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레펀트와 볼링 포 컬럼바인을 보고먼저 엘레펀트를 보고나면, 감독이 어떤 것을 의도하였고 어떤 것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알기 어렵다. 이 작품에서는 작품에 작가의 개입이 거의 들어가지 않는 방식을 사용하였다. 등장하는 풍경들이나 등장인물의 행동들도 시청자들에게 어떤 주장을 전달하기 위한 도구 라기 보다는 그냥 미국의 한 고등학교의 모습이며 그 고등학교의 학생들의 일반적인 언행이다. 즉 무심할 정도로 가치중립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물론 여기서 감독은 우리에게 문제점들을 제시하고 있기는 하다. 학교에서 학생이 왕따를 당하고 괴롭힘을 당하는 현실, 총기구매의 손쉬움, 폭력적인 비디오 게임과 인터넷, 가정의 문제등이 화면에 사실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역시 위의 것들 중 하나를 직접적으로 총기사건의 원인으로 지적하고 있지 않고 있다.따라서 감독은 여러 원인들 중 어느 것 하나로 단순화되는 것에 대한 위험을 시청자로 하여금 느끼게 하고 있다. 엘레펀트 라는 제목에서 말해주는 것처럼 코끼리의 각 부분만 보고 전체를 말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오히려 흐리는 것이라고 전하고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문제의 본질을 밝히는 것이 힘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물론 직접적으로 말하기보다는 영화를 있는 그대로 사실적으로 보여줌으로써 그러한 것을 느끼고 판단하는 것을 시청자들의 몫으로 돌리고 있다.영화 속에서는 이러한 것 들이 심미적으로 형상화 되어있다. 그것은 끔찍한 총기사고와 대비돼서 나타나는 평화로운 풍경에서 나타난다. 특별한 조명이나 장식적인 효과음, 배경음악등 을 배제하고 명료하게 여느 날과 다를 것 없는 풍경을 그려내고 있어서 더욱 더 이 사건의 잔혹함과 끔찍함을 극대화 시켜준다. 또 등장인물에서 특별한 감정변화나 심리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차갑고 냉정한 시선으로 처리하고 있다. 배경음악이 거의 없는 속에서 들려오는 알렉스가 ‘치던 엘리제를 위하여’도 마찬가지로 비극적인 분위기를 고조 시키고 있다또 이 영화에서는 카메라를 등장인물의 뒤에서 따라가면서 찍은 형식을 자주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도 역시 좀더 리얼리티를 살리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라고 여겨진다. 등장인물의 입장에서 보여지는 것들을 그냥 그대로 뒤를 따라 가면서 담아내면서 다른 것들의 개입을 차단하고 있다. 또 어떤 한 사건도 각자의 입장에서 보여 진다는 점에서 여러 원인이 복잡하게 문제의 본질을 이루고 있음을 나타낸다.흰구름이 영화속에서 종종 나타나는 장면은 확실하게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닥쳐올 비극을 암시해주는 듯 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하늘에 점점 구름이 차면서 빛이 가려지는 것을 보면 좀 더 긴장감이 고조되면서 어떤 사건이 일어날 것 같은 느낌을 받게된다. 또 이러한 고용한 구름의 모습은 잔혹하고 충격적인 사건과 극명한 대비를 이루고 있기도 하다.한편 볼링 포 컬럼바인을 보면, 엘레펀트와 반대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다큐멘터리 방식의 영화임을 알 수 있다. 마이클 무어는 화면 중앙에 서서 감독이자 주인공이 되어서 논리적으로 하나하나씩 문제의 원인을 심층적으로 파헤쳐 나간다. 캐나다, 독일 그리고 일본과 비교할 때 훨씬 많은 총기사고의 원인은 마릴린 맨슨도 아니고 폭력적인 만화,오락도 아니고 미국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조성하는 집권층에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집권층은 그런 것을 이용해서 이익을 벌어들이고 있는 것을 확인시키면서 그런 과정에서 미국시민들이 누구나 또한 손쉽게 어디서든지 쉽게 총기와 총알을 구입을 할 수 있는 점도 몸소 총알판매점인 K -mart에 가서 항의를 하는 형식으로 지적하고 있다. 즉, 엘레펀트와는 상이하게 직접적으로, 또 인터뷰를 하고 증거를 제시하면서, 논리적으로 하나씩 따져가는 방법으로 시청자에게 강력하게 메시지를 주장하고 있다. 또한 중간 중간에 삽입되는 만화와 각종 인물들의 인터뷰에서 잘못된 정부에 대한 풍자와 조롱 비판이 뒤따른다.두 영화를 모두 다 보고서 두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방식이 서로 반대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에 따라서 전개되는 사건과 연관된 감독의 진실도 조금씩 이해 할 수 있게 되었다 .먼저 볼링 포 컬럼바인 에서는 공포심을 심어주는 것이 문제의 진짜 원인이라고 설득하고 있다. 여기서는 확실하게 어떤 것이 정의 인지를 명확히 하고 있기 때문에 특별하게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가 어렵지 않다. 감독이 상정한 도덕적 상위를 알고 그것을 확인하는 과정을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감독이 바라는 바도 이런 것일 것이다. 이에 비해 엘레펀트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위와는 반대로 어떤 주장도 펼치지 않고 어떤 주장도 개입하지 않은 상태를 그대로 리얼리티를 살리면서 보여줌으로써 어떠한 것도 단 하나의 원인이라고 말하기 힘든 것임을 역설한다. 또 그중 한 가지를 원인으로 지정하고 몰아 붙이는 것이 옳지 않은 것임을 암시한다.
현대예술과 인상주의1.서론2본론-인상주의 미술의 성격, 특성(모네, 르누아르)-인상주의 미술에서의 현대성4.결론5.그림 별첨1.서론현대예술이 시작되는 낭만주의를 거쳐서 리얼리즘에 도달하기 까지, 그동안의 예술은 그 전의 고전예술과 단절되는 특징들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앞으로 소개할 리얼리즘 뒤에 나타난 인상주의 미술에 있어서도 그러한 현대 예술적 요소들을 들어내고 있다. 일반적으로 인상주의는 초기 인상주의, 후기인상주의 또 신인상주의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여기서는 그중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한 초기 인상주의에 대해서만 다루기로 했으며, 초기 인상주의에서도 주로 다른 분야(건축이나 음악, 문학 등 )보다는 미술부문이 가장 두드러진 진가를 나타내 보였기 때문에 살펴볼 분야를 미술로 일단 좁혀 보기로 했다.2.본론인상주의 화가들이 그리고자 했던 것은 그 이름 그대로 자연의 찰나적인 ‘인상’이었다 .따라서 그 것을 작가가 감각적으로 그려내기 위해서는 자연속에 떨어지는 빛을 볼 수 있어야했고 표현 할 수 있어야 했다. 이러한 것을 잘 표현한 인상주의 화가들 중 인상주의를 잘 대변해주는 화가가 모네이다. 모네는 빛이 변화하는 것에 따라서 물체나 자연이 변화하는 것을 포착하고 그 것을 빛에 따라서 그려내려고 노력했다. 그에 따르면 원래의 형태나 색 그리고 명암은 존재하지 않은 것과 다름없었고 따라서 윤곽선이나 그전의 화가들이 그토록이나 중시하던, 원근감이나 볼륨감을 나타내기 위한 명암법은 크게 고려되지 않는 것이 옳은 것이다. 모네가 그린 이라던지 연작을 살펴보면 그러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오히려 실제 느낌을 더 잘 드러나게 하는데 일조하였다. 빛이 한곳에서 비추는 것이 실제가 아니고 여러 곳 에서 비추어 지고 그 반사광이 존재하는 것이 현실이라면, 모네가 표현한 것이 당연히 더 실감나게 보여 질 것이다. 또 그 전의 고전 방법에서 탈피해서 빛으로 나타난 색채에 따른 원근감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러하 점도 위에서 설명한 것으로 더 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그의 작품 에서 붉은색 꽃을 통해서 잘 나타나 있다.그러면 이런 빛으로 이루어진 공간을 잘 표현하기 위해서 모네가 사용한 기법은 무엇인가?그는 어두운 색의 사용을 자제하면서 프리즘에서 나타나는 7가지 색깔로서 화면을 구성하려고 했다. 또한 색조의 분할과 대비색의 병치사용을 통해서 멀리 보았을때 시각이 혼용되어서 빛의 명도를 한층 더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방법도 병용하였다. 이런 것은 우리가 작품을 멀리서 보았을 때와 가까이서 보았을 때 더 확실히 알 수 있는데, 가까이서 보면 색이 혼용되어 있지 않은 채 대비색으로 나눠어져 있는 것이 눈에 보이지만 멀리서 보면 작아서 하나하나의 개체는 보이지 않고 잠시 동안 보다보면 색이 혼용된 것과 같이 나타나는 현상이 나타난다.모네가 주로 자연을 화폭에 담아 냈다면 르누아르는 주로 사람들을 그린 인상주의 화가이다. 르누아르도 모네가 그랬듯이 , 인물에게 쏟아지는 햇빛의 효과를 연구하고자 했다. 그의유명한 그림인 <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를 보면 축제를 즐기고 있는 그 당시 상류층으로 보이는 군중들 사이 사이로 혹은 그 인물들의 부분 부분에 빛들이 따듯하게 스며들 듯 비추고 있는데, 이것은 그림에서 화사하고 너울너울 움직이는 듯한 대기의 느낌을 표현하고 있다 .또 인물들 개개인을 보면 세부까지 세세히 그리기 보다는 스케치 적으로 그린 방법을 사용했으며, 그 윤곽선은 뭉그려뜨려서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것은 매우 대담하고 비전통적이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그러면 앞서 모네와 르누아르를 통해서 본 인상주의 미술에서 옅볼 수 있는 현대성을 알아보자. 먼저 모네를 위시한 인상주의 화가들은 그전 미술가들과 같이 주제선정에 대한 고정관념이나 제한 같은 것이 없었다. 낭만주의 이전 화가들은 물론 낭만주의 화가들 조차도 많은 화가들이 신화나 역사와 관련된 것, 또는 성서에 관련된 것에 주제가 머물러 있었다. 또 인물을 그리더라고 어느 정도 위치와 권력, 부가 있는 사람들에게 한정되어 졌다 .리얼리즘에 와서는 좀더 현실의 사실적 표현에 주력하면서 주제에 대한 자유는 늘어났지만 아직까지도 작품주제는 단순 표현 수단이전에 현실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반면에 인상주의화가들에게서 주제는 단지 빛이 자연스럽게 들어서 그것을 잘 표현 할 수 있는 것이 최고였고 따라서 그들은 집 밖으로 나가서 빛이 환히 드는 풍경을 택했다. 이러한 점은 현대예술의 한 단면을 들어내 준다 .산업혁명으로 인한 시민계급의 성장과 과학기술의 발달로 미술의 수요자가 궁정,왕과 일부 귀족에서 많은 일반 시민에게로 넓혀졌고, 그로인해 더 이상 이상적인 신화적 상황이나 고급 상위 계층만을 그림 속에 등장시키지 않게 하였다. 더불어 일어난 도시화도 기차역이나 도시사람들을 그림 속에 종종 등장시켰다.또 그 당시 주변에 보이는 것들이나 상황에 대해 주관적인 눈으로 바라보면서 그 것을 좀더 잘 ‘보기’위한 것들을 그림 속에 표현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인상주의에서 와서 화가들은 자연현상을 새로운 정신과 새로운 눈으로 탐지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본다’ 는 개념의 변화를 뜻하기도 하다. 그전까지는 본다는 것에는 단순히 피상적인 것 외에 외양을 통해서 들어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 고전미술에서 성서에 나와 있는 내용을 재구성한 화폭에 이상화된 캐논적 비례를 나타내고 있는 신들의 모습이 그것을 통해 설명적인 목적을 가졌음은 물론이고., 리얼리즘의 꾸르베의 경우도 그전의 이상화에서 탈피해서 주변의 현실에 사실성에 목적을 두고 그림을 그렸지만, 꾸르베가 ‘본 것’은 그 사실성 이면에 있는 상황적 진실이였다. 그에 비해서 모네의 눈이 ‘본 것’은 단순히 이러한 내재성이 배재된 빛으로 형성된 시각현상을 나타낸 것 이었다. 모네의 이런 관점은 이라고 한 그의 말에서 보다 잘 드러난다. 앞서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성향도 과학의 발달에서 기인한다. 사진술이 발달하면서 시각적 사실성은 그림을 대체했고, 그동안 굳건히 믿어져왔던 그림에서의 사실성 재현 목표를 여지없이 무너뜨리게 되었다. 즉 이시기의 화가는 시각적 사실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국제갤러리를 찾았다.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국제갤러리의 위치나 외관이 좋아서 나는 그 곳에서는 유명한 작가의 좋은 작품들만 전시를 할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있다. 그래서 국제갤러리에서 하는 전시는 빼놓지 않고 보는 편인데, 7월9일에 만난 그 곳에서는 최욱경 20주기 회고전이 전시되고 있었다. 사실 최욱경이라는 작가는 남성으로 알고 있었다. 몇 개의 작품과 이름정도를 예전에 본 적이 있었는데, 여성이라는 사실에 굉장히 놀랐다. 들어가는 입구에 최욱경에 대하여 간단하게 설명해놓은 글이 있었는데, 김기창, 박래현 부부의 미술지도를 10세 때부터 받았다는 것이 참 신기했다. 모르긴 몰라도 최욱경은 대단한 부모님 밑에서 충분한 후원을 받으면서 작가의 꿈을 키운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또 한 가지 반가웠던 것은 나의 모교이기도 한 서울예술고등학교 출신이라는 점이었다. 서울예고 출신들이 미술계에서 그리 환영받지 못한다는 인식이 있어서 작가 프로필에 굳이 쓰지 않는다는 말도 들은 적이 있는데, 여러 차례 서울예고 졸업생이라는 문구를 볼 수 있어서 괜히 내가 으쓱하기도 했다. 또 최욱경의 사진들을 볼 수 있었는데, 약간 말괄량이다운 것이 얼굴에 묻어난다고 해야 할까? 평범한 모습은 아닌, 직접 만나보고 싶은 외모였다. 문을 열고 전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잉크와 연필로 그린 흑백 그림들이 보였고, 동시에 얌전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분명하게 들었다. 또 액자를 한 간단한 크로키 작품들도 있었는데, 액자의 효과를 톡톡히 누리고 있는 것 같았다. 잉크로 그린 그림들은 터치가 다양했고 때로는 튀긴 흔적도 있으며, 연필 작업을 보면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선을 여러 차례 그은 뒤에 지우개로 지워가면서 명암을 나타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진득한 성격을 가진 여성이 아니라, 조금은 성격이 급하고 느린 것 보다는 빠른 것을 좋아하는 사람일 것이라는 추측을 하였다. 이런 생각을 할 때 즈음에 작가 천경자가 떠올랐다. 작년 가을에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우연히 천경자의 전시를 보았었는데, 그 때는 그림들을 보면서 참 ‘여성스럽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었다. 그런데 최욱경의 전시를 둘러보는 초반에 문득 들었던 생각이 내가 이 전시를 여성 작가인지 모르고 그냥 보았다면 작가의 성격에 대해서 이렇게 추측하지 않았을 것 같았다. 또, ‘여성스럽지 않다’는 평가 보다는 ‘속도감이 있다.’ 내지는 ‘거칠다.’등 훨씬 다양하게 상상을 해보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했다. 이미 나부터가 열린 시각으로 작품을 바라보고 있지 못한 것 같아 회의감이 들었다. 1967년에 제작된 자화상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목탄으로 그린 것인데, 이것 역시 어둡게 베이스를 깔아놓고 지우개로 지우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아직까지도 지우개 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붙어있었다. 이 그림도 빠른 시간 내에 그렸을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특징을 잡아내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그 사람을 만나 본 것이 아니지만 웬지 그 사람보다도 더 그 사람답게 자화상을 그려낸 것 같았다. 바로 그 옆 방을 들어갔다. 작은 그림들 위주의 초기 작품 활동 시절의 그림인 듯 했다. 원색을 위주로 한 아크릴과 유화를 재료로 삼은 그림들이 많이 걸려있었는데, 붓 자국이 특별히 많이 남지 않은 그림들이었다. 노랑과 붉은색, 초록색 등이 서로 섞이지 않고 순수하게 튜브에서 나온 색 그대로 캔버스에 바른 것 같았다. 나 혼자만의 생각인지 몰라도, 이런 색들이 왠지 처녀성과 관련이 있어 보였다. 중앙으로 들어가 커다란 전시실 안으로 들어갔다. 본격적인 활동기의 그림들이 보였는데, 다양한 크기에 더욱더 다채로워진 색채의 그림들을 만나볼 수가 있었다. 전체적으로 둘러보고 가장 처음으로 한 생각은 붓 터치가 초기의 작품들 보다 더 자유 분방해 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특이한 점은 외곽선은 뚜렷하고 분명한 반면에 그 안에 칠해져 있는 면은 정말 무형식이라는 것이었다. 물결처럼 보이는 빗살무늬는 초기부터 베이스를 깔고 지우개로 지우면서 효과를 내는 것과 연결이 되는 것 같았고, 색감은 쓰여진 종류는 더 많지만 흰색이 많이 섞여서 유학 초기 시절의 작품보다는 보는 데에 부담이 덜 가는 듯 하였다. 실크에 아크릴을 쓰는 등 재료 사용에 있어서도 한 층 다양한 시도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외곽선은 얌전하게 드러나 있되, 정신없이 그 안의 면들을 채워 넣은 것이 나는 여성의 하나의 사회적 속성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분명히 대부분의 여성들에게는 정해진 길이 있다. 그 틀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어떻게 펼쳐질지 모르는 다른 길로 가는 것이 무서워서 안정적이고 인증되어진 삶을 여성들은 택하곤 한다. 하지만 그 길도 결코 쉽지가 않다. 도망가고 싶을 때도 있고 새로운 것을 찾으려고 해 볼 때도 있지만 결국에는 어쩔 수 없는 제 자리 걸음이다. 외부에서 떠나가지 못하도록 잡아 놓는 것도 아닌데, 여성들은 스스로가 떠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저 문화가, 제도가 이들을 훈련시켰을 뿐이다. 이러한 상황들이 최욱경의 그림에서 나타나는 듯 했다. 사회 속에서 억눌렸던 것들을 그림을 통해서 해방시키려는 듯 보였다. 테두리는 너무나도 분명한데, 그 안의 칠해져있는 모습은 아무런 형식도 질서도 없다. 여성으로서 살아가려면 일탈의 행위는 틀 속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에서 이러한 겉은 똑바르게 포장되어 있지만 속으로는 욕구가 끊임없이 쌓여서 그 속에서 욕구가 표출되는 여성의 성격이 잘 나타나 있는 것 같았다. 라는 작품이 나에게는 가장 인상적이었다. 규모도 굉장히 컸고, 다른 그림들과는 구분되는 색감이 마음에 들었다. 오랫동안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으니까 여성의 자궁과 닮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작가의 의도는 알 수 없었지만 화면 안에 있는 부드러움과 딱딱함의 조화, 상아색의 외곽선과 다리처럼 보이는 검은색 면이 꼭 아이가 품어진 엄마의 자궁 속 같았다. 지난 학기에 학교에서 열린 메이데이 전시회에서 꽃을 그리는 친구가 자신은 의도한 것이 아닌데 보는 사람 중에 여성의 생식기를 암시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하며 걱정하는 것을 본 기억이 있는데, 그것처럼 내가 평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한 편으로 겸연하기도 했다. 는 비교적 그 방에서 작은 그림이었는데, 공작새의 모습을 재구성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고 보니 다양한 색의 그림들은 꽃이나 새의 모습을 조금 다른 눈으로 바라 본 것을 손이 움직이는 대로 작가 안에 내재되어 있는 에너지를 표현해낸 것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러한 생각을 할 때 쯤 약간의 실망감이 있었다. 나는 꽃과 여성은 과연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인가 많이 고민을 했었다. 특히 작업을 하는 사람으로서 꽃을 그리는 것은 여자 미대생으로서 소재를 지나치게 국한 시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나는 의식적으로 꽃을 그리는 것을 피하고 있고, 또 꽃으로 작업하는 사람을 볼 때에 가장 참신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늘 해왔었다. 최욱경 역시 꽃을 그리고 있는 것 같다는 추정을 하며 작가로써 흥미가 조금은 떨어지지 않았나 싶다. 2층에는 후기의 작업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색 조합이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최욱경만의 분위기를 낼 수 있다는 것이 부럽게 느껴졌다. 1984년에 제작 된 이라는 작품이 개인적으로 참 좋았다. 나도 평소에 산을 위에서 바라볼 기회가 있을 때 마다 한 쪽 눈을 감고 손으로 틀을 만들어서 바라보면서 ‘섬’같다는 상상을 많이 해보곤 했다. 화면에 세 개의 적갈색 직선을 그어 줌으로 시선의 움직임을 제한시켜 정말 섬을 보는 것 같았다. 그 당시에 굉장히 실험적인 도전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연필과 파스텔로 구성된 종이위의 작품들을 바라보면서 정말 이 작가는 ‘자신이 그리고 싶은 것’이 뚜렷하게 있었으며 그만큼 남의 눈을 신경쓰지 않고 자유롭게 표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 당대에,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 작업들이 한 여성 작가로써 중요하게 인정 받고 있는 것이 대단해 보였다. 1985년 갑작스러운 죽음 직전까지도 끊임없이 작품활동을 부지런히 했던 최욱경은 그림을 그리면서 여성으로서 가졌던 불만들을 충분히 해소시켰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공기에 스치는 여성의 느낌이랄까? 결코 약한 여성이 아닌, 여성으로서 갖추어야 할 것을 갖추고 필요한 것은 과감히 버렸기 때문에 작품 활동에 전념할 수 있었을 것이다. 후기의 작품들에는 그녀의 광기가 더욱 적나라하게 표출되어 있었다. 즉흥적으로 선과 면들을 수없이 겹치고 또 뿌리고... 주체할 수 없는 열정이 최욱경에게는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결혼을 하지 않은 여성을 개인적으로 존경한다. 보통 사람들이 가지 않는 길을 택했다는 것만으로 ‘다른 사람’으로 보인다. 자신의 일에 깊이 몰두했기 때문에 그만큼 그 여성들이 속한 분야를 개발하는 데에 큰 몫을 할 수 있었고, 또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를 빨리 발견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 최욱경씨가 살아 있었다면 한국의 여성미술이 지금과는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을 것이라는 상상을 해본다. 전시장을 나오면서 입구에 있는 그의 사진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멋있는 사람인 것 같다. 한 여성으로써의 가치관이 참 궁금한 사람이다. 최욱경씨가 직접 쓴 책을 찾아 읽어 보아야겠다.
Ⅰ. 서론얼마 전 교육부에서는 본고사 시행과 기여 입학제, 고교 등급제를 금지하는 '3불(不) 정책'을 공표했다. 본고사를 금지하는 이유는 과도한 학습부담을 줄이고 사교육의 폐해를 줄이기 위해서 이다. 그리고 기여 입학제를 반대하는 논리는 현 상황에서 기여 입학제가 도입된다면 계층간의 갈등은 더욱 커질 것이며 이는 결국 국가경쟁력을 하락시키는 주요인이 된다는 것이다. 한편, 고교 등급제란 지역별로 등급을 두어 등급별로 가산점의 차이를 두는 제도로 이 제도가 시행될 경우 등급이 낮은 지역에 사는 학생의 경우 점수가 비슷한 다른 학생들 보다 가산점 만큼의 불이익을 당하게 되므로 반대하고 있다. 이 중 본고사 시행과 기여 입학제는 아직까지 대학과 정부간에 합의가 이루어 지지 않고 있다. 특히 기여 입학제의 경우 정부가 이의 도입을 원천적으로 봉쇄한 상태이며, 대부분의 국민들 역시 이에 대해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다.우리나라의 교육문제의 핵심은 재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가에서 교육예산만 충분하다면 기여 입학제 논의는 사라지고 질 높은 교육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국가 예산의 지출은 광범위하게 쓰여 지고, 교육에만 무한정 투자할 수 없기 때문에 열악한 교육재정 문제는 늘 ‘문제’가 된다. 국내 최고라고 불려지는 대학이 외국에 가면 100위 안에도 들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대학의 78%를 차지하는 사립대학의 위상은 훨씬 더 뒤쳐질 수밖에 없다. 이런 문제들 속에서 대학 기여 입학제라는 방법을 통해 대학의 자주성과 경쟁력을 향상시키자는 방안이 여러 곳에서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비단 사립대학뿐만 아니라 정부의 제약된 예산에 의존하는 국립대학들 역시 기여 입학제 도입을 시도했던 것이 사실이다.새시대전략연구소)의 보고서(제2002-04호)에서도 보여지 듯 기여 입학제는 첨예한 대립양상을 보이고 있다. 재정경제부, 한국개발연구원, 대학들은 찬성을 교육인적자원부, 교원단체, 학부모협의회는 반대의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물론 기여 입학제를 반대하는 측의 의견 학생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줄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다수가 교육 받을 권리를 실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형평성을 따르는 행위라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연세대학교에서는 기부금으로 20억 이상을 지급해야 입학 허가를 내주겠다고 하였다. 한 학기의 등록금이 400만원이라고 가정하면 그 20억은 500명의 학생이 한 학기를 다닐 수 있는 돈이 되는 것이다. 한 명의 학생이 500명의 학생에게 말이다.2.1.2. 수월성의 측면교육인적자원부는 창의적 인재 양성을 위한 「수월성 교육 종합대책」을 발표한 바 있다. 이 대책이 발표되자 많은 사람들이 수월성 교육이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을 가지면서 엘리트 교육으로 오인하여 각종 언론에서는 수월성 교육과 엘리트 교육을 동일한 개념으로 사용하면서 우리말 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모호한 용어를 사용한 데 의아심을 가졌다. 수월성교육이란 우수성이나 탁월성과 통하는 교육학적 개념으로 학생 개개인의 잠재력을 최대로 계발하기 위해 능력과 적성 분야를 고려하여 맞춤식 교육을 통해 최대 성취를 달성하도록 하는 교육을 말하는 반면 엘리트 교육은 전 교과에서 학업성적이 뛰어난 학생을 키우는 교육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헌법 제31조 제4항에 따르면, 교육의 자주성, 전문성, 정치적 중립성 및 대학의 자율성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된다고 말하고 있으며 ?교육기본법 제 5조 [교육의 자주성 등]에서는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는 교육의 자주성 및 전문성을 보장하여야 하며, 지역의 실정에 맞는 교육의 실시를 위한 시책을 수립, 실시하여야 한다고 이야기 한다.우리나라는 사 대학간 경쟁이 상당히 심하다. 더 훌륭한 학생을 뽑고 싶고 그러기 위해선 대학에서 업적이 많아야 하며, 이를 위해 훌륭한 교수, 좋은 시설, 좋은 기자재, 쾌적한 공부환경 등을 필요로 하게 된다. 수월성교육은 어찌 보면 우리 사람의 기본적인 욕구라 할 수 있다. 더 발전하려는 욕구 말이다. 대학에서도 이러한 원리는 깊게 자리 잡고 있다.위와 같이 대학이 수월성교육을 잘 하기 위해선 독립유공자 특별전형은 현행과 같이 계속 실시하며, 그밖에도 국가 및 사회발전 유공자, 벽오지 해외선교사자녀및 의료선교사 자녀도 특별전형 실시 예정.8. 기여심사평가위원회 및 기여금 관리위원회- 2001년중 교내외 인사를 포함한 기여심사평가위원회 와 기여금 관리위원회 를 구성하여구체적인 기여우대제 실시계획을 마련함.9. 시행시기- 고등교육법 시행령 개정 후부터 시행함을 원칙으로 하며, 법의 허용범위 내에서 비물재적 기여를 단계적으로 실시함.10. 법률 개정안 건의- 고등교육법 시행령 개정 건의* 고등교육법 시행령 제29조 제2항에는 정원외로 입학할 수 있는 경우를 열거하고 있는 바, 여기에 제9호를 신설하여 “국가 및 사회발전 또는 당해대학의 발전에 현저하게 기여한 자의 직계자손”을 추가하고 입학정원의 2%까지 정원이 따로 있는 것으로 규정하면 기여자 우대 특별전형 시행의 근거가 됨.2.2.2. 기여 입학제의 도입 연혁우리나라에서는 1986년 교육개혁심의회가 사학발전 정책의 하나로 기부금 입학제를 처음으로 제기했다. 이후 1993년까지 몇몇 대학에서 기부금입시부정이 발생하자 이를 양성화하는 측면에서 대학과 사학법인측이 기여 입학제 도입을 요구해 왔다. 한동안 잦아들었던 기여, 기부금 입학제에 대한 논란은 1997년 '2002년 특별전형제도'를 마련하면서 또다시 불거졌다.)서강대, 건국대, 동국대, 단국대 등이 특별전형제도에 기여 입학도 고려하겠다고 발표한 것이 원인이 된 것이다. 당시 교육부는 기여 입학 제도를 허용할 수 없다는 방침을 밝혔으나 연세대가 학교발전에 기여한 사람의 직계자녀에게 입학혜택을 주는 기여 우대제도입에 대한 추진 의지를 밝히면서 논쟁이 다시 본격화되었었지만 결국 실행되지 못하였다.2.3. 기여 입학제에 대한 쟁점(爭點)2.3.1. 기여 입학제에 대한 찬성 의견① 학교 재정을 확보하게 되어 교육의 질적 향상을 통한 국가 경쟁력을 실현할 수 있게 한다.- 질적으로 전체 대학의 70%가 사립학교이지만 일부 상위권 대학 및 몇몇 군데를 제외하고는만평을 기증했던 사람들의 후손에 대해서는 학교 차원에서도 입학우대란 형태로 사례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기부문화의 확산과 정착을 꾀할 수 있다는 것이다.⑦대학교육은 우수성 지향을 해야 한다- 대학교육의 궁극적인 목적은 사회가 필요로 하는 각 분야에 우수인력을 배출하는 것이다. 평등(equity) 대 우수성(excellence) 간의 교육이념 논쟁은 초·중등교육에 적용되는 것이며, 대학교육은 후자를 지향한다는 것이 정설이다. 물론 양자가 항상 대립되는 것은 아니다. 대학이 좋은 인재를 뽑아 사회가 필요로 하는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경제적으로 불우하거나 소외된 계층의 자녀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한 결과, 사회 전반적인 평등성이 높아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사후적으로 나타나는 결과에 불과하다.※실제 서울대학교 재학생 117명을 대상으로한 설문조사 결과1).기여입학제도에 대한 찬반찬성의견이 약 51%로 117명중 60명이 응답.2).찬성의 근거찬성 60명중에서,47%의 학생이 대학의 재정 확보를 통한 교육의 질적 향상을28%의 학생이 장학금을 통한 빈부격차의 해소를12%의 학생이 교육의 자율성 확보를7%의 학생이 올바른 기여문화의 본보기를6%의 학생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재산권 행사의 권리를 옹호 논거로 들고 있었다.2.3.2. 기여 입학제에 대한 반대 의견①금전만능주의, 황금만능주의 사상을 조장하게 된다.- 우리 사회의 지배적인 가치관인 자유, 평등, 효율성, 합리성 등인데 돈만 있으면 대학도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어 돈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판단하는 결과 즉 황금만능주의, 배금사상의 확산을 가져오므로 학생들에게 비교육적이다.②학생의 개인의 권리 침해와 평등권 침해를 가져온다.- 정원은 한정되어 있는데 기여 입학제도로 들어가는 학생이 많으면 오직 실력만으로 대학에 입학하려는 학생들이 불이익을 당하게 될 것이다. 열심히 공부한 학생이 기부금 때문에 떨어지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헌법 제 31조" 에 "모든 국민은 능력에 따라 교육을 균로 설문 조사를 해보니( ※아래의 표 참조※ ) 대부분의 사람이 기여입학제도에 대한 이해의 정도나 알기위한 노력의 수준이 미미했음을 발견했다. 또한 기여입학제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이 막상 자신이 그러한 이용기회가 주어졌을 때, 어떻게 반응할지를 조사해 보니 유보적인 태도(보통이다.)로 전환을 하는 비율이 의외로 컸음을 발견했다. 즉, 처음에 반대의견을 표출했던 51%의 응답자들이 막상 이용의 기회가 주어지더라도 이용을 거부한 다는 응답 비율은 불과 41%에 지나지 않았다. 이들의 대부분은 유보적인 태도로 전환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반대 응답자들의 기여입학제 반대가 논리적인 비판이라기보다는 감정적인 반응임을 반증하고 있는 것이다. =====>>>>수정 필요!!!!!!!!!!따라서 기여입학제의 타당성에 대하여 감정적으로 반응하기 보다는 합리적인 논거를 바탕으로 검토해 보는 것은 의미가 있는 일일 것이다.※설문조사 결과표※1.기여입학제도에 대한 이해 정도2.기여입학제도를 이해하려는 노력 정도3.기여입학제도의 이용에 대한 질문① 금전만능주의, 황금만능주의 사상을 조장하게 된다.-> 현재 우리나라에 황금만능주의가 만연해있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리라 생각한다. 사실 이 주장은 순서를 옳게 파악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기여 입학제 자체가 금전만능주의, 황금만능주의를 조장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런 사상이 당연시되는 우리 사회의 모습이 기여 입학제를 그대로 시행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뿐이다. 우리가 고민해야할 문제는 기여 입학 자금의 철저한 운용과 입학생의 엄준한 관리를 통해 긍정적인 방향으로 운용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금전만능주의를 타파하고 치유하여 교육의 정상화를 이룩하는 것이다.② 학생 개인의 권리 침해와 평등권 침해를 가져온다.-> 개개인의 실력만으로 학생을 선발해야 한다는 이 입장은 이미 해결책을 찾아놓은 상태다. 바로 ‘정원 외 입학제도’이다. 이 제도는 대학 입학 정원의 1~2%에 해당하는 학생을 따로 특별전형으로 할당하여 선발하는 것이다.
1. 우리는 칼리니스쿠를 통하여 역사적 모더니티와 미적 모더니티의 개념을 구분해보았다. 이 두 개념에 대하여 각자 다시 한번 정리해보고, 모더니즘의 예술이 “자율적인 예술”로 지향하게 되는 과정을 설명하고 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적어보세요.(다른 이론가의 관점에 의거하여 설명해도 좋습니다.)칼리니스쿠는 역사적 모더니티와 미적 모더니티를 구분했는데, 먼저 역사적 모더니티의 개념을 살펴보자. 그에 의하면, 개념적으로 역사적 모더니티란 새롭게 나타난 역사적 ,사회적 상황에 따른 모더니티라고 말 할 수 있다. 먼저 여기서 역사적 모더니티는 대략 17~18세기 이후의 시간적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는데 , 그것은 역사적 모더니티가 생성되기 위한 사상적인 배경에서 기인한다. 그 배경은17~18세기에 나타난 계몽주의로서, 인간의 이성에 의해 역사가 무한히 진보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즉, 이성을 가진 인간인 내가 주체성을 가지게 되면서 경험적인 것 과 보편적인 것, 합리적인 것에 대한 신념이 생겼고 ,그에 따라서 과학을 통한 인간의 물질적, 역사적 진보와 번영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이런 내용들은 이후 형성된 역사적 모더니티의 개념에도 영향을 주었고 , 따라서 역사적 모더니티 또한 이성을 가진 주체를 상정하고 주체위에서 재현 될 수 있는 현실, 혹은 법칙이 있다고 믿었다. 이렇듯 역사적 모더니티는 17~18세기 계몽주의의 사상적 토대위에서 형성되었고 ,따라서 우리는 위의 시간적인 정의로부터 것 역사적 모더니티를 좀 더 잘 정의 할 수 있게 된다. 요컨대, 역사적 모더니티는 17~18세기전의 전통사회에서 나타난 특징들인 신 중심적인 사고와 왕족, 귀족중심의 계급사회, 농업중심사회에서 벗어난 합리적이고 개인주의적인 특징과, 자본주의 사회로 이행하면서 물질중심적인 특징을 갖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다음은 미적 모더니티의 개념을 살펴보자. 미적 모더니티는 앞서 설명한 역사적 모더니티와 관련이 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시민사회의 발달, 자본주의의 발달로 더불어술하면서 두 가지 개념과의 연관성도 더불어 살펴보도록 하겠다. 예술이 “자율적인 예술”로 지향하게 되는 과정은 연대기적으로 현대예술의 시초라고 일컬어지는 낭만주의로부터 시작할 수 있다. 미술 분야로 좁혀서 보면, 그전의 벨라스케스의 ‘시녀들’란 작품에서 보듯이 바로크 양식에서도 조금씩 나타나고 있었지만, 낭만주의에서부터 작가의 주체적인 의식이 들어나기 시작했다. 그전에는 후원자, 즉 귀족이나 왕족에게 영속되어서 그들의 그림이나 그들이 원하는 형태의 그림을 그려야 했고, 따라서 작가가 스스로 개성적인 그림을 창조해 낼 수 없었다 . 그러나 낭만주의에 들어서면서 사회적으로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의 영향이 유럽으로 전파되고 그에 따라서 자본주의가 들어서기 시작했으며, 또 프랑스에서는 시민혁명으로 인해서 왕족 및 귀족중심의 계급체제가 무너지고 부르주아가 중산층으로 부상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왕족, 귀족의 몰락과 중산층 부르주아의 성장은 더 이상 예술가가 왕족, 귀족들에게 영속되지 못하고 익명의 다수의 돈많은 부르주아들을 상대로 예술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으며, 자본주의로 인해 모든 것이 상품화되는 현상 속에서 예술 작품 또한 상품화되는 과정을 겪게 되었다. 따라서 예술가는 돈을 벌기위해서 그전과 달리 대중을 상대로 다양하고 많은 작품을 만들어 내야했고 결론적으로 후원가의 요구에서 벗어나게 되어서 그런 의미에서 자율성을 획득하게 되었다. 이러 현상은 낭만주의의 대표적 화가인 들라꾸르아의 그림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의 그림에서 동방이나 신비로운 상상의 세계를 그린 작품이 다수 있는데, 예를 들면 그중 ‘사르다나팔르의 죽음’을 보면 그가 주장한 창조적 상상력과 창조적 독창성이 잘 나타난다. 이런 것은 더 이상 종교화, 왕족의 초상화나 귀족취향의 예술이 아니었고, 따라서 이것은 예술이 자율성을 획득한 결과일 것이다. 이렇게 낭만주의부터 싹트기 시작한 후원자로부터의 벗어남이란 의미에서 자율성은 예술의 자율성의 한 축으로서 낭만주의 이후 리얼리즘을 거쳐 인상주의 이후에 자. 이번에도 여러 예술분야 중 미술 분야로 좁혀서 보면, 중세시대에는 그림속의 그려진 것들이 주로 종교적인 것들이었고 그것들은 예배적인 목적으로 교훈적인 성격을 띄면서 그림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림은 그림으로서 의미가 있기 보다는 집단적으로 수용되면서 설교적 목적 등 다른 목적으로 이용되는 수준이었다. 그 이후 르네상스 시대가 열리면서 좀더 현실감을 그림에 부여하는 원근법과 같은 미술적인 기법, 과학적 방법이 동원된 것 과 함께 베네치아 화파 에서 색채의 다양성을 어느 정도 확보한 것이 그 전보다 발전되었다고 할 수 있으나, 여전히 그림속의 소재는 다시 예전의 헬레니즘으로의 복귀로서 그리스, 로마의 신화적 모티프를 차용한 것이 많은 수를 차지했다. 역시 아직 까지도 그림 속에 나타날 수 있는 소재는 매우 제한 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낭만주의에 들어서면서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림속의 들어가는 것이 작가에 개성과 상상력에 따라서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었고, 이렇게 소재가 특정한 것에 제한 됨 없이, 또 그것이 이야기를 설명하거나 훈계하는 것 없이 자유롭게 다양화되는 현상은 점점 더 그림이 그림으로서 의미를 갖게 되는데 일조하였다. 그림의 소재는 리얼리즘과 인상주의에 들어서면서 우리 일상생활과 풍경 그리고 도시의 일부분까지 확대 되면서, 그것을 좀더 보이는 그대로 표현하고자 하게 되었고, 이런 방향 속에서 그림의 그림자체로서의 의미 외의 목적이나 의미는 더욱더 사라지게 되었다. 후기 인상주의에 들어서면서 그림은 좀 더 순수성을 띄게 되는데, 이제는 소재에서 벗어나 그림은 색, 선 ,형태자체에 주목하기 시작한다. 고갱의 그림에서 보듯 오히려 실제로 보는듯한 느낌은 사라지면서 진한 윤곽선에 색면을 칠함으로써 색깔 그 자체가 주는 느낌, 정서 그리고 색사이의 관계에서 형성되는 것들을 나타내고자 했다. 세잔의 그림중 특히 정물그림에서, 인상주의가 그랬듯이 조금 더 사물을 실제와 비슷하게 그리고자 하기보다는, 사물의 본질을 나타내기위해서 형태를서 다시점의 파편화를 통해서 소재 자체의 존재성은 사라지지만, 즉 수많은 다시점으로 쪼개서 보았기 때문에 그려진 것이 무엇인지 모르게 되었지만, 그림 자체로서의 의미를 획득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그림에서 자율성을 획득하는 과정을 보았는데, 다른 예술의 경우도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자율적인 예술”로의 지향을 나타냈다. 또 여기서 그림 자체로서의 의미를 찾음으로써의 자율성은 처음부분에 설명한 미적 모더니티의 관계속에서도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미적 모더니티가 역사적 모더니티에 대항해서 취한 방법 중 하나를 “예술을 위한 예술 ”의 방법, 즉 심미주의 예술이라고 한다면, 그림에서 자율성을 얻은 것도 미적 모더니티에 속해 있다고 말 할 수 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미술에서 그림으로 한정 지어서 자율성 획득과정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그림은 조각도 문학도 아닌 오로지 그림만의 영역을 확보한 것 같다. 그러나 나 같은 일반 대중들이 보기에는 점점 더 이해하기 어려워지는 측면이 있고 따라서 일반 대중들과의 거리가 커지게 된 결과를 나았다. 또 결과적으로 이런 상황 속에서 대중문화의 형성이 되는데, 뒤의 4번에서 좀 더 자세히 설명하겠다.*다음 글을 읽어 보세요. (리처드 월린 “모더니즘 대 포스트모더니즘” 중에서)“부르즈아 시대에서의 예술의 운명은 ‘고급한 형식’과 ‘저급한 형식’이라는 양분화 과정을 겪게 된다. 전자는 미적 자율성이라는 본래적 원칙-진정한 주체적 자기표현의 과정-에 충실하며 ‘보편적으로 될 수 있는 순간’을 희생시킨 대가로서 미적 자율성을 성취할 수 있었던 반면, 그러한 순간(즉 ‘보편적으로 될 수 있는 순간’)은 ‘저급한 영역에 속하게 된다.대체로 이 두 영역 사이에 발생하는 긴장을 통해서 미적 모더니즘의 특징적인 발전과정을 설명할 수 있다. 즉 한때는 ‘대중문화’였던 것의 점증적인 상품화, 오락매체의 광범위한 확산으로 인해서 자율적 예술은 아래로부터 그것을 흡수하려고 위협하는 조류에 뒤쳐지 이른다. 이 과정은 예술이 점차 ‘객관적 정신’의 부르즈아 세계를 포기하고 내러티브 구조의 주관화(삼인칭 단수로부터 일인칭 단수 내러티브 목소리로 바뀜)를 수반하며 궁극적으로 ‘보편화할 수 있는 경험’의 영역을 상실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러한 사태의 책임은 문화적 보수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예술가 자신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객관적인 정신 분야에서의 발전에 있다.(예를 들어 지금까지의 사회활동의 자율적 분야-가정 학교 여가-가 형식상의 합리성과 교환가치의 매체에 집중적으로 예속되는 현상을 말한다.) ‘문학적 모더니즘’의 발생은 바로 이러한 발전적 추세의 대단원 혹은 최극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의 특징은 내러티브구조의 주관화 이외에도 , 증대된 자기 지시성, 문학적 기표의 자율성, 연대기적 시간의 와해, 그리고 원숙하고 신성하며 완전한 작품에 대한 고전적 이상의 거부인 것이다.”4. 위에서 인용한 글에서 저자는 한편으로는 고급한 것으로서의 자율적 예술과 다른 한편으로 저급한 것으로서의 대중예술의 분리가 자본주의 시대 예술의 자연스런 귀결로 설명하고 있다. 이에 대한 여러분 각자의 의견을 정리해보고 앞으로의 현대 예술이 나가야 할 바를 주장해보세요.먼저 고급예술(fine arts)와 대중예술(popular arts)로 분리가 나타난 이유를 살펴보자. 대중예술이 생기게 된 것은 산업화, 근대화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 이전에는 소수의 왕족, 귀족들만이 누릴 수 있는 것이 예술이었고, 그것들은 분류상으로 시, 음악 ,회화 ,건축 같은 분야에 걸쳐져 있었다. 또 그런 것들은 순수성, 진정성의 기준 하에 고급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산업화, 근대화가 이루어짐에 권력을 얻게 된 다수의 부르주아들과, 도시화가 진행됨에 따라서 도시 속에서 살게 된 소시민들이 급격하게 증가하게 되었다. 이 ‘보통사람’들의 사회적 지위와 권리가 신장되면서, ‘보통사람‘들 즉 대중들도 예술분야에 참여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부르주아들의 삶의 윤택함과 여유에 따른 예술에의 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