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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부고속도로 개통 이전과 이후의 수송구조의 변화
    목차서론본론1.경부고속도로 이후 수송구조의 변화2.문제점결론서론1960년대는 국토개발 및 경제개발계획으로 산업이 급속히 성장함에 따라 수송수요 또한 급속히 늘어났다. 수송난은 우리나라의 고도성장을 저해하는 요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철도중심의 육상교통체제로는 이 수송난을 해결할 수 없었기에 육상교통체제를 도로중심으로 전환시키기는 것을 모색하게 된다. 그 결과 생긴 것이 유료고속도로계획이었고 이 계획은 제 1차 경제개발계획에 포함되었다. 하지만 이때의 유료도로라는 것이 고속도로의 뜻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경부고속도로는 제 2차 경제개발계획의 시기에 건설되어진다. 하지만 제 2차 경제개발계획의 내용엔 고속도로 건설계획이 없었고 계획이 시작 된지 2개월만인 1967년 경인고속도로가 착공되고 1968년 경부고속도로가 착공됨으로서 고속도로사업은 경제개발계획과 별개로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경인고속도로가 서울과 인천지역을 주 대상으로 한 것에 비해 경부고속도로는 전국적 규모의 산업발전을 목표로 계획되어진 점에서 그 의미가 있다. 세계에서 가장 싼 건설비로 가장 짧은 건설시기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는 경부고속도로는 단군이래로 최대의 국책사업이라는 평을 받게 되는데, 건설기간은 1968년 2월 1일 착공하여 1970년 7월 7일 전구간 428KM를 준공함으로서 3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건설경비만 430억원이었다. 이 430억원은 경부고속도로 계획당시인 1967년 국가전체예산의 약23.6%에 이르는 금액이었다. )그리고 당시 철도를 이용한 서울-부산간 여행시간이 6시간대인 것에 비해 경부고속도로는 4시간대를 기록함으로서 여객뿐 아니라 수송, 물류체계를 철도중심에서 도로 중심으로 바꿔놓는데 큰 역할을 했다. 즉 경부고속도로는 전국토의 일일 생활권시대의 개막, 지역 개발과 경제발전 촉진, 인적ㆍ물적 자원의 지역 간 이동, 국민의식향상과 평균화 등 우리 삶의 질을 높였다는 데에 그 의의가 있다. ) 그럼 다음부터는 철도와 고속도로를 비교함으로서 경부고속도로인해 수송의 중심이 변화하는 과정과 현재 발전된 도로수송의 문제점 및 해결방안등을 살펴보겠다.본론1. 경부고속도로 이후 수송구조의 변화구분철도자동차해운196248.645.95.5196351.342.35.4196443.149.87.1196545.548.95.6196647.347.45.3표 60년대 수송분담율(단위:%)철도는 경부고속도로가 만들어지고 도로망이 만들어지기 이전의 대표적 운송수단이었다. 하지만 일제시대에는 철도는 그다지 보급이 제대로 이루어 지지 않은 교통수단이었다. 오히려 자동차를 이용한 화물의 수송이 활발히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하지만 한국전쟁으로 도로와 교량의 대부분이 파괴된 상황에서 철도를 이용한 물자의 보급이 발전하게 되었었고 이 상황은 1960년대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전후 복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전후 1955년 신진공업사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자동차인 ‘시발’을 생산한 것을 시작 1962년 ‘자동차공업보호법’이 공표되면서 자동차시장은 급성장하게 되고 대량생산에 성공하게 된다.) 하지만 아직 도로사정은 체계화지 못한 상태였다. 1962년 ‘자동차공업보호법’ 공표 후부터 故 박정희대통령이 고속도로사업을 구상하기 직전인 1966년까지의 수송분담율을 보면 표1)과 같다. 표1을 보면 철도를 이용한 수송이 자동차를 앞서있지만 자동차의 비율이 점점 높아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구분철도공로해운항공20046.676.417.00.120036.274.619.20.120006.773.619.60.119959.768.621.70.1199017.263.819.00.1198523.262.414.30.1198028.460.511.10.1197530.760.88.50.1197030.359.310.50.1표 경부고속도로 건설 이후 수송분담율(단위:%)철도가 당시로서는 수송의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지만 발전하는 자동차 산업과 자동차를 이용한 수송의 최대 장점인 Door to door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故박정희 대통령은 발전하고 있었고 앞으로도 발전할 산업을 위해 그리고 수송의 원활한 해결을 위해 고속도로건설을 생각하게 되었고 그 결과로 나타난 가장 큰 사업이 경부고속도로인 것이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직후인 1970년 이후 수송분담율의 차이를 보면 표2)와 같다. 이처럼 도로를 통한 수송의 비율이 커지는 데는 여러 요인이 있다. 철도를 이용한 수송은 미리 놓여진 궤도 이외 이동이 불가하여 자유로운 이동이 제한되며 사적소유가 불가능하고 공공서비스 부분이여서 경영의 간섭이 많아 채산성을 맞추기 어렵다.) 하지만 도로를 이용한 지동차의 수송은 신속정확한 문전 대 문전 수송(Door to door service)이 가능하고 도로만 있으면 장소ㆍ시간을 불문하고 이동할 수 있는 기동성, 집하ㆍ운송ㆍ배달을 다른 수송수단의 매개 없이 스스로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또한 근래에 와서는 운송업체간 경쟁격화로 인한 서비스의 증대, 운송계약의 유연성의 증대로 업주들이 도로수송을 선호하고 있고 공장의 수도권이전이 늘어나면서 철도수송이나 연안해송을 통한 수송이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의 중심에 있었던 것은 경부고속도로인 것이다. 즉 우리나라 수송구조가 철도중심에서 도로중심으로 변화하는 것의 출발점은 경부고속도로건설로 인한 것이었다. 2004년 기준 도로의 총연장은 100,277.8KM 이고 철도의 총연장은 3,374.1KM 이다.)2. 문제점하지만 경부고속도로 인해 수송의 구조가 철도 중심의 수송구조에서 도로중심의 수송구조로 변한 것은 분명 장점이 많다. 하지만 현재에 와서 철도를 이용한 수송이 다시 각광받고 있는 추세이다. 왜 그럴까? 먼저 현재 너무 증가된 차량에 의해 야기되는 교통체증의 문제이다. 교통체증으로 인한 사회비용의 낭비 -수송시간의 증가와 낭비되는 유류 - 는 현재 큰 골칫거리가 되고 있다. 그에 비해 철도를 이용한 수송의 경우는 출발시간과 도착시간이 정확하고 정체되는 일 없이 목적지까지 수송된다.또 한가지는 환경오염의 문제이다. 이미 자동차로 인한 대기오염의 문제는 여러 기관에서 확인 되었다. 현재 수소자동차와 하이브리드 자동차가 시판되어 있지만 문제는 트럭의 경우이다. 트럭의 경우 경유를 사용하는 디젤엔진을 사용함으로서 대기오염의 주범이 되고있는 것이 사실이다.환경오염과 더불어 발생되는 문제는 에너지의 문제이다. 자동차를 이용한 수송의 경우 에너지 효율이 철도의 10분의 1가량으로 매우 좋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은 고유가시대에 매우 치명적인 단점으로 지적되고 있고 현재 높은 유류비로 인한 -특히 트럭 운수업자들 - 반발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결론경부고속도로이후 여러 차례 고속도로 건설과 국도의 확ㆍ포장이 있었고 예전과는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도로망이 발전했다. 하지만 앞서 말한 이유 등으로 현재 철도가 다시 주목 받고 있다. 그리고 고속철도의 도입으로 철도를 이용한 수송을 정부가 장려하고 있다는 것이다. 출발시간과 도착시간이 정확한 철도와 뛰어난 기동성을 가진 도로수송의 접목을 시도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미 고속철도 개통으로 인해 고속철도구간의 고속도로 이용율은 약 평균적으로 약 4.1%감소 한 것으로 나와 있다.) 그리고 고속철도는 호남권에 큰 발전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예상된다. 하지만 도로망의 확대는 국가기반사업의 중심이라는 것은 아직 변함이 없고 앞으로도 도로를 통한 물류ㆍ수송은 발전 할 것이다.
    사회과학| 2007.06.07| 5페이지| 1,000원| 조회(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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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긍정의 힘을 앍고
    이번 리포트는 조엘 오스틴 목사의 ‘긍정의 힘’을 읽고 독후감을 쓰는 것입니다. 저는 이번 리포트에서 책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제외하고 제가 이 책을 읽고 느낀 점만을 쓰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책 내용의 전반적인 줄거리를 쓰는 것만 해도 한페이지가 넘어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조엘 오스틴 목사가 지은 이 책은 희망을 잃은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에게 용기를 심어주는 의도로 지었습니다. 본문 내용을 살펴보면 지치고 힘든 우리 생활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믿고 의지하면서 긍정적으로 인생을 살다보면 그 분(하나님)께서 성공을 가져다 주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기독교인인 저의 입장에서 오스틴목사의 말은 참 좋은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서구사회가 기독교중심사회라는 것을 생각할 때 서구사회에서는 별 탈 없는 내용이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나라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처럼 은근히 종교적 갈등이 많은 나라에서 이 책은 기독교내에서는 환영 받을지 모르지만 다른 종교에서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아닐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책 내용이 지나치게 기독교 중심적이라 자칫하다가는 오해의 소지가 발생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분명 자기 자신의 능력을 믿고 하나님이 주신 그리고 앞으로 주실 복을 믿으며 나간다는 내용은 자신을 잃은 사람들에게 힘을 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내용에 있어서 너무 기독교 편중적이라 자칫 다른 종교의 신도들의 구설수에 오를 수 있는 소지가 있습니다.그리고 또 하나는 너무 하나님께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오스틴 목사의 말은 하나님을 의지하며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라는 말이겠지만, 잘못 해석할 경우 하나님께 기도만 하면 무엇이든 이루어진다는 생각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노력하지 않고 교회만 잘 나가면 성공할 것이라는 생각을 심어 줄 수 있으므로 이단의 도구로 사용되어질 소지가 다분히 있습니다. 또한 맹목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이 읽을 경우 매우 위험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이 책을 읽을 때 주의가 필요합니다.
    독후감/창작| 2007.06.07| 1페이지| 1,000원| 조회(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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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예술과 야나기 무네요시
    먼저 이번 감상문을 쓰면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제가 읽은 ‘조선예술과 야나기 무네요시’라는 책은 예술 작품에 대한 또는 미술사적 해설이 쓰인 책이 아닌 일본의 미술학자 ‘야나기 무네요시’의 사상으로 바라본 조선예술에 대한 책입니다. 도서관에서 이 책을 봤을 때 단순한 호기심으로 봤지만 이 책을 읽을 수 록 ‘야나기 무네요시’ 라는 사람이 일본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것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예술작품이 아닌 무네요시의 미술사에 대한 책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이번 독후감의 주제로 선정하게 되었습니다. ‘조선’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야나기 무네요시’는 일제시대에 우리예술을 연구했으며 당시 일본 시민에게 팽배했던 식민주의 사고방식이 아닌 순수한 예술론적 시각에서 우리예술을 바라본 몇 명 되지 않는 사람 중에 한 사람입니다.무네요시가 태어난 때는 1889년입니다. 이 시기는 일본이 개항하고 메이지 유신으로 개혁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던 때이고, 그가 자라던 시기는 일본이 청일전쟁, 러일전쟁의 승리로 제국주의로 치달으며 주변국 특히 조선을 식민지화 해가던 시기였습니다. 귀족집안으로 고등교육을 받았으며 일본인으로선 드물게 기독교의 영향을 받았고 당시 일본시대의 군국주의와 국수주의의 극복에 관습을 두었습니다. 기독교의 영향으로 그는 처음에는 서양의 사상과 예술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영문학에서 시작하여 서구 근대, 중세 미술 등에 관심이 있었고 나중에는 동북아 지역의 회화, 조각, 민예등 그의 관심은 매우 넓었습니다. 즉 청년기에는 서구문화의 이해에 주력했으나 장년기에는 동북아시아 지역의 문화에 매료 되었고 그 계기가 바로 조선의 예술이었습니다.그는 우연한 기회에 조선백자 한 개를 구입한 계기로 조선의 예술에 빠지게 되는데, 그 때 그를 미치게 만든 것은 백자의 선(line)이었습니다. 선의 아름다움에 반해 조선의 도자기에 대해 연구하고 조선여행에 나서서 깊은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의 조선예술에 대한 최초의 관심은 도자기로부터 시작 했지만 나중에 민예품 -무네요시는 공예품이라고 강조- 에 대한 연구까지 하게 됩니다. 초기 도자기에 대한 연구에서 조선의 예술의 특질은 비애미라고 무네요시는 생각 했습니다. 비애미는 지금까지 무네요시를 논쟁으로 삼게 되는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선(line)에 대해 깊은 감명을 받은 그는 조선의 선적예술이 사랑에 굶주린 조선민족의 마음의 상징으로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비애미를 주장하는 계기입니다. 하지만 당시 그는 조선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른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가 예술을 바라볼 때 방법적 기초로 삼은 ‘직관’에서 나온 생각 일 것입니다. 이 당시 일본에 의한 많은 우리 문화재의 연구가 식민 사관에 의해 행해진 반면, 무네요시는 순수한 감정에서 오는 주장을 했었고, 또 다른 이유로는 당시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조선의 현실에 대해 동정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는 3.1운동의 무력 진압에 대해 비판했고 광화문 철거에 이의를 제기하여 철거대신 이전을 하는 데 압력을 넣기도 했습니다. 비애미를 통해 조선예술을 설명하는 것은 후대 지식인들에 의해 많은 논쟁을 하게 만들게 했는데, 이것이 우리 미술사에서 말하는 ‘야나기 신드롬’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비애미는 그가 우리예술을 연구했던 42년간(1919-1961)초기 3년뿐입니다. 이 시기 그는 우리역사의 관념이 희박했던 시기였고 직감에 의해 예술을 평가하던 시기였습니다. 무네요시는 우리예술을 연구하면서 초기 비애미론에서 민예론으로 옮겨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민예론은 무네요시가 우리예술에서 특히 관심을 가졌던 민예에 대한 것입니다. 특히 그는 생활 민예품 즉 도자기, 그릇, 민화등 무명잡기에 대해 관심을 가졌습니다. 특히 그 중에서 공예품에 대한 관심은 더더욱 특별 했는데, 그의 주장에 의하면 ‘민(民)은 민중을, 예(藝)는 공예를 뜻하며 민예는 민중공예의 약칭이다’라는 주장을 합니다. 민중예술이라고 할 수 있으나 예술이라 하면 자칫 개인적인 고급미술품을 연상 시킬 수 있으므로 민예의 뜻을 민중예술이 아닌 민중공예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렇듯 상등품의 예술작품보다 신변잡기에서 더 보편적인 아름다움이 숨겨 있음에 주목했습니다. 그는 미(美)는 하나이지만 그 핵심에 이르는 길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미술(fine art)이고 하나는 공예(craft)이며, 르네상스 이후 지금까지 미술은 인간중심적 사고의 소산이기 때문에 찬미되고 공예는 자연 중심적 소산이기 때문에 천대되어 왔지만 인간중심의 사고로 볼 때 공예야말로 찬미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공예에 대한 그의 민예론적 관점을 알 수 있고, 이 민예론적 관점을 바로 조선의 공예에서 찾았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는 조선예술이 다른 나라의 예술보다 민예적인 특성이 짙다고 보았습니다. 그의 생각에는 민예야말로 조선예술의 특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그에게 조선예술은 비애미가 아닌 공예적 특질을 가진 민예미로 다가옵니다. 진정한 예술이란 일부 상류계층의 눈요깃거리가 아닌 민중의 생활 속에서 가장 보편적이며 민중의 삶 속에서 살아 숨 쉬는 미(美)야 말로 진정한 예술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야나기가 민예론을 주장하는 또 다른 근거는 타력도라는 불교 수행법입니다. 타력도는 이 세상이 초극의 대상이 아니라 마음의 정토이며 이 땅은 하늘에 이르는 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깨달음의 길이며 평범한 사람들까지 깨달음에 이를 수 있듯이 공예야 말로 평범한 사람들까지 미에 관여 할 수 있고 평범한 사람들의 미에 대한 깨달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진정한 미는 천재적인 작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무명의 공인에게서 나온다고 보았고 그래서 민예미는 사회미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장롱 같은 목공품에서 인위성이 아닌 자연성을 보았고 민화에서는 수준에 못 미치며 제멋대로 그린 그림이지만 소박과 자유를 읽었습니다. 특히 그에게 비애미로 다가왔던 도자기의 경우 조선예술에서 그가 읽어 낸 것이 어떤 것인지 잘 보여주는데 그는 조선 도자기의 7대 불가사의를 이렇게 말했습니다.1. 지나칠 정도로 추하거나 언짢은 것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조잡한 것이 있기는 하나 조잡한 것은 조잡한 대로 살아 있고 거친 것도 그 속에 무언가 담겨있다. 모든 도자기가 제도(濟度)되고 성불했다. 중생제도에 대한 염원이 이들 작품을 통해 선명히 나타난 것이다.2. 관요와 민요의 차이가 극히 적다. 상등품과 하치물건의 차이가 다른 나라의 경우처럼 뚜렷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염부류는 상등품이고 철사류는 서민의 것이라고 하지만 상등품이라는 염부류에도 아주 단순하고 소박한 것이 많다. 조선 도자기에는 관요의 것도 민요적인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있다.3. 이상과 같은 것은 조선시대의 도자기가 원래 실용화에 입각해 있기 때문에 감상성을 가진 것은 적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듯하다4. 기술적인 면에서 덧그림(유약을 발라 구운 도자기 위에 다시 그림을 그려서 구워낸 무늬)의 역사가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적색 도자기를 만드는 데 쓰이는 녹유(綠釉)가 없다. 화학적으로 순수한 산화염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와 대조적으로 서양엔 녹유가 있으나 조선에서 흔히 쓰는 진사(辰砂)가 없다.5. ‘무늬 없는 것’이 꽤 많다. 가장 많은 것은 흑색, 엿색이다. 흰 것은 상등품이고 그 밖의 것은 순수한 민기(民器)이다 이것 역시 서양과 대조를 이룬다.6. 훌륭한 도자기를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작품에도 작가의 이름이 기입되어 있지 않다. 조선에서는 도공에 대한 평가가 매우 낮은데 이것이 오히려 도자기에 순도를 준 원인이 되었다.7. 완벽한 것이 매우 드물다. 파형(破形)이 많다. 이 파형은 결코 의식적으로 의도된 것이 아니다. 만드는 법이 부자연스럽고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는 무관심에서 이렇게 된 경우가 많다. 처음부터 일부러 부주의하게 만들거나 모양을 일그러지게 만들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이 부정형과 파형은 어디에도 구애받지 않는 성질의 필연적인 결과이다. 조선자기의 특색은 파형 즉 기수성(奇數性)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의 도공들은 ‘자연’이었다. “의도적으로 만들지 않고 무엇에도 구애됨이 없이 그대로의 사정을 솔직히 받아들이는 마음이 뚜렷하다.”)그의 조선예술에 대한 생각은 섬세하지 않으나 태평온화하고 멍청한 데가 있지만 유순 ? 순박하며 보면 볼수록 친근감이 생기는 예술이라고 칭했습니다. 이렇듯 그의 조선예술에 대한 평생에 대한 연구는 극초기 비애미가 아닌 민예로서의 예술입니다. 그리고 이 민예미는 비애미를 비난하던 우리 미술사학자들에게도 인정받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저는 야나기 무네요시가 근대 우리 예술사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우리 근대 예술사학의 -외국인, 그것도 일본인 임에도 불구하고 - 선구자중의 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그리고 야나기 무네요시가 우리 예술을 말할 때 빠뜨릴 수 없는 것이 불교미학으로서의 조선예술입니다. 불교미학으로서 조선예술은 조선시대가 유교를 국가적 정치이념으로 삼았던 것을 생각하면 선뜻 이해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그가 불교신자였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그는 동양사상을 불교사상으로 보았고, 불교미학의 이론을 세우고 싶어 했던 그에게는 조선의 민예야 말로 최고의 예술이었기 때문입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불교사상에 의해 자신의 예술론의 기초를 세워감에 따라 평생의 관심사였던 조선예술을 설명할 때, 그 때 민예미가 탄생되었던 것입니다. 즉 타력도에 입각한 모든 중생의 구제, 모든 사람들의 깨달음의 길이라는 관념에서 천재적인 작가나 유명한 사람의 작품이 아닌 이름 없는 공인이 만들어내고 우리 삶의 구서구석에 존재하고 살아 숨 쉬던 우리의 민예품이야말로 진정한 예술이며 살아있는 예술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독후감/창작| 2007.06.07| 4페이지| 1,000원| 조회(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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