전에 절제사가 사무를 보던 곳이다. 1435년 최해산 안무사가 창건하였다. 홍화각이라 명명한 것은 왕의 어진 덕화가 백성에게 두루 미치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붙여진 것이다. 또한 홍화각은 탐라고각(耽羅高閣)이라 불리었을 정도로 관아건물 중에서 가장 웅장하였다. 그러나 홍화각은 1940년에 일제에 의해 강제로 훼철되었다. 본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4칸, 이익공 겹처마에 팔작지붕으로 면적은 47.13평이다.우련당은 1526년에 이수동 목사가 성 안에 우물이 없으면 적이 침입하여 성을 포위하거나 화재가 발생하였을 때 구급하기 어렵다 하여, 못을 파고 물을 가두어 연꽃을 심은 뒤 그 위에 세웠던 정자이며, 연회 장소로 사용되던 곳이다. 그 뒤 양대수 목사는 개구리 울음소리가 시끄럽다 하여 연못을 메워 평지로 만들었다. 영조 때에는 김 정 목사가 다시 정자를 중수하고 향의실이라 개명하여 공물을 봉진하는 장소로 사용하였다. 본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3칸, 초익공 겹처마에 팔작지붕으로 면적은 26.91평이다.
    인문/어학| 2008.05.28| 6페이지| 1,000원| 조회(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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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시대 탑비 - 보물9호 서봉사 현오국사탑비 중심으로
    서봉사현오국사탑비(瑞峰寺玄悟國師塔碑)-목차-1. 머리말2. 서봉사 현오국사탑비3. 현오국사4. 시대별 유물 비교(고려시대)5. 맺음말보물 제9호 - 서봉사 현오국사 탑비1. 머리말이번에 한국 미술사 발표 과제는 보물9호를 발표하는 것이다. 국보1호부터 시작해서 출석번호대로 각자 발표할 유물을 배정받았다. 기대를 가지고 기다린 결과 나에게는 보물9호인 서봉사 현오국사탑비가 당첨되었다. 인터넷으로 검색해보기 전 까지는 보물9호가 뭔지 몰랐던 지라 검색해 보고 나니 서봉사 현오국사탑비가 된 것을 보았다. 처음 본 유물이어서 당황했지만 오히려 모르는 유물을 조사하는 것이 좋을 것이란 생각을 하면서 서종사 현오국사탑비를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다.2. 서봉사 현오국사탑비종목 : 보물 제9호소재지 : 경기 용인시 수지읍 신봉리 산111시대 : 고려시대건립 목적 : 고려 중기 승려인 현오국사 종린(宗璘, 1127~1179)의 공덕을 기려 세운 탑비.서봉사의 창건에 대한 기록은 없고 절터의 크기로 보아 아주 큰 규모의 절로 추정된다.전하는 말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절에서 떠내려오는 쌀뜨물이 10리나 흘러내려와 왜적이 물을 따라 올라가서 절을 불태웠다고 한다.이곳은 탑비의 비각을 세우는 공사를 하던 도중에 기록이 남아있는 기와조각이 발견되어 서봉사의 옛터임이 밝혀졌다. 명종 15년(1185)에 세워진 이 탑비는 현오국사(玄悟國師)의 행적을 후대에 알리고자 만들어졌다. 보통 부도와 함께 건립되는데 절터에 부도의 흔적은 없고 이 비석만 남아 있다.화강암의 비받침위에 점판암으로 만들어진 비몸돌이 놓여있는 단촐한 모습이다. 비받침부분의 윗면은 4변을 비스듬히 잘라내었고, 비문이 새겨지는 비몸에도 윗부분의 양 귀끝을 사선으로 접듯이 잘라서 마무리하였다.비문에 의하면, 현오국사는 15세에 불일사(佛日寺)에서 승려가 된 후 부석사(浮石寺)의 주지를 거쳐 명종 8년(1178) 53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왕이 크게 슬퍼하여 국사(國師)로 삼고 시호를 ‘현오(玄悟)’라 한 뒤 동림산 기슭에서 화장하였다.그 외에도 글을 지은 이와 건립연대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지명이 짓고 유공권이 썼다. 전체적인 조형이 간략한 고려 후기 석비의 새로운 양식을 보여준다.3. 현오국사 ( 탑비의 내용을 중심으로 )현오는 고려 의종때의 승려로 1178(명종 8)에 입적하자 명종은 그를 국사로 봉하고 동림산에 다비하였다. 비의 찬자는 이지명 서자는 유공권이다.명종 원년(1171)에 그에게 좌세의 호를 내리고 내전에 불러 만수가사를 하사하였다고 한다. 명종 8년에 나이 53세로 입적하였는데 왕이 크게 슬퍼하여 국사를 삼고 시호를 현호라 하고 동림산 기슭에서 화장하였다.현재 원 위치에 있는 비는 귀부와 이수 형식이 아닌 네모난 방부에 이수는 없고 비신의 두 모서리를 줄인 규형 비신으로서 비신의 둘레에 당초문을 둘렀고 비신 아랫부분에 파손이 많아 판독이 어려운 글자가 많다. 비문의 내용은 현오국사가 왕족으로 태어나 출가하여 원명국사에게 수학하고 귀신사, 국태사, 중흥사, 부석사 등의 주지를 지내며 명종이 내전에 초빙하여 백고좌회를 주관하게 하는 등 활동하다가 귀법사에서 입적한 생애를 기술하였다.4. 시대 별 탑비 비교1) 고려초기 탑비명칭 : 보원사법인국사보승탑비 (普願寺法印國師寶乘塔碑)종목 : 보물 제106호분류 : 기록유산 / 서각류/ 금석각류/ 비수량 : 1기지정일 : 1963.01.21소재지 : 충남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119시대 : 고려시대소유자 : 국유관리자 : 서산시보물 제106호보원사는 고란사라고도 하며, 이 절에 관한 역사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주변에 담아있는 유물들을 볼 때 규모가 큰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비받침인 귀부(龜趺)는 거북모양이나, 머리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의 모습으로, 목은 앞으로 빼고 콧수염은 뒤로 돌아 있으며 눈은 크게 튀어 나와 있다.등 위에는 3단받침을 하고 비를 얹었으며, 비머리는 네 귀퉁이에서 안쪽을 바라보는 용을 새기고, 앞·뒷면에는 구름무늬를 조각하였다. 비문에 의하면, 법인국사(法印國師)는 광종 25년(974)에 국사(國師)가 되었고, 이듬해에 입적하였으며, 비는 경종 3년(978)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거대하고 웅장하나 조각기법이 형식에 치우친 감이 있다.2) 고려 중기 탑비명칭 : 법천사지광국사현묘탑비 (法泉寺智光國師玄妙塔碑)종목 : 국보 제59호분류 : 기록유산 / 서각류/ 금석각류/ 비수량 : 1기지정일 : 1962.12.20소재지 : 강원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 74-2시대 : 고려시대소유자 : 국유관리자 : 원주시국보 제59호법천사터에 세워져 있는 지광국사(984∼1067)의 탑비로, 국사가 고려 문종 21년(1067)에 이 절에서 입적하자 그 공적을 추모하기 위해 사리탑인 현묘탑과 함께 이 비를 세워놓았다.현묘탑은 현재 경복궁으로 옮겨졌고 탑비만이 옛 자리를 지키고 있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돌을 세우고 왕관모양의 머릿돌을 올린 모습이다. 거북은 목을 곧게 세우고 입을 벌린 채 앞을 바라보고 있는데, 얼굴은 거북이라기보다 용의 얼굴에 가까운 형상으로, 턱 밑에는 길다란 수염이 달려 있고 부릅뜬 눈은 험상궂다.독특한 무늬가 돋보이는 등껍질은 여러 개의 사각형으로 면을 나눈 후 그 안에 왕(王)자를 새겨 장식하였다. 비몸돌에서 눈에 띄는 것은 양옆면에 새겨진 화려한 조각인데, 구름과 어우러진 두 마리의 용이 정교하고도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머릿돌은 네 귀가 바짝 들려진 채로 귀꽃을 달고 있는데, 그 중심에 연꽃무늬가 조각된 3층의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를 얹어 놓아 꾸밈을 더하고 있다.비문에는 지광국사가 불교에 입문해서 목숨을 다할 때까지의 행장과 공적을 추모하는 글이 새겨져 있다. 비문은 정유산(鄭惟産)이 짓고, 글씨는 안민후(安民厚)가 중국의 구양순체를 기본으로 삼아 부드러운 필체로 썼다.고려 선종 2년(1085)에 세워진 작품으로, 거북등의 조각수법과 머릿돌의 모양이 새로운 것이 특징이다. 비 앞면 가장자리에 덩굴무늬를 새기고, 양 옆면에 정교한 조각을 한 치밀함이 돋보여 형태와 조각이 잘 어울리는 고려시대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3) 고려 후기 탑비① 창성사진각국사대각원조탑비(彰聖寺眞覺國師大覺圓照塔碑)종목 : 보물 제14호분류 : 기록유산 / 서각류/ 금석각류/ 비수량 : 1기지정일 : 1963.01.21소재지 : 경기 수원시 팔달구 매향동 13-1시대 : 고려시대소유자 : 국유관리자 : 수원시보물 제14호진각국사의 행적을 알리는 탑비로 창성사터에 있다. 직사각형의 비받침 위에 비몸돌을 세운 다음 지붕돌을 올려놓았다. 비문을 새긴 비몸돌은 마멸이 심하고 오른쪽 모서리가 떨어져 나갔으며, 지붕돌은 경사면이 완만하다.비문에는 진각국사가 13세에 입문한 뒤 여러 절을 다니며 수행하고 부석사(浮石寺)를 중수하는 등 소백산에서 76세에 입적하기까지의 행적이 실려있다. 입적한 다음 해인 우왕 12년(1386) 광교산 창성사 경내에 이 비가 세워졌다.간략화 된 고려 후기 석비의 형식을 보이고 있으며, 천봉사대각국사비와 신륵사의 두석비 등과 비교할 만 하다. 글씨는 고려 전기의 힘 있는 풍모가 사라진 투박한 것으로, 고려 후기의 글씨가 퇴보하였음을 보여준다. 비문은 이색이 짓고 승려인 혜잠이 글씨를 새겼다.
    인문/어학| 2008.12.18| 7페이지| 1,000원| 조회(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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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일성의 주체사상 분석 우리의 대응 방향
    북한의 김일성 주체사상을 분석하고 우리의 대응방향을 논하라.서론북한에서의 주체사상은 정치?경제?사회?문화 등의 부문만이 아니라 북한 주민의 일상생활은 물론 심지어 가치판단과 실천적 행위의 보편적 준칙이 된지는 이미 오래 되었다. 요즘 들어 북한과 관계된 국내외적인 급격한 환경 변화 속에서는 국민들로 하여금 북한에 대해 명료한 인식과 그에 의거한 바람직한 통일관을 견지하는 것이 중요한 시기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북한사회의 지배적 실체가 무엇인지 잘 아는 안보의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북한관련 안보의식의 기본 방향을 설정하는데 있어 최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바로 주체사상의 본질을 파악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북한 사상교육의 정점에 있는 주체사상을 분석해보고 이에 따른 대응방향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본론1955년에 김일성이 주장한 사상에서의 주체가 어떠한 배경과 요인에 의하여 표방되었는지에 대해 북한의 당 이론가들은 첫째, 한민족의 사대주의로부터의 해방, 둘째, 김일성의 지도체계의 확립 즉, 당의 지도력 강화, 셋째, 대국주의에 의한 내정간섭 반대 등 세 가지 이유 때문에 주체의 확립이 필요하였다고 역설한다. 요컨대 김일성에게는 한반도가 처한 지리적 위치와 환경, 역사 발전의 특수성, 그리고 혁명의 복잡성 때문에 주체를 확립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로 대두되었던 것이다.첫째, 한민족의 사대주의로부터의 해방과 관련하여 살펴보자. 스탈린사후 소련이 당 지도부 내부의 권력투쟁으로 인해 다른 공산국가들에 대한 영향력을 많이 잃게 되자 동구 공산권국가들은 각자 독자노선을 추구하게 되었다. 그 틈을 타서 중국은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새로운 중심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김일성은 공산권 내부의 역학관계의 변화에 따라 현실적 실리를 추구할 수 있는 방향으로 이념적 전환을 모색해야만 했다. 김일성의 주체사상은 이러한 공산권의 역학적 정세관계 변화의 적극적 반영으로 나타난 것이다.둘째, 대국주의에 의한 내정간섭과 관련하여 고찰해 보자 김일성은 주체사상이란 대의명분을 활용하여 중소분쟁을 계기로 어느 한쪽으로도 기울지 않는 중립노선을 표방하고자 하였다. 북한은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커다란 은혜를 입고 있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소련과 중공이 이념을 둘러싼 분쟁에 말려들자 북한은 어느 쪽으로도 기울기 힘든 매우 난처한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김일성은 이러한 곤경을 벗어나기 위해 중소의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자주노선과 독자노선 추구의 이데올로기적 기반을 모색하게 되었으며, 주체사상은 이러한 현실적 요구에 의해 탄생되었다.셋째, 김일성의 지도체계의 확립 즉, 당의 지도력 강화와 관련하여 검토해보자. 김일성은 북한 정권수립 후 자신의 확고한 권력기반의 토대 위에 김일성 유일체제를 확립하려는 생각에서 교조주의분자, 사대주의분자, 종파주의분자 등을 차례로 제거한다. 이와 같이 정적을 숙청하거나 제거하여 김일성 유일 지배체제를 확립하는데 필요한 정치적 기반을 확립할 수 있었으며, 주체사상은 대의 명분적토대가 되었다.주체사상의 특징을 보면 북한은 주체사상의 특징에 대하여 김일성 동지의 혁명사상은 그이께서 독자적으로 창조하신 주체사상?이론?방법의 전일적 체계이며, 완성된 공산주의 혁명이론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체사상으로 북한은 어떠한 이득을 보려했을까? 크게 정치적, 외교적, 군사적, 경제적으로 알아볼 수 있다.첫째, 정치에서의 자주이다. 북한 주체사상이 정치의 측면과 관련해서 가지는 함의는 정치적 자주이다. 정치에서의 자주란 북한의 내정에 대한 소련과 중국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당 정책, 경제정책 등 모든 국내정치에서 자주성을 갖고 독립국가로서의 지위를 유지하려는 정책이라 볼 수 있다.둘째, 경제에서의 자립이다. 경제에서의 자립개념은 북한 자체가 스스로 벌어서 먹고 살 수 있는 자립적이며 자주적인 경제를 건설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나아가 주체적인 경제건설이론을 탄생시킨다. 주체적 경제건설론은 북한에서 사회주의 무계급 사회를 건설하고 공산주의로 넘어 가기 위한 경제건설이론이다.셋째, 외교에서의 자주이다. 북한이 대외정책에서 자주노선을 표명하게 된 동기는 중소분쟁의 발단이다. 북한은대중소관계 있어서 세계 어느 지역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원천적 특수성을 갖고 있다. 중소 양국과 동시에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세계 제2차 대전 직후 오늘의 조선노동당이 창건될 때 모스크바파와 연안파는 동시에 당 건설의 후원자들을 평양에 파송했다. 또한 중소 두 나라는 한국전쟁 이후 북한의 재건을 위해 다량의 원조를 제공했다. 구체적으로 1961년 7월 북한은 소련 및 중공과 거의 같은 시기에 우호원조 및 상호원조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중소 두 나라와 군사동맹관계를 맺었다. 이런 이유로 해서 북한은 한편으로 자신의 해방자이자 정치 경제적 후원자인 소련을 소홀하게 대할 수도 없었으며, 다른 한편 문화적 스승이고 구원자이며 같은 아시아 국가인 중공을 경시할 수도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소 양국의 비위를 거슬리지 않고 피해갈 수 있는 길은 중도노선 혹은 자주노선을 취하는 것이었다.
    인문/어학| 2008.12.18| 2페이지| 1,000원| 조회(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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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밭 교육박물관 답사
    한밭 교육박물관■박물관연혁1992 07. 10 한밭박물관 개관11. 23 문화체육부 등록1994 07. 10 9개 전시실 및 4개전시코너 설치10. 01 조선시대 교육생활사 모형 설치08. 30 어진회의 및 상거래 모형 설치2002 07. 10 개관10주년08. 23 박물관 건물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50호로 지정2003 08. 07 관람객 100만명 돌파■박물관 소개1992년 7월10일 교육부의 승인을 받아 현재 대지 1270평에 연건평644평으로 7개의 전시실과 3개의 전시장, 야외전시장 그리고 각종부대시설을 갖추고 있습니다.옛날에 사용하던 교과서를 비롯해서 교육관련도서, 교육학습기록, 교원학생서장, 사무 용품 등 교육관련유물 총 30000여점의 자료를 보존, 전시하고 교육과정과 연계 하여 학생들의 학습장으로 활용하도록 운영 하고있는 교육전문박물관입니다.한밭교욱박물관 건물은 1938년 6월 8일 준공된 학교건물로 가장오래된 건물입니다.한번의 개축도 없이 학교 건물로 사용되었고 6.25전쟁때는 유엔군과 북한군이 번갈 주둔하여 지금까지도 당시의 총탄의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있어 민족의비극의현대사를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현재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로 제50호로 지정되어 있다.■전시실 소개○제 1 전시실삼국시대부터 관학(官學)에서 사용하였던 사서오경(四書五經)을 비롯하여 서민교육의 뿌리 라고 할 수 있는 서당에서 사용하였던 《천자문(千字文)》, 《동몽선습(童蒙先習)》, 《명심보감(明心寶鑑)》 등 고서를 전시하고 있다.1876년 개항과 더불어 서양 문물이 물밀듯이 들어오면서 정치, 사회, 경제 등 전 분야에 개혁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였는데 특히 특정계층 을 대상으로 한 인재양성 위주에서 대중을 위한 학교 교육, 국민교육으로 전환의 계기가 되었다.이에 학교에서 교과서로 사용하였던 《소학만국지지》(1895), 《동국역사》(1899), 《중등 만국지지》(1902) 등 개화기 교과서를 전시하여 옛 선현 들의 면학정신을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하였다.그 외에도 문방사우(文房四友)와 이를 취급하였던 필방(筆房)을 재현하였고, 서당의 모습을 모형으로재현하였다○제 2전시실일제 치하 민족저항기 교육은 내선일체(內鮮一體), 신사참배(神祠參拜), 국어와 역사의 말살, 창씨개명(創氏改名) 등 우리 민족의 혼을 말살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따라서 자율과 자주정신을 억압하려는 군사교육, 노동력 착취를 위한 근로교육, 황민화를 위한 민족혼 말살교육이 교육활동의 전부였다. 이에 당시의 실증 사진자료를 중심으로 국어교과서인 《조선어독본》, 《고등조선어》, 《초등수신서》 등의 교과서를 전시하고 있다. 또한 민족혼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시행되었던 창씨개명에 대한 서장을 전시하여 나라를 빼앗겼던 통한의 35년을 되돌아 볼 수 있도록 하고 있다.○제 3전시실광복 이후부터 현재 7차 교육과정기까지의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주요 전시자료로는 광복과 더불어 우리말과 글을 되찾기 위해 조선어 어학회에서 발행한《한글 첫걸음》을 비롯하여,《한글교수지침》, 《한글의 바른길》 등 임시 국어교과서와 미 군정청 학무국에서 발행한 《초등국어교본》 등을 들 수 있다.또한 6·25 전시 중에 발행하였던 전시교재를 전시하여 우리나라의 높은 교육열을 가늠할 수 있도록하였다. 이외에도 노천 칸막이 교실 또는 판자촌 등을 재현하여 당시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교육에힘썼던 조상들의 열의에 대해 알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학생들이 실제 사용했던 교복, 모자, 배지,가방 등은 가난했던 지난날의 교육을 되새겨 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제 4 전시실조선시대 교육기관 모형촌 조선시대 교육 생활상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모형촌을 제작하여 전시하고 있다. 인간의 출생과 혼례, 논 갈기, 밭농사, 베 짜기 등의 세시풍속을 볼 수 있고, 서당, 서원, 향교, 사부학당, 성균관 등 조선시대의 주요 교육 기관이 모형으로 재현되어 있다.○제 5전시실사랑방 사랑방을 재현한 곳으로 옛날 남자들이 생활하던 모습을 그대로 꾸며 놓았다. 사랑방에는 서안, 책궤, 평상, 죽부인, 사방탁 자, 문갑, 촛대 등을 전시하였고, 생활 유물로는 남성용 모자, 각종 신발, 시전지판 등을 전시하여 남자들의 생활상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볼 수 있도 록 하였다○제 6전시실안방 안방을 재현한 곳으로 옛날 여인들의 생활하던 모습을 그대로 꾸며 놓았다. 주요 전시물로는 경대, 서 안, 이층장, 예장함, 다듬잇돌과 방망이, 시집 갈 때 타고 가던 가마와 고비 등이 있고, 여인들의 생활 용품으로는 비녀, 빗치개, 청동거울, 다리미, 여성 용 모자, 노리개, 화장품, 신발 등을 전시하여 여인들의 생활상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하였다.○제 7전시실어전회의(御前會議), 시장풍속 모형촌 왕이 조정의 신하들과 중요 국정을 논의하던 어전회의를 하는 편전(便殿) 모습과 시 장 풍속의 모형촌을 재현하고 있다. 시장 풍속 모형촌은 사라져가는 시골장의 풍경과 부보상, 객주, 상인들의 전통적인 상거래 관행을 알 수 있도록 전 시하였다.
    인문/어학| 2008.12.17| 7페이지| 1,500원| 조회(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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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시대의 제도
    고려시대의 제도- 목차 -Ⅰ. 머리말Ⅱ. 본론 (전시과와 토지분급제)1. 전시과제도⑴ 전시과제도 시행 이전의 토지제도① 식읍(食邑)과 녹읍(祿邑)② 역분전(役分田)⑵ 전시과제도의 정비와 특징⑶ 전시과의 토지분급방식2. 전시과제도하의토지운영과 성격⑴ 공전?사전?민전의 개념⑵ 공전의 유형과 운영① 장처전(莊處田)② 내장전(內莊田)③ 공해전(公?田)④ 둔전(屯田)⑤ 학전(學田)과 적전(籍田)⑶ 사전의 유형과 운영① 양반전(兩半田)② 군인전(軍人田)③ 사원전(寺院田)※ 보충(녹과전)Ⅲ. 머리말Ⅰ. 머리말전시과제도는 고려전기 관리에 대한 대우체계로서 경종 원년 11월 시정전시과를 시작으로, 목종 원년 12월 개정전시과를 거쳐, 문종 30년 경정전시과의 완성으로 일단락을 보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고려전기 제반제도의 정비와 맥을 같이하면서 기본적으로는 당시의 토지소유구조를 반영하고 있다.전시과는 기존의 토지소유관계를 새롭게 재편한 것이라기 보다는 그것을 그대로 용인한 채, 녹읍제를 폐지하고 역분전제를 계승하면서 관리들에게 토지에 대한 수조의 권리를 분급한 것이다. 이러한 과정의 이면에는 고려정부의 정치적 의도와 토지소유구조를 반영한 제반문제가 내포되어 있다.이러한 전시과와 토지분급제를 중심으로 고려의 토지제도를 살펴보기로 하겠다.Ⅱ. 본론 (전시과와 토지분급제)1. 전시과제도⑴ 전시과제도 시행 이전의 토지제도① 식읍(食邑)과 녹읍(祿邑)전시과가 설치되기 이전에는 앞 시기의 제도를 일정하게 계승하면서 왕족과 공신들에게 지급한 식읍과 고려에 귀부한 귀순성주나 공경장상들에게 지급한 녹읍이 있었다. 식읍은 원래 중국의 주대(周代) 봉건제 하에서 왕족과 고신에게 지급한 기원을 가지고 있으며, 신라의 통일전후에도 식읍의 존재는 찾아진다. 고려왕조에 들어와서도 태조 원년 6월 을축에 동궁식읍(東宮食邑)의 존재가 찾아지며, 태조 18년 6월 견훤에게 야주를, 태조 18년 12월 김부에게 경주를 식읍으로 지급한 예가 있다. 식읍에 관한 구체적 운영방식을 보여주는 사례는 없다. 대졌는데 『고려사』의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경종 원년 11월 처음으로 직산관(職散官)의 각 품 전시과를 정하였는데 관품의 높고 낮음을 논하지 않고 단지 인품(人品)으로 정하였다. (『고려사』 권 78, 식화1, 전시과)위와 같이 시작하여 시정전시과는 공복의 색깔에 따라 자삼 18품, 무반 단삼 10품, 비삼 8품, 녹삼 10품 그리고 잠업에 단삼 10품, 비삼 8품, 녹삼 10품 무반에 단삼 5품의 등급으로 나누고 그에 따른 전시 지급의 규모를 서술하고 있다. 지급의 기준으로 제시되어 있는 인품은 기본적으로 4색 공복제에 기초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시정전시과는 관계와 실직을 동시에 고려한 토지분급체계였음을 알 수 있다. 관계를 기준으로 자삼층은 원윤이상의 관계만을 소유하고 있는 호족층과 공신세력으로 이루어졌고, 문반 무반 잡업의 단삼 비삼 녹삼층은 광종대 이후 관료로 진출한 관료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절충적인 토지분급제가 만들어지게 된 데에는 광종 경종 연간의 정치사회가 아직 정연한 관료제적 조직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는 점과 관련이 있다.성종대에 들어오면서 제반 제도의 정비가 이루어지는데 3성6부제를 비롯한 중앙관제의 저비와 12목제로 대표되는 지방제도의 정비 및 관계제(官階制)의 개편, 향직제의 개편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시정전시과에서 이중적 기준으로 분급되었던 토지분급체계도 재조정 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따라서 목종 원년 전시과는 다시 개정되었다.개정전시과의 지급대상은 매우 다양하지만 대체로 관인층, 이속층, 군인층의 세 계층으로 나누어진다. 관인층에는 실직에 종사하는 관원은 물론이고 관직은 없고 산직만을 소유한 관인까지 섞여 있었다. 16과에서 18과에 걸쳐 고루 배치되어 있는 이속층은 시정전시과에서 장사로 분류되어 있던 부류들이다. 군인층은 시정전시과에서 이 해 과등에 미치지 못한 자 에 속했던 부류로 생각되는데 개정전시과에서 정식의 분급대상자로 편입되었다. EH한 18과에 들지 못한 자들은 대체로 잡류층으로 생각 의문이다. 지리업 관계 지급대상자로는 대통, 부통, 지리사, 지리박사, 지리생, 지리정 등이 있다. 별사전시과는 모두 6등급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최고 전 40결, 시 10결로부터 전 17결이 지급되었는데 3등급 부통이하부터 전(田)만이 지급되었다.특히 전시과에서 주목되는 내용은 조선시대의 과전법과는 달리 시지(柴地)가 지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시지는 일반적으로 땔감채취지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단순한 땔감채취지라기보다는 이용 가능한 다양한 용도가 있었으리라고 생각된다. 특히 개간을 통한 경작지의 확대는 관료 개인의 수입의 증가라는 측면 못지않게 국가의 입장에서도 토지이용의 효율화를 추구한다는 측면에서 굳이 막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시지의 지급지는 대채로 양반관료들의 거주지와 가까운 개경주변에 위치하였다. 시지는 하루 왕복 거리인 1 일정(日程)과 일틀 왕복거리인 2 일정(日程)으로 구분하여 각기 지명을 제시하였다.⑶ 전시과의 토지분급방식고려시대 토지제도는 기본적으로 토지사유제에 기초하고 있었다. 따라서 고려의 국가개정은 일반민의 민전으로부터 획득되는 조세수취에 의해 유지되었다. 전시과제도 역시 크게 볼 때 국가 개정 운영의 한 방편으러서 국가에 직역을 부담하는 관료층에게 그들의 직역에 대한 대가로서 토지를 지급하는 제도이다.전시과의 토지분급방식과 관련하여 두가지의 해석방법이 있다. 하나는 수조권적 분급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면조권적 분급방식이다. 수조권적 분급방식으로 보는 견핸에 의하면 분급되는 토지는 농민이 소유하는 민전이며 수조권자는 국가로부터 민전에 대한 수조의 권리를 부여받는 것이라고 본다. 면조권적 분급방식으로 보는 견해에 의하여 분급되는 토지는 피급자 자신이 소유하는 토지이며 면조권지급이란 국가로부터 이 토지에 대한 면조에 권리를 지급받는 것이다. 양자의 견해는 기본적으로 토지사유제를 인정하는 입장에서 전개되는 논리이지만 내부적으로 고려전기사회를 보는 시각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전시과의 지급규정에 의하면 전시의 지급은 기본적으로 양반관료. 장처에 거주하는 주민은 대체로 농경에 종사한 것으로 이해되며 이들은 장호, 장정으로 불리웠고 백정과 마찬가지로 조세와 요역을 부담하였으며 명경업, 서업, 산업, 율업 등의 과거에 응시할 자격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백정보다는 응시과목이 많은 다소 불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장처는 왕실에 소속되어 왕실재정의 근간을 이루는 곳이었음은 요물고 소속의 360개 장처 중 선대에 사원에 시납한 것은 모두 환원시키라 는 창왕의 교서 등에서 보아 알 수 있다. 장처전은 정처민들이 소유한 민전인 만큼 이들로부터의 전조수취는 1/10이었을 것이로 생각된다. 따라서 장처전은 그 본질에 있어서는 민전과 다를 바가 없었으나 전조나 요역을 수취할 권리가 왕실?궁원 등에 주어진 토지였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장처전은 3과공전에 속하는 토지로 보아야 할 것이지만 이는 논자에 따라서 견해의 차이가 있다.② 내장전(內莊田)내장전은 장처전관는 달리 왕실 직속의 소유지로서 왕실재정을 담당하는 내장댁에 소속된 토지로 생각된다. 『고려사』권93, 최승로전에 의하면 태조께서는 궁에서 공역을 하는 내속노비를 제외하고는 외교로 나가 살게 하고 토지를 경작시켜 세(稅)을 내게 하였다. 라고 하였다. 이때 노비로서 외거하여 경작했던 토지는 내장전과 같은 왕실 직속의 토지로 생각되며 그들은 생산물의 일부를 세(稅)로 왕실에 내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내장전은 고려초부터 있었던 토지지목으로 생각된다. 또한 고려사 권 129 최충헌전에 의하면 희종이 최충헌에게 내장전 100결을 하사하였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이로 보아 내장전은 고려중기에도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그 이후의 사실을 전하는 직접적 기록이 보이지 않으므로 언제까지 존재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내장전은 왕실직속지인 만큼 그 경영은 전호제나 직영지경영의 방식이 채택되었거나 주변 농민들의 요역노동으로 경작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 수조율을 정화갛게 단정할 수는 없지만 전호제나 직영지경영의 경우 국공유지의 수조율에 비의절감이라는 이중적 효과를 겨냥한 제도라고 할 수 있다.고려시대 둔전의 기원은 어디에서 잡을까는 막연하다. 패강진 개척을 위해 통일신라 후기에 설치하였다가 현종대까지 계속된 것으로 이해되고 있는 안서도 둔전의 예는 고려시대 둔전의 초기 예로서 주목된다. 그 외 현종 15년, 의종 17년 관대의 섬에 설치한 둔전 등의 예가 있다. 여기서 보아 둔전은 통일 신라기에서부터 계승해오거나 북방개척시 점령지에서 군량을 조달하는 방편으로 둔전을 설치하였음을 알 수 있다. 둔전은 양계 외에 연안지역에도 둔전을 설치하고 있었다. 둔전의 관리기구로도 동도둔전사의 예에서 보아 해당관리기구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둔전은 주로 국공유지인 한광지에 설치되었고 그 경작은 군인의 사역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특히 당해 주둔지의 방수군에 의해 경작되었다. 이때 국가에서는 이들에게 경작에 필요한 종자 농우 농기 등을 제공하여 국가의 관리하에 둔전경영이 이루어지는 방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때로는 부곡민을 도거(徒居)시켜 경작을 시키기도 하고 둔전군에게 토지를 지급하여 경작시키고 수조하기도 하였는데 이때의 수조율은 대체로 1/4정도일 것으로 생각된다.군둔전 이외에 지방관청의 경비를 보충하던 둔전으로 관둔전이 있다. 숙종 4년 주부군현에 대해 5결씩의 관둔전을 지급한 사례에서 그 존재를 짐작할 수 있다. 관둔전은 지방관청에 대해 지급한 공해전 공수전ㅇ과 함께 지방관청의 경비를 보충하는 목적으로 지급된 만큼 구공유지로서 지방관의 관리 아래 경영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들 토지에 대한 경작은 주로 관노비였을 것으로 짐작되나 일반농민을 사역시키기도 하였을 것이다.고려후기로 가면서 토지의 탈점 현상이 심화되고 둔전 역시 탈점의 주요대상이 되었다. 임피둔전의 경우는 공민왕대에 이르러 거의 탈점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충선왕대의 둔전연호지법 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를 가호(家戶)둔전이라고도 하였는데 봄에 종자를 지급하였다가 가을에 몇 배를 징수하는 방식이었다. 따라서 농민에 대친다.
    인문/어학| 2008.11.03| 13페이지| 2,000원| 조회(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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