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1.세종대왕의 약력 ……………………………………p.2-32. 세종대왕의 리더십…………………………………………p.4-7① 생명을 우선시 하다② 사람을 위한 세상 경영③ 약자를 위한 경영④ 자신을 낮추는 절제와 겸양의 치세3. 반대의 사례 ………………………………………… p.84. 맺음말 ………………………………………… p.95. 참고문헌 …………………………………………p.101. 세종대왕의 약력조선 제4대 왕(재위 1418~1450). 젊은 학자들을 등용하여 이상적 유교정치를 구현하였으며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측우기 등의 과학 기구를 제작하게 했다. 6진을 개척하여 국토를 확장하고 쓰시마섬을 정벌하는 등 정치·경제·문화면에 훌륭한 치적을 쌓았다.이름 도(?). 자 원정(元正). 시호 장헌(莊憲). 태종의 셋째 아들로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閔氏) 소생. 비(妃)는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심온(沈溫)의 딸 소헌왕후(昭憲王后). 1408년(태종 8) 충녕군(忠寧君)에 봉군, 1413년(태종 13)에 대군이 되고 1418년에 왕세자에 책봉, 동년 8월에 22세의 나이로 태종의 왕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즉위 뒤 정치·경제·문화면에 훌륭한 치적을 쌓아 수준 높은 민족문화의 창달과 조선 왕조의 기틀을 튼튼히 하였다.그는 정치적으로 중앙집권 체제를 운영하기 위하여 1420년에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고 황희(黃喜)·맹사성(孟思誠)·허조(許稠) 등의 청백리(淸白吏)를 등용하여 왕권과 신권(臣權)의 조화를 위하여 노력하면서 의정부(議政府)를 견제했다. 또한 이를 왕립 학술기관으로 확장하여 변계량(卞季良)·신숙주(申叔舟)·정인지(鄭麟趾)·성삼문(成三問)·최항(崔恒) 등의 젊은 학자를 등용하여 정치 자문·왕실 교육·서적 편찬 등 이상적 유교정치를 구현하였다. 1443년(세종 25) 한글을 창제하고, 1446년 이를 반포하였다. 또한 이천(李? )에게 명하여 경인자(庚寅字)·갑인자(甲寅字)·병진자(丙辰字) 등을 제작하게 하였는데, 이 가운데 갑인자는 정교하기로 이름난 활자이다.초기에는통력(大統曆)을 참작하고 아라비아의 회회력(回回曆)을 빌어 역서(曆書)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을 편찬했다. 또한 천문·역법(曆法)·의상(儀象) 등에 관한 지식을 종합한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을 이순지가 펴냈다.경제·사회 정책면은 1436년 공법상정소(貢法詳定所)를 설치하고 각도(各道)의 토지를 비척(肥瘠)에 따라 3등급으로 나누어 세율(稅率)을 달리하는 안을 실시했다. 그러나 결함이 많아 1443년에 공법상정소의 안을 시정하기 위하여 전제상정소(田制詳定所)를 설치하고 풍흉(豊凶)에 따라 연분 9등법(年分九等法)과 토지의 비옥도(肥沃度)에 따라 전분 6등법(田分六等法)에 의한 수등이척법(隨等異尺法)으로 조세의 공평화를 도모했으며, 전국의 토지를 20년마다 측량하여 양안(量案)을 작성하게 했다.그리고 의창(義倉)·의료제도·금부삼복법(禁府三覆法)을 제정했고, 노비(奴婢)에 대한 지위 등을 개선, 사형(私刑)을 금하도록 했다. 대외정책면에서는 국가의 주권 확립과 영토확장에 진력한 치적을 들 수 있다. 명나라와의 관계를 보면, 처녀진헌(處女進獻)을 폐지하는 한편, 명나라에 보내던 금(金)·은(銀)의 조공물(朝貢物)을 폐지하고 마(馬)·포(布)로 대신하도록 했다. 그리고 여진(女眞)과의 관계는 무력으로 강경책을 쓰거나 회유하는 화전(和戰) 양면책을 썼는데, 두만강 유역의 여진은 김종서(金宗瑞)로 하여금 구축하도록 하고 6진(六鎭)을 개척하여 국토를 확장하였다(1432). 압록강 유역의 여진은 최윤덕(崔潤德)·이천 등으로 하여금 구축하게 하고, 4군(四郡)을 설치하였다. 이때의 국경선이 압록강으로부터 두만강까지 확보되어 이곳에 사민정책(徙民政策)을 실시하는 등 국토의 균형된 발전에 노력하였다.그리고 일본과는 1419년(세종 1) 이종무(李從茂)로 하여금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섬[對馬島]을 정벌하게 했으며, 이후 쓰시마 도주(島主) 소 사다모리[宗貞盛]가 사죄하고 통상을 간청해오자, 1426년 삼포(三浦)를 개항하였다. 이후 왜인의 출입이 증가하자 1443년 왜인의. 이에 세종은 "내가 어떻게 스스로를 봉양하려고 동물을 죽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양은 우리나라에서 나는 짐승도 아니다."라며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세종은 병이 많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위해서 양을 죽이지 못하게 했다. 하찮은 동물이라 해도 여전한 하나의 생명이기 때문이다.두 번째 사례로는 경기, 충청도 해도찰방 윤득민 등이 풍랑을 만나 배가 파손되었다. 이에 대해 의정부가 국문하기를 청하자, 세종이 이와 같이 말했다고 전해진다. "금년에 이미 큰일이 있었고 재변도 여러 번 발생한 것을 보면 시운이 좋지 않은 해다. 처음에 파견할 때 일이 꼭 성공하리라는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지금 큰바람을 만났지만 살아온 것만 매우 기쁜 일이다. 국문 할 것까지는 없다." 살아온 것만으로도 기쁜 일인데 살아온 사람에게 국문을 청하는 일은 가혹한 일이라며, 삶의 중요성이 우선이라 생각했던 것이다.세 번째 사례로는 세종 21년 10월 23일, 세종이 대신들의 상참을 받고 정사를 보는데 형조에서 절도죄를 범한 백성을 율에 따라 교형에 해당된다며 형을 허락해주기를 아뢴다. 이에 세종대왕은 "근래 백성 가운데 기근(饑饉)으로 죽은 자가 퍽 많다. 내가 정말 참고 볼 수가 없다. 그런데 형벌로 또 죽이겠는가."라고 하였다. 세종대왕은 굶어죽는 마당에 다시 형벌로 죽일 수는 없는 것이라며, 왜 강도가 되었는지 생각해보면 죽음을 주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고 하였다. 그는 원일을 우선 생각하고, 그것을 해결하는 데 더욱 초점을 맞추었던 것이다.이처럼 세종은 작은 동물에서부터 잘못을 한 하인들까지 모두 존중하며 특히 생명에 대해 중요시 여겼었다. 그의 이러한 사상이 대신들은 물론 백성들까지 감동하게 만들어 마음을 움직이는 리더로 자리매김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 나라의 수장이 되어서 작은 일들에 신경을 대부분 쓰지 않지만 세종대왕은 마음에서 우러나는 진심으로 백성과 나라를 사랑했던 것이라 생각된다.2. 세종대왕의 리더십(2) 사람을 위한 세상 경영'아랫사람을 유복하게 하의 상황을 파악하는 데 더 중요하다며 직접 시찰을 가기도 하였다고 한다. 세종대왕은 치세의 기본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두 번째 사례는 세종 12년 12월 18일, 세종이 각도의 풍흉을 묻고 손실답험에 대해 이야기를 하던 도중의 일이다. 예조 판서인 신상이 금년의 답험은 너무 가볍게 했다며 이야기하자 "경기의 백성들이 답험이 쉽사리 되었다고 좋아한다며, 답험이 백성에게 편리하게 된 것은 잘못이 아니라며, 백성이 만족히 여기면 그것으로 족하다." 라고 하였다. 백성에게 관계되는 일에서 우선 백성이 편리하게 생각하면 그것이 만족스러운 것이고, 백성이 불편하게 생각하면 우선 만족스럽지 않은 것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던 것이다.세 번째 사례는 세종 7년 6월 16일, 관가의 물건을 주지 않을 곳에 준 고산 현감 최수를 한 등 감하게 했다. 이에 좌의정 이원이 " 전조 말기에 기강이 무너져 수령이 마음대로 불법을 행했고, 태조와 태종께서 엄정하게 금하는 법을 세우셨지만, 수령의 금령을 어기는 자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남에게 준 물건은 나라의 창고에 저장한 것이 아니었고, 모두가 관직에 있을 때 개인적으로 장만한 것들이었습니다."라고 아뢰자 이에 세종은 " 개인적으로 장만한 것인들 어째 백성의 힘에서 나온 것이 아니겠느냐. 금하는 법령이 이렇게 뚜렷한데도 이처럼 법을 범하는 자가 있으니, 이런 무리들을 죄주지 아니하면 뒷사람에게 어떻게 거울삼게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공적인 물자의 토대는 모두 민간의 한 사람 한 사람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러한 점을 생각한다면 공적인 조직에 있는 사람은 항상 겸손해야 하며 그 사람들을 소중하게 여기는 일을 해야 한다. 세종대왕은 이를 적절히 잘 지켜낸 리더라고 할 수 있다.2. 세종대왕의 리더십(3) 약자를 위한 경영세상을 경영할 때 약하고 어리며 힘이 없는 사람을 우선하지 않는다면, 최고 수장과 관리자가 존재할 이유가 없어진다. 국가와 정부가 존재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그렇지 않다면 자연 상태 그대로 무도한 강자가 난무하도록 내 나이에 이마에 도둑 놈 자를 새기고 다닌다면 개선의 여지마저 없애는 셈이 된다. 좋은 방향으로 개과천선할 싹을 없애버리는 것이다. 이제 생명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에게 자자하는 것은 가혹하다. 더 이ㅇ상 개선의 여지가 없으니 자자의 효과도 없으며 그의 생명을 더 단축시킬 뿐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현재 법치국가인 오늘로서 보기에는 다소 억지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세종대왕은 무조건적인 법 행사만이 사람을 옳은 쪽으로 인도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법보다는 사람이 우선이라는 것이 그의 경영 방침이었다.그 외에도 노인을 공경하는 것이라든지, 종(從)들에게 너무 가혹하게 하지 못하게 하였다. 유교적 사상들을 그저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현실에 적용시켜 나라를 다스린 것이다. 세종대왕은 한 나라의 수장임에도 불구하고 약자의 입장을 헤아릴 줄 아는 마음 따뜻한 경영인이었던 것이다.2. 세종대왕의 리더십(4) 자신을 낮추는 절제와 겸양의 치세겸손함도 그 도가 지나치면 비굴하게 된다. 마음에 진실함이 없으면 비난받아 곤경에 빠진다. 겸손이 지나쳐 누구에게나 비열하게 머리를 숙인다면 권위를 잃고 만다. 그것이 비록 옳은 일이라도 흉하다. 지나치게 나가려는 마음을 막는 데 힘써야 한다. 자기 마음대로 행하면 몸을 보존할 수가 없고 위험하다. 항상 스스로를 경계하고 때를 기다려라. 자기의 힘이 약하다는 것을 알고 솔직한 마음으로 주위의 가르침을 받는다면 궁지에서 벗어날 수 있다. 겸허한 마음은 스스로 말과 행동에 나타난다. 자신을 낮추고 절제하며 겸양의 태도를 보이는 것은 영성 경영과 맞물려 있다. 세상의 경영은 사람에서 시작해서 사람으로 끝난다. 자신을 낮추고 겸양의 태도를 보이는 것은 결국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 안정을 취하려는 것이다. 자신이 오만하고 방자하다면 누가 그를 진심으로 존경해서 따르겠는가 생각해볼 수 있다. 또한 절제와 겸양은 맑은 정신과 기운으로 조직구성원이나 조직구성원의 영향을 받는 사람들까지 이끌어가려는 것이다. 오만과 무절제는 그것을 바라보는 문이다.