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제 A > 나는 누구인가?“나는 누구인가” 라는 물음은 바로 내가 내 자신을 이해하려고 하는 데서 오는 인간의 근본적 물음입니다. 가장 먼저, 겉모양으로 자신을 알 수 있습니다. 눈, 코, 입, 팔, 다리 등등 겉으로 보이는 것으로서 알 수 있지만 이것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 일뿐 진정한 자아를 알지 못합니다. 즉 다시 말해 겉모습이 아니라 나는 어떤 존재이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는 바로 어떤 인간다움을 가지고 있는가를 찾는 것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인간다움이 나는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다움이라 하여 꼭 남에게 도움이 되고 정직하고, 항상 의롭게 행동한다는 것만은 결코 아닙니다. 인간다움이란 자신이 속한 사회에 속에 한 일원으로서 얼마나 잘 융화하여 잘 살아가는 가는 것입니다. 나 자신 혼자서 만이 살아가는 것으로서는 존재의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오랫동안 살아오면서 하나의 문화를 이루면서 살아가고 있어서 입니다.“나는 누구인가” 라는 물음에 구지 답을 달자면 이렇게 달아볼 수 있습니다.첫째, 나는 아주 개별적인 존재이다. 이는 아주 당연하면서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인간들 하나하나를 따져보면 나와 같은 존재는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누구나 자신이 가장 잘 살기 위해 노력하고 그 나름대로 자신의 존재를 만들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정형화되어 똑같은 삶을 살지는 않습니다. 물론 삶의 방식이란 것이 판이하게 다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누군가가 살았던 방식을 쫓아 가려할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완전히 따라 하지는 않습니다. “나”라는 존재를 항상 염두해 두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인간다움을 찾아 융화 할 수 있기 위해 항상 노력하는 존재가 우리 인간 즉, “나”인 것입니다.둘째, 나는 아주 사회적인 존재이다. 앞서 개별적인 인간인 나를 보았지만 항상 개별적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태어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자기 혼자서 이 세상에 갑자기 나타날 수는 없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나는 독자적인 존재가 아닌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사회 속에서 살아가도록 만들어진 존재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서 왜 인간다움을 찾아야 하는지가 절실히 나옵니다. 인간 즉, “나”라는 존재는 사회를 떠나서는 살아갈 수 없도록 만들어진 존재인 것입니다. 인간이란 사회 안에서 개인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나는 사회에 융화되어 살아갈 수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처음 태어날 때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아니 자신의 개별성만이 뚜렷한 존재로서만이 살아갑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인간은 사회 안에서 살아가기 위해 비로소 자신의 인간다움을 찾는 것입니다. 그런 인간다움을 찾으려면 결코 이기적 이어서는 안 됩니다. 이기적 이어서는 서로 융화되어 살아갈 수 없으니 말입니다.셋째, 나는 특정 문화 안에서 살아간다. 인간이 개별적이고 사회적인 존재였듯이 인간은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안튼, 자신이 태어난 곳의 문화에 익숙해져서 살아갑니다. 나는 대한민국의 문화에 익숙해져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물론 문화라는 것은 인간들이 살면서 만들어낸 하나의 관념일 뿐입니다. 그러나 너무도 오랫동안 변화하면서 그 당시에 옳다고 하는 것에 기준이 되어 이룩되어 온 것들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오랫동안의 삶의 결과로 문화를 만들어내지만, 결국에는 인간이 문화에 의해서 창조되어집니다. 나는 이것이 바로 인간다움을 가장 손쉽게 배울 수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이는 인간이 자신이 속해 있는 곳의 사회에 잘 융화되고 익숙해질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문화를 자연스럽게 배움으로서 인간다움을 저절로 몸에 베이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를 구속하고, 억압하는 것일 수도 있어 오히려 그 문화에 역행하는 행위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결코 거기서 크게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넷째, 나는 항상 현실보다는 더 나은 것을 바란다. 지금 보다 더 나은 것을 추구한다는 것은 어디에 가치를 두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여기서는 행복이라고 정의 하겠습니다. 실제 생활에서 인간은 가장 중요한 삶의 가치의 하나로 행복을 추구합니다. 그 행복이 정신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말입니다. 그러나 결국 물질적인 것도 그 자체가 있음으로써 자신의 정신을 만족시키는 것이므로 결국 중요한 행복의 지표는 정신적인 것입니다. 즉, 다시 말해 명예나 권력, 돈은 행복해 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란 것입니다. 그런 것을 알려면 더욱이 철학적인 물음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이 필요한 것입니다. 행복해 지기 위해서는 물질적인 가치보다 정신적인 가치가 상위에 있음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다운 것을 배우면서 살아가는 존재로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 예전보다는 물질적으로 풍족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정신적으로 추구하던 인간다움을 많이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너무 계산적이고 이기적인 삶들 말입니다. 물질적인 것은 단지 나 자신의 의식주 문제를 해결해주는 수단일 뿐인데 말입니다. 우리 삶에는 물질적인 것보다 더 중요한 가치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다움을 만들어주는 것일 것입니다.
※ 칸트의 윤리학은 흄의 윤리학과 상반되는데, 그렇다면 당신의 입장은? ※칸트가 제시하는 첫째 원리인 ‘준칙이 동시에 보편적 법칙이 되기를 네가 바랄 수 있도록 하는 그런 준칙에 따라서만 행위하라’는 오직 준칙의 보편성에만 주목하기 때문에 도덕의 형식적 원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행위는 의지의 형식적 규정만으로는 아직 충분히 규정된 것이 아니다. 어떤 준칙이 보편적 합법칙성을 가질 수 있는지 없는지를 내가 물을 때, 판단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은 나의 의지와 행위가 지향하고 추구하는 목적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어떤 행위가 합당한 행위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그것이 추구하는 목적이 무엇인가에 의해 가장 정확하게 판단될 수 있는 것이다.그러나 칸트는 의지와 행위의 도덕성을 그것이 지향하는 목적을 통해 판단하려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첫째로 선한 의지는 어떤 경우에도 자기 아닌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일 수 없으며, 둘째로 우리의 행위가 지향하는 목적은 때마다 다르고 또 사람에 따라 서로 달라 상대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선한 의지로부터 모든 목적을 제거해버린다면, 그것은 맹목적인 것이 되고 말 것이고 그에 반해 선한 의지가 지향할 목적을 상정할 경우 선한 의지는 이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어버린다. 이러한 이율배반적 상황을 넘어서기 위해 칸트는 우선 상대적이고도 주관적인 목적과 객관적인 목적을 구별한다. 어떤 행위에서 우리가 임의로 설정하는 목적은 조건부 명령의 근거일 뿐이다. 조건적 명령에서 행위는 목적을 위한 수단적 가치만을 갖기 때문에 참된 보편성을 가질 수 없다. 그리하여 우리가 임의로 설정하는 주관적 목적은 어떤 경우에도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도덕적 명령의 근거일 수 없다.하지만, 흄의 윤리학이 옳다는 것은 아니다. 흄의 윤리학에도 문제점은 있다. 사람들은 수많은 감정들과 느낌들을 가지고 살아간다. 즐거움, 슬픔, 행복함, 부끄러움 등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정들이 우리의 삶을 이루고 있으며, 우리는 이러한 감정의 영향 아래에서 행동 하고, 살아간다. 감정이란 이처럼 매우 친숙한 것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난해한 대상이기도 하다. 감정은 시도 때도 없이 변하기도 하고, 2+2=4 라는 수학적 진리처럼 절대적인 법칙과 증명 방법이 존재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또한 사회에서는 지나치게 감정적이고 기분파 적인 사람들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감정적인 사람은 자신의 감정에 이끌려 도덕적 사리 분별력을 잃고 어떤 위협적인 행동을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성인군자처럼 어떠한 상황에서도 이성을 잃지 않고 침착하게 대응하는 사람들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래서인지 나는 ‘도덕적 판단은 이성적 인식이나 추론이 아닌 인간의 내적인 감정이나 정념에 기반 한다.’ 라고 주장하는 흄의 생각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물론 감정에는 긍정적인 측면도 존재한다. 예술가들의 감정은 창조의 원천이자 에너지다. 우리가 열정을 가질 수 있는 것 역시 내부적인 감정의 발현이다. 누군가가 시켜서 마지못해 하는 일보다는 내가 정말 하고 싶어서, 즉 나의 감정에 충실했을 때 일의 성과도 큰 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감정이 이처럼 긍정적인 면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사고 작용이나 이성적 추론에 비하여 일시적이고 즉흥적이며, 예상할 수 없다. 나는 이 점에서 감정은 도덕적 판단 기준이 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 했다.
이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 머리 위엔 별빛 가득한 밤하늘, 내 마음속엔 도덕법 -1724년 동프로이센의 도시인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마구장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80세로 죽 을 때까지 거의 평생을 그곳에서 보냈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 사람이여서 기독교에 대한 확신은 그의 철학에 중요한 기초가 되었다. 버클리처럼 칸트도 역시 기독교 신앙의 토대를 지키려고 했다. 칸트는 또 우리가 다룬 철학자 중에서는 최초의 대학 교수였다. 흔히 말하 는 ‘전문철학자’이다. ‘철학자’란 말은 쉽게 두 가지 의미로 구분해 쓴다. 철학자란 무엇보 다도 철학 문제에 대해 독자적인 대답을 구하려는 사람을 뜻한다. 그러나 꼭 자기 고유의 철학을 갖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철학의 역사에 대해서 전문적인지식을 갖춘 사람이라면 철학자라고 한다.칸트는 이러한 두 가지 의미의 포함한 그 누구보다도 철학의 전통에 정통한 철학자이다.※ (1) 중세철학 ※- 합리주의자(데카르트, 스피노자)는 모든 인식의 기초는 사람의 인식(이성)에 내재한다.- 경험주의자(로크, 버클리, 흄)는 세계에 관한 모든 지식을 감각 경험에서 이끌어 내려고 했다.흄은 그 밖에도 우리 감각 인상의 도움만으로 어떤 결론을 내리는 데 명확한 한계가 있음을 제시☞ 세계는 우리가 지각하는 그대로인가, 아니면 우리의 이성이 파악하는 대로 존재하는가?☆칸트생각☆ 우리가 가진 모든 지식이 감각 경험 덕분이라는 흄과 경험주의자의 생각에 동의. but 그는 우리가 외부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는지 결정하는 중요한 전제 조건들이 우리의 이성에 내재한다고 함으로써 합리주의자와 손을 맞잡았다. 다시 말해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함께 규정하는 어떤 조건들이 우리 내면(이성)에 있다는 것이다.ex) 안경알이 빨간 안경을 낀 소피 → 소피가 현실을 체험하는 방식(전제 조건)은 안경알이 결정하지만 이 순간 세계가 빨갛게 보이더라도, 소피는 세계 자체가 빨갛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눈으로 보는 것이 무엇이든, 우리는 그것을 특히 ‘시간’과 ‘공간’속의 현상으로 파악할 것이다. 칸트는 시간과 공간을 사람이 지닌 ‘직관의 두 형식’이라고 했다. 이러한 두 형식은 모든 경험에 앞서서 우리의 의식 속에 주어져 있다. 즉 우리가 무엇을 경험하기 전에 이미 그것이 시간과 공간 속의 현상으로 파악되리란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이성의 안경을 벗을 수 없다. 즉 칸트의 말은 사물을 시간과 공간 속에서 파악하는 것이 사람이 가진 타고난 본성이다. 칸트는 시간과 공간이 우리의 삶 자체에 속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시간과 공간은 무엇보다도 우리 의식의 속성이지 세계의 속성은 아니다. 따라서 의식 자체는 세계에 대한 우리 인식의 근본 구조를 결정한다.☞ 흄이 우리가 감각을 통해 경험할 수 없다고 여겼던 인과율 역시, 칸트에 따르면 단지 이성의 구성요소다ex) 방 안으로 굴러 온 공 → 고양이는 공을 보자마자 공을 따라 다닌다. 하지만 이성이 발달한 사람이라면 먼저 사방을 둘러본 다음에 공이 어디서 굴러온 것인지 살펴본다.사람의 이성은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 그것을 고찰한다. 인과율은 언제나 절대적으로 타당하다. 이성이 없는 고양이나 개는 어떤 사건의 원인을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 단지 인간만이 어떤 사건의 원인과 결과를 찾으려 하므로 인과율은 이성의 구성 요소가 되는 것이다.※ (2) 형이상학적 문제들 ※- 사람은 불멸하는 영혼을 갖고 있는가?- 유일한 신이 존재하는가?- 자연은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작은 미립자로 이루어 졌는가?- 우주는 유한한가? 아니면 무한한가?=> 당신은 영혼을 보았는가. 신을 보았는가. 미립자를 보았는가. 우주전체를 한눈에 보았는가?☆칸트생각☆ 칸트에 따르면 우리가 지각해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외적인 관계가 있는데 이를 인식의 재료라고 불렀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론 사람 안에 자리 잡은 내적 관계들이 있다. 예를 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시간과 공간 속의 사건으로 관찰하고, 게다가 그것을 변경할 수 없는 인과율에 따른 진행으로 간주한다. 그것을 우리는 인식의 형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칸트는 형이상학적 문제들에 대해 인간은 대답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할 때 이성은 어떤 감각 재료도 다룰 수 없으므로 존재 전체를 결코 감각적으로 경험할 수 없다. 따라서 어떠한 확고한 대답도 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인간 이성의 본성은 묻고 또 물어 더 이상 물을 수 없을 때까지 그 중대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발견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우리가 물고 늘어질 만한 확고한 질료는 없다. 이성이 헛수고를 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확실한 대답을 얻을 수 없다.☞ (But) 신의 존재에 대해서는...형이상학적 문제들에 대해 인간은 대답할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칸트는 기독교 신앙의 토대를 지키려는 답변으로 신의 존재 유무에 관해서 이성도 경험도 신의 존재를 증명할 확실한 토대가 될 수 없다고 하였다. 칸트는 우리의 경험과 이성이 도달하지 못하는 곳 에다가 실제로 종교를 위한 자리를 남겨 놓았다. 이 자리를 바로 종교적 미음을 채울 수 있었다. 칸트는 개신교도였다. 종교 개혁 이후 개신교의 특징은 오로지 믿음을 토대로 삼은 것이다. 오히려 가톨릭 교회가 중세 초기부터 이성이 믿음의 발판일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칸트는 이러한 중대한 문제를 단순히 사람들의 믿음에 내맡겨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그는 한층 더 나아가서 사람이 불멸의 영혼을 지니며, 신이 존재하고, 사람에게 자유 의지가 있다는 것을 도덕의 가능성을 위한 필수 불가결한 전제로 간주하여 데카르트와 유사한, 처음에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을 매우 비판적으로 생각하고는, 나중에 가서는 신이나 그와 유사한 모든 것들을 뒷문으로 슬쩍 들여 놓았지만 칸트는 데카르트와 반대로 이성이 아니라 믿음이 자기를 그런 생각으로 이끌었다고 명확히 강조하고 있다. 그는 영혼의 불멸에 대한 믿음과, 또 사람의 자유 의지와 신에 대한 믿음을 실천적 요청으로 표현했다. 무엇을 요청한다는 것은 증명할 수 없는 것을 주장한다는 말이다. 칸트에 의하면 실천적 요청이란 사람의 ‘실천’, 즉 사람의 행위와 도덕을 위해 인정되어야만 하는 어떤 것을 뜻한다. 이런 의미에서 신의 현존을 인정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필연적인 것이라고 칸트는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