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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9와 5.18 비교분석
    4?19혁명과 5?18 광주민주화운동 비교분석4?19혁명과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명칭의 변화과정과 정의를 살펴보겠습니다.4?19혁명이란 무엇인가? 1960년 4월 학생들이 중심세력이 되어 일으키니 민주주의 혁명을 뜻합니다. 4?19혁명은 4월 혁명, 4?19학생혁명 또는 4?19 민주혁명 등으로 불리었다가 5?16군사정변 이후 이를 의거(義擧)로 규정하여 일반화되었다가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혁명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이어서 5?18민주화 운동은 전라남도 및 광주시민들이 계엄령 철폐와 전두환 퇴진, 김대중 석방 등을 요구하여 벌인 민주화 운동입니다. 발발 당시 전두환 정권에서는 불순분자와 폭도들에 의한 난동으로 규정되었으나, 1988년 6공화국 출범 직후 국회에서 ‘5?18광주민주화운동’으로 정식 규정하였습니다.대체로 위와 같이 4?19는 그 명칭)이 여러 가지가 붙기는 하지만, 대부분 혁명이라고 붙여집니다. 의거나 운동의 차원을 뛰어넘는 성격인 것입니다. 여기서 혁명과 운동을 구분을 해보면 혁명은 근본적인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변동이 일어났을 때 쓰입니다. 반면 운동은 계기가 되는 어떤 움직임은 있으나 혁명보다는 사회적 방향도 적고 운동 자체가 직접적 성공으로는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혁명은 통치조직 자체의 변경을 포함한 정치체제의 근본적인 변동을 요구합니다. 또한 파급적으로 사회적, 경제적, 심리적 측면 등의 여러 분야에서의 변화를 수반합니다.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 혁명은 기존 지배세력 사이에서 권력 탈취를 위한 투쟁의 형태가 아닌 피지배계층인 학생, 시민 등의 민중이 갖는 반항의 형태를 취하였습니다. 또 그런 피지배계층의 광범위한 지지를 필요로 하는 것이 일반적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면을 통하여 4?19가 이승만 독재체제를 무너뜨렸다는 점, 정치체제의 전반적인 변혁을 주었다는 점에서 성공적이라 하겠습니다. 따라서 4?19혁명이라고 부르는 것이 가장 적합하겠습니다.5?18에 대한 명칭은) 4?19에 비해서 극단적으로 상반되는 도덕적 정당성을 확보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러나 이 같은 논리는 줄곧 길들여져 있던 민중들이 기존의 지배구조를 거부하는 최고의 저항형태인 무장투쟁의 수준에까지 나아가게 된 역사적 구조적 원인을 근처에서 파악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러한 투쟁을 발생시킨 직접적인 촉매제만을 핵심적 요인으로 포착한다는 점만 들어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민중들의 주체적인 역사변혁노력을 단지 소극적 자기방어적 대응의 측면에서만 파악한다는 점에서 문제를 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이렇게, 5?18의 명칭은 다양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희는 5?18의 명칭을 혁명이라고 하기에는 5?18의 결과가 직접적으로 성공되지 못하였으며 이에 대한 직접적 변혁을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보았습니다. 또한 사회적 방향이 광주 안에서만 국한되어있다는 점에서 혁명으로 보기에는 어렵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실패하였지만 당시 전두환 세력에 대한 독재체제에 대해서 저항을 하였고, 그것이 6월 민중항쟁의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5?18은 민주화운동이 가장 적합하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이제부터는 당시 4.19혁명과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시대상황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단독정권 수립을 반대하는 통일 민족국가 수립을 반대하는 통일 민족국가 수립세력의 저항 속에서 이승만 정권은 불안정하게 출발하였습니다. 그런 이유가 정치적으로 6.25전쟁 후 국군과 경찰력의 증강 등으로 국회에서 취약한 지지기반을 물리적으로 보완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런 반민주주의 경향은 이승만의 권위주의적인 성격과 정권의 핵심을 이루는 친일 관료, 경찰집단의 비민주적 성향과 어울려 강화되었습니다. 또한, 정권야욕을 충족시키고 장기집권을 충족시키고 장기집권을 꾀하는 과정에서 1950~1951년의 국민 방위군 사건, 1951년 거창 양민학살사건, 1952년의 5.26정치 파동과 발췌개헌, 1954년 11월의 4사5입 개헌, 1955년 9월 대구 매일신문 테러사건, 1958년 12월의 보안법 파동 전국의 학생들과 국민들의 흥분은 극에 달한 것입니다.5?18 광주민주화운동의 경우는 5월 17일 밤의 전국비상계엄 선포에 따라 김대중 등이 연행되어 야기되었습니다. 김영삼의 제명으로 인한 부마항쟁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확대 심화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증폭되는 원인이었습니다. 그 심화의 원인으로는 첫째, 김대중 추종세력의 광주잠입 유언비어 유포로 시민들을 조직적으로 자극한 것으로 들 수 있습니다. 둘째, 시민입장에서는 5.18 민주화 운동은 반대시위사태, 계엄군입장에서는 계엄하의 시위는 불법이고 초등단계의 진압이 상책이라 판단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저항과 진압이 더 가열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영남 출신의 정당성이 취약한 집권과 이에 따른 인사의 편중과 경제 발전의 불균형으로 광주의 지역감정이 심화되었습니다,지금부터는 4.19혁명과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 우선 표를 통해 그 전체적인 모습을 확인하고, 4.19혁명과 5.18 광주민주화운동 사이의 공통점과 차이점에 대해서 애기하고자 합니다. 우선 표를 통해 전체적인 비교를 해보겠습니다.*4?19혁명과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전체적인 틀 비교*4?19 혁명5?18광주민주화운동시기1960. 02.28~ 04.251980. 05.17~05.27지역대구, 마산→ 전국적으로 확산광주, 전남지역에 한정전개과정60년 2월 28일 대구경북고교 학생시위→3.15마산의거→4.11마산 2차의거(김주열시신발견)→4.18고대생데모(운동의 전국화)→4?19혁명 발발→교수단 데모→이승만의 하야80년 5월 17일 비상계엄전국확대(김대중포함 야당지도자 체포)→서울, 광주 지역공수부대배치→5.18전남대시위대 시작→5.21시민무장→5.27 계엄군의 진압갈등구조학생세력을 중심으로 한 지식인, 도시빈민, 노동자, 중소상공인들을 한축으로 하고, 이승만과 자유당독재 및 그와 연합한 부패관료들을 대응 축으로 하는 갈등구조가 성립.시민들의 민주화 의지와 전두환 신군부의 권력의지의 충돌로 성립.저항대상이승만과 자유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즉, 이런 각각 다른 상황 속에서의 독재체제 안에서 민주화를 이룩하려는 학생과 시민들의 노력이 이 두 사건의 첫 번째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둘째, 두 사건 모두 봄이라는 계절에 일어났다는 점입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봄이라는 계절의 특수성에서 보았을 때, 봄은 날씨도 따뜻하고 새로운 뭔가를 시작하는 활동적 시기라는 것에 기인합니다.셋째, 4?19혁명과 5?18 광주민주화운동 모두 처음에는 학생이 주도하였다가 나중에는 시민이 동참하게 되면서 민중 항쟁이라고 할 수 있는 성격을 지니게 된 것입니다. 물론, 4?19 혁명이 조금 더 전국민적이고 시민참여도가 더 강하다고 애기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5?18 광주민주화 운동은 대학생들이 주축으로 움직였기 때문에 4.19혁명에 비해 대중성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전체적인 틀로 보았을 때는 둘 다 학생들이 주도를 먼저 하였고 나중에 시민들이 동참하였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넷째, 4?19혁명과 5?18 광주민주화운동 모두 인위적으로 생긴 사건이 아니라, 자생적이면서 비조직적인 형태로 정의감에 불타는 학생들이 집단적으로 행동을 한 것이라는 점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 과정 속에서 사태가 변절되고 발전되어갔다는 것입니다.마지막으로 공통점을 찾자면, 두 사건 모두 피를 불렀고 많은 희생자를 낳았다는 점입니다. 대체적인 통계자료를 보면 4?19혁명이 대략적으로 사망이 190명 정도이고 부상이 6,400명에 이릅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역시 이와 비슷한 154명의 사망에 3,208명에 달합니다. 하지만 이런 공식적인 통계보다 실제 더 희생자가 많을 것이라는 의견이 분분하며 실제로 요즘에도 5?18 민주화 운동 시기로 추정되는 유골들이 심심찮게 발견되고 있습니다.4.19 혁명5.18 광주민주화운동사망자190명154명부상6천400여명3208명행방불명?70명지금까지는 4?19혁명과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공통점에 대해서 애기해보았습니다. 몇몇째, 4.19혁명이 대구, 마산에서 시작하여 전국적으로 확산이 되었다면 5.18 민주화 운동은 대구와 전남지역에 국한되었다는 점입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4.19 혁명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비해 전국민적인 성격이 더 강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고등학생, 중학생, 시민들 누군가 얘기할 겨를도 없이 모두 나와 독재체제에 대한 강한 저항을 하였고, 그런 그들의 행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던 것입니다. 반면, 5.18 광주민주화운동에서는 이런 대구와 전남지역에 국한되었던 것의 의견이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로 전남과 광주지역의 특수성을 다른 지역의 그것과 구별되는 독자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1960년대 이래 박정희 정권의 지역편향적인 개발정책에 따라 대구, 전남지역이 저개발=낙후성과 정치, 사회, 문화적인 소외의 심화현상을 겪었다고 애기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또한 당시 '호남민중의 정치적 희망‘으로 여겨졌던 동향출신의 정치지도자 김대중 체포가 대구, 전남지역에서 범민중적 저항의 표출로 이해가 된다고 합니다. 즉 사회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호남민중의 총체적 파탄의 상태에서 광주민중항쟁이 전개되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이 견해는, 전라도 민중들의 일반적인 정서와 행태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주장이 품고 있는 양면성은 항쟁의 발단과 발전과정에 있어서 가장 위력적인 추동력을 설명해주는 대신 항쟁의 지역적 성격(지방색)을 가장 주요한 측면으로 간주해버릴 개연성이 크다는 점이 있습니다. 반면 둘째로 전남, 광주의 지역문제를 공간적으로 물화(物化)시키는 것에 반대하고 한국사회 모순의 보편적 성격에 보다 주목하는 경우로서, 지역문제란 일국차원에서의 계급문제의 다른 표현으로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광주민중항쟁의 경우에도 한국자본주의의 전개과정에서 배제된 한국사회의 총체적인 모순이 1980년 5월 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전남. 광주라는 지역을 통해 폭발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견해는 호남민중의 무차별적 동질성에 대해
    사회과학| 2007.05.20| 11페이지| 5,000원| 조회(5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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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정희의 경제개발과 그의 리더쉽
    박정희의 경제개발과 그의 리더십Ⅰ경제개발의 의의 및 과정?경제상황)① 6.25전쟁의 파괴 : 1950년 6월 25일 북한 공산군의 불법적 남침 전쟁으로 많은 건물을 비롯하여 도로, 다리, 공장, 발전 시설 등이 파괴되었다. 남한의 전쟁 사망자는 15만 명, 행방불명자는 20 만 명, 부상자는 25 만 명이었고, 이재민은 수백만 명이나 되었으며, 물적 피해는 약 18 억 달러로 공업과 발전 시설의 40% 이상, 그리고 주택의 ⅓ 정도가 파괴되었다.② 인구 증가 : 6?25 전쟁 기간 중 많은 피난민들이 남한으로 몰려 생활이 더욱 어려웠다.③ 외국의 원조 : 6?25 전쟁 후여서 여러 가지 생활필수품, 식량 등이 부족하여 미국을 비롯한 자유 우방국들이 보내 주는 옷, 식량 등을 받아 이용하였다.?경제개발의 의의우리나라에서 1962년부터 경제발전을 위해 5년 단위로 실시하고 있는 경제개발계획.1962∼1981년까지 4차에 걸쳐 경제개발계획이 실되었으며 1982년부터는 그 명칭이 경제사회발전계획으로 바뀌어 실시되고 있다. 1982∼1986년의 제5차, 1987∼1991년의 제6차, 그리고 1992∼1996년의 제7차 경제사회발전 5개년계획으로 이어졌다.?경제개발의 배경 및 목적한국경제의 공업화전략은 해외시장 개척에 의한 수출촉진을 도모하려는 수출주도형 또는 외부지향적 공업화정책으로서 수입대체산업화, 수입대체산업의 수출 산업화, 농업 근대화, 사회개발을 그 내용으로 한다. 즉, 외자를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경제성장과 근대화를 달성하려는 정책이며, 이 경우에 국내시장 형성보다는 노동 또는 자원면에서의 비교우위를 이용하여 수출촉진에 중점을 두게 된다.이와 같은 전략을 채택하게 된 배경은, 자본과 부족자원이 절대적으로 빈곤한 반면에 값싼 노동력이 풍부했기 때문이다.?1차 경제개발의 목표는 농업생산량을 증대 시키는 것이었고,?2차 경제개발의 목표로는 공업화추진과 농업근대화추진이었다.?3차 경제개발의 목표로는 중화학공업증진과 수출증대였는데 이때 전 세계에 불어닥친 제1차 오일쇼크상으로 하였다. 이 계획의 가장 큰 성과는 한국 경제의 고질적 문제였던 물가를 획기적으로 안정시킨 것이며, 이를 바탕으로 86년부터 3저현상의 유리한 국제환경변화를 맞아 경상수지의 흑자전환, 투자재원의 자립화로 경제의 질적 구조를 튼튼하게 하였다.결과 :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사상 처음으로 무역 흑자를 기록하였다〈제6차 경제사회발전 5개년계획〉제6차 경제사회발전 5개년계획(87~91)은 ‘능률과 형평을 토대로 한 경제선진화와 국민복지의 증진’을 기본목표로 설정하고, 21세기에 선진사회에 진입하기 위한 제1단계 실천계획으로 수립되었다. 특히 흑자기조로의 전환에 따라 선진국의 보호주의 압력과 대내적인 소외부문의 소득보상욕구가 더욱 커지게 되어, 이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으로 자율·경쟁·개방에 입각한 시장경제 질서의 확립, 소득분배 개선과 사회개발의 확대, 그리고 고기술부문을 중심으로 한 산업구조의 개편을 중점과제로 삼게 되었다. 그 결과 경제성장률은 목표 7.5 %를 상회하여 10 %를 달성하였으며, 실업률은 2.4 %로 고용안정을 가져왔고, 저축증대에 노력한 결과 국내저축률은 당초 예상보다 높은 36.1 %에 이르렀다. 한편 수출의존도는 계획보다 낮은 26.4 %로 떨어져 경제기반이 보다 탄탄해졌다. 그러나 물가는 예상보다 높은 3.3 %로 억제하는 데 그쳤다. 국제수지면에서 수출은 계획보다 늘어났으나 수입이 더 크게 증가하여 87억 달러 적자를 기록, 흑자기조 정착에는 실패하였다. 산업구조는 제조업의 비중이 91년 28.5 %로 낮아지고, 농림어업도 7.7 %로 떨어진 반면, 기타 서비스 부문은 크게 늘어났다. 지역간 균형에도 힘쓴 결과 도로포장률은 목표 70 %를 웃도는 76.4 %를 이룩하였다.?경제 개발 계획의 성과 및 문제점제 1 차 계획('62∼'66) : 울산 정유 공장 준공, 수출 1억 달러 목표 달성제 2 차 계획('67∼'71) : 경부.공인.호남 고속 국도 개통, 서울 -부산 간 자동 전화 개통제 3 차 계획('72∼'76) : 포항 종합이 한 때 1억 달러를 밑도는 등 외환위기 징후까지 나타났다.한 마디로 말해서,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은 총체적 부실을 출발점으로 했던 것이었고, 이런 실패의 결정 적 원인은 위에서 언급한 금융활동 동결조치, 이것이 금융시스템의 정상적 작동을 저해했던 것, 이외에도 후술하는 증권파동과 통화개혁도 경제정책 실패의 대표적 사례로서, 후손에 길이 교훈으로 남겨주어야 할 것들이다.박정희시대와 경제개발* 개발독재에 대한 설명1. 박정희식의 개발독재는 경제성장을 위해 바람직한 대안이었으며, 현재에도 그 필요성이 지속되고 있다는 입장2. 개발독재는 산업화 초기인 박정희시대에는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으나, 현재에는 환경변화로 그 필요성이 상실되었다는 평가 - 산업화 초기단계에서 민주주의를 선택하여 발전을 성공적으로 이룬 선례가 없다는 주장. 박정희 체제하의 경제발전은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밖에 없으며 그 과정에서 수반된 희생은 가치선택의 결단에 부수되는 어쩔수 없는 손실이라는 견해3. 개발독재는 박정희시대에도 바람직한 대안이 아니었으며 독재의 정당화 논리에 불과하다는 비판론 - 독재형태가 아닌 민주적 방식에 의해서도 경제발전은 가능하였으며, 그것이 장기적으로 볼 때 더욱 건실한 발전의 경로라는 입장. '다소 지연될 발전'과 '민주주의'의 결합이 '급속한 성장'과 '권위주의'의 결합보다 현실적으로, 규범적으로 보다 바람직한 후발산업화 발전모델이라는 주장.* 과연 박정희정권은 개발을 위한 독재를 하였는가, 아니면 독재를 위해 개발을 주창하였는가. 최근의 연구에서 보면 개발은 쿠데타와 집권연장을 위해 내세운 구실이었음미 명백하다. 더욱이 유신이라는 독재의 강화는 경제적 심화발전과는 관계없는 정치적 야욕에 의한 것이었다. 박정희정권은 삼선개헌, 위수령, 유신, 긴급조치 등 독재강화의 역사였다. 경제성장은 이같은 지속적인 독재의 강화를 반드시 요구하는가.Ⅲ.박정희 정권의 산업화 전략의 형성과 특징1)성장제일주의쿠데타 이후 박정희는 경제제일주의, 성장제일주의를 주장. 이공업화의 선언이었다.중화학공업화 정책은 1971년부터 구상되어 1973년 선언되었다. 이 정책은 주도업종을 철강, 비철금속, 조선, 기계, 전자, 화학 등 6개 업종으로 선정하였다. 그리고 중화학공업화 전략으로 규모의 경제를 채택하고, 규모의 대형화에서 파생되는 국내시장의 협소로 인한 제품판매의 애로를 해소하기 위해 중화학공업을 수출산업으로 육성하기로 결정. 또 연관산업을 집단적으로 유치, 개발하기 위한 산업기지화 계획이 마련됨.*중화학공업화의 문제점1. 1970년대 데탕트에 따른 안보 상황의 변화는 방위산업의 육성을 절감케 하여 박정권은 방위산업의 육성과 산업구조 고도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한 중화학공업는 경제논리보다 안보논리에 영향을 받게 됨. 더욱이 중화학공업화가 유신체제의 명분으로 이용됨 -정치논리에 의해 영향을 받음.2. 가시적인 성과를 위해 단기간에 투자, 이로써 중복 과잉투자 문제에 곧 직면함. - 1979년에 들어서면서 중복과잉투자는 큰 문제가 되어 투자조정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됨.3. 집중적 투자는 산업구조의 유기적 관련성을 고려하지 않은채, 손쉬운 대기업 위주로 진행되어 무차별 다각화를 통한 재벌의 팽창으로 나타남. 대기업 중심의 중화학투자는 재벌성장과 비관련 다각화의 발판을 만들어 파행적인 산업구조를 만듬. (현대 1974년 9개 기업에서 1978년 31개로 늘어남. 삼성은 24개에서 33개, 대우는 10개에서 35개, 럭키는 17개에서 43개)4. 중화학투자가 지역적으로 편중됨. - 포항(철강), 온산(비철금속), 여천(화학), 울산(조선), 거제(조선), 창원(기계), 구미(전자) 등Ⅳ시대별 박정희 정권의 평가 및 그의 리더십 평가가. 재평가의 필요성▣민주당 정부가 실현 가능한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한 것이나, 50년말 이래 우리 경제가 안정을 찾으면서 성장의 기틀을 잡았던 사실은 5ㆍ16군사 쿠테타 세력에 의해서 완벽하게 은폐되었다. 사실 경제성장은 이미 50년대 후반부터 시동을 걸었었다. 성장률이 57년에 7.6%, 58년 5.는 증권시장을 다시 휴장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9월 4일 재개장). 또한 9월 4일에는 삼성증권까지 영업정지를 당했다.증권파동 이후 증권시장은 기업의 직접자금을 조달하는 시장 및 건전한투자의 장이 아닌, 투기장이자 도박장으로 인식되는 계기가 되었고, 이에 따라 기업경영을 은행대출에 의존하는 차입경영 폐습도 정착되고 말았다.증권파동은 기업의 자금조달을 더욱 어렵게 하여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차질을 빚게한 결정적 원인으로도 작용하였고, 동시에 화폐개혁이라는 또 다른 경제실책을 불러오기도 하였다.또 다른 경제정책 실패 사례 3 : 화폐개혁▣62년 6월 9일의 긴급통화조치로 화폐개혁 단행. 구권 화폐의 유통과 구권 화폐에 의한 거래를 금지하고, 구권과 구권으로 표시된 각종 지급수단을 금융기관에 예입토록 조치하였다. 1천만원 이상의 예금은 완전 동결하고, 동결된 예금은 특별지급준비금으로 한국은행에 예치토록 했다.화폐개혁의 명분은 경제개발계획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고소득층의 유휴자금을 끌어내자는 것이었으나, 1천만원 이상 신고자는 6.1%로서 자금편재현상은 그렇게 심하지 않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감각적 판단의 위험성을 증명.)화폐개혁은 신용경색을 불러옴으로써 경제혼란만 가중시킴. 금융시스템의 신용창조가 제대로 작동할 수 없게 됨에 따라 61년에 이어 62년에도 통화증발을 유발, 화폐발행액 증가율은 전년말 대비 4.4%로서, 성장률 2.1%에 비해서는 너무컸다.증권파동의 여진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화폐개혁까지 가세하자, 금융기관의 부실화가 더욱 진전되고 신용경색이 극심해졌고. 6월 16일에는 지급준비율을 14%에서 10%로 인하했으나, 신용경색현상은 계속됨. 결국 7월 13일에는 예금동결조치를 해제되었다.또한 12월 31일에는 4개 시중은행에 대규모 증자를 실시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은행별 자본금을 각각 3.5-4.3억원에서 그 세 배에 가까운 10-11억원으로 증자했다..박정희 정권의 경제발전전략의 성공과 그 배경▣이상과 같은 경제정책의 중대한 하였다.
    사회과학| 2007.05.20| 14페이지| 3,000원| 조회(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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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학농민혁명운동의 성격과 한계점
    500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체제를 유지 해온 조선왕조는 자랑스러운 역사일수 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 긴 세월동안 변화 또는 혁명이 없었다는 것을 뜻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기간(체제)은 영원할 수 없었고 일본을 통해 근대적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어쩌면 신라가 당과 연합하여 삼국을 통일했을 때부터 시작될 수 있는 동북아시아의 중화질서, 사대자소(事大字小)의 중국 중심 세계관이 일본에 의한 개항과 함께 무너지게 된 것이다. 국가가 서로 대등하다고 생각하는 관념(근대적 관념?국제법 질서)의 개항과 하늘과 땅 사이에 수직적이었던 관계(계급)가 하늘 아래 모두가 똑같은 존재가 되는(수평적 관계) 개혁이 시작된 것이다. 개혁!! 상놈은 죽어서도 끝나지 않고 자식에게까지 상놈의 신분을 물려주는 고통을, 뒷짐 지고 팔자걸음으로 천천히 다가오는 양반을 보면 머리를 땅에 처박아야 했던 농민들에게는 아니 단지 그들만이 아닌 500년이라는 긴 시간의 축척만큼 조선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뒤집고 뒤엎고 또 뒤집고 싶었던 그들의 가슴 속 영원한 소망이 왜 그들 스스로의 힘이 아닌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의도에 의한 힘으로 인해 변화(개혁)하게 되었을까?이미 1793년 1월에 루이 16세의 목을 자르고 혁명에 성공한 프랑스와의 비교?대조는 혁명을 할 수 없었던 조선사회의 문제점을 알아볼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프랑스조선특권층귀족, 성직자양반, 선비제3계급부르주아(자본계급)부농(지주층)농민?천민(농노)농민?천민인간의 지식과 기술이 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축척됨에 따라 땅에서 생산된 모든 물질이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지는 물질로 서서히 변화되고, 단조로웠던 계급과 그 속의 계층들이 여러 갈래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자본의 중요성을 알려줬고 부자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돈이 많은 부자라고 해서 특권이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속한 세상은 계급신분사회였기 때문이다.경제 사회적으로 성장한 계급이 강화된 정치 참여 욕구 수준과 실제적 욕구수준 사이에 갑작스러운부르주아)그들은 자유와 개인주의를 주장하였다. 그들은 사회적 상승에 대한 장애물과 특권층에 대항하고 나섰다.조르주 뒤프의 말처럼 부르주아들은(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행동이지만) 피지배층과 함께 싸웠다. '자유'와 '평등'은 모두를 하나로 묶을 수 있었던 것이다. 계몽사상과 서민출신의 성직자들, 자유주의적 귀족들의 자유?평등을 향안 노력과 도움, 삼부회라는 기회로 찾아온 개방적 정치구조와 그것을 통해 피지배층과 힘을 합쳐(또는 이용해) 지배층과 싸운 부르주아들의 실천이 혁명을 가능케 했고 농민들은 자신들의 힘(폭력)으로 그것을 성공 시켰다.반면 조선의 자본계급(부농)들은 최악의 상황에서도 혁명이 없었던 우리의 지난 역사가 말해주듯 특권층과 싸우기보다는 자신들의 위치(처지)를 상승시키기에 여념이 없었다. 계급구조의 모순을 스스로 자초한 조정의 무관심과 무능함을 통해, 오히려 조정 스스로가 재정적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자본계급의 불법적?편법적 신분상승 행위를 이용했다. 지도층은 파벌싸움과 세력다툼에 여념이 없었고, 특권층은 자신들의 이익만 생각할 뿐 피지배층의 계몽?인권과 근대화에 대한 고민은 극소수의 인원들만이 했으며 그들 또한 낙향한 선비거나 몰락양반들이었다. 자본계급들에게 혁명(폭력)이라는 최후의 수단을 상상할 수도 없는 너무나도 쉽게 자신들의 욕구?욕망을 충족할 수 있는 현실이 있었던 것이다. 남은 것은 무엇인가?16909.2%53.7%37.1%172918.7%54.7%26.6%5%178337.5%57.5%1.5%185870.3%28.2%양반 상민 노비조선 후기의 신분별 인구변동(대구지방)피지배계층은 3대7의 싸움을 생각하고 실천할 수 있었을까? 조선은 혁명을 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계급사회의 균형이 무너진 비정상적인 시기(모순된 봉건사회) 일본에 의해 조선은 개항을 하게 되고, 사회의 급격한 변동(자본주의 유입)을 겪게 된다. 개항과 함께 조선에서도 진보적 지식층들이 생겨났고 그들은 김옥균을 중심으로 개화당이라는 조직을 형성했다. 임오군란 이 달랐다. 조정과 탐관오리들의 부패, 외세의 침입으로 인한 혼란, 전염병과 천재(天災), 사상적으로 유교의 폐해(당쟁과 봉건체제의 유지수단, 시대의 흐름에 변화?적용될 수없는 끝없는 도덕성 요구)는 새로운 사상의 요구와 전파에 날개를 달아주었고 평등?개혁?외세배척을 본바탕에 둔 동학은 너도나도 양반이 되었던 그 시기의 무언가 변화를 간절히 원했던 그러나 왜놈들은 거부했던 농민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을 것이다.탐관오리들의 행패도 모자라 일본의 수탈은 가장 기본적인 그리고 혁명발생의 핵심적 원인인 극심한 식량난을 발생시켰다. 더 이상 참을 수 없거나 잃을 것이 없던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유일하고 또 최고의 무기인 폭력을 사용한다.중세적 계급사회의 모순을 없애고 자유와 평등을 찾기 위해 투쟁하는 과정은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를 찾는 행동이며 사회의 발전적 미래를 동반한다. 그러나 그들의 이러한 투쟁, 즉 혁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그 혁명의 반대세력과의 대결에서 승리하여야만 한다. 중세 봉건계급사회를 타파하기 위한 피 계급층의 투쟁은 근대화로 넘어가는 비슷한 시기에 전 세계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서양과 동양은 문화적으로 차이가 있고, 그것을 포함시켜 그 과정을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공통점무능한 지도자, 봉건계급사회, 민중의 불만에 대한 지도층의 부적절한 대응, 극심한 식량난프랑스차이점조선◎계몽사상의 전파(자유?평등)와 인접국의 혁명사례.◎폐쇄적 신분구조와 그로인한 부르주아들의 불만◎중앙 집권에서의 자유주의적 귀족(평민들을 인권과 자유를 획득을 도움)◎유교적 도덕관념◎국가 재정문제로 인한 암묵적?필요적 신분상승 허락 그로인한 신분구조 파괴◎문신주의로 인한 군사력의 약화 그로인한 강대국의 개입◎소수개혁파의 혁명 실패(갑신정변)조선 농민들의 투쟁 상대는 조정에서 왕의 정치를 더럽히는 민씨정권과 지방의 탐관오리, 양반과 부농이었다. 지배층은 유교적 이데올로기로 5세기를 넘어서는 국가체제를 유지했다. 조선의 민중은 위로는 왕에서부터 가장 기본단위인 가족의 가장에 이르기까지 따르 쓸 존재이기는커녕 자신들의 중요한 수입원 중 하나였다. 이러한 상황의 결과는 고스란히 힘없는 민중들에게 돌아갔고 그것은 전봉준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자신의 아내가 제대로 먹지 못해 병들어 죽고, 아버지가 탐관오리의 횡포로 인해 죽음을 당했다는 것은 전봉준이 왜 농민의 지도자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말해 준다.1890년대 초부터 왕성한 활동을 펼쳤던 동학은 당시 민중들에게 많은 관심을 유발시켰다. 동학은 조정으로부터 포교의 자유와 자신들의 정당성을 인정받고 싶어 했다. 그러나 92년의 척왜양 성격이 점점 반봉건성격으로 변화한 것은 순순한 종교적 목적의 활동에서 계급투쟁으로 변화했기 때문이다. 그 변화의 요인은 투쟁지도자세력들의 등장 때문이다. 전봉준이 그들의 핵심이었다. 보은집회에서부터 그 움직임은 서서히 들어난다.189210.20동학교도, 공주 신원운동11.01동학교도, 삼례 신원운동189302.11동학교도, 광화문 복합상소02.14동학교도, 서울쾌서사건03.04동학교도, 보은 집회03.11동학교도, 금구 원평 집회04.02동학교도, 보은 집회 회산11월중사발통문 거사 계획(남접측)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들이 서구의 ‘민회’를 거론하였다는 점이다. 민회란 요즘의 국회와 같은 것이니 정치제도에 대한 이들의 높은 의식 수준을 짐작하게 한다. 이들은 이미 서구의 정치제도와 문물을 소개한 신문과 책자를 보고 백성의 의사를 전달할 수 있는 선진 제도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1883년 갑신정변의 주역들이 발간한 에 서양의 정치제도가 소개된 이후 지식인층에서는 그런 글들을 쉽게 구해 볼 수 있었다.우윤의 글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당시 지방 지식인들의 정치적 수준은 이미 봉건적 계급사회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이들에게 동학이라는 연결망의 장점과 사상은 커다란 도움이었지만 동학의 최고 지도자인 최시형의 소극적인 태도는 큰 걸림돌로 작용했다. 동학교도들이 원하는 것은 포교의 자유였지 지배층의 투쟁함으로써 역적으로 몰리는 것은 아니었다. 반대로 농민지도자들이 원하는 역사학자들이 보기에는 너무 한쪽 편에만 서는 입장일 수도 있었던 것이다.덧붙여 말한다면 이것은 농민전쟁이라 말하기에는 너무나 큰 사건이었다. 당시 농민들은 단지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운 것도 탐관오리의 징벌만을 목적으로 싸운 것도 아니었다. 지도자 전봉준의 의도는 그 의도를 확실히 보여준다.전봉준 등이 일으킨 1894년의 제1차 농민봉기는 본질적으로 儒敎의 忠君愛民사상에 바탕하되 체제내 정권교체를 겨냥하여 일으킨 ‘무장 개혁운동(armed reform movement)'이었다고 보며 그 제2차 봉기는 1894년 여름에 조국을 침범한 일본 침략군을 몰아내기 위한한국 근대사상 최초의 본격적 義兵이 벌인 ‘항일전쟁’이었다고 파악한다.1894년 동학농민혁명운동의 시기 구분단계시기중요내용중요사항이유(배경)11894년 1월 11일~ 3월 3일고부민란전봉준이 주도고부군수의 착취23월 20일 ~ 5월 7일전주입성제1차 동학농민혁명‘사대명의’안핵사의 동학교도 숙청35월 8일 ~ 9월 12일전주화약?집강소설치폐정개혁안외세 개입(청일)49월 13일 ~ 연말청일전쟁, 일본군과의 전투?패배제2차 동학농민혁명북접 합류일본의 침략 우려유영익의 이러한 주장은 개혁적 정치성격을 잘 보여준다. 농민봉기의 제1차 시기의 집강소 운영은 그들의 민주적인 정치제도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천한 핏줄인 농민과 천민이 국가운영제도에 참여하다니? 지금이 아닌 당시 사회에서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놀라운 것이었다. 농민들은 지배층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지도자들은 농민들의 입장에서 지배층과 싸웠다. 그것은 단지 승리하나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입장은 분명했다. 그것은 그들이 처음 시작을 알렸던 사발통문에서 사대명의, 페정개혁안에서도 꾸준히 나타난다. 평민과 천민들의 보다 낳은 신분보장이었다. 노비문서를 불태워 없애거나 양반을 직접적으로 공격하는 모습은 계급투쟁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하지만 이와 반대로 그 정치적 성격이 사회구조를 완전히 변혁 시키는 것이었는지에 대한 의문점이
    사회과학| 2007.05.20| 9페이지| 5,000원| 조회(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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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두개의 한국 서평 평가D별로예요
    두 개의 한국은 워싱턴포스트지의 기자인 돈 오버도퍼의 저서로서 그의 오랜 한국취재 경험과 한국,북한,미국,중국,러시아 등의 많은 정치인 및 관계자와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일제강점기 이후 이승만정권의 1공화국부터 김영삼 정부까지의 국제관계와 남북관계에 비중을 두어 순차적으로 기술하고 있다.중요한 점은 그가 미국인임에도 왠만한 한국인보다도 한국의 역사와 한국인의 정서에 대해 매우 깊게 이해하고 있었고 그를 바탕으로 제3자의 눈으로 한국과 북한에 대하여 비교적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점이 주목할만하다. 이는 책 중간중간의 사실에 따른 순차적인 기술뒤에 짧막한 견해등이 나오는데 이에서 알 수 있다. 또한 저자는 이승만을 제외한 한국의 유력정치인들 예를 들면 박정희, 노태우, 전두환, 김영삼 등과 인터뷰등을 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그들의 대한 사적인 견해와 비사에 대한 진술 예를 들면 전두환의 경우 ‘전두환은 군복대신 남색정장에 옅은 하늘색셔츠를 받쳐입고 있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소파에 비해 한결 간소해 보이는 등나무 의자에 앉아 대담 도중.......중략’(p209), ‘박대통령은 자신의 말이 한마디씩 끝날 때마다 손가락으로 탁자를 쳐서 탁탁 소리를 냈다. 이 역시 감당하기 힘든 스트레스를 받으면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朴대통령의 버릇이었다. 밴스는 카터의 차가운 분기(憤氣)로 회의실 전체가 냉랭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할 수 있었다’ 등의 자세한 상황설명과 인터뷰한 자들의 어투 및 행동등을 생동감 있게 기술하였고 이런 어투 행동 등을 바탕으로 그들에 대한 평가 및 성격에 대한 예측, 또한 1장의 마지막 혹은 일련의 사건의 전개후 그에 대한 인터뷰한 사람들의 회상적인 내용의 글을 기술. 예를 들면 광주5.18 사건을 광주에서 15년 가까이 살았던 선교사 마사 헌트리는 자기가 목격한 장면을 이렇게 설명했다. ‘30세 정도 된 사업가로 나도 잘 알고 있던 한 남자가 (다른 젊은이들과 함께 타고 가던) 버스에서 끌어내려진 다음 군인들의 발길질에 얼굴을 심하게 맞아 결국 한 쪽 눈을 실명하고 말았다. 갓 서른을 넘은 또 한 여성은 아이 둘을 데리고 주일학교에 가던 중 구타를 당해서 보도에 의식을 잃고 버려졌다. 그녀는 머리부분에 봉합수술을 받았고 후유증 으로 몇 달 동안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녀의 남편은 그 일요일 오후 학생들과 함께 시위에 가담해 군인들과 싸웠다. 도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와 같이 기술하여 책이 근현대사 라는 딱딱할 수 있는 주제에도 불구하고 소설과 같이 흥미롭게 다가갈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이는 책의 분량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몰입도를 올려줄 수 있는 요인이었다. 또한 책의 기술이 16개의 장으로 순차적으로 이루어져 있고 후에 알려진 사건의 내막 등의 재구성 또한 매우 잘 이루어져 있어서 이해하기 쉬웠다. 가장 좋은 점은 근대사에 대한 단편적인 지식들의 순차적,시기적 정리를 하는데 매우 큰 도움이 되었다. 또한 ’지난 해 이날 9시 45분경 아래층 집무실에 오렌지색 한복차림으로 내려온 당신과 같이 식장으로 향했다. 그것이 당신이 청와대를 생전에 마지막 하직하는 길이었다. 작년의 오늘은 나의 일생 중 가장 긴 하루요 가장 괴롭고도 슬픈 하루였다.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것 같은 허탈에 빠진 그 날이었다. 모든 것이 다 귀찮고 나의 심신에서 모든 용기와 의욕을 잃어버리게 한 그 날이었다. 그 로부터 1년이란 세월이 벌써 흘렀다. 지난 1년 남모르게 수없이 많이 혼자 울기도 했다‘ 내용의 일반인이 쉽게 구해서 볼 수 없는 박정희의 일기 내용등으로 인해서 지도자들의 인간적인 면모등을 파악하여 독자 나름대로의 주관적인 평가를 할 수 있는데 도움을 주었다.책이 21세기 유일의 분단국가 한국의 타의에 의한 분단임에 초점을 맞추어 기술한 것은 분명하다. 그 이유는 남북한의 외교 및 통일관계에 있어서 제8장 서울올림픽의 국제적 위상 과 같이 올림픽을 중심으로 그와 관련된 KAL858 폭파사건과 이와 관련하여 소련과 미국등 강대국의 외부권력 개입에 관한 내용에서 알 수 있다. 특히 북한의 핵문제에 있어서 미국의 개입에 관한 자세한 내용 등은 우리의 입장을 배제하고 과연 핵문제에 대해서 미국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게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책에는 강대국의 권력개입에 대한 내용은 나오지만 미국의 대한 어떠한 책임도 나오지 않는다. 보수언론의 대표적인 워싱턴포스트지의 기자이기 때문인가? 단순히 베테랑 미국기자의 시선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착각하지는 않았는가? 하는 의구점이 들었다. 이 책에는 한국 현대사에 있어서 분명하게 보이는 미국의 책임에 대한 언급은 나오지 않았다. 교묘한 어투와 논리로 피해가면서 미국은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서 개입하였을 뿐이라는 논리로 느껴진 것은 나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또한 미국 즉 강대국 입장에서의 오만한 서술 예를 들면 ‘핵무기 개발을 둘러싼 이 에피소드는 미국이 마음만 먹으면 남한 정부가 아무리 굳센 의지를 가지고 추진 하는 일이라 할지라도 저지할 수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였다.’(P120) 등의 부분은 중간중간 글의 읽는 흐름을 끊었다. 또한 김일성의 비롯한 일부 북한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이 부정적인 내용을 강조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원조로 연명해 가는 나라’ 라는 문구와 같은 표현은 과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책은 분명히 지구상의 최후의 분단국가에 초점을 두고 있음에도 북한의 연방제통일방안이나 김영삼정부의 민족공동체 통일방안 김대중정부의 햇볕정책의 상세한 내용 등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책에도 외부의 힘에 의하여 갈라진 한국이라고 기술하고 있지만 돈오버도퍼라는 미국기자 즉 미국인들을 비롯한 제3자의 눈에 우리의 의지와 자주적인 역량은 아직도 크게 작용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또한 정보공개법(FOIA)에 의해서 쓰여진 자료들의 출처와 정보가 명확하지 않은데서 오는 의구점과 미국의 음모론 등에 대한 내용은 서술되지 않은점 등은 이책의 한계를 분명히 보여준다.이러한 점에도 불구하고 이책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책의 서두에 나왔듯이 한반도는 미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과 러시아의 4대 강대국의 이익고 안보가 교차하는 세계 유일한 곳으로써 냉전시대를 거쳐 지금까지도 가장 위험한 탄약고라고 평가하고 있다. 이것은 한반도의 문제가 단순한 우리 민족의 문제만이 아닌 동북아시아의 번영과 평화를 위한 중요한 문제이고 또한 세계의 문제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는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를 부여하는가? 아직도 한국에 대해서 모르는 외국인들이 많다. 또한 그들은 한국을 단순히 지구상에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분단국가로 생각하지 않고 단순히 두 개의 한국이라고만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하는가? 남과북의 이념차이와 체제의 차이로 인한 정치 경제적 차이는 이미 꽤 벌어져있고 그래서 분단이 고착화 됨에 따라 요새 젊은사람들은 과연 통일은 이루어져야 하는가? 하는 의구심이 드는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돈오버도퍼등의 미국이나 기타 열강등의 이익이나 국제정세를 고려하지 않고 우리 남한, 북한의 자주적인 역량으로 통일을 해야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거두절미하고 가장 중요한것은 우리의 관심이다. 이미 통일문제는 우리에게 관심밖 이야기 된것이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은 우리에게 어떤 효과를 주는가? 통일은 왜 이루어져야하는가? 에 대하여 말하여 보려고 한다. 우선 통일의 필요성은 정(옳은일)과 이(이로운일)로 파악해야 한다. 먼저 ‘정’의 개념으로 보자면 민족정기 즉 우리는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의 같은민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세에 의해 2동강이 나버린것이다. 통일은 우리의 민족정기를 찾아주는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이’의 개념으로 보자면 통일의 효과를 따져봐야 한다. 먼저 경제적인 면으로 비용효과가 있다. 우리사회안에 통일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들은 독일의 예를 들으며 통일비용을 언급하는 사람이 있으나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통일비용을 다 합쳐도 현재의 분단비용보다 작다. 또한 분단비용은 통일의 효과 보다 작다는 것이다. 경제적측면에서 통일의 효과는 우선 규모의 경제를 들수있다. 남과 북의 경제가 통합하여 내수시장의규모가 성장했을때의 이익은 매우 엄청날것이다. 다음으로 정치적효과를 들수있다. 통일을 하면 지금의 군사력은 유지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군을 축소하게 될것이고 더 이상의 징병제도는 필요하지 않을것이다. 또한 사회가 건전하게 발달하기 위해서는 양쪽성향의 것들이 필요한데. 현재 우리는 우리와 다른쪽의 성향 즉 공산당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와같은 사회구조가 변하면서 조금더 건전하게 발달하는 우리사회를 낳게 해줄 것이고 사회 문화적방면으로는 현재 전통문화부분은 발전이 이루어 지지 않고있다. 그이유는 서로의 유익한 것을 삭제하고 금지시 하기 때문이다. 통일후 교류가 활달해 지면 당연히 전통문화의 계승및 발전도 이루어 질것이다. 이와같이 경제적 정치적 사회문화적 차원의 막대한 긍정적 효과및 이득이 발생하는 통일은 꼭 필요하다는 것이다.
    독후감/창작| 2007.05.20| 4페이지| 3,000원| 조회(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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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과학]종교사상의이해(바람직한종교와그렇지않은종교)
    [ 주제 : 바람직한 종교와 바람직하지 못한 종교 그 이유는?]개요Ⅰ. 서론1) 종교란 무엇인가?2) 종교와 인간의 삶Ⅱ. 본론1) 바람직한 종교2) 바람직하지 못한 종교Ⅲ. 결론Ⅰ. 서론1) 종교란 무엇인가?종교를 정의하고 단정 하는 것은 무척 어렵고 애매한 일이다. 종교란 어떤 것이라고 말하기엔 매우 포괄적인 관념이기 때문이다. 종교를 일반 적으로 인간의 정신문화 양식의 하나로 인간 문제의 가장 기본적인 것에 관하여 경험을 초월한 존재나 원리 연걸 지어 의미를 부여 하고 또 그런 힘을 빌려 통상의 방법으로 해결이 불가능한 인간의 불안, 죽음의 문제 , 심각한 고민 등을 해결하려는 것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종교는 단순히 절대적 존재에 대한 믿음, 신앙심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현상들을 여러 다른 학문에 걸쳐 탐구하고 연구 하는 더 나아가 형이상학적, 즉 현세를 넘어선 우주 넘어선 현상들을 탐구한 학문이라 할 수 있다.종교는 원시(자연)종교, 민족종교, 세계종교로 구분 하는데 종교들은 대체적으로 초자연 적인 것 (절대자 또는 절대 경지)에 대한 신앙, 신성한 조재에 대한 의식, 의례, 저마다의 도덕적 규범을 가지고 절대자 대상과의 다양한 의사소통의 방식을 가지고 있으며 각각의 세계관, 인간관, 우주관을 가지고 있다.2) 종교와 인간의 삶종교를 통해서 인간은 자신의 내면적인 전체성을 바라볼 수 있는 힘을 기르며 자기반성의 기회를 갖게 된다. 인간은 자기반성을 통해 자신을 둘러싼 외부의 환경 속에서 대상을 자신으로부터 분리시켜서 대상화하며, 자아를 다시금 생각하는 자아와 생각되는 자아로 구분하고 , 더 나아가 자아와 대상의 공통적인 세계 근원을 추구 한다. 또한 각 종교들이 추구하는 인간관, 세계관, 우주관을 통해 인간은 세계를 바라보는 눈을 기르게 되고 그에 따른 삶을 영위 한다.대다수의 많은 사람들이 종교를 가지고 있고 그 중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부모 혹은 친지들로부터 종교가 대물림 된다. 또 다수의 사람들은 종교를 갖지 않고 있으나 그들 또한 원초적 믿음, 신앙을 가지고 있다.종교를 가지고 있건 있지 않건 간에 우리는 무의적으로 당연 하듯 종교와 연관되어 살고 있다. 우리가 명화라고 불리는 그림과 조각들을 대다수가 종교에 관련 되어있다. 예를 들면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 등이 있으며 유럽 대다수 최고의 건축물은 대부분은 교회건물이 많았다. 우리가 미신이라 칭하는 것, 특정 동물, 물건을 숭배하거나 신격화 하는 것도 종교의 맥락이라 할 수 있으며 종교는 우리들이 수학하는 학문의 기초가 되는 원리를 담고 있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여러 곳에서도 종교와 관련된 여러 일들이 일어나고 그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우리는 종교를 통해 자유와 양심을 깨우치고 인간의 본질적인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종교는 믿음이다. 우리는 그러한 믿음으로 고통에서 이겨내고 희망을 발견 하게 되는 것이다.종교가 형이상학적 현상에 대한 탐구를 하면서 그런 형이상학적 현상을 밝히고 말할 수 있는 방법 즉, 과학, 수학, 철학 등의 학문들을 발전시켜 우리들의 삶을 더욱 윤택하게 해주고 진보를 꾀하였다.종교는 우리 삶의 전반에 걸쳐 영향력을 발휘 하고 있는데 경제, 정치, 문화뿐만 아니라 생활방식, 사고방식, 식생활, 성향(성격)등에 영향 미쳐 인간의 생에 여러 가지 요소 들을 제공해 준다.Ⅱ. 본론1) 바람직한 종교내가 생각 하는 바람직한 종교는 유대교 이다. 유대교와 기독교는 그 뿌리가 같다고 볼 수 있으나 엄연히 다름 종교로 유대교는 천당을 초월적인 세계가 아닌 이 땅에서의 이상적인 삶을 추구 하며 예수를 구세주로 보는 기독교와 달리 그를 단순히 메신저 정도의 인물로 그리고 있다. 유대인이 하느님(여호아)한테 특별히 선택받은 특별한 민족임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오직 야훼만을 창조와 도덕, 정의, 유일한 원천임을 간주하는 윤리적 유일신을 믿은 유일신교이다. 신을 인간을 초월한 존재로 보지 않고 그는 인격자 , 즉 우리 자신 인간과 유사한 존재라고 보고 있다.유대교의 기원은 원죄로부터 고통 받고 있는 인간의 자손 가운데 기원전 약 2000년경에 히브리인(오늘날의 유대인) 아브라함이 신앙의 테스트를 받고 하느님 여호야 로부터 아브리함의 민족 즉 유대민족들을 원죄로부터 해방시켜 구원하는 약속으로부터 시작한다. 여기서 유대교의 선민의식과 유대인의 자존심과 책임의식이 생기고 그것을 바탕으로 집단적 역사의식이 생기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나라 없이 여러 다른 나라에 흩어져 살아가면서 여러 핍박과 고통을 뒤로 하고 토착민족을 위협할 정도로 세력을 넓히고 힘을 가지게 된 원천이라 할 수 있다.이런 선민의식과 현세 지향적인 종교관 때문에 그들은 어느 민족 보다 유대감이 깊고 그들 민족 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결국 그것이 오늘날 세계에서 위명을 떨치고 사는 유대인들의 원천이다. 그들의 가운데는 유대교가 있고 그 유대교로 인해 그들은 항상 당당 할 수 있는 것이다. 유대교는 유대민족 전체의 오랜 역사적 체험을 통한 기록이며 희망의 표현이 고 지혜라고 할 수 있다.내가 유대교를 바람직하다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유대교가 민족 종교로써 조금을 배타, 이타 적인 면이 있지만 신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으로 자신들의 본래의 것을 잃지 않고 정진하였다는 점에 있다. 형이상적인 종교가 아니라 현세지향적인 종교라는 점에 서도과거 신들이 어떤 일 하였다는 사실에 치우친 종교가 아닌 앞으로 나아가는 면이 보인다.2) 바람직하지 못한 종교내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종교는 기독교이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역사적 인물이 구약의 종교적 전통을 이어가 완성하고자 한 종교이나 대부분 기독교가 예수의 종교, 그리스도인의 종교라 생각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종교와 그리스도인의 종교는 엄밀히 말해 다른 개념이다. 그리스도의 종교는 그리스도가 인간으로서 스스로를 인식하고 경험한 종교이며 그리스도인의 종교란 예수를 인간이상 혹은 절대자로 생각하고 그들 예배의 대상으로 삼는 사람들이 경험한 종교를 의미하는 것이다.한국에서의 기독교는 크게 천주교와 개신교로 나누어 졌는데 기독교는 곧 개신교를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되어지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가 예수의 사람과 가르침을 자신의 사람 속에서 가장 의미 있는 것으로 사는 사람들의 종교적 총체이므로 개신교와는 다른 개념을 가진 종교로 곧 개신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기독교는 삼위일체( 한 하느님 안에 세 위격) 하느님에 대한 신앙과 부활신앙을 종교 겸험 가운데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기독교는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 ,예언자, 메시아(구세주),로 나타내고 그가 곧 하나님이라 칭하고 있다. 에덴동산에 아담과 이브가 저지른 원죄로부터 우리인간은 질병과 죽음의 고통 속에서 삶을 살아가야 하는 벌을 받았지만 그 고통 속에서 구세주가 나타나 우리를 구원 해줄 것이라는 맹목적, 헌신적 믿음은 자칫 큰 물의를 일으킬 수 있다. 언제나 자신을 구원 해줄 존재를 기다리기만 할 뿐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과 반성이 부족 될 수 있다. 언젠가 아동학대와 관련하여 TV 프로그램을 본적 있는데 한아이가 내장에 커다란 종양이 생기는 병으로 인해 부푼 자신의 배를 움켜 지고 아프고 고통스러워하고 있는데 그 아이의 부모는 병원에 아이를 보내지 않고 있는 것이다. 부모는 기독교 신자였는데 그런 병운 열심히 기도하고 하느님께 소원하면 나을 것이라는 엉뚱한 말만 하고 있었다. 결국 그 아이의 부모를 설득하여 수술을 하였지만 아이는 1년을 채 살지 못하였다.이런 하느님에 대한 맹목적 믿음으로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이것이 구원이라는 신앙에 대한 절대적 믿음의 병폐이다. 기적은 노력 하는 것이다. 넋 놓고 손 모아 기도만 한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절대자에 대한 종용하고 천당에 가는 것을 너무 중시하는 것 같다. 그런 것 때문에 암흑의 시대라고 불리는 기독교 락의 시대에는 교황의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백성들을 유린하고 핍박하고, 돈이 있는 자들은 천당에 갈 수 있고 돈이 없는 자들은 갈 수 없는 면책권을 팔아 부를 축적하였다.
    인문/어학| 2006.12.31| 5페이지| 2,000원| 조회(1,4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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