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 통해 보는프랑스 68혁명과 젊은이들1. ‘몽상가들’ Les Innocents, The Dreamers (2003)제작 :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장르 : 드라마, 로맨스감독 :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배우 : 마이클 피트 (매튜), 에바 그린 (이자벨), 루이 가렐 (테오)베트남전의 징병을 피해 도망치듯이 프랑스로 유학 온 미국인 매튜는 영화관에서 자주 마주치던 쌍둥이 남매 이자벨과 테오를 알게된다. 시위를 진압하던 경찰을 도망치다 급격하게 친해지게 된 이자벨과 테오는 매튜를 부모님이 여행을 떠난 파리의 아파트로 초대하여 시위로 혼잡한 세상을 뒤로하고 지내게 된다. 하지만 몽상가들은 애정관계와 이상과의 괴리 등 여러 갈등을 겪다가 결국 시위대로 뛰쳐나가고 영화는 에디트 피아프의 Non Je Ne Regrette Rien(아뇨, 난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요)와 함께 끝이 난다.2. 기억에 남는 시퀀스① 오프닝 시퀀스 :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참여한 영화이지만 이 영화를 프랑스 영화라고 할 수 있는 이유를 오프닝 시퀀스에서 찾을 수 있다. 카메라는 지미 헨드릭스의 'Third Stone from The Sun'을 배경음악으로 복잡한 에펠탑의 철골 구조 사이를 훑어 내려가며 제작진과 배우의 이름을 보여주고 있다. 프랑스=파리=에펠탑 이라고 할 정도로 프랑스의 상징인 에펠탑이라 프랑스 영화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에펠탑의 색은 빨강과 파랑 그리고 하얀색으로 칠해져 있다. 이것은 프랑스 국기의 상징인 자유, 평등, 박애를 나타내는 것으로 영화 처음부터 이 영화의 아이덴티티를 말해주고 있다.② 이자벨 부모님과 저녁식사 : 이자벨의 아버지는 시인으로 꽤나 자유분방하고 철학적인 사람이다. 하지만 68혁명을 주도하는 대학생인 남매에게는 꽤나 보수적으로 느껴지는 구세대의 인물이다. 그런 답답하고 보수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푸르스름한 형광등 조명에 5명의 인물을 작은 테이블에 다닥다닥 붙여놓고 있다. 그리고 클로즈업이 아니라 바스트샷으로 인물을 잡고 있지만 눈을 마주치지 않고 서로 외면하는 인물들을 통해 불편한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는 부모님이 떠난 후 이자벨, 테오, 매튜가 남으면 반전된다. 조명은 초 두 개로 아까보다 더 어둡지만 노란 빛은 따스하게 느껴진다. 또 아까보다 답답하게 느껴질 수 있는 클로즈업이지만 서로는 눈을 마주치고 있고 분위기는 친근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두개의 초는 신기하게도 테오만을 비추고 있는데 초는 시위를 뜻하고 어쩌면 나중에 테오가 시위에 참가한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한가지 재미있는 문화적 차이는 식사시간에 담배를, 그것도 부모님 앞에서 뻑뻑 피워댄다는 점이다.)③ 세 명이서 같이 목욕하는 시퀀스 :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장면으로 지오다노 광고 등 여러 곳에서 이용된 장면이다. 주인공 세 명은 좁은 욕조에서 거품목욕을 하며 사회 전반적인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이 세 명의 성격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부분이다. 매튜는 프랑스에서 벌어지고 있는 혁명에 가담하지 않고 집안에 처박혀 자신만의 에덴동산을 꿈꾸는 남매를 비난한다. 하지만 매튜 또한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베트남 전쟁을 피해 도망친 유학생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부적절한 인물일 뿐이고 꿈만 거창하게 꾸는 몽상가들일 뿐이다. 여기서 테오와 매튜는 말싸움을 벌이고 서로의 감정은 극에 달하고 이후로 이들은 더 이상 친구가 아니게 된다. 감독은 이런 대립을 욕조 건너편에 있는 삼면 거울로 인물을 비추며 설명하는데 이들은 서로의 치부를 다 보여주고 즐겁게 지내는 듯해 보이지만 결론적으로 본성이 다른 인물이라는 것이다.④ 거실의 텐트 : 서로의 대립은 극에 달하지만 이자벨이 어릴 때처럼 여러 담요를 가지고 거실에 텐트를 만들어 이들은 잠시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 화해한다. 아니 애초에 이들은 어른이 되지 못한 미성숙한 아이였다. 테오와 이자벨은 그들의 말처럼 서로를 끊을 수 없는 샴쌍둥이 같은 존재이기도 하며 서로에게 정신병적인 의존증을 갖고 있다. 그리고 매튜는 이들 사이에 잠시 끼어든 방해물이었다. 테오는 어린 아이처럼 텐트에 뛰어들고 이자벨은 테오에게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은 잠이 드는데 나체로 서로 엉켜 잠이든 그들을 부모님이 발견하고 만다. 에덴동산같은 곳에 선악과같은 존재가 바로 부모님으로써 이자벨은 자신들의 치부를 부끄러워 하고 가스로 자살을 시도하지만 시위대의 소란에 깨어난다.⑤ 엔딩 시퀀스 : 시위대의 소리에 깨어난 셋은 옷을 챙겨 입고 시위대 속으로 들어간다. 이자벨과 테오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투쟁은 계속된다!’라고 시위대와 함께 외치지만 화염병을 든 테오에게 매튜는 이건 아니라고 말한다. 테오는 그런 매튜에게 이건 대단한 일이야 함께 하자 라고 말하지만 매튜는 결심한 듯 결국 이들에게서 떨어져 나가고 이자벨과 테오는 경찰들을 향해 달려간다. 그리고 경찰들은 시위대를 향해 달려오며 영화는 에디트 피아프의 Non Je Ne Regrette Rien(아뇨, 난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요)와 함께 끝이 나는데 프랑스의 국민 여가수 에디트 피아프의 상징성도 이루 말할 필요가 없지만 이 영화는 철없는 프랑스 몽상가들의 목소리를 에디프의 애절한 목소리로 통해 난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3. 영화의 배경인 프랑스 68혁명제작국가가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라고 되어있지만 이 영화는 엄연한 프랑스 영화이다. 비록 이탈리아 감독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손으로 만들었고 영화는 미국인 매튜의 눈으로 프랑스를 관망하고 있는데도 이 영화를 프랑스 영화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시대 배경이 ‘68혁명’ 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68혁명은 20세기 프랑스 현대사를 새로 쓴 혁명으로 과거 18세기 프랑스 혁명만큼이나 중요한 혁명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68혁명을 본격적으로 다루지 않지만 68혁명은 주인공들의 생각을 읽으려면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내용이다.68혁명의 배경 _ 세계 2차대전 이후 전세계는 어느 정도 안정을 이룬 듯 하였으나 실상은 자본주의, 사회주의를 막론하고 여러 나라에서는 권위주의 정권이 참된 민주주의를 훼손하고 있었으며, 자본주의세계의 최강국 미국은 상대적으로 매우 약소한 베트남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때문에 전후의 경제번영과 자유를 누리며 대학에서 시대에 뒤떨어진 대학 교육체제를 경험한 젊은이들은 이에 강한 불만을 표출하게 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일반적 의미에서의 68혁명은 결코 성공한 혁명이라 부를 수 없다. 그러나 68혁명 이후 사회는 성문화와 가족제도 대중문화의 측면에서 변화의 모습들을 더욱 많이, 그리고 선명하게 찾아볼 수 있다.
1. 서론 ……………………………………………………………………… 12. 본론1) 시대배경………………………………………………………………… 22) 안데르센의 집안 ……………………………………………………… 33) 미운 아기오리 안데르센 …………………………………………… 44) 아버지의 죽음 ………………………………………………………… 45) 코페하겐으로 건너간 안데르센 …………………………………… 46) 사랑의 시간 ………………………………………………………… 57) 백조가 된 안데르센 ………………………………………………… 68) 안데르센의 콤플렉스와 작품세계 ……………………………… 73. 결론 …………………………………………………………………… 71. 서론“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내 삶에서 나왔습니다.상상으로만 만들어낸 인물은 한 명도 없습니다.그들은 모두 내가 아는 사람이거나 예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들입니다.“)80년대 중후반에 태어난 사람이라면 한번 쯤은 월트 디즈니의 ‘인어공주’란 애니메이션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안데르센 원작에 나오는 인어공주는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물거품이 되어버리지만 디즈니의 인어공주는 왕자의 사랑을 얻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결말로 끝난다. 이 때문에 80년대 중후반의 친구들 중에는 디즈니의 결말을 원작으로 알고 있는 친구들이 많은데 이처럼 월트 디즈니의 애니메이션들은 건전한 내용으로 단순한 상징성과 스토리로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으며 현대 어린이들에게는 고전 동화와 같은 존재로 아주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인식 때문에 사람들이 동화를 말그대로 童話(아이 동, 이야기 화)로 인식하고 어른들이 읽는 소설에 비해 평가절하하는 경우이다. 게다가 우리가 어렸을 때 꼭 읽는 안데르센의 동화는 편집본으로 상당히 감성적이고 따뜻하게 포장되어 있다.때문에 사람들은 ‘동화작가’ 안데르센을 긍정적이고 감상적인 인물로 인식하지만 안데르센의 일생을 살펴보면 비천한 배경과 불확실한 성적 정체성, 못생긴데다 눈치도 없와 시, 민속춤과 음악, 심지어 그때까지 무시되어온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작품들을 수집하고 모방하는 등 문화적 민족주의가 되살아나고 민족의 기원에 새로운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독일의 그림 형제가 수집한 , 프랑스의 페로가 편집한 등을 보면 알 수 있다.)② 낭만주의 시대의 안데르센낭만주의 시대 이전인 1781년까지는 모차르트도 잘츠부르크 황실 대주교의 시종보다 낮은 지위에 있었다. 그러나 낭만주의 시대에는 타고난 천재성은 발굴, 육성되어야 한다는 사고가 보편화되어 있었다.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함을 이상화하는 낭만주의가 주류를 이루기 시작한 때 안데르센은 코펜하겐에 도착하여 후원을 받을 수 있었다. 앞서 말한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은 안데르센은 옛 이야기를 문학적인 양식으로 소화하여 새로운 이야기를 스스로 창조해내었고 해학과 구어체의 생생한 문체를 잘 조화시켰다.③ 이탈리아와 안데르센추운 북유럽의 날씨는 북유럽 사람들에게 태생적인 우울함을 안겨다 주었다. 북쪽의 유럽인들은 언제나 남부 유럽의 찬란한 지중해를 동경했다. 바이마르 공국의 괴테가 그러했고 페테르스부르크의 차이코프스키가 그러했다. 정치적인 좌절 상태를 이기기 위해 괴테는 지중해를 향해 마차를 몰았으며 각혈을 했던 차이코프스키는 지중해 여행의 덤으로 ‘이탈리아 기상곡’을 완성하기도 했다. 요즘도 북유럽인들은 여름 휴가 때마다 지중해 연안으로 몰려간다. 덴마크 태생인 안데르센도 28세 때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났다. 북유럽 지식인들의 이러한 행렬이 ‘여행’이라는 방법을 통하여 그들 나름의 지독한 고독과 우울을 견디는 일이었음을 상기할 때, 그리 성공적이지 못한 청춘을 보내던 안데르센에게도 이탈리아 여행은 단순한 ‘기분 전환’ 이상의 그 무엇이었다.) 안데르센의 은 이탈리아 여행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작품이다. 즉흥시인에서 안데르센이 묘사한 이탈리아의 영상은 덴마크에 큰 반향을 일으켰는데 덕분에 안데르센은 작가의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④ 안데르센과 예술가안데르센은 낭만주의를 대표하던 작가로써 온 유럽의징하며 안데르센에 지워지지 않는 상처로 남았다. 카렌은 외할머니와 살았기 때문에 안데르센과 거의 마주친 적이 없지만 안데르센은 성공한 자신을 어디선가 카렌이 나타나 자신을 나락으로 끌어내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항상 두려워했었다. 그래서 제멋대로이고 버릇없는 의 여주인공에게 안데르센은 바로 카렌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아버지 쪽 가족사 또한 만만치 않았는데 안데르센의 할아버지는 정신이상자로 나무로 야수 머리를 한 사람이나 날개를 단 괴물같은 기괴한 조각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곤 했다. 그리고 때로는 숲으로 들어가 들꽃과 잔가지로 만든 화관을 머리에 쓰고 나와서 목청껏 노래를 부르며 다녔다. 안데르센은 이런 할아버지와 자신이 매우 비슷하다고 생각하며 자신도 할아버지처럼 미치지 않을까 몹시 두려워했다. 할머니는 정신병자와 노인을 위한 요양원에서 일을 했었다. 한번은 안데르센이 위험한 환자들의 방이 늘어서 있는 복도로 접어든 적이 있었다. 그 때 머리가 마구 헝클어진 여인이 안데르센을 향해 달려들었는데 그 경험은 안데르센에게 강한 충격을 남겼다. 할머니는 안데르센을 자상하게 돌봐주는 사람 중에 하나였지만 자신의 조상들을 미화하는 몽상가로 자신을 귀족의 딸로 자랐고 어느 배우와 사랑의 도피를 하는 바람에 모든 것을 잃고 말았다고 이야기 하곤 했다. 이런 이야기는 어린 안데르센에게 신분상승의 환상을 강하게 불어넣었다.안데르센은 작가로 유명해진 후에도 혈육에 대한 편집증적 열등감과 신경과민 증세를 보인다. 안데르센은 이런 ‘가족’에 대한 이미지를 동화 속에서 은근히 노출시키거나, 자신이 원하는 가족상으로 변화시켜 그려놓은 경우가 많았다. 의 주인공은 안데르센 자신이다. 가장 밑바닥 출신일 뿐만 아니라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2대에 걸친 정신병자로 이른바 ‘사회도 등을 돌린 소외계층’ 이었다. 그런 이미지가 외다리 장난감 병정을 탄생시킨 것이다. 그러나 이런 그의 기억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애정을 갖게 했고, 그는 동화 안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변했다.3) 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며 비웃었다. 그리고 결국 안데르센의 아버지의 모험은 결국 비웃음거리가 되었다. 아버지는 전투도 구경도 못한 채 덴마크의 홀슈타인 지방까지밖에 진군하지 못 하였지만 오랜 행군과 가혹한 체벌의 후유증으로 2년 동안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 했다. 병상에 누워 있는 동안 아버지는 정신착란을 일으키며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밤새 귀뚜라미가 울었다. 어머니가 내게 말했다. “아버지는 돌아가셨어. 이젠 아버지를 부르지 마라. 얼음요정이 데려갔단다.” 나는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 언젠가 추운 겨울날, 유리창에 얼음이 얼었을 때였다. 아버지는 얼음 낀 창문에 만들어진 갖가지 무늬 중, 두 팔을 앞으로 내 아가씨같은 모양을 가리키며 “얼음요정이 나를 데리러 올 거야.” 했다. 이제 차가운 몸이 되어 침대에 누워있는 아버지를 보고 어머니는 그때 일을 떠올렸던 것이다. 20년이 지난 후에도 안데르센은 아버지가 죽은 그날 밤의 모습을 일기에 기록했다. 안데르센의 충격적인 기억은 과 에서 환상적인 이미지로 되살아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안데르센은 혼자 남겨졌고 가족은 더욱 가난해졌다.5) 코페하겐으로 건너간 안데르센아는 지인도 없이 코펜하겐으로 건너간 안데르센은 그 때 마침 일어난 유대인 살인사건 때문에 흉흉하고 떠들썩한 분위기와 마주치게 되었다. 그러나 시골에서 갓 상경한 안데르센은 이런 술렁이는 분위기에 매료되었다. 극단에서 일하고 싶었던 안데르센은 오덴세의 출판업자에게서 받은 추천장을 들고 당시 최고의 발레리나였던 샬 부인에게 찾아갔다. 그러나 찾아가자 마자 하녀에게 거지 취급을 받고 가까스로 샬 부인과 만날 수 있었으나 샬 부인은 그 출판업자도 몰랐으며 구두를 벗고 탬버린을 치며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는 안데르센을 미친 사람으로 취급하였다. 안데르센은 가난하고 더러운 사창굴에 자리를 잡고 자기보다 높은 계층의 사람들을 감동시키려는 열망에 빠져있었다. 왜냐하면 코펜하겐에서의 그의 생존 여부는 바로 자신의 천재성을 믿어주는 후원자들에게 달려있었기 때강해졌다. 그리고 안데르센은 후원자 요나스 콜린의 아들 에드바르에 대한 감정으로도 번민하게 되었다. 요나스 콜린의 가족은 안데르센이 꿈꿔오던 이상적인 가족으로 안데르센은 요나스의 후원을 받으면서 그를 아버지와 신으로 취급을 했었다. 그리고 요나스의 자녀들과 친분을 맺었으나 요나스의 자녀들은 안데르센에게 친절하게 되하되 은혜를 베풀고 있다는 태도를 은연 중에 나타내었다. 덕분에 안데르센은 자신이 콜린의 아들로 대우받을 때 가장 행복해하면서도 콜린의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에 슬퍼했다. 안데르센은 콜린 가족에게서 언제나 자신을 이방인으로 느꼈다. 덕분에 안데르센은 심한 동요를 일으켰고 그의 집착은 평생 계속되게 된다.그의 그 ‘사랑’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은 동화에서도 드러난다. 은 태어나면서부터 불구자이며 열등감 그 자체이다. 무희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싶지만 그녀의 고귀함과 성장 배경에 거리감을 느끼고 단지 멀리서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 그러나 자신의 임무는 책임감을 갖고 완수하며 어떤 시련이 닥쳐도 굴하지 않는다. 이 동화에서는 아이들에게 복수하는 장면이 나와 있지 않다. 어떤 역경에도 쓰러지지 않고 용감했던 외다리 장난감 병정은 기구한 인생을 거쳐 마지막에는 아이들에게 버림받고 난로에 던져져 사랑하는 무희와 함께 불타죽는 것으로 끝난다. 는 자신의 목소리까지 내어주고 열렬히 왕자를 사랑하지만, 그녀의 사랑은 비극으로 끝이 난다. 사랑했지만 결국 공주를 두 번 다시 볼 수 없게 된 나 주위 요소의 방해로 인해 사랑의 결실을 맺지 못하는 역시 사랑에 대한 안데르센의 솔직한 심정을 보여주는 듯하다.힘든 어린 시절을 보내고 힘들게 성공한 안데르센. 나중에 생전에 그는 시인으로서, 동화 작가로서 인정을 받게 되지만 정작 그는 한 번도 사랑에 성공하지 못하고 가정도 꾸리지 못한 채 외로운 인생을 보낸 사람이었다. 그의 이런 외로움과 고독, 사랑에 대한 고통은 그의 동화 속에 고스란히 묻어 나오고 있으며, 그의 동화를 읽는 우리들도 사랑과 삶에 대한 진실을 생각하며 동감하게
한국과 일본의 신여성,나혜석과 히라쓰카 라이초의 비교Ⅰ. 머릿말Ⅱ. 1990년대의 한국 여성1. 개화기 이전 여성들의 일반적인 모습2. 근대사상의 유입과 신여성의 등장Ⅲ. 나혜석과 히라쓰카 라이초1. 나혜석의 일생2. 나혜석과 히라쓰카 라이초와의 비교Ⅳ. 나혜석이 현대 여성에게 가지는 의미Ⅴ. 맺음말-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Ⅰ. 머리말‘한국 근,현대사의 이해‘란 과목을 신청할 때 많은 고민을 했었다. 한국 근현대사에 대해서는 이미 고등학교 때 사회탐구의 한 과목으로 배웠었기 때문이다. 배웠던 과목을 다시 한번 배우는 것도 나에겐 지루하게 여겨질 것 같았고 대학에서 배우는 한국 근현대사는 더 전문적이고 어려울 것 같았다. 그러나 평소에 역사에 관심이 많았던지라 많은 고민 끝에 ’한국 근,현대사의 이해’를 선택하게 되었다. 그리고 과목을 수강하면서 느낀 점은 역시 고등학교와 대학은 다르다는 것이었다. 고등학교에서는 연도표를 늘어놓고 을사조약이 몇 년도이고 갑오개혁이 몇 년도이고 그에 연관된 인물들은 누가 누구인지 도식화된 자료만 암기하는 근현대사였다. 그러나 대학에 와서 배우는 근현대사는 달랐다. 인물이 어떤 이유로 어떻게 행동하였는지에 대하여 납득이 가는 인과관계를 배우고 유명인사들 뿐만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가는 일반 사람들의 생활상을 간접적으로 체험하면서 살아있는 근현대사를 공부할 수 있었다.네 가지의 리포트 주제를 보고 느낀 점도 살아있는 역사였다. 단순히 지나간 과거에 대한 암기가 아닌 과거가 있기에 우리가 현재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다에 대한 분석이었다. 고등학교 때 읽었던 “은자의 나라”에 담긴 이방인들이 보는 조선의 이미지,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행하는 고이즈미와 게토 희생자 기념장소 앞에서 무릎 꿇었던 독일 前 총리 빌리 브란트의 비교 등.. 전부터 관심 있었던 주제들이라 네 가지의 주제가 모두 매력적이게 느껴졌고 어떤 주제를 선정해야할지 많이 고민했었다. 그러나 를 초래함에도 불구하고 아직 우리 사회는 그것을 고치려는 노력을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혜석과 비슷한 인생을 살아왔지만 다른 결과를 가졌던 일본의 신여성 ‘히라쓰카 라이초’와 비교해보고 당시 조선 여성들의 모습을 살펴보며 현대 사회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보고 느낄 수 있는 점을 찾고 싶었다.Ⅱ. 1990년대의 한국 여성1. 개화기 이전 여성들의 일반적인 모습개화기 이전에 일반적인 여성의 가정, 경제, 사회에서의 위치는 조선시대 내내 내려온 유교 문화와 가부장제도 아래에서 지배되어져 왔다. 유교 문화가 원하였던 여성의 모습은 우리가 지금도 존경하는 인물로 흔히 말하는 ‘신사임당’과 ‘성춘향’에서 보면 알 수 있다.신사임당은 현명하고 그림과 시같은 예술 분야에서도 재능이 많았던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러나 신사임당의 이름이 남겨진 것은 그 재능 때문이 아니었다. 성리학의 대가 율곡 이이의 어머니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이름이 남겨지고 재능이 발견되어진 것이다. 신사임당하면 현모양처란 단어가 바로 떠오르듯이 그 당시 사회에서는 신사임당의 문학적, 예술적 재능은 중요하지 않았다. 여성은 오로지 딸도 아닌 아들을 낳아야 가정 내에서의 위치가 인정이 되었고 또 이런 아들을 잘 양육하기만 하면 되었던 것이다.가정에서의 여성의 위치는 완벽한 남성의 소유물로 인식되어져 왔다. 삼종지도와 같은 제도를 보면 먼저 여성은 태어나면 아버지의 소유물이었다가 결혼하면 남편을 섬겨야하고 남편이 죽으면 아들에게 의존해야하였다. 이러한 제도는 여성을 독립된 인격체로 인식하지 않았고 여성은 사회에서나 경제에서 독립된 활동을 하지 못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의 경제, 사회적 활동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고 소수 양반층 부녀자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일반 여성들은 자녀출산, 양육, 봉제사, 시부모 봉양 등의 가사 노동뿐만 아니라 농번기에는 가족 농업에 노동력을 투입하며, 농한기에는 직포 생산을 담당하였다. 후에 외국인 선교사는 이런 한국 여성들을 보고 ‘노예’와 ‘당나귀’같다는 표현을 쓴다. 이대사상의 유입과 신여성의 등장근대 문물과 사상이 들어오면서 여성개화사상의 수용과 발전은 먼저 개화파 지식인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즉 남성들이 위로부터 개혁을 추진하려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그런 개혁의 추진과정은 여러 문제점들을 안고 있었는데 그 중 하나의 예를 서재필의 논설에서 찾아 볼 수 있다. “.......2천만 동포 중 1천만이 버렸던 물건을 사람으로 찾아옴이요, 이후에 여자들은 자기 권리를 찾아 천대를 받지 않을 것이오, 자녀되는 아이들은 사랑하는 스승을 얻을 것이오, 사나이는 백년에 아름다운 친구를 얻을 것이오, 나라는 자연 문명한 지경에 이를 것이다.”) 이는 여성의 독립성을 인정하기 보다는 가정교육자와 현명한 내조자로서의 아내 역할을 강조하며 여성의 가정적 역할을 위해 근대 교육의 필요성을 주장한 것으로써 개화기 전에 여성 교육의 필요성의 이유와 다른 점이 없어 보인다. 후에 여성교육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교육 기관인 이화학당(1886년)과 같은 외국인 선교사들이나 개인이 만든 민간 사립학교가 대부분이었다.이런 초기의 학교들은 학제나 수업의 운영 등에서 제도화된 규정이 없었다. 그 후 찬양회라는 여성 단체들의 관립 여학교 설립 운동으로 정부차원의 여학교가 세워질뻔 하였으나 정부의 재정부족으로 결국 무산되다가 한성고등여자학교(1908년)가 설립되게 된다.) 찬양회의 활동은 학교를 세워달라는 것 외에도 “출입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장옷을 쓰지 않고 가마를 타지 않으며 우산이나 들고 다니게 해달라”는 것도 있었다. 여성들에게 ‘배운다는 것’의 의미는 이처럼 여성을 구속하는 일상의 문화를 바꾼다는 뜻도 있었다. 찬양회는 여학교 설립운동과 더불어 여성계몽을 위한 사업으로 일요일마다 정기집회를 개최하고 연설회와 토론회를 열었다. 주요한 주제는 여성의 의식각성과 여성교육의 필요성을 외치는 것이었는데, 회원이 아닌 여성도 많이 참여할 정도로 집회는 성황이었다.) 이 점에서 찬양회의 활동은 정부나 남성 개화파 지식인의 주도가 아닌 여성 스스로의 적극적인 활동은 종전의 결혼관에서부터 확연하게 차이가 드러났다. 조선시대 일반적인 결혼의 모습은 부모님이 정해주시는 배필을 만나 결혼 전까지 얼굴도 보지 못한 채 결혼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서구의 소설과 문물을 접한 신여성들은 이런 결혼관에 반대하고 자유연애주의 사상을 표방하였으나 이는 당시 가치관으로써는 획기적인 가치관이었고 게다가 신여성의 연애 상대는 같은 신식 문물과 교육을 남성이었는데 대부분의 남성들이 기혼남성이라 이런 남성과 교제하는 신여성은 ‘제 2부인’이라 불리며 많은 비난을 받았었다. 이런 신여성과 기혼 신남성들의 스캔들은 대중들에게 회자되었고 이런 점 때문에 대부분의 신여성들이 좋은 결과를 얻어낸 삶을 살지 못하였다. 그리고 성악가 윤심덕과 유부남이었던 애인 김우진의 현해탄에서의 동반 자살과 같은 극단적인 결과도 일어났다. 이렇게 신여성들은 당시 가치관을 부정하였고 일부 신여성의 사치 향락 등으로 기존의 사회 기득권층과 일반 대중들에게도 곱지 못한 눈초리를 받았었다. 그래서 근대 조선의 부인 운동의 선구자이자 최초의 폐미니스트였던 김일엽은 “신여성이 되려면 나부터 알아야 하고, 조선을 알아야 하고, 결혼을 직업화하지 말고, 동등한 경제권을 갖도록 애쓰고, 경제 상태를 면밀히 파악해 자기 생활을 타개하고, 검소한 몸가짐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신여성들 중에는 일본 유학을 다녀와 영향을 받아 친일 활동을 했던 인물들도 있었다. 이런 점들은 당시와 현대에서도 많은 지적을 받고 있으나 신여성의 모두가 친일 활동을 펼친 것은 아니었다. 지금도 유명한 김마리아와 유관순 열사와 같은 신여성들의 독립과 사회개혁을 위한 운동가들도 많이 알려져있다.신여성은 당시 사회뿐만 아니라 현대 사회에도 많은 영향력을 남겨주었다. 당시 사회에서 제대로 된 인격체로 인정받지 못하였던 많은 조선 여성들의 권위 향상에 힘을 썼었고 이런 신여성들의 행동과 가치관은 현대 사회에서도 통용될 수 있는 가치관들이고 신여성들의 희생에 가까운 선구적인 노력이 있었기에 오늘날 여성파리 등에서 나혜석은 서구 여성들의 좀더 인간생활을 위한 노력을 목격하고 예술의 도시 파리에서 새로운 그림의 세계에 눈떠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함께 예술을 논할 수 있었던 남자 최린과 사랑에 빠졌고 귀국 후 아이들을 두고 이혼을 하였다. 이혼을 하고 나온 후 나혜석은 제10회 선전에서 으로 특선을 수상하였고, 다음해에 세계 일주 기행문인 「구미유기(歐美遊記)」를 『삼천리』지에 연재하였다. 1933년에는 미술연구소인 '여자미술학사'를 설립하여 후진을 양성했으며, 1년 뒤 『삼천리』에 「이혼고백서」를 발표하면서 당시의성의 억압철폐, 여성의 자유실현 등 기존의 인습을 강력히 비판하였다.그러나 1937년 무렵부터 방랑생활에 빠져들었고 1946년에 행려병자로서 불우한 삶을 마쳤다경제적 궁핍과 사회적 비난에 맞닥뜨리게 되면서 여성에게만 일방적으로 정조관념을 지키라고 하는 사회 관습을 비판하고 나아가 그런 관념은 상대적이고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기에 해체되어야 한다는 시대를 앞서가는 주장을 펼쳤다.현모양처가 여성의 모범상으로 굳어버린 시대에 자기의 예술을 추구하다가 이혼을 당하고 빈몸으로 쫓겨났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한 여성을 파멸로 몰아 넣은 두 남자와 그들 남성이 멀쩡하게 행사하도록 하는 사회 관습에 도전한 나혜석이 연 전람회에 대한 조선사회의 반응은 차가웠고, 사회의 냉대속에서 경제적으로 궁핍하고 쓸쓸한 생활을 하면서 나혜석의 심신은 서서히 병들어 갔다. 화재로 그림을 태워 먹고 아이들을 보지 못하게 된 충격으로 신경쇠약과 반신불수의 몸이 된 나혜석은 자기만의 방을 갖지 못한 채 절집들을 떠돌아 다녔고, 해방 후에는 서울의 한 양로원에 맡겨졌으나 그는 걸핏하면 몰래 빠져 나왔다. 아이들이 보고 싶어서였다고 한다. 여행을 떠나기 위해 짐을 쌀 때면 늘 기운이 솟아오른다고 했던 나혜석은 어느 날 양로원을 나선 뒤 종적이 묘연해졌다. 그리고 1948년 12월 10일 서울의 시립 자제원 무연고자 병동에서 아무도 모르게 눈을 감았고 그의 무덤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