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순신을 흔히 성웅(聖雄)이나 영웅(英雄) 역사의 면류관(冕旒冠) 민족의 등불 등으로 부르면서 존경하고 그의 리더십과 인물됨을 본받으려고 하고 있으나, 막상 이순신의 무엇을 본받고 무엇 때문에 이순신을 존경하느냐는 물음에는 잠시 머뭇거릴 수 밖에 없다. 이순신은 분명히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영웅이었다. 그는 뛰어난 전략을 구사했고 지역 주민과 혼연일체(渾然一體)가 되어 연전연승(連戰連勝)하면서 수많은 공적을 세웠다. 그가 세운 공적은 어려운 여건을 극복하고 얻은 것이기에 더욱 크게 부각되고 값진 것이었다.이순신은 사후(死後) 6년이 지난 1605년 선무(宣撫)일등공신(一等功臣)에 오르고 좌의정 겸 풍(豊)덕(德)부원군(府院君)에 추대되었으며, 1613년 광해군 5년에 영의정으로 추증된 후 1643년 인조21년에 충(忠)무(武)라는 시호(諡號)를 받았고, 생사를 걸고 싸우던 전쟁 중에 자신의 행적과 판단을 포함하여 진중 생활과 국정에 대한 솔직한 감회를 ‘서한, 장계, 일기’ 등에 기록하였기 때문에 그의 행적을 더욱 잘 알 수 있다. 이처럼 충무공 이순신은 고결함과 겸허함을 잃지 않은 지도자였다. 또한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군사 전략가이자 경영 전략가라고 판단하는 데 무리가 없다고 생각이 된다. 그래서 그의 전략과 리더십에 대해 알아보고 우리의 현재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1.완벽한 준비정신을 가진 리더이순신은 옥포해전과 당항포 해전에서 압도적인 해상 세력의 우위를 입증함으로써 일단 상실한 영남 해안의 대부분의 해역에서 제해권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이 때 지상 전투는 패전의 연속으로 온 국토가 쑥대밭이 되고 백성들은 처참하게 목숨을 잃고 있었다. 승승장구의 일본 육군은 서울 점령, 개성 점령, 평양 점령에 이어 일단 추월 공격하느라 남겨 둔 지역인 전라도는 수륙 병진 공격으로 점령하여 서울에 합류한다는 계획을 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일본 수군은 통영 쪽으로 점차 접근해 오고 있었다.이순신은 7월 6일을 제 3차 출동일로 잡았다. 이영 반도와 거제도 사이의 약 3킬로미터에 이르는 500미터 정도의 협수로로 여러 개의 섬이 중간에 가로놓여 있고 암초가 많아 판옥선 다수가 기동하기에는 제한이 많은 곳이었다. 이에 이순신은 견내량 북쪽에 결진하고 있는 적선단 73척을 넓은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하여 포위 격멸할 전법을 세웠던 것이다.드디어 1592년 7월 8일, 이순신은 한산 앞바다에 도착했다. 조류를 탄 조선의 선발 함대 대여섯 척이 급히 견내량을 지나 거제 앞바다로 접어들고 있었다. 당시 견내량에는 대규모 일본 수군이 정박하고 있었다. 적 선단 가까이 접근한 조선 수군은 곧바로 그들을 공격했다. 기습을 당한 일본 수군은 잡시 당황했으나 곧 일자(一字)진을 함대를 정비하고 반격에 나섰다. 선제 공격을 했던 수군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선발 함대는 뱃머리를 돌려 한산 앞바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조선 수군의 퇴각을 본 일본 수군은 아군을 포획하기 위한 공격을 시작했다. 총사령과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전군에 진격명령을 내렸다. 그는 견내량을 일거에 뚫고 그 기세를 몰아 서해를 지나 곧바로 한강으로 상륙할 생각이었다. 이 때 조선의 함대는 있는 힘을 다해 도망가고 있었다.그 때 한반도 앞바다에 견내량으로 기습 공격을 갔던 선발 함대가 돌아오고 있다는 신호가 울렸다. 그 뒤로는 적의 선단이 몰려오고 있었다. 휘하의 장수와 장졸들은 흔들림 없이 장군의 명령을 따랐고 장군을 신뢰했다. 이순신의 지시대로 싸우면 반드시 이긴다는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군의 전선이 장군의 눈앞을 지나감과 동시에 다시 신호의 깃발이 올랐다. 조선 수군은 매복한 채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군의 선발대가 보이자 공격을 알리는 북소리가 울렸다. 한산도와 미륵도 뒤편에 매복해 있던 조선 수군들이 바다로 일제히 모습을 드러냈다. 앞서 퇴각하던 아군의 선발대도 일제히 뱃머리를 돌렸다. 퇴각하던 선발대와 섬 뒤편에 매복하던 본대가 학이 커다란 날개를 펼치듯 학익진을 펼쳤다. 일본 함대는 완전히 그 진 안에 빨려 들어갔다. 한산 앞바다에전쟁에 임하는 자세와 전략 면에서 기본과 원칙에 중시했기 때문이다. 또한 완벽성을 추구하기 위해 노력했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임진왜란 전에 조선은 오랫동안 평화로 군기가 해이해졌고 적당주의가 판을 쳤다. 평화에 젖다 보니 고된 훈련에 불평도 많았다. 그러나 이순은 스스로 모범을 보임으로써 군기를 확립하고 고된 훈련을 이끌어 나갔다. 학익진법 활용을 위한 노 젓기 및 함대 편성 훈련, 그리고 방향 전환 훈련도 예외가 아니다. 그 결과 그는 20세기 초 영국의 저명한 해군 전략가 빌라드 제독이 극찬할 정도로 한산해전에서 일사불란한 함대 운용을 할 수 있다.지금도 이순신이 부하들과 활쏘기 연습을 매진했던 한산도 활터에 가 보면 그의 완벽성을 추구하는 대비 태세를 알 수 있다. 화살로 적을 명중시키려면 적과의 거리를 정확히 측정해야한다. 그러나 바다에서는 거리 감각이 무뎌져 다른 배에 탄 적을 정확히 겨냥하기 힘들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순신은 바닷물을 사이에 두고 활 쏘는 곳과 과녁을 배치할 수 있는 곳을 활터로 개발했던 것이다. 이런 활터는 한산도를 빼고는 국내에 없다고 한다.2.무에서 유를 창조한 리더이순신이 칠천량 해전 이후 피난민이나 패잔병까지 함께 싸우려고 모여들었으며, 에 노인들까지 도우려고 했던 일, 강직한 성품, 부하 사랑, 깨끗한 몸가짐 등 청렴결백과 높은 신뢰성, 겸허한 마음가짐은 위급한 상황에서도 군사를 모으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것은 신뢰라는 큰 재산을 크게 쌓았기 때문에 가능했다.그 속내를 자세히 들여다보자.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괴멸된 후 다시 수군통제사가 된 이순신은 빈손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가 얻었던 신뢰는 많은 사람들이 그를 믿고 존경하도록 했고, 따르게 했다. 그것은 그의 깨끗한 몸가짐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는 출장 갈 때 지급받는 쌀에서 남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다시 가져와 반납했다. 또 상관이 자기와 친한 사람을 무리하게 승진시키려 하자 이를 강력히 반대해 저지시킨 적도 있다. 이런 성품 탓에 이순신은 윗품위가 없다고 모함을 받을 정도로 부하들과 마음을 터놓고 같이 일했다.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에도 앞장섰다. 궁색한 사람에게 입고 있던 옷을 벗어 준적도 있었다.이순신의 이 같은 따뜻한 보살핌과 인간애(人間愛)로 인해 그를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이순신은 오랫동안 쌓은 신뢰(信賴)라는 재화(財貨)를 바탕으로 위급한 상황에서도 군사를 모으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것이다.3.먼저 실천했던 리더어느 누구도 이길 수 없다던 싸움, 명량을 선택한 이순신은 전선의 맨 앞에서 손수 북을 치며 쇠나발을 불며 목숨을 걸고 장졸들을 독려했다. 명량의 물길을 알았던 그는 결국 세계 해전사에 길이 빛나는 올린다.이순신은 명량해전에서 승리한 날을 천운에 돌렸다. 그는 명량해전 하루 전에 일기에 “이 날 밤, 신인이 꿈에 나타나서 가르쳐 주시기를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패하게 된다고 했다.”라고 기록했다. 그러나 이것은 자면서도 12척의 전선으로 대규모의 적선을 무찌를 수 있는 방법에 골몰하던 그의 간절한 승리에 대한 소망이 꿈 속에서 신인(新人)의 출현으로 표출된 것이 아닐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듯이 이순신이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더라면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끌어 내지 못했을 것이다.이 때 조정은 12척의 배로는 패배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임금은 이순신에게 수군을 없애고 육군에 합류하라는 교지를 내렸다. 장수들도 도망가고 임금마저 전투를 포기하라고 명령할 정도로 위급한 상황에서도 이순신은 “아직도 12척의 전선이 있으므로 죽을힘을 다해 싸우면 적 수군의 진격을 막을 수 있습니다.” 라고 오히려 임금을 설득하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4.창의적인 리더십이순신은 일본 수군의 강점을 무력화하고 우리의 강점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전함 개발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기술자들과 함께 거북선의 개발에 혼신의 힘을 기울인 창의적인 리더십을 발휘했다.이순신은 배를 만드는 기술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임진왜란이 터지기 전 이미 거북선같이 뛰어난 혁기 위한 좁은 십자로를 제외하고는 모두 쇠못을 꽂아 사방 어느 곳에서도 적군이 발을 디딜 수 없게 했다. EH 배 안에선 밖을 엿볼 수 있지만 밖에서는 배 안을 볼 수 없었고, 거북머리와 거북꼬리 부분, 그리고 배의 좌우에도 화포를 쏘는 구멍이 있어 적이 거북선을 포위하기 어려웠다. 그야말로 거북선은 당시 획기적인 신제품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거북선은 신비에 쌓인 신화가 아니다. 장군의 지혜와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안목이 만들어 낸 혁신 제품이었던 것이다.5.난중일기, 기록하는 리더기록은 자료임과 동시에 정보의 가치를 지니다. 이순신은 전쟁 중의 일을 자세하게 정확한 기록으로 정리한 난중일기를 남김으로써 그 자신을 더욱 빛나게 하는 계기를 만들었다.우리의 머릿속에 들어온 것 중에서 3일이 지나면 거의 반 정도가 망각의 늪 속으로 사라져 머리는 까닭에, 반복해서 기억하지 않는 한 영원히 잊어버리는 것도 있다. 그러므로 기록 정신은 기억의 보조 장치로 천재보다 능률적이라고 하였다. 이순신 임진왜란 7년의 와중에서, 때로는 토사(吐瀉)관(灌)락에 시달리면서도 일기를 써서 귀중한 난중일기를 남겼다. 난중일기에는 전쟁에 관련된 많은 기록뿐만 아니라 당시 사회상에 대한 자료까지 담고 있어 사료로서 가치가 높다. 그는 또 조정에 올린 장계(狀啓)에서도 전쟁 상황을 생생하게 보고했는데, 이 자료들은 현재 임지장초로 남아 있다. 때문에 우리는 4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임진왜란이 어떠했으며, 이순신이 어떻게 전쟁에 대비하고, 어떻게 이겼는지를 비교적 상세히 알 수 있다. 그의 투철한 기록 정신이 엿보이는 대목이다.우리는 고려자기를 세계에 자랑하지만 과학 기술이 획기적으로 발달한 지금도 이를 똑같이 재현하지 못한다. 기록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가치를 지닌 지식이나 기술을 기록으로 남기면 바로 국가와 후손들의 재산이 되는데 안타까운 일이다. 기록은 일의 효율성을 증대시키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꾸준히 기록함으로써 미래를 향한 지표를 만들어 낼
국제 컴퓨터 음악제에 다녀와서영어영문 1학년 60060221 이애리음악에 대한 나의 고정관념을 단번에 무너뜨려버린 상상초월의 음악회, 난 이런 음악회에 다녀왔다. 음악회에 자주 찾아가는 편은 아니지만 내가 생각하는 음악회는 악기가 등장하거나 사람이 등장해서 곡을 연주하거나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나와 함께 음악회에 갔던 친구에 의해서 이 음악회가 열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음악회의 이름은 이렇다.‘서울 국제컴퓨터음악제 2006’ 컴퓨터 음악이라, 음악회에 가기 전에 난 상상을 해 보았다. 도대체 어떤 음악일까? 컴퓨터로 곡을 연주하나?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음악회장은 비교적 작았고, 사람들도 많지는 않았다. 국제 음악제라서 그런지 외국인들도 눈에 띄었다. 음악회가 시작되기 전까지도 나는 수많은 상상을 했다.‘앞에 있는 블라인드 위에는 영상이 펼쳐지나? 저 드럼은 어디에 쓰는 거지? 드럼 연준가? 저 기계들은 뭐지? 왜 우리 앞에 있는 걸까?’나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첫 곡이 시작되었다. 궁금증에 대한 대답은 어두운 가운데 썼던 노트위에 있는 나의 글씨들이면 충분할 것이다.‘기차소리, 깨지는 소리, 문 닫는 소리, 씹는 소리, 쏟아지는 소리, 호기심 자극’ 그리고 옆에 앉아 있는 친구에서 살짝 적어 보여줬던 쪽지의 내용 '깜짝이야’, ‘끝난 건가?’, ‘독특해’나는 시작도 몰랐다. 끝도 몰랐다. 그리고 음악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여러 가지 소리들에 놀라기도 했다. 그렇게 첫 곡이 끝났다. 내 앞에는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이 있는 게 아니었다. 물론 내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도 아니었다. 어두운 가운데 나는 ‘소리’를 들었다. 음악이라고 생각하면 음악이라고 볼 수도 있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나를 깜짝 놀라게 했던 것은 컴퓨터 음악회가 시작 된지 벌써 14 해가 되었다는 것이다. 나같이 이런 분야에 무지했던 사람들, 그리고 그냥 보통 사람들로부터 철저한 외면을 받아왔던 것이 사실인 듯하다.음악회가 끝날 때까지도 나는 이상하다는 생각 이외에는 아무런 느낌을 갖지 못했다. 컴퓨터 뮤직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는 것이 가장 큰 성과라면 성과일 것이다. 집에 도착해서는 컴퓨터 음악에 대해서 인터넷 검색을 해 보았다.‘현실 세계에는 없는 소리를 창조해 내, 그것을 미학적으로 재배치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컴퓨터 음악이다.’이런 문장 읽고 현실 세계에 없는 소리를 창조해 냈다는 것에 우선 감동을 받았다. 내가 위에서 언급했던 소리들(기차소리, 깨지는 소리, 문 닫는 소리, 씹는 소리, 쏟아지는 소리) 모두가 현실 세계에는 없는 소리였다는 것, 기계 문명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추상적인 세계의 정점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이런 소리를 만들었는지 감탄 이 절로 나온다. 작곡자는 이 곡에 대해서 ‘자신이 관조자가 되어 희미한 불빛과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의 울림을 따라 유도된 상상의 암흑 한 가운데 맴도는 것을 형상화한 작품이며, 이 변형된 각각의 모든 상황은 그 한 소설로부터 파생된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내가 이곡을 듣고 나서 받은 느낌과 비슷한 듯 했다. 왠지 혼자 남겨져 무서운 느낌을 받았던 것이 사실이다. 진정한 음악 세계를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은 나 스스로도 인정하지만 이 음악을 듣고, 작곡자가 전하고자 했던 느낌을 나도 느꼈다는 것에서 이 음악은 성공적인 음악이라고 생각 했다.다음곡이 시작 되었다. 첫 곡처럼 예고도 없이 찾아와서 나를 우주로 데려갔다. 말 그대로 나는 우주에 와 있는 듯 했다. 이런 소리 하나로 우주에 와 있는 상상을 하게 되다니! 우주선을 타고 나는 남색 빛의 공간을 떠 다녔다. 신비롭고 멍한 느낌, 정말 우주에 갔을 때는 이런 느낌이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런 소리를 나에게 전하는 의도는 무엇일지 궁금증이 생겼다. 아쉽게도 나는 의도를 알지 못했다. 음악에 대한 어떠한 설명도 덧붙이는 말도 없었고, 곡에 대한 설명이 있는 책자에 조차 의도는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지 ‘다양한 형태의 소리덮개를 사용하여 외적으로는 일정하지 않은 움직임을 표현하려고 하였으며, 내적으로는 주된 음향의 부분음에 적용하여 음색변화를 주었다.’는 것만 알게 되었다. 또 나를 우주에 와 있는 듯하다 느낌을 주게 했던 시작 부분은 십대가 잘 들을 수 있다는 매우 높은 주파수를 사용하였다고 한다.세 번째 곡, 드디어 사람이 등장했다. 바이올린과 같은 악기도 등장했다. 하지만 난 속지 않았다. 내가 상상했던 그런 음악회가 아니라는 걸 이미 첫 번째 곡과 두 번째 곡만을 듣고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귀에 이어폰을 끼우고 연주를 시작하려는 바이올린 연주자가 보였고, 어느새 기계음은 음악회장에 울려 퍼졌다. 바이올린과 기계음의 조화였다. 이 곡을 들으니 작곡가의 개성과 음악관을 알 수 있을 듯 했다. 왠지 재잘거리는 듯하다 소리들이 많았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서 작가의 성격도 사교적이고 밝을 것만 같았다. 또한 바이올린 연주를 평소에 즐겨듣던 사람일 것 같았다. 바이올린이 저런 독특한 소리도 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는 쉽지 않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정말 새로운 시도인 것 같다. 어느 것 하나 뒤지지 않고 컴퓨터와 바이올린이 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어느 것이 기계음인지 어느 것이 진짜 연주인지 헷갈리는 부분도 있었다. 새소리도 있었고, 영어로 누군가 말하는 것 같은 소리도 들렸다. 긴장을 놓지 못하게 하는 독특한 음악회, 나는 한 순간도 긴장을 놓고 있을 수 없었다.이번엔 통기타를 든 한 남자가 등장했다. 기타를 든 손이 매우 희고 고왔기 때문에 나는 손에 집중을 하고 있었다. 저 분은 도대체 저 기타로 무슨 소리를 낼까?연주가 시작되었다. 줄을 튕기면서 내는 소리는 익숙한 것이었다. 하지만 표정이 심각한 연주자, 갑자기 기타의 통을 두드리는 게 아닌가? 통통거리는 소리가 즐겁게 느껴졌다. 잘 본 건지는 모르겠지만 기타 줄도 몇 개 안되는 것 같았다. 이 곡 역시 악기와 기계음의 구분이 잘 되지 않았다. 흘러나오는 소리를 듣고 절묘한 타이밍에 기타로 소리를 내는 연주자를 보면서 그간의 고된 연습과 노력이 짐작이 되었다. 0.1초도 늦는 것을 허용할 수 없는 음악에서, 매 순간 순간은 아주 소중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