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의 두 얼굴평화와 폭력인류문명의 역사 중 대부분이 전쟁과 폭력으로 얼룩져있다. 그 중에 그리스 지중해 연안을 중심으로 하나의 지배권을 형성하려는 ‘정복주의적 힘의 평화’를 추구하던 시대가 있었다. 전쟁은 피비릿내 나는 살육과 가정과 사회의 해체 그리고 인권이 유린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전쟁에 패배한 민족에 대한 잔인한 결과를 맞이하지 않으려면 전쟁에서 이기는 방법 밖에 없었다. 자신의 민족을 지키려는 노력은 전쟁 영웅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이런 영웅들이 가져오는 평화는 불안한 평화였기에 평화 조약을 통한 공동의 평화를 추구하려는 노력들이 이어졌다.평화협약은 제국주의적 욕망을 버릴 때 지속 가능하다. 이를 버리지 못했던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거쳐 몰락하게 되었다. 이후 그리스의 협약적 평화(eirene) 개념은 종식 되었고, 로마의 평화(Pax Romana)라는 새로운 사상이 대두 되었다. 본래 Pax는 쌍방 혹은 그 이상의 주체들이 관계를 통해 이루어낸 합의나 약속을 뜻 하는 말이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이 단어를 순전히 ‘패배한 국가의 무조건적인 항복’으로 사용하였다. 로마제국에 항복하지 않는 이들은 십자가에 매달아 처형했고, 잔인한 처형 방법은 사람들에게 공포 그 자체였다. 로마는 국경 밖으로는 끊임없이 군사주의적인 정복의 길을 걸으면서 국경 안에서는 스토아학파의 이성적 평정을 예찬하는 극한의 모순을 보여주었다. 국경너머에는 전쟁이 있었지만 로마 시민들은 평화와 풍요를 누릴 수 있었다. 로마의 평화가 지속되는 동안 지배 계층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사치스러워지고 더 깊은 탐욕에 빠졌다. 과거에는 도둑들이 설쳐 댔지만 이제는 공적 권력을 가진 세력이 합법적인 힘으로 민중을 착취하게 된 것이다.피정복민의 관점에서 로마의 평화란 박탈과 고통, 치욕과 죽음, 침묵과 굴종의 삶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한편, 이런 억압적 평화는 상대적으로 자유와 안전을 불러오기도 했다. 강력한 군사적 힘에 의한 복종은 생명을 보장받고 상대적인 자유를 누리는 길이었다.예수는 로마와 다르게 평화를 이해했을 뿐 아니라 로마의 평화에 대립되는 행위를 하였다. 무력으로 인한 힘의 평화, 군사 제국주의적인 평화의 시대 한복판에 나타난 예수는 사실상 로마식 평화의 걸림돌이었다. 결국 예수는 로마 총독 빌라도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처형당했다.예수의 평화는 칼과 창으로 유지되던 로마의 평화와 다르다. 예수는 제국의 평화로 만족 할 수 없는 다른 평화에 대해 수시로 언급했다. 그는 힘과 지배와 억압을 통한 성공이 아닌 사랑과 자비를 통한 평화를 이야기 했다. 또한 그의 평화사상은 인간의 실존적 한계를 넘어서는 평화, 하나님의 은총으로서 불안과 죽음을 극복하는 평화이기도 하다.예수의 가르침을 특징짓는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무수한 비유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비유들은 크게 두 가지 범주로 분류가 되는데, 하나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비유이고 다른 하나는 종말론적인 논의에 덧붙여진 비유이다.하나님 나라 비유는 궁극적으로 복종의 대상은 하나님이며 하나님 나라를 향한 희망을 가진 이들은 세상의 속된 것을 향하는 자기를 철저히 버리기를 요구한다. 이 비유는 씨 뿌리는 자, 가라지, 겨자씨, 누룩, 감춰진 보화, 값진 진주, 그물, 집주인을 주제로 한다. 이렇듯 하나님 나라 비유가 당대의 일반인들이 구체적으로 경험하는 현신을 빗대어 주어졌다면, 종말론적인 논의에 덧붙여진 비유는 유대의 정신세계를 깊이 공유하고 있다. 무화과나무, 경각심 없는 종, 충성스러운 종과 불충한 종, 열 처녀, 그리고 달란트와 관련된 비유이다.예수의 가르침은 약한 자와 가난한 자, 버림받은 자를 섬기고 돌보는 길에 대한 것이었다. 꾸고자 하는 자를 금하지 말며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 대고 겉옷을 달라는 이에게 속옷까지 벗어주며 원수를 사랑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과 같이 온전해지라는 예수의 가르침은 철저한 자기포기를 요구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기의 목숨까지 내놓는 적극적인 사랑과 섬김의 윤리를 가르쳤다.예수의 비유와 가르침은 구약성서의 평화-샬롬-와 상통한다. 샬롬은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 성취되는 종말론적 희망과 하나님 나라를 향한 희망을 뜻한다. 그리고 억압으로부터의 해방과 약자를 향한 깊은 동정을 품고 있다.구약 신학자 폰 라트는 ‘샬롬’을 해함이 없는 온전함 그리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건강한 상태라고 이해했다. 하나님이 지은 모든 생명 간에 폭력과 해함이 없고, 인간 또한 그 공동체 속에 속해 있다. 인간은 평화를 위해 하나님과 그 피조세계와 관계 맺으며 살아가야 한다. 평화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하나님의 구속이고 구원이며, 의와 정의가 넘치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렇듯 샬롬은 자기 자신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하나님과의 관계, 심지어 자연과의 관계에서 억압과 착취와 속임수가 없는, 정직하고 공평하며 정의로운 상태를 지시한다.예수의 십자가 죽음 이후 형성된 신앙운동의 형태로 출발한 초기 기독교는 3세기에 걸쳐 로마의 박해를 받았다. 베드로와 바울을 비롯한 2만명이 넘는 기독교인이 처형당했으며 로마 군중들은 그러한 죽음을 바라보며 즐기기까지 하였다. 온갖 잔인한 수단들을 동원한 혹독한 박해가 이어질 때마다, 그리스도인들은 삶과 죽음을 앞에 둔 신앙적 결단을 해야 했다. 그 때마다 교회 지도자들이 보여준 신실하고도 헌신적인 영적 지도력은, 세상의 위압에 두려워하지 않는 경건한 모습이었다. 그런 지도자들이 있었기에 초기 그리스도인은 영적인 돌봄을 받으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초연한 신앙을 지킬 수 있었다. 그리고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청빈한 삶과 순수한 신앙인의 모범적인 삶을 통해 교회와 신앙을 지켰다. 폭력에 대한 비폭력으로 그들은 이미 이 세상의 권세를 이긴 사람들이었다. 예수의 평화사상을 신실하게 따르던 초기 기독교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 평화적 영성이 깊은 시대였다.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영원의 관점에서 현재를 바라보았고, 현재의 안일과 평화가 아이라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른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삶을 ‘이미’ 살고 있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초기 교부인 저스틴은 이사야의 평화의 비전을 받아들여 “칼과 창을 사용하는 전쟁은 그리스도인의 삶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고, 나아가 그리스도인은 칼과 창을 쟁기와 낫으로 바꾸고 하나님 나라를 향한 평화를 일구어 나가는 이들이어야 한다”고 했다.해 아래 평화 없도다. 몸 둘 곳도 없네. 전쟁과 갈등의 세상. 하나님 나라 아니리. 주께서 우리에게 평화를 주셨고, 사도로 명하셨으니 칼과 창을 쟁기 만들어 막힌 담 헐어버리자.-「평화의 노래」 신동근4세기를 지날 무렵 박해의 시대는 끝이 나고,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했다. 이후 392년 테오도시우스 1세가 로마의 국교로 지정하면서 기독교는 더 이상 박해의 대상이 아니었다. 로마 황제와 고관들이 기독교로 개종하고, 로마군의 보호 아래 기독교 선교가 확대 되었다. 그리하여 부유함과 권력, 인간의 욕망과 같은 세속적 태도에 대한 거부가 약화되고 교회 지도자들조차 세속 가치를 가진 이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교회는 하나님나라에 대한 종말론적 삶을 미루고 제국에 타협하는 형태가 되어버렸다. 제국의 권력과 더불어 중세 사회를 지배했을 뿐 아니라, 국가권력을 초월하는 최고 권력기관으로 지상권까지 행사하게 되었다.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독교 승인 이후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종교로 탈바꿈시킨 신학자 중 한명이 아우구스티누스다. 그는 현실주의적 이해를 통해 이 세상에는 완전한 평화가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하고자 했다. 동시에-초기 기독교의 영성에 깊이 영향을 받았던 그는-예수의 평화사상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중적 세계관을 제시했다.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저서 「하나님의 도성」에서 하나님에 의해 성취되는 종말론적 사건으로서의 평화세계와 정치·힘에 의한 평화세계를 나누어 이야기 한다. 그는 인간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러한 이중적 현실에 처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궁극적 평화는 내세의 천국에서나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가르쳤다. 이 주장에 따르면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현실 세계에서는 이룰 수 없거나, 이 땅에서는 모호해지고 사라지고 마는 것이 되어버린다. 그는 완전한 구원은 이루어 질 수 없으며, 우리는 구원의 성취가 아닌 구원의 여정을 가는 존재라고 믿었다.아우구스티누스는 정의를 집행하는 주체가 일으키는 전쟁이든, 정치권력의 대립 관계를 해소하려는 전쟁이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준행되는 전쟁이든 모든 전쟁의 궁극적 목적은 평화에 도달하려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간혹 전쟁이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교육과 징벌의 수단일 수 있다고 했다. 악에 대한 징벌의 수단으로 전쟁을 인정하는 주장은 대리적 폭력을 승인하는 입장이 되었다. 이러한 입장에서 그는 로마의 장군 보니패스에게 전쟁을 독려하는 편지까지 썼다. 로마제국의 그늘 아래 형성된 아우구스티누스의 정당전쟁론은 중세 가톨릭교회의 애국주의 사상이나 성전론, 종교재판이나 마녀사냥 같은 종교적 포악을 불러오는 논거로 오용되었다. 이는 막강한 제국의 교회로 성장한 기독교가 내부의 악에 대해 철저한 비판과 견제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중세의 모든 사람이 기독교 신자가 되고 사회·정치·경제·문화 등 모든 영역이 기독교적으로 해석되어야 할 때, 교회는 아퀴나스의 사상을 통해 사회 전반에 대한 기독교 사회 이론을 제시 했다. 아퀴나스는 세계에 일어나는 모든 문제에 대해 신학적인 해명을 하려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근거가 필요했는데 사회 모든 영역을 규명하기에는 성서적 전통은 한계가 있었다. 그리하여 아퀴나스는 성서의 계시뿐 아니라 자연과 이성의 영역도 하나님의 창조로 주어진 것이므로 하나님의 뜻을 담고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아퀴나스 사상은 자연 이성의 전통, 즉 로마의 자연법적 전통과 그리스 윤리사상에 크게 의존하게 되었다.아퀴나스의 신학은 초월과 자연이 상하 수직적 이중구조를 이루고, 덕과 법이라는 횡적인 이중구조로 나뉜다.
갈라디아서-목 차-I. 저자소개II. 기록시기- 바울의 여행시기와 장소에 따른 기록시기에 대한 관점들III. 역사적 배경IV. 내용- 전체 내용- 세부 내용1) 1:1-10 서신의 서두2) 1:11-2:14 바울의 복음은 그리스도의 계시로 된 것이다.3) 2:15-21 이신칭의4) 3:1-5:12 그리스도인의 자유5) 5:13-26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성령의 열매6) 6:1-18 마무리IV. 갈라디아서의 신학1) 갈라디아 교회들에 나타난 적대자들2) 칭의론< 참 고 문 헌 >저자바울의 이름으로 기록된 서신은 총 13개로 추정된다. 그러나 대다수 학자들은 그 중에서도 오직 7권만을 바울의 편지로 인정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 7권 중에 갈라디아서도 포함된다. 그 서신의 형식이나 성격이 바울 서신들의 것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직접 확인할 수 없기에 이것도 장담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갈라디아서가 바울의 영향 아래에서 집필된 것이라고는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2. 기록시기1) 기록 장소와 시기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의견이 있다. 첫째,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고린도전서와 마찬가지로 제3차 선교여행 때 에베소에 머무는 동안 기록했다. 둘째, 바울은 에베소를 떠나 마케도니아를 여행하는 동안에(행20:2) 갈라디아서를 기록했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서는 고린도전후서 이후에 기록되었으나, 로마서보다는 앞에 기록되었다. 즉,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의 유사한 내용과 동일한 순서,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헌금문제로 갈라디아서가 두 고린도 서신들 이후에, 그리고 로마서 기록 직전에 곧 55년 늦가을쯤에 마케도니아에서 기록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조경철, 신약성서가 한눈에 보인다, 서울, 도서출판 땅에 쓰인 글씨, 2003, p232~2332) 바울이 갈라디아 남부 공동체들에게 서신을 썼다면 이것은 이미 “두 번째 여행”동안에 고린도에서 쓰였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아마도 보존된 모든 바울서신들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일 수 있다. 그에 반해서 서신이 갈라디아 지방에서 쓰였다면 이것은 바울이 에베소에서 체류하던 시기일 것이다. 보다 더 정확하게 저작 시기를 규정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 고린도 서신들과의 정확한 시간적 관계는 미결로 남는다. 중요한 근거로는 바울이 고린도전서 16:1에서 자신이 갈라디아에서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해 모금하였다고 언급한 것이다. 그는 갈라디아서 2:10에서 모금이 사도회의에서 일치되었다고 언급하지만 이것의 조직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이것은 갈라디아서가 고린도전서 이전에 쓰였음을 암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갈라디아서의 기록 장소로 갈라디아 지역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지지 않은 지역이 언급된다. 그러나 바울이 갈라디아 지역으로의 여행을 추천했으리라는 추측은 그리 설득력을 지니지 못한다. 가장 설득력 있는 관점은 이 편지가 빌립보서와 고린도 전후서의 기록 시기와 비슷하게 에베소에서 기록되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한스 콘첼만/안드레아스 린데만, 신약성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 박두환 역, p356~3573. 역사적 배경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할례와 특정한 율법의 준수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교회들에 들어와서 유혹한다.(3:1-5, 5:2, 6:12)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이 바울의 복음에서 떠나 ‘다른복음’으로 넘어갔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된다.(1:6) 이에 대처하기 위해서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들에 편지하게 된다. 신약성서가 한눈에 보인다, p2344. 내용 신약성서가 한눈에 보인다, p235~241(전체구조)머리1:1-5발신자, 수신자, 기원1:6-10서신의 기록 동기몸통1:11-2:14바울이 선포한 복음은 그리스도의 계시로 된 것이다.1:11-12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1:13-24복음의 증인이 된 예전의 박해자 바울2:1-10예루살렘 사도회의2:11-14안디옥에서 게바를 책망하다2:15-21이(以)신(信)칭(稱)의(儀)3:1-5:12그리스도인의 자유3:1-4:7아브라함의 후손, 하나님의 자녀, 자유인4:8-31종으로 되돌아가지 말라5:1-12종이냐 자유냐5:13-26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성령의 열매5:13-15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할 것5:16-26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 것마무리6:6-10마무리 교훈 - 바르게 살 것6:11-18서신의 마무리 - 새로 지음을 받을 것(세부내용)갈라디아서는 큰 구조에 있어서는 바울의 다른 서신들의 구조와 유사하다. 서두-몸통-마무리의 구조라는 것과 교리적인 가르침 먼저 주어지고 교훈적인 부분이 뒤따른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바울의 다른 서신들과 비교해서 특이한 점은 서신의 서두에 항상 나오는 감사의 말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갈라디아 교회들이 ‘다른복음’으로 넘어갔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1) 1:1-10 서신의 서두바울이 다른 서신들과 비교해 볼 때, 발신자인 바울 자신을 설명하는 대목이 특이하다. 바울이 사도가 된 것이 예수그리스도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을 강조한다. 이것은 바울이 다른 사도들에 비하여 권위가 떨어졌다는 소문을 잠식시키기 위함이다.또 다른 서신들과 달리 감사의 대목 없이 곧바로 책망과 논쟁의 어투로 서신의 동기를 밝힌다. 갈라디아 교회들에 바울이 전한 복음과는 ‘다른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나타났고, 성도들이 너무 빠르고 쉽게 그것을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을 떠난 것에 대해 책망하고 있다.2) 1:11-2:14 바울의 복음은 그리스도의 계시로 된 것이다.‘다른 복음’을 전한 사람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은 ‘사람에게서 배운’ 권위가 없거나 떨어진 것이라고 비난한 것 같다. 이에 대해서 바울은 그의 복음이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임을 강력히 주장하며 세 가지 증거를 제시한다. 첫 째는, 예전에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자신이 복음의 증인으로 변화된 것과 회심 이후 아라비아를 거쳐 다메섹에 가 있다가 3년 후에야 비로소 예루살렘으로 가서 게바를 만나 보름동안 친교를 나누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14년 후 다시 예루살렘을 방문해서 예루살렘 사도들과 회의를 갖고 할례 등 율법에 구애를 받지 않는 이방인을 향한 독자적인 선교에 합의하였다는 것. 세 번째는, 베드로가 안디옥에서 믿음과 다른 이중적인 행동을 했을 때 바울이 베드로를 공개적으로 책망했던 것이다.3) 2:15-21 이신칭의갈라디아서뿐만 아니라 바울 서신들 전체를 통틀어서 칭의론의 핵심을 담고 있는 단락이다.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2:16)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2:20)4) 3:1-5:12 그리스도인의 자유바울은 ‘다른 복음’으로 넘어간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연속적인 질문을 던지며 처음 믿음을 갖게 되었을 때를 기억하라고 책망한다. 이어서 아브라함의 예를 들며 행위로서가 아닌 믿음으로써 의롭다함을 얻게 됨을 길게 설명한다.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 상속자가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초등교사, 초등학문 격인 율법의 종노릇할 필요가 없다. 다시 말해 율법으로부터 자유 하라고 말하고 있다.그런데, 자유인에서 다시 종으로 돌아간 것에 대해 바울은 탄식한다. 바울은 갈라디아 선교 초기 그곳의 성도들이 그에게 보여 주었던 헌신적인 사랑을 회상하면서 거짓 교사들에게 넘어가버린 그들을 다시 돌리기 위하여 안간힘을 다한다. 바울은 다시 아브라함의 두 아들의 비유를 들며 그리스도인은 율법에서 해방된 자유인임을 거듭 설명한다.5) 5:13-26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성령의 열매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이 자유에 대해 오해 할 것을 염려하였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해 다시 설명한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사랑으로 서로 섬기는 것이며 그 사랑은 성령으로부터 온다. 성령의 길을 따를 때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6) 6:1-18 마무리바울은 마지막으로 교회 안에서 성도들이 서로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지를 가르친다. 선한 행동이나 악한 행동이 모두가 마지막 심판 때에 그에 합당한 보응을 받게 된다고 이야기 하고 할례를 강요하는 이들을 향한 날선 공격을 하면서 서신을 마무리한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고신영복 선생님은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되어 무기징역을 선고 받아 20년 동안 수감 생활을 하였다. 수감생활 동안 깊은 고뇌와 자기 성찰을 통해 써나간 글들은 처참한 환경 속에서도 의연하게 일어서는 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그것은 그가 수신(修身)하고 궁리(窮理)하였기 때문이다.사람은 나무와 달라서 나이를 더한다고 해서 그저 굵어지는 것이 아니며, 반대로 젊음이 신선함을 항상 보증해주는 것도 아닙니다. 노(老)가 원숙이, 소(少)가 청신함이 되고 안되고는 그 연월(年月)을 안받침하고 있는 체험과 사색의 갈무리 여하에 달려 있다고 믿습니다. p229신선생님이 말하는 ‘연월을 안받침 하는 체험’이란 노동과 배움을 말하는 것이다.그는 교도소에서 노동을 하면서 목공, 영선, 제화공, 재단사 등으로 직접 노동자 생활을 온몸으로 고통을 느끼며 경험 하였다. 신영복 선생님은 대전교도소에서 붓글씨 노역을 하다가 정향 조병호 선생님을 만나 7년동안 전,예,해,행,초(篆隸楷行草)의 한문 서체를 체계적으로 배웠다. 그는 이 배움을 통해 조선시대 유배지에서 서도의 새로운 세계를 연 추사 김정희, 원교 이광사, 다산 정약용등이 보여준 삶과 예술의 변증법적 발전을 체득하게 되었다고 한다.“대전교도소 복역중이던 70년대 중반 우연히 서도반이 만들어져 열심히 배웠다. 만당 성주표, 정향 조병호 선생 등 외부 서도인이 1주일에 한번씩 교도소를 찾아 자상하고도 엄격하게 가르침을 베풀었다. 서도에 빠지다보니 매서운 추위도, 일신의 괴로움도 다 잊을 수 있었다.”, 1991년2월22일자 한겨레신문에서 인용그리고 노동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사회란 ‘모두살이’라 하듯이, 함께 더불어 사는 집단이다. 협동노동이 사회의 기초이다. 생산이 사회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 그리고 함께 만들어낸 생산물을 여러 사람이 나누어 갖는다는 것이 곧 사회의 ‘이유’이다. 생산과 분배는 사회관계의 실체이며, 구체적으로는 인간관계의 토대이다. p27노동이 곧 인간관계의 토대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체제와 계급사회의 부조리는 갈등과 대립으로 점철되어 왔다. 생산수단을 가진 자들은 경제체제 내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생산 수단을 갖지 못한 채 생산하는-피지배 계급으로부터 더 많은 부를 빼앗아 가려고 한다. 반면에 피지배 집단은 이에 대해 저항하고 자신들의 생활을 향상시키려 노력한다. 결국 사회는 계급으로 분열되고, 계급 사이에는 갈등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군사정권과 독제체제는 이러한 구조를 억압과 폭력의 방법으로 통제하려 한다.신선생님은 수감생활을 하던 중 군사독제체제에 저항하다 잡혀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들-그중에서도 비전향 장기수들-을 만나 생생한 현대사를 들음으로서 살아있는 역사체험을 하였다. 또한 사상 장기수로부터 동양고전과 철학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으며 책 읽는 것에도 힘썼다.독서는 타인의 사고를 반복함에 그칠 것이 아니라 생각거리를 얻는다는 데에 보다 참된 의의가 있다. p24그의 이러한 연월을 안받침 하는 체험들은 사색의 갈무리를 통해 원숙으로 이어진다. 가족에 대한 염려와 사랑, 나팔수 친구를 향한 안쓰러움, 작은 철창 밖 생명들 닭, 토끼, 고양이, 새싹, 민들레, 참새, 달, 나뭇가지, 낙엽, 땅과 하늘, 햇살 등 조그마한 교도소창살 밖의 풍경과 생명들에 대해 관심하여 쓴 글들 속에서 생명의식을 느낄 수 있다.에 대한 연민은 마치 틸리히가 이야기한 ‘인간의 자기통전성’을 실현한 듯 보일 정도이다.살면서 ‘사색’이라는 것을 해본 적이 얼마나 있었던가 생각해보면 딱히 기억이 나지를 않는다. 옛 성인들과 철학자들은 깊은 사색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데, 나에겐 그럴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이 살았던 것 같다. 삶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 없이 나이만 먹어버린 것 같아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대학 졸업을 앞 둔 시점에서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살게 될지 불안하고 막막한 심정뿐이었다. 그런데, 신영복 선생님의 책은 내가 놓치고 살았던 중요한 물음을 깨닫게 해주었다. 지금까지 무엇을 위해 살아 왔는지 되돌아보고 지금까지의 삶이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물어보게 된 것이다. 물음의 답은 ‘아직은 희미하다.’이다. 마치 해가 뜨기 전 안개 자욱한 파란 새벽 같다.
신약성서, 우리에게 오기까지성서는 수많은 필사자들의 손을 거쳐 왔고, 이제는 그 사본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필사과정을 많이 거쳤기 때문에 아무리 비슷한 본문을 가진 사본들일지라도 차이가 있게 마련이다. 이것을 ‘이문’이라고 한다. 이문을 크게 ‘고의적인 변개’와 ‘우연한 변개’로 나누어 볼 수 있다.고의적인 변개라고 한다면, 필사자가 대본을 베기는 과정에서 본문을 의도적으로 바꾼 경우이다. 대본의 본문이 문법에 맞지 않거나 표현이 어색할 경우에, 고대의 필사자들은 문장에 ‘손’을 대었고 또 본문 내용이 사실과 다를 때에도, 필사자들은 그것들을 ‘올바르게’교정한 것 들이 있다. 교리적으로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문장을 변경시키기도 하고 본문의 설명만으로는 독자들이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을 때, 필사자들은 부연설명을 덧붙이며 고의적 변개를 하였다.한편, 고의성 없이 단순한 실수로 본문을 변경시킨 경우를 우연한 변개라고 한다. 단어와 단어의 구분을 잘못 읽거나, 비슷한 글자를 혼동하여 본문이 변경된 경우가 있다. 또, 문장을 중복하여 쓰거나 필사자의 이해가 들어간 이문이 있다.현재 2만개가 넘는 사본들이 남아 있고 계속해서 사본이 발견됨에 따라 사본들을 분류 할 필요가 생겨났다. 신약성서 사본은 크게 파피루스 사본, 대문자 사본, 소문자 사본, 성구집, 이렇게 4가지 그룹으로 분류된다. 처음 세 부류는 ‘연속본문’형식이고, 성구집은 오늘날 요일 묵상집과 같은 ‘선택된 본문’형식이다.성서를 의미하는 영어의 ‘바이블’은 그리스어 ‘비블로스’에서 유래되었는데, 이 그리스어 단어는 ‘성서’를 의미하는 단어가 아니라, 일반적인 ‘책’을 가리키는 일반명사였다. 이 단어는 원래 베이루트의 북쪽 약 40km 지점에 위치한 고대 페니키아의 해안도시 이름이다. 이 지역은 당시 파피루스 식물 생산의 중심지로서 파피루스를 이용한 용지 생산이 활발하였다. 이로 인해 책도 많이 만들어졌다. 그래서 고유명사인 이 지역의 이름이 ‘책’이라는 일반명사가 되었고, 고대의 책의 대표자격인 ‘성서’에도 같은 이름이 붙은 것이다.신약성서 파피루스 사본은 19세기 중엽 티셴도르프라는 독일 학자가 처음으로 발견하였다. 파피루스 사본들이 중요한 이유는, 이 사본들이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본문의 우수성을 증명해 주기 때문이다. 20세기 이후 우리가 재구성한 신약성서 본문은 주로 4세기 이후의 대문자 사본들을 토대로 하고 있다. 그런데 그 이전의 사본들이 발견될 때마다, 그것들은 우리가 재구성한 본문이 사실은 4세기의 본문이 아니라, 2-3세기의 본문임을 입증해 준다. 즉 2-3세기의 본문이 오늘날까지 잘 보존되어 있다는 것이다.그리스어 신약성서 사본들의 역사를 살펴보면, 기원후 4세기가 되면서 양피지가 파피루스를 대신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양피지는 파피루스에 비해 한층 더 부드럽고, 재활용에도 유리하며, 이미 기록된 글을 지우고 새로운 글을 쉽게 쓸 수 있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신약성서의 본문이 양피지에 그리스어 대문자로 기록된 사본을 대문자 사본이라고 한다.대문자 사본들 중에는 베자사본, 프리어사본 등이 있는데 대문자 사본들 가운데서 가장 연구가 많이 된것이 베자 사본이다. 이 사본은 종교개혁자 칼빈의 제자가 1581년에 이 사본을 캠브리지 대학교에 기증하여 이런 이름이 붙었다. 또 다른 사본인 프리어사본은 5세기의 사본으로 마가복음의 긴 끈보다 더 긴 끝이 있는 사본이다. 16장 14절과 15절 사이에 긴 구절을 삽입함으로 제자들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해소하고 제자들에게 복음 선포의 사명이 맡겨진 것이 정당화 되었다.9세기 이후 대문자 사본이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는데, 이로 인해 재생사본이 생겨났다. 소문자 사본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게 된 이후에는 대문자 사본이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기존의 대문자 사본도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대문자 사본의 교정은 주로 대문자로만 나타나며, 소문자 교정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근거로, 소문자 시대에 이르러서는 대다수의 대문자 사본의 사용이 중단되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그래서 10세기 이후 필요없게 된 사본을 지우고는 비싼 양피지를 재활용한 재생사본이 생겨나게 되었다.소문자가 대문자를 대신하게 된 이유는 첫째, 소문자는 물질적으로 경제적이었다. 한 면에 더 많은 양을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이다. 둘째, 시간적으로도 경제적이었다. 대문자 보다 훨씬 빠르게 기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셋째, 소문자의 정착과 더불어 마침표라든지 쉼표 등 구두법과 악센트가 함께 정착되기 시작했는데, 그렇기 때문에 소문자 사본들은 읽기에도 좋았다. 넷째, 소문자는 대문자보다 필체가 화려하다. 두 개 또는 세 개, 심지어는 그 이상의 여러 개의 글자들을 마치 한 글자인 것처럼 쓰는 합자가 많이 사용되어 아름다운 느낌을 주는데, 이러한 장식적인 필체가 중세의 화려함과 잘 어울렸던 것이다.기독교가 확장됨에 따라, 기원후 2세기 중반 이후부터 그리스어 성서는 각 지역의 언어로 번역되기 시작하였다. 번역본들은 성서의 원문 연구에 중요하다. 그 이유는 이것들이 문자적으로 번역되었기 때문에 원문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번역본들이 그리스에서 직접 번역되었을 경우 번역본 뒤에 놓여 있는 그리스어 대본의 본문 상태를 어느 정도 유추해낼 수 있다. 번역본들이 중요한 두 번째 이유는 어떤 독법들이 특정한 지역과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라틴어 본문은 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서방에서 유통되던 본문을 반영하며, 콥트어는 이집트 지역에서 유통되던 본문을, 시리아 본문은 시리아 지역에서 유통되던 본문을 반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