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육실기 2 - 이영석 교수님탁구의 기원과 역사과목명 : 체육실기 2학 과: 수학교육 B학 번: 0 5 0 4 4 5이 름: 오 남 희목차Ⅰ. 탁구Ⅱ. 탁구의 기원Ⅲ. 우리나라의 탁구의 역사Ⅳ. 참고자료Ⅰ. 탁구탁구는 직사각형의 테이블 중앙에 네트를 치고 양편에서 공을 쳐 넘겨 득점을 겨루는 스포츠로 핑퐁 또는 테이블 테니스라고도 한다. 상대방과의 거리가 짧아 공의 왕복이 빠르며 공이 가벼워 각종 회전구(回轉球)를 구사할 수 있다. 따라서 예민한 반응과 복잡한 전술·기술의 숙련이 필요하다. 또한 옥내경기로 일기의 영향을 받지 않으며,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고, 좁은 장소에서 간단한 용구로도 가능한 운동이다.Ⅱ. 탁구의 기원탁구의 기원이나 발상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중세 이탈리아의 ‘루식 필라리스(Rusic Pilaris)’라는 유희에서 변한 것이라고도 하고 15세기~16세기경 프랑스 궁전에서 행한 ‘폼’또는 ‘라파움(Lapaum)’이라는 놀이에서 변했다고 하기도 한다. 19세기 프랑스 궁정에서 행해졌던 로열 테니스(Royal Tennis)가 하나는 테이블 위에 올려져 탁구가 되고, 하나는 옥외로 나가 롱 테니스(Long Tennis)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 로열 테니스 시대에는 마루 위에 네트를 치고 메리야스로 싼 공을 나무채로 쳤는데, 그 뒤 코르크나 고무로 만든 공이 사용되었다. 또 1880년대에 영국에서 고안되었다는 설도 있고 뉴잉글랜드에서 시작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뿐만 아니라 헝가리의 케렌이 저술한 책에서는 2천년 전 일본의 公家(현재의 공무원 신분)에서 깃털로 놀이를 한 것이 탁구의 시초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의 어떤 학자는 약 2천년 전 동양의 각국에서 예컨대 신라의 화랑들이 즐기던 축국이 원형이라는 견해를 비친 일도 있었다. 탁구의 원류에 대해서는 이같이 그 견해가 분분하지만, 남아프리카 공화국, 인도 등이 영국의 식민지였을 때 영국인들이 테니스의 경기규칙에서 힌트를 얻어 더위를 피하여 실내에서 할 수 있는 놀이로 만들었다는 것이 통설이다. 국제탁구연맹에서 발간한 편람 (I.T.T.F Hand Book)에서도 고대 중세기 경에 탁구는 테니스, 베드민턴과 구분 없이 시작되어 내려오다가 각기 독자적인 형태로 발전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탁구는 초기에 명칭 또한 일정하지 않아서 고시마, 프림프림, 와프와프 등 여러 가지로 불리어 졌다. 서구의 귀족들이 사교적으로 즐기던 당시에는 남자는 연미복을, 여자는 이브닝 드레스를 착용하는 등 복장도 독특하였다.공은 코르크나 센드페이퍼 그리고 고무공이나 거미줄같이 피륙으로 짠 것 등을 사용했고 라켓은 나무 또는 마분지 등을 사용했다. 서구의 귀족들이 사교적으로 즐기던 당시의 사진과 그림을 보면 남자는 연미복을, 여자는 이브닝드레스를 착용하는 등 복장도 특이했다.현대의 탁구공은 셀룰로이드로 만들어졌으며 이것은 1898년 영국의 크로스칸트리 주자였던 제임스 깁이 처음으로 고안했는데 이 공을 송아지 가죽으로 싼 라켓으로 칠 때 ‘핑퐁’ 소리가 난다고 하여 명칭을 ‘핑퐁(Ping-pong)’이라고 붙였다고 한다. 그 후 테이블을 사용한 후부터 테이블 테니스라고도 하였는데 이것은 미국의 용구업자가 제 1차 세계대전 후 ‘핑퐁’을 상표로 등록하였기 때문이며, 그 뒤 국제탁구연맹에서는 ‘테이블 테니스’가, 한국에서는 ‘탁구’가 정식명칭이 되었다. 라켓에 고무판을 붙인 것은 1902년 영국의 굿이라는 사람이 물건을 팔 때 동전을 받아 넣는 접시 밑바닥에 고무를 깐 것을 보고 힌트를 얻어 나무판으로 사용하던 라켓에 고무판을 단 라켓을 고안해 냈다. 제 1회 대회의 남자우승자 야코비(헝가리)는 펜홀더 그립이었으나, 그 뒤 미국·유럽에서는 셰이크핸드 그립이 주류가 되어 오늘날에 이른다.Ⅲ. 탁구의 역사1900년 무렵에 전 유럽에 탁구가 널리 보급되었으며, 1902년 영국 탁구협회가 설립되고 그와 함께 선수권대회가 개최되었다. 1926년에 독일인 크레만 박사가 제창하여 현재의 탁구경기로 발전시켜 국제탁구연맹(I.T.T.F.;International Table Tennis Federation)까지 조직하여 베를린에서 독일, 영국, 오스트리아, 헝가리 5개국 대표가 모여 결성하였고, 체코슬로바키아, 스웨덴이 뒤이어 가입해 유럽의 7개국으로 발족했다. 1930년 미국이 참가하기 전까지는 유럽선수권대회였다. 세계의 탁구는 유럽 탁구와 한국, 일본, 중국 등을 중심으로 하는 동양탁구로 대별할 수 있는데 이는 속도와 회전 기술, 회전과 회전의 다방면에서 유럽선수들과 아시아 선수들 간에 경쟁을 하기 때문이다.탁구가 우리나라에 언제, 어디서, 어떤 경로로 도입이 되었는지 문헌상 분명하게 기록된 것은 없다. 다만 국제탁구연맹 편람에는 탁구가 1899년 영국에서 일본으로 보급되었고 1900년대 초 한국, 중국, 홍콩 등지로 전파되었다고 기술되어 있을 따름이다. 이에 따라 탁구계 에서는 도입경로를 두 가지로 추정하고 있다. 하나는 인접한 지리적 조건으로 문물교류와 인적왕래가 잦았던 일본에서 한일합방을 전후하여 도입하였다는 설과 다른 경로로는 영국을 비롯한 서구의 선교사들이 종교전파의 수단으로 탁구를 이용했다는 설인데, 어느 것도 분명치는 않다. 대한탁구협회에서는 1924년 1월에 경성일보 사 주최로 개최된 “핑퐁경기대회”를 한국 탁구의 효시로 보고 있다. 이 시점을 계기로 탁구는 소수계층의 유희에서 대중적인 스포츠로 보급되기 시작했다. 1928년 Y.M.C.A에서 1회 조선탁구대회를 열었고 1932년 최초로 일본과 대회를 해 9전 8승 1패라는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1933년에 명지신궁대회에서 우리나라 선수가 우승을 하기도 했다. 1934년에는 탁구 구락부가 조직되기도 하였다. 그 이후 일제하에서 활발하게 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다가, 8.15해방이 되자 1945년 11월에 조선 탁구협회가 만들어지고 각 지방으로 보급되어 선풍을 일으켰으며 전국 선수권대회를 개최했다. 그러는 동안 국내 경기대회와 국제친선 교환경기를 통하여 경기 운영과 기술 향상이 급진적으로 발전되어 1973년 유고슬라비아의 사라예보에서 열린 제32회 탁구 선수권대회에서 일본, 중국의 강호를 타파하고 이에리사, 정현숙 선수 등의 활약으로 여자팀이 우승을 차지하여 탁구는 물론 구기사상 최초로 세계정상에 오르는 찬란한 금자탑을 수립하였다. 이로써 한국탁구는 세계무대에 진출한지 17년만에 세계탁구의 패권을 획득하였다. 1987년에는 인도에서 개최된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중국을 누르고 환상의 복식조 양여자와 현정화가 우승을 차지해 패권을 잡았다. 탁구경기는 1988년 제24회 서울올림픽 대회부터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었다. 첫 경기인 1988 서울올림픽에서는 남자 단식에서 유남규, 김기택이 금, 은메달을, 남자복식에서는 안재형, 유남규 조가 동메달을, 여자복식에서는 양영자, 현정화 조가 금메달을 차지하여 우리나라가 탁구 세계 정상임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켰다.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는 동메달 5개를 따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91년 세계 탁구선수권대회 여자부에서는 역사적인 남북단일팀이 구성되어 단체전 우승을 이끌어내는 쾌거를 거두었다. 그리고 '91년 세계 탁구선수권대회 여자부에서는 역사적인 남북단일팀이 구성되어 단체전 우승을 이끌어내는 쾌거를 거두었다. 중국의 높은 벽에 막혀 주춤하고 있는 것이 현 실정이나 역시 세계 최강의 전력을 자랑하고 있다 아울러 생활체육(사회체육) 종목으로도 활발히 보급되어 폭넓은 탁구인구를 확보 하고 있다.
세계문화사 - 김배철 교수님일본의 역사 왜곡에 대한 다른 생각역사를 공부하는 우리가 한 가지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은, 역사는 승자의 입장, 또는 ‘우리 편’의 시각에 따라 편향되게 서술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미국인들이 '서부 개척'이라고 표현하는 것에는, 백인들의 우리가 '인디언'이라 부르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에 대한 엄청난 약탈과 학살이 숨어 있다. 백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을 침략하여 거기에 살고 있던 수백만 내지 수천만 원주민들을 약탈하고 학살하면서 거의 멸종에 이르도록 한 게 '서부 개척'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승자의 시각에 따르면 '개척'일 수 있지만, 패자의 처지에서는 '약탈과 학살'이 될 수 있다.마찬가지 현상이 아시아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와 중국은 장시간의 일제 점령기 및 침략기간 동안 일본이 행했던 수많은 만행들에 대해 사과하고 야스쿠시 신사 참배를 중단하라고 몇 년째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은 이에 대한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며, 신사참배에 대한 참견은 내정간섭이라고 거부하고 있다. 동시에, 일본이 행했던 많은 일들, 철도 및 도로 공사, 공장 설립 등을 예를 들면서, 한국 근대화의 초석을 다지는데 큰 기여를 했다고만 주장할 뿐이다. 이로 인해, 한 때 욘사마 열풍으로 인해 우호적이 되었던 한일 간의 관계는 다시 악화되고 있다.문제는, 우리가 백인들이 아메리카에 이주한 뒤 서부개척을 통해 미국을 건국했다는 사실은 쉽게 인정하면서, 동시에 일본에 대해서는 진출한 게 아니라 조선과 만주를 침략했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만일,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했다고 한다면, 아메리카에서는 미국이 서부 개척을 한 게 아니라 인디언들을 학살했다고 써야 하지 않을까. 백인들에 의한 인디언들의 학살을 우리가 잘 모르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일제 침략은 우리가 직접 경험한 사실이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그것 역시 올바른 자세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직접 경험한, 다른 나라를 침략했으면서 그것을 정당화하려고 했던 일이 없단 말인가.우리 역시, 이에 못지않은 심각한 역사 왜곡을 하고 있다. 바로, 2006년으로 끝난 지 30년이 되는 베트남 전쟁이다. 베트남 전쟁은 미국 내의 양심 세력들이 격렬하게 반대하고 거의 온 세계가 크게 저항했던 대표적인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 전쟁이었다. 이러한 베트남 전쟁에 우리는 스스로 자청에서 ‘미국의 용병’으로 참전했다. 실제로 고 박정희 대통령은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지 6개월 뒤인 1961년 11월 미국을 방문하여 케네디 대통령에게 한국군을 베트남 전쟁에 보내고 싶다고 몇 차례 제안하였으며, 1964년 5월 처음으로 미국이 공식적인 파병을 요청하자, 의료 지원단과 태권도 교관들뿐만 아니라, 전투 부대까지 보내고 싶다고 간청하면서, 9월 130명의 의료 지원단과 10명의 태권도 교관들을 1차로 베트남에 보냈다. 물론, 베트남 전쟁의 참전의 결과로 미국으로부터 많은 경제적인 원조를 받을 수 있었고, 이를 이용해 눈에 부신 경제발전을 이뤄, 우리가 현재의 위치에 와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침략전쟁에 대해 베트남 국민들에게 사과하고 용서를 빌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을까?1998년 12월 베트남을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이 양국 간의 불행했던 과거에 대해 유감으로 생각한다고 말한 데 이어, 1999년 8월 베트남 국가원수와 청와대에서 정상 회담을 하며 본의 아니게 베트남 국민에게 고통을 준 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하고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고 사과했을 때, 이에 참전했던 군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한나라당과 일부 보수 언론 등에서는 온갖 비난과 항의를 퍼부었다. 특히 한나라당은 김대중 대통령의 주장을 운동권 주사파의 논리와 흡사하다며 반박했고, 당시 한나라당 박근혜 부총재는 대통령의 역사 인식에 대해 초점을 맞추면서, 참전 용사들의 명예를 손상시킨 발언에 대해 강도 높게 비난하며 사과를 요구했다. 그렇다면, 과연 미국 정부는 한국군을 어떻게 평가했을까? 여러 문헌에 의하면, 당시 파병 대가로 돈을 제공했던 미국 정부는 한국군을 '용병(mercenary)'으로 간주하고 서술했다고 한다. 얼마나 어이없는 일인가.이러한 역사왜곡은 북한의 김일성에 대해서 극에 달한다. 우리는, 김일성이 민족의 큰 아픔인 6?25를 일으킨 장본인이라는 것은 잘 알지만, 그가 1920년대 중학교 다닐 때부터 항일 운동에 나서 1930년대 만주 벌판에서 목숨을 내걸고 항일 무장 독립 운동을 벌인 일은 모른다. 아니, 사실이 아니라고 교육 받아 왔다. 오히려, 우리가 어릴 때 접했던 많은 책에는 북한의 김일성이 ‘김일성장군’을 사칭한 범죄자인 것처럼 나온다. 또한, 김일성이 독립운동 했던 일에 대해 인정해야 한다는 일부의 지적 역시, 빨갱이로 몰아붙이는 식으로 덮어버리고자 한다. 하지만, 김일성이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실과 '한국 전쟁을 일으켜 수백만 명을 죽게 한 일'은 별개의 일이다. 독립 운동을 했기 때문에 국립묘지에 모시자는 것도 아니고 한국 전쟁의 책임을 묻지 말자는 것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한국 전쟁의 책임 때문에 과거의 독립 운동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거나 폄하해서도 안 된다. 하지만, 가짜 김일성이란 주장이 얼마나 심각한 역사 왜곡인가. 우리가 그를 주관적으로 위대한 수령으로 평가하든 전범과 독재자로 평가하든, 그가 독립 운동가 집안에서 태어나 치열하게 항일 운동을 벌인 것은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사실이다.이와 비슷하게 박정희에 대한 사실이나 평가도 제대로 짚어봐야 한다. 그는 일제가 황국신민 정신이 투철한 교사로 양성하기 위해 세운 사범학교를 마치고 교사가 되었다가, 일제의 괴뢰 정부인 만주국의 군관학교에 들어가 수석으로 졸업한 뒤, 일본 육사로 편입하여 육군 소위가 되어 만주에서 활동했다. 그러다 일제가 패망하자 패잔병 신세로 귀국했는데, 공산주의자였던 형이 피살된 데 이어, 남로당 가입 등 좌익 혐의로 체포되어, 군사 법정에서 무기 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관계했던 좌익 조직망을 폭로하여 수사에 적극 협조함으로써 형 집행정지로 풀려나 육군 정보국에서 월급도 없이 문관으로 일하다 6.25가 터지자 현역에 복귀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