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목 차 ]Ⅰ.서론 ...... 11. 영화 & 선정이유Ⅱ.본론 ...... 22. 영화내용3. 시대적 · 역사적 배경4. 시사점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바)5. 우리의 의견 및 느낀 점Ⅲ.결론 ....... 76. 결론※ 참고문헌1. 영화 & 선정이유2011년 1월말 ‘비전향장기수의 국가상대 손해배상 청구소송’건을 기사를 통해 봤다. 그 사건은 비전향장기수 21명이 “국가가 사상전향제도라는 반인륜적, 반인도적 범죄행위를 저질러 심한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겪었다.”며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20억원대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이었고, 결국에는 5년 유효기간인 손해배상청구권의 시효가 소멸되었다는 이유에서 원고의 패소로 끝나게 되었다. 당시 우리는 비전향장기수가 어떤 이유로, 얼마나 수감생활을 했는지에 대해서 전혀 알고 있지 않았고 그래서 그 기사에 크게 관심을 갖지 못했다. 두 달 정도 시간이 지나고 과제의 주제들 중 하나로 ‘비전향장기수’에 대한 사건을 다시 접할 수 있었는데 이번 기회를 통해서 비전향장기수들의 전반적인 모든 것들에 대해 알고자 이 주제를 선정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 보고서에서 영화의 내용, 시대적·역사적 배경 그리고 감독이 영화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 얘기해 볼 것이다. 그리고 영화를 보고 난 뒤 우리의 의견을 정리하면서 이 보고서를 마무리 지을 것이다.2. 영화내용두 영화 모두 비전향장기수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비전향장기수(非轉向長期囚)는 사상전향을 거부한 채 장기 복역한 인민군 포로나 남파간첩을 뜻한다. 먼저 송환은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감독 김동원이 12년간 비전향 기엔 힘들었다. 순수한 태도로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다가도 내부를 파악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단호하게 거부감을 내비쳤다. 당시 감독의 어린 시절(1950년대쯤)에는 뉴스나 반공드라마에서 간첩들이 많이 등장하였다. 드라마가 끝나면 아버지께서 공산주의가 얼마나 나쁜지에 대해 설명해주셨고, 따라서 어린 시절 감독은 당연히 간첩에 대한 공포감과 부정적인 인상을 가지고 있었고 자라면서 국가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간첩사건을 다뤘다는 것에 대해 알게 됐다고 한다.당시 비전향장기수들은 감옥에서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전향한 사람들이 더러 있기도 했고, 감옥에서 매를 맞고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강제적으로 전향한다는 서류에 지장을 찍기도 했다. 비전향장기수들을 미전향 장기수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미전향 장기수는 아직은 전향을 하지 않은 상태이지만 언젠가는 그들을 전향시키겠다는 협박을 함축하고 있다.1972년 남북적십자 회담 이후 그들은 석방과 송환의 희망을 가지게 되었고, 박정희는 교도소의 모든 장기수를 없애고자 강제 전향 공작을 시작했다. 이에 따라 구타, 물고문 등 인간의 상상력을 뛰어 넘는 고문이 행해졌다. 장기수들은 당시 얘기를 하면서 다들 치유될 수 없는 고통에 말문이 막히곤 했다. 1972년 당시 전국 교도소에는 약 500여명의 장기수가 있었고 그때의 전향 공작에 의해 그들 중 350명 정도가 전향한 것으로 추산된다. 옥중 사망한 비전향 장기수 명단도 여럿 있었다. 현재까지 출소한 7년 이상 복역한 비전향 장기수는 102명으로 집계되었다. 그들은 정치적 신념을 포기할 수 없어서, 또 민족과 민중을 위해서 전향할 수 없다고 했고, 그 안에서도 사상학습을 게을리 하지 않고 서로를 채찍질했다. 감옥 안에서도 그들은 쉼 없이 활동하고 치열한 사상투쟁을 계속 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전향 공작의 폭력성 그 자체에 자신이 저항해야 했던 정당성과 정의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인간이라는 품성을 지키기 위해 폭력에 맞섰다고 말한다.주인공인 김석형, 조창손은 남한에서 주차관리요북한과 미국의 문제인 한반도에 대해 관심을 가져나갔다. 1995년 장기수 석방 운동이 해외까지 알려져 그곳에서 석방에 대한 압력이 들어오기 시작했다.송환 운동이 점차 해외에도 이슈가 되자 국민들은 이에 대해 다양한 입장을 표명했다. 맞교환 형식에 대한 의견이 많았다. 일반적인 북송에 대해서 논란이 일어난 것이다. 1999년 말 송환 추진위원회 결성되었고, 희망하는 모든 송환 장기수들이 대상이었다. 인도주의에 입각한 무조건적인 송환을 정부에 알렸다. 일반 국민들의 호응은 예상외로 뜨거웠지만 무조건적인 송환에 반대하는 여론도 많았다. 송환을 희망하는 장기수들의 파악이 우선되었는데, 남쪽 북쪽 모두에 가족이 있는 장기수들의 심적 갈등이 심했다. 2000년 이후 비전향장기수들에게 송환은 현실이 되었고, 당시 북에 대한 인식이 많이 개선되었고, 국민들의 통일에 대한 기대심리 또한 상승했다. 그들은 끝내 북송 될 수 있었고 최종목표는 통일이라 하였다.선택은 주인공인 김선명을 중심으로 한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전개가 이루어진 작품이다. 따라서 비전향장기수들에 대해 좀 더 친근한 느낌을 가질 수 있었던 동시에, 그들 입장에서의 당시 시대적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비전향장기수였던 김선명은 1951년 10월 체포되어 수감생활을 시작하였다. 감옥 안에는 같은 처지의 비전향장기수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들은 분필이나 돌멩이 같은 도구로 벽을 치면서 그들만의 암호를 통해 다른 방의 장기수들과 의사소통을 했다. 주로 바깥 세상에 대해 알게 된 정치 내용이나 단순한 생활 상황이나 사적인 얘기도 많았다. 그들은 통일에 대한 기대로 꿈을 꾸기도 했다. 감옥 내 상황은 비인간적이라는 말밖에 형용할 수 없었다. 밥그릇을 내놓으면 한 덩어리씩 담아주는데 밥은 보리밥 같은 것이었고, 성인 밥그릇 기준으로 반 공기밖에 안 되는 양이였다. 겨울에는 추워서 입술이 하얗게 질렸고, 목을 수건 등으로 꽁꽁 싸매고 생활했다.죄수들을 상대로 한 사상교육도 이뤄졌다. 장기수들을 모아놓고 전향해라고 설선명은 내레이션으로 말한다. “사람들은 대체로 자유가 감옥밖에 있는 줄 알지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자유는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이었다. 바로 양심의 자유이다.” 이렇게 1951년 10월 체포됐던 김선명은 1995년 8월15일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어 43년 10개월을 감옥 생활을 하였다. 2000년 9월 그는 북송되었고, 아흔이 넘은 어머니를 마주하며 슬픈 상봉을 했다.3. 시대적 · 역사적 배경비전향장기수란 국가보안법·반공법·사회안전법으로 인해 7년 이상의 형을 복역하면서도 사상을 전향하지 않은 장기수이다. 이들은 해방 이후와 6·25전쟁 당시의 빨치산 및 인민군 포로, 6·25전쟁 이후 북에서 남파된 정치공작원, 통혁당사건 등 남한에서의 자생적 반체제 운동가 출신, 1970년대 이후 해외활동으로 체포된 재일동포, 1970년대 중반 이후 인혁당 등과 같은 사건으로 연루된 인사 등으로 분류된다. 장기간동안 수감생활을 함에 따라 이들은 시대적·역사적인 물결에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먼저 1960년 4·19 혁명으로 제1공화국이 붕괴된 후, 장면 내각은 사회 질서를 안정시키고 국가의 안보 체제를 확립하면서 경제와 사회의 발전을 통하여 국력을 신장하고, 한민족의 숙원인 평화적 통일 정책을 내세웠다. 이에 따라 비전향장기수들의 상황도 조금씩 숨통이 트이는 것처럼 보였다. 장면 정권의 조재천 법무장관은 “사상범들은 탄압만 해서는 안 되고 특별대우를 해서 회유해야 한다”며 비전향장기수들에게 새로운 접근을 시도하였다. 4.19혁명이 그들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은 감형이었다. 무기수는 15년 내지 20년으로 감형되지만 국방 경비법 33조 간첩죄가 적용된 사람들 감형대상에서 제외되었다.이렇게 조재천 법무장관의 특별 대우안이 논의되다가 1961년 5.16쿠데타가 일어났고 그동안 그들에게 보였던 희망적인 조치들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박정희 정부는 “반공을 제1국시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강화한다.”,“민족적 숙원인 국토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을 제외하고는 한국전쟁 때 체포된 대부분의 비전향 장기수들이 출소하게 되었다. 따라서 비전향 장기수에 대한 완전 격리나 전향 작업을 통해 비전향 장기수의 존재를 부정하고, 체제의 안전을 도모하던 지배 권력으로서는 무엇인가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다. 이에 형기 만료로 출소하였거나 출소를 앞두고 있던 비전향자를 영원히 가두어두기 위한 사회안전법이 1975년 7월 16일 새벽 3시 야당의원들의 반대를 뚫고 날치기로 통과되었다. 사회안전법으로 1975-1978년 사이에 150여명이 보안감호처분을 받고, 갇혀 지냈다. 청주보안감호소는 “전향 안 하면, 세상에 못 나간다”는 걸 보여주는 본보기였다. 비전향자가 전향하거나 죽지 않는 한 기한 없이 가두어둘 수 있었다. 반인권적인 사상탄압법으로 국제적 비난에 휩싸인 사회안전법은 우리사회 민주화 흐름 속에서 1989년 5월 29일에 폐지되어 보안감호처분제도는 역사의 그늘로 사라졌다. 그렇다고 비전향 장기수와 그 출신들에 대한 정부 당국의 감시가 해제된 것은 아니다. 사회안전법은 곧바로 보안관찰법으로 대체되었다. 교도소에서 사회로, 감금해놓고 감시하는 방식에서 풀어 놓고 감시하는 방식으로,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감시에서 간접적이고 비가시적인 감시로 형태만 바뀌었을 뿐이다. 과거에는 감시 권력이 한 곳에 집중되었다면 이제는 전체 사회로 확산되었을 뿐이다. 감시 자체는 그대로 남아 있고 감시의 형태만 바뀐 것이다. 출소한 장기수들은 지금도 보안관찰법에 의해 자신의 일상을 신고할 의무를 강제받으며, 여전히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비롯한 국민의 기본권을 유린당하고 있다.4. 시사점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바)먼저 의 감독은 왜 이렇게 위험할 수도 있는 비전향장기수를 다루었을까? 다큐멘터리 의 김동원 감독은 실제로 구속된 적이 있었다. 검열을 받지 않고 불법영상물을 유포했다는 혐의였다. 그런 그가 남파 간첩을 소재로 다시 다큐멘터리를 만든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특히 이 영화를 시작하던 1992년은 국보법이 시퍼렇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