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마가의 기독론의 연구는 ‘그리스도의 자기 은닉 사상’과 그의 ‘위엄의 칭호’에 대한 연구로 말해질 수 있다. 마가복음의 줄거리를 그리스도의 자기 은닉이라는 주제로 살펴보며, 저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중요한 위엄의 칭호들의 의미와 기능을 규명하고자 하는 것이 이 책의 의도이다.제 1장 문제의 형태: 마가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자기 은닉마가복음의 연구에 있어서 브레데는 예수의 침묵명령이나, 비유로 말씀하심, 그리고 제자들의 무지함이 한 덩어리로 메시야 은닉과 연결이 되어 있다고 한다. 그것이 바로 브레데의 ‘메시야 은닉사상’이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의 비판 가운데 메시야 은닉주제가 다른 여러 주제들 중 하나라는 것이 분명해 졌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 주제가 마가복음의 내용 전개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믿는다.킹스베리는 이 책을 통해 주장하기를 마가에게 있어서 메시야 은닉은 성격상 “메시야” 은닉이 아니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에 대한 은닉이라고 보고 있다. 이 은닉은 예수가 첫 번 세례 받으심으로부터 십자가와 부활에 이르기까지 잘 유지되고, 마가는 이것을 “침묵명령”을 사용하여 유지시킨다. 이 명령에 제자들과 귀신들도 순종하며 기타 다른 방법으로는 막1.1.절의 편집적인 설명이 있다. 그리고 한편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 수 있는 사건에서는 사건의 당사자들의 무지함으로 인하여 비밀이 유지됨을 보여 주고 있다. 마가는 이 은닉을 위해 일반적인 방법 외에 다른 동기, 다른 주제를 가지고 있는 구절들에서도 그 개념을 심고 있다.(막4.10-12;11.27;12.1-12) 또 문학적 반어법 등도 사용한다. 그러나 이런 은닉과 별도로 유대인과 유대 지도자들은 그리스도, 유대인(이스라엘)의 왕을 믿지 않았다.예수의 하나님 아들되심을 은닉함으로 무엇을 기대하는 가에 대한 의문이 든다. 그 의문에 대하여 저자 킹스베리는 예수의 자기 은닉의 목적하는 바는 십자가상에 달려 돌아가시는 장면을 목격한 백부장의 입을 통하여, 복음서 초두(1.1)의 선언을 이끌어 내기 위함닉이 있음을 분명히 하며 마가복음의 기독론을 전개한다.제 2장 문제의 형태: 마가복음에 나타난 수정적 기독론수정적 접근 방법의 기본 논지는 “하나님의 아들”이나 “메시야” 칭호는 결점과 오류가 많고 그 의미에 있어서 불분명하기 때문에 수정이 요청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지난 20년간 마가의 기독론을 연구하는 북미 학자들 사이에 유행하였던 방법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수정적 접근을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과는 상관이 없는 영광의 신적 인간으로 묘사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를 수정하기 위해 마가는 자신의 십자가 신학을 사용하면서 특별히 “인자” 칭호를 부각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자”라는 칭호가 마가복음의 예수님을 드러내는 가장 적절한 칭호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정할 필요가 없는 유일한 칭호로 “인자”를 생각하는 것이다. “인자”라는 칭호는 가장 규범적인 칭호이며 예수님에 대한 다른 칭호를 “재해석”하도록 하여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정하신 신적 운명이 고난과 죽음이란 것을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그러나 킹스베리는 이러한 수정적 접근 방법을 반대한다. 그 이유는 이러한 북미 신학자들의 “인자” 이해는 “예수가 누구냐?”라는 정체성을 하나님의 관점과는 전혀 무관하게 판단하는 것이며 오히려 예수님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는 것을 반대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마가의 기독론에 대한 전승 비평적 접근 방법을 취한 불트만과 브레데에 이르는 하나의 기본적인 형태는 헬라의 “신적 인간” 개념으로 집약할 수 있는데, 이 신적 인간은 비록 인간이기는 하지만 신적인 것의 내주를 통하여 천재 또는 “초인”이 된 사람을 뜻한다. 그러나 킹스베리는 어느 누가 “신적 인간”이 1세기 헬라 종교에 있어서 고정된 개념으로 사용되었다고 분명히 주장을 할 수 있다 하여도 마가 기독론에 대한 신적 인간 접근 방법의 정당성에 대하서 분명한 의문의 갖고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전승 비평적 접근 방법이 아닌 문학 비평적인 복음 밖에서 찾는다는 것은 잘못된 출발이다.저자는 수정적 기독론자들의 방법을 네 가지로 비평한다. 먼저는 제2복음서 기자는 그의 복음서 서장의 수세 기사의 기록 목적을 결코 “잘못된” 또는 “불투명한” 빛 아래 두려고 한 것이 아니었고 둘째는 복음서 기자는 어느 경우에도 독자들로 하여금 인자 칭호를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 칭호를 수정하게끔 하였다고 주장하도록 지시하지 않았다. 셋째로, 복음서 기자는 그의 복음서에서 “신적 인간”이란 용어를 결코 사용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복음서 기자는 그 어디에서도 그가 그의 전승의 기독론에 반대의 입장임을 분명히 밝히지 않았다는 것이다.제 3장 마가의 기독론: 다윗적 메시야-왕, 하나님의 아들마가의 기독론을 탐구함에 있어서 마가가 던지는 끊임없는 질문은 바로 “예수가 누구인가?”이다. 그리고 그 고민의 결과 그 얻어진 답은 “다윗적 메시야-왕, 하나님의 아들”라는 것이다. 따라서 마가의 기독론은 그 성격상 왕적인 것이고, 그 중요한 칭호들로는 “메시야”, “다윗의 자손”, “유대인(이스라엘)의 왕”,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칭호들이 상호교호적으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킹스베리가 보는 관점에서는 분명한 구분이 있다. 특히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는 다른 세 칭호에 대하여 명확하게 구분이 되고 있다. 세 칭호는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하여 인간들의 평가적 관점을 드러내고 있다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인간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귀신들과 같은 초자연적 존재들의 예수의 정체성에 대한 평가적 관점을 나타내었다. 따라서 마가복음에 있어서 “하나님의 아들” 칭호만 초자연적 존재들이 예수께 대하여 적용한 유일한 칭호였다. 결국 수의 자기 은닉 주제의 중심에 위치하여 마가복음의 이야기의 흐름을 주도한 칭호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라는 것이다.“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와 은닉은 서술적인 면과 신학적인 면을 갖고 있다. 서술적인 면에서 본다면 이 주제의 목적은 예수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대로 여줄 것과 자신의 이야기가 막1.1을 밝히려는 노력임을 인정하여 줄 것을 믿었다. 하나님의 평가를 일방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로 하여금 자발적인 신앙의 고백이 있고, 나아가 하나님의 평가와 일치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그래서 마가는 예수를 "다윗적 메시야-왕, 왕적 하나님의 아들"로 소개한다. 그에 대한 가장 전형적인 표현은 "나사렛 예수"이다. 이 이름은 마가 이야기의 시작과 끝에 모두 사용되어(.:9; 16.6),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온 예수가 바로 하나님께서 그의 왕적 아들로 인정하시고 메시야 사역을 위하여 선택하신 분이시라는 것과 바로 그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하나님에 의해 다시 살리심을 받은 분이시라는 것을 마가는 강조했다.그래서 수세기사는 예수의 정체성에 초점이 있고, 시험기사는 그의 사역에 초점이 있다. 마가는 그의 이야기의 서두에서 예수를 왕적 하나님의 아들로 소개하고,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서도 예수를 왕적 하나님의 아들로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마가의 은닉사상은 끝까지 유지되면서 마지막으로 백부장의 입을 통해 터져나오게 한다. 백부장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바로 이해함으로 예수의 정체의 비밀을 간파한 첫 번째 사람이다.예수의 자기 은닉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면서 마가의 기독론을 연구한 저자는 결론적으로 메시야 은닉의 주제가 예수의 이야기를 통해서 예수에 대한 인간의 생각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하나님의 평가적 관점 곧 하나님의 생각에 일치하도록 바꾸어 놓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바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오직 그를 통해서만 종말론적 통치 영역에서 구원과 생명을 제공하시는 분익 때문이다. 이런 관점은 마가복음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가이드라인을 제공하고 있다.제 4장 마가의 기독론: 인자4장에서 킹스베리는 “다윗적 메시야-왕, 하나님의 아들” 칭호와 관련해서 “인자”라는 예수의 칭호가 어떤 뜻으로 마가복음에 사용되어졌는지에 대해서 입장을 밝힌다. 마가는 그의 이야기의 기준으로 오직 하나님의 평가적 관점을 철저히 나의 위엄의 칭호로 그의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있다. 마가는 “인자”를 사용하여 예수의 독특한 사역을 묘사하고 있으며, 예수는 그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에 관련하여 자신을 “인자”로 소개한다. 그리고 파루시아와 관련하여서도 자신을 “인자”로 소개했다. 그러므로 마가복음에 있어서 “인자”는 다른 어떤 인간에게가 아닌 예수께만 적용된 특수한 용어이다. 이 용어는 오직 예수의 입을 통해서만, 그리고 오직 이 형태로만(“인자”, “the Son of Man”), 그리고 오직 예수 자신만을 지칭하면서 사용되었다. 마가복음에 있어서 “인자”의 역할은 다른 중요한 칭호들의 용법 못지않게 중요한 것으로서 구약 예언들의 성취를 나타낸다. “인자” 칭호는 위엄의 칭호로 사용되어 예수님이 자신을 공적으로 나타내거나 “대중” 또는 “세상”의 견지에서 자신을 “사람” 또는 “인간”으로 나타내거나 대적 자들 앞에 그의 신적 권위를 나타내는 방편으로 사용되었다.“인자”는 공적 칭호로서 예수와 “세상”과의 관계에 집중하기 때문에 예수의 자기 은닉 주제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마가의 독자가 자신을 인자라고 말씀하신 “예수가 누구인가?”라고 묻는다면, 그 답은 그는 “왕적 하나님의 아들”(또는 보다 자세히 말해, “다윗적 메시야-왕,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 마가에서 하나님은 예수를 그의 아들로 “생각”하시고, 예수는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생각”했다. 자신을 공적으로, 다니엘 7.13의 성취로서 “인자”라고 하신 예수님과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신 예수님의 정체는 “왕적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파루시아 때 왕적 인자로서의 역할을 성취하실 예수님은 바로 왕적 하나님의 아들이다.마가복음의 예수에 대한 두 측면, 곧 왕적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와 인자로서의 예수는 마가 이야기의 전개에 있어서 상호 보충적-수정적이 아닌-성격을 지녔다. 인자적 측면은 외향적 성격을 지니면서 예수의 대중 또는 세상과의 관계에 주목하고 있고, 하나님의 아들적 측면은 내향적 성격을 지니면서 예수의 준다.
Ⅰ 서 론1. 연구의 목적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기독교의 중요한 토대가 되는 혁신적인 사건이다. 신학의 역사는 어떤 의미에서는 기독론 논의의 역사였고 앞으로도 기독론에 대한 논의는 끊이지 않을 것이다. 특히“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계속해서 거듭되며 도전되어 오고 있다.그리스도론은 “예수는 그리스도시다”라는 신앙고백의 해석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예수의 낮아짐과 높아짐에서 예수는 완전한 인간이요 완전한 하나님이라고 십자가의 신학을 전개한 본 회퍼를 구심점으로 시작된 1960년 이후의 신학계는 어느때 보다도 큰 변혁을 겪게 되었고 급변하는 제3세계의 신학자들은 이해와 관점을 달리하면서도 예수는 누구인가?대한 본질적 해명을 요구했다. 이러한 신학적 맥락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본 회퍼에게 가장 큰 신학적 영향을 끼친 칼 바르트의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에서 그 그누언적 출발점을 발견할 수 잇다. 따라서 바르트의 기독론이 현대의 행동적 기독론에 끼친 영향과 현대 신학의 기독론의 발전에 미친 영향을 밝히는 밝히고자 한다.2. 연구의 범위와 방법바르트는 그리스도론을 그의 조직신학인 교회 교의학에서 어떤 한권에 국한하여 전개하지 않고 전권의 기초로 다루고 있는데 특히 제 1권과 제4권에서 나누어 취급한다. 제1권에서는 주로 삼위일체 신론의 테두리안에서 그리스도를 논하고 있으나 제4권에서는 그의 사역인 화해론의 테두리 안에서 다루고 있다. 이에 대해 본 논문은 서론에 이어 일반적인 기독론을 서술하고 삼위일체론의 구조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인 양성이 어떻게 성육신 안에 내포되어 있는가를 고찰하며 마지막으로는 교회 교의학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바르트의 평가와 결론으로 마무를 하겠다.Ⅱ 기독론 중심의 신학1. 기독론 위치바르트의 기독론의 특징은 단순히 신론, 창조론과 나란히 하여 기독론 한 장 만을 다룰 수 있는 성격은 아니다. 그것은 그의 신학이 기독론적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기독론의 위치가 어떠함을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곧 교의학 전체를 뚫고 있는 하나의 맥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그의 의하면 칼케돈신조는 어떠한 오류에 빠지지도 않고 신비를 해소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따라서 그것은 기독론에 대한 최초적 결정으로 역사상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고 한다.바르트는 현대 기독론은 용서할 수 없는 오류를 범했다고 한다. 오히려 고대 교회의 기독론은 항상 타당했다고 보아 원칙적으로 그것을 받는다.)또 하나의 기독론의 문제에 하나인 것은 삼위일체 문제이다. 바르트는 성육신의 문제를 생각할 때 삼위일체를 염두에 두었다. 그는 삼위일체의 문제를 교의학의 서론에 즉 기독교인식으 처음에 두고 그것을 모든 기독교 신앙의 풀이의 토대로서 취급한 것이다. 그의 기독론은 철저하게 삼위일체 위에 있는 신학이다.바르트는 삼위일체론을 전개함에 있어서 계시의 하나님과 영원한 하나님 사이에는 차이가 없어야 한다고 하며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일어난 모든 사건은 한 주 하나님의 행동이어야 한다고 한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단지 그 뒤에 숨어있는 상징이나 익명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이 곧 영원한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바르트는 양태론과 종속론을 부정했다.3. 인본주의 신학에 대립하는 기독론 중심의 신학교회 교의학 전체를 볼 때 바르트 신학의 결정적인 특징은 그리스도 중심적인 데에 있다. 바르트는 본 교의학 서설 초두부터 교의학의 임무는 다음과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즉, 교회의 하나님에 대한 언어는 “교회의 본질”이요, 교회 신학의 규범이요, 척도인 예수 그리스도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결정적인 계시를 가르킨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14:6)이신 까닭에 신학의 지배적인 관심은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의미있게 하시는 분임을 증거하는 것이다.바르트의 기독론적 방법이 그의 신학을 이해하는 열쇠라고 주장할때, 우리는 그가 이 출발점을 점차적으로 확정짓게 되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교회 교의학을 쓰는 과정에서 그의 신학의 기독론적 출발점가 규범신 성부를 떠나서 추상적인 보편적 신 개념이나 궁극적인 존재에 관한 교리가 되어서는 안된다. 뿐만 아니라 자연, 문화, 역사, 인간 실존에서 유비해낸 하나님의 삼위일체성도 안된다. 바르트는 성경에서 우리가 삼위일체론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기를 계시하는 바 그의 동일성과 다양성을 이해하려고 할 때 우리는 삼위일체론의 문제에 부딪힌다.고 하였다.바르트의 삼위일체론은 다음과 같은 명제를 지닌다. (1)하나님은 그의 본질적 존재, 본체 혹은 본성에 있어서 하나이다. 그는 삼신론을 반대하여 무엇보다 하나님의 하나됨과 통일성을 강조한다. (2)전통적 삼위일체론을 따라 하나의 하나님 존재안에 3인격(위격)혹은 3존재양태가 있다. 그는 하나님은 한 분이지만 3실존 양태를 가지신 한 분이시다. 그리고 이들은 상호관계속에서 성부, 성자, 성령이시다.라고 말한다.2. 그리스도의 선재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함으로써 바르트는 입양(adoption)이나 의인화(personification)에 의해서가 아닌, 하나님의 화해하는 자기 계시에 의해서 주님으로 현시된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을 처음으로 가리킨다. 예수는 죄인들을 하나님과 화해시킴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맘씀을 듣도록 해준다. 창조와 비교해 볼 대에 화해는 새로운 사역이다. 그것은 인간의 사역이 아니며, 비인격적인 계시자의 사역도 아니고 존재의 제 2의 양태 속에 계신 하나님의 사역이다. 그런데 이는 성부 하나님과 관련하여 양태에서는 구별되지만 존재에서는 하나님이다.)바르트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계시 사건 이전부터 있는 하나님의 영원한 존재 안에 있는 것으로 본다. 그의 신성은 계시와 화해의 사건을 통하여 비로소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영원전부터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시와 화해가 그의 신성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신성이 계시와 화해를 형성한다.) 바르트는 여기서 그리스도의 선재와 현재의 우리와의 관계를 규명한다. 모든 시간 이전에 아버지로부터 태어났다는 구절에서 우리를 위하여 시의 신비안에서 제한된 표현으로 나타남을 밝히는 것이다. 성육신은 계시의 성격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과 인간되심(God - Manhood)의 개념을 나타낸다.말씀은 하나님의 창조적이고 화해하는 구속적 말씀이며 신적 성품과 존재에 제약됨이 없이 참여하는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다. 따라서 여기서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는 “참 하나님”이다.Ⅳ. 그리스도의 사역 : 화해론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관하여서는 그의 화해론에서 보다 충분히 논의된다. 그의 최종적인 작품은 [교회 교의학]을 결론짓는 화해론이다. 바르트의 화해론은 그 전제가 하나님의 계약이다. 하나님의 계약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이다. 따라서 바르트의 화해론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식이다. 즉 바르트의 화해론이 지니는 특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적으로 하나님과 인간적 그리고 객관적인 화해의 실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1. 화해론의 목적과 특징그의 아들 안에서 “이 세상을 자기에게 화해시키려는” 하나님의 목적은 - 이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 바르트의 전신학을 결정한다. 하나님의 본성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인간을 그의 언약의 파트너가 되게 하신 하나님의 피조물로 해석하는 제 있어서, 이스라엘에서 시작하여 교회 역사를 뚫고 계속되는 언약사의 해석에 있어서,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삶, 죽음 및 부활,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는 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업들의 연속적 효과는 죄인과 하나님 사이의 화해를 일으켰고 이들 사이에 개어잔 언약을 회복했다고 해석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통하여 세상을 자기와 화해시키셨다”는 화해론이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다.)바르트의 화해론이 지니는 특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적으로 하나님과 인간적 객관적 화해의 실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런데 비록 바르트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유일회적으로 성취하신 것을 통하여 모든 인생들이 칭의를 얻고, 성화되고, 부름을 받았다고 말하지만, 성령의 로서의 종’이라 부르고 ‘그리스도’의 높이 들리신 영광의 상태를 논하고 있다. 옛 교의학에서는 제사장적인 것을 ‘겸비의 상태’(status exinanitions)라고 하고 왕적인 것을 ‘들린 상태’(status exaltations)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셋째 상태, 즉 예언자적인 것을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 - 참다운 증인’ 이라고 부르고 예수와 그리스도를 합친 진리의 주가 되심을 논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세 가지 형태를 ‘내려오심’, ‘들리심’, 그리소 ‘보증’이 세 가지로 구분하여 속죄론을 화해론을 논하고 있다.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세 종류의 형태에다가 인간을 각기의 상채에 대비시켜 놓았을 때에 인간의 모습이 곧 죄된 인간에 틀림없는 것이다. 즉 교의학 제 4권 제 1부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의 순종’에 대하여 ‘인간의 교만과 타락’을 말한다. 바르트는 겸손히 종이 되신 주님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제시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심으로, 스스로 낮추시고 인간의 영역에 들어오셨다.) 제 4권 제 2부에서는 ‘사람의 아들의 들림’에 대하여 ‘인간의 추락과 가련함’을나타낸다. 바르트는 주님이 되신 종 예수 그리스도를 서술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에 의하여 들리움을 받은 인자이다. 인간의 죄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는 것과 상반된 것으로써 그것은 비참함과 나태함이다.) 그리고 제 4권 제 3부에서 바르트는 참 증거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진술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예언자적 사역이다. 예수는 중보자이고 화해자이다. 쪼한 그는 계시자, 즉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는 계시자이다. 그는 생명의 빛이며, 계시이며, 진리이다. 그는 완성된 계약에 대한 증거자이다.) 중보자의 영광’에 대하여 ‘인간의 ‘거짓과 멸망’이 진술된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의 모습이 뚜럿하게 나타난다. 예수가 겸손하게 내려오실 때에 인간은 교만하게 올라가려고 하고 그리스도로서 올려 갈 때에 인간은 여지없이 떨어지게
목 차Ⅰ 서론 ------------------------------------------------------1Ⅱ 목회사역과 사회 ---------------------------------------------11 기독교 사회복지의 개념-----------------------------------------12 목회와 사회복지의 관계-----------------------------------------2Ⅲ 목회사역과 노인복지-------------------------------------------31 노인의 개념--------------------------------------------------31) 노인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32) 노인에 대한 성서의 이해----------------------------------------32. 노인복지의 개념 ---------------------------------------------41) 노인복지시설------------------------------------------------42) 재가노인복지사업 --------------------------------------------43. 성서에서 나타난 노인복지---------------------------------------44. 현 교회에서의 노인복지 현황 및 문제점-----------------------------51) 교회사업 참여 현황--------------------------------------------52) 노인복지사업 현황에 대한 문제점---------------------------------65. 대처방안 ---------------------------------------------------6Ⅳ 목회사역과 청소년 복지----------------------------------------71. 청소년의 개념(정의)----------------까지 파고 들어가 이제는 하나님의 나라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그 안에서 인간을 해방시켜 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볼때 목회와 사회복지의 관계는 인간이 사회와 원만한 조화 속에서 만족스러운 생활을 영위해 나갈 수 있게 도우는 전문적 사역이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Ⅲ 목회사역과 노인복지1 노인의 개념1) 노인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국어 대사전에서 ‘노인’이라는 항목을 찾아보면 ‘늙은이’ 즉 ‘늙은 사람’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정의를 내리지 않고 불분명하고 애매한 정의로서 노인에 대한 분명한 의미를 설명해 주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노인이란 단순히 나이만을 가지고 구별할 수도 없으며, 또한 사회의 경제적, 문화적 배경과 전통과 습관에 따라 노화과정의 개인차가 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노인은 생리적, 신체적 기능의 감퇴와 더불어 심리적인 변화가 일어나 개인의 자기유지 기능과 사회적 기능이 약화되어 있는 사람을 말하고 있다.) 참고로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노인복지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65세 이상자를 노인으로 지칭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이다.2) 노인에 대한 성서의 이해성서에서 노인에 대한 구약과 신약의 의미를 살펴보면, 먼저 구약에서 자켄(???; Zaqan)은 “수염이 희다”는 뜻으로 60대 노인을(창48:10; 삼하 19:32; 욥 12:20; 32:9; 시 72:18; 렘 6:11), 세바(???; Seba)는 “흰머리”란 뜻으로 70대 노인을(창 15:15; 왕상 14:4; 시 71:18), 야쉬쉬(????)는 “흔들린다”로 80대 노인을(욥 15:10) 칭하고 있다.) 성경에서 이러한 장수는 축복의 개념이며(창 15:15, 출 20:12,등)), 노인은 지혜의 상징(욥 15:10, 신 32:7)으로 공경하라고 명하고 있다. 하지만 성경은 이러한 노인의 긍정적인 모습과 아울러 부정적인 모습도 보여주고 있는데 그것은 곧 신체의 노쇠에서 오는 연약함과 우울한 모습이다.)한편 신약에서 게론(γερον)은 자녀 출산이 불가능한 지순례, 성경학습 등의 프로그램을 노년기에 적합하도록 구성하여 제공해 줌으로서 그들의 신앙의 질을 높여줄 뿐 아니라, 이로 인해 자아의 가치관을 새로이 정립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할 것이다.요컨대, 교회는 시대적 변화에 따라 선교의식을 새롭게 하고 지역사회와 유리되지 않는 노인복지의 선교방법을 모색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교회는 교회 내 인적자원(기능별, 직능별 자원봉사)과 물적자원(재정,시설)을 자세히 조사하여 노인복지를 위한 복지사업에 적극 참여할 수 있도록 교회조직과 구조를 재정비하고, 교회가 속해 있는 지역에서 지역의 단체들과 네트웍을 만들어 보다 “전문적이고 지역성 있는 목회”를 해야 할 것이다.Ⅳ 목회사역과 청소년 목회1. 청소년의 개념(정의)우리나라의 청소년관련법규에 보면, 민법은 20세 미만을 미성년으로, 아동복지법은 18세 미만을 요보호 대상으로, 근로기준법에서는 근로소년을 18세 미만으로, 소년법에서는 20세 미만을 범죄소년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연령층이 대체로 12-13세로 부터 20세경까지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략적으로 청소년의 개념을 정리하여 보면 청소년은 아동과 성인의 중간, 즉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아동에서 성인으로 되어 가는 과도기적 존재로서 대략 9-13세에서부터 22-24세의 연령에 해당하는 자라고 할 수 있다.2. 청소년 목회의 성경적 근거성경에는 청소년을 가리키는 많은 용어들이 있으며 청소년에 관한 이야기들도 많다. 그 한 예가 구약의 잠언이다. 이 책은 인생의 초반기에서 아직 범죄 할 줄을 모르는 어린이나 인생의 황혼기에 있는 늙은이들을 위해서 기록된 것이 아니고, 이제 막 인생을 앞두고 살아가야 할 젊은이들을 위해 주로 기록한 책이다.1)구약 성경에 나타난 청소년 목회히브리 민족의 교육 대헌장이 창세기 18장 19절에 있다.) 출애굽 시대의 청소년 목회는 민족적 차원에서의 신앙교육이었는데 그 방법은 가정에서 부모가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이러한 말씀들은 하나님께서 어른이 된 의 정의장애의 과정은 질병- 손상- 능력부전- 불리로 이어진다.)손상은 1차 장애로 심리학적, 생리학적 또는 해부학적 기능이 일부 상실되었거나 비정상적인 상태를 말하고, 능력부전은 2차 장애로 손상으로 인하여 인간에게 정상적이라고 생각되는 방법이나 범위에 속하는 행동능력이 일부 제약되거나 결여되고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며, 불리는 3차 장애로 손상이나 기능제약으로 말미암아 그 개인으로서 정상이라고 인정되는 사회적 역할 수행이 제한되거나 불가능해지는 상태를 말한다. 이것은 사회적 장애를 말한다.이와 같이 장애인의 정의를 종합해 보면 장애인이란 절대적인 개념이 아니라 상대적인 개념인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장애인의 정의는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으나 일반적인 개념으로 정의를 해보면 첫째, 신체적, 정신적인 면에서 기능적인 장애를 가지며 둘째, 이러한 장애로 사회생활이나 직업생활을 영위함에 있어서 영속적인 제약을 받는 사람이다.)2. 장애인의 분류1) 장애인의 발생시기에 따른 분류: 선천적 장애인과 후천적 장애인2) 장애의 경도에 따른 분류: 경증장애인과 중증장애인으로 분류, 우리나라에서 현재 시행하고 있는 장애인의 복지법 시행령에서는 장애인을 장애의 정도에 따라 6등급으로 기준을 상세히 정해 구분하고 있다.3) 장애의 중복여부에 따른 분류: 단순장애인과 중복장애인으로 분류하기도 하지만 일반적인 분류방법은 장애의 형태나 유형에 따른 분류방법이다. 2분법으로 분류해보면 신체와 정신의 어느 부분에 장애가 있느냐에 따라 신체장애인과 정신장애인으로, 4분법으로 분류해보면 지체장애인과 청각, 언어장애인, 시각장애인, 정신지체장애인 등이다.3. 장애인 현황2005년 6월말 기준 보건복지부 전국장애인 등록현황에 따르면 남성장애인은 109만3천650명, 여성장애인은 60만5천679명으로 우리나라 등록장애인은 총 169만9천329명이다.)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질병이나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신의 저주를 받은 사람으로 취급하는 등 잘못된 인식으로 많은 장애인을 집안에 숨기며 생활 때문에 장애인 선교는 선교회 같은 곳에서나 하는 일로 여기는 것이다. 즉 교회의 일이 아니라 선교회와 같은 준교회의 일이라는 것이다.)넷째로 오늘날 교회가 장애인문제에 대해서 무관심하고 소극적이며 무력한 이유 중에 가장 큰 이유로는 장애인 분야에 대한 교역자 또는 목회자의 일반적인 무지와 무관심 그리고 소극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Ⅵ 목회사역과 이주노동자 복지국내 이주노동자들이 우리나라에 등장한지 이제 10여 년을 훨씬 넘어 섰다. 1980년대 후반의 경제성장에 따라서 심각한 인력난을 겪는 과정과 1988년의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언론을 통해 한국의 경제 발전이 알려 지기 시작했다. 특히 아시아의 여러 가난한 나라에 한국의 경제발전이 알려 지면서 이주노동자들이 코리안 드림을 꿈꾸면서 본격적으로 한국 땅에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최근 우리나라에 거주하는 이주노동자들의 수가 산업 연수생과 불법 체류자를 모두 합하여 50만 명이 넘는 실정이다. 이주노동자들의 양적 증가와 더불어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에 대한 심각한 인권과 인종 및 문화적 차별과 학대. 착취, 억압, 저임금 등의 문제가 사회적으로 심각하게 등장하고 있다.교회는 이러한 상황 가운데 있는 이주노동자들을 단순히 노동력 사용의 대상자만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야 할 사회구성원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교회가 이주노동자 문제를 해결하고자 할 때 가장 우선적인 과제는 이 문제에 대해 신앙적 관점을 분명히 하는 일이다. 이 글에서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문제가 있다. 그것은 이주노동자들을 인권 보호의 대상으로 보아야 할 것인지 아니면 선교 대상으로 보아야 할 것인지 고민스럽고 조심스러운 물음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질문은 교회가 이 문제를 접근하며 해결하는데 그 활동의 범위와 방향을 결정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지난 10년여 간의 이주노동자문제를 신학적이며 신앙적인 관점에서 조명하고 나아가 복지 선교적 측면에서 역할을 살펴보고자 한다.1. 이주노동자의 현황과 그들이 겪는 문제1이다.
10가지 이단 사항들16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은 너희에게 헛된 것을 가르치나니 그들의 말한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 17항상 그들이 나를 멸시하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평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며 또 자기 마음의 강퍅한 대로 행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르기를 재앙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였느니라 18누가 여호와의 회의에 참예하여 그 말을 알아들었으며 누가 귀를 기울여 그 말을 들었느뇨 19보라 나 여호와의 노가 발하여 폭풍과 회리바람처럼 악인의 머리를 칠 것이라 20나 여호와의 노는 내 마음의 뜻하는 바를 행하여 이루기까지는 쉬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말일에 그것을 나 여호와의 노는 내 마음의 뜻하는 바를 행하여 이루기까지는 쉬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말일에 그것을 완전히 깨달으리라 21이 선지자들은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달음질하며 내가 그들에게 이르지 아니하였어도 예언하였은즉 22그들이 만일 나의 회의에 참예하였더면 내 백성에게 내 말을 들려서 그들로 악한 길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게 하였으리라 23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가까운데 하나님이요 먼데 하나님은 아니냐 24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기를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25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에 내가 몽사를 얻었다 몽사를 얻었다 함을 내가 들었노라 26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이 언제까지 이 마음을 품겠느냐 그들은 그 마음의 간교한 것을 예언하느니라 27그들이 서로 몽사를 말하니 그 생각인즉 그들의 열조가 바알로 인하여 내 이름을 잊어버린 것같이 내 백성으로 내이름을 잊게 하려 함이로다 28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몽사를 얻은 선지자는 몽사를 말할 것이요 내 말을 받은 자는 성실함으로 내 말을 말할 것이라 겨와 밀을 어찌 비교하겠느냐 29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30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므로 보라 서로 내 말을 도적질하는 선지자들을 내가 치리라 31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그들이 혀를 놀려 그가 말씀하셨다 하는 선지자들을 내가 치리라 32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거짓 몽사를 예언하여 이르며 거짓과 헛된 자만으로 내 백성을 미혹하게 하는 자를 내가 치리라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으며 명하지 아니하였나니 그들이 이 백성에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1 그들의 말한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 몰몬교를 말 할 수 있겠다. 몰몬교도들은 자신의 교주가 말한 것에 대해 믿고 있는데 몰몬교의 교주인 요셉 스미스는 아무런 역사적 근거를 찾아 볼 수 없는 몰몬경을 믿게 하고 있다. 이들의 주장을 볼때 위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계시와는 전혀 무관하게 사람들에게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세뇌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2 마음이 강팍한 사람 : 마음이 강팍한 사라들은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들을 꼽을 수 있겠다. 이들은 강팍한 마음을 가지고 자신들의 교리와 이치에 맞지 않으면 폭력으로 모든 것을 잡으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특히 다른 종교에 대한 이해를 전혀 하지 않으려고 하는 모습에서 위의 마음이 강팍하다라는 것을 표현할 수 있겠다.3 나는 가까운데 하나님이요 먼데 하나님은 아니냐 : 위에서 말하는 것과 일치하는 이단을 말하자면 자연주의를 말하겠다. 자연주의는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것 자체를 부인하고 있다 하지만 성경 말씀에서 정확히 말하고 있는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과는 굉장히 거리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살아계시고 우리의 옆에 항상 계시는 분임을 믿는다.4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기를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 위에서 말하는 것과 일치되는 이단 종교를 말하자면 여호와 증인을 들 수 있겠다. 여호와 증인들은 자신들의 활동범위를 최대한으로 좁히고 자신들이 추구하는 구원의 숫자만을 채우기 위해 조용히, 하지만 많은 사람들을 현혹하기 위해 혈안에 되어 돌아다닌다. 특히 이들은 믿는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집중적으로 포교활동을 하면서 자신들의 본색을 드러내지 않고 자신들의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5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이 언제까지 이 마음을 품겠느냐 그들은 그 마음의그 마음의 간교한 것을 예언하느니라 : 위에서 말씀하고 있는 간교한 것을 예언한다는 것과는 라엘리안무비먼트에서 말하고 있는 것에 대해 경고 하고 있는 것 같다. 라엘리안 무브먼트는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위해 특히 성적인 것을 이용해서 사람들을 유혹하고 끌어들이고 있다. 이는 그 마음의 간교함을 드러내는 것이고 그 것을 위해 많은 사람들을 성적으로 문란한 생활을 하도록 조장하며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고 있다.6 바알로 인하여 내 이름을 잊어버린 것같이 내 백성으로 내이름을 잊게 하려 함이로다 : 위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대부분의 이단 종교들이 나타내고 있는 부분인다. 특히 대순진리회. 라엘리안 무브먼트, 통일교, 등등을 들수가 있다. 이들의 특징은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고 하나님의 권한을 침해하고 있다. 이들은 그들의 교조, 또는 교주가 하나님이라고 속이고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아주 잘못된 행위들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모습 가운데는 하나님의 모습과는 너무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7 몽사를 얻은 선지자는 몽사를 말할 것이요 : 이 말씀은 통일교와 JMS에서 볼 수 있는 것을 알수 있다. 물론 대 다수의 이단 종교의 교주들이 무슨 말인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이해 되지 않는 말들을 한다. 그리고 그들이 주장하는 말들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이 처럼 이들은 꿈속에서의 삶을 현실화 하려고 하고 이들이 추구하는 것들은 너무나 허황된 일들이라 말할 수 있겠다.
- 목 차 -Ⅰ서론---------------------------------------------1Ⅱ 야웨 신앙의 기원과 특징-----------------------------11 겐족기원설-------------------------------------------------22 이스라엘의 고유한 제의제도------------------------------------2A 유월절 제의와 희생제의---------------------------------------------3Ⅲ 야웨와 가나안 신들의 속성------------------------------31 야웨의 거룩하신과 가안안 만신전의 거룩---------------------------32 창조우 야웨와 가나안의 풍요신----------------------------------43 야웨와 하나님의 전쟁-----------------------------------------44 유일하신 하나님 야웨-----------------------------------------55 야웨와 엘로힘-----------------------------------------------56 야웨와 바알-------------------------------------------------67 야웨와 아세라-----------------------------------------------6Ⅳ 야웨신앙의 토착화-----------------------------------61 기드온과 여룹바알---------------------------------------------62 이세벨과 바알 제의--------------------------------------------73 여로보암의 송아지 상-------------------------------------------8Ⅴ 결론---------------------------------------------8참고문헌Ⅰ서론야웨신앙과 계시적인 하나님에 대한 인식혹은 야는 신이다 라고 해석한 것과 달리 올브라이트는 이 구절들이 신은 지금 임하소서 또는 이러저러한 것을 주소서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화이틀리는 Yw를 신의 이름으로 간주하며 야웨와 동일시한 것 자체가 의심스럽고 지적하고 있다.)1 겐족기원설모세가 가졌던 야웨에 대한 개념이 조상들의 하나님 개념의 연장선상에 있었을 것이고 그가 이스라엘이 전혀 모르던 신을 소개한 것은 아니지만 어찌되었거나 그를 통해서 계시된 하나님 개념은 매우 새로웠을 것이며 모세 이전에 이스라엘인들이 야웨를 알았다는 사실은 쉽게 확인되지 않고 있다. 출애굽기 3장에는 모세가 광야의 떨기나무 가운데서 야웨를 만나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 장면에서 모세는 하나님을 처음으로 만나게 되며 야웨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알게 되는데 이때 비로서 야웨 조상의 하나님과 동일시 된다. 한편 모세가 야웨를 알게 된 사건을 계시적인 사건으로 이해하지 않고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가 속한 겐족 제의에 참여했던 모세가 겐족으로부터 야웨를 히브리인의 신으로 받아들인 뒤 야웨신앙이 시작되었다는 겐족기원설)은 (1)모세는 야웨신앙을 겐족으로부터 알게 되었는가? (2)이드로가 야웨의 제사장이었는가?라는 질문과 관련된다. 첫 번째 질문을 바꾸어 말하면 야웨신앙이 겐족으로부터 야웨라는 이름을 알게 되었으며 유다지파와 시므온지파는 모세와 함께 이집트를 탈출하지 않았고 출애굽할 무렵 가나안 남부 가데스 바네아 근처에서 반유목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그곳에는 이미 유다와 시므온 이외에도 옷니엘, 갈렙, 레위, 기르고 겐족이 6부족 암픽티오니를 구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야웨신앙에 대해여 알고 있었던 이들은 레위인인 모세가 그들에게 야웨신앙을 전했을 때 생소하게 느끼지 않았다고 한다. 모세가 그들에게 전한 것은 새로운 신이 아니라 새로운 신앙이었다는 것이다. 겐족기원설은 문서가설 및 암픽티오니 가설과 밀접하게 괸련되어 있는데 이 사실은 여러 가지 점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모세의 장인 이드로는 미디안인의 사제라고 불렸는데 대부분 이것이다.가나안에 정착하기 오래 전부터 유월절 제의가 행해졌고 광야에서 체류하던 동안 발전된 희생제의보다 더 오래되었다고 보이는데 유월절 제의의 가장 오랜 형태는 가장이 제단없이 가족과 하게 드리는 가족제의였다. 이런 유월절 제의의 가족적인 성격은 요시야왕이 제의의 중앙화를 추진했던 왕정 말기까지 남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흘 길 떨어진 곳에 가서 희생을 드리겠다고했던 모세의 요구는 가족단위로 이루어졌던 유월절 제의와는 다른 제의를 드리겠다고 한것이 거의 분명하며 바로가 이 요구를 거부한 사실로 보아 이것은 이스라엘 고유의 공적인 종교 제의였을 것으로추정할 수 있다. 또한 유월절 제의에서 보이는 반유목적인 정황은 가나안 정착 이전 배경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오랜 전통을 가진 반 유목민의 제의는 모세에 의해 재해석되고 새로운 의미와 형식이 부여되었을 것이다.가나안에 정착하기 오래 전부터 유월절 제의가 행해졌고 광야에서 체류하던 동안 발전된 희생제의보다 더 오래되었다고 보이는데 유월절 제의의 가장 오랜 형테는 가장이 제단없이 가족과 함께 드리는 가족제의였다. 이런 유월절 제의의 가족적인 성격은 요시야왕이 제의의 중앙화를 추진했던 왕정 말기까지 남아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흘 길 떨어진 곳에 가서 희생을 드리겠다고 했던 모세의 요구는 가족단위로 이루어졌던 유월절 제의와는 다른 제의를 드리겠다고 한 것이 거의 분명하며 바로가 이 요구를 거부한 사실로 보아 이것은 이스라엘 고유의 공적인 종교제의였을 것으로 추정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이 가나안 정착 이후 역사에 출현한 종족적 종교적 정체성을 가지지 못한 국가라는 견해들을 비판적으로 소개했는데 이 견해들의 취약점들이 드러나면서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입증할 수 있는 기회는 더 넓어지게 되었다.Ⅲ 야웨와 가나안 신들의 속성1 야웨의 거룩하신과 가안안 만신전의 거룩야웨의 속성 가운데 첫 번째는 거룩함이다. 야웨의 거룩함은 금기가 되는 행동을 수반한다. 고대 이스라엘 신앙 가운데 야웨 하나님의 거룩함과 관 야웨가 인간의 역사에 집접 개입했던 가장 놀라운 구원행위이며 이집트의 바로도, 마술사도, 신들도 그의앞에는 더 이상 힘을 쓸 수 없다는 창조행위인 것이다. 창조주 야웨는 온 우주의 창조주이며 인간에게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역사에 개입한다. 그러나 가나안의 신화 가운데 나타나는 신들은 온 세계의 주, 우주의 신, 모든 것들 위에 있는 존재가 아니며, 야웨처럼 인간에게 관심을 갖고 있는 신이 아니기 때문에 야웨와 다를 수 밖에 없는 것이다.3 야웨와 하나님의 전쟁여호수아서에는 이스라엘이 여리고 성의 군인은 물론 남녀노우 심지어는 우양과 나기까지도 진멸했으며, 아이성은 가축을 제외하고 거주민들을 진멸했다는 기록이 있다. 가나안 남쪽의 성읍을 점령할 때도 위와 같이 진멸하고 한 사람도 남기지 않았다고 반복된다. 가나안의 여섯 족속들 즉 가나안, 아모리, 헷, 브리스, 여부스, 히위 히람은 한 사람도 남가지 않고 죽임을 당했다. 하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진멸사상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점령해 들어가면서 일어났다.진멸사상은 야웨가 직접 전쟁을 주관하는 야웨의 거룩한 전쟁에서만 나타난다. 이 전쟁의 주인은 야웨 자신이며 적군은 이스라엘의 적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는 혼돈과 두려움이다.이런 전쟁을 야웨의 전쟁이라고 하며 야웨는 싸우는 용사라고 표현된다.가나안 족속들은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던 하나님의 대적자들이다. 이 이방신을 섬기던 족속들은 야웨신앙을 파괴하고 오염시키는 자들이었기 때문에 진멸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의 전쟁은 이방신과 종교에 동화를 방지하고 야웨신앙의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한 이방종교와의 단절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전쟁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가나안 문화와 구별되기 위한 목적을 가졌다는 사실로부터 다시 한번 이스라엘이 가나안 지역에 정착하면서 가나안 문화와 종교를 수용하는 문제를 매우 심각하게 생각했다는 사실을 확인 할 수 있다.야웨를 만군의 주라고 부르는 것도 이것과 관련되어 있다. 구약에서 야웨를 만군의 주라고 부르는 표 가나안 종교 가운데 나타나지만 구약의 엘로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독특한 표현임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올브라이트는 가나안에서 파라오를 나의 신들, 나의 태양신이라고 언급하는 것에 주목했다. 이것을 가나안인들이 제의적 표현 가운데서 차용한 것이라고 보면서 가나안인들이 그들의 신 가운데 하나를 모든 신들을 합한 총체적인 존재, 즉 만신전 전체에 해당하는 것으로 설명했는데 이스라엘인들도 신들이라는 의미를 가진 엘로힘을 보편적인 개념을 가진 그들의 하나님으로 수용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올브라이트는 엘로힘이 이스라엘의 엘로힘이 가진 교유한 성격을 설명하기 어렵게 될 것이다. )6 야웨와 바알엘이 가나안 만신전의 최고신이었고 구약에서 하나님을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된 것처럼 바알도 폭풍의 신 바알을 가리키기도 했고 주를 뜻했기 때문에 신의 이름을 구성하는 요소가 되기도 했다. 바알이 신의 이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 관계에 잇어서의 주인, 소유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결혼 여자의 남편, 가장, 심지어는 동물들의 주인이라는 뜻으로도 쓰였기 때문에 바알과 관련된 논의는 상당히 복잡하다.바알은 엘의 아들로 나타나기도 하고 다곤의 아들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 모순된 일이 고대의 신화 속에서 종종 나타난다. )바알은 가나안의 푸용와 폭풍의 신이다.야웨가 엘의 많은 속성을 창조적으로 수용한 것처럼 바알의 속성 가운데도 수용한 부분이 많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바알과 관련된 전승과 속성을 수용하면서 자신들의 고유한 것을 포기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바알이 야웨의 이름을 대신해서 쓰인 경우도 없다.7 야웨와 아세라아세라는 가나안과 이집트에서 거룩, 창조의 여신으로 불리기도 했으나 나체의 창녀라고 묘사되었고, 성적인 의미와 기능을 가지고 있던 여신이었다. 여신들과 관련된 신화와 대부분의 가나안 신화들은 비도덕적 성행위와 관련된 내용을 포함하고 있으며 여신들은 매우 잔인하게 그려졌다. 만신전의 모신인 앗라는 엘의 아내이며 아디랏, 혹은 엘랏이라고 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