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이 이끄는 삶’을 읽은 후 나의 변화된 모습‘목적이 이끄는 삶’의 내용 요약나는 왜 이 세상에 존재하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에 의해서 그 분의 목적을 위하여 창조되었다. 우리는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이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기 시작할 때만이 우리 삶 속에서 그 의미와 목적을 발견할 수 있다. 삶의 목적을 알고 그에 따라 살아갈 때 그것은 삶의 원동력이 된다. 인간은 영원히 존재하도록 지어졌으므로 다음의 영원한 삶을 위한 준비를 하며 현재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우리는 삶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삶은 시험이고, 위탁받은 것이며, 임시로 맡겨진 임무다. 삶은 일시적인 것이므로 이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한 소유와 집착을 버려야 한다. 무언가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영원한 가치가 근본적인 기준이 되어야 한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 우리 삶의 첫 번째 목적은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것, 그분의 목적을 위해 사는 것이다.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모든 행동이 예배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우리의 삶에 가장 큰 목적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마음을 다해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해주신 것들에 기뻐하고 그 즐거움을 하나님께 표현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 삶의 모든 구체적은 부분을 바라보며 기뻐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항복하여 나 자신을 하나님께 내어 드려야 한다. 하나님께 삶을 드리는 것이 가장 좋은 삶의 방법이다. 우리는 모든 삶의 경험을 하나님과 나누는 끊임없는 대화와 하루 종일 그분의 말씀을 생각하는 묵상을 통해 하나님의 친구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과 우정을 만들어 가야 한다. 그것은 영원히 지속될 관계다. 하나님은 우리의 온전한 헌신을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가 정확하고 진실하고 사려 깊고 헌신적일 때 기뻐하신다. 하나님이 멀게 느껴질 때는 시험과 성숙을 위한 과정의 일부이다. 우리 삶의 두 번째 목적은 하나님의 가족 안에서 서로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사랑은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우리는 혼자서는 하나님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으므로 교회에 속해야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삶을 경험하는 교제를 해야 한다. 우리는 헌신을 통해 공동체를 가꾸어야 한다. 관계들은 항상 회복할 만한 가치가 있으므로 우리는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려 노력해야 한다. 하나님께 교회는 매우 소중한 것이므로 우리는 교회의 하나 됨을 보호해야 한다. 우리 삶의 세 번째 목적은 인격을 개발하여 그리스도를 닮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고를 가지고 의도적으로 헌신하여 성장하여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거짓을 진리로 대체시켜 영적인 성장을 이루어야 한다. 모든 문제 뒤에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다. 우리는 어려움을 통해서 성숙한 인격이라는 영원한 결과를 얻어야 한다. 시험은 선을 행할 수 있는 기회이므로 그것을 이겨내어 그리스도와 같은 성품을 개발해야 한다. 시험에 맞서지 말고 관심을 다른 데로 돌려서 그것을 이겨내야 한다. 성숙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의 네 번째 삶의 목적은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만이 할 수 있는 특별한 사역을 위해서 현재의 모습을 가진 우리를 만드셨다. 누구도 우리의 역할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모습을 이해하고 그것을 사용하여야 한다. 우리의 삶을 최대로 사용하는 방법은 우리의 현재 모습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진실한 종의 마음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종이 되기 위해서는 종의 마음으로 생각하여야 한다. 하나님은 약함을 통해 위대한 능력을 보여주시므로 나 자신의 약함을 인정해야 한다. 사명을 위해 사는 것이 우리의 다섯 번째 삶의 목적이다. 사명은 이 땅에 있는 믿지 않는 사람들을 향한 섬김이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알리는 것이 사명이다. 우리가 사명을 완수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의 본질적인 부분이다. 사명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것과 하나님을 대표하는 것이라는 특권을 포함하고 있고, 우리의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 사명을 완수하려면 우리의 목표를 버리고 우리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세상에 말씀을 전하기 원하신다. 삶의 메시지는 간증과 삶의 교훈과 열정과 복음을 담는다. 지상명령은 우리의 사명이므로 우리는 월드 크리스천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복을 받기 위하여 삶의 다섯 가지 목적이 균형을 이루도록 해야 한다. 목적을 가지고 사는 것이 참된 삶을 사는 유일한 방법이다.‘목적이 이끄는 삶’을 읽고..사실 이 책을 처음 읽기 시작했을 때는 거부감이 들었다. 나는 기독교인이 아닌데 책속에는 온통 기독교에 관한 내용만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을 읽어가면서 공감하는 부분도 있었고 기독교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안 좋은 인상이 많이 사라졌다. 이 책을 읽었다고 해서 기독교인이 되지는 못했지만 책 속에는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배울 점이 많았다. 여러 가지 공감하는 점이 많았는데 몇 가지만 언급 하겠다. 그 중 하나는 현재의 삶이 일시적인 것이므로 지나친 애착을 갖지 말라는 것이다. 나는 천국이 있는지 없는지 확신하지 못한다. 하지만 천국이 있든 없든 간에 현실의 모든 것에 집착하며 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은 이해한다. 부나 명성 권위에 집착하며 바쁘게 살아가면 무엇이 남는가. 그러한 인생을 산다면 인생의 끝에서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죽고 나서 그런 외면적인 것들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나 또한 그러한 것들에 가치를 두는 경향이 있다. 그것이 바르지 못한 것임을 알면서도 바로 잡지 못하는 것이다. 눈앞의 것에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집착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그런 마음을 버리기로 결심했다. 당장의 이익에 욕심을 부리지 말고 그것을 버림으로써 얻게 되는 많은 것들을 생각하려 한다. 욕심을 버리면 얻게 되는 가장 큰 것이 마음의 안정인 것 같다. 내 인생에 있어서는 물질적인 것보다 마음의 평안함이 더 중요하게 여겨진다. 또 공감하였던 것은 사랑의 가장 좋은 표현은 시간이라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말이 정말 맞는 말이다. 나는 그것을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했던 경우가 많았다. 그 부분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생각난 사람이 우리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나와 함께 20년가량을 함께 사셨는데 지금 암 말기로 최후의 순간을 기다리고 계시다. 할머니가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하셨을 때 할머니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 나는 할머니보단 친구와 함께 했고 할머니가 함께 하기를 원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만을 위한 시간을 보냈다. 할머니와 함께하는 것을 미루기만 했다. 그러나 지금 할머니는 일어나시지도 못하고 병상에 계셔서 먼 친척 댁에 가 계신다. 내가 함께 하고 싶어도 함께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나는 할머니가 함께 있어달라고 했을 때 마음에 걸려하면서도 그러지 않았던 것이 너무나 죄송하고 후회된다. 책에서 사랑할 기회를 얼마나 오래 가지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사랑하기 좋은 때는 바로 지금이라고 말한 것이 너무나 와 닿았다. 내가 할머니에게 드릴 수 있는 사랑의 기회를 놓쳐 버린 것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면 다시는 사랑을 표현할 기회가 없는데 어리석었던 내 모습이 너무 후회된다. 요즘 거의 매일을 후회하며 보내고 있다. 다시는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앞으로는 상대가 누가 되건 간에 내 사랑을 즉시 아낌없이 표현할 것이다. 또 진정한 교제에 대한 이야기에 공감한다. 인생을 얼마 살아보지는 않았지만 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가 많았다. 여러 가지를 느끼기도 했다. 현실 속에 있는 인간관계는 거의 피상적인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책속에서 이야기 하는 것은 내가 바라던 진정한 교제이다. 우리의 삶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 하는 진실함으로 인해 진정한 교제를 경험하게 되고 그로 인해 사람들은 상호 의존을 하며 공감을 한다. 사실 우리가 교제를 통해 진정으로 얻고자 하는 것은 상호의존이다. 언젠가는 나도 누군가와 함께 고통을 나누는 교제를 하고 싶다. 교제를 통해 서로에게 의지하고 더욱 발전 있는 삶을 살 수 있다. 현재의 나에게 교제는 책 속에서 말하는 얄팍한 교제일 뿐이지만, 상대방에게 진실 됨을 보이고 그를 이해하여 주는 진정한 교제를 통해 서로 의존적인 관계를 형성하려 노력할 것이다. 요즘 세상에 그러한 인간관계를 맺는 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나는 먼저 나를 솔직하게 드러내 보려 한다. 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넘지 못할 시련은 주시지 않는다는 말에 공감했다. 나는 시련이 하나님이 주시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확신하지 못하지만 우리에게 닥치는 시련 중에 우리가 이겨내지 못할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고로 나는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서 어떠한 시련이 나에게 들이 닥쳐도 흔들리지 않고 나의 신념과 의지대로 살아갈 것이다.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때때로 나에게 너무 과중하다고 생각되는 과제가 있을 때 그것을 포기하고 싶지만 그 대신에 마음을 단단히 먹고 해 내었을 때 나는 한 층 더 성숙한 모습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여러 가지 가치 있는 내용들이 있었는데 그것들이 살아가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Report onThe Blind Man- D. H. LawrenceⅠ. D. H. Lawrence의 생애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David Herbert Lawrence)는 1885년 9월 11일에 영국 중부의 조그만 광산촌인 노팅엄셔(Nottinghamshire)의 이스트우드(Eastwood)에서 광부 아서 로렌스(Arthur Lawrence)의 3남 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이스트우드는 1860년대에 갑작스런 변화가 일어나는 고장이다. 대규모로 자본가들이 몰려 들어와 1891년에는 이 고장의 채광업이 기계화가 되어간다. 그러나 이스트우드는 아름다운 시골풍경을 계속 유지한다. 그의 아버지는 글을 읽을 줄 몰랐고 본능적인 삶을 살았다. 그는 춤을 잘 추었고 낙천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인생을 즐기며 살았다. 그의 생활은 완전히 육체적이고 관능적이었다. 그에 비해 어머니인 리디아 로렌스(Lydia Lawrence)는 사립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교사가 되기도 했으며 완벽한 금주주의 자였다. 기질과 교육면에서 성격도 남편과 대조적이었다. 그녀는 언어생활에 매우 주의하였으며 독서를 좋아했고 다방면에 풍부한 지식을 갖고 있는 지적인 여자였다. 그녀는 남편에게 실망하여 자식들에게 모든 사랑과 정성을 쏟았으며 그들이 사회적으로 아버지보다 나은 삶을 살게 하기 위하여 교육에 전력했다.로렌스는 부모에 대한 인상을, 어머니는 영리하고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난 지적인 부인이었고, 하층계급 출신의 아버지는 무식하지만 쾌활한 웃음을 지닌 건장한 광부로서 낙천적인 기질과 마음이 잘 변하는 성격의 소유자였으며, 주관이 없는 행동을 하고 술에 취하여 항상 어머니에게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고 1910년 12월 3일자 R. A. 테일러(Rachel A. Taylor)에게 보낸 편지에서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있다.내 어머니는 영리하고 섬세한 착한 성격의 여자였고 전통 있는 공민 혈통의 여자였다. 그녀는 그녀보 다 못한 남자와 결혼했다. 나의 아버지는 검은 얼굴에 쾌활하게 웃는 광부였다. 그는 낙천적인병을 치유하는 입장에서 자서전적인 소설 『아들과 연인』을 쓰기 시작했다. 이 것은 그의 어느 작품보다 그의 생활 및 성장과 유사하며 작품 속에 직접적 양상 또는 변형된 양상으로 그의 친지나 동료들이 등장한다.그는 1912년 4월 그가 다닌 노팅엄 대학으로 스승인 어네스트 위클리(Ernest Weekley) 교수에게 취직을 부탁하기위해 찾아갔다가 그의 아내인 4살 연상의 세 자녀를 가진 프리다(Frieda)를 만난다. 프리다는 지적이고 개성이 강한 여성이었고 10년간 함께 살았던 남편과 너무나 사랑한 세 아이를 버리고 로렌스와의 사랑을 위해 영국을 떠나 독일로 갔다.로렌스는 독일로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일 때까지도 제시 쳄버즈와의 애정관계와 어머니의 모성애로 인해서 오랫동안 침체되어 있던 정서를 극복하지 못했다. 그는 이탈리아의 가르냐노(Gargnano)에 머물면서 『아들과 연인』을 다시 썼고 장편소설 『무지개』(The Rainbow)의 전신인 『자매들』(The Sisters)를 쓰기 시작했다. 1913년 5월 영국에서 『아들과 연인』이 출판되었으며, 1914년에는 프리다와 위클리 교수의 이혼이 성립되어 그해 7월 13일에 그들은 정식으로 결혼하였다. 로렌스는 결혼생활을 통하여 안정감을 얻게 되고 작품을 쓰는데 있어서 프리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문학적으로 재능 있는 소설가로 인정받았으나 『무지개』를 발표하고 나서 작품에 성 묘사를 노골적으로 하였다고 하여 1915년 11월에 외설물이라는 이유로 작품 발매가 금지되었을 때 그를 옹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초기 작품 중에 내재했던 지성과 본능의 갈등이 보다 뚜렷하게 주제가 되었고 개인의 생명을 보다 큰 생활의 일부라고 주장하여 성 문제에 큰 역점을 두었다. 『무지개』의 속편이라 할 수 있는 『사랑하는 여인들』(Women in love)은 1916년에 쓰여 졌으나 1920년에야 미국에서 자비로 출판되었다. 『무지개』에서는 부랭웬(Brangwen) 집안이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파도처럼 후 자비로 출판했으나 판매 금지되었으며 같은 해에 『시 전집』(Collected Poems)을 출판했다. 1929년에는 로렌스의 회화전이 런던 워렌(Warren) 화랑에서 열렸으나 영국 내무성의 명령으로 금지되었다. 그해 여름, 독일 여행을 하는 동안에 시집 『팬시이즈』(Pansies)를 출판하였다. 이처럼 로렌스는 20여 년이라는 기간 동안에 연인들과의 관계, 지병으로 인한 곤욕, 계속된 방랑생활 등에도 불구하고 많은 걸작품을 남겼는데 이것은 그에게 그가 모든 작품 속에서 끊임없이 추구했던 '불타는 생명력'이 있었기 때문이다.로렌스는 1929년 9월에 반돌로 돌아왔을 때 병이 악화되어 1930년 2월에 프랑스 남쪽으로 옮겨갔다. 그 해 3월 2일 밤, 그는 방스의 로베르 몽 장(Villa Robemonds)에서 사망하여 3월 4일 4시에 방스의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Ⅱ. D. H. Lawrence의 작품 흐름D. H. Lawrence는 병든 현대문명을 성(sex)의 신비를 통해 고발하는 작품을 많이 쓰려고 온 세계를 돌아다니며 방랑 생활을 했다. 그러한 방랑의 연속은 새로운 가치체계 속에서 진정으로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곳을 찾아 헤맸던 정신적 탐구였다. 그는 작품을 통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자아를 넓히고 자신의 경험을 일반화 하려고 노력한 작가이다. 인간 의식의 새로운 국면과 이제껏 경험해 보지 못했던 세계를 인간 내부세계에서 탐색한 많은 걸작을 남긴 것은 로렌스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대단한 공적이다. 로렌스는 기계와 지성과 정신을 중요시하는 서구문화에 항거하여 인간의 근원적인 육체와 생명의 우위를 강조했다. 이러한 점에서 그의 문학은 현대 문명에 대한 뜻 깊은 비판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성장하면서 실패한 인간관계의 요인을 『아들과 연인』에 털어놓았다. 즉 그는 모친과 연인들의 사이에서 겼었던 갈등과 이 외에 자신의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청산할 배출구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을 쓰면서 그는 자서전적인 초기소설『아들과 연인』을 분석하고 의 생활에 종종 권태를 느끼고 벗어나고 싶어 한다. Maurice또한 마음속에서 시각적인 눈을 버리지 못해 육체적 장애가 있다는 사실에 괴로워한다. 그의 갈등은 본능적인 삶을 살아감으로써 자신의 장애를 극복한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그에게 정신적으로 결함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삶이 ‘정신적인 면’과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육체적인 면에만 치중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Isabel을 또다시 옭아매는 구실을 하게 된다. 그녀는 그를 외부와 연결시켜 답답함에서 벗어나려고 다른 사람들과의 접촉을 시도하지만, Maurice는 외면적인 것을 중요시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스스로의 장애를 의식하여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둘만의 단절된 생활로 돌아간다. 그래서 그녀는 새로 태어날 아기를 그녀의 탈출구로 삼으려 하는데 이러한 모습은 지적이고 이성적인 것을 추구했고 그로 인해 본능적 삶을 사는 남편에게 실망하고 자식들을 자신의 욕구 분출구로 삼은 작가의 어머니의 모습을 바탕으로 하여 표현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she had something of a warm, maternal look."(109)에 나타난 작가의 Isabel에 대한 외적 묘사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또 그 시대의 여성들이 가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남편을 통한 사회와의 연결에 실패한 Isabel은 자식을 매개체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She had her husband on her hands, a terrible joy to her, and a terrifying burden."(106)에서 그녀는 남편에게 매여 있는 것을 좋아하는 동시에 벗어나고파 하는 욕구를 가진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그녀의 내적 갈등에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갈등을 겪고 있는 Isabel의 심리는 작품 속에 여러 번 나타나는데, 그녀가 갈등을 겪는 것은 그들 부부의 생활이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남편위주로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로렌스는 이를 통해 남녀관계 찾는 과정에서 감각적인 생명의 인식에 대한 기쁨을 조금이나마 체험한다. 이는 작가가 이성적 삶을 사는 사람도 감각적 인식을 할 수 있고 그것이 어떠한 느낌을 갖게 하는지 알게 해 주려는 의도에서 보여주는 것이다.His head was small, usually carried high and light. As he bent down to unfasten his gaiters and boots he did not look blind. His hair was brown and crisp, his hands were large, reddish, intelligent, the vein stood out in the wrists; and his thighs and knees seemed massive.(112)작자는 Maurice의 외모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묘사 하고 있다. 이를 통해 본능적 삶을 추구하는 것을 지지하는 작가의 사상을 알 수 있다.He stood at the foot of the stairs, arrested, listening. She watched him, and her heart sickened. He seemed to be listening to fate.Isabel은 남편이 감각적으로 모든 것을 인식하는 것을 보면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그의 모습에 거부감을 느낀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그로인해 느낄 수 있는 감각적인 것에서 얻어지는 기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The touch had an almost hypnotizing effect on her."(113)에서 알 수 있다.It sas a pleasure to him to rock thus through a world of things, carried on the flood in a sort of blood-prescience. he did not think much or trouble much. So long as he kept this sheer immediacy of blood-다.
I Stop Writing the Poem이 시에서 화자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겉으로는 태연한 척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화자 자신이 매우 고통 받고 있음을 시에서 전체적으로 나타나는 irony를 통해 알 수 있다. 이미 시가 한편 완성되었는데도 ‘I Stop Writing the Poem'이라는 제목을 붙여서 제목에서부터 irony가 나타난다. 시 쓰기를 멈췄다면 이 작품이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No matter who lives or who dies'에서도 irony가 나타난다. 만약 그녀에게 누가 살든 죽든 별 문제가 안 된다면 그녀가 시를 쓰는 데에도 아무 문제가 없었을 텐데 그녀는 I stop writing the poem 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 시의 화자가 사랑하는 이를 잃었다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다. ‘I'm still a woman'도 시의 뒷부분에서는 ‘I'll get back to being a woman'이라고 말함으로써 irony를 만들어 낸다. 자기 자신의 본래 모습을 지키고는 있으나 정신적으로는 그 자리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화자는 빨래를 개는 일상적인 일을 하고, 'Nothing can stop our tenderness'라고 하는 등 스스로를 위로하지만 바로 뒷부분에 나오는 'I'll get back to the poem. I'll get back to being a woman'을 통해서 지금은 그녀가 원래의 위치로 돌아갈 수 없을 만큼 많이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자신의 원래 자리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 한 것에서 굳은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바로 뒷부분에서 ‘a giant shirt in my hands'와 ‘a small girl'을 통해 자신은 지금 대단히 작은 존재가 되어 있고, 현재의 짐이 너무 무거워서 혼자 감당 할 수 없다는 뜻을 드러내고 있다. 또 'a giant shirt in my hands' 라고 했는데 'somewhere a small girl standing next to her mother watching to see how it's done'라고 말 해 contradiction이 나타난다. 'shirt'는 자신의 손에 있는데 다른 어떤 곳에서 한 소녀가 그녀의 어머니가 그것을 처리하는 것을 본다는 것이 모순된다. 뒷부분에서 자신이 고통을 감당 할 수 없음을 드러냄으로써 앞부분의 강건한 자신의 의지를 나타낸 부분은 표면적인 태도에 불과했음을 알려준다. 시의 전체적인 구성에 irony가 바탕으로 깔려 있어 화자의 숨은 뜻을 효과적으로 나타내 주고 있는 시이다.Tired Sex이 시는 싫증나버린 sex에 대한 내용인데, 그 것을 imagery를 사용해 효과적으로 잘 표현 하였다. 화자는 tired sex를 겨울 내내 장작더미 밑에 있던 종이 성냥에 불을 붙이려 한다는 것으로 표현하였다. 그 것은 원래는 뜨거운 불이 활활 타올랐을 것인데 겨울 내내 축축해져 버렸기 때문에 불이 잘 붙지 않는 성냥을 이용해 sex라는 것의 특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원래는 뜨겁고 정열적인 것이었지만 이미 tired sex가 되어 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불이 붙지 않는 젖어 버린 성냥과 같이 시시해져 버린 것이다. ‘damp sulphur on sodden cardboard'에서 tired sex의 이미지가 확실하게 와 닿는다. 이미 젖어버린 종이 성냥은 다시 불을 붙이기 매우 힘든 것이다. ‘I catch myself yawning'에서 화자 자신의 무관심함을 직접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선생님이 훌륭한 문학작품이라서 꼭 읽어야 한다고 지정해준 책의 페이지를 넘기듯이 창 밖의 ‘sparrow'와 ‘cat’을 바라본다는 표현은 tiredness의 느낌을 실감나게 나타내어 준다. 시가 전체적으로 축 늘어진 분위기에 실감나는 imagery로 주제를 잘 표현하고 있다.
Oedipus 와 Orestes의 이야기는 죄를 짓는 인간의 비극적인 생애를 다룬다는 점에서 매우 공통된 점이 많다. Oedipus와 Orestes 의 생애를 보면서 우리는 인간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인간이 지을 수 있는 가장 큰 죄가 무엇인지, 인간이 어떤 원칙에 의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인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과연 인간다운 삶이라 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 두 주인공은 인간이 처할 수 있는 가장 비극적인 상황에서 지어서는 안 될 죄를 짓는다는 점은 공통되지만 그들이 죄를 짓게 되는 원인과 상황은 서로 다르다. 그렇다면 그들 중 누가 더 비극적인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무엇이 그들을 비극적인 인간으로 만든 것일까? 인본주의적 입장에서 두 이야기가 나타내고자 하는 바를 분석해 보겠다.Oedipus와 Orestes는 모두 비극적인 삶을 살았지만, 여러 가지 점에서 생각해 볼 때, Oedipus가 Orestes 보다 더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무엇이 그를 더 비극적이게 하는 것일까? Orestes의 이야기에는 인간의 죄에 대한 개념이 명확하게 드러나 있다. Orestes가 죄를 짓게 되는 근본적인 원인은 Orestes 자신이 만든 것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 Agamemnon이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Agamemnon이 전쟁에서 승리하고자 하는 욕망에 눈이 멀어 자신의 친딸 Iphigenia를 살해하는 끔찍한 짓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every sin causes fresh sin"(H-253)에서 죄를 지으면 그것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진리처럼,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 친족을 살해한 그의 죄악이 복수를 부른 것이다. Orestes는 그의 아버지 Agamemnon의 죄와 그의 어머니 Clytemnestra가 딸의 복수를 위해 남편을 죽인 죄 까지 짊어지는 신세가 되었다. 또, 넓게 보면 그의 조상들의 친족 살상의 죄까지 책임지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자신은 아무런 잘못도 없었지만 자신의 가문에서 일어난 끔찍한 죄악의 연속에 대해서 책임을 지기 위해서 죄를 저지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의 가문의 죄인들과 크게 다른 점이 있다. 그는 오만과 자만심에 빠져서 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었고, 자신의 욕망 때문에 죄를 저지를 것도 아니었다. 그는 다만 그가 해야 할 도리를 다하기 위해서 죄를 짓게 되었으며, 복수를 실행하기 이전에 너무나 큰 고통 속에서 갈등을 겪었다. "He must be a traitor to his father or he must be the murderer of his mother"(H-256)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어느 것도 선택할 수 없는 갈림길에 놓이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아버지의 복수를 선택하게 된다. Apollo가 내려준 신탁에 따라서, “he must work out the curse of his house, exact vengeance and pay with his own ruin."(H-256)에서처럼 자신의 희생으로 모든 죄악을 끝내는 것을 선택한다. 다른 죄인들처럼 자신의 욕망이나 자만 때문이 아니라 다른 어리석은 인간들이 초래한 죄악의 연속을 끝맺기 위해서 스스로를 파멸시킨다는 점에서, 그의 죄는 다른 인간의 것보다 한 차원 높은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Orestes의 이야기에서는 더러운 죄악은 다른 죄악을 불러와 끊임없이 죄악이 이어지게 되므로, 죄 없는 인간의 손으로만 죄악의 순환이 끝맺어질 수 있다는 원리가 나타난다. 또, Clytemnestra를 죽이기 전에 갈등하던 Orestes가 신탁대로 어머니를 죽이는 모습은 죄를 짓은 인간은 벌을 받아야만 한다는 원칙에 입각한 것이라 보여 진다. Orestes는 죄를 짓고 나서도 오랫동안 고통스러워한다. “no crime was beyond atonement, that even he, defiled by a mother's murder, could be clean again."(H-259)에서 죄를 지으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으며 속죄하면 죄를 씻어낼 수 있다는 이치가 등장한다. “those who desire to be purified cannot be refused and the black stain of his guilt had grown fainter and fainter through his years of lonely wandering and pain."(H-259)을 보면 그는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지만 속죄를 하였고 그로인해 정화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쨌든 그는 그의 가문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죄를 반성했고, 그로 인해서 죄를 씻어낸 사람이었다.Oedipus가 저지른 죄악의 원인은 명백하게 한 가지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가 그의 아버지 Laius를 살해하고 그의 어머니 Jocasta와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Thebes에서 살게 된 것은 그저 그의 운명이 그렇게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라고밖에 설명할 수가 없다. “You have suffered equally for your fortune and for your disaster."(O-30)에서처럼 Oedipus는 자신의 운명을 미리 알았기 때문에 더욱 불행해 졌다고 할 수 있다. Oedipus의 운명을 미리 알고 있었던 Laius와 Jocasta가 운명을 거스르기 위해 그를 버렸기 때문에 그가 자신의 친 부모를 모르고 Polybus와 Dorian의 손에서 자라게 되었고, 그가 자신의 운명을 알고 나서 그것을 바꾸기 위해 자신이 자란 나라 Corinth를 떠났기 때문에 정해진 운명처럼 추악한 죄를 짓게 된 것이다. “It was I who commanded that Thebes must cast out the one who is guilty, unholy, cursed by the heavenly gods."(O-31)에서처럼 그는 자신의 운명을 바꾸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스스로를 더욱 비극적인 상황으로 몰고 가게 된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알았을 때 그것에 순응하는 것 보다는 운명에서 벗어나려는 쪽을 선택했다. Laius와 Jocasta, Oedipus는 모두 다 인간에게 주어진 운명을 인간의 힘으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운명에 저항했던 것이다. 그들이 운명에 맞서지 않았다고 해서 Oedipus의 비참한 운명이 바뀌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한 가지 작품에 분명하게 나타난 사실은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로 운명을 거역할 수 없다는 원리이다. "I was saved for a more dreadful fate. Let it be."(O-32)에서 알 수 있듯이 결국에는 Oedipus도 운명을 거부 할 수 없는 인간의 모습을 인정하고 자신의 운명에 순응하고 있다. 또 "Incestuous sin!"(O-31), "All the most heinous sins that man can know!"(O-31)에서 친족을 살해하는 것보다도 근친상간의 죄가 더욱 악한 것으로 표현된다. 그는 자신의 죄 앞에서 스스로의 눈을 멀게 만들어 파멸함으로써 자신을 벌한다. 그리고 운명에 순응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운명에 맡긴다.Orestes와 Oedipus의 이야기를 살펴본 결과 Oedipus가 Orestes보다 더 비극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몇 가지 이유를 알 수 있다. 우선 죄를 지은 후에 Orestes는 죄를 씻어냈지만 Oedipus는 그러지 못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Orestes의 죄는 그의 가문의 불행이 끝나게 해 주었지만, Oedipus의 죄는 그의 가문의 불행이 시작되게 했다는 것 또한 그 이유 중 하나이다. Orestes는 자신의 운명을 미리 알지 못했고 때문에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고통 받지 않았으나, Oedipus는 자신의 세상에서 가장 끔찍하다고 할 수 있는 비극적 운명을 미리 알고 심적으로 고통 받았으며,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 했으나 결국 벗어나지 못하였다는 점에서도 그가 더 비극적이라 할 수 있다. 또 Orestes는 자신이 짓는 죄가 어떤 죄이고 무엇 때문에 짓는 것인지 알고 스스로의 선택과 판단에 의해서 죄를 지었으나, Oedipus는 단지 그것이 운명이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무슨 죄를 짓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죄를 저지르게 되었다는 점도 Oedipus의 비극이 더 강조되는 부분이다. Oedipus는 가장 행복한 삶에서 자신의 운명이 현실로 밝혀지는 순간 가장 비참한 삶의 끝으로 순식간에 전락함으로써 그의 인생이 얼마나 비극적인지 더욱 잘 드러낸다.
국어 훼손의 심각성요즘 한국인들은 바른 한국어보다 틀린 것을 더 많이 사용한다. 틀린 표현이 너무나 많이 사용 되어서 어느 것이 바른 표현인지도 잘 구분 못 할 정도이다. 주위를 둘러 보면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간판부터 시작해서 대중 매체는 물론 개개인의 일상생활 등 사방에서 틀린 국어 표현이 난무하고 있다. 이렇게 된 것은 국제 사회에서 영어의 위력이 점점 더 커져가는 현재 상황과 급속도로 발달한 인터넷 통신망이 큰 원인이라고 볼 수 있다.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영어로 우리말을 지금처럼 심하게 더럽히지는 않았다. 그 때에는 영어를 공부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영어에 친숙한 사람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외국에서 살다 온 사람도 많아졌고 외국과 교류가 상당히 개방적으로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어, 영어와 몇몇 외국어가 우리 생활에 매우 깊숙이 자리잡게 되었다. 이에 따라 생활 속에서 사람들은 외국어라는 인식도 하지 못한 채 자연스레 외국어를 우리말처럼 사용하고 있다. 외국어가 우리말보다 더 친숙하다는 사람들까지 생겨나고 있다. 심한 경우에는 외국어 문장을 조사만 우리나라 말로 바꾼 것 같은 우리말 문장을 볼 때도 있다. 이것은 정말 심각한 문제가 된다. 꼭 필요한 경우에만 외국어를 외래어로써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말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외국어로 대체해 사용하는 것은 우리말의 정체성을 모호하게 하는 것이다. 국어는 우리나라 사람들을 위해서 우리 조상이 만들어온 것으로, 우리나라 사람이면 누구나 쓰는 말로서 한국인의 자존심이다. 언어 속에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문화와 역사가 담겨 있고, 정서가 담겨 있다. 때문에 국어를 오염시키는 것은 한국인의 정체성을 위협하고 우리 스스로의 자존심을 구겨버리는 행위이다.또, 통신망의 발달로 초고속 인터넷 사용자가 기하 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사람들이 사용하는 잘못된 표현 또한 급속도로 퍼져 나가고 있다. 인터넷의 발달은 외국어 남용보다 더 큰 문제를 야기했다. 단순히 우리말 대신 외국어를 사용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말 자체를 변형시켜 사용함으로써 국어 본래의 모습을 송두리째 바꿔가고 있는 것이다. 인터넷이라는 것은 그 특성상 잘못된 표현이 퍼지기 시작하면 어느새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보편화 되어 버리고 만다. 젊은이들은 잘못된 표현을 만들어내고 인터넷의 주 사용층으로서 그것을 보편화 시켜 일상생활에까지 적용시켜 쓰기 때문에 우리말을 훼손시키는 주범이다. 나의 주변을 둘러 보았을 때에도 우리말을 잘못 사용하거나 훼손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친구들의 대화 속, 문자 메시지, 인터넷 상의 글 등에서 이제는 한국어를 바르게 사용한 것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어 버렸다. 텔레비전 시청이나 인터넷 사용을 자주 하지 못하는 나도 친구들이 쓰는 말 때문에 현재 유행하고 있는 변형된 우리말 표현을 금방 알 수 있다. 그 정도로 대중 매체나 인터넷 상에서의 우리말 훼손은 우리의 국어생활에 큰 파급효과를 주고 있다.이런 현실 속에서 가장 큰 문제는 젊은이들의 의식 수준이다. 내가 틀린 우리말을 사용하고 있는 친구에게 바른 사용법을 설명해 줘도 고치려 하지 않고, 관심도 없는 경우가 태반이다. 외국어를 한국어 대신 사용하는 것은 자신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쓰이기도 하고, 전혀 아무 의식 없이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하는 경우도 자주 있다. 한글이 심하게 훼손되고 있다는 사실은 거의 모든 사람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거나 사태해결을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은 아직 우리말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할 만한 단계의 의식수준을 갖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우리말 훼손에 앞장서고 있으니, 사태의 심각성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말이 많이 훼손되고 있다는 사실만 알고 그 것이 가지고 오는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젊은이들이 우리말 훼손의 심각성을 깊이 깨닫고 개선하는 노력을 하지 않는 한 그 문제는 해결되기는커녕 점점 더 커져 갈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말 훼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일까?우리 젊은이들의 의식을 깨워주기 위해서 소수의 지각 있는 사람들이 노력할 필요가 있다. 여러 가지 운동도 벌이고, 오염된 우리말 속에서 바른 우리말을 끝까지 사용하고 전파시키는 노력도 필요하다. 지금은 젊은이들이 생각 없이 우리말을 망가뜨리고 있지만, 끊임없이 바른 우리말 사용에 대한 것을 접하게 되면 조금씩이나마 의식에 변화가 있을 것이다.물론, 우리말을 지키기 위해서는 소수의 사람들의 노력에만 의존해서는 안될 일이다. 프랑스에서는 자원 봉사단체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자국어를 보호하는 활동을 하고 있고, 정부가 직접 활동에 개입하기도 하며, 프랑스어 보호법을 만들어 놓아 프랑스어 보호에 힘쓰고 있다. 영국의 경우에도 영어교육을 위한 홈스테이가 일반 가정에까지 확산되었고, 영어 교재 출판 사업을 통해 수출 수입을 올리는 등, 영어 교육 산업에 정부가 직접 개입하여 큰 성과를 거두고 있다. 우리말의 훼손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는데도 방관하고 있는 한국 정부는 이들 나라처럼 우리말 보호에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다. 우리말을 보호 할 수 있는 법도 제정하고 여러 가지 정책을 시행해서 실질적인 우리말 보호 운동이 이루어 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오늘날의 언어는 산업이라고 할 만큼 가치 있는 것이다. 우리 정부가 나서서 우리말을 보호하고 위상을 높이는데 노력을 기울이면 지금 직면해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개인과 정부가 힘을 합해서 우리말 보호에 힘쓴다면 지금 아무리 우리말 훼손이 심각한 상황에 있다고 하더라도 극복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말 훼손을 막고 본래의 국어를 보존하는 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말의 본질을 회복하고 위상을 높여 한국인의 위상을 높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모두 우리말에 관심을 가지고 조금이라도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