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Bronze개인인증
팔로워0 팔로우
소개
등록된 소개글이 없습니다.
전문분야 등록된 전문분야가 없습니다.
판매자 정보
학교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직장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자격증
  •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판매지수
전체자료 12
검색어 입력폼
  • 세계사 연구수업안(고대 그리스)
    담당자부장교감교장2013학년도(세계사)과 수업안일시장소대상교사○○고등학교단원 전개안단원명Ⅱ. 문명의 새벽과 고대 문명대상2학년기간3월8일-4월 15일교사Ⅰ. 교재관1. 단원 설정의 이유세계사는 지구상의 인류가 어떻게 생활하였으며, 그 삶의 모습이 어떻게 변화하고 발전하였는지를 다루는 과목이다. 이 과목을 통해 우리는 현대 세계의 형성 과정과 그 성격을 파악할 수 있으며, 우리의 현재 위치와 나아갈 방향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우리는 세계사를 학습하면서 세계 여러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고, 이를 통하여 국제 이해와 국제적 감각의 폭을 넓힐 수 있다. 나아가 세계사 학습을 통하여 우리는 한국사의 특수성과 보편성이 무엇인지를 보다 정확하게 파악하게 된다.‘지구촌 이란 말에서 엿볼 수 있듯이 오늘날의 세계는 국가 간 상호 교류의 차원을 넘어서 전세계를 하나의 생활권으로 묶어 나가고 있다. 그러므로 세계사 학습에서는 특정 지역에 편중된 역사를 지양하고, 지구촌적 관점에서 보다 폭넓은 지역의 역사를 다룰 필요가 있다.한편, 세계사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인간 생활의 모든 국면이 서로 어떻게 관련을 맺으며 발전되어 왔는가를 다루는 과목이므로 세계사의 학습 내용은 보다 전체사적인 시각에서 구성할 필요가 있다.특히, 고등 학교의 세계사 교육에서는 세계사의 기초적인 사실에 대한 이해를 강조하고 있는 중학교의 세계사와는 달리, 세계사의 발전에 대한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이해에 역점을 두고 있으므로, 학습 내용에 대한 구조적인 이해가 요망되고 있다.세계사는 인간의 생생한 삶의 체험을 배우는 과목이므로 그 어떤 교과보다도 학습자들의 관심과 흥미를 유발하기에 적합한 과목이다. 그러므로 세계사 교재는 다양한 탐구 자료를 중심으로 쉽고 재미있게 구성하여야 하며, 학습 활동에 있어서도 학습자들의 지적인 탐구심과 상상력을 강조하여야 한다.본 단원을 설정한 이유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측면에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국가?사회적 측면에서 볼 때, 이 단원은 세23-24일? 방 법 : 설문지법 (단, *표시는 가장 많은 항목, 숫자는 %)설문지 문항분포 그래프1. 평소 세계사 수업에 대해 흥미를 느끼고 있습니까?① 매우 그렇다.(34%)② 대체로 그렇다.(39%)*③ 보통이다.(24%)④ 대체로 아니다.(1%)⑤ 전혀 아니다.(2%)2. 세계사 수업에서 가장 흥미를 느끼는 분야는 무엇입니까?① 동아시아사(10%)② 남아시아사(7%)③ 서아시아사(12%)④ 유럽사(53%)*⑤ 기 타(18%)3. 가장 원하는 세계사 수업 형태는 무엇입니까?① 시청각 학습(57%)*② 강의식(10%)③ 탐구학습(7%)④ 역할극(4%)⑤ 토론학습(7%)⑥ 문답식(2%)⑦ 기타(13%)4. 세계사 공부를 하는 목적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① 교양과 상식을 넓히기 위해서(32%)*② 각종 시험 준비를 위해서(12%)③ 단순히 교과목 중의 하나라서(20%)④ 사회 발전 및 세계 평화에 기여하기 위해서(20%)⑤ 과거를 거울삼아 현재의 교훈을 얻기 위해서(6%)⑥ 기타(10%)5. 세계사에 대한 지식은 주로 어디에서 얻습니까?① 인터넷(10%)② TV 등의 대중 매체(22%)③ 수업시간(52%)*④ 역사 관련 서적(11%)⑤ 유적지 여행(5%)6. ‘그리스 문화의 성립과 발전’ 부분을 학습하게 될 때 집중적으로 다루었으면 하는 내용은 무엇입니까?① 에게 문명의 성립(8%)② 폴리스의 성립(5%)③ 올림픽의 기원(12%)④ 아테네와 스파르타 비교(41%)*⑤ 아테네의 민주 정치 발전(34%)2. 학생 실태 조사 분석1) 세계사 수업에 대한 흥미도 조사에서 34%가 ‘매우 그렇다’, 39%의 학생이 ‘대체로 그렇다’라고 대답하여 세계사 과목에 대한 긍정적인 대답이 73%로 대단히 높게 나타났다. 세계사 수업에 대한 흥미가 상당함을 확인할 수 있다.2) 세계사 수업에서 가장 흥미 있는 분야를 묻는 질문에 전체의 53%가 유럽사라 답했고, 다음으로 기타(아메리카, 아프리카)가 18%, 서아시아사 12% 순으로 나타났다. 이에 비해 동아시아사와 남아시아사을 줄 수 있는 내용을 다루되, 세계사 교육의 본래 목적을 상실하지 않는 방향으로 지도하겠다.5) 세계사에 대한 지식을 어디에서 얻느냐는 질문에 52%의 학생이 수업시간에 얻는다고 대답했다. 이를 통해 볼 때 학생들이 세계사 지식을 얻는 곳이 한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수업 중 인터넷, 매스컴, 역사 관련 서적 등의 다양한 매체를 경험하게 하여 평상시에도 이와 같은 매체를 통해 세계사 지식을 얻을 수 있도록 지도하겠다. 특히, 홈페이지를 적극 활용하여 혼합형 학습이 가능한 기반을 조성하겠다. 혼합형 학습은 쌍방향 수업을 가능하게 할 뿐 아니라, 시·공간적 제약을 넘어서서 학습의 효과를 극대화 할 수 있는 대표적인 방안이다.6) 그리스 문화의 성립과 발전을 학습하는 과정에서 집중적으로 다루었으면 하는 내용으로는 아테네와 스파르타 비교가 41%로 가장 높게 나타났고, 다음으로 아테네의 민주 정치 발전이 34%로 나타났다. 학생들이 관심을 가지는 부분에 중점을 두어 수업하되 관심도가 떨어지는 부분은 중요 내용을 강조하여 수업을 진행하여 균형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도록 지도하겠다.7) 수업 실시 전에 반드시 학습 목표를 제시하여 학생들이 수업을 통해 학습할 주제를 보다 명확히 인식하도록 하고, 수업 후에는 형성평가를 실시하여 단원의 성취도 및 역사적 사고력 및 가치?태도 등을 종합적으로 기를 수 있도록 지도하겠다.2. 단원 지도 계획1) 단원의 목표1. 그림, 사진, 도표 등의 자료를 통하여 인류의 출현 과정과 각 인류의 특징을 파악한다.2.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의 차이를 파악하여, 석기 시대 인간의 생활 모습을 상상적으로 이해한다.3. 농경과 목축의 시작이 인류 생활에 미친 영향을 파악하여 신석기 혁명의 의미를 탐구한다.4. 문명의 의미를 파악하여 문명 발생의 조건이 무엇인지를 설명할 수 있다.5. 황허 유역에서 일어난 중국 문명의 성립과 발전 과정을 통해 고대 중국 사회의 특징을 파악한다.6. 사진 등의 자료를 이용하여 인더스 강가에서 나타난 인도봉건제를 비교하여 공통점과 차이점을 알 수 있도록 지도한다.PPT학습지강의식문답식시청각(3)인도 문명(4)메소포타미아문명ㆍ인더스문명ㆍ아리아 인의 이동과 카스트제ㆍ메소포타미아의 변천과정ㆍ메소포타미아의 사회와 문화4/15ㆍ인더스 문명을 다른 4대 문명과 비교하여 그 차이점을 인식시킨다.ㆍ아리아 인의 이동 과정에 카스트제가 성립되었음을 설명한다.ㆍ함무라비 법전이 어떤 원칙에 입각하여 제정된 것인지 파악하도록 한다.ㆍ메소포타미아 지역의 현세적 종교관이 나타나게 된 배경을 이해시킨다.PPT동영상사료학습지시청각강의식문답식사료학습(5) 이집트 문명ㆍ이집트의 사회ㆍ이집트의 문화ㆍ소아시아와 동부 지중해 연안의 국가5/15ㆍ이집트인의 여러 유물, 유적이 내세적 종교관과 밀접한 관계를 있음을 이해시킨다.ㆍ히타이트, 페니키아, 헤브라이가 인류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친 분야를 파악하도록 한다.PPT동영상학습지강의식문답식시청각3.고대 아시아 세계(1)고대 중국의 형성과 통일 제국ㆍ춘추 전국 시대의 성립ㆍ춘추 전국 시대의 사회와 경제 발전ㆍ제자백자의 등장6/15ㆍ춘추 전국 시대의 사회경제적 변화 양상과 정치적 변화를 연관지어 설명한다.ㆍ제자백가 사상들을 서로 비교하여 특징을 파악할 수 있도록 한다.ㆍ전국 시대 각 국이 법가적 부국강병책을 시행한 이유를 유가의 사상적 특징과 비교하여 설명한다.PPT동영상학습지강의식문답식시청각탐구학습중단원소단원주요학습내용차시지도상의 유의점수업매체수업형태3. 고대 아시아 세계(1)고대 중국의 형성과 통일 제국ㆍ진의 중국 통 일ㆍ한의 성립과 발전ㆍ한대의 경제와 사회ㆍ유교의 성립과 한대의 문화7/15ㆍ법가 사상이 진의 중국 통일과 멸망에 미친 영향을 파악할 수 있도록 한다.ㆍ한 무제의 정책을 정치, 경제, 문화적 방면에서 서로 연결지어 설명한다.ㆍ한대 호족이 사회 지배층으로 성장하게 된 배경을 파악할 수 있도록 한다.ㆍ유교의 국교화가 이후 중국 사회에 끼친 영향을 파악할 수 있도록 한다.PPT동영상학습지강의식토론식시청각(2)동아시아의 여러 국가들(3)인도와 불교의수 있다.수업자료교 사학 생교과서, 학습지, PPT교과서, 학습지단계(시간)수업 요항수업 활동수업 형태및 자료도달점 및 유의점교 사학 생도입(4)인사?출석 점검 및 인사?안녕하십니까?전시학습상기?지난 시간에 공부한 서아시아 지역에 어떤 나라들이 있었는지 시기별로 정리해서 발표해 보자고 한다.?B.C.15000년경 동부 지중해 연안에서 해상 무역으로 번성했던 나라는 무엇인지 묻는다.?기원전 7세기에 아시리아, 아시리아 멸망 후 4나라로 분열되었다가 기원전 6세기에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가 다시 통일하였다고 대답한다.?페니키아 라고 대답한다.일제학습문답식PPT2?서아시아 및 이집트 지역과 그리스 문명이 관련이 있음을 알도록 한다.동기유발?당시 대부분의 지역에서 전제 군주정이 발달한 것과 달리 그리스에서는 민주 정치가 발달하게 된 이유를 묻는다.?이번 시간에 그 이유를 알아 보자고 말한다.?여러 가지로 답변한다.문답식PPT3?학생들의 궁금증을 유발할 수 있도록 한다.수업목표제시?오늘 공부할 내용을 수업 목표를 중심으로 알아보자고 하고 수업목표를 다함께 읽게 한다.?수업 목표를 다 함께 읽으면서 오늘 공부할 내용을 확인한다.일제학습PPT4?오늘 공부할 내용을 숙지시킨다.전개(12)에게 문명?에게 해 주변 지도를 통해 기원전 2000년경 에게 문명이 성립하였음을 설명하고, 지난 시간에 과제로 낸 탐구과제 1-(가)에서 역사적 사실을 찾아 발표해보자고 한다.?긍정적 강화를 주고 부연 설명한다.?초기 에게 문명은 오리엔트지역의 영향을 받아 크레타 섬을 중심으로 발전하였고, 청동기를 기반으로 해상무역에 종사하면서 문명이 발전하였음을 설명한다.?탐구과제 1-(가)를 읽고, 역사적 사실을 찾아 발표한다.-에게 문명은 페니키아의 영향을 받았다.-페니키아 문자의 영향을 받아 그리스 문자가 나왔다.?PPT 화면을 보면서 설명을 듣는다.발표식일제학습시청각PPT5-9?에게 문명은 오리엔트 지역과의 교류를 통해 발전하였음을 알게 한다.?신화의 내용이 고고학적으로 뒷받침되고 있음을 알도록정리
    교육학| 2014.10.06| 18페이지| 3,000원| 조회(257)
    미리보기
  • 정복왕조 연구
    『10-18세기 북방민족과 정복왕조 연구』「몽골제국사 연구동향(1995-2008)」, 이용규Ⅰ. 머리말본 연구사 정리는 서구 학계의 연구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특별히 이슬람사 또는 중동사 분야에서 나온 연구에 비중을 두었다. 시간적인 제한 범위로는 주로 2000년대 이후에 나온 저작들을 중심으로 한다. 그 이전의 연구성과에 대해서는 피터 잭슨의 논문을 참조하면 될 것이다. 이 글에서 다루는 시기는 피터 잭슨이 다룬 시기 이후인 2000년 이후 시기로 하되 2000년대의 연구에 영향을 미쳤거나 중요한 흐름을 제시한 연구의 경우에는 그 이전 시기의 연구성과도 함께 다루도록 할 것이다. 또 영역에 있어서도 서구 학계의 연구동향에 맞추어 한국 학계 그리고 중국과 일본 학계의 주요 연구성과를 대별하고자 한다.Ⅱ. 몽골사 사료이용의 변화몽골제국사 연구의 최근 동향을 일별해 보면 대체로 몇 개의 화두가 연구의 방향을 주도하는 중심축을 형성하고 있다. 첫째로 최근 20년간 가장 괄목할 만한 성과로 들 수 있는 것은 사료 이용에 있어서의 변화이다. 몽골제국사 연구의 가장 큰 장벽의 하나는 언어의 문제이다. 몽골제국과 연관이 되는 사료들을 구성하는 언어들은, 중국어, 페르시아어, 아랍어, 라틴어, 아르메니아어, 히브리어, 그루지아어, 그리스어, 시리아어, 러시아어, 일본어, 그리고 몽골어 등으로 매우 다양하다. 그간 지속되어 온 사료 번역과 연구는 이러한 언어적 장벽을 넘는 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특별히 몽골제국사 연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료의 하나로 꼽히는 『몽골 비사』의 역주서 간행은 큰 성과라 할 수 있다. 클리브즈의 『몽골 비사』영문본 번역(1982) 이래로 다양한 역본이 출간되어 왔다. 그러나 이 번역이 가진 오류를 수정함과 동시에 광대한 주석을 제공한 라케빌츠의 『몽골 비사』역주서는 이 분야 연구를 위한 중요한 초석을 놓았다고 평가받을 만하다. 한국에서도 2004년에 번역 출간된 유원수의 『몽골 비사』는 큰 도움을 주고 있다.몽골제국사 연구에 필요한 언어 의 킵차크 초원 지대, 볼가강 유역, 북 코카사스 지역, 크림 반도 일대의 몽골 통치 시기 유물 및 유적 조사 성과가 주목받을 만하다. 아울러 일본 역사학자들이 몽골의 고고학계와 협력하여 추진하고 있는 각종 고고학 분야의 조사 활동과 중국 지역 내에서 발굴한 금석문 연구도 문헌 사료의 한계를 극복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이러한 연구의 대표 주자로서 마츠다 고이치, 모리타 겐지, 시라이시 노리유키 등의 학자군을 들 수 있다.Ⅲ. 페르시아어와 중국어 사료의 활용1990년대 중반에서 현재까지 진행된 몽골제국사 연구에 있어서 보이는 두 번째 주요한 현상은 페르시아어와 중국어 사료를 같이 보는 연구자가 연구의 흐름을 주도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의 주목받는 연구를 보면 적어도 두 가지 이상의 언어를 다루는 학자들에 의해 몽골제국사 연구가 주도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구미 학계의 토마스 알슨이나 미할 비란, 한국 학계의 김호동, 중국의 류잉성, 리즈안 등의 남경대학 중심의 학자군 그리고 일본 학계의 스기야마 마사아키를 중심으로 하는 교토대학 학파 등을 들 수 있다.토마스 알슨은 2000년대에 들어서도 꾸준히 비교사, 통합사, 문화사, 관계사적인 영역에서 의미 있는 연구 업적을 내면서 독보적인 영역을 구축하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저작은 Culture and Conquest in Mongol Eurasia이다. 이 저서는 칭기즈칸 가의 정복과 통치가 당시 사회의 문화에 미친 영향을 포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의 근작인 The Royal Hunt in Eurasian History도 왕가의 수렵 제도를 중심으로 유라시아 지역에서 한 문화적인 특질이 종과 횡으로, 또는 시대적공간적으로 어떻게 연결되어 갔는지를 비교사적 관점을 가지고 정리해내었다.미할 비란의 최근 연구의 주요 초점은, 중국 문명과 이슬람 문명 이 둘이 중앙 아시아의 유목민이 건설한 제국을 통해서 어떻게 서로가 만나게 되고 영향을 주고 받았는가에 있다. 그녀의 The 점차적으로 옮겨지고 있는 가운데 2000년대에도 이 경향은 더욱 강화되고 있다. 이러한 연구 성과를 통해서 기존의 중국사 중심의 몽골제국사 이해에 대해 전반적인 재검토가 이루어지고 있다.Ⅴ. 맺음말중국의 전통적인 사관에서는 북방의 정복왕조들을 요사, 금사, 원사 등의 단대사 편찬을 통해서 중국 전통 왕조의 일부로 다루어 왔다. 그러한 틀에 의해 원사를 중국 민족사의 한 부분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즉 요금원 정복 왕조들의 역사를 결국 중국 역사에 흡수 통합시켜 버린 것이다. 현 중국 역사학자들은 이러한 시각을 고수하고 있을 뿐 아니라 중국 지역학적 훈련을 받은 구미권의 중국 연구자들 대다수가 이러한 틀을 견지해 왔다.몽골제국사를 원대사라고 하는 중국의 한 왕조 역사의 차원에서 그려냄으로써 거대 몽골제국사를 여러 개의 지역사로 분할하여 중국 지역에서의 몽골제국사를 중국사라는 민족사의 틀 안에 넣어 기술했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관은 중국 내의 소수민족이나 접경 지역의 영토 관련된 정책과 맞물리며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그러나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의 몽골제국사 연구는 다양한 사료들을 발굴하고 적극적으로 이용하면서 통합사적 이해, 또는 전체적인 큰 그림에 대한 이해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 가고 있다. 아울러 몽골제국사를 바라보는 시각에 있어서도 정주적 틀이 아닌 유목적인 틀을 강조하면서 문화적인 다양성에 대해 강조하는 흐름이 점차 대세를 주도하는 상황이라고 하겠다.토의 과제1. 쿠빌라이 이후에도 몽골제국이 하나의 제국으로서 공통적인 정책을 펴 나간 점을 중시하여 통합사적으로 바라보려는 시각이 강해지고 있다고 하는데, 그러한 측면도 있겠지만 4개의 한국이 독자적인 성격으로 나아간 점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결국 그 양자를 종합해서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2. 원대사를 중국사의 일부로 보려는 현재의 중국학계의 경향은 통일적 다민족 국가이론을 통해 중국 내 소수 민족의 역사를 중국사의 일부로 파악함으로써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시도로 볼터 벗어난 새로운 방법론을 보여주고 있다. 먼저 토간은 그녀의 저서 Flexibility and Limitation in Steppe Formations : The Kerait Khanate and Chinggis Khan(Leiden, 1998)에서 칭기즈 칸이 참고할 수 있었던 선례들과 당대의 선례들을 고찰하며, 제국 초기에 대한 담론에 재분배적 경제 개념을 소개하였다. 위 연구가 칭기즈 칸 이전의 상황에 대한 모색이라면, 비란의 저서 Chinggis Khan (Oxford, 2007)은 칭기즈 칸 이후의 상황에 대해 무슬림 세계에 남은 몽골제국 창건자의 ‘잔상’을 추적하여, 유라시아에 걸친 다양한 민족과 정치 세력들이 어떻게 그의 명성을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차용하였는지를 살핀다.칭기즈 칸 이후 제국의 발전에 대해서는 무슬림과 한문 사료 양쪽을 활용하는 통합적 연구들이 나타났다. 비란의 연구서 Qaidu and the Rise of the Independent Mongol State in Central Asia(London, 1997)는 1260년 이후 등장한 독집적 한국들 간의 정치군사적 관계에 대한 최고의 기술이다. 칭기스조 궁정들 사이의 활달한 문화적 교류 특히 중국과 이란 사이의 교류에 대해서는 알슨의 두 저서, Commodity and Exchange in the Mongol Empire : A Cultural History of Islamic Textiles(Cambridge, 1997)과 Culture and Conquest in Mongol Eurasia(Cambridge, 2001)이 있다.몽골제국과 인접 국가들의 관계도 하나의 연구 분야이다. 몽골제국시대에 존재한 장거리 경제 교류는 결코 전통적, 선자본주의 제국들의 변경 지역에서 발생한 교류와 동의어가 아니라는 것이다. 몽골인들의 경우 그들의 경제적상업적 관계망은 그들의 영토 훨씬 너머까지 뻗어나갔다. 서부 유라시아 지역에 있어서는 마티네즈가 이것을 몇 개의 긴 논문을 통해 충분히 기술중 한 가지는 몽골인들이 복속시킨 다른 모든 동아시아 사회와 마찬가지로 그들 또한 가지고 있었던 조상 숭배의 관습이다. 이러한 관습은 서방세계에서는 낯선 것이었다. 무슬림이든 기독교이든지 서방인들은 이 관습을 어떻게 보고 반응하였는가? 더 나아가 조상숭배와 긴밀히 연결된 인간 형상의 회화적 표현은 이슬람에서는 공식적으로 금지된 관습이었다. 따라서 이 차이점은 이란에서 몽골인들의 미술 후원의 의도와 본질에 대해 또 일한국 후기와 티무르조 시대에 이슬람 미술에서 인간 형상이 등장하기 시작하는 현상과의 연관 가능성에 대해 흥미를 품게끔 한다.마지막으로 몽골제국의 경제체제 역시 더 점검해보아야 할 분야이다. 가장 개괄적인 단계에서는 몽골제국의 경제체제는 봉건경제, 조공체제, 재분배 체제 등으로 특성을 파악하여왔다. 필자의 관점으로는 이러한 표지들은 너무나 제한적이고 하나의 핵심적 포인트를 놓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유라시아 전역에 걸쳐 몽골인들이 자원 수취와 교역을 위한 광범위하고 다양한 일련의 체제를 수탈하고 조종하고 침투하며 지배했다는 점이다. 즉 북단부에서는 몽골인들은 시베리아 주민들에게 전통적 방식의 물물교환과 조공관계를 통해 모피를 획득했다. 중단부에서는 칭기스조의 궁정들을, 지배자들이 정주지역으로부터 수취한 물품을 그들의 추종자들과 조력자들에게 아낌없이 베푸는 재분배 체제가 휩쓸었다. 그리고 보다 더 경제가 발달한 남단부에서는 세련된 시장 중심적 교역이 지배적이었다. 그렇다면 아마 몽골제국을 고대 및 근세 교역체제의 혼합체인 경제적 거대기업으로 설명하는 것이 나을 것이고 이를 위해서는 개별적 구성요소들과 그 상호연관성에 대해 더 알아야 한다.전술한 분야들은 몽골제국을 보다 깊이 연구하기 위해 중요성이 높은 ‘내적’ 과제들의 표본적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 이외에도 연구자들의 관심을 기다리고 있는 몇몇 ‘외적’과제들이 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세계적 및 비교사적 관점에서 몽골제국사의 위치를 모색하는 것인데 꾸준히 ‘내륙’과 ‘외부 유라시아’의 .
    인문/어학| 2014.10.06| 15페이지| 1,000원| 조회(153)
    미리보기
  • 연행사와 통신사(내용요약 및 비판)
    『연행사와 통신사』제1장, 제2장제1장 만력 2년 조선사절의 ‘중화’국 비판제1장에서 저자는 허봉의 『하곡선생조천기』와 조헌의『조천일기』를 이용하여 두 젊은 조선의 지식인들이 중국 명나라에 성절사로 파견되어 4달여의 중국 여행에서 느낀 ‘중화’의 현실에 대해 적고 있다.저자는 중국 명으로부터 ‘예의의 나라’로 불릴 만큼 명조를 ‘중화’로 여기고 ‘중화’문화의 정수를 배우기 위해 노력하였던 조선의 사절들에 대해 중국은 어떻게 접대를 하였고, 조선 사절들은 이를 어떻게 평가하였는가? 하는 의문에 대한 답의 형식으로 글을 전개하고 있다.당시 허봉과 조헌은 중국 군관들의 물품을 탐하는 모습, 요동도지휘사, 순안어사 등의 탐욕, 사신을 접대하는 홍려시 서반 고운정이 뇌물을 바라는 탐심에 대해 염치가 없다고 비판하고 있다. 또 허봉과 알고 지내던 등계달이라는 중국인과의 만남을 통해 조선 사절단이 숙소인 회동관은 통제가 많아 중국지식인과의 자유로운 교류가 금지되고, 회동관 밖에서 만나려 하면 스파이가 미행하는 등 일시동인, 내외일가는 허울에 그치고 있음을 비판하고 있다.또 국자감을 방문하였을 때의 실망, 그리고 당시 중국에서 양명학이 유행하여 양명배향에 대한 찬성론이 확산되는 현실에 대한 개탄 등 당시 중국 현실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고 있는 것이 많다. 또 중국의 세역에 대해 조선과 마찬가지로 중세로 인한 백성의 고통이 가중되고 있는 점, 그리고 중국 관료와 향신층에 대한 요역면제 특권으로 인한 불평등의 문제 등 중화의 현실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이러한 허봉과 조헌의 ‘중화’에 대한 비판에 대해 저자는 이들이 이미 소중화인이었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즉 조선이 ‘소중화’가 된 것은 만주족에 의해 조선이 파괴되고, 명조를 멸망시킨 후가 아니라 이미 이때부터 그러한 생각이 나오게 되었고 그 이후 명조가 결국 ‘중화’국에 어울리지 않게 되자 결국 현실에 없는 ‘중화’국을 찾게 된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고 있다.제2장 조헌의 『동환봉사』에 나타난 중국보고『동환봉사』는 부경사로실하면서도 도덕적이고 명분적인 문제보다 현실 사회의 개혁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졌던 인물이다. 이러한 율곡에게 수학한 조헌이 퇴계학파와는 좀더 다른 현실 의식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이는 저자가 1장에서 밝힌 부분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찾아볼 수 있는데, “허봉의 『하곡선생조천기』와 조헌의『조천일기』를 읽고 비교해 보면, 역시 허봉쪽이 보다 재기가 넘치고 평론도 준엄하다. 그러나 양자가 관찰한 대상 혹은 그 관점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들의 출생과 경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의외에도 퍽 유사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라는 부분이다. 두 사람의 관점이 유사한 것은 주자 중심의 성리학을 기본으로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허봉의 평론이 준엄하다는 것은 도덕적인 면을 더 강조한 퇴계의 제자였기 때문은 아닐런지 또 조헌이 조선의 현실을 개혁하기 위해 자신의 견문과는 다른 보고문을 작성한 것은 현실 사회 개혁에 관심이 많았던 율곡 이이의 영향은 아니었는지 한 번쯤은 생각해 볼 필요성이 있는 것 같다.그러나 앞서 ‘소중화’ 의식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비판하면서 밝힌 바와 같이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이 현실의 명조를 ‘중화’로 인식하려 한 것이 아니라 경서에 나타나는 ‘중화’를 따르려 하였다는 점은 분명한 것 같다. 당시 조선의 사대부들이 명을 ‘중화’라고 부른 것은 유학(성리학)의 발원지로서의 동경에서 나온 표현이지 명 자체를 ‘중화’라고 보았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더욱이 17세기 중반 이후 병자호란과 명의 몰락을 겪은 이후에 등장하는 대명의리론과 소중화의식은 그당시 상황에서 집권세력이었던 서인 세력의 현실적 필요성에 의해서 대두된 것이지 진짜 명을 ‘중화’로 인식해서 나온 것은 아닐 것이다.제3장 민정중의 「연행일기」에 나타난 왕수재 문답에 대하여1. 내용 요약이 장은 17세기를 살았던 조선사신(민정중)이 하북성의 한 생원과 교환한 필담의 기록이다.민정중은 현종 10년(청조 강희 8년, 1669년)에 동지사로 북경사행을 떠났던 인물중화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국초부터(특히 16세기 사림의 대두이후) ‘소중화’ 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러한 인식이 17세기를 거쳐 19세기까지 이어졌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그러나 제1장의 주요 주장인 ‘소중화’의식이 명 멸망 이전부터 있었다는 부분에 있어서 ‘소중화’란 단어의 용례를 구분해야 한다는 용어 사용의 문제를 제기하였다. 명 멸망 이전에도 조선 사대부들의 중화의식을 갖고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지만 명 멸망 이전과 이후의 의식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으므로 같은 용어를 사용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다. ‘소중화’에서 ‘조선중화’로 변했다고 하는게 좋은 대안으로 보이는데 하여간 양자 사이의 차이를 간과하면 안된다는 것이다.두 번째는 후마 선생은 조선이 명을 중화로 여겼다는 것을 기본 전제로 깔고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그런데 지난 번에 역시 논의된 대로 당시에는 중화라는 개념 자체가 이중적인 의미(중화 = 유교적 이상세계, 중화 = 명)를 갖고 있음을 간과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즉 후마 선생은 중화 = 유교적 이상세계 = 명이라는 인식을 당시 조선 사대부들이 가지고 있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후마 선생은 명에 가서 보고 명이 중화국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자 주자와 경서 속에서 중화를 다시 찾게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으로는 조선 초부터 중화 = 유교적 이상세계, 중화 = 명 이라는 두 가지의 중화 개념이 있었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또한 조헌은 율곡의 학문을 계승하면서도 특히 경세적인 면에 치중한 인물로, 조헌의 사례를 가지고 전체 조선 사대부들의 경향으로 일반화하기 어려울 것 같다.마지막으로 3장과 관련해서도 민정중이 청조의 부정적인 면만을 보고한 것을 16세기 이래 지속된 중화 의식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듯 한데 이는 1장에서 비판한 바와 같이 16세기와 17세기 중반 이후의 중화 의식은 차이점이 있다는 현실을 무시한 것이 아닐까 한다.요컨대 후마 선생의 인식은 크게 두 가지 면에서 문제가 있어 보인다.학을 비판하였는가? 당시 홍석주, 김정희, 정약용 등과 같이 송학과 한학을 절충할 수도 있었는데 왜 그렇게 한학을 비판하였던 것인가? 이는 김선신이 현장에 있었던 한학송학 논의의 주변을 살펴조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즉 김선신이 직접 만나거나 빈번하게 소문을 듣고 있었던 옹방강, 옹수곤, 엽지선을 통해 한학이 조선에 도입되는데 어떤 문제가 있었는가를 알 수 있다.옹방강은 금석학이나 문자학에 관해 당시 중국을 대표하는 학자였는데, 고증은 고증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의리를 밝히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즉 그는 한학과 송학의 겸용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가 실제 생활에서 정주의 가르침을 지키고 있었는가? 그는 중국에서 ‘탐재치부’로 알려지고 있었으며, 김선신은 그를 ‘속유’로 평하고 있다. 옹수곤은 옹방강의 아들로 자신의 학문의 독창성을 위해 조선금석학을 개척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김정희를 비롯한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조선 비각의 탁본을 보내줄 것을 요청하면서 ‘후안무치’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한학이 ‘의리’를 밝히기 위함이라는 주장과는 달리 오로지 ‘완물상지’의 길을 걷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엽지선은 약삭빠르고 경박하면 품위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 연행사들이 관찰한 엽지선의 인물평이었을만큰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청조 한학자들이 자신들이 내건 슬로건과는 다른 행동을 하는 모습을 본 김선신은 이 한학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생각이 당시 김정희를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던 조선의 한학도입에 관련된 제약이었다고 할 수 있다.조선은 청의 한학이 이미 쇠퇴해가는 시점에서야 그것을 도입하려는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에 대한 비판도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한학비판을 근저에서부터 행하기는 어려운 것이었다. 한학을 비판하기 위해서는 대량의 자료가 필요한데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은 중국에 넘쳐나는 대량의 서적을 입수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한학을 받아들여 절충하고자 했던 성해응조차도 조선에서는 할 수 없에 사는 야만인이 우매함에 빠져 선현을 업신여김이 이런 지경에 이르렀다. 참으로 가련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라는 평을 내리고 있다. 이들은 주로 일본 주자학자들과 필담을 나누었는데 일본 주자학자들은 일본 유학계의 상황을 제대로 전하지 않고 통신사들이 묻는 진사이 학파에 대해서만 답을 하였다.통신사들은 에도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소라이 학파에 대해 알게 되는데, 나카무라 란린을 만나면서였다. 그는 주자학자였기는 하지만, 진사이와 소라이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것도 분명하다. 그는 통신사측에 대해 ‘주자의 경전주석은 가장 정밀해서 빠뜨린 바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 용어는 때로는 고훈에 어긋나고, 그 해석에는 고의에서 벗어나는 바가 있다.’, ‘송유는 항상 근언으로 고언을 풀고 금의에 근거하여 고의를 해석하고 있다’고 주자를 비판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경전 해석 방법은 이토 진사이가 창시하여 이를 오규 소라이가 연구방법론으로까지 발전시킨 것이다. 또 마쓰자키 칸카이는 통신사들에게 소라이의 저서를 읽어 볼 것을 권고하고 소라이 학설의 핵심 가운데 하나인 도덕과 정치의 분리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이러한 필담을 통해 통신사들은 진사이만이 문제가 아니라 소라이학설이라는 또 하나의 이단으로 보아야 할 학설이 일본에 유행하고 있음을 명확히 인식하였다. 이봉환은 일본고학에 대해 이를 「한당의 전주」를 중시하는 경향의 학문으로 파악하고 있다.돌아가는 길에 오사카에서 통신사들은 송학을 신봉하는 루스 토모노부에게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어떻게 되돌릴 작정인지를 묻고 있다. 이에 루스는 그제서야 일본 유학계의 상황을 솔직히 전달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통신사들은 절망감을 느끼고 송학자들이 고립되어 가고 있음을 파악하고 있다. 또 이봉환이 가는 길에 오사카에서 숙소의 주방장 노구치에게 도발적인 문장을 써 준 것에 대해, 스가누마 토카쿠가 반응을 보여 “조선의 학자는 자사, 맹자, 정자, 주자를 깊이 신봉하는 것이 공자를 신봉하는 것 이상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 학자들았다.
    인문/어학| 2014.10.06| 17페이지| 1,000원| 조회(207)
    미리보기
  • 최부 표해록 연구 서평
    조선 선비 최부의 중국견문록 『표해록』에 대한 분석- 박원호, 『최부 표해록 연구』고려대학교출판부이 책은 조선 성종 때의 인물이 최부가 지은 『표해록』에 대한 연구 서적이다. 최부는 tdj종 19년 제주도로 출장을 갔다가 부친상의 소식을 듣고 해남으로 돌아오는 길에 폭풍우로 만나 표류하여 중국 절강성의 어느 해안에 표착하였다. 최부 일행 43명은 온갖 고초를 겪은 다음 조선인임이 밝혀져 항주로 이송되었고, 이어 대운하를 거쳐 북경에 이르렀다가 요동을 경유하여 조선으로 귀환하였다. 『표해록』은 최부가 한양에 도착한 직구 성종의 명에 따라 쓴 보고서로서, 표류로부터 중국 여정을 일기체로 기록한 일본의 중국견문록이다. 당시 조선인이 쉽게 가 볼 수 없었던 중국 강남의 견문에 대한 기술이 특히 조야의 관심을 끌었다.이 책은 『표해록』에 대해 그간의 연구 과정을 회고하고 서지학적인 면에서 표해록 판본을 분석하였고, 역사학적으로 명대 조선 표류민의 송환절차와 정보전달 체계, 15세기 조선인이 본 명 ‘홍치중흥’의 조짐, 그리고 15세기 중국인의 조선인식을 분석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최부 『표해록』에 대한 연구 기행을 실어 『표해록』의 내용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먼저 1부에서 최부 『표해록』의 연구와 번역에 대한 회고를 통해 기존의 연구 과정을 밝히고 있다. 특이하게도 『표해록』에 대한 최초의 저작은 일본에서 공부한 미국인 메스킬에 의해 나왔다. 그리고 우리 나라보다 먼저 『표해록』이 대중적인 서적으로 출판되었던 일본에서 마끼다 교수를 중심으로 연구가 이루어졌으며, 우리 나라의 경우 고병익에 의해 시작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또 지금까지 출판된 역본들을 분석하여 잘못 번역한 사례들을 지적하고 있다.2부 서지학적 연구 부분에서는 『표해록』판본 6종을 일일이 대조하여 교정하는 원전 비평을 시도하였다. 임진왜란 이전에 간행된 3종의 판본은 관판본인데 비해 임진왜란 이후 간행된 3종의 판본은 사판본이며 문집의 형태로 출판되었음을 밝히고 있다.3부 역사학적인 연구 부분에서는 6장 - 8장까지 세 가지 연구 성과를 싣고 있는데, 먼저 「명대 조선 표류민의 송환절차와 정보전달」에서는 표류민에 대한 조사는 크게 3단계(도저소 - 소흥 - 항주)로 이루어졌으며, 이 때 발송된 공문을 번역하여 당시 정보의 전달이 비교적 정확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밝혔다. 또한 절강 삼사를 통해 북경으로 보고된 공문 외에 진수태감이 황제에게 직보하는 통신시스템이 가동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사례는 15세기 조선과 중국 간에 표류민 송환 절차와 정보전달 시스템을 잘 알려 주고 있으며, 또한 양국 간에 이루어진 신속한 정보 전달과 중국 국내 정보 유통의 실제 모습을 뚜렷하게 보여 주고 있다. 특히 명대의 공문을 번역하였는데, 하위 기관의 보고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도록 하여 보고의 내용을 허위로 작성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는 점을 보여주고 있는 점이 특징적이다. 또 공식적인 통로가 아닌 진수태감을 통한 보고 경로의 실제를 보여 주고 있는 점도 인상적이라 하겠다. 마지막으로 명의 관원들 또한 상부의 질책을 두려워하여 최부의 진술 내용을 고치도록 하고 있는 점은 관료 사회의 또 다른 일면을 보여 주고 있어 흥미롭다고 하겠다.7장「15세기 조선인이 본 명 ‘홍치중흥’의 조짐」에서는 『조선왕조실록』과 『표해록』을 통해 ‘홍치중흥’에 대해 조선인들이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를 밝히고 있다. 이를 통해 당시의 조선에서는 ‘홍치신정’의 내용에 대해 비교적 정확하게 인식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고, 특히 『조선왕조실록』의 내용을 통해 홍치신정이 이미 홍치 5년에서 7년 사이에 시들해지고 있음을 밝히고 있는 점이 인상적이다. 중국 학계에서 홍치 8년에 변화가 나타난다고 보고 있는 점을 정면으로 반박할 수 있는 사료가 조선에 기록되어 남아 있다는 것이 당시 조선인들이 중국의 동향에 대해 얼마나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 준다고 하겠다.8장 「15세기 중국인의 조선인식」에서는 『표해록』을 중심으로 장녕의 『봉사록』, 동월의 『조선부』를 분석하여 15세기 중국인들이 조선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를 밝히고 있다. 이에 따르면 중국인들은 조선을 ‘예의지방’으로 인식하고 있음이 잘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이 어떻게 중국인들에게 널리 퍼져 지방의 사인들까지도 그렇게 인식하고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드는데 아마도 여러 중국 서적들이 그렇게 적고 있으므로 식자층에서는 조선이 ‘예의지방’이라는 인식이 자리잡게 되지 않았을까 한다. 그리고 중국 서적들이 그렇게 기록한 것은 아무래도 조선이 다른 나라들보다 중국의 문물을 가장 많이 받아들였으며, 특히 유교적 질서가 가장 잘 자리잡은 나라였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그 외에 중국인들은 조선의 유학이나 불교, 그리고 각종 조선의 제도에 대해 질문을 많이 하고 있으며, 중국인들이 최부에게 개인적으로 가장 큰 관심을 보인 것은 시를 지을 줄 아는가 하는 것이었다. 많은 이들이 최부에게 시 한 수를 지어 줄 수 있는가를 묻고 있고 최부도 때로는 요청에 의해 때로는 감사의 표시로 시를 지어 주고 있다.당시 중국인들은 조선의 역사에 대해서는 기자와 고구려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데, 아무래도 기자에 대한 관심은 조선의 문명이 기자로부터 시작한다는 중화의식의 소산이라고 하겠고, 고구려에 대한 관심은 과거 수, 당 제국의 공격을 막아낸 고구려에 대한 관심이라고 주장하고 있다.조선의 인물에 대한 인지도는 단연 서거정이 가장 많이 거론되었다. 이는 서거정이 뛰어난 시인으로 중국인들에게도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으며, 양국 간의 외교에서 특히 시문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았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있다.이 장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은 왜 중국인들은 조선을 ‘예의지방’으로 인식하고 있는지, 또 언제부터 그러한 인식이 자리잡게 된 것인지에 대한 해설이 없다는 점이다. 앞서 필자는 나름의 생각을 밝혔지만, 단순히 필자의 추측에 의한 것일 뿐이고, 역사학자로서 한 번쯤 살펴볼 필요가 있는 부분이 아닌가 한다.
    독후감/창작| 2010.09.07| 2페이지| 1,000원| 조회(311)
    미리보기
  • 연행사와 통신사 서평 평가A좋아요
    연행사와 통신사를 통해 본 16-19세기 동아시아 사상계의 동향- 후마 스스무, 『연행사와 통신사』, 신서원이 책은 후마 스스무라는 일본인 학자가 연행사와 통신사들이 중국과 일본을 다녀 온 뒤에 남긴 글들을 분석하여, 동아시아 삼국의 사상계의 동향을 비교해 주는 책이다. 기존의 연구 성과들이 대부분 연행사들에 대한 연구들이 많았고, 최근 들어 한?일 역사 분쟁의 과정에 통신사에 대한 연구들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지만, 이 두 외교 사절을 한꺼번에 파악하여 삼국 간의 학문적 흐름의 변화를 밝힌 것은 이 책이 처음이 아닌가 한다. 그러한 점에서 이 책은 일단 대단한 의의를 가진다고 생각된다. 사실 연행사들이 남긴 연행록만 하더라도 그 분량이 너무도 방대한 것으로 알고 있다. 개개의 연행록을 분석한 연구들이 행해지고 있고, 몇몇 중요한 연행록을 중심으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는 국내의 현실을 감안할 때, 그 방대한 사료들을 모두 읽고 분석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연구일 수 밖에 없으며 거기에다 통신사들이 남긴 기록까지 더하여 삼국 사상계의 흐름을 읽어낸다는 것은 왠만한 학자들은 엄두도 내지 못할,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는 연구일 수 밖에 없다. 이 방대한 사료들이 우리 선조들이 남긴 것임을 생각하면 이러한 연구가 국내 학자가 아닌 일본 학자에 의해 처음으로 시도되고 책으로 편찬되기까지 하였다는 점에서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국내 학자가 아닌 일본 학자의 시각에서 이루어진 연구이기에 기존 국내 학계의 견해와는 다른 점들이 많이 눈에 띈다. 그것들은 어쩌면 우리 학계가 미쳐 발견하지 못한 새로운 점일 수도 있고, 일본적인 시각이 가미되어 조선 사상계를 너무 경직되게 이해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즉 이 책에서 일관되게 주장되고 있는 점은 16세기에서 19세기에 이르는 시기의 조선 지식인들은 ‘성리학’에 매몰되어 있고, ‘중화’ 사상을 맹신하여 ‘중화’국인 명조의 모습에 실망하고 있고, 오랑캐인 ‘청’과 ‘일본’의 학문적 변화를 애써 외면하여 시대의 흐름에 뒤처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동안 국내의 연구가 조선 후기 ‘실학’의 발생과 발전에 그 초점을 맞추어 온 것과 달리 후마 선생은 북학 사상이 나오고서야 조선의 성리학적인 사상의 흐름이 바뀌어지게 되었다고 보고, 그 시기는 홍대용의 등장 즉 18세기 후반으로 설명하고 있다. 또 청조의 ‘고증학’이나 일본의 ‘고학(소라이학)’과 같은 실증적인 학풍은 19세기 김정호에 의해 처음 시도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조선 통신사에 의해 조선의 문물과 학술이 일본에 전해졌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과 달리 오히려 18세기에는 일본의 새로운 학문적 경향 즉 ‘소라이학’에 대한 조선 통신사들의 관심이 지대하였고, 그 관계 서적들을 구하기 위해 많은 노력들을 하고 있는 모습들을 소개하면서, 일본으로부터 조선으로 학술적인 흐름이 역전되었다고 주장하고 있기도 하다.이러한 그의 주장들은 연행사와 통신사라는 당대의 지식인들의 남긴 방대한 사료들을 인용하고 분석한 것이어서, 원사료를 접하지 못한 이들은 쉽게 비판을 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하지만 사료들을 후마 선생이 어떠한 오류도 없이 제대로 해독, 분석하여 종합하였다 하더라도 그의 인식에는 문제점도 있어 보인다.먼저 제1장 ‘만력 2년 조선사절의 ‘중화’국 비판‘에서 허봉의 『하곡선생조천기』와 조헌의 『조천일기』를 분석하여 두 젊은 조선의 지식인들이 중국 명나라에 성절사로 파견되어 4달여의 중국 여행에서 느낀 ‘중화’의 현실에 대한 실망을 적고 있다. 이러한 허봉과 조헌의 ‘중화에 대한 비판에 대해 저자는 이들이 이미 ’소중화‘인이었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즉 조선이 ’소중화‘가 된 것은 만주족에 의해 조선이 파괴되고 명조를 멸망시킨 후가 아니라 이미 이때부터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명조가 ’중화‘국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자 결국 현실에 없는 ’중화‘국을 찾게 되었다고 보고 있다. 큰 틀에서 본다면 이러한 그의 주장에 별 문제는 없어 보인다. 그러나 병자호란 이전의 조선 지식인들의 갖고 있던 ’소중화‘의식과 이후의 그것은 엄연히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뒤의 글들에도 줄곧 이어져 이미 16세기부터 조선이 중화라고 생각해 온 조선 지식인들은 명이 망하고 청이 들어서자 완전히 조선이 중화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성리학만을 고집하여 청조와 일본에서 일어나고 있던 새로운 학문적 경향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뒤처지게 되었다고 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16세기 조선인들이 현실의 중화인 명을 비판한 것과 17세기 병자호란 이후의 ’중화‘의식은 그 출발선이 다르다고 판단된다. 성리학의 뿌리인 중국에서 한족들에 의해 회복된 ’명‘을 중화로 인식했다가 실망하고 있는 것과, 대명의리를 명분으로 집권했다가 병자호란으로 삼전도의 굴욕을 겪고 중국 대륙의 명조는 멸망한 상황에서 등장한 ’중화‘ 의식은 그 성격면에서 다른 것일 수 밖에 없다. 같은 ’중화‘ 의식이라 해도 그 내용과 성격 면에서 차이가 있기에 그 둘을 같은 선상에 놓고 당시 현실을 분석하는 것은 문제가 있어 보인다.제2장 ‘조헌의 『동환봉사』에 나타난 중국보고‘에서는 조헌이 중국 방문 후 국왕에게 제출한 의견서인 『동환봉사』에서는 앞서 언급된 『조천일기』의 내용과 차이가 있음을 밝히고 이는 조헌이 현실의 중화인 명조의 문물제도를 본받고자 한 것이 아니라 주자와 자신이 경서라는 텍스트에 주입하였던 이상의 모습을 따르고자 하였음을 밝힌 글이다. 조선의 지식인들이 ‘중화’의 모습을 현실의 명조가 아니라 주자와 경서 속에서 찾았다는 점은 공감이 가는 부분이지만 조헌의 『동환봉사』에 나타난 것처럼 현실의 중국의 모습과는 다른 보고서를 올리고 있는 예가 많지 않다면 이러한 사실을 일반화하기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제3장 ‘민정중의 『연행일기』에 나타난 왕수재 문답에 대하여’에서는 17세기에 민정중이 청을 방문하여 하북성의 생원인 왕수재와 교환한 필담의 내용을 분석하였다. 민정중은 왕수재로부터 들은 정보들 중 청에 대해 부정적인 정보만을 귀국 후 보고하였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당시 조선 지식인들이 중화 사상에 입각해서 듣고 싶은 정보만을 인식하려 하고 청조의 발전상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았음을 비판하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후마 선생의 지적이 대단히 옳다고 생각된다.제4장 ‘조선연행사 신재식의 『필담』에 보이는 한학?송학 논의와 그 주변’에서는 당시 조선은 중국의 문화에 대해 선택적으로 수용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청의 고증학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청의 고증학(한학)에 대해 자세한 지식이 없던 조선 지식인들은 일반론적인 비판에만 머물면서 한학 서적에 대한 관심을 갖지 않아서 청과의 학술적인 교류가 단절되고 있다. 따라서 한학의 실사구시의 정신이 조선에는 김정희에 의해 매우 늦게, 일부의 학자들에게만 받아들여진 것은 근대로 접어들고 있던 시기였음을 감안하면 큰 문제점이었다고 주장한다. 실제 조선은 성리학 중심의 학술 경향이 지배적이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이는 실학의 의의를 너무 간과한 것이 아닐까 한다. 비록 북학파의 사상이 아닌 경세치용학파의 주장들까지는 모두 성리학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이는 변화의 움직임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어 보인다. 외교 사절로 파견되고 있는 당시 지배층들의 인식이 아직 성리학적 질서에 머무르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미 그 시기에는 재야 학자들에 의해 실학이 등장하여 퍼져가고 있던 시기였다. 같은 성리학의 테두리에 있다 하더라도 변화의 조짐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조선 사회가 성리학에만 매몰된 사회였다라고 하기에는 문제가 있어 보인다. 그리고 청의 고증학을 대중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주장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성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당시의 학술계에 고증학이 유행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고증학의 영향은 틀림없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영향으로 실학이라 불리는 새로운 변화들도 일어난 것이 아닐까 한다.제5장 ‘조선통신사의 일본고학 인식’에서는 1748년 일본을 방문한 통신사들에 의해 일본 고학이 알려졌음을 밝히고 있다. 청조의 한학에 대해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던 조선 지식인들이 일본의 고학을 접하고 당황해하고 있음을 밝히고 이를 통해 중국을 통해서만 새로운 학술을 받아들이던 조선 역사에서 일본으로부터 새로운 학술을 접하게 되는 변화가 일어났음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이 새로운 것에 대한 관심은 물론 있었겠지만 일본으로부터 접한 고학에 대해 크게 관심을 갖고 그것에 대해 탐구해보려고 했을 것 같지는 않다. 따라서 새로운 학술을 일본으로부터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는 주장은 지나친 주장이 아닐까 한다.
    독후감/창작| 2010.09.07| 4페이지| 1,000원| 조회(367)
    미리보기
전체보기
받은후기 4
4개 리뷰 평점
  • A+최고예요
    2
  • A좋아요
    1
  • B괜찮아요
    0
  • C아쉬워요
    1
  • D별로예요
    0
전체보기
해캠 AI 챗봇과 대화하기
챗봇으로 간편하게 상담해보세요.
2026년 05월 29일 금요일
AI 챗봇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 AI 챗봇입니다. 무엇이 궁금하신가요?
6:05 오전
문서 초안을 생성해주는 EasyAI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의 20년의 운영 노하우를 이용하여 당신만의 초안을 만들어주는 EasyAI 입니다.
저는 아래와 같이 작업을 도와드립니다.
- 주제만 입력하면 AI가 방대한 정보를 재가공하여, 최적의 목차와 내용을 자동으로 만들어 드립니다.
- 장문의 콘텐츠를 쉽고 빠르게 작성해 드립니다.
- 스토어에서 무료 이용권를 계정별로 1회 발급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바로 체험해 보세요!
이런 주제들을 입력해 보세요.
- 유아에게 적합한 문학작품의 기준과 특성
- 한국인의 가치관 중에서 정신적 가치관을 이루는 것들을 문화적 문법으로 정리하고, 현대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를 비교하여 자신의 의견으로 기술하세요
- 작별인사 독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